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나의 시기적절한 대꾸에 주위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졸지에 짖는 똥개가 되어버린 사내는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했다. 건방진 계집을 당장이라도 일도양단해 버리고 싶은 듯 손이 연신 움찔거리고 있었다.
안 돼!
그 모습을 본 세르발티 왕녀가 서둘러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이곳에서 사고를 친다면 행여나 간택식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처리할 결심을 굳혔다. 생각을 정리한 세르발티 왕녀는 타는 듯한 눈초리로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네년도 간택식에 참석하려는 왕녀 신분이냐?
그렇다. 왜? 이제 와서 꽁무니를 빼려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세르발티 왕녀는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네년에게 결투를 청한다.
뭐라고?
네년은 내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켰다. 따라서 내 대리인으로 하여금 그 대가를 받아내야겠다.
말을 마친 세르발티 왕녀는 고개를 돌렸다. 율리아나의 욕설로 인해 아직까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로 그 사내였다.
오스발 페이런 경.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대를 나의 대전사로 임명하겠어요. 그러니 그대가 내가 당한 모욕에 대해 단단히 대가를 받아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오스발이라 불린 사내는 즉시 싸울 채비를 갖췄다. 가슴보호대(護心鏡)와 어깨받이를 착용한 사내는 투구를 깊숙이 눌러 쓴 뒤 부하 기사가 건네주는 바스타드 소드를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세르발티 왕녀는 맛 좀 보라는 듯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네년도 대전사를 내세우도록 해라. 나설 자가 없을 경우 네년은 날 모욕한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한다.
듣고 있던 율리아나는 기가 막혔다. 말이 좀 과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시비를 건 쪽은 저쪽이 아니던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란 말에 눈이 뒤집힌 율리아나는 세르발티 왕녀를 향해 덮어놓고 몸을 날렸다.
대리인 따윈 필요 없다. 당사자끼리 직접 한 번 싸워보자.
순간 한 줄기 싸늘한 검광이 율리아나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번쩍.
싸울 채비를 마친 오스발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날린 공격이었다. 적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의 손속에는 일체의 사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감히 우리 왕녀님을 암습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오스발의 공격은 정통으로 율리아나의 앞가슴을 파고들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쩌쩌쩡.
산산이 부서진 검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율리아나의 앞에는 어느새 먼지로 범벅이 된 인영 하나가 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버티고 서 있었다. 바로 미첼이었다. 그는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오스발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런.
오스발은 난감한 기색으로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는 이미 손잡이만 남기고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대관절 언제 끼여들었는지 기척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상대의 몸놀림은 빨랐다.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로군.
부하 기사에게 새로운 검을 한 자루 건네 받은 오스발은 바짝 긴장하며 상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먼지를 뒤집어 쓴 것만 빼고는 극히 평범한 젊은 애송이였다.
미첼의 얼굴은 지금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감히 율리아나의 목숨을 노리다니…….
비록 율리아나에게 셀 수 없이 당해온 미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는 것만은 좌시할 수 없었다. 미운 정이지만 지금까지 함께 지내며 그 얼마나 쌓였던가? 때문에 서슴없이 율리아나에게 살수를 가한 오스발이 결코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미첼은 오스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그녀의 대 전사로 나서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들고 있던 검에서 푸르스름한 선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선들이 모여들며 검에서 1미터 남짓한 유형의 기운이 형성되자 오스발은 눈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와,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란 말인데? 세상에…….'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를 확인한 순간 오스발의 투지는 그대로 꺾여 버렸다. 비록 그가 팔라딘이긴 하지만 소드 마스터에게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추레한 차림새의 상대가 소드 마스터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미첼은 오스발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당신의 왕녀 역시 내가 모시는 왕녀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가 널 상대해 주겠다.
오스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물론 그에게 소드 마스터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누군가가 끼여들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제가 한 번 해결해 보고 싶군요.
깜짝 놀란 미첼이 고개를 돌리자 제럴드의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율리아나가 공격받은 일 때문에 잔뜩 화가 난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렇군. 녀석의 좌수검법이라면…….'
미첼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났다. 제럴드의 실력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심해라. 그래도 명색이 팔라딘이니…….
알겠습니다.
오스발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정말 다행이로군.'
걱정했던 소드 마스터가 뒤로 빠지고 웬 애송이가 그 자리에 끼여든 것이 오스발에겐 여간 반갑지 않았다. 혹시라도 상대에게 숨은 실력이 있을지 몰라 오스발은 애송이의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것이 채 스물이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고 걸음걸이가 어색한 것을 보니 십중팔구 절름발이 같았다.
내가 율리아나 왕녀님의 대전사로 나서겠소. 동의하시오?
오스발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용기가 가상해서 내가 친히 상대해 주겠다.
그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것을 보아 승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율리아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럴드가 익힌 좌수검법의 위력이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때를 놓칠세라 세르발티 왕녀가 잽싸게 결투 시작을 알렸다.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다. 물론 결투로 인한 사상에 대해서는 피아에 어떠한 책임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스발이 소드 마스터와 싸우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표정이 역력히 감돌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대전사 결투가 시작되었다. 율리아나의 대전사를 맡은 제럴드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가죽갑옷 외에 아무런 갑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제럴드는 방패를 들어 몸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상대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제럴드는 묵묵히 데이몬의 조언을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좌수검법은 공격 방면이 뛰어난 반면 방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너는 그 약점을 방패를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극복해야 한다. 또한 방패를 잘 사용하면 네 공격시점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장점이 있다.-
제럴드에겐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미첼에게서, 그리고 데스 나이트들에게서 방패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법을 충분히 교육받은 상태였고 거듭되는 대련으로 인해 기술은 완벽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팔라딘이라 하더라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을 현저히 얕잡아보고 있다. 그것 하나만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이미 끝난 승부나 다름없었다.
'후후후. 무모한 절름발이 녀석.'
예상대로 오스발은 제럴드를 완전히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덩치에 있어서 두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는 데다 착용한 갑옷의 수준 역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승부를 빨리 종결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선제공격에 들어갔다.
이야아압.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제럴드의 왜소한 몸을 양단해 들어갔다. 장검의 표면에는 은은하게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상대의 몸을 방패와 함께 단칼에 쪼개버릴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가볍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해냈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피해내는 모습에 오스발은 조금이나마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법이로군. 과감히 나선 것을 보니 한 수가 있기는 하군.'
