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크크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조처하도록.
존명.
공손히 부복하는 흑의인을 보며 독고성은 말없이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주위에서 흑의인들이 날렵하게 산개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자신이 지휘하는 수호마왕군들이었다. 철저히 별동대(別動隊)로 키워진 자들로써 전문적으로 기습공격만을 전담하는 배교의 최고 정예무사들.
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배교 총사 사준환은 무려 20여 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안배했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 개정대법을 실시한 뒤 갖은 영약을 투입하고, 무려 20년 동안의 혹독한 수련을 거쳐 키워낸 최고의 정예 무사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1천 5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수련에 들어갔지만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친 아이들은 불과 오백을 넘지 못했다. 그 정도의 처절한 수련을 거친 끝에 이들 수호마왕군들은 같은 나이의 정파의 직전제자도 능히 감당할 만큼의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독고성이 직접 통솔하고 있었다.
후후후 정말 꿈만 같군.
휴식을 취하던 독고성은 나지막이 흉소를 날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는 무공의 기본도 모르는 범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초절정 급의 정파 고수를 무리 없이 격살시킬 정도의 가공할 만한 무공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최고의 자질과 오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루기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천자혈마공의 연성. 그것은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매일매일 새끼 양에게서 짜낸 정혈(독고성은 철저히 그렇게 믿고 있다)을 흡취하고, 통상적인 무공연성방법과 전혀 상이한 도리에 따라 천자혈마공을 익혀나가는 일.
그것은 천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그 기간이 끝난 후 천자혈마공을 완전히 몸에 배게 하기 위한 수련이 이어졌다. 독고성은 천자혈마공을 연성하는데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바램은 단 한가지, 소림성승을 시해한 정파 인들을 위시해서 자신을 멸시한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한 복수를 이루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목숨을 걸고 무공을 연성하는 이유였다. 또한 두 번 다시 그 같은 멸시를 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무공 연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결과 단 10년 만에 천자혈마공을 극성으로 연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수련을 마치고 연공실에서 나온 독고성을 사준환은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현재 무림이 돌아가는 제반 정세의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무림은 일촉측발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각지에서 정사지간의 국지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전이 터질 것이 확실하다고 사료됩니다. 이미 저희 배교는 무림맹에 맞서기 위해 마교를 비롯한 사도 방파들과 연대해서 마인연맹을 형성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소교주님께서는 앞으로 하실 일이 무척 많으실 것입니다.
크흐흐. 내가 무얼 하면 되오?
이미 천자혈마공의 마성에 어느 정도 사로잡힌 터라 독고성은 피에 무척 굶주려 있었다. 그런 독고성을 힐끗 쳐다보며 사준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수호마왕군을 맡아주십시오. 이들은 지금을 대비해서 제가 미리 키워놓은 무사들입니다. 전반적인 전투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소교주님께서는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제가 알려드리는 정파 놈들의 요지를 기습하여 초토화시켜 주십시오. 일종의 별동대인 셈이지요.
바라던 바요. 맡겨 주시오.
독고성의 임무는 그렇게 확정되었다. 소수 정예인 수호마왕군을 지휘, 통솔하여 백도의 중요한 거점을 제거하는 임무. 여기에는 독고성이 가장 합당한 인물이었다.
천자혈마공에 바탕을 둔 강력한 무공, 그리고 마치 야수와 같은 감각으로 그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실전경험의 미비로 다소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무공은 차근차근 완성되고 있었다. 무수한 접전을 통해 실전경험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독고성은 마침내 복수를 성공할 수 있었다. 목적했던 놈들 중 한 명에게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무수한 모욕을 가했던 모용세가의 장자인 모용진. 시간이 흘렀지만 독고성의 뇌리에 각인된 원한은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크크크 다른 놈들 역시 내 손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독고성은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급히 다가왔다.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다음 목표물이 정해졌습니다.
바라던 바다. 수하들을 소집하라
존명.
독고성을 위시한 수호마왕군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자리를 뜨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감옥 속에서 독고성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구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나름대로 절정기라 말할 수 있는 시기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어왔다. 비록 천자혈마공의 마기에 취한 채 정신 없이 살육을 일삼던 때였지만 말이다.
마도 천하(魔道天下)를 이루겠다는 기치 아래, 오백의 수호마왕군을 대동하고 전장을 비호처럼 누볐던 나날들.
생각이 거듭될수록 죽은 수하들의 얼굴이 독고성의 뇌리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들은 수하이기에 앞서 절친했던 전우였으며 서로를 지켜주었던 은인들이기도 했다.
원래 수호마왕군의 구성원들은 사준환이 선발해서 키워놓은 무사들이었다. 어린 시절 선발되어 20년에 가까운 지옥훈련을 거치고 나서 독고성의 휘하에 임의로 배치된 무사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눈앞에 펼쳐진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함께 전장을 전전했던 대장을 구하는 쪽을 서슴없이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이 총단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 적의 발길을 저지하고, 또한 운공 중인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부대장 종리령 이하 모든 무사들이 장렬하게 죽어갔다.
그들이 목숨을 잃은 배경은 다름 아닌 사준환에 의해서였다. 독고성의 눈에서 갑자기 광망이 일어났다.
죽을 때 죽더라도 너희들의 복수는 내가 꼭 해주겠다.
거듭 다짐하긴 했지만 그것이 이루기 힘든 일이란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곳이 중원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세계란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이제 그는 평범한 강호 무사 한 명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단전이 사라져버려 내공을 새로 연성하기란 불가능한 일. 또한 초식이나 외공 방면으론 그다지 조예가 없었으므로 새로이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전장에서 얻은 숱한 실전경험과 감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독고성은 뭔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사용하는 마법에 관한 생각이었다.
이미 그는 슈렉하이머를 통해 개략적인 마법의 개념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마법이다. 슈렉하이머의 말대로라면 마법은 단전을 잃은 상태에서도 충분히 구사할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는 바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 시험에서 살아남아야만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우거라고 했나? 과연 어떤 괴물일지 궁금하군.
독고성은 앞으로 싸우게 될 마지막 상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상대를 제압해야만 이후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미지의 존재,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해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쿠르르르.
묵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쇠격자로 된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올라갔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지금 올라가는 철문말고도 세 개나 되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굉음과 함께 첫 번째 철문이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자, 다음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독고성은 하나 둘씩 올라가는 철문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생사를 결정짓는, 아니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상대를 맞이하기 위해 그는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곤두세운 상태였다.
쿵.
마지막 하나의 철문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문들은 모조리 천장에 고정되었다. 그러자 철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괴성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캬오오오.
극도로 화난 맹수만이 낼 수 있을 듯한 짐승의 부르짖음. 독고성은 그것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인 오우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 대결을 위해 벌써 두 번씩이나 시험을 치른 지하감옥에 들어간 상태였다.
침착해야 한다. 독고성.
그는 나직이 내뱉으며 오른 손에 차여진 스파이크 건틀릿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마지막 대결이니 만큼 그에겐 원하는 무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중장갑주와 철퇴, 모든 종류의 장비를 막론하고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모든 것을 마다했다. 그나마 호조와 비슷한, 트롤과의 격전에서 사용했던 스파이크 건틀릿만을 선택한 상태였다.
무기를 들고 들어온 병사들이 거듭 중갑주와 방패를 쓸 것을 권했지만 독고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미 트롤과의 격전을 통해 갑주 방패 따위가 별달리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터득한 때문이었다.
이번에 상대할 놈은 트롤보다 월등히 강한 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막는 것보다 피하는 쪽이 용이할 것이다.
모든 무공을 소실했다고는 하나 수많은 격전을 치러가며 얻은 반사신경과 감각만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비록 신법을 운용할 내력이 전무한 상태지만 그의 몸놀림은 범인보다는 월등히 빨랐다.
그것 하나만을 믿고 독고성은 변변한 갑옷도 고르지 않은 채 대결장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이상했는지 병사들은 저마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상식으론 하다 못해 체인 메일 위에 플레이트 메일이라도 착용해야 겨우 오우거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 견디지 못하고 오우거의 한끼 식사가 될 것이 자명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딴 것 입어봐야 몸놀림만 느려질 뿐이지.
