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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혼찌검만 내 줄 생각으로 데이몬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병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나에게 볼 일이 있나?”

시비를 걸어온 병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얼씨구 우리말을 곧잘 하는 군.”

“싸우고 싶다면 덤벼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대로 나가겠다.”

“솔직해서 좋군. 좋다. 네놈이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이상 성한 몸으론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일이지.”

으르렁거리던 병사의 얼굴에 서서히 살기가 떠올랐다.

우두두둑.

연신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다가온 거구의 병사는 데이몬의 앞에 선 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몬의 얼굴이 가슴팍에 겨우 닿을 정도로 병사의 키는 컸다. 하지만 데이몬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견지할 뿐이었다.

주점 안의 병사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마디를 연신 꺾던 병사는 갑자기 몸을 돌리면서 데이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에잇”

무시무시한 파공성. 상황을 보아 데이몬의 얼굴은 단 한 방에 피떡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정말 힘이 좋아 보이는 병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엄청나더라도 적중시키지 못하면 하등 필요 없는 법이다. 고개를 살짝 돌려 주먹을 흘려보낸 데이몬은 거구의 품속으로 살짝 파고들며 배를 가격했다.

퍽.

복부를 가격당한 병사는 혼비백산했다. 데이몬이 그리 강하게 가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먹이 꽂힌 곳은 인체의 중요한 혈도 중 하나였으므로 당연히 통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헉.”

숨이 넘어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병사의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렸고 데이몬은 병사의 무릎을 움켜 쥔 뒤, 사정없이 뒤로 메다 꽂아버렸다. 탄력을 적절하게 이용한 공격.

거구의 병사는 허공을 한 바퀴 돈 다음, 탁자를 산산이 부수며 나가떨어졌다.

와장창.

큰 대자로 뻗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 단 한 방에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이 입이 딱 벌어졌다. 저 덩치를 단 한 방에 제압하다니■■.

하지만 거구를 쓰러뜨렸다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탁자에 앉아있던 병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일제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하나같이 적의를 줄기줄기 흘리며 말이다.

“스탠리를 다치게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대략 서너 명의 병사가 주먹을 움켜쥔 채 다가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저 쓰러진 거구를 멍하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있진 않았다. 오로지 무념, 무아의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다.

4대 1의 대결. 물론 순수한 힘으로 따지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체력적인 면에서 데이몬은 병사들 중 어느 하나도 능가할 수 없었다. 트루베니아 인들은 중원 사람들에 비해 체격도 훨씬 컸으며 힘 역시 월등했다. 여러모로 보아 불리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능히 사태를 수습할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데이몬이 인체의 혈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체에는 알려진 것만도 대략 365개의 혈도가 있다. 어떤 혈도는 의식을 잃게 만들며 또 다른 혈도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절명하는 혈도도 있었다. 데이몬은 바로 이것을 이용해서 무척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덤벼드는 병사들을 보며 그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퍽, 퍽, 퍽.

“윽. 억. 크억.”

단 한 방씩에 큰 대자로 뻗어버린 병사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손을 툭툭 털었다.

내력이 없었으므로 혈도를 제압할 수는 없지만 기절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혈도가 있는 부위에 정확히 주먹 한 방씩 먹이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세, 세상에■■.”

뜻밖의 사태에 주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체격도 그리 크지 않은 이방인이 건장한 병사를 네 명씩이나, 그것도 단 한방씩에 넉 아웃을 시켜버리다니■■.

믿을 수 없어하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데이몬은 말없이 상의를 벗었다.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있는 근위대 제복 말이다. 벗은 제복을 둘둘 말아 아무렇지도 않게 주점 구석에 던져버린 뒤 데이몬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이제 난 근위병이 아니야. 오늘 부로 해고당했으니 말이야.”

패싸움이 일어났지만 별다른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이런 패싸움은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마법사로 보이는 자가 없었기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데이몬은 얇은 셔츠만을 걸친 채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주점 밖으로 나가고 나자 사람들이 그때서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단 한방씩에 저 거구들을 때려눕힐 수 있지?”

“글세? 보기와는 달리 힘이 무척 좋은 모양이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쳐다보는 동안 기절한 병사들이 하나 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처음의 계산과는 달리 마법사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우선 전황이 워낙 험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워 메이지들이 여간해서는 휴가를 받지 못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펠드리안 시내의 주점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마침내 한 명의 워 메이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규모가 무척 큰 주점, 그 이층에 위치한 좌석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모두 갑옷을 걸친 상태였는데 갑옷의 표면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핏자국이 자욱하게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전장에서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운데 앉은 중년인 만은 예외적으로 갑주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푸른 색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 마법사인 듯 보였다. 전장에 파견되었다가 휴가를 나왔으리라 짐작되는 워 메이지 말이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마법사는 음식을 먹으며 한창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멍하니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던 데이몬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스르릉.

데이몬이 접근하자 마법사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시에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아들었다. 무척 숙련된 동작이었다. 그 중 선임병으로 보이는 사내가 데이몬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데이몬은 손을 펴서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무기가 없음을 보여 저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다.

다른 뜻이 아니오. 나는 마법사 님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소

청?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용모를 보아하니 이방인이 분명한데 그가 자신이 모시는 마법사에게 볼 일이 있다니……. 그의 얼굴에 수상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마법사는 사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전장에서 마법사는 기사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전력 중 하나였다. 특히 마법사를 잘 써야만 명장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마법사의 파괴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법사에 대한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사의 경우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둘 다 군대의 주축인 것은 분명했지만 기사에겐 난전에서도 능히 자신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전혀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 그들은 오로지 정신적인 수행에 전념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일단 마법사는 체력적인 면에서 기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그럴 뿐더러 마법을 캐스팅하는데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그 때문에 전투가 벌어질 경우 적병들은 제일 먼저 이쪽의 마법사를 처치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없이 마법사를 잃을 경우 이쪽은 정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군대에서는 보통 뛰어난 실력을 가진 병사를 엄선해서 마법사의 호위역을 맡겼다. 이들이 바로 마법사를 호위하는 가드(Guard)인 것이다.

물론 가드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법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혹은 잘 때에도 어김없이 마법사의 옆에 붙어 보호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가 휴가를 얻을 때에도 가드들 역시 함께 휴가를 얻어 그를 수행하며 보호해야만 했다. 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내는 만에 하나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을 고려해서 상대의 청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접근을 허락할 수 없소. 가시오.

데이몬의 얼굴에 다급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어렵게 만난 마법사를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정 의심스럽다면 몸수색을 하더라도…….

하지만 사내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몸수색이든 뭐든 상관없소.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오. 가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소. 어떻게 하겠소?

눈에 힘을 주어 으르렁거린 사내는 데이몬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의 태도는 정말 교본에 오를 만한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정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마법사의 가드가 된 경우였다.

물론 마법사들은 군대에서 말 그대로 특급 대우를 받는다. 따라서 그를 수행하는 가드들 역시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가드가 되려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줄을 이었다. 그런 절차를 거쳐 가드로 임용된 만큼 사내는 정말 철저하게 위험요인을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기다리게. 밀튼.