오스발은 병기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들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는 상대의 검보다 족히 한 배 반 이상 길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공격이 상대에게 미치는 반면 상대의 공격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 사실을 떠올린 오스발은 몸을 빙글 돌리며 검을 맹렬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원심력을 최대한 이용한 연환공격이 제럴드의 상단과 중단, 그리고 하단을 연속해서 노렸다. 그의 장검에는 일격에 방패를 두 조각 내버릴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별다른 대응 없이 그저 피해내기만 했다. 마치 완벽한 순간을 노리는 독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오스발은 와락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생쥐 같은 녀석.
그는 휘두르는 검에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쾅, 쾅, 쾅.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사방을 종횡무진 내려찍었다. 반드시 한 번은 걸릴 것이란 생각에 오스발은 제럴드를 마구잡이로 몰아붙였다. 마치 일체 피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스발의 예상대로 제럴드가 피할 방위는 점점 차단되고 있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듯 제럴드가 방패를 들어 바스타드 소드에 마주쳐가자 오스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이야아압.
그는 기다렸다는 듯 혼신의 마나를 검에 불어넣었다. 바스타드 소드가 상대의 방패에 닿는 순간 오스발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끝났다. 애송아.
하지만 상황은 결코 오스발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꽝.
굉음이 터져 나왔지만 단박이라도 두 조각 나버릴 것처럼 보였던 방패는 부서지지 않았다. 도리어 오스발의 바스타드 소드가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상대의 기술에 의해 검에 실린 힘이 허공으로 분산되어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공격이 실패한 것을 느낀 오스발은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오스발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끄으.
섬뜩한 느낌이 목줄기를 파고드는 것을 느낀 오스발은 맹렬히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이미 경동맥은 목뼈와 함께 절단된 다음이었다. 오스발의 공격을 허공에 흘려보낸 제럴드는 지체 없이 반격을 가했다. 일격필살의 좌수검법이라 제럴드의 검은 상대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정통으로 파고 들어갔다. 오스발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로를 따라 말이다.
쨍그렁.
바스타드 소드가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제럴드가 검을 뽑아들자 오스발의 몸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마구 비틀거렸다. 목을 감싼 손아귀 사이로 핏줄기가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다.
푸슛, 푸슛.
화려한 갑옷을 선혈로 물들이던 오스발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것을 보니 즉사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결코 상대가 되어 보이지 않던 왜소한 애송이가 두 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팔라딘을 꺾은 충격은 그 정도로 컸다. 특히 세르발티 왕녀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승리를 확신했던 터라 오스발의 죽음이 섣불리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떠듬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세르발티 왕녀에게 율리아나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가갔다.
이번 대전사 결투는 나의 승리인 것 같군.
…….
원래는 네년을 단단히 골탕먹이려고 마음먹었지만 호위기사를 잃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지. 앞으론 주제넘게 나서지 말도록 해라. 네년이 가만히 있었다면 불쌍한 네 호위기사가 죽지 않았을 것 아냐?
율리아나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세르발티 왕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곱게 자라왔던 그녀가 어찌 이런 모욕감을 느껴 보았으랴? 하지만 패배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언반구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복색을 보니 레이토나의 경비병들 같았는데 하나같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오스발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결투입니까?
그의 말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쪽에서 먼저 결투를 청해왔어요.
둘을 번갈아 쳐다본 병사는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비록 결투였다고 하지만 사람이 죽은 이상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그 말에 카심이 난처한 듯 앞으로 나섰다.
그건 조금 곤란한 것 같소. 우린 아직까지 간택식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소이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무척 촉박하지 않소?
하지만 병사는 전혀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곳은 엄연히 크로센 제국의 영토, 따라서 이곳에서는 우리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강제로 모시기 전에 순순히 따라오십시오.
카심의 얼굴에 곤혹감이 어렸다. 조사를 받으러 간다면 참가 신청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르발티 왕녀는 무척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참가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사를 받아봐야 조금 늦게 출발할 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호호호 그것 참 깨소금맛이로군. 잘 되었어.'
병사 우두머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카심과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백주대낮에 시가지 중심부에서 소란을, 그것도 황태자비 간택식이 열리는 시기에 살인을 하다니 감히 본국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묵묵히 지켜보던 데이몬이 불쑥 끼여들었다.
이것 봐 대장. 내가 해결할 테니 자넨 율리아나를 데리고 참가 신청을 하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게.
둘의 대화를 들은 병사 우두머리는 기다렸다는 듯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들이로군. 당신들을 체포하겠소.
그러나 달려들려던 병사들의 발걸음은 일시에 멈춰졌다. 데이몬이 짤막하게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우린 카심 용병단원들이라네. 카르셀 왕녀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병사 우두머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떠듬 내뱉었다.
저, 정말입니까?
원한다면 증거를 보여줄까?
아, 아닙니다.
병사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부동자세를 취했다. 지금껏 귀가 닳도록 들은 상부의 지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지휘관 역시 페르슈타인 공작의 심복이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을 만날 경우 최상의 예의로써 접대하기 바란다. 만약 실수를 하는 자가 있다면 군율에 의해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병사 우두머리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감히 몰라본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들이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설사 이들이 카심 용병단을 사칭하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심 용병단원들로 짐작되는 이들에게 결례를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목이 달아나는 지름길이었다. 사실 병사들은 상당히 울화가 쌓여 있던 상태였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레이토나에 모여들었기에 치안 유지가 벅찰 수밖에 없었고 거듭되는 격무에 극히 지친 상태였다. 때문에 누군가가 소란을 피우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판국이었다.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 모여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런 상황에서 결투가 벌어져 사람이 죽었으니 그들로써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소란을 피운 당사자가 카심 용병단이라니……. 병사들이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 카심 용병단을 대했을 때의 대처요령이었기에 그들은 두말도 하지 않고 일행을 안내했다.
저희들이 신청장소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용병대원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해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험악하게 대하던 병사들의 태도가 갑자기 180。 바뀌어 버리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세르발티 왕녀도 마찬가지였다.