그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든 스파이크 건틀릿을 쳐다보았다. 특이하게도 저번에 트롤과 결투할 때와는 건틀릿의 형태가 무척 달랐다. 원래는 4개의 얄팍한 칼날이 달려있었지만 지금은 모조리 잘려나간 상태였으며 대신 무척 튼튼해 보이는 쇠송곳 한 개가 중지손가락 손마디 부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왼쪽 건틀릿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그가 베니테스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무기였다. 독고성이 미리 생각해 놓은, 오우거를 상대할 해법에 맞춰 제작된 것이기도 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송곳 하나 보다는 칼날 네 개가 나을 텐데…….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베니테스는 별 상관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자고로 사형수에겐 다소 과중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법이다.
무기가 완성되자마자 독고성은 대결장에 곧장 투입되었고 곧이어 있을 오우거와의 접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마지막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철문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형체가 거세게 철문에 부딪쳐왔다.
쾅.
자욱한 먼지와 함께 격자문이 들썩였다. 충격으로 인해 두터운 철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휘청거렸다. 그것을 보아 괴물의 힘이 얼마정도인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한 대 맞으면 그대로 염라대왕과 대면하겠군.
나직이 중얼거린 독고성은 말없이 오우거가 감옥 속으로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지의 존재 오우거는 마침내 독고성의 앞에 육중한 몸매를 선보였다.
콰우우우.
오우거의 모습을 목격하자 독고성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세상에…….
땅 위에 저런 생물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오우거의 모습은 기괴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오우거는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우선 독고성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오우거에게 머리통이 두 개 달려있는 점이었다.
무릇 동물이라면 뇌가 들어있는 머리통은 분명 하나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개념을 깨어버리려는 듯 오우거는 두 개의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다.
달려 있는 눈동자가 각각 움직이는 것을 봐서 두 개의 머리통은 각자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뛰어들어온 오우거는 눈에 불을 켜며 대결장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핏발 선 눈동자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독고성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감옥 안에 독고성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오우거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급격히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식욕 때문이었다.
이번 대결을 위해 오우거는 꼬박 일주일을 굶었다. 그 때문에 놈은 무척 심기가 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먹잇감을 발견하자 놈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빠르기였다.
오우거가 들고 있는 거대한 몽둥이, 차라리 건물의 기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무기가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독고성의 몸을 노렸다.
독고성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헉.
오우거의 빠르기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혼비백산한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콰쾅.
그가 있던 자리의 석판이 산산이 깨어져나가며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켰다. 나무로 된 몽둥이에 의해 커다란 석판이 깨어져 나갈 정도니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짐작할 만했다. 덩치는 크지만 동작이 다소 느렸던 트롤을 연상했었기 때문에 독고성은 오우거의 반응속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거대한 거구가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니……. 오우거의 속도는 신법을 펼치는 무림 고수의 몸놀림에 거의 육박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독고성은 계속해서 회피동작을 취했다. 상황을 봐서 몽둥이에 격중되는 때가 바로 이승을 하직하는 순간임은 자명했다. 물론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그저 사력을 다해 몽둥이를 피해낼 뿐이었다. 다행히 전장에서 갈고 닦은 감각만은 건재했기 때문에 독고성은 오우거가 공격해오는 사각(死角)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고 겨우나마 피해낼 수는 있었다.
먹잇감이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가자 오우거의 흉성은 극도로 치밀어 올랐다.
콰우우우.
놈은 연신 기성을 내지르며 독고성의 뒤를 쫓았다. 4.5미터의 당당한 키에 어울리게 팔 길이 역시 길었기 때문에 오우거는 먹잇감의 진로에 대고 연신 몽둥이질을 했다.
휘이이익.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내려쳐지는 미증유의 거력. 그것이 정확히 자신이 몸을 날리는 방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독고성은 순간적으로 몸을 핑그르르 돌렸다. 힘껏 내딛은 왼발 축을 중심으로 그의 몸이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콰쾅.
등뒤에서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전해졌다. 산산이 부서진 돌 조각이 날아와 등에 박히는 것을 느끼며 독고성은 다시 몸을 날렸다. 방향은 바짝 붙어 자신을 움켜쥐려 하고 있는 오우거의 다리 사이였다.
부웅.
솥뚜껑 만한 손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기를 모면한 독고성은 오우거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와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괴물은 나보다 빠르다. 잡히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또다시 먹잇감을 놓친 오우거는 기성을 지르며 독고성의 뒤를 쫓았다. 육중한 몸이 마치 거짓말처럼 방향을 바꿔 질주를 시작했다. 독고성이 비록 사력을 다해 달리고는 있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독고성. 하지만 오우거는 멈칫멈칫 하면서도 별다른 무리 없이 독고성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숨마저 가빠오고 있었지만 독고성은 아랑곳없이 달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정말 놀랍군. 오우거의 손에서 저처럼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니.
독고성의 움직임에 대한 세르게이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는 지금 베니테스와 함께 지하감옥의 위 부분에 앉아 벌어지는 혈투를 관람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트윈헤드 오우거라면 어지간한 기사들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놈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오래는 견딜 수 없을 듯 하군.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하니 말이야.
오우거는 가공할 만한 스피드를 차지하고서라도 우선 가죽이 무척 두텁기 그지없는 몬스터였다. 어지간한 무기로 찔러보아야 헛되이 검만 부러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기에다 급소가 모여있는 상체 부분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 오우거는 숙련된 기사가 아니고서는 잡을 수 있는 존재가 감히 없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물론 다수의 병사들을 동원하면 잡을 수 있긴 했지만 대신 막대한 피해는 각오해야 했다.
그러니 세르게이와 베니테스가 독고성의 승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의 눈엔 이미 독고성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오우거의 위장 속으로 들어갈 고깃덩이로만 보였다.
그래, 놈이 자네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보았다고?
그렇습니다.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왔습니다.
그래? 어떻게 대답했나?
저번에 공작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대답해 주었지요. 살아남는다면 이곳에서 사역을 하던지 병사로 징집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살아난다면 가능한 얘기겠지? 하지만 상황을 봐서 놈이 살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둘이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독고성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쾅.
주위의 석판들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서져나갔다. 퉁겨져 나온 돌 조각 때문에 입은 상처로 독고성의 전신은 선혈이 낭자했다. 이미 숨이 턱 밑까지 차 오른 상황. 하지만 오우거는 전혀 힘이 빠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헉, 헉.
몸이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나른했지만 그래도 독고성은 몸을 날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는 것은 하등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오우거의 먹이가 된다면 죽어간 수호마왕군에 대한 복수는 누가 할 것인가? 그 생각 때문에 독고성으로써는 쉽사리 삶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 오우거의 공격이 바로 옆에 작렬하며 돌 조각 세례가 그의 전신에 퍼부어졌다.
우욱
시큰하는 감각과 함께 이마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핏물이 눈을 덮어 시야마저도 가물가물해져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로 등뒤에서 느껴지는 오우거의 거친 숨소리. 바짝 접근해 있음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보아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기에 그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헉, 헉. 이대로 가다간 당한다.
그는 전방에 보이는 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이번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새도록 생각해서 준비해 온 방법. 바로 그것을 시전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짜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가던 오우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 정도 되면 도주를 포기하는 것이 십상이었는데 유독 이 인간만은 끝까지 자신을 애먹이는 것이다. 연신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오우거는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겠다는 기세로 추적을 시작했다. 인간이 달려가는 방향은 막다른 석벽.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는 판단에 오우거 역시 모든 힘을 짜내어 추격하고 있었다.
달려감에 따라 지하감옥의 석벽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독고성은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치 석벽에 머리를 박고 그대로 죽어버리려는 듯 돌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바짝 붙어 오우거가 추격하고 있었고 둘 사이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끝났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니테스의 눈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상황을 봐서 이방인이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은 아예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세르게이는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관람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석벽을 들이받을 듯 달려가던 이방인이 달려가던 탄력 그대로 석벽을 걷어차더니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는 것이 아닌가? 탄력을 적절히 이용한, 정말 놀랍다고 볼 수 있는 몸놀림이었다. 이방인은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지만 불운하게도 오우거는 그렇지 못했다. 바짝 붙어 질주하던 오우거는 그만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벽과 세차게 충돌해 버렸다.
