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테스 님은 너 따위가 만날 분이 아니시다. 그냥 돌아가라.
그 때 뒤에서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다른 근위병이 턱에 손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데이몬의 정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조금 유명해진 이방인 용병. 이미 그 근위병은 이방인 용병이 오우거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곧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보게. 내 한 번 기별을 넣어 보겠네.
데이몬은 묵묵히 그의 시선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래 날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베니테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전과 별달리 다름없는 수려한 생김새였다. 그러나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것을 보니 뭔가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었다.
하, 한 가지 청이 있어 왔소.
어눌하긴 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서 베니테스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저 이방인이 트루베니아에 온 지는 고작 6개월. 그 짧은 세월동안 이곳의 말을 깨우쳤다는 사실에 베니테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군. 6개월만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당혹해 하는 베니테스를 응시하며 데이몬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용건을 서서히 꺼내고 있었다.
내 듣기로 당신이 이곳에서 제일 실력이 있는 마법사라 들었소. 그 말이 사실이오?
베니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진정으로 실력이 있는 마법사는 궁정마법사 따윈 하지 않을 테니…….
아무튼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소?
그, 그렇기는 하지만.
이방인이 난데없이 자신의 마법실력에 대해 거론하자 베니테스는 이유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저의를 파악하려는 듯 데이몬의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시오.
마, 마법?
베니테스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서 마법을 가르쳐달라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거니와 너무도 엉뚱한 청이라서 베니테스는 말까지 떠듬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더러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말이오?
그렇소. 나는 마법을 배우고 싶소.
마법을 배우고 싶다…….
베니테스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채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심 착잡한 기분도 들었다. 이방인이 마법이란 학문을 쉽게 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쫓아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베니테스는 좋게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그는 이방인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므로 평소 동정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마법은 그리 만만한 학문이 아니오. 더욱이 지금처럼 쉽게 배우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학문이기도 하지.
어째서 그렇소?
베니테스는 지체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맥밀란이 가르쳐준 사실과 부합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나에 선천적인 소질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백날 익혀도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없소. 왜냐하면 마법이란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나를 임의로 제어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마나에 대한 친화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소.
말을 마친 베니테스는 힐끗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물론 당신이 한 때 소드 마스터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하지만 마법에 사용되는 마나와 소드 마스터가 몸 속에 간직한 마나는 근원적으로 동일하지 않소. 다시 말해 당신의 경험이 마법을 익히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또한 제대로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부터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오. 그러나 그 중에서 마법사로 자라나는 아이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마법이란 그만큼이나 어려운 학문이오. 죽을힘을 다해 수련을 해도 제대로 마법사로 대접받을 수 있는 2∼3서클 급의 경지까지 오르는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 기간을 대략 30년 정도로 잡고 있소.
예상치 못했던 사실에 데이몬의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베니테스는 그런 이방인의 모습에 일말의 통쾌함까지 느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히 당신같이 늦은 나이에 마법을 익힌다면 그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소. 내 장담하건 데 당신이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기까지 최소한 4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릴 것을 보증할 수 있소.
저, 정말이오?
그렇소.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리다.
데이몬의 얼굴에 다소 미심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베니테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척 젊어 보이는 수려한 얼굴. 데이몬의 내심을 알아차린 듯 베니테스는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내 얼굴을 보고 의구심을 가졌나 보군요.
솔직히 말해서 내 나이는 올해 여든 넷이오. 일곱 살 때부터 마법의 길에 들어서서 이제 겨우 7써클의 경지에 올라 있다오. 굳이 나이를 밝힐 필요가 없어서 지금은 마법으로 용모를 감추고 있는 것이지.
말을 이어나가며 베니테스는 상대가 깜짝 놀라는 광경을 상상했다. 결코 마흔이 넘어 보이지 않는 멋들어진 중년인이 실제로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면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손가?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이방인은 하나도 놀라지 않는 과묵한 태도를 보였다.
사실 데이몬은 중원에서도 이미 여러 번, 반노환동의 경지에 올라 젊음을 되찾은 고수를 봐 왔던 것이다. 물론 역체변용술을 사용한다면 더욱 쉽사리 용모를 바꿀 수 있다. 이미 데이몬 자신이 배교 내부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사술의 대가가 아니던가?. 내력만 뒷받침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용이 가능했다.
때문에 오히려 놀란 것은 베니테스였다.
노, 놀랍지 않은가 보구려.
눈이 휘둥그레진 베니테스를 보며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소. 나는 이미 그 마법이란 학문에 관심을 가졌소이다. 그러니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 드리겠소. 이건 진심이오.
이방인이 좀처럼 자신의 뜻을 꺾지 않자 베니테스는 난처해졌다. 물론 평상시라면 문하생 하나 정도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 모든 마법사들에게 총 동원령이 내려져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카롯트의 궁정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참전해도 벌써 참전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그에겐 전혀 몸을 뺄 시간이 없었다. 마법사의 수가 극도로 부족한 상태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넘치고 넘쳤다. 전장에 파견된 부대와의 마법 통신, 요인들의 공간이동, 등등이 그에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업무였다. 다시 말해 베니테스에겐 결코 마법에 관심을 가진 저 이방인에게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결국 베니테스는 강경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다. 별안간 냉랭해진 표정으로 베니테스는 싸늘한 일성을 날렸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군.
경비병으로 배속 받았으면 말없이 임무에 열중할 것이지 주제넘게 마법은 무슨 얼어죽을 마법이오? 그렇게도 할 일이 없소? 마법이란 학문은 당신 같은 이방인이 심심풀이로 익히겠다고 나설 학문이 절대 아니오. 알겠소?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 업신여기며 윽박지르는 말투에는 데이몬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놀라지 않았다.
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소. 나는 이미 마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몸이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 학문을 배워야겠소.
베니테스는 황당해졌다. 강하게 나갔지만 상대의 기가 전혀 꺾이지 않는 것이다.
대책이 없는 작자로군. 나에겐 당신 따위와 입씨름할 시간이 없소.
그는 냉랭한 표정을 견지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물론 이방인에게 마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처지도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베니테스에게 가르칠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작금의 상황에선 시간을 쪼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베니테스는 냉랭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나가 보시오. 더 이상 이런 일로 나를 귀찮게 하지말고…….
하지만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베니테스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결국 베니테스는 근위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갑주를 절그럭거리며 근위병 네 명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베니테스는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저자를 데리고 나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곧 근위병 두 명이 다가가서 거칠게 데이몬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워낙 키도 작은데다 꼽추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곧 근위병들의 팔에 들려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자, 가자.
거친 근위병들의 윽박지름이 들려왔다. 베니테스는 그 장면을 외면하며 말없이 내실로 들어가려 했다. 별달리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한 줄기 격양된 음성이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 음성은 차라리 비명이라고 봐야 옳을 듯 했다.
이렇게 하려고 날 이리로 데리고 왔었나?
그 말에 베니테스는 잠시 멈칫했다. 마치 울부짖는 듯한 절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왜? 날 데리고 왔나? 차라리 깨끗하게 죽을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말이다.
베니테스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물론 생각해보면 이리로 데리고 온 자체가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 비록 이런 신세가 되었지만 중원에서는 당당한 실력자였다. 적어도 2천 명이 넘는 무사들을 거느리는 절대자 중 한 명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날 이렇게 멸시하는 이유가 뭔가? 왜 나를 이리로 데리고 와서 이런 참을 수 없는 수모를 안기는 건가?
그 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데이몬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스러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설움이기도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참아왔다. 그래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 온갖 미물들과 목숨을 건 혈투를 치렀고, 한낱 경비병으로써의 소임도 달게 수행해왔다. 그런데 그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 어떻게 해서든 강해지고 싶다는 내 열망을 이토록 무참히도 짓밟아야만 속이 시원하겠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에 근위병들도 일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데이몬의 음성은 하나 하나가 비수가 되어 베니테스의 가슴에 와서 꽂히고 있었다.
내 비록 힘을 잃었기는 하되 무인으로써의 자존심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날 추하게 하지말고 깨끗하게 죽음을 다오. 날 이렇게 만든 데 일말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날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란 말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얼굴을 적셨다.