조, 조사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그 말에 병사 우두머리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조사는 없소. 이 분들은 우리가 맞아들여야 할 최고의 귀빈이라오. 당신들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시오. 이분들 덕분에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되니 말이오.
말을 마친 우두머리는 휘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길을 열어라. 이분들을 최대한 빨리 간택식 신청장소로 모셔야 한다. 그리고 한 명은 먼저 가서 영접할 채비를 갖추도록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가벼운 갑주를 걸친 병사 하나가 서둘러 몸을 날렸다. 병사 우두머리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다시 한 번 허리를 꺾었다.
저희들을 따라오십시오.
용병들은 당혹한 기색으로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직 데이몬만이 상황을 익히 짐작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짙게 떠올리고 있었다.
'페르슈타인이란 녀석, 몸이 달긴 달았나보군.'
신청장소에 도착한 용병들은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그들을 맞아들이는 자의 신분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한껏 웃음을 떠올린 채 달려나온 자는 화려한 갑주를 걸친 중년의 기사였다. 그의 뒤로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기사들이 죽 늘어선 것을 봐서 신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직속 기사단인 듀크 나이트를 책임지고 있는 크로비츠 폰 아멘가드라고 합니다. 레이토나로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듀, 듀크 나이츠의 총수시라고요?
그의 소개에 카심은 깜짝 놀랐다. 물론 그가 듀크 나이츠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의 뒤를 이어 아르카디아 제 2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무력집단 듀크 나이츠. 그곳의 총수가 친히 자신들을 영접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뒤이어 한 젊은 기사가 자기 소개를 하자 카심은 아예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크란시아 폰 헬프레인입니다. 저는 현재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 성이 헬프레인이라면…….
이해를 돕기 위해 크로비츠가 소개를 덧붙였다.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첫째 아드님입니다. 저희 듀크 나이츠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재이기도 하지요.
카심은 말을 잊었다. 듀크 나이츠의 총수도 모자라서 페르슈타인 공작의 아들까지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레이토나로 파견되다니…….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카심을 대신해서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엔 다소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거 반갑소이다. 이처럼 쟁쟁하신 분들이 우리를 마중 나오시다니 정말 고맙기 짝이 없구려.
데이몬을 보자 크로비츠와 크란시아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의문에 쌓인 미지의 흑마법사가 드디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마법사만 가세한다면 그들의 앞길에 거칠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한껏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들은 데이몬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만나 뵙게 되어 필생의 영광입니다.
전 대륙에 자자하신 위명을 떨치신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 데이몬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응대했다.
영광이라니 나 역시 기분이 무척 좋소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데이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아시다시피 우린 카르셀 왕녀를 간택식에 참가시키기 위해 이리로 왔다오. 이제 슬슬 참가신청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로비츠가 얼른 대답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미 저희들이 참가신청서를 대부분 작성해 놓았습니다.
왕녀께서 마지막으로 서명만 하시면 아무 문제없이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랬소? 늦을까봐 부랴부랴 달려왔건만…….
크로비츠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늦으실 경우엔 언제까지라도 관리들을 대기시켜놓을 작정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파견된 것이지요. 그럼 이리로 오십시오. 카르셀 왕녀님과 카심 용병단원들을 위해서 특별 마차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고맙구려.
데이몬은 당연하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 역시 불안한 눈초리로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이런 거창한 응대를 받을 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크로센 제국에서도 이름난 실력자들이 레이토나에 파견되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니…….
일행이 크로비츠의 뒤를 따라 들어간 뒤 남은 왕녀 일행들은 부러운 눈초리만 날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듀크 나이츠 단장과 페르슈타인 공작의 큰아들이 나와 영접할 정도라면…….
저들이 정녕 카심 용병단원들이 맞다면 그럴 만도 하지.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세르발티 왕녀의 모습도 보였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오래지 않아 수도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벌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난 다음이었고 두 번째 무리가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독자적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간택식이 열리기 전에 데이몬을 페르슈타인 공작과 만나게 하려는 속셈 같았다.
따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에 있어서는 먼저 출발한 무리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병사와 엄선된 호위 기사 2백여 명이 다섯 대의 대형 마차에 포진한 채 일행을 철통같이 호위했던 것이다. 호위 기사 중에 소드 마스터가 열 다섯이나 포함될 정도였으니 페르슈타인 공작이 데이몬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실질적인 카심 용병단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카심과 데이몬이 크로비츠, 크란시아와 함께 큼지막한 마차에 승차했고 미첼을 비롯한 나머지 용병들은 다음 마차에 탑승했다. 율리아나에게는 한 대의 고급 마차와 열 명의 시녀들이 배정되었다. 가장 선두 마차와 후미의 마차에는 소드 마스터들이 탑승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호위 병력 중에 200명의 기사까지 배치된 것을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호위였다. 이렇게 해서 카심 용병단원들은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까지의 여정을 시작했다.
펠젠틴까지는 약 하루 반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쉬도록 하십시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데이몬이 크로비츠의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맙소. 그런데 호위병력의 규모가 정말 엄청나구려. 이들 모두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개인 사병들이오?
크로비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로센 제국의 각급 사단장들은 거의 모두가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작전하께서 정규군까지 모두 통제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놀랍구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숨겨진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크로비츠 옆에 앉아 있는 크란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저 나이에 절정에 거의 근접한 경지에까지 오르다니 놀랍군.'
아무리 보아도 20대 중반을 넘어가지 않을 듯한 용모였지만 크란시아는 소드 마스터를 거의 목전에 둘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미첼에 비해 별달리 손색이 없는 경지인 것이다. 대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의 아들이 이룬 성취라고 믿어지지 않았는지 데이몬은 연신 감탄성을 발했다.
대단한 성취이구려. 대체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했기에…….
크란시아는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습니다. 모두가 기사단의 선배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택이지요.
보고 있던 크로비츠가 슬그머니 끼여들었다.
그는 우리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 중에서도 소문난 수련광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지극히 공정한 경쟁을 뚫고 부대장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는 그분의 아들이라고 해서 일체 특혜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때문에 저희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은 그를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실제로 선배들은 그가 잘못을 저지를 때 엄히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잘못을 꾸짖지 않고 그냥 넘긴다면 큰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공작 전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크로비츠의 말에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듣기엔 쉬워 보였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권력자는 많지 않았다. 자식사랑은 어버이의 본능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인물이로군. 사자가 새끼를 키우는 방법을 실제로 재현하다니…….'
