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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소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부디 묻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카심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 데이몬은 싱긋 웃으며 점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술 좀 가져다 주겠나? 최고급으로만 골라 열 병 정도 가져오게. 말을 마친 데이몬이 금화를 한 잎 내밀자 점원은 마치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 알겠습니다. 주문을 마친 데이몬은 묘한 미소를 띠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동료들과 술을 한 잔 나누고 싶군. 모두들 어떤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로소 데이몬이 고도의 마법사란 것을 자각한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과 테일러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두 들었을 수도 있었다.

저, 전 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안될 말이지. 평소에 대장의 주량이 무척 궁금했었거든. 한 마디로 잘라버린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미첼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생긴 것보다 술이 약하더군. 그래서 오늘은 대장을 대상으로 한 번 실험해 보려고 하네. 미첼이 슬며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오늘은 저도 원 없이 술을 마셔보고 싶군요. 물론 나머지 용병들이 술을 마다할 리가 만무했다. 1년 동안 북부에서 고된 수련에 열중하느라 구경조차 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술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한 잔 먹어봅시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오?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마셔봅시다. 거기에는 불과 얼마 전에 술맛에 눈뜬 카트로이도 가세했다.

드래곤이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 가를 증명해 보이겠다. 일행이 모두 찬성하는데 카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석진 자리를 찾아간 일행은 곧 술판을 벌였다. 얼마나 질펀했는지 점원이 가져온 열 명의 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나버렸다. 데이몬이 금화 몇 닢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술 창고를 깡그리 털어다 가지고 오너라. 점원들은 말 그대로 바닥이 닳도록 술 창고를 드나들어야 했다. 빈 술병이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일행의 얼굴에는 벌겋게 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술자리에서 카심에 대한 얘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다. 일행은 각기 과거의 경험을 하나 둘씩 털어놓았고 그럴 때마다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용히 술잔을 비우는 것은 오직 카심과 카트로이 뿐이었다. 카심은 조용히 술을 즐겼다. 술잔이 비면 옆에 앉은 용병들이 잽싸게 잔을 채웠고 카심은 잔을 들어 묵묵히 들이켰다. 카심의 주량은 상당한 편이었다. 혼자서 거의 열 병 가까이 마셨지만 전혀 취한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말 그대로 덩치에 어울리는 주량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우연찮게 술에 맛을 들이게 된 카트로이 역시 뒤질세라 술병을 비워나갔다.

꿀꺽꿀꺽크으……. 정말이지 마실 만 하군. 카트로이 앞에 어지럽게 널린 술병을 본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작작 좀 쳐 마셔라. 이놈아. 네놈에겐 술이 아깝다. 임마. 술값을 주면 될 것 아냐?

취하지도 않는 녀석이 웬 술을 그리도 밝히는지…….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카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 얘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정리한 듯 카심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미 들으신 것 같으니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동료에게까지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저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요. 잠시만 기다리게.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인을 맺어 일행 주위에 결계를 쳤다. 식당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고 그들이 듣게되면 별로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외부와 빈틈없이 격리된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자네 얘기를 우리만 들을 수 있도록 조처했으니 어디 한 번 얘기해보게. 감사합니다. 머리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한 카심은 곧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카심은 불과 열 한 살에 부모와 형제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었다. 돌림병으로 인해 그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외톨이가 되어버린 카심. 돌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어린 카심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카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이는 다름 아닌 아르네의 영주였다. 돌림병의 피해를 조사하러 나왔던 영주가 외톨이가 된 카심을 보고 거두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르네 영주는 이미 인자함으로 영지 주민들에게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이후 카심은 영주의 저택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성장하게 된다. 당시 아르네 영주에겐 여섯 살 먹은 무남독녀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붉은 전갈좌의 해(당시 아르카디아에서 붉은 전갈좌는 백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해이다. 그리고 그 해에는 사람들이 자식을 낳지 않는 경향이 있다. 불길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에 타고난 소녀로써 마틸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꺼리는 붉은 전갈좌 태생답게 마틸다는 고집이 세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 때문에 카심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려다 뱀에 물리기도 하고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마틸다가 천성적으로 착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카심은 그녀를 마치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어쩌면 마틸다를 돌림병으로 죽은 여동생 대신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녀 역시 카심을 친오빠처럼 스스럼없이 따랐다.

벌꿀이 먹고 싶어.

그 한 마디에 벌에 쏘여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벌집을 가져와 내밀던 카심이 어린 마틸다에겐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카심은 마틸다의 부탁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를 업은 채 하루종일 망루 계단을 오르내려도 힘든 기색하나 보이지 않았고 갖고 싶다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해서 가져다주었다.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이야. 그 한 마디에 어린 카심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만큼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영주 내외는 무척 기꺼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형제가 없는 마틸다에게 카심이 더할 나위 없는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카심이 들어온 이후로 마틸다는 더욱 밝고 명랑한 소녀로 자라났다. 하지만 둘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것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이미 카심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고 따르는 마틸다였다.

자라서 반드시 카심 오빠에게 시집갈 거예요. 행여나 둘 사이에 다른 감정이 끼여들면 안되겠다고 판단한 영주는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열 다섯 살이 되던 날 카심을 경비대원으로 차출해서 성에서 내보냈던 것이다. 둘 사이를 떼어놓으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문제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열 다섯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카심은 그 날부터 아르네 영지의 수습 경비병이 되었다.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고된 훈련을 고스란히 소화해낸 카심은 오래지않아 정식 경비대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어린 마틸다가 비밀리에 성을 빠져나가 카심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고된 훈련으로 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카심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영주는 그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영리한 마틸다가 적당한 핑계를 대어 부모를 속여넘겼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이미 부모가 카심을 멀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어린 시절부터 싹틔워 온 애정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건장한 청년이 된 카심과 아리따운 아가씨가 된 마틸다는 신분상의 괴리마저 극복한 채 애정을 서서히 사랑으로 승화시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틸다 아가씨와 함께 있기만 해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으니까요. 용의주도한 마틸다는 카심과의 사이를 감쪽같이 숨겼다. 카심 역시 둘 사이가 밝혀지면 안 되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동료 경비대원에게조차 철저한 비밀로 행했다.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어나가던 둘 사이의 사랑. 하지만 그것은 우연찮은 기회로 그만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당시 아르네 영주는 상당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자한 영주로 탄탄하게 기반을 쌓아놓긴 했지만 그것은 당대에 한정될 뿐이었다. 작위를 세습할 아들이 없으므로 그가 죽는다면 아르네 영지는 다시 국가로 귀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해결책을 찾던 영주는 급기야 정략결혼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 결심했다. 영지를 가지지 못한 수도의 귀족청년 중 적당한 자를 마틸다와 맺어주어 후계자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때마침 마틸다도 꽃다운 17세의 소녀로 자라나 있었기에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을 굳힌 영주는 마틸다를 불러 그 사실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러이러해서 널 결혼시킬 생각이란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틸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전 카심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시집가지 않겠어요. 오직 그만이 내 낭군이 될 자격이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영주는 대경실색했다. 마틸다와 카심이 벌써 그런 관계에까지 이르러 있다니……. 물론 영주에게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평민 신분인 카심과의 결혼을 허락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만약 그 결혼이 성사된다면 후사를 잇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었다. 평민에겐 작위가 세습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영주는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두 번째 계획의 실행에 들어갔다. 후사를 이어야겠다는 일념 하에 영주는 집요하게 마틸다를 회유했다.

마틸다. 생각해보아라. 넌 지금 아비가 평생을 걸쳐 이룩해 놓은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 아르네 영지가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말이냐? 미안해요. 아빠. 전 도저히 카심을 포기할 수 없어요. 이미 마틸다의 고집은 정평이 나 있던 상태였다. 달래도 보고 꾸짖어도 보았지만 그녀는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에 영주 내외는 결국 설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군.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은밀하게 카심을 저택으로 부른 영주는 이번에는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네와 마틸다와의 사이가 그 정도로 진전될 줄은 몰랐군. 카심.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짝 얼어있던 카심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이미 그는 마틸다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 어떤 질책도, 심지어 호된 매질까지도 달게 감수하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둘 사이에 신분상의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리한 영주는 그에게 그 어떤 협박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주가 조용조용히 내뱉은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카심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자네와 결혼할 경우 마틸다가 과연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나? 물론 자네가 마틸다에게 더 없이 잘 해준다는 것은 아네. 하지만 그 아이가 과연 평범한 평민의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자네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마틸다 역시 평민이 되네. 또 내가 죽고 난 뒤 아르네 영지는 자동적으로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가게 되지. 그렇게 되면 내가 마틸다에게 물려줄 재산은 아무것도 없네. 모조리 국가로 귀속될 테니까. 그런 다음 그 아이는 평범한 평민의 아낙으로 평생을 뼈빠지게 일하며 살아야 하네. 하루종일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에는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실을 잣는 것이 기본이겠지? 물론 시녀와 유모가 없을 테니까 집안 일과 육아도 모두 그 아이가 떠맡아야 하겠군. 그렇게 되면 마틸다가 과연 행복할까? 얼굴빛이 시커멓게 변한 카심은 일언반구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네. 마틸다도 그 때가 되면 자네와 결혼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네. 귀족부인으로써 풍요롭게 삶을 영위할 기회를 자네 때문에 박탈당한 셈이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하도록 하게. 어떤 선택이 마틸다에게 최선일지 말이야. 부디 현명한 결정을 기대하겠네. 할 말을 다한 영주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카심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 뒤로도 카심은 한참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킨 카심은 그 길로 숙소에 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과거를 떠올리던 카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전 경비대에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아르네를 떠나왔지요. 영주님의 말씀이 백 번 옳았습니다. 마틸다 아가씨의 행복을 위해서는 제가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마음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카심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을 보니 술기운이 턱 밑까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일행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조금 뒤 적막을 깬 것은 뜻밖에도 율리아나였다.

그건 카심이 옳지 못해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만이 행복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카심은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아요.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공주님은 평민 아낙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십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것이 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정말 힘들게 사셨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전 떠나올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젠 괜찮잖아요. 이제 카심은 그 어떤 강대국도 무시하지 못하는 용병단의 대장이에요. 그녀를 맞이할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 카심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제게서 떠나갔습니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용병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율리아나가 단호하게 카심의 말을 잘랐다.

그건 단지 핑계에 불과해요. 아니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던가……. 쾅 카심이 돌연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굳게 움켜쥔 주먹이 탁자 위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전 지금까지 단 한시도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게 있어 그녀는 내 전부입니다. 그런 말씀은 부디 말아 주십시오. 율리아나는 입을 닫았다. 지금껏 그녀는 카심에게서 이토록 격양된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잠시 후 카심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례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 일행은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율리아나가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데이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견디지 못한 데이몬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 계집애야. 뭘 그렇게 들여다보는 거야? 데이몬. 당신에겐 이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요.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어째? 내가 신이냐? 신은 아니지만 신에 가까이 근접했다 봐요. 일전에 케이트의 남편 필립의 마음을 바꿔놓았듯 이번에는 마틸다의 마음을 한 번 조종해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심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결계를 쳐놓지 않았다면 식당 안에 있는 사람의 시선을 모두 사로잡을 정도의 고함소리였다.

그만하시오. 그녀에게 손대는 것은 내가 용납지 못하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곤두선 수염까지 푸들푸들 떨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율리아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나서서는 안될 자리란 걸 직감한 것이다. 데이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계집얘야. 나설 자린지 아닌지를 잘 분간해야지. 마음 씀씀이는 그런 대로 마음에 든다만 방법이 틀렸어. 게다가 그 방법은 적합하지 않아. 카심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것은 마틸다의 마음이 바뀌더라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 것 같군. 영주 내외의 마음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미 결정된 결혼식까지, 거기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장의 의지라고 생각해. 말을 마친 데이몬은 미첼을 쳐다보았다.

넌 오늘 저 빌어먹을 드래곤 녀석과 자도록 해. 오랜만에 대장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카트로이의 노성이 바로 귓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며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몸을 일으켜 카심에게 다가갔다.