베니테스는 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절대자의 신분에서 한낱 경비병으로 전락한 한 사내의 처지가 가슴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몬을 쳐다보는 베니테스의 눈빛이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데이몬에게로 다가온 베니테스는 안색을 붉혔다.
일단 당신을 데리고 온데 대해, 일행 중 한 사람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오.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빛으로 그저 베니테스를 쏘아볼 뿐이었다. 잠시 그의 눈빛을 맞받던 베니테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한 번 찾아보겠소. 그러니 이대로 근무지로 돌아가 있도록 하시오.
내가 직접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하오. 다시 말해 내가 원한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테니…….
저, 정말인가?
베니테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가며 말이다. 잠시 베니테스의 눈빛을 응시한 데이몬은 근위병에게 붙들린 팔을 흔들었다.
놓아라. 내 발로 가겠다.
주뼛거리던 근위병들이 팔을 놓아주자 데이몬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언제 추한 꼴을 보였냐는 듯 깔끔한 태도로 베니테스를 향해 포권을 했다.
실례가 많았소.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이다.
생소한 인사법에 다소 당혹해진 베니테스를 두고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베니테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근무지로 돌아온 뒤 데이몬은 한동안 성벽 근무에 열중했다. 하루에 한 번씩 차례가 돌아오는 감시탑 근무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다른 병사들에게 부탁해서 언어를 유창하게 익히는데 주력할 뿐이었다.
'마법이란 학문을 익히기 위해서는 언어라도 깊이 있게 익혀야 한다.'
하지만 베니테스로부터 기별은 여간해선 오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조금도 조바심 내지 않았다. 이미 그는 참고 기다리는 데 대해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가 베니테스를 만나고 온 지 한 달이 되는 날 마침내 기별이 왔다. 선임병인 맥밀란이 무언가를 들고 데이몬을 찾아온 것이다. 다소 씁쓸한, 다시 보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궁정에서 명령서가 내려왔네.
자네를 궁정 근위병으로 배속한다는 공문일세. 이거 정말 축하해야 할 일이로군.
맥밀란의 말에 함께 근무하던 수비병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궁정 근위병 자리는 결코 쉽게 배속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위세 있는 귀족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배속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자리가 바로 근위병 보직이었다. 물론 평민 출신들 중에서도 근위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 검술실력이 유난히 뛰어나던지 아니면 체격조건이 훌륭해야 한다는 지하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데이몬은 결코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니 왜소하고 추악한 외모를 차지하고서라도 그들은 지금까지 타국 출신의 용병이 근위병이 되었다는 소문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만큼 궁정근위병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엘리트 부대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술렁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좋은 자리로 배속되게 된 데이몬을 가슴 깊이 축하해주고 있었다.
축하해. 데이몬.
가더라도 우릴 잊지는 마.
6개월 이상 함께 근무했던 덕에 수비병들은 데이몬을 절친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데이몬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극도로 메마른 그의 심성에도 수비병들의 소박한 마음이 와 닿았던 것이다.
이, 잊지 않겠어. 너희들 모두…….
수비병들은 떠나는 데이몬을 위해서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각기 음식을 아낌없어 꺼내었고, 파사트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서 깊이 숨겨두었던 밀주(密酒)를 가져와서 개봉했다. 곧 57 경비대만의 조촐한 전별식이 거행되었다. 독하기 그지없는 밀주가 한 순배 돌아가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취기가 감돌았다.
선임병인 맥밀란이 데이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가면 앞으론 서로 보지 못할 거야. 전황을 봐서 우린 곧 전방으로 배속될 것 같아. 어딜 가더라도 우릴 잊지 말도록 하고…….
그, 그러지.
예상치 못했던 환대에 데이몬은 다소 얼떨떨했다. 사실 그는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통해 이곳의 군주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멸감을 가진 바 있었다. 그 생각이 이들의 태도로 인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트루베니아 사람들 전체에 대한 선입관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수비병들을 대해 본 결과 트루베니아 사람들은 비교적 소박하고 솔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흉물스러운 용모의 데이몬이었지만 한 번 친해지자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을 보여주었다.
잘 가. 데이몬. 다시 보기를 기원하겠어.
나, 나 역시 그러고 싶어.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로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이토록 술에 취해 본 기억은 중원에서도 없었던 것 같았다. 무공을 보유하고 있을 때, 즉 중원에서는 술에 취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가 술을 먹을 때는 오직 수호마왕군 무사들과 잔치를 벌일 때뿐이었다. 물론 그 때는 수백 명의 수하를 책임지는 입장이라서 이처럼 술에 만취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데이몬의 뇌리에는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수하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들을 죽인 원흉인 사준환의 얼굴과 함께 말이다.
'사준환! 결코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할수록 그에 대한 복수심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뭐하는 거야. 한 잔 받아야지.
술을 권하는 파사트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데이몬은 술잔을 받아들었다.
아, 알았어.
생소하고 독한 밀주였지만 그에겐 지금 이 이상 맛있는 술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57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망루는 파티 분위기에 젖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정든 동료들과 작별을 고한 데이몬은 6개월 동안 머문 망루를 나섰다.
개인 소지품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는 맨몸으로 성벽을 걸어 내려갔다.
베니테스가 왜 자신을 궁정 근위병으로 임명했는지 알 순 없었지만 궁성에 가 보면 곧 알게될 터라서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품속에 근위병 임명장을 깊이 보관한 채 말이다.
약 1시간 남짓 걷자 궁성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그는 즉시 궁성의 후문으로 향했다. 근위병들에게 임명장을 내밀자 그들은 이번에는 두말 하지 않고 그를 베니테스의 집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베니테스가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공손한 데이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베니테스는 함께 들어온 근위병에게 다가가서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근위병이 예를 취하고 나간 뒤에야 베니테스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아마 당신을 근위병 자리에 배치한 데 대해 무척 궁금할 것이오.
솔직히 그렇습니다.
한 달 전보다 훨씬 유창해진 말투에 베니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이처럼 트루베니아의 언어를 빨리 배운 자는 그가 유일한 듯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그는 곧 설명에 들어갔다.
사실 그 방법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오. 물론 당신이 마법을 배울 기회 말이오.
한 달 전 당신이 방문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난 세르게이 공작을 찾아갔었소.
그가 궁정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 분께 당신을 근위병으로 임명해야겠다는 의견을 올렸소.
모르긴 몰라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군요.
물론 자신이 세르게이에게 대한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예상대로 베니테스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말대로 공작은 무척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군. 하지만 준비해 온 논리를 풀어놓자 그는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지.
베니테스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공작께 당신이 트롤, 오우거를 쓰러뜨렸던 점을 부각시켰소. 다시 말해 그런 중형 몬스터가 만에 하나 공간 이동을 통해 궁성에 잠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대비책으로 당신을 근위병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었오. 어쨌거나 당신은 단신으로 중형 몬스터와 싸워 이긴 유일한 병사이기 때문이었소. 물론 기사들을 제외하고 말이오.
비로소 자신이 근위병으로 임명되게 된 연유를 알아차린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법을 배우겠다는 날 왜 근위병으로
근위병은 현재 궁성의 모든 장소에 배치되어 있소. 물론 마법 학부 내에도 어김없이 근위병이 배치되지요.
데이몬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로소 베니테스의 속셈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소. 그것말고는 당신이 마법을 배울 방법이 없소. 당신을 학부 경비조로 파견하는 것은 내 권한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 그러니 당신은 그곳에서 수업과정을 지켜보며 근무를 하도록 하시오.
데이몬은 진심 어린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길을 열어주었으니 배우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자질에 달렸소.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몸을 돌리려는 베니테스는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아까 당신을 데리고 온 근위병을 따라가시오. 그가 갑주와 무기를 보급해 줄 것이오.
