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준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교주님은 이제 본교의 제 19대 교주로 즉위하실 몸입니다. 비록 소교주님과 수호마왕군이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란 것은 속하도 익히 짐작하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교중의 위계질서를 철저히 세워야 할 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결국 독고성은 사준환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수하들을 뒤로 한 채 독고성은 주연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들어가자 수석호법이 무사들에게 다가가서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정말 수고 많았소이다. 그럼 모두들 본좌를 따라오기 바라오. 아마 혀가 놀랄 정도의 미주가효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오.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별 수 없이 수석호법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장과 떨어지는 것이 다소 못마땅했지만 정사대전도 끝난 마당에 별다른 위험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청 안에는 떠들썩하게 주연이 베풀어졌다. 온갖 숙수들이 정성을 들여 요리해놓은 중원 각지의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져 있었고 죽엽청이나 여아홍등 이름만 들어도 능히 알 수 있는 이름난 명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 한 아리따운 시비들까지 말이다. 독고성과 사준환이 들어가자 시비들은 기다렸다는 듯 가무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준환은 독고성에게 연신 음식을 권했다.
자 드시지요. 소교주님.
대, 대단하구려.
평소 미식가로 자부하던 터라 독고성은 서슴지 않고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준환 이하 배교 수뇌부들도 만찬을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의 태도는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무언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준환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할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던 독고성은 미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 말이 정말입니까?
굵직한, 실로 남자다운 음성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수호마왕군의 총대주인 종리령이었다. 그는 지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뚫어지게 앞을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는 수석호법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네. 틀림없는 사실이네.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조금 있으면 그는 이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네.
말을 이어나가며 수석호법은 탁자 밑에 둔 검 자루를 불끈 쥐었다. 상대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종리령은 의외로 빨리 흥분을 가라앉혔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처치해 버리기엔 실력이 아깝긴 하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총사는 제거하기로 굳게 결심하셨으니……. 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본교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있는 상태이네. 하나같이 지존의 심복들인 자들로 말일세. 놈이 살아날 길은 전혀 없어.
고개를 끄덕이던 종리령의 표정이 본래대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검을 쥔 수석호법의 손에 힘이 다소나마 빠졌다. 종리령은 얼굴에 모호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발작했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발작하기 전에 정사대전이 끝나서 말일세.
그런데 소교주를 제거하고 나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그는 하급 교도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일텐데……
수석호법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야. 놈을 처치하고 나서 아마도 이렇게 선포되겠지.
―교주 독고성은 대대로 연성을 금지해왔던 저주받은 마공인 천자혈마공을 익혔다.
따라서 이 무공을 익히는 자는 설사 교주라 하더라도 실각시킨다는 교의 법도에 따라 독고성 교주를 처형했다. 이렇게 말이야.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종리령은 돌연 정색을 했다.
그럼 수호마왕군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세? 그들을 일단 제압해 놓을 생각이네. 지금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에 몽혼약이 풀려 있으니 아마 지금쯤은 모두 중독되었을 것이네. 아무래도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거의 10년을 소교주와 함께 했으니 놈의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졌을 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거하기엔 실력들이 아깝지 않습니까?
비로소 종리령에 대한 의심이 다소 풀린 수석호법은 슬며시 손을 검자루에서 떼었다.
하지만 내력은 잔뜩 끌어올린 그대로였다.
하긴 전 무림에 위명을 떨친 집단이니 그냥 없애긴 아깝지. 혹시 그들 중에 회유할 만한 자가 있나?
고개를 끄덕이는 종리령의 반응에 수석호법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위험인물들이긴 했지만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지닌 실력 하나만은 진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사들을 그냥 죽여버리기는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곽상이나 도일룡, 그리고 천영일 같은 자들은 골수까지 소교주의 심복입니다.
하지만 일반 무사들 중에서 제 입김이 닿는 자가 몇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전력으로 회유한다면 말을 들을 자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래? 반가운 소리구먼.
이제 종리령에게 완전히 경계를 풀어버린 수석호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뭔가 말을 건네려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넌저시 운을 뗐다.
그런데 자네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나? 오랜만에 복귀했는데 처자식과 노모를 한 번 보고 싶을 테지?
잠시 망설이던 종리령은 그러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뭐 이제부터 실컷 볼 텐 데요. 그보다도 급한 일이 있으니 뒤로 미뤄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수석호법은 파안대소를 했다.
크하하하. 과연 지존께서 믿고 맡긴 인물답군. 자네는 분명히 중용될 자격이 있어.
그럼 어디 놈들이 늘어져 있는 곳으로 가 볼까? 자네가 그들 중에서 회유가 가능한 자들을 골라주도록 하게. 그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처치해 버려야 할 테니…….
그럴까요.
밀실에서 담소를 나누던 둘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떨어진 대청에는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몽혼약에 중독된 채 축 늘어져 있을 터였다.
아니?
대청 문을 열어본 수석호법은 혼비백산했다. 몽혼약에 중독되어 늘어져 있어야 할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하나같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음식에 손을 댄 자가 없었다. 그저 부동자세로 자리에 앉은 채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는 음식을 나르던 숙수와 시비들이 안절부절못해 하는 태도로 몸을 떨고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이 휘둥그레진 수석호법의 뒤에서 냉랭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왜? 이상한가? 우리 수호마왕군에게는 하나의 전통이 있지. 그것은 바로 음식을 먹을 땐 모두 함께 한 자리에서 동시에 먹는다는 것이야. 아마도 저들은 내가 오기 전까지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야.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네, 네놈이?
고개를 돌린 수석호법의 눈에 냉랭한 표정을 한 종리령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말마저 떠듬거리던 수석호법은 돌연 검을 빼 들었다.
가, 감히 네놈이 총사를 배신하다니…….
종리령도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추상같은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총사는 배신할 수 있어도 대장만은 어떠한 경우에도 배신할 수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미 나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닐 터, 그의 목숨이라면 충분히 가족과 나의 생명과 바꿀 가치가 있다.
멍청하군. 한낱 만용으로 부귀영화와 가족의 목숨까지 버리다니…….
비로소 상황을 눈치챈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고 있었다. 이미 잘 때도 무기를 손에 놓지 않는 전통을 가진 그들이었다.
급변하는 상황에 수석호법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그 모습을 본체만체 하며 종리령은 내공을 모아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들어라. 총사를 위시한 배교 수뇌부들은 지금 우리 대장을 모살하려 하고 있다. 그것도 비열한 암습으로 말이다. 대장을 구하려는 자는 지금 즉시 나를 따르라.
그 말에 무사들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대장을 모살한다는 말에 무사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무기를 꼬나쥐고 몸을 날렸다. 종리령은 멍하니 서 있는 수석호법을 본체만체 하며 무사들을 통솔해서 달려나갔다.
비켜라. 네놈 따윌 상대할 시간이 없다.
수석호법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이, 이런 빌어먹을.
물론 대청 외부에는 총단 소속 무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이름도 드높은 수호마왕군을 막는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석호법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환영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대청. 이곳은 한창 주연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긴장을 풀어버린 채 거나하게 취한 독고성에게 사준환이 가까이 다가왔다. 말없이 술을 마시던 수뇌부들이 바짝 긴장했지만 독고성은 미처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이 지나면 약속대로 교주님께 제 모든 권한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주님은 명실상부하게 배교의 제 19대 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정말 감회가 새롭구려.