대장은 오늘 나와 함께 자도록 하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일어나는 것이 어때? 예. 카심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방안에 들어간 카심은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데이몬의 잠자리를 챙겨주었다.

고맙군. 고맙긴요 뭘. 침대에 걸터앉은 데이몬은 카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네 사정을 들어보니 꽤나 기구하더군. 사랑하는 사람을 본의 아니게 떠나보내야 한다니 말일세.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는 이불을 덮어쓰며 대꾸했다.

이미 잊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추태를 많이 보였는데 내일부턴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내심을 숨길 필요는 없네. 카심. 데이몬은 쓸쓸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음성에서 묻어 나오는 애틋함을 느낀 카심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도 자넨 의지로써 그녀를 보낼 수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네. 데이몬은 슬며시 시선을 카심에게로 던졌다.

혹시 내가 일전에 한 말 기억하나? 율리아나와 닮은 소녀 이야기 말이야. 기,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얘기하겠네. 그녀가 바로 내 첫사랑이자 내 생애에 있어 유일한 여인이라네.

난데없이 데이몬의 사랑타령을 듣게 되자 카심은 귀가 솔깃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슬픔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아픔이란 오로지 겪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겠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살아있다네. 카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이몬이야 극한에 이른 마법실력으로 500년의 세월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어, 어떻게……. 그렇다면 그분 또한 마법사입니까?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잠들어있는 신세라네. 데이몬의 입에서 다프네에 대한 일이 술술 흘러나왔다. 데이몬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드래곤 로드의 손에 의해 돌이 된 채 잠들어있다는 사실. 그 말에 카심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그렇다면 데이몬은 500년 동안 그녀를 기다려왔다는……. 그렇다네. 사실 그녀를 구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지. 아무리 마법실력을 갈고 닦더라도 드래곤 로드가 걸어놓은 마법을 파훼할 순 없지 않겠나?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그 어떤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그녀를 구해내고 말 테니까……. 데이몬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굳은 각오가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심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데이몬은 자신보다 훨씬 절실한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배부른 소릴……. 아니야. 둘 다 어렵긴 마찬가지일세. 문제는 의지에 달려 있어. 자네가 그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가 관건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카심은 결국 내심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 이제라도 그녀를 잡고 싶은 것이 제 심정입니다. 용병으로 떠돌아다니던 10년 동안 전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제 생애에 있어 전부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카심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가 서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전 그녀가 이미 시집갔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여자의 마음이란 변하기 쉬운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절 잊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것이라 짐작했었지요. 따라서 전 그녀를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채 평생을 혼자 살리라 생각했습니다. 설마 절 10년 동안 기다려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무릎꿇고 애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절 받아달라고……. 카심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어떻게 하기엔 상황이 너무 악화되었군요. 비록 그녀가 마음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미 결정된 결혼식을 어떻게 취소시킬 것이며, 영주님 내외분의 마음을 돌리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분들은 제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들, 결코 그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문에 현재로썬 제가 조용히 떠나는 것이 상책일 뿐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한 마디 내뱉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야. 어렵군 어려워. 하지만 낙심하지 말게.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 법. 자네에겐 아직까지 노력할 여지가 조금은 남아있어. 내일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봐야 그녀의 마음만 혼란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 약속하게.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마지막까지 지켜보겠다고……. 조용히 듣고 있던 카심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결혼식에 참석하겠습니다. 좋아.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데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는 모습에 카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을 좀 쐬려고……. 짧게 일축한 데이몬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은 침대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술기운이 올라왔기 때문에 카심은 금세 잠들어버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카심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무렵 아르네 영주의 저택에서는 누군가의 괴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후후. 내일 일만 잘 치르면 아르네 영지가 송두리째 내 것이 되겠군. 무척 흡족한 듯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자는 바로 내일의 신랑인 모르세르였다.

아르네 영지가 괜찮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와 보니 상상 이상이로군. 잘 하면 제법 많은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겠어. 생전 처음 와 본 아르네 영지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영지 주민들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쳐흘렀고 하나같이 부지런히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영지 주민들이 이처럼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은 그의 아버지의 영지인 튜드렛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모르세르는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네 영주는 재산 모으는 방법에서는 영 젬병이로군. 인두세며 다리세 등 돈이 나올 만한 곳이 천지인데 말이야. 게다가 소작료를 고작 30%만 받고 있다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린가? 50%를 거둬들여도 쓰기에 빠듯한 실정인데 말이야. 하긴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돈 쓸 곳이 제대로 있기나 하겠어? 비록 아르네의 영주 자릴 노리고 있긴 하지만 모르세르에게 이곳에서 살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산다면 아마 1년도 되지 않아 미쳐버릴 거야. 물론 방법은 있었다. 여타의 귀족들처럼 대리인을 시켜 영지를 관리하게 한 뒤 수도인 코르도에다 화려한 저택을 얻어 거주하면 깨끗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비싼 코르도의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지 주민들에게 세금과 소작료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거둬들여야 하지만 말이다. 모르세르는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마틸다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던데 순순히 말을 들을까? 하긴 어느 여자건 수도의 화려한 생활에 맛들이게 되면 두 번 다시 이런 촌구석으로 오려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할 건 없겠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자 저절로 가슴이 뿌듯해져왔다. 결혼한 뒤 얼마간은 코르도에서 장인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면 될 터였고, 장인이 죽어 영주 자리가 자신에게 넘어올 경우 적당한 관리인을 구해 내세우면 그만이었다. 영지 관리인으로 적합한 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고 하나같이 영지 주민들에게서 돈을 긁어내는데 도가 튼 자들이었다. 모르세르는 코르도에 남겨두고 온 애인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애인들을 만나지 못해 애석하군. 특히 크리스틴 그년이 가장 그리워. 이미 그는 코르도에 세 명의 애인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인 튜드렛 백작이 보내주는 돈으론 솔직히 셋을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만 허락된다면 그 이상을 거느리고 싶다는 것이 모르세르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마틸다의 얼굴을 떠올리며 모르세르는 괴소를 지었다.

초야가 어떨지 정말 궁금해 죽겠군. 그토록 몸을 사리는 것을 보니 경험이 없는 게 분명해. 쯔쯔. 어쩌다 그 나이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갔는지……. 날이 새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는지 모르세르는 연신 안절부절못해 했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안고 싶었다. 그동안 마틸다를 집요하게 유혹했지만 번번이 헛물만 켰기 때문이었다.

내일까지 참자. 느긋하게 행동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테니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모르세르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뒷모습을 달빛이 밝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카심은 숙취 때문인지 조금 늦게 깨어났다.

이런, 이런. 대장으로써 늦잠을 자다니…….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카심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미첼이었다. 그는 깨끗하게 다려놓은 옷 한 벌을 카심에게 내밀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제가 말끔히 다려놓았습니다. 미, 미안하군.

미첼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대장을 따라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되었는데 괜찮으시겠지요? 아시다시피 인물이 받쳐주는 자가 저밖에 없어서……쿠엑. 딱. 머리를 감싸안고 주저앉는 미첼의 뒤로 주먹을 움켜쥔 데이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미첼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이놈. 하루라도 맞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냐?

이러지 마십시오. 무력(武力)으론 결코 진실을 가릴 수 없는 법입니다. 한 대 더 맞고도 그 소리가 나오는지 보자. 농담입니다. 데이몬과 미첼의 드잡이질을 보고 있던 카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얼마 전의 관계에 비추어보면 정말 보기 좋게 변한 모습이었다. 악의 없는 장난을 주고받으니 말이다. 미첼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일행 중에서 가장 덜 험상궂게 생긴 놈이 이놈이니 데리고 가게. 알겠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카심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음 한켠에 무거운 짐이 놓여 있었지만 그는 억지로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우린 낚시를 한 번 즐겨볼 생각이네.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며 보니 강에 물고기가 많은 것 같더군. 우린 한가롭게 그곳에서 낚시나 하고 있을 테니 자넨 그 동안 미첼을 데리고 결혼식에 다녀오게. 아르케 강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런데 자네가 이걸 좀 맡아주겠나? 낚시를 하다 물에 빠뜨리면 안되니 말일세. 이, 이게 뭐죠? 카심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데이몬이 내민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데이몬의 손에는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붉은 보석과 이상하게 생긴 조그마한 홀이 놓여 있었다. 왕이 사용하는 홀과 모양이 비슷하긴 했지만 크기가 현저히 작았다. 데이몬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설명을 시작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보물이라네. 일단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드래곤 하트라네. 내가 트루베니아에 건너가서 잡은 웜급 드래곤의 것이지. 드, 드래곤 하트. 카심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엄청난 것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

아마도 대장이 아니었다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걸세.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베르하젤의 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네 이것 역시 드래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이지. 언데드나 마물을 퇴치하는데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는 무기의 일종이야. 데이몬은 손을 뻗어 홀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에다 마나를 주입할 경우 베르하젤의 홀은 주입된 마나를 순간적으로 항마(降魔)의 힘을 가진 신성력으로 바꾸어주네. 언데드나 마물에겐 가히 극성이라 할 수 있는 힘이지. 이 홀의 신성력에 명중된 마물은 어지간히 강한 놈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네. 단점은 이것을 사용하는데 어마어마한 마나가 소요된다는 점이지. 아마 어지간한 팔라딘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걸세. 말을 마친 데이몬은 베르하젤의 홀 아랫부분과 드래곤 하트를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 홀이 엄청난 마나를 함유하고 있는 드래곤 하트와 결합할 경우 상상도 못할 결과가 초래할 걸세. 드래곤 하트를 홀의 아랫부분에다 쳐서 깨뜨린다면 모르긴 몰라도……. 데이몬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가볍게 떨었다.

실험해보진 않았지만 나나 데스 나이트라도 감히 생존할 수 있다고 장담을 못하네. 반경 일백 미터 이내의 마물이나 언데드는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테니까……. 이, 이런 엄청난 물건을 왜 저에게 맡기시려고? 데이몬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미리 말했지 않았나? 강에 빠뜨리면 곤란하다고……. 게다가 이것 역시 용병단의 공동재산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니 대장이 맡고 있는 게 가장 좋을 듯 싶네. 특히 이건 나와 데스 나이트에겐 극성이나 다름없는 보물이야. 혹시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으니 대장이 단단히 간직해 줘야겠네. 알겠나? 카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녀오게. 데이몬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미첼이 밝은 표정으로 망토를 집어 카심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갈까요? 대장. 그러세. 카심과 미첼은 조용히 여관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데이몬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결혼식이 벌어지는 장소인 영주의 저택은 그들이 묵던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카심은 영주의 저택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던 도중 카심은 아는 사람과 적지 않게 마주쳐야 했다.

이게 누군가? 카심 아닌가? 알프레드 아저씨. 카심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노인과 와락 끌어안았다. 반백의 머리를 한 노인은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 연신 카심의 등을 쓸어 내렸다.

자네가 떠나간 뒤로 꼭 10년만이로군. 사람이 무정하기는……. 한 번 찾아올 것이지 말이야. 그런데 자네 어디 가는 길인가? 마, 마틸다 아가씨의 결혼식에……. 채 말을 마치지 못하는 카심을 들여다보며 노인은 안색을 흐렸다. 그 역시 카심과 마틸다 아가씨 사이에 얽힌 일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자네 괜찮겠나? 하긴 결혼식에 참석해서 마음의 짐을 더는 것이 아무래도 나을 테지. 식이 끝나면 푸주간에 한 번 찾아오게. 자넬 위해 저녁을 지어놓겠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카심이 몸을 돌렸다.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 연신 손을 흔드는 노인을 쳐다보며 미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척 소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군요. 아르네 영지 사람들은 나에게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아마 난 영원히 이곳을 잊지 못할 걸세. 그 이후로도 카심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카심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빵집 아주머니에서부터 재단사 아저씨까지 모두가 카심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또한 제 몸처럼 걱정해 주었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다보니 둘은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뒤에나 영주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초청장을 검사하는 병사가 바로 테일러였다.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카심을 맞았다.

카심. 결국 왔나?