베니테스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 사의를 표명한 뒤 근위병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휘적휘적 걸어나가는 그의 등판에 베니테스의 시선이 와서 꽂히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나서자 베니테스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가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지만 베니테스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법이란 본시 기초가 튼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용이한 법이다. 물론 지금 마법학부에서 교육 중인 학생들은 대부분이 고르고 고른 자질 있는 학생들이었으며 통상적으로 기초 과정을 마스터한 상태로 투입된 이들이 태반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교육은 현재 고급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터라 그런 고등 과정을 마법에 대한 아무런 기초도 없이 배운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후! 할 수 없는 일이지. 일단 길만은 열어주었으니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일.
마침내 베니테스는 상념을 접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없군.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급하기 그지없었다.
휴, 이제 되었군.
얼굴이 박박 얽은 곰보중년인은 손을 들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손에 굳은살이 박힌 위치로 말미암아 그가 대장장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반짝반짝 닦인 갑주 한 벌이 놓여 있었다.
대장장이의 얼굴에 돌연 짜증이 서렸다.
이렇게 괴상한 갑주를 만들어보긴 처음일세 그려.
그는 바로 조금 전 근위대로 배속된 이방인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도 무척 신기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위대에 이방인이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하지만 막상 이방인을 직접 대하자 그는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신임 근위병의 모습이 그의 상상을 여지없이 깨트려버렸던 것이다.
세, 세상에…….
일반적으로 근위병들은 근육질의 당당한 체구를 가졌다. 때문에 그는 보편적으로 치수가 큰 갑주를 만들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 이방인은 마치 소년처럼 체구가 작았다. 그것뿐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등이 불룩 솟아오른 꼽추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몸에 맞는 갑주를 만드는 데 대장장이는 꼬박 반나절을 허비해야만 했다. 근위병들의 갑주는 쇠사슬 갑옷이 아닌 철판으로 된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으므로 이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맞으려나 모르겠군.
그는 완성한 갑주를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먼저 신임 근위병의 몸에 맞춰본 뒤 광택을 내고 장식을 달아야 했던 것이다.
덜컥.
문을 나서자 두 명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그도 익히 알고 있는 근위병 분대장이었고 다른 자가 바로 신임 근위병이었다. 이국적이긴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흉물스러운 얼굴 형태. 거기에다 체구 역시 드워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작달막했다. 그에 비하면 얼굴이 얽긴 했지만 자신이 훨씬 미남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어쨌거나 한낱 대장장이인 자신에 비해 근위병들의 신분이 훨씬 높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다 되었습니다. 한 번 입어보시지요.
완성된 갑주를 힐끗 쳐다본 근위병 분대장은 곧 불만스러운 음성을 토해냈다.
이게 아니야. 투구의 얼굴 가리개가 고정식으로 되어있어야 한다고,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일단 먼저 갑주의 치수를 재는 것이 우선인지라…….
이방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본 대장장이는 수긍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고위 귀족들 앞에서 저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지.'
대장장이는 완성된 갑주를 데이몬의 전신에 대고 줄이거나 늘여야 할 부분을 펜으로 표시했다. 데이몬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는 근위병 분대장이 잔뜩 심통이 난 듯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다소 경멸하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지만 데이몬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몸에 익은 눈빛이었고 그로써는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데이몬의 얼굴을 훑어본 분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어찌 저런 놈을 근위병으로 받아들였을까?'
휘하의 근위병들은 대부분 훤칠한 키를 가진 미남자였다. 물론 분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용모에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분대장의 얼굴은 걸치고 있는 빛나는 갑주와 무척 잘 어울렸다. 물론 잘 생긴 얼굴을 가릴 필요가 전혀 없는지라 그는 근무를 서면서도 항상 얼굴가리개를 올리고 다녔다. 이미 근위병들 사이에 얼굴가리개는 비상사태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로군.'
비록 상급자인 베니테스의 명령이라 따르긴 했지만 그로써는 추악한 몰골의 신임 근위병이 별달리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것도 출신이 밝혀지지 않은 이방인 아닌가? 그 때문에 분대장은 일부러 얼굴가리개가 일체형으로 된 투구를 주문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본 모습으로 다닌다면 궁정의 화젯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치수를 완전히 잰 대장장이가 작업실로 들어가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갑주를 받아 가지고 근위병 대기실로 오게.
하지만 난 근위병 대기실을 잘 모르는데…….
대장장이에게 물어보면 가르쳐 줄 거야.
냉랭하게 내뱉은 분대장은 빙글 몸을 돌렸다. 마치 너 따위와는 더 이상 대화하기조차 싫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 겪어보진 못했지만 근위병들과 지내는 것이 그다지 쉽진 않겠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들의 성격은 성벽 수비병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군.'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잠자코 갑주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5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종족전쟁의 전황은 현재 한창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트란보르 전투를 대승리로 이끌어 낸 결과 오크들은 트루베니아 대륙의 60% 가량을 점령할 수 있었다. 대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오크 군은 한동안 병력을 진군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겐 전투에 투입할 병력을 생산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던 것이다.
척박한 펠루시아 산맥에 숨어살면서 인구가 현저히 줄어버린 탓에 오크들에겐 싸울 병력이 모자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어렵지 않게 극복될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태어난 오크는 평균 5년이면 충분히 전쟁과 사냥에 투입할 수 있는 전사(戰士)로 자라난다. 그리고 태어나는 새끼의 수 역시 충분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점령한 지역에서 노획한 음식물과 식량은 그들을 무사히 키워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오크 군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들에게도 휴식시간이 필요했다. 공성작전을 위해 많은 마나를 소비한 탓에 드래곤들이 무척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의 만들어낸, 성이란 최강의 방어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드래곤들은 연신 고써클급 마법을 전개했고 그 탓에 그들이 가진 마나는 대부분 고갈되어 버렸다. 그것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장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해 인간들의 군대는 연신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산발적인 국지전이 전선 전체를 걸쳐 다방면으로 벌어졌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는 자가 뒤바뀐 전쟁. 하지만 전세가 기울면 즉각 드래곤들이 투입되기 때문에 인간들의 군대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와이번을 이용한 강습작전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도 그들에겐 큰 부담이 되었다. 든든해야 할 후방에서마저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에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것이다.
앞으로 5년의 시간이 지나면 오크 족의 침공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오크 보충병들을 앞세워서 말이다. 여러모로 보아 인간들에겐 점차 불리해져만 가는 전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카롯트의 로젠가르트 4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들에겐 단 하나 손꼽아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첩보부의 수장인 세르게이가 파악해 낸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로젠가르트 4세는 각 국 군주들을 다시 한 번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한 군주들의 세 번째 회합이 성사되었고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 회합은 비교적 안전한 왕국 트란벨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카롯트의 궁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부유한 상업왕국이라 그런지 트란벨의 궁성도 정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 궁성의 집무실엔 현재 각국 군주들이 모두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참석한 군주들의 수가 저번의 회합보다 현저히 줄어있는 점이다.
물론 나라가 무너지면서 많은 군주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한 상당수의 군주들이 기사단을 이끌고 전장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지라 참석할 수 있는 군주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불안감에 가슴 조이며 앞에 나와 있는 작전관의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작전관은 이카롯트의 세르게이 공작이었다.