페르슈타인 공작이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일 것이란 생각이 데이몬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자식을 저 정도로 조련시키는 것을 보니 충분히 크로센 제국을 탐낼 만한 그릇이라 생각되었다.
데이몬이 침묵을 지키자 듣고 있던 카심이 입을 열었다. 놀라움이 상당부분 가셨는지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눈빛을 찾은 상태였다.
듀크 나이츠의 단장을 맡으시고 있다면 작위가…….
크로비츠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 작위가 없습니다. 제 필생의 소망은 죽을 때까지 공작전하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귀족 기사들이 무도회나 연회에 참가할 시간동안 저희들은 검술 수련에 매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작위를 반납했지요.
카심 역시 입이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듀크 나이츠가 머지않아 크로센 기사단의 아성을 넘어설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이런 부하들을 거느린 페르슈타인 공작에 대해 두려움마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페르슈타인 공작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정말 대단한 인물이로군.
부하들에게 이 정도로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니 말이야.'
그들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담소를 나누었다. 엄선된 정예병 1천 명의 철통같은 호위아래 일행은 조금씩 펠젠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뒤에 따라가는 마차에서도 두런두런 대화소리가 흘러나왔다.
굳이 호위기사 녀석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제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첼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혹시 그 녀석이 율리아나를 모욕해서 죽인 것이냐?
듣고 있던 제럴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그런 사소한 일로 사람을…….
제럴드는 고개를 들고 빽 소리를 질렀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일이라뇨? 교관님도 놈이 한 욕지거리를 들으셨잖아요?
하지만 상소리는 율리아나가 먼저 시작했잖아?
경우가 틀리잖아요. 율리아나 왕녀님은 여자라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감히 그놈이…….
그 말에 미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율리아나 계집애에게?
제럴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급히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제럴드를 보며 미첼은 혀를 찼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스무 배가 넘게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을 사모하는 계집애가 있는가 하면 또 그 계집애를 짝사랑하는 녀석이 있다니……. 쯔쯔.'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한심한 녀석. 율리아나의 성질머리를 익히 겪어 보고도…….'
만약 율리아나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용병단 전체가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미첼이 아는 율리아나는 대륙에서 제일 콧대가 높은 소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이몬에게 정체 불명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돌아누운 제럴드에게서 시선을 거둔 미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이라…….'
문득 미첼의 머릿속에 자신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검술수련에 매진하느라 누굴 만날 틈이 있을 턱이 없었고, 나이가 든 뒤로는 카르셀을 벗어나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던 그였다.
수많은 카르셀의 처녀들이 추파를 던져왔지만 미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와의 로맨스를 그리던 미첼에게 카르셀의 순박한 처녀들이 눈에 찰리가 없었다. 그 때를 떠올려본 미첼은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땐 내가 정말 철이 없었지. 헛된 야망에 눈이 멀었다고나 할까?'
미첼은 묵묵히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열정을 불살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대상이 누구이던 간에 말이야…….'
창 밖으로 크로센 남부의 경치가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크, 큰일입니다.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윌리엄스 후작은 난데없이 달려 들어온 이를 맞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오. 테오도르 집정관.
젊은 집정관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근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방금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바인의 흑마법사와 그의 용병단이 지금 펠젠틴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그 말이 사실이오?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분노의 광망이 떠올랐다. 물론 그가 세바인의 흑마법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근위기사 엘케인을 포함한 토벌대를 참혹하게 박살내어 크로센 기사단의 명성을 여지없이 실추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비록 황제의 호위를 위해 복수를 나중으로 미뤄놓았지만 언제고 찾아가서 단단히 빛을 갚고 말 것이라 벼르고 있던 상대가 아니었던가? 그런 가증스런 존재가 겁도 없이 펠젠틴으로 오고 있다는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요절내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 작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하지만 이어진 집정관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는 지금 듀크 나이츠의 단장인 크로비츠의 엄밀한 호위아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호위병력 1천에 듀크 나이츠 200명이 그의 호위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크, 큰일이구려.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짐작한 것이다. 듀크 나이츠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각할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놈이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면……. 후,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려. 그랜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 넷과 본 드래곤을 부리는 그놈이 가세한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소.
그렇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입니다.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절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크로센 기사단의 힘으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견제해 왔지만 일이 성사될 경우 그 균형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거느린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은 정말 엄청난 전력이었다. 만에 하나 그들이 듀크 나이츠와 힘을 합할 경우 크로센 기사단은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황실의 안위를 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상황을 떠올려 본 테오도르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페르슈타인 공작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기습조를 파견해야겠습니다. 흑마법사를 죽이던지 최소한 중상을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는 짙게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거기에는 동의하오. 하지만 기습에 우리 크로센 기사단원들을 동원할 수는 없소. 내 휘하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섣불리 투입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요.
물론 그것은 테오도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기습조에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추후의 사건전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는 마음을 정한 듯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래도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어새신들을 동원해야겠습니다.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깜짝 놀랐다.
하, 하지만 그들로는 듀크 나이츠를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집정관도 아시다시피 어새신은 결코 팔라딘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괜찮습니다. 어차피 목적이 흑마법사를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까요.
테오도르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짙어졌다.
투석기와 석궁을 이용해서 한 번 공격을 해 볼 생각입니다. 원거리 공격을 가한 뒤 퇴각하는 방법으로 치고 빠지기를 거듭한다면 호송대의 발목을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놈을 죽일 수도 있고요.
테오도르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 방법이 가장 적합하구려. 그렇다면 부관을 시켜 매복에 적당한 지형을 물색해 놓겠소이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속 부대의 문장이 찍혀있지 않는 투석기를 좀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캐터필터나 발리스타 등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본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펠젠틴 남부에 위치한 제 13 무기보관소에는 그동안 각 국에서 압수한 대형 공성무기들이 보관되어 있소. 아마도 최소한 백기 이상의 투석기가 있을 것이오. 물론 다양한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으니 기습조의 정체를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지요. 게다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11 무기보관소에는 명품으로 알려진 하르젤 왕국의 석궁 500여 자루가 보관되어 있소. 아시다시피 강철갑주를 가볍게 꿰뚫을 수 있는 강력한 석궁이지요
훌륭한 생각입니다.