꽝.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하감옥 전체가 들썩였다. 석벽이 푹 패여 나가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오우거의 거대한 몸은 반탄력으로 인해 퉁겨져 바닥에 볼썽 사납게 나뒹굴었다.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정도의 충격. 베니테스는 하지만 저 정도로 오우거가 죽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만큼 오우거는 강인한 생명체인 것이다. 그의 눈에 비틀거리며 착지한 이방인이 쓰러져 있는 오우거에게 달려드는 장면이 들어왔다.
재미있군.
뜻밖의 상황에 마음을 바꿨는지 세르게이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장내를 주시했다.
독고성은 날렵하게 오우거의 몸 위로 뛰어올랐다. 몬스터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금이 그에겐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단숨에 몸통 부분으로 뛰어올라간 그는 오른 손에 찬 건틀릿을 들어올렸다. 건틀릿에 단 하나만 달려있는 송곳의 끝은 날카로움을 자랑하려는 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에잇.
독고성은 가차없이 오우거의 눈동자에다 송곳을 찔러 넣었다. 트롤을 무력화시켰던 방법을 이곳에서 다시 재현하려는 것이다. 벽면에 충돌한 충격으로 반쯤 감겨져 있던 오우거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푸슉.
기다란 송곳은 눈동자를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물론 그 뒤에 위치한 오우거의 대뇌까지 꿰뚫어버린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우거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독고성은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야. 이제 끝났어.
가쁜 숨을 내쉬던 독고성은 일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결코 끝이 아니었으니……. 파공성과 함께 무언가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자 독고성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교차시켜 막아갔다. 뒤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
으헉.
그의 왜소한 몸이 맹렬히 퉁겨졌다. 통증으로 냅다 휘저은 왼팔에 그만 적중되고 만 것이다. 독고성은 거의 일장 가까운 거리를 날아가 바닥에 냅다 쳐 박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낙법을 이용해서 충격을 줄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의 눈에 오우거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키는 장면이 들어왔다.
오우거는 두 손으로 남은 머리를 틀어쥔 채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공격을 받은 머리는 완전히 기능을 잃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젠장 놈의 머리가 두 개였었지.
맥이 탁 풀렸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우거가 일어난다면 그는 공격해 볼 기회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뼈마디가 아우성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우두두둑.
어디 한 군데가 단단히 부러졌는지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오우거에게로 육박해 들어갔다. 상체를 일으킨 오우거는 손으로 눈을 꼭 감싼 채 엎드려 몸을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만약 일어난다면 그 즉시 죽은목숨이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그가 공격할 목표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오우거는 이미 성한 머리에 달려있는 눈을 손으로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상태. 건틀릿의 송곳으로는 도저히 두터운 오우거의 손을 뚫을 수가 없어 보였다. 아니 설사 뚫는다고 해도 두터운 손등을 감안하면 송곳은 아마도 눈동자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독고성은 아니었다.
에잇.
몸을 일으키기 위해 엎드려 있는 오우거. 독고성은 달려가던 탄력을 이용해서 오우거의 등판 위로 뛰어올랐다. 놀란 오우거가 몸을 뒤트는 것이 느껴졌지만 독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 한복판을 단단히 디디고 선 뒤, 송곳을 찔러 넣을 장소를 물색했다.
여기로군.
독고성이 고른 장소는 오우거의 어깨 죽지 뼈가 서로 만나는 장소였다. 인간으로 치자면 치명적인 혈도인 명문혈이 있는 곳을 택한 것이다. 판단도 짧았지만 행동은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건틀릿에 달린 송곳이 그곳을 사정없이 파고 들어갔다.
쿠어어어.
오우거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덩치로 보아 바늘 하나에 찔린 정도로 예상할 수 있었지만 오우거의 반응은 무척 의외였다. 그 모습에서 독고성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인간과 혈도가 동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건틀릿에 달린 송곳이 또 다른 목표물을 향해 쏘아졌다. 그가 택한 곳은 인간으로 따지면 치명적인 요혈이 있는 장소.
이미 인체의 혈도는 독고성의 뇌리에 명확히 기억되어 있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독고성이 노린 곳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송곳에 의해 깊숙이 파헤쳐졌다.
오우거의 전신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독고성이 연이어 요혈을 건드리고 있었으므로 오우거는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마침내 가슴의 거궐혈에 송곳이 파고드는 순간 오우거의 떨림이 갑자기 멎어버렸다.
크워.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눈이 돌아가며 오우거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아 버렸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덩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죽음.
하지만 독고성은 그래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공격을 가해 머리 복판에 있는 백회혈까지 꿰뚫어버린 다음에야 그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헉, 헉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피가 흘러내려 이젠 눈조차 뜰 수 없었다. 한계에 달하는 힘을 모두 사용한 때문에 근육엔 경련까지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감옥 위 부분으로 희미한 미소를 한 번 보낸 뒤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감옥 위쪽에서는 눈동자 4개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빛을 띠고 죽은 오우거의 시체와 축 늘어진 독고성을 번갈아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법 규모가 큰 장원이었다. 인가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원의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10여 채가 밀집되어 있는 전각군을 볼 때 이곳엔 적어도 일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하나도 남김없이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야밤을 틈타 침투한 일련의 고수들에 의해 깡그리 도륙당한 것이다. 날이 밝은 지금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사방에는 생명을 잃은 시신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널려 있었으며 벌써 잔치를 벌이려는 듯 까마귀 떼가 장원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간혹 흑의를 입은 시신들도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 했다.
이곳은 바로 무림맹의 비밀 거점이었다. 사천 지방의 아미파와 당문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건설해놓은 무림맹의 후방기지인 셈이다. 물론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급습한 자들은 그들보다 월등히 강한 자들이었다.
이름하여 수호마왕군. 마도의 떠오르는 샛별이라 불리는 파천혈마(波天血魔) 독고성의 지휘 하에 있는 무적의 군단이 불시의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들의 위력을 증명하듯 죽어있는 흑의인의 시신은 몇 되지 않았다. 일천 명의 무림맹 무사들이 떼죽음 당했지만 죽은 수호마왕군 무사는 불과 사십 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독고성은 착잡한 표정으로 목숨을 잃은 수하들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접전이 계속되며 하나 둘씩 수하를 잃어 가는 것이 무척 애석했던 독고성이었다.
처음 그에게 배속되었을 때 수호마왕군의 총 수는 정확히 오백 명이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접전을 치러가면서 그 수는 이제 삼백으로 줄어 있었다. 그만큼 그들이 싸우는 전장은 흉험하기 그지없었고 위험도가 높은 작전에만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돌연 바로 옆의 전각에서 갑자기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독고성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전장에서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생을 마감하며 내뱉는 단말마가 아니라 극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내뱉는 비명소리인 것이다.
독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길게 끄는군.
전각 안에는 총단에서 파견 나온 수석호법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지금 살아남은 무림맹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심문을 벌이고 있었다. 심문에는 필수적으로 고문이 동반되는 것이 당연했고 생포된 자들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깡그리 털어놓고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그것이 별달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순간적으로 숨통을 끊는 것을 선호하는, 다소 호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지라 이처럼 고통을 계속해서 주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총단에서 직접 파견되었는지라 수석호법이 하는 일에 별달리 제동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목표물이 정해지면 수하들을 대동하고 즉각 박살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목표를 정하는 것은 철저히 사준환의 몫, 자신은 오로지 행동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루하군.
사방에 널려 있는 시신들 사이를 터덜터덜 걸어간 독고성은 잘려나간 나무뿌리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훤칠한 키를 가진 흑의인 하나가 독고성에게 급히 다가왔다.
대주님께 보고 드립니다.
말하라.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제법 잘 생겼다 볼 수 있는 청년은 독고성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바로 수호마왕군의 부대주 중 하나인 곽상이었다. 두 자루의 쌍검을 능숙하게 잘 다루는 고수로써 검술실력 뿐만 아니라 잘 돌아가는 머리를 인정받아 독고성의 보좌로 발탁된 자이기도 했다. 총 부대장 종리령과는 별개로 말이다.