그 목소리에 밀튼이라 불린 사내는 검을 거두더니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바는 다한 것이다. 그가 물러난 곳으로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저벅저벅 걸어나오고 있었다. 마법사는 정확히 사내가 엄호할 수 있는 자리에 선 뒤,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데이몬은 다행이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말문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청은…….

데이몬의 청을 들은 마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그러니까 당신에게 마법을 전수해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법을 배워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제발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데이몬의 어조에는 절박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법을 배워야만 했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데이몬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리어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마법을 가르쳐달라?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마법사의 옆에선 가드들도 함께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하하. 마법?

클클클 정말 웃기는 놈이로군.

데이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법사가 자신의 진심을 전혀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답답한 쪽이 오히려 자신이라서 그는 다시 부탁을 했다.

이건 제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 테니 제발…….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돌연 정색을 했다.

그래 얼마를 줄 텐가?

네?

영문을 모른 데이몬은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마법사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태도를 고수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마법을 가르쳐 달라며? 그러려면 수업료를 내야 할 것 아닌가?

전혀 뜻밖의 말에 얼떨떨해진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얼마나 드려야 할지? 저는 돈이 별로……

그는 품속에 손을 넣으려 했다. 성벽 수비병으로 근무하며 받은, 얼마 안 되는 봉급이나마 몽땅 꺼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터져 나온 마법사의 말에 그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물론 많이 주면 좋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적정 수준만 받을 테니……. 가만있자.

내 휴가기간이 정확히 일주일이니 하루에 10셀 어떤가? 내 그 기간동안 성심껏 가르쳐줌세.

데이몬은 비로소 상대의 의도가 자신을 놀리려는데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저는 진심입니다.

아 물론 나도 진심이지. 비록 내가 그리 높은 써클의 마법사는 아니지만 자네 정도는 충분히 지도할 수 있다고 자부하네. 못 믿겠으면 여기서 시범을 보여줄까?

여전히 이죽거리는 마법사의 태도에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게서 마법을 배우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말없이 몸을 돌리는 데이몬의 뒤로 사람들의 비웃음 섞인 조소가 터져 나왔다.

원 싱거운 녀석.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마법을 배우겠다고? 차라리 나에게 검술이나 배우지 그래?

덜컥.

문을 열고 나오는 데이몬의 뇌리에 문득 서글픈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왜 이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며 살아야 하는가? 정녕 마법을 배울 길은 없는가? 하지만 집념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못지 않은 터라 그는 말없이 각오를 다졌다. 상황을 봐서 저 마법사는 자신을 지도해줄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터. 그 어떤 모욕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결심으로 데이몬은 묵묵히 다른 주점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그래 놈이 아직까지 수비대에 복귀하지 않았다고…….

그, 그렇습니다. 마법 학부에서 쫓겨난 뒤 그는 복귀하지 않은 상태로 정처 없이 시내를 배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떠듬떠듬 보고하는 베니테스를 보며 세르게이는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래 놈이 뭘 하고 있다던가?

잠시 주저하던 베니테스는 곧 조사된 사항을 보고했다.

네. 목격자에 의하면 그는 주점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보름 동안이나 끊임없이 말입니다.

세르게이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법을?

그, 그렇습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베니테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는 데이몬을 마법 학부에 배치한 사실로 인해 세르게이에게 한바탕 곤욕을 치른 상태였다. 물론 그를 근위병으로 임명하겠다는 명령서엔 세르게이가 직접 사인을 했지만 그를 강의실에 배치한 것은 명백한 베니테스의 월권행위였다.

사실 베니테스의 제안대로 중형 몬스터를 상대하게 할 목적이었다면 그를 중앙 광장에 배치해 놓아야 옳았다. 하지만 마법 학부의 학장인 가필드에 의해 데이몬이 강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르게이에게 직통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세르게이는 데이몬을 즉시 원래대로 성벽 수비병으로 좌천시켜버렸다. 그리고 베니테스를 불러들여 한바탕 나무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지금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데이몬의 근황에 대해 전해듣자 세르게이는 예상대로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나이에 마법을 배우겠다. 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마법이 무슨 아이들 장난인 줄 알고 있나 보군. 가르쳐 달라면 순순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어림없는 일이지.

묵묵히 듣고 있던 베니테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이방인의 처지에 동정이 가긴 했지만 더 이상 자신으로썬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착잡한 심경을 털어 내기 위해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체포하기 위해 근위병들을 보낼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세르게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섣불리 병력을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특히 일반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근위병을 보낼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무차별적인 징집 명령 때문에 민심이 무척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또한 한 나라의 공작답게 그는 일반 병사들이 근위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에 하나 근위병들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기로 했다.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도록 하게. 만약 한 달이 지나도 그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손가락을 들어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표시 나지 않게 처리해 버리게. 암암리에 키우고 있는 어새신(Assassin:암살자)들을 파견하면 용이하게 처치할 수 있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베니테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요즘 펠드리안 사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것은 용모가 무척 추악한 이방인 하나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자네 요즘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말인가?

마법을 배우겠다고 돌아다니는 이방인 말이야. 혹시 본 적이 있나?

아! 그 추악하게 생긴 작자? 암 본 적 있지, 있다마다. 워낙 용모가 특이해서 한 번 본 순간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되더군.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가 있는 거지? 아침에 먹은 음식이 올라올 정도로 흉물스럽더군. 또한 재미있는 것이 그 놈이 휴가 나온 마법사만 찾아다니며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애걸하는 점이야.

마, 마법 말인가?

글세 말이야. 워낙 흉측하게 생겨서 나이를 짐작할 순 없지만 적어도 40은 훌쩍 넘은 것처럼 보이네. 주제에 우리말은 제법 유창한 것 같더군.

미친놈이군. 그 나이에 무슨 마법을 배우겠다고…….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어릴 때부터 배우더라도 되기 힘든 것이 마법사인데 말이야.

혹시 정신이 나간 놈 아닐까?

글세 그럴지도…….

워낙 특이한 용모인 데다가 마법을 배우겠다고 돌아다니는 때문에 데이몬에 대한 소문은 펠드리안 시내에 널리 퍼질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을 본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를 비웃기에 바빴다. 우선 그처럼 공개적으로 마법사만을 찾아다니며 마법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병사들조차 데이몬의 기행을 화젯거리 삼아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데이몬은 매일 주기적으로 주점을 방문하며 자신에게 마법을 전수해 줄 마법사를 찾아다녔다. 잠은 그냥 아무데서나 쓰러져 잤으며 그 시간 이외에는 오로지 주점을 돌아다니는데 하루를 소진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선 주점에 들르는 마법사들 대부분이 잠시 동안의 휴가를 얻어 모처럼 펠드리안을 방문한 워 메이지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겐 오로지 전장에서 지친 심신을 쉬겠다는 생각뿐이었으므로 마법을 배우겠다는 나이든 이방인에게 관심을 둘 리가 없었다.

정신나간 사람이군.

데이몬을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는 마법사들은 오히려 양반이었다.

마법사들 대부분은 데이몬을 놀림감으로 삼으려 했다. 전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데이몬을 대상으로 풀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 가드로 써 주십시오.