테오도르 집정관의 얼굴에 감탄스럽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여러 왕국에서 압수한 무기이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기습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무기들이었다.
지금껏 크로센 제국은 여러 왕국들의 전쟁을 중재해왔다. 벌어진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산될 것 같으면 크로센 제국은 즉각 대군을 투입해서 전쟁의 확산을 막았다. 강력한 크로센 제국의 군대 앞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고집할 왕국은 없었다.
때문에 수많은 왕국의 군대가 크로센 제국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고 그 과정에서 노획한 무기들은 고스란히 크로센 제국으로 옮겨졌다. 윌리엄스 후작은 바로 그 무기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집정관 테오도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 안으로 어새신 부대를 출동시켜 무기를 손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후작께서는 그곳의 방비상황을 한 번 점검해 주십시오.
대형 공성무기들이라 방어가 그리 삼엄하진 않을 것이오. 문제는 석궁이 보관된 제 11 무기보관소라오. 경비병들의 수가 제법 많을 텐데…….
기습에 능한 어새신들이니 무기를 확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가급적 경비병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도록 당부해 놓겠습니다.
말을 마친 테오도르는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서둘러 어새신 부대를 출동시킬 생각밖에 없었다. 홀로 남은 윌리엄스 후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기껏 길러놓은 어새신 부대로 아군을 공격해야 하다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심사가 착잡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시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일행이 레이토나를 떠나온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날이 저물자 그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미리 마련해놓은 숙소에서 묵었다. 파라다이스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의 고급 여관이었다.
좋은 음식과 푹신한 잠자리에서 하루를 보낸 일행들은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길을 떠났다. 함께 마차에 타고 가던 크로비츠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저녁 무렵이면 펠젠틴에 도착할 것입니다. 공작전하께서 친히 성문으로 나오셔서 맞이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아마도 오늘밤은 그분의 저택에서 묵게 될 것 같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이라……. 무척 으리으리하겠구먼.
데이몬의 말에 크로비츠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도 실망하실 겁니다. 공작전하께서는 생각보다 검소하시거든요.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부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데이몬의 입장에서 그는 사준환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모를 꾀하는 점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그 생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생각보다 걸출한 인물이로군. 모든 것을 떠나서 수하에게 이토록 진심 어린 충성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크로센 제국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지.'
문득 데이몬의 머릿속에 500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영웅, 크로센 대제에 대한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대체 어떤 녀석일까? 혹시 나와 동시대의 인물일까?'
만약 동시대의 인물이었다면 데이몬이 모를 리가 없었다.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무인(武人) 특유의 승부욕을 떠나더라도 반드시 한 번 만나 보고픈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센 대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무덤에 묻혔고 자신은 아직까지 살아 드래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이몬은 크로비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로센 대제는 이곳에 묻혀 있소?
그렇습니다. 81세로 천수를 다하신 대제께서는 펠젠틴 북쪽에 위치한 제왕의 능에서 영면을 취하고 계십니다.
크로센 대제를 거론함에 있어 크로비츠는 극도의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역모를 꾀하는 무리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센 대제에게만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크로센 제국의 기사들에게 크로센 대제란 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무의 절대자였다. 데이몬은 다시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제왕의 능이라……. 혹시 그곳에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이 남아 있을까? 만에 하나 복수를 성공하고 난 뒤 중원으로 건너가려면…….'
데이몬의 상념은 거기에서 끝났다. 마차 밖에서 다급한 경고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기, 기습입니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파공성 소리가 꼬리를 물고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석궁 사격이 퍼부어지는 소리였다.
쐐액. 쐐애액.
화살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 소리를 듣자 크로비츠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설마 크로센 제국의 영토 안에서 기습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린 크로비츠는 즉시 마차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곳에 계십시오. 강철로 지붕이 보강된 마차라서 석궁 사격 정도에 뚫리지 않을 것입니다.
크로비츠의 눈은 분노의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최고의 요인을 맞아들이는 상황에서 기습을 가하다니……. 누군지 알 순 없었지만 크로비츠는 기필코 용서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마차 밖으로 나와보니 상황은 생각 외로 심각했다. 방패로 몸을 가린 병사들이 열심히 화살공격을 막고 있었지만 이미 1백 명 가까운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크로비츠가 보고 있는 중에도 한 명의 병사가 날아온 퀘렐에 맞아 이승을 하직했다.
끄아악.
날아온 퀘렐은 강철제의 가슴보호대를 여지없이 꿰뚫어 버린 뒤, 엎어진 병사의 등판에 삐죽이 살촉을 내밀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위력의 석궁이었다.
핑.
날아오는 퀘렐 한 발을 방패로 퉁겨낸 크로비츠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들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하르젤 왕국의 석궁이야. 상황을 보니 흉수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홧김에 퀘렐 살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크로비츠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모두 밀집 대형으로……. 한데 모여 화살공격을 방어한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은 지금 즉시 돌격해서 궁수를 처리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로 잰 듯 척척 들어맞는 움직임에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밀집대형, 밀집대형.
모여든 병사들이 사각형 방패를 일제히 포개자 거기에는 거대한 방어벽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위력이 강한 하르젤 특산의 석궁이라도 두 겹, 세 겹으로 포개진 방패의 벽을 뚫을 순 없었다. 그 사이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이 빗발처럼 퍼붓는 화살비를 뚫고 돌격을 시작했다.
화살공격에 상당수의 말을 잃었지만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은 대부분 건재했다.
튼튼한 마갑(馬甲)을 씌운 덕분이었다.
두두두두.
기사들의 돌격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아무리 위력이 강한 석궁사격이라고 하나 팔라딘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의 돌격을 막을 순 없다. 뛰어난 몸놀림, 그리고 갑주와 방패에 밀어 넣은 마나 덕택에 팔라딘들은 어렵지 않게 날아드는 화살비를 막거나 피해내며 앞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용서할 수 없다. 단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
크로비츠는 성난 눈빛으로 능선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뛰어난 시력을 보유한 덕택에 크로비츠는 어렵지 않게 습격자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습격자들은 얼룩덜룩한 위장복을 걸치고 복면을 한 자들이었다. 열심히 석궁을 쏘아대고 있지만 밀집대형으로 방어하는 덕택에 병사들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젠 돌격해간 팔라딘들이 궁수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때 느닷없이 둔탁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퉁. 투투퉁.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자 크로비츠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다급하게 하늘을 올려본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투석기……. 이런 빌어먹을…….
