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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카심은 꿈만 같았다. 마틸다를 얻은 것도 모자라서 아르네 영지까지 승계할 수 있다니…….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은인인 아르네 영주가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하던 영지였고 영지 주민들의 행복을 자신이 맡아 이어나갈 수 있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명을 감사히 받들겠나이다.

탁월한 선택이오.

카르수스 공작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카심의 양어깨에 검을 가볍게 가져다 댄 공작은 근엄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본관이 국왕전하의 대리인으로 의식을 행함과 동시에 참관하였으니 경은 이제부터 자랑스런 펜슬럿의 남작이오.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바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용병대원으로부터 시작된 박수는 곧 모여든 아르네 영지주민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마틸다와 영주 내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믿음직스러운 사윗감과 함께 영지를 승계할 후계자까지 함께 얻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여들어 환호성을 지르는 아르네 영지 주민들 사이로 튜드렛 백작 일행이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떠나려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어깨가 축 늘어진 모르세르가 끼여 있었다. 파견된 근위기사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재산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로부터 사흘 후, 아르네 영지에서는 카심과 마틸다의 결혼식이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결혼식이었다. 두 사람 다 이곳 출신이었으므로 모인 하객들 역시 아르네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외인이라곤 오직 카심 용병단원들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산뜻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카심이 웃는 낯으로 하객들을 맞이했다. 아직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알프레드 아저씨. 이크! 테레사 아주머니도 오셨군요.

하객들은 웃음 띤 얼굴로 카심을 축하해 주었다.

축하하네. 카심.

드디어 자네의 사랑이 이루어졌군. 진심으로 축하하네.

두 사람의 결합을 축하하러 온 아르네 주민들로 인해 영주 저택은 차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전 아르네 주민이 몰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카심 용병단원들도 주민들 틈에 끼여 얼굴에 함박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 그럼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머리에 붕대를 두른 신관이 찡그린 표정으로 축사를 읽어나갔다. 리치에게 당해 꼬박 이틀 동안 인사불성인 상태로 누워 있던 신관은 깨어난 직후 또다시 결혼식을 주관하게 된 것이다. 신부는 그대로였지만 신랑이 바뀐 결혼식. 그간의 사정을 들은 탓인지 그는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카심을 쳐다보았다.

신랑은 불굴의 투지와 용맹으로 마계마물들과 맞서 신부를 지킨 용감무쌍한 용사요.

그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마틸다 양의 신랑이 될 자격이 있겠소? 플로렌스 남작.

그대는 아르네 가문의 마틸다 양을 맞아 평생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소?

맹세합니다.

과묵하지만 결연한 대답을 들은 신관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신부에게 묻겠소. 마틸다 양은 플로렌스 가문의 카심을 맞아 아내로써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겠습니까?

기꺼이 그러겠어요.

신부의 흔쾌한 대답을 들은 신관은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표했다.

이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소. 평생동안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위해줄 것이라 믿겠소.

신관의 공표가 끝나자마자 결혼식장은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

와아아아.

그 이후로 아르네 영지는 꼬박 열흘동안 잔치 분위기 속에 휩싸여 들어갔다. 근위기사 단장의 명령에 의해 아르네 영주의 재산이 쓸 수 없도록 동결된 상태였지만 잔치를 벌이는데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영지 주민들이 자진해서 술과 음식을 싸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참석한 사람들은 꼬박 열흘동안 술독에 빠져 살아야 했다.

그것은 카심 용병단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술에 일가견이 있는 용병들이 체력의 한계를 느껴야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제 먹은 술이 미처 깨지도 않은 부스스한 몰골로 또다시 영지 주민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들이키는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술이라면 신물이 난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일행들 중에서 가장 신이 난 이는 카트로이였다. 취하지도 않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는 카트로이의 주량에 영지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건네주는 술잔을 단 한 번도 마다하는 경우가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술이 센 사람이 있다니?

물론 그들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란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아르네 영지에서 벌어진 잔치는 열흘동안 거행되었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은 자는 단 둘 뿐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에서 나오지 않은 율리아나와 감시를 위해 파견된 펜슬럿의 근위기사 이렇게 둘 말이다. 기사단장의 인장으로 봉인된 창고 앞에서 근위기사는 입맛만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어휴. 술 한 잔만 했으면 원이 없겠군.

하지만 그는 그것을 생각만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펜슬럿 근위기사단의 군율은 무척 엄격한 편이었고 임무수행 중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쉽다는 듯 군침을 삼킨 근위기사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상황을 보니 굳이 감시할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임무는 임무이니…….

그러나 철탑처럼 버티고 선 근위기사의 뇌리에는 임무를 마친 뒤 술 한잔 들이킬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열흘 동안 성대한 잔치를 치르고 난 뒤 카심을 비롯한 용병단원들은 아르네 영주와 함께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 코르도로 가서 대전사 결투를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공간이동이란 편리한 마법을 통해 눈 깜짝할 사이에 코르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네를 대표하는 대전사는 예정대로 미첼이 맡았다. 귀족의 작위를 얻어 자격을 얻은 카심이 직접 해결하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아직까지 낫지 않은 상처 때문에 결국 미첼이 중임을 맡기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전사 결투는 시작되었다. 근위기사 단장이 앞으로 나서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대전사 결투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아르네와 튜드렛에서 선출된 두 대전사는 근위기사 단장의 참관 아래 결투를 시작했다.

이미 끝났군.

연신 다리를 후들거리는 튜드렛 대전사의 모습에 사람들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결투는 시작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판가름이 났다.

챵챵챵

미첼의 매서운 연속 공격에 정신 없이 방어에만 열중했지만 휴고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장검과 방패가 차례로 토막 나자 그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몸통이 두 조각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하, 항복이오.

목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휴고의 머릿속에서 수치심은 깡그리 사라진 다음이었다.

튜드렛 영지의 대전사가 항복 선언을 하자 근위기사 단장이 머뭇거림 없이 결투 종료를 알렸다.

드디어 승부가 판가름났소.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는 기사단장의 발표가 없어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너무도 허무하게 끝난 결투로 인해 튜드렛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옆에는 망연자실한 모르세르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그는 세 명의 애인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냉랭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카르수스 공작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전사 결투는 아르네 영주의 승리로 끝났소. 약정에 의해 튜드렛 영지는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아르네 백작에게 귀속되었음을 밝히는 바요.

공표를 마친 근위기사 단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튜드렛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오늘 자정까지 수레 한 대에 한정된 짐을 가지고 튜드렛 영지를 떠나야 하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튜드렛 영지의 관리권은 모조리 아르네 백작에게 넘어갈 것이오.