그럼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군주들에게 예를 취한 세르게이 공작은 곧 전황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까지 전세는 어둡기 그지없습니다. 트란보르에서의 참패 이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지속되고는 있지만 되찾은 왕국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보충병이 충원되는 오크와는 달리 계속해서 병사들의 수가 줄고 있는 것도 우리에겐 큰 부담입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세. 이러다간 인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군주들의 얼굴은 짙게 그늘이 깔려 있었다. 상황은 여러모로 보아 인간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드래곤 때문에 제대로 된 병진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00년 전 시작되어 대략 50년 전에 끝난 오크 족과의 종족전쟁. 그 전쟁에서 인간들이 비교적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배경에는 세 가지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 중 하나는 성을 이용한 방어작전이었고, 두 번째는 중 장갑을 걸친 기사단의 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현저하게 열세였던 병력 차이를 용이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점이 바로 병진이었다. 통상적으로 잘 정비된 인간의 군대는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오크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다. 왜냐하면 병과(兵科)에 따른 병사들의 조합에 의해 군대의 위력이 극대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울프 라이더나 궁수대가 있긴 하지만 오크 군의 주력은 보편적으로 경장갑을 걸친 보병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엄선된 병과에 의해 임무가 엄격히 정해진 인간들의 군대에는 결코 비교 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적의 예기를 꺾는 기사단을 비롯해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전문적으로 차단하는 경갑기병, 그리고 탄성이 강한 석궁과 갖가지 활로 무장한 궁수대와 적의 진격을 선두에서 버텨내는 중갑보병단. 적의 추격과 포위를 도맡아 하는 경장보병과 창병들까지 인간들의 병과는 정말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만큼 인간의 군대는 만약 한데 뭉친다면 그 위력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병과들이 조합되는 시너지 효과에 의해 힘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점은 드래곤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다시 말해 드래곤이란 존재로 말미암아 성을 이용한 방어전과 병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각 군주들은 공포감이 치밀어 오르는지 진저리를 쳤다. 이미 그들은 드래곤의 가공할 만한 공격마법으로 인해 벌써 여러 번이나 주력군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메테오 스웜(Meteors swarm)이나 블리자드(blizzard), 어스 쉐이크(earth shake) 파이어 스톰(fire storm)같은 광범위한 지역에 작용하는 고써클의 마법은 정말 위력이 가공할 수준이었다. 만약 드래곤에 의해 마법이 전개되면 밀집해 있는 인간의 군대는 정말 처참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의 부대로 분리시켜 놓을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병력 배치를 하면 사나운 오크 보병들에게 좀처럼 승기를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정말 이것은 딜레마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각종 중형 몬스터들의 참전으로 인해 기사단이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린 지금 인간들의 운명은 급속히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만간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오크 보충병이 가세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하지만 헤쳐나갈 방법은 있습니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세르게이의 자신감 어린 말투에 각 왕국 군주들은 고개를 들었다.
위기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라 그들은 세르게이의 발언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쳐다보며 세르게이는 지긋한 어조로 설명을 해 나갔다.
작금의 사태는 모두 드래곤들의 개입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드래곤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오크를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드래곤들은 이미 인간들을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선언했소. 이미 그들의 마음이 확고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회유할 수가…….
세르게이는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자연적으로?
군주들의 얼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본시 드래곤이란 종족은 어느 정도 활동기를 지내고 나면 반드시 수면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사실은 각 군주 전하들께서도 익히 파악하고 계실 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드래곤들이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에는 활동기가 극히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저희 첩보부에서는 드래곤들의 수면주기에 대해 세세히 분석을 끝낸 상태입니다.
세르게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군주들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급격히 떠오르고 있었다.
―드래곤만 손을 떼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이미 이런 분위기가 각 병단들 사이에 널리 팽배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이나 드래곤은 병사들에겐 공포로 자리잡은 존재였다. 사실 드래곤들만 없다면 오크 따위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비록 일백 년 전 오크들이 인간을 거의 멸종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긴 했지만 지금과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의 오크들은 일백 년 전보다는 수가 현저히 적은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트루베니아 대륙에서는 인간들의 수가 월등했다. 그 탓에 군주들은 모처럼 자신들의 운명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그렇다면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요.
성질 급한 카르나틱 군주가 벌떡 일어서서 고함을 질렀다. 이미 카르나틱 왕국은 국토의 반 이상의 오크 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 그러므로 카르나틱 국왕이 느끼는 위기감은 이곳에 모인 군주들 중에서 가장 지대하다 할 수 있었다.
세르게이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펴서 흔들었다.
고정하십시오. 카르나틱 군주님. 비록 알아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방심할 상황이 아닙니다.
드, 드래곤. 그 저주받은 놈들만 없었다면 이렇게 밀리진 않았을 것이오.
떨리는 카르나틱 국왕의 말에 군주들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전쟁에 드래곤들이 모두 참전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가장 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는 아직까지 어떠한 전장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에인션트로 추정되는 다른 두 마리의 드래곤들과 함께 말이지요.
따라서 현재 참전중인 에인션트급 드래곤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가 유일합니다. 물론 우리 군대는 베르키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지요.
펠루시아 산맥과 접경지역을 이루고 있는 칸두라스 왕국. 그 왕국을 무너뜨리는데 가장 혁혁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그리고 그는 가장 활발히 활동하며 인간들에겐 이미 대항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드래곤이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들은 군주들 중에는 암암리에 어금니를 질끈 깨무는 이들도 있었다.
현재 크라누스는 자신의 레어에 머물며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대륙과의 바닷길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해저의 조류와 각종 소용돌이, 그리고 공간이동을 차단하는 마법진을 계속해서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놈의 마나 소요량은 전장에서 활동중인 다른 드래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정보부에서 조사한 바로는…….
잠시 말을 끊은 세르게이는 정색을 했다.
앞으로 약 십 년 정도가 지나면 놈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면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를 필두로 다른 드래곤들이 차례대로 수면기에 들어갈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놈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잠깐 희망의 싹을 틔웠던 군주들의 얼굴이 다시 절망감으로 암울해졌다.
자리에 일어서 있던 카르나틱 국왕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시, 십 년을 어떻게 버틴다는 말이오? .
드래곤과 오크의 연합군 앞에서 인간의 군대가 십 년을 버틴다는 것은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아니 오크의 보충병이 추가되는 삼 년 후부터는 전세가 급격히 역전될 것이라는 것이 일선 지휘관들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십 년을 버티라니……. 대부분의 군주들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세르게이의 태도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운명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10년을 버텨내야 합니다. 어차피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들은 멸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트루베니아 인구의 반이 전사하더라도 이것은 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긴장한 듯 한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지원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십시오. 오크 보충병들이 투입될 때를 대비해서, 검을 들 수 있는 자라면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징집하여 훈련시키십시오.
오직 그 길만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세르게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말에 군주들의 얼굴은 여지없이 굳어가고 있었다. 단 한가지, 아르카디아 대륙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하지 않은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트루베니아 대륙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한 마디로 심각한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뎅 뎅 뎅
맑디맑은 종소리가 시가지를 휘감으며 울려 퍼졌다. 종소리와 함께 펠드리안의 아침이 밝은 것이다. 평상시라면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일 때였고 종소리는 정확히 그 시간을 알린다. 하지만 이제 종소리의 의미는 한참 변질된 지 오래였으니…….
시민들은 물론이었지만 특히 성벽 수비병들에게는 이 종소리가 더욱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종소리는 병사들이 목숨을 하루 더 이어나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처럼 오크 유격대의 습격이 빈번한 시기에 성벽 수비병들의 목숨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자고 나면 어김없이 여러 개 수비 분대가 해체되어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룻밤에 동료 병사들이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공포의 밤이 계속해서 이어졌던 것이다.
용케 살아남았군, 하는 말이 병사들에겐 이젠 일상적인 아침 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상황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증원되는 오크 유격병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이어지는 공습에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꺾여만 갔다.
하지만 펠드리안의 중심부에 위치한 궁성은 성벽 근처와는 대조적으로 평온하기만 했다. 워낙 경비망이 엄밀했기 때문에 유격병들은 도저히 이곳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크들은 대부분 성벽 근처에서 요격되어 싸움을 벌이다 죽어갔다.
그 때문인지 이곳 궁성에 근무하는 근위병들의 일상은 성벽 수비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궁성 정문을 경비하는 수십 명의 근위병들. 깨끗하게 닦여진 그들의 갑주에는 평온함을 증명하듯 전혀 전투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았다. 다만 종소리가 울려 퍼짐과 함께 궁정 내부에도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궁정 내부의 한 장소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얼굴에 앳된 기색이 만연한 젊은 남녀들이었다. 다소 우람한 체구에 약식 갑주를 걸친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푸른 색 로브로 몸을 감싼 호리호리한 청년들도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아카데미의 수련생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준비해온 검이나 책 등을 소지하고 자신이 교육받을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후대를 키워내는 교육이라 자부할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미래가 암울할 때라도 교육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행해졌다.