조금 떨어진 산봉우리에서 큼지막한 돌덩이들이 맹렬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밀집대형으로 모여있는 곳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고 돌덩이뿐만 아니라 발리스타로 쏘아붙인 듯한 나무기둥들도 군데, 군데 섞여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십 기 이상의 투석기가 쏘아붙인 분량이었기에 크로비츠의 얼굴은 삽시간에 검게 물들어버렸다.
크, 큰일이야. 밀집대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투석기 공격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등골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공격으로 상대를 모이게 한 뒤 투석기를 쏘아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전형적인 전장에서의 기습공격에 속했다. 하지만 크로센 제국의 영토 안에서 설마 이런 공격을 당할 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크로비츠는 일순 어쩔 줄 몰라했다.
안되겠어. 피해가 있더라도 병사들을 산개시켜야겠어.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피하게 할 순 있었지만 문제는 마차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이미 화살공격에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몰살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강철로 보강된 마차라서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에 병사들이 밀어봐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데다 투석 공격에 격중된다면 제 아무리 견고한 마차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가 돌덩이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그는 서둘러 산개 명령을 내렸다.
밀집대형을 해제한다. 모든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마차를 이동시켜라.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돌격한 팔라딘들은 석궁 사격이 가해지는 곳에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팔라딘들이 지척으로 접근하자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석궁을 버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말들이 속도를 낼 수 없는 길만을 골라 도주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팔라딘들은 즉시 추격을 개시하려 했다. 죽은 병사들의 목숨 값을 받아내려는 듯 하나같이 서슬 시퍼런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크로비츠는 목청을 돋워 고함을 질렀다.
추격하지 마라. 대신 산등성이의 투석기 포대를 공격하라.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팔라딘들은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 역시 이쪽으로 가해지는 투석 공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투석기가 위치해 있는 곳은 제법 높은 산등성이였다. 말을 타고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했다. 열심히 달려 근처에 도착한 기사 우두머리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하마(下馬)하라. 도보로 달려 올라간다.
말에서 뛰어내린 팔라딘들은 검을 뽑아든 채 투석기가 설치된 곳을 향해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그것을 확인한 크로비츠 역시 장검을 뽑아들며 서둘러 마차 쪽으로 뛰어갔다.
부디 투석 공격이 마차에 적중하지 않아야 할 텐데……. 지금으로썬 운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투석 공격까지 막을 수는 없다. 투석기 공격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경우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비츠는 날아드는 돌덩이들을 몸으로라도 막을 작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흑마법사의 안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오래가지 않아 멈춰졌다.
이, 이럴 수가?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마차 쪽을 노려보았다. 날아든 돌덩이로 인해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었는데 상황은 전혀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콰콰쾅.
투석기에서 쏘아진 돌덩이가 무언가에 부딪히며 허공에서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그것은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나무기둥들도 마찬가지였다.
콰직, 콰지직.
나무기둥들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길쭉한 빛줄기와 부딪히자마자 삽시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스러졌다. 산산이 부서진 나무 부스러기가 돌가루와 함께 자욱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작렬해서 동료들을 납작하게 깔아 뭉개버릴 것 같았던 돌덩이들이 허공에서 맥없이 부스러지고 있는 것이다.
저, 저건 뭐지?
매직 미사일 같은데……. 도무지 수를 셀 수도 없군.
마차 위 허공을 종횡무진 뒤덮고 있는 것은 바로 매직 미사일이었다. 대략 수백, 수천 발의 매직 미사일이 허공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올이 촘촘한 그물처럼 투석 공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매직 미사일 자체가 지능이 있는 것처럼 투석기 포탄에 달려들어 자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택에 투석 공격은 마차 주변으로 단 한 방도 작렬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크로비츠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허공을 새카맣게 뒤덮을 정도의 매직 미사일이라니……. 9서클의 위력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매직미사일의 위세에 질렸는지 투석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려는 모양이었다. 부아가 치민 크로비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반드시 잡아서 배후를 밝혀야 한다.
투석 공격 때문에 궁수들을 깡그리 놓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뒤 팔라딘들은 맥없이 말을 몰아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이라곤 생명이 사라진 시신 몇 구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놈들의 도주가 워낙 신속해서……. 몸놀림을 보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어새신 같았습니다.
크로비츠는 눈을 부라렸다.
명색이 팔라딘이란 놈들이 단 한 놈도 생포하지 못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놈들이 워낙 신속히 도주했기 때문에…….
팔라딘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양 침묵을 지켰다. 거둔 성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크로비츠는 마뜩찮은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놈들이 버리고 간 투석기의 문장은 조사해 놓았는가?
여러 왕국의 것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석궁의 형태는 의심할 나위 없는 하르젤 왕국의 것이었는데 여러 왕국의 표식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본국에서 압수해 놓은 무기들 같습니다.
크로비츠는 바짝 약이 올랐다.
용의주도한 놈들이로군. 펠젠틴에 도착하면 무기보관소의 상황을 한 번 알아봐야겠어. 그럼 즉시 사상자의 수를 집계하도록 해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
명령을 내린 크로비츠는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말 그대로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화살 공격이 마차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진데다 강철로 보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뚫고 들어간 화살은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공격이 시작되자 병사들이 재빨리 창문을 닫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차를 끌던 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있었다. 이제 인력으로 끌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로비츠는 머릿속이 무척 복잡해졌다.
말이 모두 죽었으니 다시 보충할 때까지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겠어.
생각을 마친 그는 병사들을 통솔하는 부대장 몇 명을 불렀다.
힘이 좋은 병사를 두 부대 정도만 차출하라. 그들에게 갑옷과 무장을 벗게 한 뒤 마차를 끌게 해야 한다. 가까운 보급창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
상황을 대충 정리한 뒤 크로비츠는 겸연쩍은 기색으로 흑마법사가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유일하게 그 마차만이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살나 있다고 봐야 했다. 왜냐하면 맹위를 떨친 매직 미사일이 창문을 부수고 발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간 크로비츠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기습을 받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터라……. 만약 마법사 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데이몬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일행들이 무사하면 다행이지.