독고성은 반쯤 풀린 눈동자로 사준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성격상 도저히 제정신으론 감사를 표할 수 없었기에 술기운을 빌리기로 작정하고 마음껏 마셔버린 독고성이었다.
축하의 의미로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꺼억. 총사가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지요.
독고성의 앞으로 다가온 사준환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독고성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무릎을 꿇은 채 사준환은 충심이 절절히 묻어나는 어조로 비장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교주님은 제 지존이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아니오. 난 감당할 수 없소.
당황한 독고성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음 속에 구상해 놓은 감사의 말을 떠올리며 사준환에게 다가갔다. 그를 부축해 일으킨 다음 마음 속의 말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난 이미 당신을…….
사준환을 안아 일으키려던 독고성은 채 말을 잊지 못했다. 따라서 사준환을 앞으로 부모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겠다는 말은 채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크윽.
단전을 파고드는 차디찬 느낌에 독고성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을 단전 부분으로 가져갔다. 들어올린 손엔 선혈이 질펀하게 묻어 있었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봐 왔던 선혈. 그것이 그의 손을 흠뻑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독고성의 눈동자가 한껏 뜨여진 채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사준환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의 얼굴은 지금은 판이하게 변해있었다. 사악한 미소가 감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간교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독고성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귀로 돌연 사준환의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한없이 맑던 그의 음성은 이제 어조마저도 완연히 변해있었다.
수고했다. 독고성. 이제 너의 임무는 모두 끝난 것 같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총사
사준환은 진득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의 뒤에는 어느새 배교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실세들이 모조리 다가와 시립해 있는 상태였다.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내가 정리해 주지. 정확히 말하면 넌 소모품으로 키워진 것이다. 철저히 나의 기반을 다져주기 위해 만들어진 소모품. 이제 정사대전이 끝난 마당에 더 이상 널 살려둘 필요가 없겠지?
내 계획대로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일찍 발작했다면 내가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과연 소림성승이 직접 시술한 금제라 다르긴 하군.
무, 무슨 소리지?
사준환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네가 익힌 천자혈마공은 원래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무공이다.
비록 널 10년 만에 개세고수로 탈바꿈시키기는 했지만 정상대로라면 넌 5년 이내에 오로지 살육 밖에 모르는 혈귀로 변모했을 것이다.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발작해서 말이다.
처, 천자혈마공이?
그렇다. 이제 알겠는가?
비로소 상황을 짐작한 독고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떨리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 그러려면 왜 날 굳이 소림사에서 빼내어 왔지?
희생양이 필요했지. 나 대신 정파 무림과 피 터지게 싸워 줄,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내 입지를 다져줄 희생양 말이야. 아! 물론 뿌린 씨를 거두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말이야.
뿌린 씨라니…….
사준환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 아비가 죽고 네가 소림사에 억류된 연유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짐작한 적이 없나?
……?
전대 교주 독고무기는 널 얻는 와중에 애석하게도 부인을 잃었지. 그 때문에 그래서인지 너 하나만은 정말 끔찍이도 위하더군. 그것이 무척 보기 싫더군. 그래서 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는 너마저 없애기로 마음을 먹었지.
정말 태연자약하게 설명을 해 나가는 사준환이었다. 그러나 내용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니…….
먼저 난 믿을 만한 수하를 시켜 어린 널 납치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수하는 어김없이 계획을 실행했다. 널 잃어버리자 독고무기 놈은 말 그대로 광분하더군. 당시 널 경호하던 무사와 시비들을 모조리 처치해버렸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결국 보다못해 네가 있는 장소를 살며시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이미 그곳에 정파 놈들이 그를 척살하기 위해 빈틈없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바로 내가 전해주었다는 일까지도 말이야. 멍청하게도 독고 무기는 달랑 수호마왕군 열 명만을 대동한 채 널 찾기 위해 떠나갔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지.
묵묵히 듣고 있던 독고성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준환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만큼 충격 역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런 독고성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사준환은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네놈이 살아남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또한 소림성승에 의해 칠종단금술을 시술 받게 된 것 역시도 말이야. 멍청한 정파 놈들. 모든 게 내가 안배한 것인 줄도 모르고 널 내세워 포로 교환을 하자고 제의하더군. 그래서 난 아주 가볍게 묵살해버렸지.
사준환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독고성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받고 있는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대변해 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널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네가 떠오르더군. 또한 널 이용한 계획과 함께 말이야. 그래서 난 지체 없이 도위청을 파견했지. 물론 거기에는 소림성승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야.
이제 독고성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소림성승의 시해는?
바로 그렇지. 성승은 불운하게도 도위청의 손에 의해 이승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지.
물론 그의 죽음은 철저히 너의 소행으로 위장된 채 말이야.
이놈.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독고성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시큰하는 느낌과 함께 힘이 모조리 빠져 버렸기 때문에 독고성은 도로 자리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것은?
왜? 놀랐나? 물론 내가 이처럼 비밀을 털어놓는 것을 보면 거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고 봐야겠지? 단전이 파괴된 데 이어 넌 이미 칠보단장산을 복용한 상태다. 소림성승을 잡은 바로 그 약 말이다. 물론 그것말고도 몽혼약과 산공독까지 음식에 듬뿍 발라놓았지. 맹수를 잡는데 그 정도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어?
내력을 도저히 끌어올릴 수 없는데 이어 정신마저 혼미해져 오는 상황이었다.
독고성은 조금 전까지도 사준환에게 끝없이 감사했던 자신에게 저주마저 퍼붓고 있었다. 그토록 믿었던 존재. 심지어 그에게 배교 교주 위까지 양도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자신이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기에 그는 억지로 음성을 쥐어 짜냈다.
나, 날 죽인다면 보, 본교 교도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사준환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물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이미 나에겐 합당한 명분이 있다.
명분?
네가 천자혈마공을 익혔다는 증거. 바로 그것이지. 아! 아직 모르고 있겠군.
천자혈마공을 연성하면서 네가 먹은 정혈이 어린양의 것이 아니라 동남동녀들, 그것도 비밀리에 납치한 교도의 자식들의 것이란 사실을…….
독고성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것은 지금껏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들의 썩어 가는 시체는 내가 잘 보관해 두었다. 조만간, 아마도 널 처치한 직후가 되겠지만 그 시체들은 교도들에게 널리 공개될 것이다. 바로 널 처치한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독고성은 침음성을 울렸다. 그는 말 그대로 완벽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몽혼약 기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중에서도 그는 고함을 버럭 지르며 일어서려 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
하지만 허사였다. 이미 그의 육신은 정신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심지어 암습당한 단전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독고성은 사무치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글렀어.
이제 의식이 한없이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흐릿해진 시선에 사준환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흘러나오는 예기.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거듭 정신을 추슬렀지만 몸은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젠 끝인가?'
독고성은 결국 삶을 체념해 버렸다. 그로써는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외마디 호통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멈춰라. 네놈들이 감히 우리 대장을?
그 음성은 독고성이 익히 아는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종리령이군.'
하지만 독고성은 더 이상 의식의 끈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한없는 나락 속으로 굴러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사준환은 지금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수석호법의 시신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준환의 손에 의한 소행이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대가로 수석호법은 죽음이라는 댓가를 받은 것이다. 사준환은 화를 지체하지 못하고 연신 씨근거렸다.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여겼는데…….