아,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답한 튜드렛 백작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백작이라는 문장 하나 뿐이었다. 지금껏 영지 주민들의 피땀으로 누려왔던 영화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당장 내일부터는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보름 전의 결심을 수없이 뉘우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튜드렛 백작 부자가 장내에서 사라지고 난 뒤 기사단장은 아르네 영주를 찾아가서 말을 건넸다.

아시다시피 아르네와 튜드렛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소이다. 그러니 관리인을 두어 관리하시는 것이 편하실 것이오.

큼지막한 영지 하나를 얻게 되었지만 아르네 영주는 별반 기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이미 선정으로 명망이 높으신 영주시니 튜드렛 영지 주민들도 두 팔을 벌려 환영할 것입니다.

아르네 영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국의 공작이자 근위기사단의 총수가 열과 성의를 다해 대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수스 공작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튜드렛 백작의 학정으로 인해 주민들의 원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영주께서 부디 그들을 잘 어루만져 주셨으면 하는 것이 본관의 바램이라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아르네 주민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적합한 관리인이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본관이 몇 명 추천해 드릴 수도…….

아르네 영주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저희 가문의 집사가 일 처리를 잘 하는 편이니 중임을 그에게 맡겨도 될 듯 싶습니다.

말을 마친 영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늙수그레한 육십대의 노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영주 가문의 집사였으며 영주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아르네 가문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한 경험 많은 관리인이었다. 아르네 영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집사께서 튜드렛 영지를 맡아줘야겠습니다.

제, 제가요?

집사는 깜짝 놀랐다. 튜드렛 영지라면 거의 아르네와 맞먹는 규모를 가진 영지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큼직한 영지를 맡아 관리하라니 집사로서는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르네 영주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힌 상태였다.

경험 많은 집사가 아니면 그 누가 맡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맡아 주세요. 아르네를 관리하시던 것과 똑같이 관리하시면 됩니다.

영주가 그렇게까지 청하는 데에야 더 이상 거절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집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러셔야지요.

아르네 영주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들 중에서도 가장 물욕이 없고 정직한 집사인지라 믿고 영지를 맡길 수 있었다. 집사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몇 가지 당부를 늘어놓았다.

도착하는 즉시 주민들의 소작료를 내리도록 하세요. 전임영주의 학정으로 주민들의 삶이 무척 피폐할 테니 소작료를 20%정도로 낮추는 게 좋겠군요. 당장 돈 들어갈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르네 영주의 말에 집사는 깜짝 놀랐다.

20%라면 너무 적지 않습니까?

1년에서 2년 정도만 유지하면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뒤에는 아르네와 같은 수준인 30%로 올리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창고 속의 재물 중에서 영지를 관리하는데 필요 없는 물건은 깡그리 주민들에게 나눠주세요. 아시겠지요?

말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집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르수스 공작은 튜드렛 영지가 머지않아 안정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행이로군. 튜드렛 영지에서 올라오던 수많은 민원이 이젠 깡그리 사라지겠어.

튜드렛은 영주를 무척 잘 만난 거지, 암.'

시간이 지체된 것을 알아차린 카르수스 공작은 아르네 백작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실 때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궁정마법사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먼 거리이니 만큼 안전을 위해서 마법진을 이용하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아르네 영주는 공손히 예를 취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써 주시니 도저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별 말씀을……. 그리고 영지 인수를 위해서 별도의 병력을 차출해 놓겠습니다.

그들과 동행하면 관리인이 별 무리 없이 튜드렛 영지를 넘겨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본관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살펴 가십시오.

카르수스 공작이 근위기사들을 대동하고 사라지는 것을 본 아르네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로 맞이한 사위가 다정하게 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르네 영주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자넨 앞으로 나에게 많이 배워야 할거야. 영지를 관리하는 것이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거든……. 신경 쓸 것도 많고.

카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뭐 장인어른께서 하시던 것처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대로만 하겠습니다.

내 방식대로 하면 별 문제는 없을 거야. 그건 그렇고…….

아르네 영주는 돌연 안색을 굳혔다. 비로소 카심의 입장이 생각난 것이다. 그는 드래곤 사냥이 주목적인 카심 용병단의 대장이었다.

자넨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들과 같이 갈 것인가?

영주의 말에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이미 전 대원들과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함께 행동하기로 맹세한 상태입니다.

그, 그런가?

제겐 대원들을 통솔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친 뒤 반드시 아르네에 돌아올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영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 말고. 맹세란 것은 극히 중요한 것이지.

그러나 말과는 달리 영주의 머릿속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드래곤 사냥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카심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부디 몸조심하도록 하게.

아르네 영주의 진심 어린 당부에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고개를 돌린 카심이 마틸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겐 아직 마쳐야 할 임무가 남아 있소. 마틸다. 날 기다려줄 수 있겠소?

마틸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요. 이미 10년이나 기다린 걸요?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요?

약속하리다.

마틸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에게 달려들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어머.

율리아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 장면을 외면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 광경을 훔쳐보기 바빴다. 덩치 좋은 패터슨과 헬튼이 눈치 빠르게 달려들어 다른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려 했다.

뭘 보나?

하지만 카심의 덩치가 워낙 당당했기 때문에 완전히 가리기란 한 마디로 불가능했다.

아쉬운 이별식이 끝나고 카심이 아르네 영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전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지로 가려면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아르네 영주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죄송하지만 사모님과 영지 주민들에게 인사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워낙 시일이 촉박해서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잘 얘기해 놓겠네. 그럼 대원들이 기다릴 테니 어서 가 보게.

그럼 전 이만…….

카심은 묵묵히 몸을 돌렸다. 이미 일행들은 떠날 채비를 모두 갖춰놓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마틸다를 한 번 돌아본 카심은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출발한다. 일단 도보로 펜슬럿 경계를 지난 다음 그곳에서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겠다.

카심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즉시 이동을 시작했다. 하나같이 배낭이 불룩한 것을 보니 아르네에서 많은 식량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짐을 짊어지지 않은 이는 오직 데이몬과 율리아나밖에 없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아르네 영주와 수행원들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틸다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아빠.

아르네 영주가 말없이 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걱정 말아라. 마틸다. 한없이 믿음직한 녀석이니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원 녀석도…….

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준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돌아간다. 영지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서두르자.

수행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쳐다본 영주는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일행과 떨어져 튜드렛으로 곧장 가야하는 처지였다.

그럼 집사께서는 수고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영주님. 잘 관리하겠습니다.