크로비츠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호위병력 중에 많은 사상자가 난 상황이었는데 일행들만 무사하면 다행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그리 좋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급급히 얼굴빛을 고쳤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매직 미사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 그건 그렇고 어떤 놈들이던가? 감히 크로센 제국의 영토 안에서 우릴 공격한 놈들이…….
크로비츠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만 단 한 놈도 생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황을 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어느 놈인지 모르지만 간이 상당히 큰놈이로군. 이런 일을 꾸미다니 말이야.
크로비츠는 이번 습격의 배후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과 흑마법사가 손을 잡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크로비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테오도르 집정관! 언제고 꼬리가 잡힌다면 쓴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일이 뜻대로 될 경우 내가 직접 네놈의 처형을 주관할 테니까…….'
생각을 마친 크로비츠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준비를 마쳤는지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문의 습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크로센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다보니 이따금 산길을 지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가차없이 화살공격이 퍼부어졌다.
윽.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졌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무장을 벗은 상태로 마차를 끌고 가던 병사들이었다. 화살공격을 막을 방패와 갑옷이 없었기에 화살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궁수들의 위치가 파악하자 팔라딘들은 반사적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크로비츠가 그렇게 하도록 지시해 놓았던 것이다.
두두두두.
널린 시신을 쓸어보던 크로비츠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공간이동을 시도했을 것을…….
하지만 그러기에는 호위병력의 수가 워낙 많았다. 게다가 마법방해가 끼여들 여지가 있었으므로 도보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이처럼 거듭된 기습을 당하다니…….
조만간 투석공격이 퍼부어 질 것이 확실했기에 크로비츠는 섣불리 병력을 밀집대형으로 배치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임무는 엄연히 흑마법사의 호위였으므로 더 이상 그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기사로써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빗살처럼 퍼붓는 화살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병사 몇 명이 풀썩 쓰러졌다.
크윽.
눈이 달려있지 않은 화살이 그들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옆의 동료들이 서둘러 방패로 가렸지만 그들은 이미 절명한 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투석기가 작동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로 인해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투투퉁.
자고로 전장에서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마법공격과 투석공격이다.
격중될 경우 시체조차 온전히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겁먹은 기색으로 부산하게 산개하기 시작했다. 투석 공격에 맞고 안 맞고는 한 마디로 운에 달려있었다.
휘유우우
1차로 발사된 투석기의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흑마법사가 또다시 자신들을 도와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런 병사들을 쳐다보며 크로비츠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팔라딘들이 궁수들을 처리할 때까지 조금만 버텨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은 아까와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적극적으로 끼여들기로 작정한 듯 흑마법사가 탄 마차에서 눈부신 빛 줄기가 무수하게 발사되었다.
콰콰콰콰.
부서져나간 마차 창문을 통해 퍼져나간 매직 미사일의 수는 아까보다도 훨씬 많았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매직 미사일 무리에 의해 떨어지던 투석기 포탄은 곧 흔적도 없이 분쇄되어버렸다. 그것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매직 미사일 다발은 허공에서 두 무리로 갈렸다. 마치 잘 훈련된 돌고래를 연상시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쐐애애액.
숨막히는 파공성과 함께 한 무리의 매직 미사일 다발이 근처 산등성이의, 투석기 포대가 있으리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날아갔다. 나머지 매직 미사일 다발이 날아가는 곳은 화살공격이 퍼부어지는 지점이었다.
우와아악.
그곳에서 숨막히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비명소리가 늘어남에 따라 화살과 투석 공격이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크로비츠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되었어. 이제 이 지긋지긋한 습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군.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각 부대장은 발이 빠른 병사를 소집해서 산등성이를 점령해라. 투석기를 발사한 놈들을 깡그리 처리해야 한다. 명심하도록.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치하되 포로 몇 명은 반드시 잡아와야 한다.
와아아아.
수백 명의 병사들이 산등성이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기에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먼저 돌격을 시작한 기사들이 적 궁수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한 달음에 산등성이에 뛰어든 병사는 놀라운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세, 세상에…….
상황은 이미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의문의 습격자들은 이미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사방으로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대부분 기절한 상태로 보였는데 그들의 몸 위에는 아직까지 매직 미사일 다발이 허공을 맹렬히 맴돌고 있었다.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매직 미사일 다발들은 흉흉한 기색으로 그들에게 달려들려 했다. 데이몬이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도록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윽.
선두의 병사 한 두 명이 매직 미사일에 격중되어 풀썩 쓰러졌다. 훈련받은 대로 방패로 막으려 했지만 매직 미사일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방패를 피해 급소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새신으로 짐작되는 습격자들이 당한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해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매직 미사일 다발은 서너 명의 병사만을 쓰러뜨린 뒤 마치 그 자리에 언제 존재했었냐는 듯 픽 하고 꺼져버렸다.
다, 다행이로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병사들은 서둘러 습격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저항은 일체 없었다. 모두가 매직 미사일에 흠씬 얻어맞아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궁수들에게로 돌격한 기사들도 큰 성과를 거두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흑마법사의 매직 미사일에 넉다운된 상태였던 것이다. 의문의 습격자들은 곧 굴비두릅 엮이듯 줄줄 묶여 본진으로 호송되는 처지에 놓였다.
병사들의 포위 하에 꽁꽁 묶여 무릎 꿇려진 포로들을 본 순간 크로비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가장 가까이 무릎 꿇려 있는 포로에게 다가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크로비츠는 머뭇거림 없이 포로의 머리통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퍽.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지며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생명이 사라진 시신이 맥없이 바닥에 털썩 널브러졌다. 그 모습을 보자 포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명을 본보기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크로비츠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포로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그럼 어디 정체를 한 번 털어놓아 보실까?
하지만 입을 여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 그것을 보아 혹독하게 훈련받은 어새신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크로비츠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아무래도 단단히 쓴맛을 봐야 입을 열 놈들 같군.