곽상은 나지막한 어조로 보고를 시작했다.
조사에 의하면 탈출한 자는 전무합니다. 이미 구백 팔십 구의 시신을 확인했으며 이곳 책임자였던 추운검객 한현필의 시신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는 연신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장원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어나갔다.
곧이어 추가될 다섯 구의 시신을 합친다면 조사한 것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독고성은 거기엔 별달리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다른 것에 있었다.
수하들의 피해상황은?
잠시 머뭇거리던 곽상은 지체 없이 보고를 시작했다.
사망 사십 이 명, 그리고 중상이 십 칠 명입니다. 물론 경상자는 보고에 넣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상이라 하면 신체의 일부를 잃어 두 번 다시 검을 들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면 결코 중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독고성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안타깝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독고성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시신을 수습해서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중상자는 일단 사천 분타까지 데리고 간다.
알겠습니다.
곽상은 당연하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이미 그것은 그들에게 익숙해진 처리방법이었다.
통상적으로 마도의 무사들은 동료가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가차없이 목숨을 거둬주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었다. 수호마왕군처럼 별동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조직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남은 동료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것, 이것은 마도 무사들에겐 하나의 철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고성은 지금까지 그 원칙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접전 중에 다리를 잘리거나, 양팔을 잃은 무사의 경우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업어서라도 총단으로 데리고 갔고, 남은 여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온갖 조처를 취해주었다. 이것은 지금껏 배교에서 유래가 없던 일이었고, 또한 겉으로 보이는 독고성의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파천혈마(波天血魔) 독고성. 이것이 바로 백도에서 붙여준 명칭이었다. 살육과 파괴를 극단적으로 즐기는 마인, 심지어 백도 무사들에겐 죽음의 마왕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독고성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단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의해 죽은 백도 고수들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또한 그는 살인을 할 때 손속에 추호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비참했던 성장배경과 저주받은 마공인 천자혈마공을 연성했다는 것을 따져보면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그는 수하에 대한 애착심이 유난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적에게는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마두에 불과했지만 수호마왕군 무사들에게 독고성은 실력 있는 대장이며 또한 자신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형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탁월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희생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맡은 임무를 무리 없이 완수하는 능력이 그에겐 있었다. 만약 독고성이 없었더라면 수호마왕군은 결코 지금 정도의 전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독고성의 명령이면 기름을 지고 불 속에도 서슴없이 뛰어들 정도로 충성심이 지극했다. 정파에서 그를 살생밖에 모르는 마두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그들에겐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 특히 적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독고성은 수하들에게만은 지극할 정도로 잘 대해 주었다. 낙오된 수하들이 있다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가서라도 구출해 올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목숨을 잃은 수하들의 시신을 손수 땅을 파서 묻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문에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하나같이 독고성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설사 그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는 것이다.
곽상은 잠시 착잡한 눈빛으로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뭔가 고뇌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본 독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하고 있나?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곽상이 다급하게 수하들을 불러모으려고 했다. 그 때 등뒤에서 갑자기 묵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안됩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독고성과 곽상의 고개가 음성이 터져 나온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사십대 후반의 냉막한 얼굴을 가진 무사가 서너 명의 수하를 대동하고 걸어왔다. 무슨 짓을 했는지 그들의 손은 온통 피로 젖어있었다. 그가 바로 총단의 수석호법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찬 태도로 조금 전 고문을 통해 밝혀낸 사실을 독고성에게 늘어놓았다.
조사 결과, 사천 북쪽에 있는 세검산장에 다수의 무림맹 고수들이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본교의 하남 분타를 기습할 채비를 한창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즉시 수호마왕군을 대동하고 그곳을 공격해 주십시오. 이것은 한 시가 급한 일입니다.
그 말에 곽상은 안절부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중상을 입은 동료들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곽상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수석호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마디 내뱉었다.
부대주. 애석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네. 그들 역시 구차한 삶을 택하기보단 깨끗한 죽음을 더 원할 것이야. 그러니 지금 즉시 그들의 목숨을 거두길 부탁하겠네.
수호마왕군은 지금 즉시 세검산장으로 투입되어야…….
그러나 수석호법의 말은 중도에 끊겨버렸다. 뒤에서 들려온 노성에 가로막힌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고개를 돌린 수석호법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독고성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기가 꺾이긴 했지만 수석호법은 지지 않고 일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다.
소교주님. 수하를 아끼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것은 한 시가 급한 일입니다. 하남 분타에는 적을 막을 병력이 전혀 없습니다. 서둘러 출동하지 않는다면 분타를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
그러나 독고성은 단호하게 수석호법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불타는 듯한 안광을 내뿜으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수호마왕군은 사천 분타에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 한 후에나 움직일 것이다. 설사 총단이 공격대상이라 할 지라도 이 명령은 철회되지 않는다.
말을 마친 독고성은 곽상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명령을 실시한다. 죽은 동료들을 묻은 뒤 중상자들을 데리고 사천 분타로 복귀한다. 실시.
존명.
곽상은 희열의 빛을 떠올리며 냉큼 복명했다. 함께 전장을 전전했던 동료들을 살리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곧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를 나눠 한 패거리는 죽은 동료를 묻고 남은 패거리는 마차를 구해 중상자를 태우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모습을 총단 수석호법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쿠르르르.
각기 말을 탄 채로 수호마왕군은 사천 분타 쪽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무림맹 지단에서 노획한 마차에 중상자들을 가득 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동속도는 극히 느렸다.
제일 선두에는 독고성이 흔들리는 말에 몸을 내맡긴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으며 무사들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대열의 후미에는 총단의 수석호법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지금 안달이 난 듯한 표정으로 마차를 쏘아보고 있었다. 일견해 무척 화가 난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이런 빌어먹을…….'
사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이제 무사라 부를 수도 없는 폐물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내색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명목상 배교의 절대자는 바로 독고성이었으므로 겉으로는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척 해야 하는 것이 수석호법의 입장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독고성의 등을 표시 나지 않게 쏘아본 수석호법은 속으로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놈. 지금은 비록 제 세상이겠지만 조만간 두고보라지.'
묵묵히 걷고 있는 수호마왕군들을 한 번 쓸어본 수석호법은 소리 없이 뒤로 빠졌다.
비록 이들이 명목상 배교의 최고 정예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에겐 한낱 소모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정체는 원래 중원 각지에서 납치해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출신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권문세가의 자제도 있었고 또한 천한 백정이나 농민의 자식들도 있었다. 물론 정파 제자의 자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자질만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납치해서 수련장에 투입했기 때문에 배교로써는 이들을 잃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 많은 아이들이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소모품이다. 독고성 역시 마찬가지…….'
비록 겉으로는 독고성을 모시는 척 했지만 그는 이미 따로 모신 주군이 있었다.
지금껏 그는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 온갖 임무를 수행해 왔던 것이다.
대열의 맨 뒤로 빠진 그에게 누군가가 접근해왔다. 무척 강퍅하게 보이는 얼굴에 구레나룻이 무성하게 나 있는 중년 무사. 그의 정체는 바로 수호마왕군의 총대주인 철담사령(鐵膽邪靈) 종리령이었다. 대부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구성된 수호마왕군에서 유일하게 40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수석호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전음을 건네 왔다.
―부르셨습니까? 수석호법님.
물론 수석호법 역시 전음으로 화답했다.
―수고가 많소. 총사께서는 종리 총대주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고 계시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수석호법은 대열의 선두에 서 있는 독고성의 등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어나갔다.
이 중에서 전음을 엿들을 수 있는 능력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독고성. 그러므로 그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현재 상태는 어떻소?
―이상 징후는 별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정파 놈들을 상대할 때는 마치 미친 호랑이처럼 날뛰지만 무사들에게는 별달리 마성을 드러내진 않습니다.
―그렇소? 이상하군. 이 정도 되었으면 마성이 한 번쯤은 발작할 만도 한데…….