그의 계획은 철저히 맞아 떨어졌고 독고성은 저항능력을 모조리 상실한 채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칼만 들이댄다면 이제 배교는 송두리째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수호마왕군이 난데없이 이곳으로 난입하다니……. 이것은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사방은 온통 시체 천지였다. 대부분이 수호마왕군의 시체들이었지만 반수 이상은 심복들과 경비무사들의 것이기도 했다. 몽혼약에 취해 늘어져 있어야 할 수호마왕군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사준환은 아연해했다. 타고난 책략가인 사준환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은 흉험했다.
외전을 경비하던 경비무사들을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돌파한 수호마왕군은 그대로 대청을 들이쳤다. 그들의 공격은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번개처럼 대청을 들이 친 수호마왕군은 순식간에 독고성을 구한 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정도 실력이면 총단 외곽의 방어진을 돌파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이 이렇게 틀어지다니…….
문제는 수호마왕군 무사들의 무공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다는 데 있었다.
심지어 사준환 자신조차 종리령을 포함한 수호마왕군 무사 다섯과 겨우 평수를 이뤘을 정도였다. 그들의 합격술은 정말 정교하기 그지없었으며 그 때문에 놈들이 늘어진 독고성을 구출해 가는 것을 두 눈 버젓이 뜨고 쳐다만 보아야 했던 사준환이었다.
정말 자신조차 짐작하지 못했을 만큼 수호마왕군의 위력은 가공했다.
이 자리에 모인 심복들 중 실력이 떨어지는 자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겨우 살아남은 심복들조차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상태. 비록 수호마왕군 중 반수를 처치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독고성은 이미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다음이었다. 통제 하에 있는 무력조직들을 부랴부랴 출동시킨 다음에야 사준환은 비로소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이 일을 맡았던 수석호법을 불러 진상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정없이 그를 난도질 쳐버린 것이다.
잡아야 한다. 놈이 살아남는다면 필시 중대한 화근이 될 것이다.
수호마왕군이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독고성을 데리고 도주한 후, 사준환은 지체 없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물론 배교 고수들 중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이 반수 이상이었지만 하급 교도들에게 독고성은 아직까지 하늘이었다. 배교의 장악을 꿈꾸는 사준환으로써는 독고성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둘러 일을 수습해야겠군.
사준환은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계획의 실행에 나섰다. 곧 총단과 각 외부 지단으로 총사 사준환의 직인이 찍힌 서찰이 전서구를 통해 대대적으로 전달되었다.
교주 독고성은 천자혈마공을 익혔다. 천인공노한 연성방법 때문에 대대로 연성을 금지해왔던 저주받은 마공 말이다. 그간 의문 속에 실종되었던 아이들의 행방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났다. 독고성 교주는 가증스럽게도 교도들의 어린 아들, 딸들을 납치해서 천자혈마공을 익히는 도구로 삼았다. 희생된 아이들의 시신은 교주의 연공실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에 나 사준환은 배교의 총사로써 눈물을 머금고 독고성 교주의 실각을 선포한다. 그는 이제 강호 공적으로 만인의 추적을 받게 될 것이며 죽는 그 날까지 척살령은 해제되지 않을 것이다.
포고령을 전해 받은 총단과 지단의 하급 무사들은 아연했다. 정사대전 기간 동안 독고성의 명성이 워낙 드높았던 지라 상황을 알고도 그들은 반신반의했다.
서, 설마 그랬을라구?
아니야. 독고 교주가 그처럼 강해진 배경을 증명하는 데에는 오직 금지된 마공인 천자혈마공 밖에는 없어.
드러난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평소 독고성을 지지하던 교도들조차 더 이상 그를 두둔할 도리가 없어져 버렸다. 사준환의 명령에 따라 숨겨져 있던 동남동녀들의 시신이 백일하에 공개되었다. 일부 교도들이 아이들의 신원을 확인했던 터라 그들로써는 더 이상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그 사체들은 바로 사준환이 납치해서 대법에 투입한 것이다. 대법이 끝난 뒤, 사준환은 아이들의 시신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독고성이 개선하는 날에 맞춰 그의 연공실 지하에다 파묻어 두었다.
그리고 그 처참한 장면은 남김없이 배교 교도들 앞에 공개되고 있었다.
그의 안배대로 모든 정황이 압도적으로 독고성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배교 교도들은 이 사건의 주범이 독고성이란 사실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되었어.
미리 준비해놓은 방법으로 배교 내부의 의혹을 해소시킨 뒤 사준환은 지체 없이 독고성의 추적에 나섰다.
일을 벌이려면 확실히 하라고 했다.
독고성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는 이 사실을 정파에까지 널리 퍼뜨리려는 마음을 먹었다. 물론 연합관계에 있던 마교에까지 전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파천혈마 독고성과 수호마왕군. 그 가공할 무력집단을 처리하려면 얼마만큼의 전력이 손실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사준환은 남의 손을 빌어 그들을 처리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이름하여 차도살인지계 말이다.
파천혈마 독고성이 천명의 동남동녀를 희생시킨 대가로 천마혈마공을 익혔다는 사실과 함께 배교 교주에서 축출되어 쫓기고 있다는 소식은 곧 무림 전체에 남김없이 전해졌다.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마교에서는 이 소식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암묵적으로 독고성을 경계하고 있던 그들로써는 더 이상 반가운 낭보가 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만 가는 독고성의 위명에 대해 마교의 수뇌부들은 심각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그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니 반가울 만도 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대대적으로 고수를 파견 추격대를 지원해왔다. 마교 공식 서열 6위의 쌍수마존 위청을 위시한 총단 고수를 파견한 것으로 봐서 마교에서 독고성을 처치하는데 얼마만큼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독고성에 의해 수많은 고수들을 잃은 정파에서도 역시 추적대를 파견했음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독고성은 정사대전을 치르며 대외적으로 악역은 도맡아가며 맡은 처지, 그에게 문하제자를 무수히 잃은 명문 정파에서는 전폭적으로 고수를 파견해서 독고성의 추적에 나섰다. 그들로써는 배교의 묵인 하에 눈엣가시를 처치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은 소림 제일의 속가제자인 철혈신검 영호명이었다.
철혈문의 신임 문주로써 후기지수 중에서 독보적인 검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신진고수인 그는 독고성에 의해 세상을 하직한 소림성승 혜정의 제자였다. 평소 혜정을 무척 존경하고 있던 영호명이었으므로 당연히 독고성에 대해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사대전 중 그는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독고성을 노렸다. 하지만 무수한 고수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독고성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었는지라 영호명은 그저 사부의 원수를 두고도 쳐다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가 생긴 이상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법. 그는 철검문의 모든 제자를 이끌고 독고성의 추적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독고성은 전 무림의 쫓김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수호마왕군이 무적의 무력집단이라고 하나 그 추적을 뿌리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은 어떠한가?
이미 저희들은 완벽하게 포위 당했습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수하에게서 보고를 받은 종리령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미 수도 없는 악전고투를 치러가며 이곳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도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버린 것이다.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쓸어보았다. 이미 무사들 대부분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종리령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총단에 볼모로 잡힌 노모와 처자식들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수석호법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부귀공명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종리령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결코 그를 배신할 수는 없어.'
아마도 이 마음은 수호마왕군 무사들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리라. 10년 간의 정사대전을 통해 수호마왕군의 구성원들은 감히 한 몸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단합되어 있었다. 모두 합심하여 서로를 철저히 지켜주는 가운데 피어난 동료애.