하다 못해 데이몬은 마법사들에게 가드로라도 자신을 받아달라고 했다. 그렇게나마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수락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원칙적으로 가드란 마법사가 속해있는 부대의 사령관이 임명하는 것이다. 물론 마법사가 직접 고르는 경우도 있었고 그럴 경우 대부분 받아들여졌지만 추악한 용모의 데이몬을 가드로 받아들이겠다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네 몰골을 보게. 그 누가 자네를 옆에 두려고 하겠나. 난 가드를 바꿀 생각이 없네.

고개를 가로젓는 마법사에게 데이몬은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한 때 무인이었던 자존심을 모조리 버리고 애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법사님의 가드 중 누구도 상관없으니 한 번 저랑 붙여주십시오.

어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 내 똑똑히 말하지만 가드를 바꾸지 않을 생각이네. 그러니 이만 물러가게.

좌절이 거듭될수록 데이몬의 의지는 약해져갔다. 그와 함께 삶에 대한 애착마저도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몸을 돌려 나왔다. 그의 등으로 조소어린 사람들의 시선이 꽃히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것인가?

이미 무인으로써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상태. 급기야 그는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 술에 맛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하들의 복수. 기구한 자신의 운명.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중압감을 모조리 잊어버리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품속에 들어있는 얼마 안 되는 은화를 모조리 털어서 말이다.

그럴 수록 마법사를 찾아 배회하는 횟수도 점점 잦아들었다.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인 한 달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주점. 낡은 탁자와 의자 서너 개가 전부인 이 주점은 한 눈에 보기에도 하급 병사들의 잔돈푼을 노리고 세워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주점 안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추레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물론 제대로 된 주점에서 술을 먹을 돈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주점의 구석진 자리에 지금 누군가가 고주망태가 된 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술. 술을 가져오란 말이야.

불룩 튀어 오른 등판에 흉물스런 생김새. 바로 데이몬이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한 일념으로 펠드리안 시내를 끝없이 배회하던 그가 주점에서 술에 떡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취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한 모습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때문에 안 그래도 흉측한 몰골이 더욱 기괴하게 보였다.

주점의 주인인 듯 한 노인이 곧 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은 가지고 온 싸구려 밀주 한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데이몬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고로 이런 술집에서는 선불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돈이 없는 빈털터리들만 찾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술값을 떼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민 손바닥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게슴츠레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돈? 도, 돈이라……. 물론 있지.

품속을 주섬주섬 뒤지던 데이몬의 손바닥에 동전 두 닢이 딸려 나왔다. 그것이 데이몬에게 남은 전 재산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이었지만 1년 가까이 모았으므로 데이몬은 제법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돈을 술을 마시기 위해 단 며칠 동안 모조리 탕진해버린 것이다. 동전 두 닢을 본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퉁명스런 음성.

술 한 병에 동전 세 닢이야.

그것밖에 없는데…….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노인은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미 많은 술을 마신 데다가 인상이 워낙 험상궂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돌아서며 으름장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술만 마시고 나가버려. 공짜 손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절이니까…….

그러지. 뭐.

데이몬은 병을 집어든 뒤, 입에다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큼한 맛이 입 속을 감돌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밀주는 데이몬의 주머니 사정에 가장 적합한 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이제부턴 마시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술집 내부의 사람들이 힐끔힐끔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데이몬은 취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엔 예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며칠 전 한 마법사를 찾아갔다가 생긴 상처였다. 데이몬의 뇌리엔 어느새 그 때의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거절하겠네. 내 가드들은 모두 일류들이야. 자네 따윌 가드로 삼을 생각은 없네.

마법을 전수해 줄 수 없다면 하다 못해 가드로라도 삼아달라는 부탁에 마법사는 물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거절했다.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게되자 데이몬은 그만 혈기를 이기지 못해 발작하고야 말았다. 그동안 거절당했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뭐지? 왜 다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냐?

어? 어? 이 사람이?

당혹한 마법사의 앞을 가드들이 재빠르게 막아섰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데이몬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불끈 움켜쥔 주먹이 사정없이 허공을 갈랐다.

크억.

가드 한 명이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주저앉았다. 정통으로 급소를 맞은 터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놀란 가드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데이몬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싸울 상대가 난데없이 머리를 감싸안고 바닥을 뒹구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물론 이것은 데이몬에게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었기에 일어난 사태였다.

격정이 치민 나머지 무념, 무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데이몬에게 어김없이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가드들은 곧 눈에 불을 켰다.

이 자식이?

수작 부린다고 속을 줄 아나?

동료 한 명이 당한데 대한 앙갚음으로 그들은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데이몬을 인정사정 없이 짓밟았고 그는 무려 일 다경 가량 동안이나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퉤. 힘도 없는 자식이…….

만신창이가 된 채 널브러진 데이몬을 남겨두고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주점을 나섰다.

그리고 데이몬은 꼬박 이틀 동안을 몸져누워야 했다. 가드들에게 그 정도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것이다.

몸을 치료한 후 데이몬은 마침내 마법사를 찾아다니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 더 이상 모욕 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이제 데이몬에게 남은 카드는 세르게이를 찾아가서 수라사령심법을 조건으로 마법을 배울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앙심을 품은 상대에겐 결코 굽히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그 때문에 데이몬은 이처럼 술주정뱅이로 전락해버렸고, 오늘도 술에 취해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술이…없군.

술병이 텅 비어버리자 데이몬은 애석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미 자신에게 돈이 없는 것을 보았으니 주인은 결코 술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말 그대로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 끼니를 걱정해야 할 몸이 되어버린 것이지만 미련은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데이몬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면 성벽 수비대 사무실을 찾아가서 새로운 보직을 부여받는 것이겠지만 그에겐 애당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 희망도 없이 한낱 수비병으로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굶어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데이몬이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점을 나섰다. 몇 되지 않는 손님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지만 그는 하등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이곳과도 작별이로군.

규모가 작아서 손님이 많지 않은 탓에 이곳에는 이례적으로 그를 구경하거나 흉보는 사람들이 몇 되지 않았다. 그나마 취하려고 오는 손님이 태반인 탓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 탓에 제법 데이몬의 마음에 드는 술집이었지만 이젠 이곳마저도 오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내가? 천하의 독고성이 돈이 없어 술을 마시지 못하다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 데 누군가가 돌연 앞을 가로막았다. 그 탓에 데이몬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른 데이몬은 화를 벌컥 내었다.

뭐, 뭐야.

그러나 그와 부딪친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서서 데이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모습을 쳐다본 순간 데이몬은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부딪칠 뻔했던 자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마법사인 듯한 자였던 것이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마법사 말이다.

마, 마법사?

검은 로브를 걸친 자는 한동안 데이몬의 얼굴을 주시하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술주정뱅이였군.

실망기가 역력해 배어있는 말투. 기이하게도 그의 음성은 무척 탁하고 거칠었다. 마치 목을 졸린 상태에서 말하면 들을 수 있을 듯한 음성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데이몬은 부랴부랴 정신을 수습했다.

호, 혹시 마법사이십니까?

잠시 동안 서 있던 흑포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로브 자락을 뒤집어써서 도무지 용모를 분간할 수 없는 자였다. 로브 자락 사이로 예의 그 음성이 계속 새어나왔다.

마법을 배우겠다고 돌아다니는 자가 있다고 해서 와 봤는데 영 실망이군.

술주정뱅이가 마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군.