참혹한 전장에서 쉴새없이 병사들이 죽어나갈지라도 이들 학생들은 튼튼한 방어진이 쳐진 곳에서 안심하고 교육에 열중해 왔다.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인 것이다.
펠드리안 아카데미의 마법 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교수 중 하나인 드로이젠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비쩍 마른 왜소한 체구였지만 눈빛이 무척 인상적인 노인. 드로이젠이란 이름을 가진 마법학부의 교수는 지금 아카데미 건물의 강의실에서 곧이어 있을 수업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법 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모두 챙겨 책상 위에 늘어놓은 뒤 그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그곳으로 수업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건물로 들어오는 장면이 비쳐졌다. 잠시동안 그들을 주시하던 드로이젠의 입에서 갑자기 한탄이 터져 나왔다.
트루베니아의 앞날이 정말 걱정이군. 정작 배워야 할 학생은 전쟁터로 징집되어 가고, 전혀 쓸모 없는 놈들만 남아 있으니…….
아직까지 학생들이 강의실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드로이젠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가슴 속 응어리가 터져 나왔다.
이미 이카롯트는 썩었어. 정작 마법에 자질이 있는 학생들이 귀족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전장으로 나가야 하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드로이젠의 뇌리에 불연 듯 서글픈 생각이 떠올랐다. 불연 듯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후대를 위한 교육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해진다.
이것은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건국이념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여러 유사종족들을 누르고 번영을 누리고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이 이념의 실천에는 전혀 잘못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념이 지금 이 카롯트에선 현격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징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원칙. 이카롯트에서 이미 이 원칙은 산산이 깨어진 지 오래였다.
그것은 바로 귀족들의 편협한 욕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전황. 이미 평민들은 물론이오 심지어 귀족들의 가문에까지 징집대상이 확대된 상황이었다. 징집 명령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급 귀족들은 아들딸들을 대거 아카데미에 위장 입학시켰다. 전장에 나간다면 죽을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막대한 뇌물은 물론, 각종 인맥까지 대거 동원해서 일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마나에 전혀 소질이 없는 학생들이 마법 학부에 입학했다.
심지어 기사 학부에도 여학생들이 심심지 않게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물론 학부의 정원은 엄격히 정해진 상태. 다시 말해 그들 때문에 정작 입학해야 할 학생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드로이젠은 바로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학부의 많은 교수들이 그 조처에 반발하고 나섰고 당연히 드로이젠도 그 대열에 끼여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이제 그것을 거부할 만한 담량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그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고 나선 동료 교수들이 죄다 워 메이지(War mage)로 징집되어 떠나간 뒤, 그는 두 번 다시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할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체념의 빛을 띄워 올리는 그의 눈동자에 하나씩 들어오는 학생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마치 전쟁터의 상황과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재잘거리며 들어오는 학생들. 물론 그들 중 태반 이상이 건성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이었다.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피해온 귀족의 아들딸들 말이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드로이젠은 어느새 교육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탓에 강의실 뒷문에 서 있는 왜소한 체격의 근위병 하나가 연신 눈을 번뜩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곧 수업이 시작되었다. 마법사이기에 앞서 타고난 학자답게 드로이젠은 곧 강의에 몰두해 들어갔다.
대기 중에는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진 마나가 분포한다. 바로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원소의 속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차례대로 나열하면 물, 불, 바람, 흙, 나무.
전기 그리고 철(鐵), 혹은 금속이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원소도 있겠지만 일단 그것은 제외하고 설명하겠다.
강의실 안은 곧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눈빛을 번뜩이며 드로이젠의 입을 주시했다. 그 모습에는 단 하나의 지식이라도 습득하겠다는 열의가 역력히 배어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에 몰입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드로이젠 교수가 열심히 강의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애초에 수업에 관심이 없는 양, 자기네끼리 속닥거리며 귀엣말을 나눌 뿐이었다. 목청이 터져라 설명하는 드로이젠에겐 당연히 힘이 빠질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무라봐야 들어먹지도 않을뿐더러 괜히 곤욕을 치를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미 그들에 대해 관심을 끈 상태였다. 어쨌거나 그 아이들의 뒤에는 엄청난 배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노릇.
바로 고위급 귀족인 부모들 말이다.
마법의 실현에는 바로 이 다섯 원소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사용된다. 다시 말해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나를 재배열하는 것이 바로 마법의 실현인 것이다. 먼저 기본적인 공격마법이며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파이어 볼(Fire ball)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시작하겠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학부의 교육은 전적으로 공격계열 마법에 주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만에 하나 전쟁이 이곳까지 확대될 경우 이들 마법 수련생들 역시 징집될 것이 확실했으며 그렇게 된다면 이들이 전장에서 워 메이지의 역할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로이젠은 강의를 해 나가면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귀족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 자식들만은 빼돌릴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파이어 볼은 원천적으로 화염계열 마법이다. 당연한 말로 이 마법을 실현시키는 데는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동원된다. 물론 대기 중에서 마나의 비율을 따져 본다면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가장 희박한 편이며 그것을 재배치하는 것도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파이어 볼은 모든 공격계열 마법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마법이다. 그 이유에 대해 누구 알고 있는 학생이 있나?
드로이젠은 고개를 돌려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화들짝 놀라 책으로 얼굴을 가리는 학생이 몇 명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모른 체 했다. 지적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은 이미 몸으로 체득한 상태였으므로……. 곧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해 왔다.
그것은 화염계 공격이 가장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다섯 원소 중에서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가장 파괴력이 강하며 또한 불 자체가 소멸을 상징하는 원소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답이다.
드로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흡족한 답변이었다.
마틴의 말처럼 공격 마법 중에서는 화염계열 마법의 위력이 가장 뛰어나다. 물론 고써클로 올라간다면 수계(水系)나 풍계(風系) 마법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낮은 써클로 마나를 구동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니 이해하기 바란다. 그럼 이제부터 파이어 볼을 구성하기 위해 마나를 재배열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다.
드로이젠이 열을 올리며 강의를 시작하자 학생들의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물론 수업에 뜻이 없는 학생들은 곧 딴 짓을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강의실 안에서 가장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자는 학생이 아니었다. 강의실 뒷문에 버티고 서 있는 한 명의 근위병.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핼버드를 들고 있는 병사가 누구보다도 더 강의에 몰입해 있었다. 물론 그의 이름은 데이몬이었다.
'놀랍군.'
깊이 눌러쓴 투구가리개 사이로 연신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 눈동자는 드로이젠 교수의 입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한 마디의 설명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벌써 데이몬이 수업을 들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베니테스의 배려로 학부 강의실 근무를 부여받은 뒤 그는 즉시 이곳에 배치되었다. 물론 오크의 습격으로부터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의실 내부에서 직접 근무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질문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일단 교수들의 강의하는 내용을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집념으로 그는 열심히 암기하고 또 암기했다. 그 결과 데이몬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마법이란 학문이 결코 만만하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물론 고등 과정을 진행하는 탓에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데이몬에겐 정말 버겁기 그지없는 강의였다. 또한 마법 교육에 사용되는 전문 용어들 중에는 데이몬이 모르는 단어도 허다했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암기에 열중했다. 어쨌거나 힘겹게 얻은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는 다섯 시간마다 이루어지는 교대마저 마다하고 강의를 청취했다.
물론 동료 근위병에게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당초 마법에 대한 관심이 없는 근위병들로써는 다섯 시간동안의 근무가 지겹기 그지없던 참이었다. 그 증거로 데이몬과 함께 근무를 서고 있는 근위병은 연신 하품을 해 대고 있었다.