수석호법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부 문서에 의하면 천자혈마공의 창시자인 동방련은 무공을 익힌 지 삼 년 째 되는 날 첫 발작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독고성 역시 이때쯤이면 첫 발작을 일으킬 만도 한데 예상을 뒤엎고 아무런 징후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나 보군. 좋소. 종리 총대주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관찰하도록 하시오. 분명히 발작을 일으킬 테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한 종리령은 서슴없이 수석호법의 옆에서 멀어져갔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남의 눈을 극도로 의식해야만 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종리령의 얼굴에는 뭔가 침통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뭔가 회의적인, 나름대로의 고뇌가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수석호법은 만족한다는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천자혈마공은 그 가공할 위력만큼이나 부작용이 심한 마공이다. 오죽했으면 이백 년 전 동방련조차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로 처자식과 심복들을 깡그리 죽여 없앴을까……'
불연 듯 그의 뇌리에 이 모든 일을 꾸민 인물이 떠올랐다. 주군을 떠올리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비록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긴 했지만 어쩔 땐 자신도 모르게 그에 대한 공포심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이 모든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안배할 수 있다니. 그 누가 그를 사람이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겐 확실한 당근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때문에 수석호법에겐 그를 멀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소교주는 오래지 않아 발작을 시작할 것이다. 발작의 징후가 보이면 수호마왕군을 최대한 무림맹 근처로 이동시켜야 한다. 첫 발작이 있은 후 정확히 이틀 후면 마인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어차피 수호마왕군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 녀석들은 그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크하하하.'
수석호법은 속으로 계속해서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저, 대장님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몰고 있던 독고성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부대주인 곽상이 뭔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잠시 머뭇거리던 곽상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시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주위를 힐끗 돌아본 곽상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작전 말입니다. 아니 이번뿐만 아니라 최근에 벌어진 작전이 모두 말입니다.
사실 요즈음 행해진 작전이 우리 수호마왕군에게 다소 버겁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 말입니다. 이번 기습작전만 해도 대장님께서 정파의 수뇌부 세 명을 단숨에 처리해 주셔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원래 대로라면 성공하기 힘든 작전이었습니다. 최정예 정파 무사 일천 명이 운집해 있는 곳을 저희 수호마왕군 삼백 이십명 만으로 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입니다.
곽상의 말에 독고성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도 우린 성공하지 않았나?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만 사상자가 늘고 있습니다. 물론 인원 보충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59명을 잃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물론 곽상은 중상자는 전력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두 번 다시 검을 들 수 없을 테니까…….
속하는 총사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수호마왕군의 힘을 줄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곽상의 발언은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일반적인 마도 방파의 구성원들은 오로지 명령에 복종할 뿐 이처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죽으라면 서슴없이 칼을 물고 자결해야 할 정도로 명령체계가 엄격했다. 만약 누군가가 곽상처럼 주제넘은 참견을 한다면 그 즉시 즉결처분을 당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고성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곽상의 내심을 알았기에 그저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워낙 흉측한 얼굴이라 미소가 아니라 그저 찡그리는 것으로만 보였지만 말이다.
지나친 걱정이야. 사준환 총사는 결단코 그럴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아무런 걱정하지 말도록……. 우린 분명히 마도천하를 이루어 낼 수 있어.
곽상은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독고성의 사준환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천천히 말을 몰아 나오며 곽상은 독고성의 흉측한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곽상의 뇌리에 문득 독고성이 처음으로 그들의 대장으로 배속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지옥훈련을 마친 무사들은 독고성의 얼굴을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철저히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 엄선된 무사들인 만큼 실력이 없다면 대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뭐 이런 인상 더러운 놈이 대장으로 왔을까?
과연 실력이 있긴 한 거야?
그러나 오백 명의 무사들 중 서열 1, 2, 3위가 차례대로 곤죽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독고성을 대장으로 삼았고 그 이후로 독고성은 그들에겐 바로 하늘이 되어버렸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지도력과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말고도 독고성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으니……. 당시를 떠올린 곽상은 얼굴에 미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정말 이해가 안되었었지. 전장에서는 정말 야수처럼 미쳐 날뛰면서도 우리들에겐 마치 친 형님처럼 대해주시니 말이야.'
이제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그 누구도 독고성의 외모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비록 흉측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들에겐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고 정이 가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곽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과연 총사의 의도가 어떤지 걱정되는군. 나쁜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것말고도 우려되는 것이 없진 않았다. 현재 무림에서 수호마왕군은 철저히 악의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사준환의 지시대로 이행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만 무림에서의 평가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수호마왕군이 계도할 수 없는 악인들만 모여있는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호마왕군과 그를 이끄는 파천혈마 독고성은 오로지 피와 살육만을 즐기는 살인귀들이다.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어린아이는 물론 개나 닭까지도 살아남지 못한다.
곽상은 그런 무림의 평가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물론 적에게 공포심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사준환이 일부러 퍼뜨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도가 지나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여자나 아이들을 학살한 적은 거의 없었다. 부득이하게 죽인 경우는 있었지만 작전을 끝내면 그 즉시 물러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고 뒤처리는 철저히 총단에서 파견된 무사들이 맡아왔다. 그런데도 그런 소문이 퍼지다니…….
수호마왕군의 경우와는 반대로 사준환에 대한 무림의 평가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비록 정파와 맞서 싸우는 배교의 총사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정정당당하고 도의를 아는 인물이란 평가가 내려져 있는 상태. 비록 곽상이 수호마왕군의 일개 무사이긴 했지만 그런 사준환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괜찮겠지? 우리 대장님은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볼 수 있는 분이니까…….'
곽상은 억지로 걱정을 숨기고 말을 몰아갔다. 어느덧 목적했던 사천 분타는 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고 많았소.
모시는 주군을 보자 수석호법은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사천 분타에서 수호마왕군과 떨어진 후로 그는 곧장 총단으로 향했고 이틀만에 천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무척 청수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없이 인자하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그 인상 뒤에 뱀보다도 냉혹한 진면목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수석호법은 잘 알고 있었다.
따르는 자에게는 확실한 당근을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처절한 죽음만이 남게 된다는 사실. 그 정도는 이미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터득해놓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수석호법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답례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총사님.
원래대로라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오체투지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여러 수하들 앞에서 배교의 절대자에게만 올릴 수 있는 오체투지를 한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명목상 그의 주군은 배교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오체투지는 배교가 확실히 주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에만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시기는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그럼 들어갑시다.
주군은 한없이 밝은 미소를 띠며 내전으로 들 것을 권했다. 수석호법은 두말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내전으로 들어간 그들은 주위의 이목을 물리친 뒤 곧장 밀담을 시작했다. 수석호법은 자신이 조사한 바에 대해 즉시 보고를 올렸다.
종리령의 말에 의하면 놈은 아직까지 마성이 제대로 발작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전장에서는 혈향에 취해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지만 말입니다.
그렇겠지. 파천혈마라는 명호대로…….
보고를 들으며 사준환은 하얗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독고성이 왜 아직까지 발작하지 않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는 점이 있었다.
이백 년 전의 동방련과는 달리 독고성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천자혈마공의 발작을 막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칠종단금술, 비록 천자혈마공의 마기에 억눌려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금제를 시술한 존재가 최강의 내공을 자랑하는 소림성승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신진기가 독고성의 몸 속에 변함 없이 머물며 마성이 발작하는 것을 다소나마 막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천자혈마공의 마성은 살육을 하면 할수록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사준환은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독고성은 지금도 꾸준히 살인을 행하고 있다. 자신의 지시에 충실하게 말이다.
상황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언젠가는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소림성승이 시술한 금제를 파훼하고 그를 완전히 마인으로 만들어버릴 터였다. 상념을 마친 사준환은 수석호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놈은 반드시 발작할 테니까 성급하게 행동할 것은 없다. 그런데 종리령의 태도는 어떻던가? 뭔가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던가?
수석호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총사님의 밀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목숨을 부지하고, 또한 가족을 살리려면 말이야.
사준환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수호마왕군의 총대주인 종리령은 사실 그가 암암리에 파견해놓은 밀정이었다. 독고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동시에 그가 발작할 경우를 대신해서 수호마왕군을 통솔할 임무를 띠고 있는 간세(奸細)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사준환의 심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일부러 그의 처자식을 볼모로 잡아 딴 마음을 먹지 않도록 안배해 놓은 것이다. 사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석호법을 쳐다보았다.