그렇네. 아가씨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싶어서……. 테일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고를 했건만……. 할 수 없지. 이왕 왔으니 들어가서 아가씨를 축하해 주도록 하게. 테일러는 초청장을 검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카심을 입장시키려 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안면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모르세르가 데리고 온 병사인 듯 싶었다. 그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결혼식에는 검을 가지고 입장할 수 없소. 그러니 나에게 맡겨주시오. 듣고 있던 카심은 묵묵히 허릿춤의 검을 풀어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경계하는 모양이군.' 카심의 검을 받아든 병사는 미첼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빛의 의미를 파악한 미첼은 투덜거리며 검을 풀었다.

젠장. 다른 사람들은 차고 입장하면서 왜 우리만…….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검을 맡긴 두 사람은 곧 결혼식이 벌어지는 저택의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별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객들 중 태반이 모르는 사람인 것을 봐서 아무래도 신랑 측 하객인 듯 싶었다. 카심은 조용히 대열 뒤로 걸어갔다. 아르네의 관습은 입장할 때 신랑, 신부,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인사를 나눈 뒤 식장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카심은 그 절차를 잘 알고 있었다. 영주 내외를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카심의 얼굴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미첼이 빙긋 웃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긴장 푸십시오. 설마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사람에게 심한 소릴 하겠습니까? 그 분들의 인품은 내가 잘 알지. 결코 그러실 분들이 아니지만 문제는 내가 그분들을 뵐 낯이 없다는 것이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심의 차례가 왔다.

아니? 카심을 본 영주 내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행여나 카심이 결혼식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 그들의 얼굴은 금세 근심으로 가득 찼다.

자, 자네가 이곳에 왜 이곳에 왔나? 카심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마틸다 아가씨의 성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장담하건데 행여나 엉뚱한 행동을 해서 영주님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카심의 진심 어린 말에 영주 내외는 비로소 얼굴을 풀었다.

그런 뜻으로 온 것이라면 환영하겠네. 어서 들어가 보게. 알겠습니다. 카심은 다시 한 번 꾸벅 절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아르네 영주는 아직까지 경계심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카심의 뒷모습을 쓸어보았다.

코르도의 귀족들이 대거 모여있으니 도통 걱정이 가시지 않는구려. 글세 말이에요. ……. 행여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로써는 엄청난 불명예가 아닐 수 없잖아요? 글세 말이오. 녀석의 성품을 익히 알긴 해도……. 그러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영주 내외는 급급히 안색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자네 왔는가? 거드름을 피우는 모르세르의 모습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명한 자라면 조용히 입장시켰을 터였지만 모르세르는 일부러 티를 내며 카심을 불러 세운 상태였다. 모르세르의 옆에는 마틸다가 경직된 표정으로 카심을 외면하고 있었다. 얼굴을 볼 엄두가 내지 않아 딴청을 피우던 카심은 모르세르에게 먼저 축하인사를 건넸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부디 오래오래 다정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걱정 끄도록……. 그럼 들어가 보게. 지체 높은 분들이 많으니 구석자리에 앉아야 하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례를 한 카심은 조용히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마틸다는 카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장에 들어간 둘은 말한 대로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미첼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 녀석을 냅다 패버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대장이 허락하지 않겠죠? 당연하지. 냉큼 터져 나온 반응에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미워도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이라 이거죠? 서글픈 생각이 들었는지 카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장면을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미첼도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러는 동안 하객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마침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덜컹. 문이 굳게 닫히고 그 앞을 무장한 병사들이 막아섰다. 생소한 표식을 보아 대부분 튜드렛에서 파견된 병사인 듯 싶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을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씁쓸히 고개를 흔들었다.

튜드렛이 명문가임에는 틀림없군. 말로만 듣던 팔라딘을 두 명씩이나 보유하고 있다니……. 아르네에는 팔라딘 급 기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서였다. 아르네 영지는 극히 부유하고 평화로운 영지였다. 그것은 모두가 아르네 영주가 지금껏 펼친 선정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르네에서 치안병사란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존재였다. 주민들과 병사들 사이의 친분은 비교적 두터운 편이었고 그 누구도 병사를 겁내지 않았다. 주민들이 아무 스스럼없이 병사들을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할 정도였다. 때문에 아르네에는 결코 많은 병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튜드렛은 달랐다. 가혹한 소작료와 세금 때문에 일주일이 멀다하고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그들을 진압할 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튜드렛 영주는 대대적으로 사병을 키워야 했고 많은 돈을 들여 팔라딘까지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모르는 아르네 영주로썬 튜드렛 가문이 심히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팔라딘의 절도 있는 동작을 지켜보던 그는 돌연 시선을 돌렸다. 카심의 꿍꿍이가 심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몹쓸 짓을 할 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큰 일을 치르는 이상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로군.' 카심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확인한 영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틸다가 무사히 시집가고 나면 기회를 봐서 카심을 불러들어야겠군. 사람 하나는 진국이라 볼 수 있으니 원한다면 영지 병사로 받아줘도 무방하겠어. 아무래도 위험한 용병보다야 낫겠지?' 아르네 영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결혼식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식을 주관하는 신관이 마침내 혼인서약을 받고 있었다.

신랑인 튜드렛 가문의 모르세르는 신부 아르네 가문의 마틸다 양을 맞아 평생 변치 않는 마음으로 아낄 것을 약속하느뇨? 마음이 급했는지 모르세르는 신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넷.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랑의 대답을 들은 신관은 이번에는 신부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심은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게다가 자신을 줄기차게 주시하는 영주 내외의 시선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이렇게 그녀를 보내야 하는가?' 카심의 애달픈 심정을 모르는 듯 신관의 말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신부는 신랑 모르세르를 맞아 영원히 내조할 것과……. 마틸다가 신관의 말을 새겨들으며 대답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 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쾅. 깜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문 쪽을 쳐다보았다. 신랑 신부는 물론이었고 카심을 주시하고 있던 영주 내외까지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식장의 문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먼지가 풀풀 내려앉는 가운데 시커먼 인영 하나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마치 그 자리에서 솟아난 듯이. 하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는 온통 시커먼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도저히 용모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지 로브자락 사이로 눈빛이라 짐작되는 광망을 시퍼렇게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바로 신관이었다.

감히 저주받은 언데드 따위가…….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둠의 마력을 파악한 신관은 노성과 함께 마나를 재배열했다. 신관은 튜드렛 백작이 특별히 코르도에서 초청해온 고위급 성직자로써 신성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실력자였다. 주위의 마나가 맹렬하게 재배열되었다. 곧이어 언데드에게 극성이라는 신성마법 엑소시즘이 캐스팅되었다.

죽어 눈도 감지 못한 존재여. 무(無)로 화할 지어다. 신관의 고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허공에서 생겨나서 침입자에게 일직선으로 내려꽂혔다.

펑.

엑소시즘을 정통으로 얻어맞았지만 침입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조잡한 신성마법이로군. 유부에서나 울려 퍼질법한 음산한 음성과 함께 침입자는 슬쩍 손을 내저었다. 으아아아. 신관의 몸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잡아 채인 것처럼 뒤로 내팽개쳐졌다. 한참을 날아간 신관은 뒤쪽 나무 벽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퍽. 벽에 뒤통수를 강하게 부딪힌 신관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 모습을 본 경비병들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다.

마, 막아라. 임무를 떠올린 병사들은 창을 꼬나 쥐고 침입자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금세 멈춰져야 했다. 상대의 모습이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디 갔지? 침입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병사가 깜짝 놀라 단상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다. 침입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관이 서 있던 자리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꼼짝달싹 못하는 신랑과 신부를 유심히 살폈다. 조금 뒤 쩌렁쩌렁한 광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드디어 찾았군. 그 찾기 힘든 붉은 전갈좌의 처녀를 말이야. 그가 광소를 터뜨리는 동안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단상을 접근했다. 신랑과 신부가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힐끔 쳐다본 침입자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로브를 벗어 던졌다.

헉.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퀭한 얼굴에 눈구멍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마치 지옥의 업화같은 눈빛. 머리에 쓴 기괴한 관(冠)과 길게 뻗은 어금니는 해골의 분위기를 더욱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튜드렛 가문의 하객으로 참석한 팔라딘 중 한 명이 오래지 않아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세, 세상에……. 리치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식장 내부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악(惡)의 대명사이며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마물인 리치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대관절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을까, 사람들이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리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쉬르나크. 마계의 위대하신 군주이신 케루빔 님의 충실한 심복이다.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쉬르나크라 이름을 밝힌 리치는 음산한 눈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사람들을 위협하듯 훑어보았다.

위대하신 마왕 케루빔 전하의 1976번째 신부를 찾아 마계로 모셔가기 위해서이다. 그분께서는 10년에 한 번씩 붉은 전갈좌를 타고난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신다. 이제 붉은 전갈좌의 처녀를 찾았으니 그 분의 뜻을 받들어 내가 모셔가도록 하겠다. 사람들은 아연해했다. 느닷없이 마왕 케루빔의 심복이라는 리치가 나타나 신부를 납치해 가겠다고 공언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순순히 두고볼 수 없는 노릇이라서 병사들을 통솔하던 팔라딘들이 가차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들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순순히 뜻을 이룰 것 같으냐? 리치라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때문에 한 팔라딘이 암암리에 병사 한 명을 불렀다.

지금 즉시 밖으로 나가서 아르네의 병사들을 깡그리 불러모아라. 리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병력이 더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병사는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병사가 채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쉬르나크의 손이 느릿하게 휘저었다. 어딜? 식장의 문이 시커멓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시커먼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내 리더니 문에 뚫린 구멍을 그대로 막아버렸다. 문 전체가 시커먼 기운에 싸여 버린 것이다.

크억. 사정없이 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던 병사는 고통 어린 비명과 함께 발을 틀 어쥐고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문이 마치 철벽처럼 단단하게 변해버렸기 때 문이었다. 사정은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문 병사가 연신 헬버드를 들어 내리쳤지만 문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힘이 빠진 병사는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세, 세상에……. 결혼식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외부와 완벽하게 격 리되어 버린 터라 사람들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쉬르나크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검을 꼬나쥐고 있는 팔라딘들에게 시 선을 던졌다. 눈구멍에서 일렁이는 광망이 보기만 해도 오싹한 듯 팔라딘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감히 케루빔 전하의 권위에 저항하려는 자들!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쉬르나크는 느릿한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뼈만 남은 손에서 시퍼런 불길이 일렁였는가 싶더니 급기야 거대한 빛의 광망으로 변해 사방으로 폭 사되었다.

투학. 광망이 폭사되자 식장 내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 었다. 섬뜩한 빛이 눈을 강렬하게 자극해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기 때문이 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나가야 했다. 말 그 대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식장 내부의 사정은 판이하게 변해있었다. 한 마디로 절망적인 상황이라 묘사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벽을 새카맣게 메운 채 버티고 서 있는 악마들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악마들은 양옆으로 두 가닥의 휘어져나간 뿔이 돋아난 머리통에다 단단해 보이는 투구를 쓰고 있었고 끝이 갈고리처럼 휜 기 형검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특이하게도 기형검에서 푸른 빛 불꽃이 일렁거렸으며 투구 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회백색 몸뚱이는 온통 꿈틀거리는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눈빛은 보는 사람들의 오금을 여지없이 저리게 하고 있었다. 수는 약 백 마리 정도, 일견해도 병사들의 두 배가 넘는 지라 하객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악마들은 누구의 출 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창문과 문 주위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쉬르나크의 옆에서 십여 마리 정도의 악 마들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들 중 넷은 특히 강해 보이는 놈들이었다. 다른 악마들과 달리 긴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데스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돋아난 뿔의 길이 역시 여타의 악마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여러 가닥으로 휘어진 채 머리 전 체를 덮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게다가 쉬르나크의 양옆에 버티고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의 정체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것은 바로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벌어졌던 어둠의 전쟁에서 엄청난 맹위를 떨쳤다는 공포의 마물, 다크 쉐이드였다. 4미터에 육박하는 거 대한 신장, 넓게 펼친 채 펄럭이는 날개의 가장자리에는 강철갑옷을 마치 종 잇장처럼 찢어버린다는 날카로운 손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손톱의 끝에는 닿기만 해도 전신을 마비시킨다는 맹독이 배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팔라딘 두셋 정도는 한끼 식사거리로 간단히 해치워버린다는 공포의 다크 쉐이드가 둘씩이나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는 백짓장 처럼 변해버렸다. 도저히 싸워 볼 전력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의 질린 표정을 감상하듯 둘러본 쉬르나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괴소를 지었다.