특히 그 중에서 독고성의 역할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가 자신들에게 보여준 정성과 보살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 마치 부모나 친 형님처럼 대해주는 독고성에게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상태였다. 심지어 사준환에게 밀명을 받고 파견된 종리령조차도 마음을 돌릴 정도니 수호마왕군의 독고성에 대한 믿음과 충성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 단언할 수 있었다.
쓸쓸히 고개를 돌린 종리령의 눈에 축 늘어진 독고성의 왜소한 몸이 들어왔다. 그의 눈에 무언가 결심했다는 빛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어가더라도 대주만은 살려야 한다.
그 의견에 동의하는 듯 무사들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령은 지체 없이 살아남은 무사들을 열 개의 부대로 나눴다.
곽상과 도일룡을 비롯한 부대주들은 각기 맡은 부대를 이끌고 사방으로 산개하라.
나는 이곳에서 추적대를 저지하겠다. 가슴 깊이 명심하도록……. 너희들이 멀리 도주하면 도주할수록 대주가 살아날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진다. 알겠는가?
존명.
물론 종리령은 만에 하나 적의 포로가 되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대해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수호마왕군의 구성원이라면 능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즉시 출발하라.
존명.
부대주들이 휘하 부대를 통솔해서 흩어지는 것을 쳐다본 종리령은 걸음을 옮겨 독고성에게로 걸어갔다. 사술에 조예가 깊은 배교의 인물인 만큼 독고성의 몸을 감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남은 무사들이 사방을 경계하는 사이 종리령은 독고성을 숨길 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핏기 없이 창백한 독고성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종리령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물막이 서렸다.
부디 살아나십시오. 대주. 당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이십니다.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떨쳐낸 종리령은 독고성의 위에 장포를 덮은 뒤 지체 없이 술법을 펼쳤다. 구석진 곳에 쓰러져 있던 독고성의 몸이 곧 주위와 동화되기 시작했다. 기척을 완전히 숨기는 은폐술. 훗날 동영의 인자들에게 전래된 이 은폐술은 곧 독고성의 왜소한 몸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모든 안배를 끝낸 종리령은 몸을 일으킨 뒤 검을 뽑아들었다. 검집까지 바닥에 버린 것을 보아 그의 마음가짐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놈들은 필시 대주가 사방으로 산개한 부대에 섞여 있을 것이라 짐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알겠는가?
비장함이 감도는 종리령의 명령. 하지만 남은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백 번을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저기 오는군.
뿌연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다가오는 추적대를 보자 종리령은 생애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전원 전투준비. 신의를 배신한 놈들에게 수호마왕군의 위용을 보여주기로 한다.
실시!
존명.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물밀 듯 밀려오는 추적대를 맞이하며 검의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꽉 쥐었다.
어스름이 깔려 가는 저녁이었다. 거대한 도시를 둘러싼 높은 성벽에도 말할 것 없이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한없이 조용한 도시. 이미 날이 저물면 문을 잠그고 집에 틀어박히는 것이 일상화된 펠드리안 시민들이었다. 왜냐하면 심심찮게 행해지는 오크 유격대의 목표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도시는 적막감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수없이 늘어선 건물 어디 한 군데에서도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군데 틀린 곳이 있었으니 도시를 둘러싼 성벽 위쪽만은 시내와는 달리 환하게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성벽 요소요소에 수를 셀 수도 없는 횃불들이 늘어서서 망루와 감시탑들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안에는 날아오는 와이번을 찾아내기 위해 병사들이 감시에 열중하고 있었다. 적에 대한 방비를 위해 성벽 위에만은 이처럼 횃불을 밝혀놓는 것이다.
그중 하나의 망루에서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새어나왔다. 정확히 제 57 수비조가 지키고 있는 망루였다.
그러니까 내가 소금만 가지고 척 나타났다면 마을의 모든 여자들이 오줌을 질질 흘리며 달려나왔단 말이야. 그리고 나와 하룻밤 인연을 맺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섰지.
고작 한 주먹의 소금을 얻으려고 말이야.
망루 속에는 등을 돌리고 있는 병사 하나가 보였다. 뺨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나 있는 험상궂은 표정의 병사. 하지만 눈빛만큼은 정말 순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지금 열을 올리며 왕년의 경험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다른 병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물론 그가 워낙 순박했기 때문에 놀리려는 의도가 대부분이었다.
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분명히 거짓말이야.
핸슨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병사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허 참. 이거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줄 수도 없고…….
이봐 핸슨. 네가 소금 행상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만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보나마나 거짓말일 거야.
병사들 사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관심사를 꼽으라면 단연코 여자 얘기가 빠질 수 없다.
때문에 망루 경비병들은 한참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날이 새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못된 것들! 너희들은 지금 내가 소금 행상이라고 깔보는 거냐?.
핸슨이 큰 소리로 더럭 역정을 내자 병사들은 찔끔했다. 물론 핸슨이 겁나서가 아니라 주위 망루에서 들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병사가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주었다.
이봐. 옆 망루에서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심야에 대화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만에 하나 들킨다면 저번 69 경비조처럼 두 달 동안을 꼬박 이곳에서 보내야 해.
그 말에 핸슨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젠장. 어디 한 번 소금 없이 살아봐. 그 무거운 소금자루를 지고 대륙을 누비는 우리가 없다면 어디 너희들이 소금 구경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소금이 없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군. 열심히 뛰어 땀을 흘린 다음 그것을 말리면 소금이 생기잖아?
다른 병사 하나가 농담을 지껄이자 망루 속의 병사들이 까르르 웃었다. 한스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로 평소에 핸슨과는 앙숙지간인 이였다.
이것들이?
또다시 열을 있는 대로 받은 핸슨이 막 발작하려 했다. 그 때 나지막한 음성이 그의 발작을 제지했다.
그만 해 핸슨. 그리고 너희들도…….
음성의 주인이 57 경비조를 책임지고 있는 선임병 맥밀란의 것임을 알아차린 핸슨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핸슨을 달래주려는 듯 맥밀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핸슨의 말도 영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냐.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나처럼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경우에는 여간해서는 소금 구경을 할 수 없단 말이지.
때문에 간혹 가다 들르는 소금 행상은 환대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맥밀란이 나서서 증명하자 병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스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여자들이 고작 한 주먹이 소금을 얻기 위해 동침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잖아? 우선 남편들이 가만히 보고 있겠어?
맥밀란이 편을 들어주는데 기가 산 핸슨이 가슴을 쓱 내밀었다.
물론 그 여자들은 남편이 없는 과부들이었다. 아직도 못 믿겠냐?
못 믿겠다. 세상에 그렇게 과부가 많은 마을이 어디에 있어.
이게 정말
옥신각신 하던 둘을 쳐다보며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는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둘 사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핸슨의 말은 사실이야. 산골 마을에는 과부들이 무척 많지. 왜냐하면…….
설명을 해 나가던 맥밀란의 눈가에 잠시 모호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바로 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이기도 했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버린 맥밀란은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남편들은 사냥을 하다, 혹은 밭을 갈다가 몬스터들에게 많이 잡혀 먹히기 때문이야.
때문에 산골 마을에는 대체적으로 여자들이 많은 편이지. 그런 점에서 핸슨의 말도 일리가 있어.