묵묵하게 서 있기가 지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강의를 암기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마법에서 써클이란 곧 마나 배열을 하는 횟수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끌어 모은 마나를 단 한 번 재배치 할 경우 우리는 이것을 1써클이라 칭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을 줄 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
이곳에 모인 마법 수련생들은 대체적으로 1써클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드물게는 2써클의 유저(user)도 있었지만 드로이젠은 1써클의 마스터(master)나 엑스퍼트(expert)를 기준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귀족 자제들 중에는 전혀 마나에 문외한인 학생들도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들은 애당초 수업내용 자체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데이몬에게 이것은 무척 중대한 난관이었다. 드로이젠 교수의 강의는 기초적인 마법 지식이 있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그저 암기만 할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하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데이몬의 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단 10년 사이에 천자혈마공과 그토록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는 호조 사용법을 대성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뛰어난 데이몬의 오성도 마법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랜 시간 트루베니아 대륙을 지배해 온 마법은 그 역사만큼이나 심오하기 그지없는 학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그저 드로이젠의 강의내용을 머릿속에 계속 주워담을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으로 1써클과 2써클의 파이어 볼은 두 배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마나를 한 번 재배열하는 것과 두 번 재배열하는 것은 위력에 있어 엄청난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시전자가 2서클의 엑스퍼트라면 파이어 볼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개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하나의 파이어 볼을 형성하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오, 두 번째는 동시에 두 개의 파이어 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캐스팅 시간이 늘어나면 더 많은 파이어 볼을 만들어 날릴 수 있겠지만 그 시간동안 적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정립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무척 전문적인,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론들이 나열되자 학생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갈려 버렸다. 정신 없이 집중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책상 위에 엎드려 곯아떨어진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데이몬도 투구 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을 번뜩이며 열심히 암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속 서 있은 탓에 다리가 저려왔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세 시간에 걸친 드로이젠의 강의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내겠다.
수업종료를 선포하자 학생들은 제각기 책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 대부분은 실습을 위해 마법 실험실로 향했다. 심지어 강의가 지겨웠다는 듯 인사도 없이 내빼는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벌써 도망친 패거리들에 비하면 그들은 신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저런 학생들의 행태를 지켜보며 드로이젠은 주섬주섬 교재를 챙겼다. 가장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불연 듯 누군가가 드로이젠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인가?
그가 강의실을 지키는 근위병이란 것을 알아차린 드로이젠이 의아한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근위병이 자신에게 용무가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근위병은 바로 데이몬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강의내용 중에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염치 불구하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강의내용?
드로이젠의 눈이 커졌다. 경비 임무를 맡은 근위병이 설마 자신의 강의에 관심을 가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드로이젠이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데이몬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물론 그 의심에는 이유가 있었다.
통상적으로 검술과 마법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검술은 오로지 육체적인 단련만을, 마법은 정신적인 수양에 극도로 치중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학부의 수련생들은 수련 과정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기사 학부에서 검술을 익히는 학생이 흥미를 잃었다고 마법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위병의 행동은 드로이젠에겐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일단 근위병이란 어느 정도의 검술을 익힌 검사만이 배치되는 자리였고, 그렇다면 분명 마법 쪽에는 문외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검이란 외길을 판 검사가 이처럼 어려운 마법수업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드로이젠은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궁금한 것을 말해보게.
데이몬은 무척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제가 궁금한 것은 바로 마나를 재배열하는 방법에 관해서 입니다. 또한 각 속성을 가진 마나를 끌어 모으는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요?
드로이젠의 얼굴에 언뜻 실망감이 어렸다. 근위병은 수련생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초적인 상식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수업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기분이 좋아진 터라 드로이젠은 근위병에게 설명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이 갸륵했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수업시간에 곯아떨어진 학생들에 대한 반감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좋네. 시간상 모두 설명해 줄 순 없지만 간략히 알려주겠네.
드로이젠은 데이몬이 질문했던 점에 대해 세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물론 마법에 관심을 가진 특이한 근위병에게 호기심이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있었기에 그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근위병의 의문점을 풀어 줄 수 있었다.
비록 마법의 방대한 내용에 비하면 마치 티끌 같은 분량이지만 예상치 못한 드로이젠의 호의는 데이몬에게 다소나마 마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 시간 남짓 개인 교습을 받은 데이몬은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교수님.
뭘? 배우겠다는데 도리가 있나? 다만 이곳 교수들 중에 자네에게 설명을 해 줄만한 마법사는 거의 없을 걸세. 특히 학장인 가필드 교수는 무척 꼬장꼬장한 영감이니 아마 그에겐 질문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궁금한 점이 있다면 상황을 보아가며 나에게 질문하도록 하게.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르쳐 주겠네. 알겠나?
기분이 좋아진 드로이젠은 데이몬에게 세세하게 주의사항까지 일러 주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고 드로이젠은 만족한 표정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다른 근위병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에 관심을 가진 근위병. 정말 별종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 어느덧 한 달이 또 지나갔다. 오크의 대 공습 시기가 임박할 때가 되었지만 데이몬은 전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마법 학습에 몰두해 있었다.
강의가 있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 없이 근무를 섰고, 교수들의 강의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리에 주워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데이몬의 좌절감은 커져만 갔다.
기초 지식 없이, 그저 훔쳐들은 지식만으론 마법이란 학문을 공부하기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마법에 대해 배운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마법의 개념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즉 훔쳐 배운 지식만으로 익히기에 마법이란 학문은 정말 난해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을 배우려는 수련생들은 대부분 고위급 마법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철저히 개인교습을 통해 마법을 익히게 된다. 이것은 마법사를 키워내기 위해 트루베니아에서 오래 전부터 정립되어 온 방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처럼 여러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의하는 방법이 그리 큰 효과가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이카롯트 제국의 수뇌부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로썬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교육할 만한 인원이 태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 터라 마법 학부에서 교육받는 수련생들의 성취는 정말 더디기 그지없었다. 물론 훔쳐 배운 지식에 일관하는 데이몬에겐 더욱 진전이 없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나마 데이몬이 더 이상 강의조차 청취할 수 없는 사건이 어느 날 일어난다. 사건의 발단은 마법 학부의 학장인 가필드 교수가 직접 수업에 나선 데부터 시작된다.
오늘은 전격계 마법인 라이트닝 볼트에 대해 수업할 시간이다. 물론 내가 누군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을 줄 안다.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는 노 마법사.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 성격이 무척 깐깐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마법 학부를 책임지는 학장 가필드였다. 학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학장이 직접 강의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가필드 학장에게는 지금의 사태가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젠장. 학장인 내가 어째서 학생들에게 강의나 해야 하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전 다수의 교수들이 워 메이지로 징집되어 간 터라 학생들을 가르칠 인원이 현저히 모자랐고, 그 덕에 가필드 학장마저 강의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그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궁정 마법사인 베니테스와 맞먹는 7써클의 엑스퍼트로써 트루베니아를 통틀어 백 명도 되지 않는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라선 톱 메이지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전력을 가진 가필드가 고작 1써클에서 헤매는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으니……. 하지만 징집되기는 싫었던 터라 가필드는 상념을 지우고 강의에 들어갔다.
라이트닝 볼트란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각종 속성의 마나들 중, 전기의 속성을 가진 마나만을 골라 한 차례 재배열한 뒤 쏘아내는 공격마법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1써클 마법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써클이 올라갈수록 위력이 점점 배가되는 강력한 공격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 2써클의 마법인 체인 라이트닝 역시 전개하는 과정은 라이트닝 볼트와 전혀 차이가 없다. 다만 같은 시간에 마나를 두 번 재배열하는 데서 위력의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강의실의 뒤에는 여전히 데이몬이 미동도 없이 서서 강의를 청취하고 있었다. 벌써 두 달째 강의를 훔쳐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학생은 없었다. 물론 얼굴가리개를 깊숙이 눌러써서 용모를 분간할 수 없는 탓도 있었지만 그가 워낙 조용히 지냈기 때문에 존재감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학생들보다 오히려 더한 열의로 강의를 듣고 있는 데이몬. 하지만 오늘따라 강의의 내용이 유난히 어려웠으니……. 투구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엔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답답하군. 마나를 재배열하는 과정은커녕 심지어 끌어 모으는 것도 불가능하니…….'