예를 올리는 집사를 뒤로하고 영주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멀리 보이는 공간이동 마법진에서는 카르수스 공작이 배치해 놓은 궁정마법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절동안 열심히 행군한 용병단은 마침내 코르도 시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관도로 접어들자 카심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용병들은 별반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문제는 율리아나였다. 말을 타고 왔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 기색을 간파한 카심이 휴식을 지시한 것이다. 짬이 나자 용병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나연공에 들어갔다.

고마워.

율리아나에게 물병을 건네는 미첼을 힐끔 쳐다본 카심이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데이몬도 카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섭섭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신혼의 신부를 남겨두고 오는 게 말일세. 사실 난 원한다면 자네도 남겨두고 오려고 생각했었지. 힘들게 찾은 자네의 행복을 깨고 싶진 않더군.

카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누가 뭐래도 전 대장입니다. 카심 용병단에서 대장이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요.

데이몬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 만한 대장을 도대체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나? 하지만 항상 몸조심해야 할거야. 아리따운 신부를 울리지 않으려면 말일세.

기이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던 카심이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쉬르나크란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지으신 겁니까? 악당 이미지가 풀풀 풍기는 것이 상당히 분위기 있는 이름이던데…….

카심의 말에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퉁방울만해졌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린가? 쉬르나크라니?

데이몬께서 변장하신 것이 아닙니까?

데이몬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뚱딴지같은 소린 하지도 말게. 내가 어디 할 일이 없어서 그깟 리치 나부랭이로 변장하겠나?

데이몬의 응대를 들은 카심의 얼굴에는 걸려들었다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하군요. 현장에 계시지 않은 데이몬께서 어찌 리치의 이름이 쉬르나크라는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까?

그, 그건…….

데이몬은 말문이 콱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카심의 유도심문에 넘어간 것이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거리는 데이몬을 보며 카심은 추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정신 없이 싸움에 열중할 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유를 되찾고 나서 당시의 일을 떠올려보니 상황이 무척 이상하더군요.

가장 의심을 가진 점은 엘리트 둠 워리어들이 사용하는 검술이었습니다. 그것들의 검로는 이미 여러 번 대련해 보았던 데스 나이트들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하더군요. 게다가 튜드렛 백작이 데리고 온 팔라딘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저와 거의 실력차이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팔라딘 둘을 가볍게 제압한 엘리트 둠 워리어가 저 하날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도 넷이나 덤볐지 않습니까?

그, 그것은 자네가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 아닐까?

카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 하더라고 그 정도 실력차이를 극복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너무 공교롭습니다. 마왕이 100년에 한 번씩 붉은 전갈좌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사실은 지금껏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결혼식이 벌어지는 순간에 이 일이 벌어진 것과, 때마침 데이몬이 베르하젤의 홀과 드래곤 하트를 제게 맡겼다는 사실은 우연이라 치기엔 너무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느덧 용병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카심은 데이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전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데이몬께서 꾸미신 일이라고 말입니다.

듣고 있던 데이몬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카심의 시선을 맞받았다.

살다보면 반드시 우연의 일치란 것이 있기 마련이지. 내 생각에 이것은 기막힌 우연의 일치인 것 같네. 그 날 내가 자네에게 베르하젤의 홀과 드래곤 하트를 건넨 것은 아마도 자네의 운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일 거야. 흠. 그리고 리치의 이름이 쉬르나크란 사실은 아르네 주민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야. 난 술판에서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라네.

데이몬의 대답은 명백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카심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결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전 데이몬을 위해서라면 결코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이제 전 데이몬을 위해서 웃으며 기꺼이 죽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진심입니다.

한자한자 또박또박 내뱉는 카심의 다짐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숙연해졌다. 묵묵히 듣고 있던 미첼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역시 데이몬에게 큰 은혜를 입은 몸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카심의 말에 그리 감명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대장은 보기보단 멍청한 사람이군.

마땅히 목숨을 바칠만한 사람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 나에게 바치나? 자네 목숨은 엄연히 자네 부인에게 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소린 하지도 말게.

퉁명스럽게 내뱉은 데이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 위해 죽어준다고 하면 내가 기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야. 죽은 시신은 동료들에겐 그저 슬픔만 줄 뿐이야. 살아서 동료들을 기쁘게 해 줘야지 죽긴 왜 죽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숨만은 소중히 여겨야 해.

자넨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가서 부인과 행복하게 살아야 하네. 그리니 앞으로 죽는다는 말은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말게. 알겠나?

카심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결심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고집불통을 봤나? 자넨 보기보단 외골수로군. 쯔쯔. 못난 사람.

데이몬은 혀를 차며 휑하니 몸을 돌렸다. 한 쪽으로 걸어가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쪽으로 걸어가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한 대 맞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카심이란 녀석.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야.'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던 데이몬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녀석, 눈치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아까운 드래곤 하트를 날리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이야. 기껏 소환해놓은 다크 쉐이드를 잃은 것도 아깝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조금만 늦었다면 나까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뻔했으니.'

드래곤 하트를 잃긴 했지만 얻은 게 더 많았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역시 난 악역이 어울려. 진정한 악당만이 악역을 완벽히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이야.'

구석자리에 도착한 데이몬은 조그마한 바위 하나를 깔고 앉았다. 몸을 돌리자 용병들이 부산하게 식사준비를 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카심이 아직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데이몬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집요한 녀석이로군. 어쨌거나 잘된 일이지. 녀석이 나에게 해 주는 것을 생각하면 드래곤 하트 하나쯤은 싸다고 볼 수 있지.'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운 데이몬의 머리 위로 산들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용병들은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카심이 미안하다는 듯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제럴드. 너에게 미안하게 되었구나. 원래는 테제로스에 가서 네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아르네에서 일정을 지체하다 보니 도저히 테제로스에 들릴 시간이 없다.

제럴드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복수는 제 손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요.

아니다. 너의 일은 곧 카심 용병단 전체의 일. 네 복수는 일단 임무를 마치고 나서 생각해 보자꾸나.

말을 마친 카심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간택식이 열리는 날이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일정을 서둘러야만 시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대장이 알아서 하게.

데이몬의 대답을 들은 카심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저희들은 레이토나까지 쉬지 않고 달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힘드셔도 좀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율리아나의 대답을 들은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서두르자. 데이몬께서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수련의 한 방편이라고 하셨으니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용병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카트로이가 급급히 카심을 불렀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나도 달려야 하나?

카심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카트로이님께서는 데이몬과 함께 오십시오. 아마 마법을 사용하시면 편하게 오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정말 다행이로군.

카트로이는 겨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게으른 드래곤에게 달리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정한 데이몬이 또다시 초를 치고 나섰다.