맥밀란의 개입으로 인해 둘 사이의 논쟁은 핸슨의 승리로 끝났다. 의기양양한 핸슨은 그것 보라는 듯이 병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것 보라고. 땅이나 파먹던 너희들이 알면 뭘 알겠어? 적어도 이 중에서 애초부터 병사 출신인 경우가 있어? 오직 맥밀란 밖에는 없잖아? 그것도 그는 당당한 영지 수비병이었다고…….
핸슨의 말은 사실이었다. 57 경비조를 구성하고 있는 병사들은 맥밀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향이 달랐고 판이하게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핸슨은 소금 행상이었고 그와 논쟁을 벌이던 한스는 농사꾼이었다. 그 외 다른 병사들도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임병인 맥밀란만은 그들과는 달리 원래부터 병사였다. 그는 펠루시아 산맥 초입에 위치한 조그마한 영지의 경비병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타의로 인해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강제로 징집되었고 트루베니아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트란보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후방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를 마치고 이곳 이카롯트시의 성벽 수비대로 재배치되었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만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인연들인 것이다. 패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없었는지 한스가 또다시 화젯거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놈은 단연 파사트야. 왜 그런지는 알고 있겠지?
글세? 왜 그렇지?
병사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한스는 감시탑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힐끗 쳐다본 뒤 가슴을 쭉 폈다. 지금 파사트는 감시탑 위에서 홀로 근무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모두들 알다시피 그놈은 말만 들어도 쟁쟁한 귀족 가의 시종 출신이야. 그러니 상상을 해 보라고.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아리따운 귀부인께서 외로운 나머지 파사트를 은밀히 침실로 끌어들일지 누가 알겠어? 허리통, 다리통 두꺼운 시골 여자들말고 훅 불면 하늘하늘 날아갈 듯한 고상한 귀족 부인들이 말이야…….
한스의 말에 병사들은 박장대소했다.
클클클 그거 말 된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야.
병사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한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시선을 돌렸다. 망루의 구석 부분에는 무척 왜소한 체구의 병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투구를 눌러써서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겨우 드러난 하관 부분은 재미있다는 듯 슬며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봐. 데이몬. 이젠 밑천도 다 떨어졌으니 자네 경험을 한 번 얘기해 보는 게 어때?
나, 나 말인가?
데이몬이라 불린 병사의 입에서 무척 어눌한 말투가 흘러 나왔다. 억양이나 어투가 판이하게 다른, 무척 떠듬거리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병사들 중 가장 신비에 쌓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데이몬은 슬며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 여자 경험 따위는 없어.
하긴 그 몰골에 여자가 따르면 다행이겠다. 솔직해서 좋군.
한스의 익살에 병사들은 또다시 왁자지껄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물론 망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 모습에 맥밀란은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대책이 없는 놈이군. 이봐. 데이몬 상관하지 않도록 해.
사, 상관 따윈 안 해.
데이몬이라 불린 병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투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무척 이질적인 얼굴. 길게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간 눈매며 심하게 휘어진 매부리코. 여러 모로 보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른 병사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얼굴의 형태. 데이몬이라 불린 병사의 정체는 바로 독고성이었다.
'그런 대로 재미있군. 모처럼 만에 겪어보는 경험이라 해야 하나?'
상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놀림을 당하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스는 묵묵히 앉아 있는 데이몬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데이몬. 넌 도대체 뭘 하다 온 거야?
……?
원래 직업이 뭐였냐고?
잠시 머뭇거리던 데이몬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나 역시 병사 출신이었어. 내가 살던 곳에서는…….
으잉?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데?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넌 분명히 광대였을 거야. 내 말이 맞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한스란 병사에 대해 익히 아는 이상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말고는 떠버리 한스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관심이 시들해진 한스는 화젯거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고 데이몬은 조용히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이미 그가 이곳에 배치된 지도 육 개월이 지났다. 그 기간동안 그는 이곳의 병사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물론 여러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별 탈은 나지 않았다.
병사들과 지내면서 독고성은 이곳의 말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 했다. 그 결과 아직 어눌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한 상태였다. 전혀 형태가 다른 언어를 익히는데 고작 6개월이 걸린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워낙 오성과 기억력이 뛰어난 독고성이었기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런 데이몬을 가만히 쳐다보던 맥밀란은 조용히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신경 쓰지 말도록 해. 원래 성격이 저런 놈이니까…….
데이몬을 쳐다보던 맥밀란의 눈은 모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의 전투에서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것은 57경비대 대원들 모두가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불과 6개월 사이였지만 그 동안 오크에 의해서 많은 공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공격 중 하나는 정확히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망루를 대상으로 행해졌다. 맥밀란은 점차 그 때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와이번이다.
성벽을 향해 내려꽂히는 와이번 편대를 보자 경비탑 위의 병사가 다급한 경고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병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다. 내려꽂히던 와이번의 입에서 화염이 토해지자 나무로 짜 놓은 경비탑은 삽시간에 불타올랐다. 물론 안에 들어있던 병사와 말이다.
하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망루에 있던 병사들은 전투준비를 마치고 달려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 세상에…….
이미 성벽 위는 오크 유격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크들은 와이번의 등위에 탑승한 채 이리로 날아온다. 따라서 한 마리의 와이번에는 기껏해야 다섯 정도의 오크들이 탈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은 이례적으로 공습방법을 바꾸었다.
그것은 바로 와이번의 등에 고정시켜 늘어뜨린 밧줄에 오크 보병들이 매달린 채 강습하는 방법이었다. 그 결과 와이번 한 마리는 스물 남짓한 오크 유격병을 착륙시킬 수 있었고 이미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감당하기 힘들 수효의 오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경비병들을 향해 물밀 듯 덮쳐들었다.
취이익.
죽어랏. 인간.
오크 유격대와 수비병 사이에서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비록 인간들에 비해 힘과 신장이 열세이긴 했지만 타고난 투지로 그것을 이미 극복한 오크 유격병들이었다.
게다가 수적으로 열세이다 보니 수비병들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야 한다. 머지 않아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한 치도 물러서면 안 된다.
계속해서 사기를 독려하던 경비대 대장의 부르짖음도 오래지 않아 오크의 함성에 묻혀버렸고 수비병들은 계속해서 밀린 나머지 성벽 부근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워낙 열세였다. 그 중에는 맥밀란이 통솔하는 57경비대도 끼여 있었다. 이미 그들은 끝없이 달려드는 오크의 투지에 의해 전의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그 때 누군가가 앞으로 쓱 나섰다. 왜소하기 그지없는 체구, 그가 얼마 전 배속된 이방인 용병이란 것을 알아차린 57 경비대 병사들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별달리 강해 보이지 않는 그가 수백 명의 오크들이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접근하는 곳을 향해 단신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크크크 이런 빌어먹을 미물들이…….
한발한발 걸어나가는 데이몬의 주위로 다소 이질적인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다소 생소한 기운인 살기(殺氣)였다. 데이몬은 자욱한 살기를 뿜어내며 단신으로 오크 무리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미 오크에게 살기가 통한다는 것은 최초의 격전을 통해 파악한 상태였다.
취익?
오크들의 눈망울에 점차 의혹이 서렸다. 처음에 인간 하나가 걸어나왔을 때 그들은 웬 미친놈인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인간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기이한 기운은 점차 그들의 기세를 꺾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라 일컫는 오크의 투지는 물론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서 나오는 이상한 기운은 그 투지마저도 여지없이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인간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투기(鬪氣)는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사정없이 내뿜어지는 데이몬의 투기는 성벽 위에 포진한 오크들의 기세를 순식간에 꺾어 버렸다.