물론 가필드 학장의 강의는 평소에도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대부분 1써클을 상회하는 실력의 학생들일지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판인데 기초 지식이 없는 데이몬이 알아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점점 조바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냥 단순히 암기만 하는 것도 이미 한계에 달한 상황, 어떻게 해서든 개념을 이해해야만 암기했던 지식에 적용해서 맞춰볼 것 같았다. 그런 데이몬의 조바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가필드 학장은 아랑곳없이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는 한 지점에 파괴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 많이 사용하는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이나 매직 미사일은 불특정다수의 목표물, 다시 말해 광범위한 표적을 공격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하지만 라이트닝 볼트는 다르다. 이 마법의 목적은 오직 하나, 즉 적의 지휘관이나 중요한 요인들을 요격해서 전투불능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럼 이제부터 라이트닝 볼트에 사용되는 마나를 재배열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다.
드로이젠 교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학생들 중에는 수업에 관심 없는 듯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정신을 집중해서 가필드 학장의 강의에 몰두했다. 그 때 강의실 내부로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저,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마나를 재배열하기 전, 어떻게 해서 대기 중에서 전기의 속성을 띠는 마나만을 끌어 모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질문자에게로 향했다. 일단 질문의 내용이 이곳에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부분이었기에 놀란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가필드 학장의 강의를 끊어먹을 정도로 담이 큰 학생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질문을 던진 자가 학생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근위병이잖아?
놀란 학생들의 숙덕거림 속에 가필드 학장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질문을 던진 자가 강의실 뒷문에 서 있던 근위병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눈초리엔 노기가 충만하게 서려 있었다. 강의의 맥을 끊은 이가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것이다. 곧 추상같은 질문이 데이몬에게 쏘아졌다.
자네는 누군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데이몬은 떠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는데 이렇게 학생들의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 제 이름은?
자네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다. 자네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물은 것이다.
데이몬은 일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모르는 것을 물어본 것뿐인데 교수가 무척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냉랭한 가필드의 질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네는 근위병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근위병의 임무수칙을 한 번 말해보게.
가필드의 퍼런 서슬에 데이몬은 어쩔 수 없이 근위병의 근무수칙을 읊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는 이곳에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오크 유격대의 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또한
근무수칙을 들으면서 가필드 학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데이몬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투구를 벗게.
예?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란 말이야.
짜증 섞인 말투에 데이몬은 얼른 투구를 벗었다. 질책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강의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그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곧 데이몬의 흉물스러운 얼굴이 학생들 앞에 드러났다. 그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경악성.
헉. 세, 세상에…….
이방인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저런 추악한 얼굴이…….
심지어 데이몬의 얼굴을 본 여학생들은 비명까지 질러대고 있었다.
꺄아악.
그녀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번도 이런 추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런 생김새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정말 운명의 장난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데이몬의 몰골에 다소 놀랐던 가필드 학장은 곧 특유의 싸늘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데이몬과 함께 근무를 서는 동료 근위병을 손짓으로 불렀다. 앞문에 서 있던 근위병이 얼른 가필드에게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자가 근위병이란 것이 확실한가?
그, 그렇습니다.
놀랍군. 이방인을 근위병으로 쓰다니……. 그것도 강의실 근무를 말이야. 그건 도대체 누가 내린 결정인가?
그 근위병은 데이몬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곧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배, 배치는 궁정 마법사이신 베니테스님께서…….
베니테스가?
가필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자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가 저런 추악한 몰골의 이방인을,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학부에 배치한 데 대해 저의가 무척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는 베니테스와 별달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한 스승 밑에서 함께 수련한 동기생 사이이긴 하지만 베니테스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직책인 궁정 마법사를 맡았다는 사실은 그의 시기심을 극도로 자극했고, 그 탓에 가필드는 베니테스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가필드는 팔짱을 낀 채 손으로 턱을 괴었다. 물론 어떠한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저 이방인을 계속 강의실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저런 추악한 몰골을 가진 근위병이 자신의 학부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가필드에겐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것도 밉살스런 베니테스가 직접 천거한 자라 하지 않았던가. 그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가리게. 그리고 두 번 다시 강의를 방해하지 말도록 주의하게.
아,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반색하며 얼른 투구를 덮어썼다. 강의실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핼버드를 다시 집어든 데이몬은 뒷문으로 걸어가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가필드는 눈매를 좁히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수업을 재개하겠다.
학생들 앞으로 걸어간 가필드는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술렁임도 잠시 학생들은 곧 가필드의 강의에 몰입해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도 몇몇 학생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돌려 데이몬을 훔쳐보고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였다.
세상에 저런 얼굴이 있다니……. 점심 먹은 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혹시 근위병이 아닌 첩자 아닐까? 진짜 근위병을 죽이고 갑옷을 빼앗아 잠입한 첩자.
그럴 리가?
아니야. 그럴 수도 있어. 넌 지금까지 이방인이 궁성 근위병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니?
하긴.
비록 낮게 속삭이긴 했지만 학생들의 대화소리가 그대로 귀에 들어왔으므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추악한 용모는 정말 어딜 가나 말썽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비웃음엔 면역이 된 상태였으므로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강의를 청취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최소한 암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강의내용을 머릿속에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가필드의 속마음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했다.
그 날의 근무를 모두 마친 데이몬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근위병 대기실로 향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 근위병은 먼저 대기실로 간지 오래였다. 물론 동료 근위병들이 자신과 함께 다니는 것을 꺼린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는 데이몬이었다. 비록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나 왜소한 체구에 불룩 솟아오른 등을 보면 한 눈에 꼽추란 것을 알 수 있을 터,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근위병들이 그런 자신과 함께 걷는 것을 좋아할 리 없을 터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직 하나, 마법만 배울 수 있다면 데이몬은 그 어떤 수모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미 강해지기 위해 마법에 모든 것을 건 데이몬이었다.
종일 서서 근무한 탓에 다리가 무척 아팠지만 데이몬은 내색하지 않았다. 걸친 갑옷이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에 다리의 피로도는 더욱 심했다. 족히 오십 근(30kg) 정도는 나갈 듯한 갑옷이었으므로 다섯 시간의 근무로 힘이 빠진 지금 데이몬은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겨웠다.
멍청한 것들. 내가기공엔 이런 갑옷이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어.
투덜거리며 걷는 데이몬의 눈에 멀찍이 근위병 대기실이 보였다. 일단 그곳에 가서 무기와 갑옷을 반납하면 데이몬의 하루 일과는 끝나는 것이다.
두 달 가량 해 왔던 근위병 생활은 성벽 수비병 시절과 판이하게 달랐다. 의, 식, 주 모든 면에서 성벽 수비병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근사한 음식에 화려한 복장, 그리고 두 명에 하나씩 주어지는 깨끗한 숙소. 물론 같은 방을 쓸 병사가 없는 탓에 그는 숙소를 홀로 독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차이가 나는 것은 근무 시간이었다.
꼬박 한 달을 성벽에서 지새는 경우가 허다했던 성벽 수비병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근위병들은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같은 병사이면서도 이처럼 처우가 다른데 대해 데이몬조차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적어도 마법만 배울 수 있다면 그 어떤 조건도 감수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근위대장의 얼굴이 들어왔다. 평소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미미하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홀가분한 짐을 던 듯한 표정이었다. 살짝 목례를 한 데이몬은 핼버드를 반납하기 위해 무기고로 가려 했다. 그 때 근위대장이 말을 걸어왔다.
갑옷과 무기를 반납한 뒤 내 집무실로 오게.
무슨 용무인지는 몰랐지만 데이몬은 묵묵히 갑옷과 무기를 반납했다. 그런데 집무실에 들어선 데이몬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화들짝 놀란 데이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명령서가 내려졌네. 자네를 근위병 직에서 박탈하고 원래대로 성벽 수비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서일세.
근위대장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데이몬을 평소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근위대장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용모가 추하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데이몬을 쫓아낼 궁리만 하고 있던 근위대장이 아니던가?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이것은 세르게이 공작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서일세. 아마 가필드 학장으로부터 항의가 들어갔던 모양이야.
그때서야 데이몬은 정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세르게이가 정황을 알고 결코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린 데이몬의 귓가에 근위대장의 느물거리는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베니테스님께 달려가 보아도 별 수 없을 걸세. 이미 명령서에 공작전하께서 직접 사인을 하셨으니 그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거야.