크크크. 인간들이여.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들 앞에서는 어림없을 것이다. 이들은 바로 케루빔 전하의 마왕 군단에 소속된 정예 전사들이다. 소개가 필요한가?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손가락을 뻗어 벽면을 채우고 있는 악마들을 가리켰다. 저들의 이름은 둠 워리어(Doom warrior). 새로이 마왕군단의 주력으로 떠 오른 강력한 전사들이지. 1차 암흑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케루빔 전하께서는 강력한 언데드 전사의 필요성을 느끼셨고 그 결과 저들 새로운 전투종족을 만 들어 내시기에 이르렀다. 둠 워리어 하나 하나가 데스 나이트에 필적하는 전 투력을 가지고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이번에는 주위의 악마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다크 쉐이드는 익히 알고 있을 테니 설명을 생략하겠다. 이들 넷은 바로 마왕군단의 각급 부대장들이다. 엘리트 둠 워리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 둠 워리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으니 위용을 한 번 보여주도록 하지.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넋을 잃고 서 있는 팔라딘과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을 가볍게 제압해서 마왕군단의 힘을 보여주도록 하라. 단 이 자리가 케루빔 전하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감안해서 생명을 빼 앗지는 말도록……. qlfdjajrdmf. 엘리트 둠 워리어 한 놈이 마계의 언어로 보이는 기괴한 소리로 화답하며 느릿하게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팔라딘들은 바짝 긴장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물이긴 하지만 리치의 말을 들어보니 결코 만만히 생각할 상대가 아니 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팔라딘, 누구도 순순히 당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림없다. 저주받은 육신을 가차없이 마계로 돌려보내 주겠다. 두 명의 팔라딘은 선공을 취하기로 작정했다. 수적인 우위를 최대한 이용하 겠다는 생각에 그들은 느릿하게 걸어오는 엘리트 둠 워리어의 좌우를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다. 마나를 시퍼렇게 머금은 두 자루의 장검이 엘리트 둠 워리 어의 목과 허리를 파고 들어갔다. 그러나. 쨍. 그들의 공격은 너무도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엘리트 둠 워리어가 뽑아 휘두른 거대한 장검에 부딪히자마자 두 자루의 검이 그대로 부스러져버린 것이다. 충만한 마나로 보호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라딘들의 검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헉. 어처구니없이 검을 잃은 팔라딘들이 급급히 방패로 몸을 가렸다. 찢어진 손 아귀에서 전해지는 통증 따윈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트 둠 워리어는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대한 장검이 파공성과 함께 날아들자 팔 라딘들은 사력을 다해 방패에다 마나를 밀어 넣었다.

콰쾅. 방패가 그대로 박살나며 팔라딘 한 명이 전신의 갑주가 으스러진 채 훨훨 날아갔다. 오우거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힘이라서 의식을 잃고 바닥에 쑤셔 박힌 팔라딘의 입에서 선혈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나머지 팔라딘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방패에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 손잡이를 놓아버 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저항해볼 여지란 없었다. 방패를 쥐었던 손은 이미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마비된 상태였고 오른 손은 호구가 찢어져 더 이상 검을 쥘 수조차 없었다.

으으으. 겁에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팔라딘에게 다가간 둠 워리어는 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마치 세로로 쪼개버리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팔라딘의 머릿속에는 죽음이란 단어가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쉬 르나크의 음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만! 죽이지는 말도록, 대신 남은 인간들을 제압하도록 하라. 그들 역시 명을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머지않아 피의 향연을 충분히 즐기게 해 줄 테니 시행하라. wpswkd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은 엘리트 둠 워리어는 엉거주춤 서 있는 병 사들 사이를 번개같이 파고 들어갔다. 고통에 겨운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크아악. 으윽. 병사들이 전멸하는 데에는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대항하려는 병사를 쓰 러뜨리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10초였고 나머지 시간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추 적해서 쓰러뜨리는데 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태를 진압한 엘리트 둠 워 리어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쉬르나크의 옆에 시립했다. 쉬르나크는 유쾌하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인간들이여. 이제 케루빔 전하의 위대한 힘을 실감했는가? 장내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누구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널브러진 병사들의 나지막한 신음소리 뿐이었다. 새로이 마왕 군단의 주력으로 떠올랐다는 마계전사 둠 워리어가 저토록 강하다니……. 눈 깜짝할 사이에 보유한 병력이 전멸하자 튜드렛 백작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간들의 질린 표정을 감상하듯 훑어본 쉬르나크는 이번에는 시선을 신랑인 모르세르에게로 돌렸다. 이미 모르세르의 얼굴에서는 핏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쉬르나크가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신랑이냐? 그, 그렇소. 모르세르는 발악이라도 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쉬르나크는 재미있다는 듯 모르세르를 쓸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무척 운이 좋은 편이다. 지금까지 케루빔 전하의 신부를 구하러 온 마계 사자들의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신랑과 신부 둘을 한꺼번에 마계로 데리고 간다. 신부는 계획대로 케루빔 전하와 혼약을 올리는 반면 신랑은……. 모르세르를 쳐다보며 쉬르나크는 눈구멍 사이에서 더욱 강렬한 광망을 피워 올렸다.

감히 케루빔 전하의 신부와 결혼하려 한 죄로 말미암아 연옥(煉獄)으로 끌 려가서 백대독형을 차례대로 당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죽으면 또다시 살려내어 영원히 형벌을 가하니까……. 주르르.

모르세르의 바지춤에서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이미 그는 공포에 질려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그런데 쉬르나크의 말투가 갑자기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다르다. 너는 다른 마족이 아닌 내가 사자로 온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한때 인간이었던 나는 무식한 악마녀석들 과는 격이 틀리지. 위대하신 케루빔 전하께서 신부를 맞아들이시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협화음이 끼여들면 안 되는 법. 그래서 나는 일을 순리적으로 해 결하려 한다.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뼈만 남은 손을 좍 벌렸다. 그러자 엘리트 둠 워리어 한 놈이 다가와서 리치의 손에다 장검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쉬르나크가 검을 쥔 채 반쯤 뽑자 눈부신 금빛 광채가 모르세르의 눈을 강렬하게 찔렀다.

스르릉. 모르세르는 엉겁결에 장검에다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세, 세상에……. 그의 눈망울에 탐욕의 빛이 가득 차 올랐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장검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마디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선렬한 금빛의 검신에서는 흠집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검집에는 온갖 보석 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손잡이 아랫부분에 박힌 루비는 모르세르가 확실하게 판별할 수 있는 진품이었는데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등의 쟁쟁한 보 석들이 검집에 돌아가며 박혀 있었다. 한 마디로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보검이었다. 애인들에게 보석을 선물하기 위해 수많은 보석상을 전전했던 모르세르가 보석의 진위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세, 세상에……. 이미 모르세르는 검의 가치에 홀린 나머지 공포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 모르세르를 쳐다보며 쉬르나크는 괴소를 흘렸다.

크크크. 검이 마음에 드느냐? 비록 검이 탐나긴 하지만 섣불리 내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모르세르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설명해 주지. 이 검의 이름은 샤이어 블레이드. 한때 멸망한 트루베니아의 왕국 트란벨의 왕가를 상징하는 검이었다. 검신 전체가 골드 드래곤의 뼈로 되어있으며 검집은 보다시피 순수한 황금이다. 물론 박혀 있는 보석은 하나같이 진품이 아닌 것이 없지. 과거 트루베니아 제일의 부국(富國)이었던 트란벨의 상징답게 샤이어 블레 이드는 모르세르의 눈앞에서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신 없이 샤이어 블레이드를 쓸어보는 모르세르의 모습에 쉬르나크는 유쾌하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카카카. 이제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거래이다. 거, 거래? 의아한 듯 되묻는 모르세르를 쳐다보며 쉬르나크는 한 자,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이 샤이어 블레이드를 얻는 대가로 신부를 나에게 넘길 마음이 있느냐? 불 협화음을 막기 위해 난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바 이다. 모르세르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굴 뚝같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아르네 영주가 있는 자리에서 내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거래가 사람들의 눈이 없는 다른 자리에서 행해 졌다면 그는 생각도 할 것 없이 승낙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마틸다는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는 수많은 미녀들 중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모르세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쉬르나크의 눈구멍에서 불같은 광망이 토해졌다.

만약 거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난 관례대로 할 수밖에 없다. 연옥으로 잡혀가서 백대독형을 겪으면서까지 신부를 지키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모르세르의 안색이 삽시간에 싹 바뀌었다.

나, 날 잡아갈 것이오? 물론이지. 지금까지 나머지 사자들은 계속 그렇게 해 왔다. 오직 나만이 관 례를 타파하려고 할 뿐이지. 케루빔 전하의 결혼식에 불협화음이 끼여들게 하지 않으려는 충성심의 발로라고 생각해라.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검을 받고 신부를 넘겨주겠느냐? 아니면 신부를 지키는 대가로 영원히 연옥에서 고통을 받겠느냐? 일이 거기까지 진행되었는데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모르세르는 겸 연쩍은 표정으로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미, 미안하오. 날 용서하시오. 마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틸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검 한 자루에 자신을 팔아 넘겼으니 어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 으랴?. 눈앞이 캄캄해진 마틸다는 현기증에 정신마저 어찔어찔해져왔다. 그녀가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엘리트 둠 워리어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쉬르나크가 사나운 눈빛으로 엘리트 둠 워리어를 노 려보았다.

멍청한 놈. 위대한 케루빔 전하의 신부께서 행여나 상처를 입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 날로 소멸되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니 똑바로 보필하 도록……. alclssha dmdlrm.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은 엘리트 둠 워리어는 마틸다를 조심스 럽게 안아들려 했다. 하지만 마틸다는 그 손길을 냉랭히 뿌리쳤다.

이것 놔. 이렇게 된 마당에 목적지가 마계이던 지옥이던 내 발로 당당히 가 겠어. 모르세르를 잡아먹을 듯 쏘아본 마틸다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던 엘리트 둠 워리어가 다시 제 자리에 버티고 서자 쉬르나크는 모르세르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먼저 허리에 찬 검을 버려라. 쉬르나크의 말에 모르세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저만치 던져버렸다.

쨍그렁. 추호도 미련이 없는 태도였다. 쉬르나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보검을 들어 모 르세르에게 내밀었다.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샤이어 블레이드를 받아드는 그의 손은 기대감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모르세르의 머릿속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마틸다가 아깝긴 하지만 이대로 마계로 잡혀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비록 아르네 영지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보검이 생긴 이상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정신 없이 검을 쓸어보는 모르세르의 귓가로 쉬르나크의 자신만만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신랑의 동의에 의해 거래는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는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결코 내 딸을 마계로 데리고 가진 못할 것이다. 소리를 지른 자는 바로 아르네 영주였다. 극도로 분노한 듯 수염을 빳빳이 곤두세운 아르테 영주는 결코 지지 않겠다는 듯 쉬르나크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마틸다의 어머니 역시 공포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뜻을 굽히려 하지 않 았다. 쉬르나크는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쳤다.

갸륵한 아비의 마음이로군. 함께 마계로 끌려가서 백대독형을 경험하시겠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힘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그가 손을 슬쩍 휘젓자 뭔가 시커먼 것이 아르네 영주를 향해 사정없이 달 려들었다.

쐐애액. 몸을 날린 마물은 바로 다크 쉐이드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접근한 다크 쉐이드는 영주 내외를 가볍게 제압해서 들어올렸다. 말 그대로 눈 깜 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놈……끄으으. 버둥거리던 영주는 곧 몸을 축 늘어뜨렸다. 다크 쉐이드의 맹독에 의해 전 신이 마비되어버린 것이다. 영주의 부인 역시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을 뿐 손 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다크 쉐이드는 사로잡은 영주 내외를 사뿐히 들 어다 마틸다의 옆에 내려놓았다. 쉬르나크의 섬뜩한 시선이 그들의 모습을 낱 낱이 훑었다.