데이몬이 한 발 내딛을수록 오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는 오크들. 그들은 성벽 끄트머리까지 밀려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취이익. 놈은 한 놈이다. 죽여라.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오크들이 도끼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역부족이었다. 그 틈을 타서 수비군들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해놓은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원 부대가 성벽으로 향하는 계단을 타고 맹렬히 올라오고 있는 상황. 이미 오크들에게는 승산이 사라진 전투였다.
데이몬의 활약은 수비대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정도 수의 오크가 성벽을 점거한다면 되찾는 데는 필경 엄청난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벌어진 혈투. 그 전투에서 수비군들은 또 한번 놀라야 했다. 이방인 용병이 단신으로 무려 스물이 넘는 오크를 처치하는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무기로 보기도 어려운 스파이크 건틀릿을 사용해서 말이다.
이곳에서 스파이크 건틀릿이란 무기는 기사들이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병기에 불과했다. 낙마한 뒤 어쩔 수 없이 격투에 임할 때나 도움이 되는 병기라고 할까, 물론 정면 대결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이방인 용병은 그 짧은 스파이크 건틀릿을 능숙하게 사용해서 오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해 나갔다. 거친 갑주를 입은 오크의 급소만을 전문적으로 꿰뚫으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벽을 강습한 오크 유격대는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되었다. 그리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방인 용병의 이름은 성벽 수비군 사이에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정말 그렇게 잘 싸운단 말이야.
그럼. 나는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 그 짧은 스파이크 건틀릿으로 철저히 목이나 눈을 노리는데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더군.
그 활약으로 인해 수비군 병사들은 데이몬이란 이름의 이방인 용병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같은 조에 속해있는 57 경비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처음에는 흉측한 외모로 말미암아 다소 경원시되는 존재였던 병사 데이몬. 하지만 6개월이란 세월이 지나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간 때문에 데이몬은 57 경비조의 병사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맥밀란을 위시한 병사들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때문에 맥밀란이 데이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뭇 남달랐다.
그의 출신이 어딘가 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는 이제 우리 57 경비조의 일원이다.
이제는 데이몬과 상당히 친해진 57 경비조원들. 데이몬이 이곳의 말을 익히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차린 대원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이곳 트루베니아 공용어를 가르쳤다. 그 결과 데이몬은 단 6개월만에 기초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데이몬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맥밀란은 그때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디 가려는 거지?
시, 시간이 된 것 같아. 교대해 주려고…….
감시탑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움켜쥐고 데이몬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맥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자신의 임무는 철저히도 수행하는군. 아마도 병사였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몰라.
그것도 규율이 엄격한 부대에서 말이야.'
그러나 맥밀란은 데이몬이 수천 명의 무사들을 통솔하는 거대 무력집단의 총수였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감시탑 근무는 병사들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임무였다. 우선 만에 하나 공습이 개시된다면 가장 먼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며 또한 좁디좁은 공간의 특성상 오직 혼자서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그 두 번째였다.
한 번 올라간다면 꼬박 한 나절을 홀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고서라도 근무를 회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데이몬 만은 달랐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감시탑 근무를 섰고, 간혹 말을 배우는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대신 근무를 서 주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가장 믿음직한 대원이라고 해야하나?
조금 뒤 임무를 교대한 파사트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자 맥밀란은 망루의 벽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다음 차례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수면을 취해두려는 심산에서였다.
무척 좁은 공간. 등을 기대면 거친 나뭇결이 사정없이 등을 파고들 정도로 감시탑 내부는 좁았다. 심지어 다리도 제대로 뻗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데이몬은 말없이 경계임무에 몰입하고 있었다. 몸에 걸친 투박한 갑옷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이제 이곳 말은 어느 정도 익혔다. 이젠 대략적으로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해.
무림의 당당한 실력자였던 그가 말단 경비병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일신상의 무공을 모두 잃은 상태.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모처럼 혼자 있게 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운기조식을 시도해 보았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행해왔던 시도. 하지만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단전에서 반응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익히 짐작했던 일이라 그의 얼굴에는 이제 실망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내 몸에서 무공은 완전히 떠나버렸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법(Magic) 뿐이다.
두 번 다시 내가기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법뿐이었다. 그것만이 그를 강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하지만 어떻게 해야 마법을 익힐 수 있는지가 미지수였다. 언뜻 보기에도 이곳엔 마법사(Mage)가 드문 편이다. 그것을 보더라도 마법 역시 그리 만만한 학문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일을 쉽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교대를 한 뒤 시간이 나면 제일 먼저 베니테스를 만나봐야겠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통해서 마법을 배울 길을 찾아야 해.
하지만 교대시기는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었다. 계속해서 장정들이 징집되어 전장으로 가는 관계로 경비병들은 무려 한 달이나 성벽에서 기거하며 근무해야 했던 것이다.
데이몬의 시선은 말없이 감시탑 밖으로 향했다. 생각한 바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우선 맡은 임무를 철저히 수행해야 했다.
데이몬이 소속된 제 57 경비조는 근 한 달 만에야 교대를 할 수 있었다. 비록 하루의 휴식시간을 거쳐 다시 사역에 동원될 것이 확실했지만 그래도 병사들은 기뻐하며 망루를 나섰다. 내일이 어찌 되더라도 따듯한 스프로 배를 채우고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겐 크나큰 특권이었다.
나 먼저 갈께.
제일 먼저 파사트가 으스대며 집을 향해 떠나갔고 나머지 병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밤늦게 교대했던 저번과는 달리 지금은 해가 많이 남아있었으며 더욱이 펠드리안 시내는 평소와는 달리 떠들썩한 축재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방에 파견되었던 엘리트 부대가 휴식을 위해 귀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느라 시내는 무척 혼잡했다. 자유시간을 얻은 병사들은 대부분 거기에 섞이기로 결심한 듯 했다. 멀어지던 병사들을 잠시 지켜보던 맥밀란은 데이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뭘 할거야?
그, 글세?
떠듬떠듬 대답하던 데이몬을 쳐다본 맥밀란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갇혀 있었으니 심심할 텐데 시내 구경이라도 하겠어?
그, 그럴까?
데이몬은 솔깃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적적하기도 했었지만 그에겐 이곳의 사정에 대해 소상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맥밀란이 자청해서 안내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가볼까?
둘은 가던 방향을 돌려 시가지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가지 중심부분 쪽으로 접어들수록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몰려다녔다. 물론 거리를 나다니는 시민들의 수는 평소와는 달리 무척 많은 편이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성벽 경비를 하며 시내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오늘, 조금 이상하군. 무슨 명절이야?
명절? 음! 명절은 아니고 전방에 파견되었던 기사단이 휴식을 위해 복귀한 거야. 그 때문에 시내 분위기가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고…….
맥밀란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지만 데이몬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기사단?
응.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이카롯트 기사단이야. 소드 마스터를 무려 일백 명이나 보유한 당당한 이카롯트의 엘리트 부대라고 할 수 있지. 저번 전투에서 그들은 오크 놈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대승리를 거뒀어.
대승리? 전세가 뒤바뀔 만큼?
데이몬의 말에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추정한 바를 설명했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오크 일개 사단을 섬멸시켰을 뿐이야. 놈들의 군세에 비해 극히 작은 병력이긴 했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이니 만큼 특별히 휴가를 준 것 같아.