이렇게 이별하다니 애석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내 생각인데 자네는 결코 근위병이란 직책이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성벽 수비병으로 가서 용맹을 떨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네. 자고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야.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의 눈에 점차 핏발이 돋기 시작했다. 이죽거리는 근위대장의 태도에 분통이 서서히 치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마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생각에 그는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대장은 용케 그 기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그는 능력보다 눈치와 아부 하나로 이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눈치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는 데이몬이 발작하기 전에 얼른 손을 뻗어 탁상 위의 종을 울렸다.
찌릉.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문이 덜컥 열렸다. 그리로 완전 무장을 한 근위병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상황을 보아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살심을 떠올리자 어김없이 발작하는 칠종단금술. 그에 따른 고통 때문에 그는 사력을 다해 통증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근위대장을 어쩌겠다는 결심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데이몬을 보며 근위대장은 조소를 머금었다.
행여나 허튼 짓 하지 않기를 바라네. 물론 한 때 부하였던 자를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말일세.
간신히 통증을 이겨낸 데이몬은 매서운 눈초리로 부대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칠종단금술이 있는 이상 상태에서 그는 결코 살인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화풀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좋다. 원하지 않는다면 가 주겠다.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고,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방법은 있을 터.'
어떻게 해서든 마법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데이몬은 천천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뒤로 부대장의 비웃음 섞인 일성이 들려왔다.
같이 근무하던 57경비조원은 몽땅 징집되어 전장으로 떠났으니 아마 다른 근무지를 찾아야 할 것이야. 성벽 수비대장에게 가보면 가장 적합한 보직을 알선해 줄 테니, 그럼 잘 가게.
뜻하지 않은 소식에 잠시 걸음을 멈춘 데이몬은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또한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점차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궁성을 나온 데이몬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수비대가 있는 성벽으로 가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항명을 각오하고서라도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기로 작정한 것이다.
“어차피 이곳의 언어를 완전히 익혔으니 마법사를 수소문하는 일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시내의 주점이었다. 맥밀란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전투에 나갔다가 휴가를 얻은 워 메이지들이 간혹 주점에 와서 술을 마신다는 소문을 들은 때문이다.
그의 눈동자는 모종의 결심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마법을 익힐 것이다. 엎드려 애걸하더라도 상관없다.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나는 강해지고야 말 테니까■■.”
어느덧 데이몬의 뇌리엔 어린 시절부터 당해왔던 숱한 모욕과 질시가 떠오르고 있었다. 데이몬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강했던 시기, 즉 수호마왕군의 총수로 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다. 다시 말해 힘이 있을 땐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지금 상태에선 완전히 물 건너간 상태.
따라서 그가 힘을 얻을 만한 방법은 오직 마법 밖에 없었다. 그 때 데이몬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비록 내공은 잃었을지언정 나에겐 지금까지 익힌 무공의 구결은 기억되어 있다.
그것을 이용한다면■■.”
물론 그의 독문 무기인 호조 사용법을 이곳의 기사들에게 전수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호조 같은 짧은 무기는 중장갑을 걸친 이곳의 기사들에겐 위력이 현저히 반감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엔 배교의 무사들이 익히는 내공법인 수라사령심법(修羅邪靈心法)의 구결이 남아 있었다.
수호마왕군을 키워내기 위해 사준환이 수십 명의 무공교두들을 동원해 만들어낸 속성 내공심법. 그 위력은 이미 수호마왕군의 활약에 의해 증명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내공을 쌓는 속도 면에선 그 어떤 내공심법보다 월등하다 자부할 수 있는 심법이었다.
“이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준다면■■.”
모르긴 몰라도 마법을 배울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백년 전의 크로센 대제가 어떠한 내공심법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수라사령심법을 결코 능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의 행동패턴으로 보아 결코 마도의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수라사령심법은 정파의 그 어떤 내공심법보다도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빠르다.”
물론 수라사령심법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심법이었다. 정파의 내공심법보다 쌓인 내공이 비교적 정순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절정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다소 희박할 것이다. 이것을 익힌 무사들은 십중팔구 마(魔)의 벽에 부딪칠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 문제는 적어도 이곳에선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수호마왕군 무사들의 수준 정도만 된다면 이곳에선 능히 일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러기엔 걸림돌이 있었다. 제반 정황을 떠올려본 데이몬의 이를 으스러져라 꽉 악물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 가증스런 세르게이란 놈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데이몬은 이미 세르게이에게 깊이 반감을 품은 상태였다. 타고난 성정답게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원한 역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는 문제로 심각한 고뇌에 휩싸여야 했다. 하지만 결정은 오래지 않아 내려졌다.
“일단 수라사령심법은 마지막 히든카드로 남겨둬야겠다. 세르게이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노력하다가 안 될 경우에나 생각해 보자.”
마음을 정한 데이몬은 시가지로 걸어 들어갔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며 손가락질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서 펠드리안 시내의 한 주점에 도착한 데이몬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덜컥.
주점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술을 먹고 있었다. 데이몬은 재빠르게 주점 내부를 살폈다. 주점 내부의 사람들 대부분은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었다. 다시 말해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은 실망하지 않았다.
“주점은 많다. 몽땅 다 뒤져보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목을 축이려는 목적으로 데이몬은 바(Bar)로 다가갔다. 감정이 고조되었던 터라 술 한 잔 생각이 절실했던 것이다. 흉물스런 용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되었지만 그는 그저 못 본 체했다. 품속에서 은화 한 잎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자 바탠더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브랜디 한 잔 주시오.”
얼굴을 조금 찡그렸지만 바탠더는 두말하지 않고 병을 꺼내어 술을 따랐다. 술잔을 받아든 데이몬은 독한 브랜디를 단번에 들이켜버렸다. 화끈한 느낌이 식도를 쭉 타고 내려갔다.
“좋군.”
그는 잠시 술맛을 음미하며 서 있었다. 비록 중원의 술과는 맛과 향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그래도 제법 먹을 만 한 술이었다. 그 때 옆에서 갑자기 험악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술맛 떨어지는 놈이군. 이봐 바텐더. 돈도 좋지만 저런 놈을 받아서야 쓰겠어?”
데이몬은 그저 못들은 체 했다. 이미 그는 맥밀란을 비롯한 경비대 동료들과 함께 주점에 서너 번 와 본 경험이 있었고, 이런 곳에서는 저렇게 술에 취해 억지트집을 잡는 놈들이 심심찮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말에 발끈한 것은 바탠더였다.
“이봐 스탠리. 취했으면 고이 막사로 돌아가. 괜히 손님에게 트집잡지 말고■■.”
“손님? 크카카카.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군. 저 몰골을 한 근위병이라니. 어디 실력이나 한 번 볼까?”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좋지 않군.’
상황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겠다는 것을 직감한 데이몬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었다.
비록 갑주는 걸치지 않았지만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근위병의 제복이다.
물론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관계로 근위병들이 일반 병사들에게 극도로 경원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데이몬도 익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저들이 어떠한 트집을 잡아서라도 싸움을 벌이려 할 것임은 안 봐도 뻔했다.
탕.
술잔을 내려놓은 데이몬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덩치가 우람한 병사 하나가 술에 취해 몸을 건들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던 탁자에도 같은 복색을 한 병사들이 이쪽을 주시하며 앉아 있던 상황. 그들의 눈동자에도 적의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듯 했다.
“잘 되었군. 안 그래도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었는데.”
데이몬은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비록 무공을 잃었다지만 위력적인 체술은 여전히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중원에서 그가 사용하던 무기는 극도로 짧은 단병 무기인 호조이다. 그런 호조의 단점을 보완하고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이미 여러 종류의 권법과 각법에 통달한 상태였다. 내공이 없다지만 저까짓 병사 서넛 정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칠종단금술이다. 만에 하나 살심을 떠올린다면 그 즉시 칠종단금술이 발동될 테고, 자신은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다시 말해 살심을 떠올리지 않으려면 오로지 무념, 무아의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공격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