말을 마친 흑포인은 이젠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정신이 번쩍 든 데이몬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그의 다리를 얼싸안았다. 이것이 과연 기회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결코 그를 놓칠 수가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는 이처럼 술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흑포인은 데이몬이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어.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결코 마법을 배울 수 없다네.

데이몬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르짖었다. 그것은 이대로 삶을 접을 수 없다는 한 가닥 발악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워낙, 워낙 괴로운 나머지……. 단지 외모가 추악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 누구도 제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이 끝나자마자 흑포인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고개를 돌려 데이몬의 얼굴을 살폈다. 이 때다 생각한 데이몬은 그 자리에 넓죽 엎드렸다.

제발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저에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설사 목숨을 걸고서라도 마법을 배워야 하니 제발…….

묵묵히 듣고 있던 흑포인은 곧 뭔가를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타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그는 왜 마법을 배워야 하는지 이유에 대해 일언반구도 묻지 않았다.

나를 따라 오라.

짧게 한 마디 내뱉은 흑포인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서 흑포인이 도착한 곳은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술집이었다.

트루베니아의 술집은 대부분 여관과 겸업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1층은 보통 식당 겸 술집이고 2층부터는 여행자들이 묵을 수 있게 여관을 만들어놓는 것이다. 술집으로 들어간 흑포인은 서슴없이 2층으로 올라갔고 데이몬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때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곧이어 이어지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음성.

뭐야? 이 자식 또 왔네?

힐끗 고개를 돌려본 데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튼튼한 갑주를 걸친 덩치 좋은 장한. 물론 데이몬과는 안면이 있는 자였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에게 뭇매를 가한 마법사의 가드. 바로 그자가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는 잘 만났다는 듯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꺾기 시작했다.

“좋은 말 할 때 꺼지도록■■.”

흑포인이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난 너희들에게 볼 일이 없다.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갈 테니 길을 비켜다오.”

하지만 다가온 가드들이 어느새 데이몬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저 멀리에선 일전의 그 마법사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순 없지. 네놈의 추악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법사 님의 술맛이 떨어진단 말이야. 좋게 말로 할 때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데이몬은 힐끗 시선을 2층으로 던졌다. 올라가던 흑포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의 실력으로 해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데이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념,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이들을 꺾어야만 마법사에게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술기운으로 인해 몽롱하게만 보이던 시야가 점점 트여졌다. 마음을 진정시키자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때려눕히고 올라가겠다.”

음성에 아무런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은 것을 보아 다행히 마음의 평정을 이룬 것도 같았다. 오히려 마음의 평정을 잃은 것은 바로 가드들이었다.

“얼씨구? 이 자식 보게? 저번에 쓴맛을 덜 봤나 보네?”

“다리몽둥이를 하나 분질러버려.”

흥분한 가드들이 데이몬을 향해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들은 물론 데이몬이 저번에 싸워본 병사들보다 실력이 월등한 것이 틀림없었고 입은 갑주 역시 무척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있는 자들 중에서 가려 뽑은 가드들이라 해도 기본적인 체술에 있어서만은 결코 데이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데이몬이 인체의 혈도에 통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겐 전혀 승산이 없었다.

퍽, 퍼퍼 퍽.

여섯 명의 가드들이 모조리 바닥에 쓰러지는 데는 채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무념, 무아의 상태에서 데이몬은 공격해오는 가드들을 슬쩍슬쩍 피해내며 가장 중요한 요혈만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급소를 얻어맞은 그들은 차례대로 거품을 물고 바닥에 뒹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주먹다짐에 있어서 만은 그 누구도 겁나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세, 세상에■■.”

그 모습에 술집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입이 일시에 딱 벌어졌다. 저 왜소한 체구의 이방인이 자신보다 족히 두 배나 큰 덩치를 가진 가드들을 단숨에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누군가? 실력 있는 병사들 중에서 가려 뽑았다는 마법사의 가드들이 아닌가? 심지어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마법사는 놀라움에 그저 이빨만 딱딱 맞부딪치고 있었다. 가드들이 저처럼 어이없이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마법사였다. 곧 타는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 마법사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암리에 끌어 모은 마나가 점차 그의 마법 지팡이로 모여들고 있었다.

손을 탁탁 턴 데이몬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뇌리로 위험신호가 감지되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의 위기감. 데이몬은 지체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폭발의 규모는 제법 강했다. 마룻바닥이 터져 나가며, 산산이 부스러진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은 바로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데이몬의 몸을 수북히 덮어 버렸다.

“헛.”

낙법을 써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등허리가 뻐근해왔다. 데이몬의 눈에 살기를 띠며 다가오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는 맹렬한 공기의 소용돌이가 맴돌고 있었다.

“내 가드들을 때려눕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냉랭한 일갈과 함께 지팡이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지팡이에 박힌 수정구슬을 축으로 공기의 소용돌이가 급속히 응축되고 있었다. 아마도 가드들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듯 싶었다. 데이몬을 대상으로 말이다.

“이런.”

데이몬은 난감해졌다. 물론 체술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있었지만 저처럼 거리를 두고 마법을 전개한다면 자신은 별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말이다.

그 때 2층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신을 데리고 왔던 바로 그 흑포인의 음성이라서 데이몬의 얼굴에 천만다행이라는 빛이 스쳤다.

“그를 공격한다면 나 역시 널 공격하겠다.”

그 말에 마법사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그의 눈망울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떠올랐다.

2층엔 어느새 검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한 명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서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방전이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태. 방전구의 크기는 거의 사람의 머리통 만했다. 적어도 4 써클은 넘어 보이는 전격계 공격마법이라서 마법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퍼래졌다. 저 정도의 마법이라면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는 양손에 끌어올린 에어 블래스트(air blast)를 급히 소멸시켰다. 검은 로브를 걸친 것으로 보아 흑마법사로 짐작되었지만 방전의 규모로 본다면 저자는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마법사가 분명했다. 손에 모인 마나를 흩어버린 뒤 마법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2층을 쳐다보았다.

“왜? 날 방해하는 것이오. 저자는 내 가드들을 때려눕혔소.”

“왜냐하면 그는 내가 데리고 온 손님이기 때문이지.”

말을 마친 흑포인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붉은 방전은 그의 손에서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망연히 굳어버린 마법사의 앞을 데이몬이 말없이 달려 올라갔고, 정신을 차린 가드들이 그때서야 하나 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흑포인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간 뒤 둘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로 흑포인이었다.

“아까 보니 체술이 정말 대단하더군.”

“벼, 별 말씀을■■.”

데이몬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상황을 통해 상대가 자신에게 모욕을 준 마법사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된지라 그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자고로 수준이 높은 마법사라면 자신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는 법. 흑포인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 이곳에서 자네의 보직은 뭐인가?”

“예, 저는■■.”

데이몬은 곧 자신이 성벽 수비병이었으며 얼마 전 근위병으로 뽑혀 갔다가 마법을 훔쳐 배웠다는 일로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또한 자신이 마법을 배우기 위해 겪었던 고초마저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그 동안 흑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휴가를 나온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자체가 정말 어이없는 발상이었으니■■.”