네놈은 아무리 봐도 운동부족인 것 같다. 그러니 잔말말고 함께 뛰어! 나도 역시 함께 달릴 테니 말이다.

카트로이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놈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니까…….

툴툴거리는 카트로이에게 짐짓 인상을 쓴 데이몬은 달리기 편하도록 로브자락을 묶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구(老具)인 데이몬이 걱정된 것이다.

힘드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달리다 힘들면 마법을 사용할 테니…….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심이 출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데이몬의 몸이 실은 싱싱한 20대 청년의 것이란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출발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일행은 일제히 내닫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를 태운 말이 기세 좋게 달려나갔고 용병들은 뒤질세라 몸을 날렸다. 데이몬 역시 조금도 뒤쳐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달음박질을 했다. 일행의 후미에서는 카트로이가 연신 투덜거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정말 고생을 사서하는 놈들이군. 공간이동을 사용한다면 지극히 간단할 것을…….

일행이 열심히 달려가는 뒤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 이 거대한 도시는 며칠 후 벌어질 축제 때문에 도시 전역이 떠들썩했다. 크로센 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모인 아가씨들을 맞아 그 중에서 황태자비를 선택하는 날이니 만큼 결코 평범한 날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부 후보가 왕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혼적령기에 든 펠젠틴의 귀족 아가씨들도 하나같이 곱게 단장한 채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눈빛을 한 번만 받아 보아도 원이 없을 텐데…….

하지만 대다수 귀족 아가씨들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간택식이 벌어지는 기간 내내 황궁에서는 거창한 무도회가 열린다. 무도회에는 황태자말고도 여러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 청년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녀를 호위한다는 미명 하에 간택식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귀족 아가씨들의 목표였다. 크로센 제국보다 작긴 하지만 일국의 왕위를 물려받을 왕족 청년과 연분을 맺을 수 있다면 그녀들로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것은 간택식에 참석하는 왕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비로 간택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막강한 크로센 제국의 저명한 귀족 자제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국익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크로센 제국에서 벌어지는 황태자비 간택식에는 많은 왕국에서 왕녀를 파견해 왔다. 그들을 맞을 채비를 갖추느라 펠젠틴 전체가 떠들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황태자는 지금 심사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졌다는 말이구려.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나가는 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흑발에 새카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은 무척이나 수려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짙은 흑발과 눈동자는 아르카디아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바로 청년이 크로센 대제의 혈통을 정통으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는 바로 크로센 제국 유일의 황손인 드비어스 황태자였다. 실낱같은 숨결이 붙어있긴 하지만 이미 운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렌시우스 3세의 뒤를 이어 막강한 크로센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행운아.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나이였지만 눈빛에서 혜지가 빛나는 것을 보니 무척 총명할 것이라 생각되는 청년이었다.

그의 앞에는 두 사람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앉아 있었다. 그들 중 왼쪽에 앉아 있는 자는 백발이 성성한 노무장이었다. 강퍅한 얼굴에 아로새겨진 각종 상처들은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역경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 풍겨지는 강인함이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그가 바로 윌리엄스 후작이었다. 대륙에서 제일간다는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로써 명실상부한 아르카디아 제일의 실력자인 그는 전 대륙을 통틀어 채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는 그랜드 마스터 중 한 명으로써 인간 세상에 나와있는 유일한 무의 절대자였다. 7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소드 마스터 1백 여명으로 구성된 크로센 기사단을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끌어가고 있는 거물. 바로 그가 황태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윌리엄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전하. 현재로써 그 방법만이 전하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구려. 페르슈타인, 그 작자가 우리 가문에 한 짓을 생각하면…….

그러나 어쩔 수 없사옵니다. 전하. 지금 그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전하의 안위를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만이…….

침통한 어조로 말꼬리를 흘리는 자는 바로 테오도르였다. 네르시스 가문의 양자로써 집정관이라는 중임을 맡고 있는 그가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 후작과 함께 배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황태자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왕국의 공주를 택하면 어떻소? 펜슬럿이나 테르비아 정도의 강대국이라면 어느 정도 페르슈타인 공작을 견제할 수 있지 않겠소?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전하. 송구스럽지만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펜슬럿, 테르비아, 테제로스 이 3국이 비록 우리 크로센 제국 다음가는 강대국이라고 하나 페르슈타인 공작의 막강한 힘을 견제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두 왕국 이상이 힘을 합쳐야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후작의 응대에 드비어스 황태자는 낙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작자의 힘이 그리도 강하다니…….

오로지 소신이 제안한 방법만이 황가의 혈통을 무사히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야망에 불타는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도 일단 혼인관계로 맺어진다면 더 이상 전하께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드비어스 황태자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 올라갔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의 총수가 발설했으리라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가의 안위를 책임진 크로센 기사단장께서 어찌 그런 맥빠진 말을 하실 수 있소?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황가를 위한 충절 때문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드비어스 황태자는 맥이 빠졌다. 물론 윌리엄스 후작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이 하등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혈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경이 제일 잘 알지 않소? 그러면서도 그토록 내 마음을 아프게 해야 하겠소?

드비어스 황태자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표정은 떠오르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미나를 말씀하시는군요 전하.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전하께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입니다. 전하께서 미거한 제 손녀에게 마음을 주심에 있어 신은 차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허나 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는 그 아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음.

드비어스 황태자의 얼굴에 침통한 기색이 어렸다. 사랑하는 여인의 조부까지 말리고 들 줄은 몰랐기 때문에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묵묵히 사랑하는 그녀를 떠올려 보았다.

'미나……. 결국 그대를 보내야만 하는 거요?'

황태자인 드비어스가 미나를 만난 것은 기사학부에서였다. 전통적으로 무를 중시하는 까닭에 크로센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손은 의무적으로 기사학부를 수료해야 한다.

그 때문에 드비어스는 15세가 되던 날 정식으로 기사학부에 입학했다. 형인 알카리스가 의문의 사건으로 실종된 후 그가 유일한 황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후 황태자가 교관에게서 들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기사학부에서는 일체의 특혜가 없습니다. 학부생이 왕족이던 귀족이던, 심지어 평민의 아들이라도 일체의 차이가 없는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 이후로 꼬박 5년 동안 이어진 학부생활은 드비어스에겐 한 마디로 고통의 나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과 시를 좋아해서 학자를 꿈꿔왔던 드비어스에게 기사학부에서의 하루하루는 견디기 힘든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힘이 되어준 이가 바로 미나였다. 드비어스 황태자보다 1살 연상인 미나는 바로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 후작의 손녀였다. 동기생으로 황태자와 함께 입학한 미나는 마치 자상한 누나처럼 황태자를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녀 덕택에 황태자는 5년 동안의 기사학부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은 때문에 미나는 검술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노력도 모자라지 않아 그녀는 학부의 평가에서 항상 수석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드비어스 황태자는 달랐다. 검술에 대한 재능이나 열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황태자의 성적은 항상 밑바닥에서 맴돌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힘겨운 검술수련이 아니라 책을 읽거나 시를 외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황태자는 학부생활 중 여러 번이나 낙제할 위험에 처해야 했다. 그 때 황태자를 도와준 이가 바로 미나였다.