너는 어떤 일이 차지하고서라도 놈의 동태를 잘 파악해야 한다. 만에 하나 놈이 본교의 총단에서 발작하는 날에는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수석호법은 주군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날이었다. 트루베니아 제일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펠드리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다 못해 불빛 한 점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달빛마저도 완전히 구름에 가려버린 암흑. 이런 날이면 적의 기습공격이 즐겨 행해졌기 때문에 펠드리안의 성벽 수비병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야 할텐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은 무수하게 늘어선 망루 중 하나에서였다.
펠드리안은 성벽으로 완전히 싸인 전형적인 성곽도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육중한 성벽 위에 빼곡이 들어차 있는 망루. 그것들은 적의 접근을 용이하게 파악하기 위한 감시탑과 함께 성벽을 둘러가며 설치되어 있었다.
젠장. 어둠 때문에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으니…….
망루에 뚫린 구멍을 통해 연신 밖을 내다보던 병사 하나가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난, 땟국이 줄줄 흐르는 초췌한 얼굴. 망루 속에 있는 다섯 명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같은 모습인 것을 봐서 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었다. 구석에 있는 병사가 툭 던지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다란 할버드가 그의 옆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상황을 봐서 오늘도 교대는 이루어지지 않을 듯 싶네.
아마도 그렇겠지? 오늘처럼 달빛이 없는 날이면 십중팔구 오크 유격대가 날아들 테니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우린 꼬박 일주일을 여기서 생활했지 않은가? 몸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 바램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병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마실 물조차 모자라는 판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이었다.
젠장. 그만 하자고. 이봐 맥밀란. 밖을 내다본다고 눈이 빠질 것 같으니 이제부턴 자네가 내다보게.
알았어. 파사트
벽에 기대어 있던, 맥밀란이라고 불린 텁석부리 병사가 냉큼 다가와 자리를 교대해 주었다. 갑옷 위에 마지못해 새겨진 문장에서 그가 가장 상급자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들고 있던 석궁을 맥밀란에게 건넨 파사트는 벽에 들을 깊숙이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쯔쯔쯔. 들려오는 것이라곤 오로지 패전했다는 소식뿐이니……. 이러다간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
듣고 있던 병사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비록 후방에 있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전황이 어렵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쉴새없이 전사자가 나오는 전방으로 투입되지 않은 것만 해도 그들에겐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미 그곳으로 투입된 동료들, 한때 같이 생활했었던 병사들은 이제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착잡함을 털어 버리려는 듯 파사트는 푸념 조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뭐, 지금 같은 시기에 전방, 후방이 어디에 있어.
이곳 펠드리안은 원래는 후방이라고 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비록 계속해서 패전한다 할지라도 오크 군대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전선은 이곳에서 무척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틈을 노려 오크 군대는 대대적으로 유격대를 펠드리안에 침투시켰고 그것은 오늘과 같이 달빛이 없는 심야에 즐겨 이루어졌기에 이젠 이곳도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독한 놈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유격대로 자원하다니…….
자네는 뭘 모르는군. 오크 놈들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 트루베니아의 종족 중 오크 족이 가장 죽음과 가까운 종족이라고나 해야 하지.
비록 반박하기는 했지만 맥밀란의 시선만은 결코 성 밖 허공을 떠나지 않았다. 오크 유격대는 바로 창공을 통해서 침투하기 때문이다. 놈들은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몬스터들 중 창공의 제왕이라고 하는 존재인 와이번을 타고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문제는 오크들이 와이번들을 이용해 펠드리안 시내로 직접 투입된다고 하는 점이다.
오크 유격대는 투입된 즉시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살상을 시작했고 때문에 초기에는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경비대가 투입되기 전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수히 학살당한 것이다. 물론 침투한 오크 유격대는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했지만 그들은 이른 바 목적을 달성했다. 펠드리안 시민들을 극도로 동요하게 만든 것 말이다. 물론 투입한 병력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크들은 계속해서 유격대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병사들은 와이번들이 날아오는 창공마저도 이처럼 빈틈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긴 놈들은 그 정도 병력쯤은 내다 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생산력이 강하니…….
맥밀란은 공허한 눈빛으로 창공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속해있는 인간이란 종족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잠든 줄 알았던 파사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놈은 경계를 잘 서고 있을까?
무슨 놈?
아! 그 괴물같이 생긴 놈 말이야. 타 대륙에서 온 용병이라는 놈.
그 말에 맥밀란의 얼굴에서 극도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는 불과 15일 전에 그의 경비대로 배속되어 온 자였다. 얼굴이 더없이 추악했기에 일단 그의 관심을 끌었고 또한 그가 들고있던 무기 역시 평범한 병사들이 쓰지 않는 것이었기에 무척 호기심이 갔다.
'기사들이 부수적으로 사용하는 스파이크 건틀릿만 달랑 들고 있다니…….'
어디서 왔는지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와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섣불리 대화를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를 데리고 온 자는 다름 아닌 이카롯트의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였다. 더불어 행동을 철저히 감시하란 명령이 떨어졌기에 더욱 궁금증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맥밀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뭐, 경계 근무는 잘 서고 있는 것 같더군.
도주하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란 명령이 있었기에 맥밀란은 그를 망루 위의 감시탑에 올려보낸 상태였다. 물론 감시탑에서 내려오는 출구는 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에 이방인이 도주할 우려는 전혀 없었다. 그 후 보름이 지났지만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교대를 해 주면 망루로 내려와서 식사하고 잠을 자는 것 밖에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파사트는 돌연 안색을 찡그렸다.
정말 특이하게 생긴 놈이야. 만약 지금이 전시가 아니었다면 그 몰골로 용병 일 하나는 잘 하겠더군.
그만하도록 해. 우리 관점에서나 그런 거지. 혹시 모르잖아? 그가 살던 곳에서는 미남 축에 속할지도 말이야.
내 생각에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누군가가 망루 문을 똑똑 두들겼다. 그러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교대자가 왔나보군.
반색을 한 파사트가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갔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는 문에 달려있는, 겨우 눈만 내놓을 수 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안면이 있는 교대조란 것을 알아차린 파사트는 얼른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짜증 섞인 파사트의 말에 들어온 병사들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우린 놀다온 줄 알아? 사역 일이 너무 힘들어서 우리도 교대시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고……. 하루 쉰 다음 고생들 한번 해 보면 우리 심정 알게 될 거야.
파사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젠장 또 사역이야?
별 수 없잖아. 징병연한이 40세까지 올랐으니 사역할 자는 이제 우리밖에 남지 않았어. 이미 여자들도 사역에 동원되고 있는 마당이야.
툴툴거리던 파사트는 할 수 없다는 듯 무기와 장비를 수습했다. 맥밀란을 비롯한 병사들 역시 각자의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맥밀란이 돌연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이방인에게도 전갈을 해 줘야겠군. 좁은 감시탑에서 고생했을 텐데…….
젠장. 작작 좀 챙겨라.
파사트의 말을 흘려들으며 맥밀란은 망루 한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다리를 타고 감시탑으로 올라갔다. 넓은 범위를 감시하기 위해 감시탑은 상당히 높게 지어져 있었다.
으차.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솟구친 맥밀란의 눈에 어두컴컴한, 사방 1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이 들어왔다.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맥밀란은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눈에 창가에 바짝 붙어 밖을 내다보고 있는 왜소한 체구가 들어왔다.
자신들과 같이 상체만을 가리는 쇠사슬 갑옷에 약식 갑옷을 걸친 모습. 특이하게도 그는 병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저 삐죽이 칼날이 달린 스파이크 건틀릿을 양손에 차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맥밀란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자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맥밀란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봐. 교대할 시간이야.
어둠 속에서 상대가 고개를 돌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미동도 없이 맥밀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젠장. 어떻게 설명하지?
잠시 난감해 한 맥밀란은 열심히 손짓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하려 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방인은 조금 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맥밀란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사다리를 내려왔다. 망루로 내려오자 그곳에서는 파사트가 연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으아! 간만에 술로 목을 좀 축일 수 있겠군. 어흐흐흐.
글세? 네놈이 먹을 술이 남아있을까? 몽땅 징발되지 않았으면 다행이게…….