“하지만 제가 마법을 배울 만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용모를 보아하니 이방인인 듯한데 조금 이상하군. 이카롯트에서는 결코 이방인을 근위병으로 쓰지 않는데 말이야.”

“그것은■■.”

데이몬이 제반 사정을 이야기하자 흑포인은 놀랍다는 듯 탄성을 토했다.

“허! 놀라운 일이로군. 일반 병사가 단신으로 트윈헤드 오우거와 싸워 이기다니■■.”

“마법사 님의 능력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는 것이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지만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때문에 흑포인의 용모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생각한 데이몬은 그 자리에 넓죽 엎드렸다.

그의 입에서 진심 어린 애원이 터져 나왔다.

“제발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모조리 극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오체투지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어도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각오였다. 한동안 그의 등허리를 내려다보던 흑포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어나게.”

“제 청을 받아주시지 않는 한 죽어도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도 여전히 마법을 배우기를 원한다면 자네의 청을 들어주겠네.”

그 말에 데이몬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렇네.”

흑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수모를 겪어가며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자신을 제자로 받아주는 마법사를 찾은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극도로 메인 목소리로 데이몬은 한 번, 두 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중원에서의 경우처럼 구배로 배사지례를 올리는 것이다.

“마법사 님을 제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마법사 님을 부모와 같은 존재로 여길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스승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는 제게 뼈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는 한 잊지 않겠습니다.”

구구절절이 진심이 배어 나오는 음성. 그의 태도에 다소 놀란 듯 싶었지만 흑포인은 별달리 동요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일어나게. 이제부터 내 정체를 알려 주겠네.”

데이몬이 슬며시 눈물 젖은 얼굴을 들자 흑포인은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로브자락을 걷어올렸다. 감춰져 있던 흑포인의 얼굴이 마침내 데이몬의 앞에 드러났다.

“헉.”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드러난 흑포인의 얼굴이 정말 처참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의 용모는 오히려 데이몬보다도 더 추악했다. 심한 화상을 입었는지 피부는 타버린 종이 같았고, 코가 있던 자리에는 그저 구멍만 훤하니 두 개 뚫려 있었다. 입술조차 말려 올라가 이가 훤하게 드러나 있는 상황. 정말 눈뜨고는 못 볼 정도의 얼굴이었다.

만약 담이 작은 사람이나 여자가 본다면 그대로 까무러칠 정도라고나 할까.

“왜 내 얼굴을 보니 전혀 상상 밖인가?”

“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몰골이야 어떠하든 상대는 이제부터 자신의 스승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데이몬의 반응에 실망했는지 씁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순간 데이몬의 뇌리에 반짝 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진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줄 알았는데 지금 스승님을 보니 그렇진 않았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데이몬의 조크에 흑포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감정이 풀렸는지 그는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도일이네.

도일?

정식으로 말하자면 도일 브로큰하트라고 해야겠지?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네? 브로큰하트(Brokenheart: 부서진 심장)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아마 트루베니아 대륙을 통틀어 단 둘 밖에 없는 성(姓)이라고 볼 수 있지.

아! 네?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지만 데이몬은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법이다. 이 상황에서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도일이라 이름을 밝힌 흑포인은 계속해서 설명을 해 나갔다.

우선 이것만은 자네가 알아야 할 것 같네. 정확히 말해 나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야. 사람들은 우리를 일컬어 다크메이지( Dark mage :흑마법사)라고 부르지. 혹시 들어보았나?

예. 들어보았습니다.

이미 맥밀란에게 들은 바가 있었기에 데이몬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일이 흑마법사란 것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오히려 도일이었다.

내가 흑마법사라는 말에 왜 놀라지 않는가?

상관없습니다. 이미 제가 스승님으로 삼은 분. 설사 흑마법사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라고 해도 제겐 부정할 수 없는 스승님입니다.

물론 자네가 배울 마법은 흑마법일세. 물론 트루베니아에서 흑마법사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고는 있겠지?

상관없습니다. 설사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다고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잠시 말문을 닫은 도일은 지긋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정말 흉측한 얼굴이었지만 눈빛 하나만은 무척 깊고 심유했다.

자네에게도 뭔가 곡절이 있는 듯 싶군. 그토록 절실히 흑마법을 배우겠다는 이유가 무척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묻진 않겠네. 흑마법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사정이 있기 마련이지. 좋네. 자네가 승낙한 이상 나는 이제부터 자네에게 마법을 전수해 주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도일을 보며 데이몬의 가슴은 희열로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강해질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일단 자네에게 마법을 전수해 주겠다는 이유에는 별다른 것이 없네. 굳이 말하자면 자네의 얼굴이 나 못지 않게 추악하다는 점과 또 하나를 굳이 더 들자면 나이가 많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을까…….

네?

상상도 하지 못한, 아니 전혀 얼토당토않은 이유라 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도일의 설명이 곧이어 이어졌다.

흉측한 생김새로 인해 자네가 받은 고통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네. 나 역시 무수히 겪어왔던 경험이니까 말이야. 비록 자네는 선천적이고, 나는 후천적인 용모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우린 줄곧, 같은 감정이 담긴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왔을 테니까. 바로 경멸과 멸시라는 눈빛 말이야.

수긍이 가는 점이 있었기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자네처럼 사십에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법을 익히기로 작정했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그 결과 난 이렇게 흉측한 몰골이 될 수밖에 없었어.

설명을 해 나가는 도일의 눈동자에는 짙은 회한이 차 있었다. 어쩌면 그는 데이몬의 모습에서 수십 년 전 마법을 배우기 위해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자신을 연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도일은 흑마법사였다. 다시 말해 다른 흑마법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흑마법을 익힌 경우라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쉬울 수는 없었다.

보편적으로 따지면 흑마법사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사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흑마법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이 대부분 누군가에, 혹은 사회 전체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마왕과의 계약 따윌 해서 힘을 얻을 이유가 없었다.

원한으로 인해 비뚤어진 심성에, 흑마법에 의한 강력한 힘이 결합되다 보니 흑마법사들의 성격은 판이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약한 마왕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받다보니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 터라 흑마법사들 대부분은 마법의 특성상 피와 살육에 심취할 뿐더러 또한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조차 서슴지 않고 수행할 정도로 심성이 잔혹하게 변해갔다. 그런 전반적인 경향 때문에 흑마법사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법칙이 트루베니아에 생겼는지도 몰랐다.

불행히도 도일이 모셨던 스승 역시 그런 보편적인 흑마법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를 떠올리자 도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생각만 해도 공포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스승은 평소 도일을 비롯한 문하생들에게 갖은 구박을 가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어쩔 때는 문하생들을 생체 실험을 위한 도구로 투입할 때도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말 그대로 문하생들의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취급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도일 역시 스승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도일의 추악한 외모는 바로 스승의 생체실험에 의해 생겨난 부산물이었다. 스승은 아무 거리낌없이 도일을 생체실험에 투입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그 대가로 이처럼 추악한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도일의 뇌리에는 외모가 변하고 난 뒤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 생각조차 하기도 싫었으며 이젠 만성이 되어버린 기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자신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데이몬에 대한 연민으로 변해갔다.

자네와 나는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네.