그럼 마계의 연옥에서 받을 백대독형을 손꼽아 기대하도록……. 참을 수 없어진 마틸다는 그들을 끌어안으며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아빠, 엄마. 왜 그랬어요? 거, 걱정 말아라. 마, 마틸다. 내, 내 목숨이 다하는 한 널 지켜주겠다. 띄엄띄엄 말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영주의 내심은 이미 절망감에 젖어 있었다. 이제 그들 가족은 영락없이 마계로 잡혀가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흡 족하다는 듯 그들을 쓸어보던 쉬르나크는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이젠 불만을 가진 녀석이 없겠지.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끄덕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랑까지 포기한 마당에 그 누가 마계로 잡혀가기를 자청하겠는가? 게다가 늘어선 마물들에 저항한 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지나지 않았다. 두 명의 팔라딘과 50명의 병사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내어 버린 엘리트 둠 워리어가 넷이나 버티고 있었고 연신 날개를 퍼덕이는 두 마리의 다크 쉐이드는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게다가 벽면을 가득 채운 둠 워리어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상대할 것인가? 사람들은 숨까지 멈춘 채 침묵을 지켰다. 순간 외마디 음성이 장내의 적막을 송두리째 깨어버렸다.

여기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곧 영주 내외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란 생각에 사람들의 시선에는 측은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카심이었다. 그의 뒤에는 미첼이 주뼛주뼛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그가 달려나가려던 카심을 지금껏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 카심. 마틸다의 눈에 금세 습막이 서렸다. 설마 카심이 나서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카심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이미 마틸다를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그였으므로 그녀가 마계로 잡혀가는 것을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이미 죽음까지 각오한 카심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카심을 쳐다보던 쉬르나크의 눈구멍에서 섬뜩한 광망이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네놈은 누구지? 정신 없이 샤이어 블레이드를 쓰다듬고 있던 모르세르가 화들짝 놀라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그, 그는 신부 집안의 겨, 경비병이오. 하인이나 다름없는 놈이지 경비병? 그런 녀석이 왜 나서는 거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인가? 카심은 묵묵히 걸어나오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충성심이라…….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영주님 내외분은 나에게 있어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니까…….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게 있어……. 식장 복판으로 걸어나온 카심은 쉬르나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생명보다도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 지금껏 그녀를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비록 신분상의 벽으로 인해 맺어질 가능성이 없긴 하지만, 비록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결혼식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내가 세상에서 여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뿐이니까……. 감정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카심은 의중의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쉬르나크는 그 말에 전혀 감동한 것 같지 않았다.

주인 아가씨와 하인의 사랑이라……. 전형적인 신파조의 사랑타령이로군. 자청해서 연옥으로 끌려가려는 놈이 또 하나 있다니 정말 재미있는걸?그녀를 위해서라면 난 웃으며 연옥으로 끌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난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 생각이다.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쉬르나크는 냉랭하게 냉소를 지었다.

과연 네놈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을까? 힘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설사 검술을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난 아무 거리낌없이 나왔을 테니까……. 말을 마친 카심은 벼락같이 고개를 돌렸다.

미첼. 미첼은 즉시 호응해왔다.

예. 대장. 지금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서 아르케 강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낚시중인 데이몬과 용병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그들을 당장 데리고 오너라. 그 말을 들은 미첼은 잠시 머뭇거렸다. 차마 카심을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대장……. 카심의 어조는 추상같았다.

이, 일은 반드시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녀가 잡혀가는 것을 막겠다. 그러니 서둘러라. 네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미첼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는 도중 미첼은 병사들이 떨어뜨린 검 한 자루를 사뿐히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쉬르나크는 냉소를 쳤다.

미친 놈. 감히 둠 워리어와 어둠의 장막을 뚫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나? 헉. 미첼이 집어든 검에서 갑자기 푸른빛의 광채가 쓱 하고 솟아나자 쉬르나크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것은 오로지 소드 마스터만이 시전할 수 있는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였다. 미첼이 접근하자 둠 워리어 서너 마리가 몸을 날려 앞을 가로막았다.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맹렬히 휘둘렀다.

가소로운 어둠의 마물들 따위가 내 앞을 가로막다니……. 썽컹. 비명도 없었다. 둠 워리어 두 마리를 가차없이 검과 함께 베어버린 미첼은 여새를 몰아 옆에서 달려드는 둠 워리어를 마저 두 조각 내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둠 워리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지만 미첼은 이미 문에 가까이 근접한 상태였다. 둠 워리어 하나가 문 앞에 버티고 있다가 갈고리 검을 휘둘러왔다.

챵. 앞을 가로막은 갈고리 검을 일검에 잘라버린 미첼은 장검을 둠 워리어의 복부 깊숙이 박아 넣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한껏 머금은 검은 둠 워리어의 몸뚱이와 함께 문을 감싼 어둠의 장막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키아아아. 괴이한 비명소리와 함께 둠 워리어는 그대로 문에 못 박혀 부들부들 떠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 상태로 미첼은 마나를 검에 집중시켰다.

파츠츠츠. 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오러 블레이드가 집중됨에 따라 검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문을 감싼 어둠의 장벽은 오래지 않아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검에 꿰인 둠 워리어의 몸뚱이와 함께……. 파파팍. 순간 등뒤로 엄습해 오는 기운을 느낀 미첼은 몸을 빙글 돌리며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슈각. 덮쳐오던 둠 워리어 두 마리가 그대로 네 조각으로 화해버렸다. 그것들의 잔해 옆으로 네 조각으로 변한 갈고리 검이 떨어져 내렸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는 그 어떤 것도 버티지 못했다.

대장. 조금만 버텨요. 알겠죠? 냅다 고함을 지른 미첼은 몸을 돌려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그의 속도는 일견해도 잘 훈련된 준마조차 따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넋이 빠진 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쉬르나크가 다시 손을 휘저어 문에 어둠의 장막을 칠 때까지……. 스르르 어둠의 장막이 또다시 결혼식장을 외부와 격리시켰다. 쉬르나크가 놀랍다는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군. 둠 워리어가 저토록 허무하게 당하다니 놀라워. 저놈은 도대체 누군가? 네놈의 부하인가? 홀로 남게 되었지만 카심은 결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내 휘하의 용병대원이다. 하지만 난 그를 부하가 아닌 동료라고 생각하지.용병? 내가 아는 상식으로 소드 마스터가 용병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카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다분히 자부심이 서려있는 미소였다.

왜냐하면 내 용병단은 좀 특별하기 때문이다. 맡은 임무가 특별하니 대원들도 당연히 특별해야 할 수밖에 없겠지? 쉬르나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특별한 임무라……. 설마하니 드래곤이라도 잡는다는 거냐? 카심은 정답이라는 듯 손뼉을 쳤다.

맞았어. 우리의 임무는 바로 그것이다. 바로 드래곤 사냥. 쉬르나크의 눈가에서 어이없다는 빛이 번져갔다.

미친 놈. 드래곤이 어떠한 존재인데……. 무서울 것이 없는 우리 마계 전사들도 드래곤만은 꺼려할 수밖에 없다. 드래곤은 그 정도로 강력한 생물이다. 사실인걸 어떻게 하겠나? 우리 카심 용병단은 벌써 드래곤을 여럿 잡은 바 있다. 그 중에는 에인션트 급 드래곤도 끼여 있다. 이해할 수 없군. 내 기억으로 그런 엄청난 용병단은 지금껏 양 대륙을 통틀어 존재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믿을 수 없어하는 쉬르나크와는 달리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악감만이 가득했다. 하객들 중 태반이 펜슬럿의 고위귀족들이었으므로 카심 용병단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심지어 아르네 영지의 사람들조차 카심 용병단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 있을 정도였다.

세, 세상에 저자가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대장이야? 카, 카심이 설마 그 유명한……. 영주 내외와 마틸다도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믿을 수 없어하고 있었다. 카심이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대장이라니……. 이름이 일치하긴 했지만 설마 그럴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귀로 냉랭한 쉬르나크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네놈의 허풍을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니 네놈까지 마저 잡아가도록 하겠다. 순순히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카심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쉬르나크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아 이미 상대를 사로잡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카심이 걸음을 멈춘 곳은 바로 모르세르가 던진 검이 나동그라져 있는 곳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내려다보던 카심은 묵묵히 되뇌이기 시작했다.

불쌍하게도 넌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새 주인이 되어 주겠다. 무시무시한 마계의 마물을 상대할 것이니 결코 네 명예를 더럽히진 않을 터, 부디 주인으로 받아들여주렴. 말을 마친 카심은 허리를 굽혀 검을 집어들었다.

스르릉. 검을 뽑아든 카심은 검집을 바닥에 던졌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검객의 마음가짐이었다. 마나를 불어넣자 검신이 삽시간에 푸른빛으로 변해버렸다.

쓰쓰쓰. 그 모습을 지켜본 쉬르나크는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네놈도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가? 소드 마스터인 미첼보단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고맙게도 날 깎듯이 대장으로 대접해준다. 나로써는 고마울 수밖에 없지만. 카심은 검을 들어 싸울 자세를 취했다.

자 덤벼라. 설사 내가 죽어 망령이 된다 하더라도 마틸다 아가씨가 잡혀가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내 생의 전부. 설사 내가 그녀 대신에 연옥에서 끝없이 고통받는 처지가 된다 하더라도 난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쉬르나크는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쳤다.

크크크. 정말 눈물나는 순애보야. 재미있군. 내 널 가상히 여겨 특별히 엘리트 둠 워리어 넷을 붙여주겠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기대해 보겠다. 얼마든지. 설사 상대가 발록이라 하더라도 난 물러서지 않는다. 검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움켜쥔 카심에게 엘리트 둠 워리어 네 마리가 서서히 접근했다. 엘리트 둠 워리어들은 검에서 시퍼런 데스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카심을 에워쌌다. 한 눈에 보아도 협공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츠츠츠 엘리트 둠 워리어들이 뿜어내는 투기(鬪氣)로 인해 사람들은 심장이 바짝 쪼그라드는 심정이었다. 전신을 파고드는 투기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카심의 마음은 도리어 차분히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검을 움켜쥔 채 공격의 순간을 기다리는 카심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내 손으로 지킨다.' 지루했던 기다림의 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팔라딘과 병사들을 간단히 패퇴시킨 바로 그 엘리트 둠 워리어가 거대한 검을 일직선으로 휘둘러온 것이다. 카심은 바짝 긴장하며 공격을 막아갔다.

'이 놈은 정말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오로지 힘을 효과적으로 흘려버려야만 버틸 수 있다.' 다행히 카심은 검의 각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엘리트 둠 워리어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검을 놓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푸캉.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엘리트 둠 워리어 네 마리의 무시무시한 공격이 카심에게로 일시에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정신 없이 공방에 열중하던 카심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때문에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손엔 땀이 서서히 맺히기 시작했다.