농지거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내려선 맥밀란의 뒤로 왜소한 체구 하나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가 허리를 편 순간 교대조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놈은 뭐야?
햐! 정말 인상이 더럽게 생겼군.
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만끽하기라도 하듯 파사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긴 뭐야. 우리 경비조에 배속된 이방인 용병이지. 정말 희한하게 생겼지?
자, 자 어서들 떠나자고. 우리도 좀 쉬어야 될 거 아냐
보다 못한 맥밀란이 빨리 나갈 것을 독촉했다. 그들은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보는 경비병들의 시선을 뚫고 망루 밖으로 나섰다.
성벽에서 내려온 뒤, 그들은 한동안 병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야 했다. 오크 유격대들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성벽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벽 앞쪽에는 일단의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 뒤에는 근무를 마친 병사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맥밀란 일행은 그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성벽을 내려왔다. 전쟁 때문에 이미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상황. 이런 상황에서 시비가 벌어진다면 필시 칼부림부터 일어날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맥밀란이었다. 성벽을 내려서자 파사트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데 그놈을 데리고 어디로 갈 거야?
뭐, 경비병 숙소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해야겠지. 아마도 내일부터 사역에 동원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야.
그래?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
길게 하품을 한 파사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다른 병사들은 무척 부러운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파사트라 불린 병사는 이곳에 집과 가족이 있는 징집병이었던 것이다. 운이 좋아 전장으로 끌려가지 않은 탓에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맥밀란을 위시한 다른 병사들은 홀홀 단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대부분은 전장에서 상처를 입고 후송된 부상병 출신이었고, 치료를 끝냈지만 전투를 치르기엔 부적합하다 판단되어 이처럼 망루 경비병으로 뽑힌 신세였다. 물론 가족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고향은 대부분 오크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 그런 연유로 그들 대부분은 경비병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 돌아갈 가족이 있는 파사트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 눈에 안대를 댄 병사 하나가 툴툴거렸다.
젠장. 녀석 으스대지나 말지 말이야.
뭐, 어쩌겠나. 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도 이만 가볼까?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을 통솔했다. 이방인 한 명이 낀 경비 제 57조는 그렇게 교대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맥밀란의 뒤를 따라가며 독고성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상체에 걸친 투박한 쇠사슬 갑옷이 절그렁거렸지만 그의 상념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병사들을 따라 걸어가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팔자에도 없는 경비병 노릇이라니…….'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이왕 살아남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떻게 해서든 생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곳의 마법이라는 술법을 배울 기회가 생기는 것 아닌가.
오우거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끈 뒤, 그는 한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격전 중 오우거의 손에 격중되었던 그는 늑골이 네 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상처가 치료되고 나서 한참만에 그는 자신과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베니테스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은 아마도 경비대에 배속될 것이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경계임무를 해 줄 것을 당부하오.
별 도리가 없었기에 독고성은 그것을 응낙했다. 그리고 꼬박 보름동안 경비병 역할을 마친 다음 모처럼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걸어가던 와중 그는 왼팔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거무튀튀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는 팔찌는 그의 팔목에 딱 맞게 채워져 있어 그의 힘으론 풀 수 없을 듯 보였다. 독고성의 뇌리에 베니테스의 경고성이 떠올랐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팔찌요. 그러니 도망칠 생각 따윈 버리기를 권고하겠소.
하지만 독고성은 굳이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이곳 말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달아날 필요도 없었고, 또한 그에겐 이제 자신을 지킬 힘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이들의 말에 따르는 척 하며 우선적으로 이곳의 말을 익히기로 마음먹은 독고성이었다. 그는 착잡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말을 익히는 시간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말도록 하자.
뒤에서 돌연 터져 나온,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병사들의 시선이 독고성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모두들 피로에 젖어있던 터라 별다른 상관은 하지 않았다.
혼잣말을 했나 보군.
독고성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맥밀란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목적했던 경비병 숙소는 드디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좁은 식당 내부에는 비슷한 차림을 한 병사들이 삼삼오오 서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배식대가 있는 한 쪽에는 병사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맥밀란은 독고성을 보며 따라오란 신호를 했다. 다른 병사들이야 이곳의 사정을 익히 알기 때문에 보살펴 줄 필요가 없었지만 이방인만은 예외였다. 명목상 책임자인 그가 이방인을 보살필 필요가 있었다.
따라오시오.
용케 알아들었는지 이방인은 잠자코 맥밀란의 뒤를 따랐다. 한 쪽에 놓여있는 식판을 집어든 맥밀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대로 세척하지 않았는지 오물이 묻어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불평을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는 말없이 식판 하나를 이방인에게 건넨 뒤,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뒤에 가서 도열했다.
묵묵히 식판을 받아든 이방인 역시 맥밀란의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식당 내부로 풍겨지는 구수한 스프 냄새에 맥밀란은 절로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얼마 만에 스프를 먹어보는 건지 모르겠군.
망루에서 근무할 때는 스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말라비틀어진 빵과, 치즈 한 조각이 끼니를 때우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식사를 받아든 맥밀란은 이방인을 데리고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쩝. 쩝.
말없이 식사에 열중하는 맥밀란을 힐끗 쳐다본 독고성은 식판을 입으로 가져갔다.
제대로 요리가 되지 않았는지 비린내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말없이 스프를 후루룩 들이켰다. 물론 차원 자체가 다른 이곳의 음식이 그에게 맞을 리가 없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수호마왕군과 임무를 수행할 때부터 노숙에 익숙해진 상태였고, 또한 이런 상황에서 음식투정이나 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 중원에서 그는 상당한 미식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배교로 복귀한 뒤 그는 기구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듯 식도락에 취미를 들였고 그 때문에 소속되어 있는 숙수들이 상당한 곤욕을 치른 바가 있었다.
비 이상적으로 발달한 독고성의 식도락(食道樂)에 관한 취미. 물론 꿍꿍이가 있던 사준환은 독고성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천하각지에 퍼진 분타로 하여금 이름난 숙수들을 초빙(정확한 말로 납치)해다 독고성에게 바칠 정도였다.
원래 중원이란 곳은 상당히 음식문화가 발달된 곳이다. 지역에 따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음식이 탄생했고 그 종류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자고로 두발 달린 것은 사람, 네발 달린 것은 책상과 걸상 빼놓고는 모두 요리 재료로 쓴다고 하는 것이 중원의 요리가 아니던가?
그런 만큼 독고성의 맛에 대한 취향은 정말 남달랐다. 특히 수호마왕군과 함께 강호를 전전하게 될 처지가 되자 독고성은 직접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쉬운 말로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을 숙수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10여년 간의 강호생활로 독고성의 요리실력은 일류 숙수에 못지 않게 되었고, 간혹 가다 그의 요리를 얻어먹은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맛에 감탄해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정말 최고입니다. 대장님.
입안에서 살살 녹는걸요?
그런 중원의 미식에 맛들어 있던 독고성. 그러나 이곳의 음식은 척 보더라도 영 아니올시다 였다. 우선 돼지고기를 원료로 쓴 듯했지만 비린내는 전혀 제거하지 못했다. 또한 양념의 배합 역시 고기의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전시에, 그것도 일반 병사들이 먹는 식당에 일류급 숙수가 파견될 리는 만무할 터. 한 입 깨문 고기에서 야릇한 맛이 전해지자 독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긴 내 처지에 이곳의 음식 맛에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니…….
정신 없이 식사에 몰두하는 맥밀란을 힐끗 쳐다본 독고성은 말없이 식판에 머리를 쳐 박았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음식이라도 뱃속에 집어넣어야 했던 독고성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독고성은 맥밀란의 뒤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식당 위층이 바로 경비병 숙소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맥밀란은 그 중 하나를 골라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방 내부는 자고 있는 병사들로 만원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땀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에 인상을 찡그린 맥밀란은 문을 도로 닫아버렸다.
다른 방을 찾아야겠군.
한참을 뒤진 끝에 그들은 그래도 몸을 뉘일 공간이 있는 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맥밀란은 비어있는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다소 좁긴 하지만 춥진 않을 거요. 우리 이곳에서 자도록 합시다.