그녀는 마치 할아버지의 당부를 받기라도 한 듯 황태자의 학부생활을 성심껏 도와주었다. 어려운 검로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밤이면 기숙사를 빠져 나와 고된 수련으로 뭉친 황태자의 근육을 풀어주었다. 발각되면 바로 퇴학처리 된다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말이다.

드비어스 황태자가 그녀에게서 받은 도움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우등생 그룹에 속해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미나는 항상 황태자와 같은 그룹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배정된 과제를 주도적으로 맡아 완수했기 때문에 드비어스 황태자는 5년에 걸친 학부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 법. 마치 누나처럼 자상하게 돌보아주는 미나에게 연정을 느꼈던 황태자는 졸업 후에도 그녀와 계속 만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학부생활동안 더없이 다정했던 미나는 그 문제만 거론하면 안색을 싹 바꾸었다.

전하와 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전하는 절대자의 길을, 소녀는 기사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 결코 전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오? 지금 난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으로써 그댈 대하는 것이오.

이미 할아버지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들은 듯 미나는 냉랭하게 황태자의 청을 일축했다.

전하와 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입니다. 전 이미 기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몸. 저 말고도 어딘가에 분명 전하와 어울리는 여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기사학부 수료 후 제위를 이어받기 위해 제왕학을 배우기 시작한 황태자와 근위기사의 수련기사로 들어간 미나와는 여간해서는 만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고집 때문인지 황태자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미나를 찾아가서 진정을 토로했다.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다. 그런 그의 정성에 미나도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를 황태자가 아닌 한 명의 남성으로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어느 날 밤에 상황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죄송하옵니다. 소녀는 더 이상 전하를 만날 수 없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절교(絶交)를 선언하는 미나. 그 모습에 황태자는 그녀가 할아버지인 윌리엄스 후작에게 단단히 주의를 들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소. 세상을 통틀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오직 당신 하나 뿐이오.

죄송하옵니다. 전하. 절 영원히 잊어주시옵소서.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미나는 떠났다. 그 이후로 황태자는 단 한번도 미나를 보지 못했다. 윌리엄스 후작이 미나가 섬기는 근위기사에게 오지로의 파견근무를 명했기 때문이었다. 미나 역시 그를 따라 머나먼 오지로 가야 했다. 그녀가 떠나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이었지만 황태자는 아직까지 미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미나…….'

사랑하는 여인을 강제로 떼어놓은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므로 황태자에겐 윌리엄스 후작이 한없이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일이 떠오른 황태자는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못났기에 공이 그토록 날 멀리하려 하시오? 한 여인을 사랑할 자격도 없는 내가 공들의 충성을 받을 필요가 있긴 한 거요?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대답하는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죄송하옵니다. 전하와 제 손녀가 맺어지는 것이 저라고 어찌 싫겠습니까?. 저 역시 영명하고 사리판단 밝으신 전하가 손녀사위로 한없이 탐난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을 마친 윌리엄스 후작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영애인 셰넌 양은 펠젠틴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입니다. 정숙하고 아리따운 셰넌 양의 자태는 뭇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고 하고 있지요. 본관의 생각에 셰넌 양의 품격이라면 대 크로센 제국의 안주인이 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냉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품격이 아니라 배경 때문이겠지요. 그녀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딸이 아니라면 경들이 날 이토록 압박하지 않았을 테니……

두 충신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찌 보면 이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이었다.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주군을 힘을 가진 신하의 딸과 맺어주려 노력한다는 것. 이것은 과거 크로센 대제가 살아있을 때라면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세력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억지로 안색을 고쳤다.

'할 수 없다. 이번 결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황태자 전하의 안위를 결코 장담할 수 없으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세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대해져가고 있었다. 제국이 보유한 군대의 각급 사단장들 중 거의 전부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령을 받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페르슈타인 공작이 보유한 듀크 나이츠의 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후한 봉급과 체계적인 관리 때문에 이미 학부졸업생들은 크로센 기사단보다 듀크 나이츠를 더 선호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듀크 나이츠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추종하는 귀족 자제들이 대거 포진한 까닭에 인맥 쌓기가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기사학부 졸업생들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듀크 나이츠를 택하기 십상이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련기사를 꿈꾸는 자는 오로지 검에 모든 것을 건 무골(武骨)들 뿐이었고 지망생의 수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크로센 기사단의 앞날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듀크 나이츠는 양적인 면에서 크로센 기사단을 추월한지 오래였다. 아직까지 질적인 면에서는 크로센 기사단이 현격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언제 역전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우열이 역전되는 순간이 바로 크로센 황가가 끝나는 날이지.'

테오도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황가의 혈통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으로써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뜻하지 않게 페르슈타인 공작이 넣어온 청혼. 그것은 불과 3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황태자비 간택식이 결정된 날 밤에 공작의 심복에 의해 비밀리에 전해졌다.

-드비어스 황태자와 내 딸 셰넌을 맺어주고 싶소이다. 황태자께 의향이 있다면 부디 간택식에서 내 딸을 간택해 주셨으면 하오.-

짤막한 데다 거드름이 잔뜩 배어있는 서신이었지만 테오도르로써는 쉽사리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서신을 받은 테오도르는 즉시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 후작을 찾아갔고 어렵지 않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안위를 위해서는 황가와 헬프레인 가문과의 결혼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제 아무리 야망에 불타는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도 사위에게까지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집정관 테오도르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윌리엄스 후작은 그 즉시 손녀인 미나를 황태자와 떼어놓았다. 때는 둘 사이의 관계가 서서히 무르익어 갈 때였다.

하, 할아버지 제발…….

이미 황태자에게 연정을 가진 미나가 눈물로 호소해 왔지만 대의를 생각한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날 용서하거라. 황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는 없구나.

상황을 가까스로 납득시킨 미나를 황태자와 떼어놓기 위해 윌리엄스 후작은 미나가 섬기는 근위기사를 머나먼 오지로 좌천시켰다. 물론 수련기사인 미나 역시 동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게 일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 윌리엄스 후작과 테오도르는 적극적으로 황가와 헬프레인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다. 각 국 정보국에 은밀히 퍼져나간 소문은 바로 그들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완강히 거부하는 황태자를 꾸준히 설득하여 간신히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 피땀어린 노력 끝에 황태자는 그들에게 거의 설득된 상태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테오도르가 때를 놓칠세라 못을 박았다.