카, 카심. 마틸다는 애가 탔다. 용기도 없는 겁쟁이로 간주하고 잊어버리려 했던 카심이 이렇게 행동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보기만 해도 섬뜩한 마계의 마물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치르고 있다니……. 눈물이 계속 흘러내려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오, 오빠.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카심 오빠. 그녀의 입에서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호칭이 슬그머니 튀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카심을 사모했던 어린 시절의 마틸다가 되어 있었다. 검 한 자루에 자신을 팔아 넘긴 약혼자 모르세르에 대한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치열하게 혈투를 벌이고 있는 카심만이 진정한 그녀의 남자였다. 이제 마틸다는 싸움의 결말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상태였다. 카심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 혀를 깨물어 자결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영주 내외를 비롯한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심의 몸은 말 그대로 혈인이 되어있었다. 한 손으로 여러 손을 막기 힘들다는 것을 입증하듯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공격을 몸에 허용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상대는 팔라딘조차 간단히 제압해버린 공포의 마물, 엘리트 둠 워리어. 그들을 상대로 이처럼 분전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토록 힘겨웠던 서전과는 달리 카심은 무척 침착하게 공방에 열중하고 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뻗어오는 공격을 가로막은 뒤 반격을 가하는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엘리트 둠 워리어의 검에 실린 엄청난 파워 역시 무리 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된 채 접전에 몰입해있는 카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상하군.'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검로가 카심에겐 극히 익숙했다. 그들의 검로는 그가 지금껏 무수히 대련해왔던 데스 나이트들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판에 박은 듯 동일한 공격. 그 때문에 카심이 시간이 갈수록 침착해질 수 있었다. 공격이 가해지는 경로와 시점을 깡그리 알고 있으니 대적하기가 점점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과거 트루베니아의 절대자들……. 그렇다면 이 놈들의 정체 역시 죽은 트루베니아의 기사들이었나? 하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검로와 공격방향을 모조리 꿰고 있긴 하지만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연수합격은 정말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잠시라도 마나가 흩어질 경우 들고 있는 검은 순식간에 조각나버릴 터였고 그렇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휘이잉. 사선으로 후려쳐 오는 검을 종잇장 한 장 차이로 피해낸 카심은 여새를 몰아 엘리트 둠 워리어의 품속을 파고 들어갔다. 데스 나이트와 대련해 본 경험에 의하면 이럴 경우 상대의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한 놈만 잡자. 카심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틈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요행을 노린 공격이었고 다행히 엘리트 둠 워리어 역시 데스 나이트와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허점이 포착되자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찔러 넣었다.

에잇. 카심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엘리트 둠 워리어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카아아아 엘리트 둠 워리어는 세차게 몸부림을 쳤다. 그 모습에 카심은 엘리트 둠 워리어가 데스 나이트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거의 불사에 가까운 존재인 데스 나이트는 이 정도 상처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는다. 몸통이 여러 조각이 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는 점이 데스 나이트가 가진 최대의 강점이었다. 그 사실을 파악한 카심은 검을 힘껏 비틀며 앞으로 돌격했다. 뒤에서 엄습해 오는 공격을 간파한 것이다.

이야아압. 검 두 자루가 미세한 차이를 두고 그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가슴이 꿰뚫린 엘리트 둠 워리어를 세차게 밀어 넘어뜨린 카심은 서둘러 검을 뽑아들었다. 가슴을 관통 당한 엘리트 둠 워리어는 생명이 다했는지 검이 뽑히는 순간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카심은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한 번 해 볼 만 하다. 버럭 고함을 내지른 카심은 벼락같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아직까지 세 마리의 엘리트 둠 워리어가 투기를 뿜어내며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카심은 지금 보유한 전투력의 몇 배에 해당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마틸다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발휘할 수 있는 괴력이었다.

zktla ajtwlsep.알아들을 수 없는 기성과 함께 엘리트 둠 워리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챵챵챵챵. 카심의 검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복부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거대한 장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카심은 지체 없이 반격을 가했다. 이미 상대가 회피하는 방위를 확실하게 파악해놓은 다음이었다. 복부가 베어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통증 따윈 느낄 겨를도 없었다.

키아아아. 목의 반이 베어져나가 너덜너덜해진 엘리트 둠 워리어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마물이라서 그런지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전투력을 많이 상실한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칠 카심이 아니었다.

푸욱. 마나를 충만히 간직한 카심의 검이 심장 부위를 사정없이 헤집어버린 뒤 빠져나가자 엘리트 둠 워리어는 저주받은 육신을 차가운 대지에 뉘인 채 몸을 푸들푸들 떨 수밖에 없었다.

크으. 이제 둘이 남았는가?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훔쳐낸 뒤 카심은 사납게 포효를 했다. 남은 두 마리의 엘리트 둠 워리어는 카심의 분전에 별반 감동받지 않았는지 무심하게 공격을 날려왔다. 하지만 카심은 이제 여유를 되찾은 다음이었다.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상대의 검로와 공격방향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이상 무서울 것은 없었다. 이후로 이어진 치열한 혈전. 카심의 몸에 서너 번 칼자국을 내긴 했지만 그것이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한계였다. 버서커(狂戰士)가 되어버린 카심의 미친 듯한 손속에 의해 하나도 빠짐없이 저주받은 생애의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것이다.

허억 헉. 카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엘리트 둠 워리어 두 마리가 몸을 푸들푸들 떨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패인 검상을, 나머지 하나는 복부에 깊숙한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카심은 피로 범벅이 된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쉬르나크를 쏘아보았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거듭된 출혈로 인해 정신마저 아득해져왔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세웠다.

1차 전은 내 승리로 끝난 것 같군. 다음은 뭐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휘저은 쉬르나크는 냉소를 쳤다.

제법이로군. 엘리트 둠 워리어 넷을 박살내다니……. 하지만 거기까지가 네 한계인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쉬르나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카심에겐 검 한 번 휘두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카심이 아니었다.

난 이미 뜻을 밝혔다. 검을 휘두를 수 없다면 입에 물고서라도 싸울 것이며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그녀가 잡혀가는 것을 막겠다. 정말 갸륵한 충절이로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롱을 보아줄 시간이 없다는 뜻이지. 쉬르나크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망이 더욱 짙어졌다.

이제 네 놈을 끝장내겠다. 힘이 다한 네놈을 처리하는데 다크 쉐이드 둘과 나머지 둠 워리어들을 모조리 투입할 생각이니 한 번 상대해 보도록. 내 생각으로 널 처리하는데 이들이라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카심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지금 그의 몸 상태라면 다크 쉐이드는 고사하고 둠 워리어 하나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도저히 마틸다가 잡혀가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케케케케. 명령이 떨어졌는지 다크 쉐이드 둘이 나지막이 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두려운 다크 쉐이드의 모습에 카심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쉬르나크는 숨조차 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우릴 본 이상 살려둘 순 없는 노릇이다. 마계로 잡아가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도록……. 쉬르나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 가증스런 리치에겐 애당초 사람들을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검을 소중히 어루만지고 있던 모르세르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그, 그것은 얘기가 틀리지 않소? 이미 거래가 성립되었는데…….거래는 거래고 입막음은 입막음이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케루빔 전하께서 인간 여잘 신부로 맞아들이신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느냐? 금시초문이었기에 모르세르는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 입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부와 그의 부모, 그리고 저 머저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물론 너희들에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지? 죽음은 순간적으로 끝나지만 연옥으로 잡혀가는 자들은 영원히 윤회되는 고통을 겪어야 할 테니까…….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카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 용기는 가상하다만 이제 마지막이다. 애송아. 어디 연옥의 맛이 어떤지 한 번 경험해 보도록 해라. 쉬르나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크 쉐이드가 카심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접근하기 시작했다. 벽면을 가득 메운 둠 워리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사람들의 머리 속엔 죽음이라는 단어가 똑똑히 각인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저항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카심의 얼굴에는 놀랍게도 기대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공교롭게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 하나가 생각난 것이다.

정말 놀랍군. 품속으로 손을 넣어본 카심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오늘 아침 데이몬이 건네준 물건을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효율적으로 언데드와 마물을 제압할 수 있는 신기인 베르하젤의 홀. 게다가 그것을 작동시킬 드래곤 하트도 있었다.

'어쩌면 이것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마음을 정리한 카심은 검을 슬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간 쉬르나크의 노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제 와서 저항을 포기한다고 그냥 용서해 줄 줄 아느냐?물론 아니지. 더 효과적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거든. 카심은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으로 쉬르나크를 쳐다보았다.

알다시피 우린 드래곤 사냥을 하는 용병단이다. 오래 전에 트루베니아에 건너가 드래곤의 레어를 턴 적도 있지. 그곳에서 얻은 물건인데 혹시 네놈이 알지 모르겠군. 품속에 들어갔다 나온 카심의 손위에는 베르하젤의 홀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츠츠츠츠. 식장 내부를 가득 채운 마물의 존재감을 파악했는지 베르하젤의 홀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쉬르나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베르하젤의 홀이로군. 1차 어둠의 전쟁에서 많이 보긴 했지만 요즘은 극히 구하기 힘든 물건이지.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네놈 몸 상태로 보아 홀을 작동시키기도 힘들뿐더러 만약 그런다고 해도 둠 워리어 정도나 당할까, 나나 다크 쉐이드에겐 거의 타격을 입힐 수 없을 것이니까…….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카심이 두 번째로 꺼낸 것은 바로 드래곤 하트였다. 지크레이트의 드래곤 하트가 그의 손에 들려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쉬르나크가 경악성을 토해냈다.

헉. 그, 그것은……. 설마 드래곤 하트? 카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만약 드래곤 하트에 내재되어 있는 방대한 마나와 이 베르하젤의 홀이 결합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무척 기대가 되지 않나? 쉬르나크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고도의 지능을 가진 다크 쉐이드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아 협박이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카심은 이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상황을 보니 감당하기 힘들 것 같나 거래를 하자. 쉬르나크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카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지? 드래곤 하트는 마계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보물. 그것을 내준다면 우린 신부를 깨끗이 포기하겠다. 그뿐 아니라 이 자리의 사람들에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뼈만 남은 손가락을 뻗어 모르세르가 얼싸안고 있는 샤이어 블레이드를 가리켰다.

샤이어 블레이드를 능가하는 보검 다섯 자루와 각종 마법 무구, 그리고 황금 백 톤을 주겠다. 어떤가? 쉬르나크가 제시한 조건이 어마어마했기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가히 엄청난 재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카심은 별로 감명을 받은 눈치가 아니었다.

대단한 재물이로군. 하지만 말이야. 카심의 눈길이 슬며시 마틸다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카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카심의 입에서 무감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있어 최고의 보물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다. 그 어떤 보검이나 보물도, 설사 황금 백 톤이 아니라 만 톤을 준다 해도 마틸다 아가씨와는 바꿀 수 없다. 카심의 말이 끝나자 쉬르나크가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녀를 잡아가지 않겠다는 사실을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드래곤 하트만 넘겨주면 넌 그녀를 얻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다. 재산 따윈 필요 없어. 이미 작정을 한 듯 카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가씨께서 붉은 전갈좌를 타고 난 이상 오늘이 아니더라도 네놈들은 또다시 아가씰 노릴 가능성이 있을 터. 난 이 자리에서 이 모든 불안의 근원을 제거하려 한다. 자, 잠깐 기다려라. 이제 입장이 바뀌어 다급해진 쪽은 쉬르나크였다.

드래곤 하트의 폭발력을 한낱 인간의 몸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드래곤 하트가 깨어지는 순간 네놈의 몸뚱이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린다. 상관없다. 아가씰 위해서라면 난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말을 마친 카심은 드래곤 하트를 움켜쥔 오른손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비록 드래곤 하트가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이라고 하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겐 하찮기 그지없는 물건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보물이라 해도 아가씨의 행복과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말을 마치자마자 카심은 오른손에 슬며시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쉬르나크는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차원의 문을 열어라. 당장 돌아가야 한다. 이미 늦었어. 카심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양손을 강하게 부딪혔다.

쩌정. 왼손에 든 베르하젤의 홀에 부딪힌 드래곤 하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로 이어진 것은 엄청난 빛의 대폭발이었다.

번쩍. 식장 내부는 순식간에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빛의 물결은 노도처럼 식장 내부를 사정없이 휘감았고 사람이든 마물이든 예외 없이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 속으로 쉬르나크의 것으로 짐작되는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키에에엑.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장을 뒤덮은 빛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배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식장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물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리치도, 다크 쉐이드도, 심지어 카심에게 당한 엘리트 둠 워리어의 잔해 역시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 모두 사라졌어.

이제 살았어.

생명을 건졌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크 쉐이드에 의한 중독에서 벗어났는지 영주 내외도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을 뜬 마틸다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오빠!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가는 쪽에는 카심이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사지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틸다는 카심을 덥석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떨어지며 카심의 가슴팍을 적셨다.

진작 내심을 말하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그랬더라면…….