말을 마친 도일은 데이몬의 얼굴을 직시했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무척 흉물스러운 용모를 가진 이방인이 마법을 배우기 위해 주점을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네. 당시 난 무척 호기심이 생겼지. 얼마나 추악할까? 과연 나보다도 흉한 얼굴일까. 자네를 찾아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네.

다시 말하면 같은 외모를 가진 일말의 동질성 때문이라고나 할까?

데이몬은 묵묵히 도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비록 자네가 마법을 익힐 수 있을지 자신할 수는 없네. 자네에게 과연 얼마만큼 마나에 대한 재질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또한 나이가 많다는 점도 마법을 배우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 되지. 하지만 이렇게 사승관계를 맺었으니 나는 이제부터 자네에게 전력을 다해 마법을 전수해 주겠네.

스승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뭐. 은혜랄 것까지야…….

물론 데이몬은 중원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승을 부모와 같이 지극히 대한다는 중원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데이몬의 지극한 태도가 다소 거북살스럽기는 했지만 결코 꾸민 행동이 아닌 것 같았기에 도일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일단 내 신분을 말해주겠네. 나는 현재 이카롯트의 제 8군단의 별동대에 소속되어 있는 워 메이지라네. 저번의 전투에서 다소의 공을 세운 때문에 일주일의 휴가를 얻었고, 이제 이틀 뒤면 다시 전장으로 복귀해야 하네.

이, 이틀이라면…….

데이몬의 눈에 다소 긴장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정식으로 사승관계를 맺었으니 도일이 이대로 자신을 내버려두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걱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데이몬의 모습에 도일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그의 미소는 기괴한 안면 근육의 뒤틀어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전장에 자네를 데리고 갈 생각이야.

하지만 데이몬의 걱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우선 세르게이가 자신을 순순히 보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도일에게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저는 현재 탈영병 신분입니다. 근위병에서 해고된 뒤 원래는 다시 성벽 수비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직까지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정상적으론 스승님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데이몬의 생각은 대충 이러했다. 일단 야밤을 틈타 데이몬이 펠드리안을 빠져나간 뒤, 정해진 장소에서 성문을 당당하게 나온 도일과 다시 만나 전장으로 향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도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일단 자네가 펠드리안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희박하기도 할 것이지만 구태여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네.

하, 하지만…….

도일은 데이몬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세르게이 공작도 자네에게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진 않은 듯 하군. 그저 해묵은 앙심으로 그럴 뿐이라면 별 문제는 되지 않을 걸세. 난 충분히 자네를 빼내어 올 수 있네.

하지만 어, 어떻게…….

내 말을 믿게. 적어도 자네 하나 정도는 빼낼 정도의 능력은 있어. 이래 뵈도 난 제법 실력이 있는 흑마법사라네. 아마 세르게이 공작도 내 요구를 결코 무시하진 못할 거야.

결국 데이몬은 도일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데이몬의 걱정을 불식시키려는 듯 도일은 계속해서 설명을 해 나갔다.

일단 자네에게 뛰어난 체술이 있으니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거야. 난 자네를 우선 내 가드로 삼을 생각일세.

가, 가드로요?

그렇다네. 이미 내가 데리고 있던 가드들은 저번 전투에서 모조리 전사했으니 걸림돌은 없어. 그러니 나는 이 길로 궁정으로 들어가 세르게이 공작에게 자네를 내 가드로 임명해 달라고 할 참일세. 그들은 감히 내 요구를 거부하지 못할 거야.

도일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일은 현존하는 흑마법사들 중 최상위급에 랭크되는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도일의 현재 마법 수위는 대략 6써클의 마스터. 공격마법만을 따진다면 흑마법사들의 위력이 거의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것이 정설로 정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그것을 감안하면 도일은 적어도 7써클의 엑스퍼트나 마스터 급에 준하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도일의 부탁이라면 세르게이도 섣불리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말을 마친 도일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난 지금 당장 궁정에 다녀오겠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내 가드로 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아, 참! 자네를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엄연히 비밀로 붙여야 할 사항이니 그렇게 알도록 하게.

물론 흑마법사인 도일이 공개적으로 누군가를 제자로 삼았다고 선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데이몬이 뛰어난 체술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를 가드로 삼아 데리고 다니며 마법을 전수해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으므로……. 어느 정도 걱정을 던 데이몬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내 금방 다녀오지.

도일은 지체 없이 숙소로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데이몬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대의 말이 무척 당혹스러웠던지 세르게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앉아있는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는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할 말을 해 나가고 있었다.

내 요구는 단 한 가지요. 데이몬이란 이름을 가진 성벽 수비병을 내 가드로 뽑아야겠다는 것. 잘 이해가 되지 않소?

흑마법사의 어조는 다분히 도전적이며 또한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그의 태도에는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공작에 대한 예우가 전혀 깃들어있지 않았다. 불쑥 들어와서 다짜고짜 사람을 데리고 가겠다는 그의 태도에 세르게이는 기가 찼다.

'걸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

상대의 현재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것은 도가 너무 지나쳤다.

세르게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인 즉슨 가드를 이곳에서 뽑아가겠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소.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 즉 도일은 추호도 굽히지 않겠다는 듯 세르게이를 직시했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는 무척 당혹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일이란 자는 별달리 보고 싶지 않은 자였다. 그런 자가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와서 가드를 뽑아가겠다니…….

물론 그의 활약을 감안하면 병사 한 둘쯤은 두말없이 내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요구하는 병사가 데이몬이라니…….

물론 데이몬이 누구인지 세르게이가 모르고 있을 턱이 없었다.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한 죄로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이계의 추물이 아니던가? 공교롭게도 그는 데이몬을 처치해 버리기 위해 막 사람을 보내려고 할 찰나였다.

무단이탈죄로 말이다. 명령서에 사인만 한다면 그 즉시 어새신이 파견될 것이고, 아마도 데이몬이란 자는 오늘 중으로 이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터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흑마법사가, 그것도 자신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서 그를 내어 달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로군.'

물론 평상시라면 흑마법사의 저런 불손한 태도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공작인 세르게이에겐 충분히 그럴 힘과 권력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는 흑마법사를 잃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세르게이는 난감해졌다.

'놈이 오랜 세월동안 가두어 둔데 대한 앙갚음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인가?'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도일이란 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30년 전 암흑전쟁에서 참전한 흑마법사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쟁에선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모든 흑마법사들은 마왕의 편을 들어 인간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정말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들의 마법 공격에 의해 이승을 하직한 병사는 이루 셀 수조차 없을 정도.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마왕의 편을 든 흑마법사와 네크로멘서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이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처형장에서 목숨을 잃어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통상적으로 마법사란 정말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키워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암흑전쟁 당시의 처절한 전투로 인해 많은 마법사들이 전사했고, 따라서 각 왕국에서는 심각한 마법 인력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왕국간의 마법 통신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몇몇 왕국에서는 사로잡은 흑마법사들 중 몇몇을 죽이지 말고 활용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당연히 죽여야 할 자들이긴 했지만 그들이 가진 실력이 정말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마법사가 부족한 때문에 결정은 어렵지 않게 내려졌고, 사로잡힌 흑마법사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가까스로 처형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앞에 있는 도일 역시 그러한 경우였다. 하지만 그 외 실력이 미흡한 흑마법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에게 내려진 처우는 어떤 면에선 더욱 비참하다 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건진 대가로 그들은 평생동안 지하감옥에서 노역할 것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삶을 선택한 죄로 햇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마법무구나 스크롤 따위를 만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늙어서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 기간은 무려 3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기간동안 무수한 흑마법사들이 자살이나, 기타등등의 방법으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흑마법사들이 살아남았고, 이번에 벌어진 종족전쟁으로 인해 그들에겐 마침내 햇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점점 위태로워지는 전황으로 인해 그들의 마법을 전쟁에 활용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물론 그 결정에는 전반적으로 공격력이 강한 흑마법에 대한 평가가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흑마법사들이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을 수 있었고, 도일이란 흑마법사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전쟁에 투입된 워 메이지였다.