헬프레인 가문의 셰넌 양은 미모도 뛰어날뿐더러 교양과 예절 면으로 펠젠틴의 영애들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본 결과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테오도르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크로센 제국 제일가는 권력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셰넌은 결코 교만하지 않고 몸가짐을 철저히 하는 정숙한 규수였던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드높은 야망만큼이나 자식교육에는 철저한 인물이었다. 공작의 슬하에는 외동딸인 셰넌 외에 총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 하나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마치 범에게서 결코 강아지 새끼가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통상적으로 고위급 귀족의 아들은 망나니가 되기 쉬운 법이다. 어릴 때부터 주위의 떠받듦을 받고 자라는 데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며 또한 가문의 후광에 기댈 수 있기 때문에 자신밖에 모르는 철부지로 자라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매를 아낀다면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다. 자식을 나약하게 키우느니 차라리 도태시켜버리는 것이 낫다.

그의 이 비정하기까지 한 철학으로 인해 그의 세 아들들은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자라야 했다.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페르슈타인 공작은 가문의 집사나 하인들에게 이런 지시까지 내렸다.

내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꾸짖은 자에겐 후하게 상을 주리라. 그러나 아이들의 잘못을 감싸주거나 그냥 보아 넘긴 자의 경우 엄한 처벌을 각오하라.

그런 가르침 때문인지 공작의 세 아들들은 하나도 삐뚤게 나가지 않고 훌륭하게 자라났다. 세 아들 모두가 20대 초반에 팔라딘이 될 정도였다.

특히 큰아들인 크란시아는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으로써 휘하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거기에 헬프레인 가문의 후광은 일체 끼여들지 않았다. 오로지 크란시아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외동딸인 셰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추문에 셰넌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끼여들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테오도르는 황태자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셰넌을 추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황태자는 결코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맥이 빠진 듯 힘없이 내뱉었다.

결국 원수의 딸과 혼인해야 하는 것이오?

총명한 드비어스는 아버지가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일체의 증거가 없는, 단지 심증뿐이었지만 그는 흉수가 페르슈타인 공작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페르슈타인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미나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언제나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전형적인 여검사(女劍士)인 미나였지만 드비어스 황태자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어찌 보면 미나는 유약한 심성의 황태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소 우유부단한 황태자의 단점을 잘 메꿔줄 수 있는 여인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젠 잊어야 할 여인이기도 했다. 그것을 떠올린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그녀와 나의 관계를 전혀 용납지 않는군. 차라리 내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평범한 청년이었다면 그녀와의 사랑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텐데…….'

물론 총명한 드비어스인지라 그것을 상상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정한 황태자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경들의 의견에 따라 며칠 후 벌어질 간택식에서 셰넌 양을 선택하겠습니다.

테오도르와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 영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그들의 기뻐하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태자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저들이 저토록 추진하는 혼사가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지금까지 해 왔던 소행으로 보면 저들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옆을 떠날 것이 분명했다. 뛰어난 검사인 윌리엄스 후작은 모르겠지만 문관인 테오도르 집정관은 십중팔구 숙청될 것이 확실했고 그에겐 막을 힘이 전혀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힘은 그 정도로 방대했다. 황태자는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시조이신 크로센 대제께서 살아나셔서 이 자리에 오신다면…….'

상념을 마친 황태자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황실의 기념관에 잠시 다녀오겠소. 오늘은 왠지 조상님들을 찾아뵙고 싶군요.

알겠사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윌리엄스 후작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대기중인 근위기사들이 달려들어 그의 몸을 에워쌌다. 물샐 틈도 없을 정도였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본 황태자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테오도르와 윌리엄스 후작이 착잡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크로센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상념에 잠겨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뛰어난 지략으로 크로센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한 야심가. 야망에 걸 맞는 탁월한 능력으로 수많은 심복들의 진심 어린 충성을 받고 있는 그가 지금 한창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과연 트루베니아의 레드 드래곤이 내 뜻대로 행동해 줄까?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서 확답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인간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레드 드래곤이 자신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것부터가 의문투성이였다.

이미 그는 고문서를 통해 트루베니아에서 벌어진 종족전쟁의 전모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수백 명의 학자들이 밤을 새워 연구했기 때문에 드래곤들이 전쟁을 벌인 연유는 이미 소상히 밝혀져 있었다. 고민에 잠겨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놈은 십중팔구 인간들의 상잔을 통해 아르카디아의 힘을 줄여놓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침공이 이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할 터, 아마도 시기는 모든 드래곤들이 수면에서 깨어난 4년 뒤가 되겠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정복전쟁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공작에겐 자신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히 선결과제가 있었다. 9서클의 흑마법사와 그가 거느린 본 드래곤, 데스 나이트가 반드시 자신의 편에 서 주어야 한다는 과제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뇌리에 문득 외동딸인 셰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눈가에 착잡한 빛이 서렸다.

'불쌍한 것. 널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 시켜야 하는 아비를 용서해라. 그러나 네 오빠인 크란시아를 제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부득이 널 희생시킬 수밖에 없구나.'

레드 드래곤이 공격을 가할 때 그는 딸 셰넌을 황태자의 바로 옆에 머물게 할 계획이었다. 드래곤이 범위 공격을 퍼부을 경우, 그녀가 살아날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공작은 야망을 위해 계획을 강행할 작정이었다.

외동딸을 잃은 자신을 드래곤을 사주한 원흉이라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고 예정대로 황태자가 딸과 함께 세상을 하직할 경우 그는 전혀 의심받지 않고 크로센 기사단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레드 드래곤이 약정대로 행동했을 경우에 생각할 일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생각해 놓은 전략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일이 성공리에 끝나면 그 즉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내가 보유한 모든 힘을 결집한 다음 틈을 주지 않고 테르비아를 침공한다. 테르비아의 주력 방어병력을 깨뜨린 뒤 그 즉시 모든 병력을 테제로스로 돌리고 테르비아의 남은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예비사단과 용병단에 맡긴다. 그 기간이 대략 3일이다. 내 계산이 정확하다면 테제로스 역시 3일만에 함락시키고 국왕의 목을 중앙 광장에서 자를 수 있다. 문제는 펜슬럿인데…….