채 말을 이어나가지 못한 마틸다는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카심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세상을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심이 그토록 자신을 생각했었다니……. 세상의 그 어떤 보물과도 자신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던 카심의 음성이 아직까지 귓가에 생생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마계 마물들과 혈투를 벌이던 늠름한 모습 또한 눈앞에 선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냉대를 했었다니……. 어제 일이 후회스러워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 카심을 따라 저 세상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기에 마틸다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카심이 내려놓은 장검이 이가 이리저리 빠진 흉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검의 손잡이가 손에 닿자 마틸다는 카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틸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오빠. 저 세상에서 만나 못 다한 연을 맺도록 해요.' 나직이 다짐한 마틸다는 검을 집어들어 목을 찌르려 했다. 그 때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마틸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내가 눈을 뜬 채 마틸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카, 카심 오빠.

둘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로 부둥켜안았다. 카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마틸다는 연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이 세상에서 더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살아나셨군요. 하늘에 감사드려요. 정말로…….

걱정 마십시오. 제 명이 다하는 날까지 아가씰 지켜드리겠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포옹을 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사람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외마디 비명 소리가 장 내의 적막을 찢어놓았다.

아악. 내 검, 내 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모르세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빛을 발하던 샤이어 블레이드는 간 곳 없고 손가락 사이에서 회백색 재가 힘없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베르하젤의 홀이 내뿜은 신성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는데 그것으로 보아 샤이어 블레이드는 애초부터 극악한 마검이었던 것 같았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작자로군.

연신 울부짖는 모르세르를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아르네 영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부인을 부축한 채 조용히 카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마비에서 풀리지 않았는지 걷기가 힘겨워 보였지만 그는 열심히 발을 놀렸다. 영주가 다가가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던 카심이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욱.

상처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는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심은 필사적으로 영주 내외에게 예를 취하려 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카심을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그냥 누워있게.

죄, 죄송합니다.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드렸는데 어쩔 수 없이…….

영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처가 심한 것 같군. 따라서 영주의 명령으로 예를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네.

안될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르네 영주는 딸을 구해주어 고맙다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카심 자네가 그토록 대단한 용병단의 대장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어. 정말 놀라워.

카심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하찮은 이름일 뿐입니다.

아니야. 도대체 카심 용병단이 어떤 용병단인지 정말 궁금했었지. 그런 용병단의 대장이라니 세상에서 딸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사윗감이겠지? 그렇고 말고.

머쓱해진 카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아르네 영주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깡그리 제외하더라도 자네에겐 충분히 마틸다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네. 마틸다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들었을 때 자넨 이미 충분한 자격을 얻었어.

말을 마친 영주는 냉랭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모르세르를 쏘아보았다.

한낱 검 한 자루에 약혼녀를 팔아 넘긴 약혼자와 자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 내가 눈이 어두웠네. 진정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네.

잠시 머뭇거리던 아르네 영주는 곧 내심을 털어놓았다.

내 딸아이를 받아주겠나? 자네가 그 아일 지켜준다면 난 이제 아르네 영지를 잃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네.

그 말을 들은 카심의 가슴속은 희열감으로 가득 차 올랐다. 드디어 사랑하는 여인을 얻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한 자,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제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마틸다 아가씰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행복을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고맙네.

목이 메였는지 영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영주 부인과 마틸다의 눈에는 어느새 뿌연 습막이 서려 있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리게.

카심에게 미소를 지어준 아르네 영주는 몸을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튜드렛 백작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 도착한 아르네 영주는 나지막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당신 아들은 검 한 자루에 내 딸을 팔아 넘겼소. 아마 입이 열 개라도 하실 말이 없을 듯 싶소. 아직까지 혼인서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난 공식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는 바요.

튜드렛 백작은 입술을 악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의 아들이 못할 짓을 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네 영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보시다시피 딸아이에겐 이제 더 없이 믿음직스러운 배필이 생겼소. 좋은 날을 잡아 빠른 시일 내에 결혼식을 거행할 생각이오. 그러니 당신들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시오.

아르네 영주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순간 튜드렛 백작이 한 마디를 던졌다.

증거가 있소?

황당해진 영주가 고개를 돌렸다. 튜드렛 백작은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보시다시피 내 아들이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 않소? 검이 재로 변했으니 거래의 증거 또한 함께 사라진 것과 다름없소. 때문에 파혼의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바요.

튜드렛 백작의 머리 속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샤이어 블레이드를 건지진 못했지만 아르네 영지까지 잃을 수 없었다. 가만히 둔다면 아르네 영지는 필경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마틸다가 카심과 결혼할 경우라면 틀림없었다.

'저 용병 녀석 실력은 대단하지만 분명히 귀족은 아니렷다.' 평민에게 작위가 세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린 튜드렛 백작은 이 일을 빌미로 아르네 영지를 집어삼켜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과연 그 아들에 그 아비였다.

당신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파혼을 빌미로 우리 튜드렛 가문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소.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대전사 결투를 요청하는 바요.

대전사 결투. 그것은 트루베니아에서 시작해서 아르카디아의 각 왕국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귀족가문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의 일종이었다. 귀족 가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법을 적용하기가 무척 힘들다. 법이란 한 마디로 평민들을 옭아매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런 경우 각 가문에서는 자격요건을 가진 대전사를 선출해서 서로 대결을 시켰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잘잘못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튜드렛 백작은 바로 그 대전사 결투를 제안하고 있었다.

우리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 대로 실추된 판국이니 난 가진 것을 몽땅 걸 생각이오. 튜드렛 영지 전체를 걸겠소. 어떻소? 과연 당신에게 이 대전사 결투에 동의할 마음이 있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방귀뀐 놈이 도리어 성내는 판국이니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이 고조된 아르네 영주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영지를 포기한 상태인 데다가 믿음직스러운 사위에 대한 기대감이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좋소. 합시다. 까짓 것 못할 게 있겠소.

뜻을 이룬 튜드렛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계약이 성립되었소. 많은 분들이 공증을 서 주셨으니 행여나 부인하진 않을 것이라 믿소.

부인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나에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소.

그렇다면 대전사로 나서는 기사의 자격요건에 대해 잘 아시겠구려.

튜드렛 백작의 말에 아르네 영주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비로소 대전사는 귀족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순수한 펜슬럿 사람으로써 반드시 귀족가문의 자제여야 한다는 대전사의 자격요건을 떠올린 아르네 영주는 땅을 쳤다.

'아뿔사. 내가 이 간악한 놈에게…….' 튜드렛 백작의 계략에 넘어간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번복할 수는 없었다. 머지 않아 다른 귀족에게 넘어갈 아르네 영지였기 때문에 영주는 결국 마음을 비우기로 작정했다. 믿음직한 사위를 얻은 것이 지금 그에겐 더 없는 위안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오.

침통하게 변한 아르네 영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튜드렛 백작은 느물느물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서둘러 대전사를 물색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참고로 우리가 내세울 대전사는 팔라딘이니 잘 고르셔야 하오.

말을 마친 튜드렛 백작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휴고.

기사 한 명이 얼른 달려와서 백작 앞에 시립했다. 엘리트 둠 워리어에게 당했던 팔라딘들 중 한 명으로써 상세가 비교적 가벼운 자였다. 붕대를 감은 오른 손 말고는 별달리 부상을 입은 기색이 없었다. 튜드렛 백작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우리 가문의 대전사를 맡아줘야겠어. 자신 있겠지?

그 말에 휴고는 카심이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그는 카심이 대전사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백작의 제의를 수락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자네만 믿겠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그는 별 표정변화 없이 카심에게 다가왔다. 카심과 마틸다는 아무 말도 없이 두 손을 마주잡고 있을 뿐이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영주가 다가가자 카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 영주님…….

영주는 상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미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갈 영지야. 부디 좋은 영주가 오기만을 바랬는데 이렇게 된 마당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카심은 어쩔 줄 몰라했다. 영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사윗감으로 인정하다니…….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리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

제일 앞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데이몬이었다. 그의 뒤로 미첼과 용병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야 달려오다니…….' 하지만 일이 잘 처리된 터라 섭섭한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심에겐 데이몬을 대할 것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기껏 맡긴 베르하젤의 홀과 드래곤 하트를 깡그리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카심은 마틸다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저들이 바로 내 동료들이오. 잠시 다녀오겠소.

그래요.

마틸다는 활짝 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에게 목례를 건넨 카심은 조용히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만신창이가 된 자네 꼴은 또 뭔가? 응 이것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데이몬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연 그의 얼굴이 심각해지는가 싶더니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드래곤 하트의 마나인데? 이런……. 카심!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데이몬. 불가피한 일이 생겨서 그만 드래곤 하트를…….

대장 자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얼마나 아끼는 것인 줄 알면서……. 어휴. 속 쓰려.

데이몬은 가슴을 탕탕 치며 아까워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카심은 그저 쩔쩔매기만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봉급을 깡그리 털어서라도 반드시 갚아 드리겠습니다.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리 문제삼지는 않을 듯한 눈치였다.

그만 두세. 드래곤 하트가 어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인가? 그래 도대체 어디다 썼나?

예 설명 드리겠습니다.

카심은 곧 조금 전에 이곳에 일어났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마계의 사자가 막강한 지옥의 전사들을 데리고 마왕 케루빔의 신부로 맞이할 붉은 전갈좌의 처녀를 구하러 왔다는 사실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데이몬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 정도라면 사용할 만 하지. 암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베르하젤의 홀이 오래되어 효과가 조금 미심쩍었는데 제 역할을 하긴 했군.

효과는 정말 확실하더군요. 다크 쉐이드를 비롯한 마물들을 깡그리 날려버렸으니까요. 뭐 리치야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으니 언젠가는 살아나겠지만…….

쉬르나크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카심의 얼굴에는 걱정기가 가득했다. 그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걱정 마. 리치라고 불사신은 아니니까. 본체에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경우라면 라이프 포스 베슬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니까 어쩌면 부활하지 못할 수도 있어.

정말입니까?

데이몬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물론이네. 아무튼 자네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얻긴 했다는 뜻이로군.

카심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하네. 정말 잘 된 일이야.

축하합니다. 대장.

역시 하늘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답하는 법입니다.

용병들은 이구동성으로 카심을 축하해 주었다. 양이 차지 않았는지 데이몬이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이럴 게 아니라 자네 장인어른을 한 번 만나봐야겠군. 약혼녀가 얼마나 예쁜지 궁금해 미치겠네.

소개 드리겠습니다.

조금 뒤 아르네 영주 내외는 반갑게 용병대원들을 맞았다.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대원들이시라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과찬이십니다. 뭐, 저희야 대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입장이지요. 대장이 워낙 지휘를 잘 하니까 말입니다.

아르네 영주는 용병대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옆에서는 카심과 마틸다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선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의 얼굴에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영주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며칠 후 저들은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오. 물론 참석해 주시겠지요?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병사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문장을 보니 튜드렛 영지의 병사였다. 그는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늘어놓았다.

튜드렛 백작님께서는 대전사 결투를 언제 치르실 건지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아르네 영주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 있다 통보해 주겠네.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병사가 몸을 돌리자 데이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대전사 결투라니 무슨 소린가?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카심이 나서서 데이몬에게 모든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백배 사죄해도 모자랄 판국에 대전사 결투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군.

데이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첼에게 손을 휘저었다.

네가 나가서 깨끗이 해결해버려.

미첼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맡겨 두십시오. 대장님의 일이 아닙니까? 아우인 제가 가만히 두고볼 수야 없죠. 깨끗하게 해결하겠습니다.

미첼이 가슴을 탕탕 치며 공언했지만 영주의 머릿속에는 아직까지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눈앞의 젊은 기사가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알긴 했지만 대전사는 아무나 될 수 없었다.

대전사로 나설 수 있는 데에는 자격요건이 무척 까다롭소. 순수한 펜슬럿 인으로써 귀족신분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 말에 카심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비로소 얼마 전 수여받은 미첼의 작위가 떠오른 것이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영주님. 미첼은 이미 펜슬럿 국왕전하로부터 친히 작위를 하사 받았습니다. 근위기사 단장인 카르수스 공작께서 직접 그 자리에 참관하셨지요

영주는 깜짝 놀랐다.