당시 세르게이는 직접 도일의 사면장에 서명을 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카롯트 제국에서 사면된 흑마법사는 도합 34명이었다.

흑마법사들이 가세함으로써 전장에서 싸우는 군대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장에 투입된 흑마법사들 대부분이 높은 써클의 수준 있는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도일이란 자는 그들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마법사라는 판정을 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난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한참을 궁리한 세르게이는 암암리에 혀를 찼다.

'젠장 정말 골치 아프군.'

물론 상대가 죽여도 무방한 흑마법사이니 만큼 눈 딱 감고 처치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전장에서 손실될 전력을 생각하니 세르게이로써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놈은 6써클의 마스터. 공격마법의 위력만으로 따진다면 베니테스도 그를 따라갈 순 없어.'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슬러 전장에 투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세르게이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출신이 다소 걸리긴 했지만 별달리 쓸모도 없는 이방인 하나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전력을 잃을 순 없었다. 어차피 처형하려 생각한 자가 아니던가? 마침내 세르게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겠소.

고맙소.

비록 말로는 감사를 표하고 있었지만 도일의 얼굴에는 의당 그래야지, 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는 다시 분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혼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그 대신 당신에게 하루의 휴가를 박탈하겠소. 그러니 내일 부대로 복귀하도록 하시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도일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 뒷모습을 세르게이는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덜컥.

도일이 나가자 뒤에 시립해 있던 베니테스가 재빠르게 다가갔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해서 그가 밀착해서 세르게이를 경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자의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겠나? 서슬을 봐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싸우러 가지 않겠다는 기세이던데…….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세르게이를 보며 베니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정을 내리셨다면 지금 즉시 데이몬을 흑마법사 도일의 가드로 삼는다는 명령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툭 내뱉으며 집무실에서 나가는 세르게이를 보며 베니테스는 말없이 명령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솔직히 말해 도일이 데이몬을 가드로 삼은 연유에 대해 의구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데리고 왔다는 점 때문에 이미 그는 데이몬에 대해 깊이 동정심을 가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정도 편의는 직접 봐 주고 싶었다. 적합할 것이라 생각되는 명령서 한 장을 집어든 베니테스는 나직이 뇌까렸다.

잘 가시오. 이계의 무사여. 비록 당신이 뜻을 이룰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소원은 푼 것 같구려.

의자에 몸을 묻은 베니테스는 펜을 들어 명령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신이 데이몬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펠드리안의 성벽. 인간의 힘으론 감히 기어오를 수조차 없어 보이는 드높은 성벽이었다. 비록 드래곤들의 개입에 의해 더 이상 무적이라 말할 수 없는 방어구였지만 아직까지 웅장함은 남아있어서 성벽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있었다. 그런 성의 문이 지금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끼이이익. 쿵

강철로 보강되어 있는 육중한 문이 서서히 내려오더니 굉음과 함께 해자 위에 걸쳐졌다. 성문을 지지하고 있는 쇠사슬이 출렁거리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 시대 대부분의 성이 그러하듯 이 성문은 문의 역할과 함께 해자를 건널 수 있는 다리의 목적까지 겸해서 하고 있었다. 곧 다리 위로 수백 명의 말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뒤로 보급품을 실은 듯한 수레 몇 대가 바짝 붙어 뒤따랐다.

두두두두.

만에 하나 있을 적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듯 그들은 속도를 내어 다리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성을 나서자마자 문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펠드리안 성은 곧 외부와 빈틈없이 격리되어버렸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한다.

부대를 지휘하는 듯한 털북숭이 지휘관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지시에 따라 부대는 서서히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전선을 지원하러 가는 지원병들이었다.

다소 안색이 창백한 병사들. 그들 대부분은 부상을 입은 뒤 후송되었다가 치료가 끝난 자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급박해져 가는 전황으로 인해 검을 쥘 수 있는 자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쟁터로 보내졌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되는 전장으로 말이다.

대략 50명 정도는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반 병사들로써 오랜 행군에 대비해서 가벼운 가죽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마 기습 공격이 있거나 전장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들은 수레에 실려있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다. 행군 속도를 가늠해본 지휘관은 눈빛을 빛냈다.

신속하게 이동하면 아마도 내일 저녁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원부대는 지휘관의 통솔 하에 전장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투구를 깊숙이 눌러쓴 털북숭이 지휘관은 병사들을 연신 독려하던 와중 힐끗 병력의 후미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마법사로 보이는 자가 수레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마법사의 동태를 슬쩍 살펴본 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사실 털북숭이 지휘관에게 부여된 임무는 지원병을 전장으로 수송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하는 저 흑마법사가 도중에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함께 부여받은 것이다. 이 임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수행해야 했기에 그는 흑마법사에게서 결코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날씨가 맑군.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햇빛을 보지 못한 때문인지 그는 한가할 때면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정말 언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쪽빛 하늘이었다.

잠시 주위의 정경을 감상한 도일은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수레 옆에는 투구를 깊숙이 눌러쓴 왜소한 체구의 병사 하나가 바삐 걷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도일의 입술을 비집고 따뜻한 감정이 깃든 음성이 새어나왔다.

전장에 가는 것이 두렵진 않으냐? 데이몬?

걷는데 열중하고 있던 데이몬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이미 저는 전장에서 수도 없을 정도로 전투를 치렀습니다.

물론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라면 전장에 가는 것이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탈영하는 병사들은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이므로……. 하지만 데이몬에겐 적어도 전장은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다.

도리어 친숙한 감정마저 느껴지는 장소인 것이다.

8군단에 도착하면 아마도 서너 명의 가드들이 보충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 가드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데이몬의 태도는 정말 깍듯했다. 거기에는 추호도 사심이나 의도가 배어있지 않았다.

자신을 제자로 삼아 마법을 가르쳐준다는 이유 하나로 데이몬은 이미 도일에게 깊이 감복해 있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도일을 배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녀석.

싱긋 웃은 도일은 다시금 시선을 하늘에 고정했다. 생전 처음 맞아본 제자의 성품이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일에게 데이몬은 명실상부한 첫 제자였다.