모든 전장을 통틀어 본다면 분명히 오크들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둔 기사단의 작은 승리. 비록 보잘것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카롯트 황제 로젠가르트 4세는 극도로 가라앉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겉으론 공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이례적으로 휴가를 주게 된 것이다. 펠드리안 시내가 축제 분위기를 띠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때문이었다.
'한심하군. 그럴 여유가 있으면 계속해서 적의 빈틈을 노릴 생각이나 하지'
물론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였던 경험에 의해 데이몬은 그것이 하등 필요 없는 일이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수뇌부도 아니고 한낱 수비군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라서 데이몬은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 때 다소 긴장한 듯한 맥밀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이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기사단이 하필이면 우리 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어.
그들의 눈에 시내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대열이 좌우로 좍 갈라지는 것이 들어왔다.
일단의 병사들이 거만한 태도로 연신 호통을 쳐 대며 시민들을 도로 가장자리로 물러나게 하고 있었다.
저리 비키시오.
중장 갑주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에서 그들이 왕실 근위병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당당한 체구에 번쩍번쩍 빛날 정도로 손질된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투박한 약식 갑옷을 걸친 맥밀란과 데이몬과는 천양지차라 말할 수 있는 차림새. 둘은 별 수 없이 사람들 대열에 끼여 도로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놈들…….
맥밀란은 연신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는 근위병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눈을 부라리는 꼴이 그들을 무척 아니꼽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로 가장자리에 몰린 사람들은 그래도 웅성거리며 곧 도착할 기사단의 행진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개를 갸웃한 데이몬은 맥밀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들은 누구?
누구긴 누구야. 실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부모 잘 만난 덕에 왕실 근위병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놈팡이들이지. 하나같이 귀족 아닌 놈들이 없단 말이야.
툴툴거리는 맥밀란의 태도에는 근위병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서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 트루베니아에선 실력 외에 신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뒤 그들 앞으로 완전 무장한 병력들이 열을 지어 행진했다. 경쾌한 나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빵빠라빵.
제일 먼저 지나간 자들은 도끼가 달린 긴 창, 핼버드를 곧추 세운 창병들이었다.
그들이 질서정연하기 지나간 다음 중장보병단이 그 뒤를 이었다.
하나같이 묵직한 갑주를 빈틈없이 걸친 둔중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앞서 본 근위병과 버금갈 만큼의 중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은 불연 듯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쇳덩이를 치렁치렁 매달고 제대로 달릴 수나 있을까? 말짱 쓸데없는 짓이지.
장담하건데 내 몸이 정상이고 수호마왕군 일백 명만 있다면 저들 전부를 반나절 내에 도륙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지금 그의 능력으론 중장보병 한 명이 아니라 창병 한 명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극악의 금제법 칠종단금술이 남아있는 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할 수 없었다. 하다 못해 상대가 검술을 모르는 평범한 농사꾼일지라도 말이다.
저기 온다.
다소 긴장한 듯한 맥밀란의 말에 데이몬은 정신이 퍼뜩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 눈에 열망을 가득 담은 채 한 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돌아갔다.
중장보병단은 어느새 지나가 버리고 지금은 말을 탄 기마병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들은 대부분 가벼운 장갑을 걸친 경기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뒤를 이어 중장갑주를 걸친 기사단이 오고 있었다. 그들의 갑주는 오히려 앞서 지나간 중장보병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데이몬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지나갔다.
'쯔쯔. 낙마한다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할 차림새로군. 이곳 놈들은 왜 저렇게 몸에 덕지덕지 걸치는 것을 좋아하지?'
물론 그 차이점은 양 대륙의 무술이 판이하게 다르다는데 기인한 것이었다. 이곳에 머문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아직까지 그 차이를 확연히 알고 있지 못했다.
중원에서는 예로부터 몸의 단련을 통한 외공보다는 내공에 바탕을 둔 내가기공이 성행했다.
물론 내가기공을 제대로 수련한 무예자에게는 갑옷이 별달리 소용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선다면 능히 갑옷을 뚫고 상대의 몸에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발경. 심지어 권법자들조차도 발경을 이용한다면 상대가 걸친 갑주를 어렵지 않게 무력화할 수 있었다.
특히 고도의 검객들에겐 갑주란 쓸데없이 몸놀림만 둔화시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보유한 내공에 바탕을 둔 고도의 기술인 검기를 이용해 능히 갑주를 뚫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에서는 갑주를 사용하는 문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중원에서 갑주란 거의 군대에서밖에 쓰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곳 트루베니아는 달랐다. 우선 이들의 상대는 중원처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오크 나 트롤같은 몬스터가 태반이었다. 그 때문에 힘을 강조하는 검술이 극도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중원처럼 개개인의 대결이 아닌 다른 종족간의 전투가 활발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갑주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우선 갑주란 개인간의 대결보다는 이리저리 뒤엉켜 싸우는 집단전에 무척 효율적인 방호구였다. 난전 중에는 개인간의 대결보다 등에 칼을 맞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은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트루베니아의 검술은 내가기공보다는 외공 쪽에 치우친 무술이 발달했고 비록 크로센 대제의 수련법이 전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대다수의 검사들은 힘을 바탕으로 한 검술을 익히는데 주력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 검술에는 갑주를 착용하는 것이 필수였다.
데이몬이 열을 지어 지나가는 중장기사단을 건성으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민들의 환호성이 극에 달했다. 옆에서 흥분한 맥밀란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것 봐. 핼버트론 경이야. 세상에 라인델프 경도 있어.
맥밀란이 가리킨 방향에는 네 명의 기사들이 연신 손을 흔들며 시민들에게 답례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미남자들로써 얼굴에 옅은 웃음을 떠올리며 자랑스럽게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쳐다본 데이몬은 반사적으로 그들의 갑주에 대해 살폈다. 앞서 지나간 중장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비교적 얇아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곳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이 그려져 있었다.
저, 저들의 갑옷은 더 야, 얇잖아?
떠듬거리는 데이몬의 말에 맥밀란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저들에겐 두터운 갑주가 전혀 필요가 없어. 가진 실력만으로도 능히 무적이라 자부할 수 있는 기사들이니까……. 저들이 입은 갑옷은 바로 마법 갑옷이야. 마법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갑옷 말이야. 물론 엄청나게 비싸지. 거기에다 저들은 가진 마나로 능히 갑주의 강도를 높일 수 있는 능력자들이니까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단 말이야.
평소 차분한 성격의 맥밀란이 이처럼 열을 올리는 모습은 여간해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심지어 지난 6개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터라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들이 누군데?
저들은 말이야.
비록 입으로는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맥밀란의 눈은 지나가는 기사들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이카롯트 제국이 보유한 최강자들이야. 기사단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제일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들. 그들이 바로 저들이야. 이제 알겠어?
뚫어져라 주시하는 맥밀란의 눈빛은 뭔가 형언하기 힘든 모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강한 열망과 경외가 감돌아있는 다시 보면 뭔가 씁쓸한 표정이 숨어있는 듯 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본 데이몬은 맥밀란의 어깨를 다시 툭툭 쳤다.
저들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저들은 너나 나 같은 하급 병사들이 백 명이나 무리 지어 덤빈다고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실력들을 가지고 있어. 넌 아마 믿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그 말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과거에는 그도 결코 저들에 못지 않은 실력을 보유한 강자였었다. 물론 내력을 잃기 전에 말이다.