두 번째 포로에게 다가가려던 크로비츠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화살이 자욱하게 박힌 세 번째 마차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을 통해 율리아나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본 크로비츠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여자가 섞여 있는 귀빈들 앞에서 끔찍한 고문을 시행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사실을 알아내긴 힘들 것 같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크로비츠는 부관을 불러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듀크 나이츠의 일원이며 소드 마스터이기도 한 기사였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전혀 없어 보였다.
기사 20명과 병사 1백 명을 붙여 줄 테니 이곳에 남아서 놈들을 심문하라. 난 귀빈들을 모시고 출발하겠다. 단단히 명심하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들의 입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을 마친 크로비츠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놈들 중에 반 정도는 본보기를 위해 사정보지 말고 죽여버려라. 그래야 남은 놈들의 입을 여는 것이 편할 것이다. 또 하나, 자백한 놈들은 죽이지 말고 펠젠틴으로 데리고 오도록…….
부관은 즉시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크로비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출발한다. 시간이 무척 지체되었으니 서둘러라.
남은 병사들 중에서 또다시 수십 명이 차출되어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삐걱.
마차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말이 끄는 것보다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마차가 그곳에서 사라진 직후 그곳에서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분노에 찬 병사들의 손속에 포로들이 생을 마감하며 내지르는 비명소리였다.
뭐, 뭐라고? 3개 부대가 전멸이라고?
뜻밖의 보고를 받은 테오도르는 아연해했다.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여 키워놓은 어새신 부대가 거의 괴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힘이 빠진 듯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5년, 5년의 세월을 투자해서 겨우 어새신 4개 부대를 키워 놓았는데 일순간에 3개 부대가 몰살당하다니…….
그의 앞에는 먼 길을 달려온 듯 전신이 먼지투성이가 된 인영 하나가 무표정한 눈빛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 때문인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동료들은 대부분 흑마법사의 공격에 당했습니다. 흑마법사 놈이 쏘아붙인 매직 미사일 다발에 변변찮은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혔습니다.
고, 고작 매직 미사일에…….
어새신 전령은 무감각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엄청난 위력의 매직 미사일이었습니다. 단 한 방에 투석기 포탄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수가 엄청났습니다. 족히 수백, 수천 발이 넘어 보이는 매직 미사일이었습니다.
그, 그런 일이……. 그렇다면 사로잡힌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먼 곳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동료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전 놈들이 남은 동료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을 본 뒤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오! 신이시여.
갑자기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듯 테오도르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힘들게 끌어 모아 훈련시킨 어새신들을 깡그리 잃은 것이 여간 애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흑마법사의 위력이 그렇게 강할 줄이야……. 도대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관자놀이 부분을 한참동안 문지른 테오도르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코빙턴의 의중은 어떤가?
코빙턴이란 어새신 부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의 이름이었다. 어새신 전령은 즉각 대답했다.
남은 병력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야습을 감행해볼 생각이라 하셨습니다. 마차를 끄는 말을 깡그리 죽여 행군속도를 현저히 떨어뜨렸으니 놈들은 오늘 안으로는 펠젠틴에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틈을 노려 시간을 더 끌어보겠다는 것이 대장의 계획입니다.
그 말에 테오도르는 불행 중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고무적인 보고로군.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흑마법사 놈이 간택식이 열리기 전에는 펠젠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그 무렵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전령의 급보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는 보고서를 읽자마자 와락 구겨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그의 얼굴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인가? 테오도르 집정관. 하지만 어림없다. 이미 난 네놈이 암암리에 어새신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놓은 상태니까…….
그는 즉각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즉시 병력을 파견하라. 목표는 펠젠틴 남서쪽 실로프 산의 계곡. 그곳은 테오도르 놈이 비밀리에 어새신들을 교육시키던 곳이니 아직까지 잔당이 몇 놈 남아 있을 것이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잡아 오거라.
알겠습니다.
듀크 나이츠에서 기사들을 차출한 다음 출발하라. 희생 없이 놈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선 반드시 팔라딘을 파견해야 한다.
부관은 즉시 복명한 채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은 지긋이 입술을 악물었다.
테오도르. 이미 난 네놈의 측근에다 밀정을 박아놓았다. 그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껏 네놈의 방종을 묵인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보아 넘길 수 없다. 머지않아 네놈에게 날 애먹인 데 대해 적절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다.
거듭 다짐을 거듭하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별안간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건 그렇고 수천 발의 매직 미사일이라……. 말로만 들어왔던 9서클이지만 정말 무시무시하군. 어새신 3백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할 정도라니…….
공작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놈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이상하군. 통상적으로 흑마법사들은 피와 살육을 즐기는 편인데 말이야?
공작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가 나와 손을 잡는다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없다. 이미 난 야망을 위하여 딸의 목숨까지 포기한 상태이니까.
이미 그는 테오도르가 호송대의 발걸음을 지체시키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셰넌을 간택하기 전까지 날 흑마법사와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 좋은 계략이야. 테오도르. 허나 넌 내가 이미 셰넌을 희생시키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딸을 생각하자 공작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감돌았다.
날 용서하거라. 셰넌. 하지만 가문의, 그리고 조상들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널 희생시켜야 하는구나.
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예상대로 호송대는 펠젠틴의 근교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밤을 맞았다.
인간의 힘으로 말이 끄는 마차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 데다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습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긴 상황이었으므로 행보가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비츠는 밤을 새워서라도 행군을 독려할 생각이었다.
서둘러라. 이 밤이 가기 전에 펠젠틴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크로비츠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횃불로 앞을 밝힌 채 관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일행에게 느닷없이 화살 공격이 이루어졌다.
쐐애애액.
기습이다. 으아악.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마차를 끌던 병사들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방패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공격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마구잡이로 퍼부어진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격은 금방 멈췄다. 그러나 화살공격으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행보가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크로비츠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미치겠군. 본격적으로 행군을 방해하겠다 이건가?
크로비츠로써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선 이런 어둠 속에서는 놈들을 추적할 수 없었다. 무리하게 기사단을 출동시켰다가는 아까운 기사들만 잃기 십상이었다. 만에 하나 기사들이 장애물에 걸려 낙마할 경우 어새신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지금 상황의 유일한 돌파구는 마차 주변에 방패로 방어벽을 쌓은 뒤 느리게 행군하는 것뿐이었다. 크로비츠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마차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흑마법사가 도와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