오래 전 도일은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에게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어떤 경우에도 제자를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삼십 년에 가까운 감옥 생활로 많이 희석되었고 다시 햇살을 보게 된 지금 그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마침내 첫 제자를 맞아들였다. 비록 그가 트루베니아 사람이 아닌 이방인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데다 자신과 동일한 추악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가는 지도 몰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일은 문득 자신의 스승인 브리즈만을 떠올렸다. 삼십 년 전 암흑전쟁에 함께 참가했다가 유명을 달리한 스승 말이다. 도일의 입에서 나지막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스승. 당신의 추측대로 난 결국 제자를 맞아들였소. 하지만 걱정 마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난 당신의 전철을 밟진 않을 테니 말이오.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도일이 스승 브리즈만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도일을 맞아들이던 당시 브리즈만은 무려 삼십 명에 가까운 제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브리즈만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그 이후의 일은 도일에겐 정말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도일이 브리즈만의 문하생이 된 지 딱 일 년 만에 삼십 명의 제자 대부분이 생체실험에 희생된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때 도일은 처참하게 변해버린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절규한 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겠다고, 꼭 마법을 배우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당시 동료들 대부분은 키메라 합성 시험에서 죽어갔다. 스승인 브리즈만은 생체실험에 제자들을 투입할 정도로 극악한 심성을 가진 흑마법사였다. 인간을 오크, 트롤, 심지어는 고블린과 몸을 붙이려는 실험이 그에 의해 거행되었고, 몬스터들과 몸이 뒤섞여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도일은 무수하게 치워야만 했다.

그리고 스승의 마수는 어김없이 도일에게도 뻗쳤다. 그를 불의 중급 정령인 살러맨더와 합체시키려는 시험에 투입한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진, 정말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은 과정.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이미 도일의 피부는 살러맨더의 열기에 완전히 타버린 다음이었다. 가히 인간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생명력이 무척 질긴 놈이군. 좋아. 네놈을 나의 두 번째 제자로 삼겠다.

중화상을 입고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도일에게 내뱉어진 냉랭한 스승의 음성. 그 때부터 도일은 스승인 브리즈만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자신의 용모를 이렇게 만든 데 대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원한 말이다. 하지만 마법을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도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브리즈만을 대하며 그에게서 흑마법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해서 도일의 마법실력은 꾸준히 향상되어갔다.

그러던 차에 암흑전쟁이 터졌다. 물론 브리즈만을 비롯해서 모든 제자들, 이미 상당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된 도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도일은 스승의 최후를 목격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브리즈만은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그의 첫 번째 제자, 정확히 말하면 트롤과 몸이 섞이고도 살아남은 제자 드류에게 느닷없이 암습을 받은 것이다. 드류 역시 도일과 마찬가지로 브리즈만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류의 암습은 성공해서 브리즈만은 결국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트롤의 가공한 재생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시에 가해진 기습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가해진 브리즈만의 반격에 의해 드류 역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당시 심각한 중상을 입은 브리즈만은 구슬픈 어조로 도일을 불렀다.

도일. 나를 도와다오. 리치가 되어야겠다. 네가 이제 나의 유일한 제자이므로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겠다.

리치가 되어서라도 생을 유지해야겠다는 삶에의 강한 집착.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흑마법사인 도일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도일은 당연하다는 듯 브리즈만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럴 수 없소. 스승.

뭐, 뭐라고?

당신은 이 세상에 살아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요.

예상치 못한 도일의 태도에 브리즈만은 눈을 부릅떴다.

크으윽. 네, 네놈이?

잘 가시오 스승.

결국 브리즈만은 도일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키워낸 제자들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브리즈만이 죽은 뒤 도일은 그가 남긴 마법서적과 마법무구들을 모조리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암흑대전은 도일의 마법실력을 늘리는데 혁혁한 역할을 했다. 이미 마왕의 마력에 지배당하고 있던 도일은 도저히 인간들과의 전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끌어온 전투. 그것은 결국 인간들의 승리로 끝났고 도일은 그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자그마치 삼십년 동안을 지하감옥에 갇혀 자신의 죗값을 치러야 했다.

정말 기구하다 말할 수 있는, 결코 짧지 않았던 인생이 도일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도일은 그때와는 반대로 이젠 누군가를 가르칠 스승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덜커덩.

길이 평탄하지 못했기에 수레의 진동이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져왔지만 도일의 상념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슬쩍 데이몬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비록 데이몬이 얼마만큼 마나에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가르칠 것이다. 적어도 그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된다.'

비록 엄청난 고초를 겪은 끝에 흑마법사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도일은 자신의 경험만큼은 결코 데이몬에게 전수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비록 스승과 같은 최후를 맞고 싶지 않아서 결정한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업보만은 데이몬에게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일에게는 브리즈만에 의해 초래된 사승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금껏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던 데이몬은 트루베니아에서 모처럼 스승다운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적이다.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급박한 고함소리에 도일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숙련된 워 메이지 답게 그는 반사적으로 공격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말을 탄 한 명의 기마병이 전력으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정찰을 위해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척후병이었다. 이미 전사했는지 다른 척후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를 쓰고 달려오는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모두 전투 준비.

이런 상황에 경험이 많았는지 지휘관은 지체 없이 대응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미리 훈련받은 대로 다급하게 수레로 다가가서 갑주와 무기를 수습했다. 오랜 행군을 대비해 벗어둔 장비를 다시 착용하는 것이다.

어느새 도일도 수레에서 내린 상태였다. 높은 써클의 마법사답게 그는 이미 공격마법을 단단히 캐스팅해 놓은 상태였다. 달려온 척후병이 쓰러지듯 말에서 뛰어 내리자 지휘관이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적의 규모는?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척후병은 전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보고를 시작했다.

약 오백 정도로 구성된 오크 부대입니다. 라이더는 보이지 않고 대부분 보병입니다.

하지만 놈들의 부대에 이례적으로 오우거 한 마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우거?

지휘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물론 오크들이 기사단과 마법사를 견제하기 위해 다수의 중형 몬스터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문제는 오우거였다.

이미 지휘관은 오우거에 의해 많은 마법사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무수히 보아왔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오우거의 피부는 마법 공격에 무척 강한 편이다. 한 두 방의 마법 공격엔 즉사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오우거의 날렵한 몸놀림은 어렵지 않게 가드들의 보호를 돌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놀림이 둔한 마법사들이 오우거를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 이미 오크 군대에게는 오우거로 하여금 마법사를 상대하게 하는 전법이 거의 절대적으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지휘관은 난감해했다.

할 수 없지. 모두 방어진을 구성하고 임시 가드들은 즉시 마법사를 보호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일련의 병사들이 도일의 주위를 에워쌌다. 하나같이 중갑주를 걸친 병사들이었다. 데이몬 역시 자신의 독문무기인 스파이크 건틀릿을 움켜쥐고 도일의 앞을 막아섰다.

건틀릿에 하나씩 달린 기다란 쇠송곳이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외의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앞을 가리며 적의 출현에 대비했다.

콰우우우.

오우거는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워낙 덩치가 컸기 때문에 멀리서도 한 눈에 분간할 수 있었다. 저번에 데이몬이 싸워본 트윈헤드 오우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머리가 하나만 달린 오우거였다. 하지만 당당한 덩치의 오우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오우거의 뒤에 바짝 붙어 일련의 오크 보병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비쳐졌다.

오. 신이시여.

선두에 선 병사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바로 그들이 일차로 오우거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맨몸으로 말이다. 돌격해 오는 오크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도일이 앞으로 쓱 나섰다. 그의 마법지팡이에는 어느새 생겨난 방전구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Chein light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