대륙 전역의 정보를 훤히 꿰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얼마 전 펜슬럿에서 벌어진 일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흑마법사가 속해 있는 용병단의 두 대원이 펜슬럿에서 작위를 받은 일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계획을 적지 않게 변경해야 했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흑마법사는 대 펜슬럿 전쟁에 투입할 수 없다. 그들에게 테제로스의 잔당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긴 뒤,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를 총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펜슬럿의 수도인 코르도를 함락시켜야 한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열흘 이상이 걸리겠지만 할 수 없다. 음. 별 수 없이 펜슬럿 국왕만은 살려두어야겠군. 흑마법사의 마음을 계속 잡아두려면 말이야.

물론 두 명의 용병 정도야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팔라딘이라 하더라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관점에서는 하찮은 피라미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들이 흑마법사의 동료라는 점이었다.

첩보에 의하면 흑마법사는 동료를 상당히 아낀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다.

그는 흑마법사를 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심 용병단의 목적과 행로를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공작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런 엄청난 흑마법사가 고작 카르셀의 왕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다니……생각보다 호색한 작자인가 보군. 상황을 보니 카르셀의 왕녀에게 흑심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겠어. 그건 그렇고 용병녀석들은 무척 운이 좋았군. 카르셀 왕녀의 호위를 맡은 때문에 흑마법사의 동료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이미 그는 카심 용병단 대원들의 신상정보를 훤히 꿰고 있었다. 그것은 썬더버드 용병단의 간부에게 거금을 주고 캐어낸 정보였다.

알아낸 바에 의하면 놈들은 하나같이 3류 용병 아니면 애송이에 불과하더군. 그런데 흑마법사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팔라딘으로 키웠을까? 불과 1년 6개월 남짓한 기간에 말이야?

모든 것이 흑마법사를 만나보면 해결될 일이라서 공작은 억지로 상념을 지웠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십중팔구 레이토나로 올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맞기 위해 공작은 이미 다수의 심복을 레이토나에 파견해 놓았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공작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회유할 작정이었다. 설사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며칠 뒤가 기대되는 군. 부디 크란시아와 크로비츠가 일을 잘 처리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그는 흑마법사를 영접하기 위해 아들인 크란시아와 듀크 나이츠의 단장인 크로비츠를 레이토나에 급파한 상태였다. 만약 흑마법사가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한다는 확실한 정보만 없었더라도 공작은 직접 가서 흑마법사를 영접할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일단 그를 열과 성의를 다해 맞아들여야 한다. 지금껏 그 어떤 왕국의 사절단에게도 베푼 적이 없는 융숭한 대접으로…….

생각을 마친 공작은 창 밖을 쳐다보았다. 밤이 깊은 탓인지 시리도록 눈부신 별빛이 공작의 눈을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도 그의 염원이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크로센 제국의 관문도시인 레이토나는 유난히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년 전 간택식이 연기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고 그들을 맞기 위한 호객행위도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차림새였다. 그들 대부분은 간택식에 참가하기 위해 온 왕녀와 그 수행원들이었다. 짧게는 일주일 전부터 길게는 한달 전까지 도착한 이들 일행들은 레이토나에서 묵으며 제국의 수도, 펠젠틴으로 떠날 때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기대되는군.

왕녀들의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을 볼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패거리 하나가 끼여 든 것은 왕녀 일행들이 모인 두 번째 무리가 펠젠틴으로 출발하기 몇 시간쯤 전이었다.

이크.

정신 없이 달려오는 패거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질겁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달려오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먼지를 시커멓게 뒤집어 쓴 몰골이었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옷에 먼지가 묻을까봐 허둥대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 때문에 패거리들이 달려오는 부분은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길이 뚫리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성벽은 훤히 열려 있었고 그 때문에 패거리들은 시내 중심부까지 곧장 달려올 수 있었다.

히히힝.

가쁜 숨을 토해내며 한 필의 말이 멈춰 서자 뒤를 따라 달리던 사내들도 하나 둘씩 달리던 것을 멈췄다. 얼굴이 하나같이 먼지로 범벅이 되어 도저히 용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얼굴을 슬쩍 훔쳤다.

헉, 헉. 드디어 도착했군.

먼지가 떨어져나가며 드러난 얼굴은 바로 카심의 것이었다. 그들 뒤로 지칠 대로 지친 대원들이 하나 둘씩 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크아아. 죽겠군. 내가 왜 이렇게 달려야 하지?

느닷없이 뒤에서 터져 나온 불평은 바로 카트로이의 것이었다.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보기 좋던 백발과 백의가 아예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의 말끔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퉁명스런 대답이 터져 나왔다.

엄살 부리지 마. 임마. 드래곤이면 드래곤답게 체통을 한 번 지켜봐.

데이몬 역시 몰골이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지를 많이 타는 색답게 그가 걸친 검은 로브에는 먼지가 마치 눈처럼 소복하게 덮여 있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숨을 고른 대원들은 서로의 몰골을 보고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네 녀석 몰골 좀 보게.

임마. 너도 마찬가지야.

카심 용병단원들은 대로변에 그대로 주저앉아 서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웃기 바빴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아랑곳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뭐야?

응? 말 위에 누가 묶여 있잖아?

아닌게 아니라 연신 헐떡거리는 말 등에는 누군가가 동아줄로 칭칭 동여매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 가냘픈 몸매로 봐서 여자로 보였는데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참, 그렇지.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챈 카심이 얼른 말에 다가갔다.

으차.

그는 서둘러 말 위에 실린 시체를 끌어내렸다. 시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율리아나였고 가슴이 미미하게 뛰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러했다. 용병단원들은 꼬박 이틀동안을 죽자고 달려왔고 그런 강행군을 율리아나가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말을 타고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힘들다고 칭얼댔다.

힘들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하지만 카심으로서는 결코 행군을 늦출 수가 없었다. 시일이 워낙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데이몬을 찾아가서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율리아나 왕녀님이라도 공간이동을 시켜 주심이…….

하지만 데이몬은 냉랭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훨씬 훌륭한 방법이 있지. 슬립(sleep).

마나가 재배열되자마자 율리아나는 그 자리에 픽 쓰러져버렸다. 마법의 힘을 이용해서 그대로 재워버린 것이다. 늘어진 율리아나를 보며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깨끗하게 해결했지? 그럼 이 계집애를 말 등에 단단하게 묶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데이몬의 기발한 해결책에 카심을 비롯한 대원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한지라 용병들을 결국 그녀를 말 등에다 묶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그들은 레이토나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려 본 카심은 율리아나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솔직히 말해 마구 흔들리는 말 등에 실리고도 무사할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율리아나의 얼굴에 이리저리 멍 자국과 상처가 나 있었다. 흔들리는 말 등에 계속해서 부딪힌 때문인 것 같았다. 특히 묶인 손발 부분은 보기 흉할 정도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심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허. 참. 데이몬도 정말 사악하십니다. 어떻게 여자에게 이러실 수가…….