'저들이 얼마나 강하기에……. 무공을 잃은 것이 정말 한스럽군. 통쾌하게 한 번 싸워보고 싶은데…….'
비록 무공은 잃었을지언정 가슴속에 품은 무사로써의 승부욕은 아직까지 남아있었기에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현실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과거는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상기할 필요는 없다. 착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그는 화제를 바꿨다.
궁금한 게 있어.
응? 뭐지?
저들을 만약 크로센 대제에 비교한다면 도대체 누가 강하다고 생각해?
건성으로 듣고 있던 맥밀란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 사람들 중에 데이몬의 말을 들은 자가 없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발음이 워낙 어색했기에 알아들은 자는 없는 듯 보였다. 우선 맥밀란 역시도 상당기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데이몬의 발음은 어색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쉿, 조용히 해.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더니 데이몬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한참을 걸은 끝에 그들은 인파를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도착한 맥밀란은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대관절 그 이름은 어디에서 들은 거지?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난 그냥…….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겠어. 하지만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만약 이 사실이 근위병들 귀에 들어간다면…….
맥밀란은 손가락을 들어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우리 둘은 그 즉시 끝장이야. 알겠어?
평소와는 다른 서슬 퍼런 태도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잔뜩 굳어있던 맥밀란의 얼굴이 그때서야 풀렸다.
하긴. 이곳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까 그런 실수를 한 것이겠지. 이해해.
미, 미안해.
미안하긴. 사실 그것은 나도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를 보지 못한 이상 누가 강하다고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되니 말이야. 내 당부 깊이 명심하도록 해.
그러지.
이제 행진대열도 시가지를 거의 빠져나간 상황이었기에 둘은 시내 구경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말없이 숙소로 향했다. 맥밀란에겐 서둘러 숙소로 가서 따끈한 스프로 목을 축일 생각밖에는 없는 듯 했다.
숙소로 걸어가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몬이 불쑥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마법사들이란 대관절 어떤 존재지?
마법사라고 했나?
맥밀란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물론 하급 병사였던 그가 마법사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아는 대로나마 데이몬에게 알려줄 결심을 굳혔다. 비록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데이몬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맥밀란이었다.
이곳에서 마법사란 기사단과 더불어 군대의 주축을 이루는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어.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마법사 한 명이 일개 기사단과 맞먹는 존재일 수도 있거든.
그래?
걸어가면서도 맥밀란은 계속해서 설명을 해나갔다. 데이몬은 점점 그의 설명에 빠져 들어갔다.
마법사란 우리 같은 보병들에게는 거의 공포와도 같은 존재야. 왜냐하면 마법 한 방에 보병 백여 명의 목숨이 좌우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 정도로 마법사의 마법은 가공해.
말을 마친 맥밀란은 데이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우리편이라면 상황은 달라져.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라도 마법사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그의 활약에 따라 전쟁의 성패가 좌우되니 말이야.
놀랍군.
마법사에 대해 난 그다지 많은 것을 알고 있진 않아. 다만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보다는 자질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말이야. 다시 말해 마법사의 자질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알려져 있지. 그리고……
맥밀란은 얼굴 가득 흥미를 띠는 데이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열 살 이전부터 마나를 다루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어. 따라서 성년이 된 이후에는 마법을 익혀도 대성하기 힘들다는 말이지.
맥밀란의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았지만 데이몬은 겉으로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나이가 든 상태에서는 마법을 익힐 길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 말이야.
예, 예외의 경우라니?
맥밀란은 데이몬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혹시 아까 대열에서 기사들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을 봤어?
으응. 본 것도 같아.
별달리 기억나진 않았지만 데이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바로 내가 말한 예외의 경우라 칠 수 있어. 그들은 다름 아닌 흑마법사들이거든…….
저, 정말이야?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슈렉하이머에게서 이곳의 역사에 대해 세세히 전해 들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 흑마법사들은 저, 저번 암흑 군대와의 대전에서 패해 모두 처형당했다고 들었는데…….
맥밀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도 알고 있었어? 흠. 그렇다면 얘기가 쉬워지겠군. 물론 암흑 전쟁 당시 흑마법사나 네크로멘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마왕의 편에 서서 전쟁을 치렀지.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대적으로 처형당한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살아남은 자가 전혀 없진 않아.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흑마법사들이 몇 있었는데 이번 전쟁을 계기로 복권되었다고 들었어. 물론 오크와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조건 하에 말이야.
그런 사정이 있었군.
데이몬은 이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봐서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듣기로 흑마법은 나이가 들어도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어. 왜냐하면 그들은 마왕과의 계약을 통해 마력을 공급받기 때문이야. 물론 뒤늦게 익힌다고 해도 1 써클 정도 마법사의 경지에는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지.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마왕과 계약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위, 위력에서 차이가 있어?
공격 방면으론 흑마법의 위력이 백마법보단 비교적 강하다고 알려져 있어. 우리 같은 일반인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아마 눈을 씻고 봐도 없을 거야.
그, 그건 왜 그렇지?
왜냐하면 마력을 얻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마왕에게 팔아야 하기 때문이야. 음.
암흑전쟁 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좋겠군.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에 흩어져 있던 흑마법사들은 모두 마왕의 편을 들었지. 단 하나도 예외가 없었어.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이미 마왕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마왕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 흑마법을 익히려면 언젠가는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다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
또한 흑마법사들은 이곳에선 상당히 경원시 되는 존재야.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운이 나쁘면 명성을 떨치려는 기사들에게 최후를 맞기 십상이지.
왜냐하면 흑마법사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을뿐더러 과거엔 베르하젤 교단에서 포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흑마법사가 되려는 자는 없어. 물론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사람이면 모를까…….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 그런 곡절이 있었군.
괜히 딴 생각 먹지말고 근무에나 충실하도록 해. 시간이 지나다보면 전황이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때마침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둘의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외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식당 안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었다. 둘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올라갈 수 있었다.
드르렁.
온통 코고는 소리와 땀 냄새로 가득찬 공간에서 데이몬은 홀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무척 피곤했는지 맥밀란은 이미 정신 없이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과연 마법을 익히는 것이 가능할까?'
맥밀란의 말대로라면 가능성이 무척 희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 무공도 늦은 나이에 익혔다. 찾아보면 마법으로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없진 않을 거야.'
마음의 결정을 내린 데이몬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 일찍 베니테스를 만나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데이몬은 아침 일찍 황궁으로 향했다. 이미 6개월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개략적인 지리는 어느 정도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얼마 걷지 않아 웅장한 황궁의 실루엣이 데이몬의 눈앞에 펼쳐졌다. 황궁을 한 번 쓸어본 데이몬은 곧장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갑주를 걸친 근위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데이몬이 다가오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경계자세를 취했다.
서라. 무슨 일이냐.
거침없이 하대하는 말투. 이는 데이몬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성벽 수비군 복장을 하고 있는데 기인한 듯 했다.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나, 나는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를 만나러 왔소.
무척 어색한데다 떠듬거리는 어투에 근위병의 얼굴에 수상하다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용무로?
그에게 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소.
그 말에 근위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라면 그들조차 쉽사리 만나볼 수 없는 고위급 인사였다. 그런데 지저분한 성벽 수비군이 그에게 용무가 있다니……. 그것도 얼굴이 흉측하기 그지없는 이방인이 아닌가? 수상한 눈빛으로 전신을 훑어보던 근위병은 그냥 쫓아버리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