이방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맥밀란은 간단히 갑옷을 벗은 뒤, 그것을 베개삼아 베고 누웠다. 무척 피곤했는지 그는 금방 곯아 떨어져버렸다. 망루에서 벽에 기대어 새우잠을 자던 처지였는지라 이나마 잠자리가 편했던 모양이었다.
드르렁.
코까지 골아대는 맥밀란을 말없이 쳐다보던 독고성은 슬며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방에는 온통 퀴퀴한 땀 냄새가 배어있었다. 때가 찌들대로 찌든 모포를 한 장 집어온 독고성은 쇠사슬 갑옷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야트막한 천장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한심하군.
나직하게 내뱉은 독고성은 잠을 청하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려고 했지만 잠은 도무지 오지 않았다. 결국 독고성은 멀뚱멀뚱한 정신으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림 전체를 피로 물들이며 벌어졌던 전면적인 정사대전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애당초 백도무림의 우세라고 예상되었던 정사대전은 예상을 뒤엎고 마도 방파들의 연합인 마인연맹에 우세하게 진행되어 나갔다.
하지만 정사대전으로 쌍방이 모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는지라 양측 수뇌부들은 암묵적으로 휴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던 백도 방파들은 예상치 못했던 피해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고 마인 연맹 역시 의도했던 바를 달성했는지라 더 이상 접전을 이끌어나갈 필요도 없었다.
결국 10년여에 걸쳐 행해졌던 정사대전은 드디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백도와 마도 피아가 이번 정사대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완전히 멸문한 군소방파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고 무림맹의 주축이었던 구파일방과 마인연맹의 주력세력인 마교 역시 전면전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 허덕일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이득을 본 방파를 꼽으라면 세인들은 단연코 배교를 꼽을 것이다. 정사대전에 참가했던 무림 방파들 중 배교의 피해가 가장 경미했기 때문이었다.
탁월한 지략가인 사준환은 치열한 접전 중에서도 정예 무사들을 최대한 살릴 수 있었다. 철저한 계산으로 승산이 8할 이상인 전투에만 무사들을 파견했고, 가장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규모의 무사단을 파견했기에 이룬 성과였다. 그 피해정도는 정예로 꼽히는 무사들 중 반 이상을 소진한 마교와 구파일방에는 결코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난전 중에서도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이상 배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교의 행태에 대해 마인연맹을 구성하고 있던 마교나 패왕문 등에서는 아무런 제동도 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외적으로 배교의 역할을 결코 폄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천혈마 독고성과 그가 이끌고 있는 수호마왕군. 그들이 정사대전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집단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적의 폭풍군단 수호마왕군. 그 정점에는 단 10년 만에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른 파천혈마 독고성이 있었다. 일대일 격전이라면 설사 상대가 마교의 교주라고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지닌 철혈의 승부사. 단 오백의 수호마왕군을 통솔하여 그는 무수한 정파의 근거지를 박살내는 전과를 올려 백도 무림의 힘을 비약적으로 약화시켰다. 그의 손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정파 무사가 죽어나갔다.
그의 공로는 마인연맹의 주축을 이룬 마교 무사들조차 달게 인정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정파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었지만 배교 교도에게만은 독고성은 영원한 절대자였다. 정사대전을 통해 그는 배교라는 문파를 백도와 마도 모두에게 깊이 각인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가 나면 정을 맞는다고, 명성이 점점 드높아만 가는 독고성을 마도 방파들, 특히 마교에서 고운 눈으로 볼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교라고 할 지라도 독고성을 건드릴 방법은 없었다. 우선 배교가 이미 마교조차 건드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두고 마침내 정사대전은 막을 내렸다. 무림맹의 맹주와 마인연맹의 절대자가 만나 전격적으로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무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비록 그 평화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두두두두.
배교의 총타가 있는 천산으로 말을 달리는 일련의 기마대가 있었다. 모두들 먼지를 흠뻑 덮어쓴 채로 정신 없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다소 왜소한 체구의 무사가 앞장 서있었다. 심하게 굽은 등을 보아 꼽추로 짐작되는 자. 그 뒤로 약 일백 팔십여 명의 무사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수호마왕군들이었다. 정사대전을 마도의 승리로 이끈 철혈의 승부사들. 이들이 있었기에 다소 밀리는 전력으로도 마도무림은 우세한 상황에서 전쟁을 마칠 수 있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배교의 총단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까지 활동을 계속해왔던 그들은 정사대전이 끝났다는 전갈을 받고서야 겨우 검을 수습했다. 그리고 개선군 자격으로 당당하게 배교를 향해 돌아가는 것이다. 한참 말을 달려가던 독고성은 핏발 선 눈을 번뜩였다.
길었던 전쟁이었군.
핏발 선 눈동자가 유난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막강한 마기. 앞에 서면 감히 숨을 내쉴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그는 능히 절대자라 칭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올해로 소림사를 탈출한 지 20여 년. 그 세월은 독고성을 무척이나 많이 변화시켰다.
물론 추악한 외모는 별달리 변하지 않았지만 이젠 그 누구도 그를 경멸하거나 멸시하는 자는 없었다. 설사 그런 자가 있다면 독고성이 먼저 손을 쓰기 전에 수호마왕군 무사들에 의해 목이 달아날 테니까……. 말없이 말을 몰아가던 독고성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자신을 뒤따르는 무사들의 수는 정확히 일백 팔십 일명. 처음에는 오백 명으로 시작했던 수호마왕군이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동안 험준한 전투를 치러오며 이렇게 수가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격전으로 단련된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그 위력은 설사 초기의 수호마왕군 500과 상대한다 하더라도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독고성은 이제 철저히 그들의 우상이 되어있었다. 설사 명을 내린다면 서슴없이 칼을 물고 자결할 만큼 무사들의 충성심은 믿어 의심할 바가 없었다. 흐뭇한 눈으로 그들의 면면을 쳐다본 독고성은 돌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맛 좋은 술과 산해진미가 우리를 기다린다. 힘을 내라.
와아아아.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간의 험준한 격전을 보여주듯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무림에서 가장 강한 조직, 수호마왕군이란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입은 영광의 상처들인 셈이다.
비록 무수한 동료들을 전장에 묻었지만 승리의 환희는 그 모든 기억을 잊기엔 충분했다. 이제 그들은 배교의 신임 교주 독고성의 친위대로써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수호마왕군은 배교 총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배교 총단에 당당하게 입성한 수호마왕군은 당연한 말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주급 인물에서부터 하급 무사들까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동원되어 그들을 맞이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수호마왕군이란 존재는 배교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결정적인 원동력이었으므로……
어서 오십시오.
공손한 태도로 맞이하는 총사 사준환을 보자 독고성의 얼굴에는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그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까지 소림사의 허드렛 일꾼으로 살고 있을 것이기에…….
특유의 성격상 독고성은 사준환을 마음 속까지 굳게 믿고 있었다. 이미 그는 암암리에 사준환에게 배교의 교주 자리를 양도하려는 마음까지 먹고 있었던 것이다. 말에서 내리는 독고성을 향해 사준환은 다시 한 번 예를 올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데 다소 서툴렀던 터라 독고성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 찰라 사준환의 안색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너무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기에 독고성은 그 기미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사준환은 웃는 낯빛을 지우지 않은 채 독고성을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대대적으로 주연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독고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사준환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이미 소교주님께 모든 권력을 이양할 준비를 마쳐 두었습니다.
이제 백도와의 전쟁도 끝났으니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 내일 정도면 본교의 19대 교주로 즉위하실 준비가 모두 끝날 것입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사준환은 떠듬거리는 독고성을 재차 재촉했다.
어서 드시지요. 술과 음식이 식겠습니다.
결국 독고성은 속의 말을 털어놓지 못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뒤에 도열해 있던 수호마왕군을 힐끗 쳐다본 사준환은 시립해 있던 수석호법을 불러 명을 내렸다.
수석호법께서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수호마왕군을 따로 마련한 자리에 안내해 주시오.
존명.
사준환은 다시 독고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을 위해 충분한 음식과 미주, 그리고 어여쁜 미희들을 준비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간 무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저들과 같이 들어가고 싶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