뒤에서 곧 데이몬의 대꾸가 들려왔다.

사악하긴 뭐가 사악해? 그러게 누가 칭얼대라고 했어?

카심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그나저나 큰 걱정이군요. 간택식에 참가해야 하는 상황에서 얼굴에 상처가 났으니…….

그거야 내 알 바 없지. 솔직히 말해 이 계집애가 간택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데이몬은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율리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녀의 입술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정도로 큰 소리였다. 깨어난 율리아나는 정신 없이 온 몸을 주무르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니 통증이 이만저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심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플 만도 하지. 그냥 타고 왔더라도 온 몸이 뻐근할 텐데, 말 등에 묶인 채 실려 왔으니…….

혹시나 해서 데이몬을 쳐다보았지만 허사였다. 내심 힐링을 펼쳐주기를 기대했지만 데이몬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도리어 이죽거리는 데이몬의 모습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앞으로 또다시 칭얼댈 경우 이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끙끙 앓던 상황에서도 율리아나는 표독한 눈길을 날렸다.

두, 두고 봐요!.

많이, 많이 두고보도록. 참고로 나더러 두고보자는 사람은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았어.

짧게 응대한 데이몬은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카심이 다급하게 데이몬을 잡았다.

자, 잠깐만.

데이몬이 고개를 돌리자 카심이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 아닙니까? 얼굴만이라도 힐링을 펼쳐주심이…….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저 머저리 드래곤 녀석도 있는데 왜 내가 수고를 해야 하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냉랭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으로 율리아나의 표독스런 눈초리가 마치 화살처럼 와서 꽂혔다. 눈빛으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면 아예 난도질을 칠 수도 있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머뭇거리던 카심은 결국 카트로이에게 다가가서 난처한 기색으로 부탁을 해야 했다.

저, 카트로이님…….

사정을 들은 카트로이는 다행히 카심의 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힐!(heal)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이 시전한 마법이라서 율리아나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와 멍 자국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얼굴이 말끔하게 변했지만 율리아나는 카트로이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타는 듯한 눈초리로 데이몬을 노려볼 뿐이었다.

머쓱해진 카심이 다가가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서둘러야 합니다. 늦으면 참가신청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카심을 한 번 쳐다본 율리아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와봤기 때문에 그녀는 신청장소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병단원들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먼지범벅이 된 몰골로 일행이 다가가자 사람들은 질겁을 하며 길을 비켜 주었다.

행여나 부딪혀서 옷에 먼지가 묻는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일행은 비교적 수월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신청장소에 거의 다가갈 무렵 뜻밖의 사단이 생겨버렸다. 옆에 비켜선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톤이 높은 여인의 목소리인 것을 봐서 간택식에 참가하려는 왕녀의 것으로 보였다.

정말 별일이로군요. 간택식이 아무리 개방되어 있는 축제라 하나 저런 허접 쓰레기들까지 참석시키다니 말이에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죽거림은 일행 모두가 들을 만큼 뚜렷이 울려 퍼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위기사로 보이는 굵직한 목소리까지 일행을 여지없이 모욕했다.

글세 말입니다. 보나마나 뭐라도 하나 주워먹으려고 참석한 작자들이겠지요? 쳐다보지 마십시오. 저런 것들 때문에 왕녀님의 아름다우신 눈이 더럽혀질까 두렵습니다.

용병들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저 웃어넘겼다. 힘을 얻어 여유가 생겼으므로 하찮은 모욕 정도는 그냥 흘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율리아나였다. 이미 데이몬 때문에 열이 있는 대로 받은 상태였으므로 그녀는 급기야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걸음을 멈춘 율리아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며 고함을 빽 질렀다.

어떤 빌어먹을 년이야? 혓바닥을 뽑아놓기 전에 당장 나오지 못해!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험악한 상소리에 왕녀들이 일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차, 참으십시오.

대경한 카심이 급히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카심의 손길을 냉랭히 뿌리친 율리아나는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런 죽일 년. 나설 용기도 없으면서 뒤에서 호박씨나 까는 너 같은 년이 정녕 허접 쓰레기다.

율리아나의 상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득하게 욕을 먹은 탓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카심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휴. 이 사고뭉치는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군.'

그러면서도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타난 이들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카심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에 상대가 어느 왕국 소속인지 파악한 것이다.

'다행이로군. 그래도 강대국 왕녀에게 시비를 걸지 않아서 말이야.'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이들은 모두 합쳐 30여명 되어 보이는 무리였다. 중앙에는 제법 아름답지만 상당히 성깔 있게 생긴 여인이 표독스런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옆에는 화려한 갑주를 걸친 십여 명의 잘 생긴 기사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갑옷에는 남부의 상업왕국인 세르발티 왕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인구 20만 정도의 작은 왕국이었지만 상업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유한 왕국이었다. 세르발티의 왕녀로 보이는 여인은 율리아나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정말 교양이 없는 계집애로군.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제대로 교육을 받기나 하긴 한 거야?

애석하게도 그녀는 말싸움에 있어서 결코 율리아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말하는 것을 봐서 대충 짐작했는데 직접 보니 정말 싸가지 없게 생긴 년이로군. 병신 같은 년.

너 같은 년이야말로 정녕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년이야. 집에 콕 박혀 사내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닐 것이지 여긴 왜 왔어?

생전 처음 들어보는 험악한 욕설에 세르발티 왕녀의 말문은 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는 이판사판이라는 듯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댔다.

왜? 할 말이 없나 보지? 겁나면 옆에 있는 똥개들이나 한 번 부추겨보지 그래? 똥개 새끼들이 생긴 것 하나는 번드르르 하군.

세르발티 왕녀의 옆에 서 있던 똥개(?)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상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가차없이 검을 뽑아들었을 터였다. 사내 하나가 이를 부드득 갈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호위기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였는데 음성을 보아 아까 거든 자가 확실했다. 관자놀이가 불쑥 튀어나온 것을 보니 팔라딘 정도 되는 실력자 같았다.

경고하겠는데 지저분한 주둥아리 당장 닥치도록 해라. 우리 왕녀님은 너 같은 하찮은 계집이 감히 범접할 상대가 아니다.

율리아나에게 퍼부어진 험악한 말에 용병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 역시 율리아나를 여지없이 모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한 눈치였다.

얼씨구? 똥개 새끼가 제법 기세 좋게 짖어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