그, 그 말이 정말인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아르네 영주의 머릿속에는 희열감이 가득 차 올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팔라딘이 이길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낭보를 접한 영주는 그 즉시 일행을 데리고 튜드렛 백작을 만나러 갔다.

이 기사가 우리 아르네 영지를 대표할 대전사라오.

영주의 소개와 함께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미첼을 본 튜드렛 영지의 대전사 휴고는 금세 얼굴이 샛노래졌다. 식장을 빠져나가면서 그가 보여준 무용이 아직까지 생생했었고 그의 검에서 솟아올랐던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는 휴고가 감히 시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팔라딘이 소드 마스터와 대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튜드렛 백작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설마 대전사의 자격요건을 모르고 계셨소? 펜슬럿의 귀족이 아니면 그 누구도 대전사가 될 수 없다오.

아르네 영주는 웃음 띤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물론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펜슬럿의 귀족이오. 국왕전하께서 친히 남작의 작위를 내리셨답니다. 그렇지 않소? 미첼 경.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 작위수여식에는 근위기사 단장이신 카르수스 공작전하께서 친히 참관하셨지요.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전 미첼 남작이라고 합니다.

이젠 튜드렛 남작의 얼굴이 싯누래질 차례였다. 미첼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휴고가 대전사로 나서더라도 승산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 난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소. 확실하게 밝혀진 일이 아닌 다음에야…….

수도에다 알아보면 될 것 아니오?

그, 그것은 나중에 내가 알아보리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데이몬이 냉소를 쳤다.

이제 와서 발을 빼시겠다? 어림없지.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인크레시아를 열어 젖혔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파파파팟.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 공포스런 위용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갑주로 완전 무장한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검을 뽑아든 채로 자리를 잡았고 그 옆에 사뿐히 내려앉은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와 러셀런트는 연신 기성을 질러대며 날개를 펄럭거렸다. 콰루루루. 그 모습을 쳐다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계 전사들에 이어 이번에는 막강한 언데드 군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 세상에…….

말로만 듣던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야.

튜드렛 영지 병사들의 질린 표정을 감상하듯 훑어본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든지 아르네 영지를 벗어나려는 자는 가장 먼저 저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오. 그럼 난 코르도로 공간이동 해 가서 미첼의 신분을 증명해 줄 사람을 모셔오도록 하지. 서로의 영지가 걸린 일이니 결코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데이몬의 주변으로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눈부신 광망을 토해냈다. 그의 몸은 빛 무리에 묻혀 금세 사라져버렸다.

이, 이런.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 몰랐으므로 튜드렛 백작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에 하나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꼼짝없이 자신의 영지까지 빼앗기게 될 형편이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영지의 소유권은 펜슬럿 국왕에게 있다. 하지만 이처럼 양 영주의 합의에 의해 대전사 결투가 벌어질 경우 국왕의 승인절차를 거쳐 영지의 관리권이 합의한 대로 넘어가게 된다. 결투에서 패한다면 튜드렛 백작은 수레 한 대에 한정된 짐과 함께 내쫓길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튜드렛 백작이 머뭇거리며 아르네 영주에게 다가갔다.

아, 아르네 영주.

말씀하시오.

시, 실은 생각해 보니 내가 실언을…….

아르네 영주의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튜드렛 영지를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별다른 소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죽고 나면 아르네 영지와 함께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영지에 대한 욕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튜드렛 백작의 비열한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랭하게 대답했다.

국왕 전하로부터 영지의 관리권을 부여받은 영주께서 어찌 실언을 하셨겠소? 이미 많은 귀족 분들께서 공증을 마친 상태이지 않소?

그렇지만 문서로 작성한 것도 아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소이다. 이제 와서 부인하지 않으시리라 믿겠소.

튜드렛 영주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자고…….' 아르네 영지를 집어삼키기 위해 욕심을 부린 것이 애초부터 화근이었다. 아르네 영지에 대전사로 내세울 팔라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전혀 뜻밖의 소드 마스터가 대전사로 나오다니……. 이제 튜드렛 영주에게 기대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젠 저 소드 마스터의 자격요건을 문제삼을 수밖에 없겠군. 누굴 데리고 올지 모르겠지만 행여나 미심쩍은 것이 있다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것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의 공터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마법사가 사라진 뒤 바닥에 새겨져있던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번쩍. 광망이 사라지고 난 뒤 그곳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생겨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조금 전 떠났던 마법사였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보던 튜드렛 백작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신분을 가진 자가 마법사와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카르수스 공작? 대체 근위기사 단장이 이곳엘 왜?

마법진 위에는 펜슬럿의 근위기사단장인 카르수스 공작이 근위기사 십여 명과 함께 서 있었다. 난데없이 아르네에 모습을 드러낸 근위기사 단장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미 그는 펜슬럿 국왕의 지시를 단단히 받고 온 상태였다.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카심 용병단에 펜슬럿 사람이 둘이나 끼여 있다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군. 모두가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우리 국왕전하 덕택이지. 암 그렇고 말고.' 그는 우선 아르네 영주에게 다가가서 극진한 태도로 예를 취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래 전 코르도에서 뵌 뒤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군요.

아르네 영주 또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근위기사 단장이 궁벽한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아르네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런 일은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예를 취했다.

카르수스 공작전하를 뵈옵니다. 그런데 아르네엔 도대체 어인 일로…….

본관은 국왕전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찾아왔소이다.

기사단장이 아르네 영주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돌연 튜드렛 백작이 다가가서 고개를 꾸벅 조아렸다.

카르수스 공작전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더 없는 영광입니다. 평소에 위명 높으신 공작전하를 절실히 흠모해 왔답니다. 이렇게 뵈게 되다니 전 도저히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돌린 카르수스 공작은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아르네 영주를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라 볼 수 있는 태도였다.

본관을 흠모해 왔다니 고맙구려.

인사를 마친 기사단장은 냉랭히 고개를 돌렸다. 두 영주가 비록 같은 백작의 신분이긴 하지만 아르네 영주는 선정으로 영지 주민들의 신뢰를 깊이 얻고 있는 명망 높은 영주였다. 물론 그 사실을 근위기사 단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반면 튜드렛 영주는 거듭된 학정으로 영지 주민들의 원성을 깊이 사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르수스 공작이 두 영주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그에겐 아르네 영주에게 극진히 대해야 할 제반 사정이 있었다. '카심 용병단의, 그것도 대장이라는 자가 아르네 영주의 사윗감이라면…….' 생각을 마친 카르수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두 영주를 쳐다보았다.

두 분께서 영지를 걸고 대전사 결투를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소이다. 이미 국왕 전하의 승인이 떨어졌소. 게다가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관이 친히 참관을 맡기로 했지요. 그럼 두 영지의 대 전사는 지금 즉시 앞으로 나와주시오.

그 말에 튜드렛 영주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대 전사 결투의 참관인으로 근위기사 단장이 나서다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할 판국이 되어버렸기에 그는 상대 대전사의 신분을 걸고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아르네 영지의 대전사가 확실한 자격요건을 갖췄는지가 의문이라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수스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미첼을 불렀다.

미첼 남작. 이리로 오시오.

미첼은 환히 웃으며 다가와 카르수스 공작에게 예를 취했다.

사흘만에 다시 뵙게 되는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 역시 반갑네.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카르수스 공작은 미첼의 어깨에 손을 척 걸친 채 튜드렛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신분을 의심한다는 것은 곧 국왕전하를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바요. 미첼 남작은 사흘 전 본관의 참관 하에 국왕전하로부터 친히 작위를 수여 받으셨소. 그 뿐인 줄 아시오? 심사를 받지 않고 근위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특혜도 함께 수여 받았지. 인품에서부터 실력, 그리고 충성심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펜슬럿의 기사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가?

말을 마친 공작은 은근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이미 난 그를 내 후임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소. 물론 근위기사단에 들어온 이후의 일이겠지만.

미첼이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절 이토록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어깨가 무겁습니다.

튜드렛 백작으로써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상대의 말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로 드러났고 이제 그는 꼼짝없이 영지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카르수스 공작은 더 이상의 논쟁을 불허하겠다는 듯 간략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알아본 결과 튜드렛 가문의 휴고 역시 대전사로 나서기에 전혀 결격요인이 없는 기사이더군. 그럼 이제 대결을 시작하도록 하겠소.

불쌍하게도 휴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그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 기색을 눈치챈 데이몬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슬며시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갑옷을 걸치고 있던 미첼을 쳐다보았다.

미첼.

부르셨습니까?

슬쩍 눈짓을 준 데이몬은 슬며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부탁인데, 이번 대결에서는 제발 상대를 두 토막 치지 말도록 해라……. 피바다 위에서 조각 난 시체 치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도 잘 알잖아?

이미 미첼은 눈빛 하나로 데이몬의 의중을 알아차리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일격에 두 토막 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저승으로 보내 주는 것이 제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죠.

그 말을 들은 휴고의 머릿속에는 상대의 공격에 가차없이 토막 나던 둠 워리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둠 워리어가 들고 있던 갈고리 검이 마치 당근처럼 쪼개버리던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갑옷과 방패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강철갑옷과 방패도 관 뚜껑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의 다리는 금세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쳐다본 튜드렛 백작은 기가 찼다. 모든 희망을 휴고 하나에 걸고 있는데 그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휴고가 손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다급하게 카르수스에게 다가갔다.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고, 공작전하.

무슨 일이오?

냉랭하게 쳐다보는 기사단장의 시선을 받으며 튜드렛 백작은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죄, 죄송하지만 이제 생각났습니다. 저희 대전사는 마계마물들을 상대로 싸우느라 손에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도저히 검을 쥘 수 없는 형편이니 대전사 결투를 며칠 미루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카르수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휴고를 쳐다보았다.

사실인가?

그,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검을 쥘 수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휴고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는 무척 아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카르수스 공작은 별 표정변화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좋소. 튜드렛 대전사의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이번 대전사 결투는 보름 뒤 코르도의 궁성 연무장에서 치르도록 하겠소. 그 정도라면 손의 상처가 낫고도 나을 테지.

말을 마친 카르수스 공작은 두 영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신 본관은 두 영주의 재산행사권을 동결하겠소. 이날 이후로 각 영주들께서는 일체 영지의 재산에 손댈 수 없소. 엄선된 근위기사가 한 명씩 파견되어 그것을 감시할 것이며 대전사 결투가 끝난 뒤 패한 영주의 영지는 이 상태 그대로 승리한 영주에게 귀속될 것이오. 이에 동의하시오?

동의하겠습니다.

어차피 아르네 영주에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숨겨놓은 재산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튜드렛 영주는 달랐다. 벌어놓은 시간 동안 재산을 깡그리 빼돌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재산행사권이 동결되어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굴이 검게 변한 튜드렛 백작. 하지만 카르수스 공작의 채근이 거듭 이어지자 그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 동의하겠습니다.

좋소.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기사단장은 곧 근위기사들 중에서 두 명을 선출했다. 하나같이 물욕이 없고 공정한 자들이었다.

그대들에게 각기 한 명씩 튜드렛과 아르네 영지에 상주하며 보름동안 영주들의 재산을 감시할 것을 명한다. 그대들은 근위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마무리를 마친 기사단장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일에 이어 본관은 국왕전하의 명령을 한 가지 더 수행하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기사단장은 마틸다와 손을 잡고 서 있는 카심에게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는 미첼에게 물어 카심이 누구인지 파악한 상태였다. 그가 앞에 서자 긴장한 카심이 카르수스 공작에게 예를 올렸다.

아르네 주민 카심 플로렌스가 펜슬럿 근위기사 단장님을 뵙습니다.

카르수스 공작은 급급히 손을 휘저었다.

예를 거두시오. 이제부터 본관은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카심 그대에게 어명을 전달할 계획이오.

뜻밖의 말에 카심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난데없이 펜슬럿 국왕의 어명이라니……. 마틸다와 영주 내외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어명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명이 적힌 문서를 펴든 카르수스 공작은 묵묵히 그것을 읽어나갔다.

카심 플로렌스. 그대는 아르네 출신으로써 카심 용병단을 이끌며 펜슬럿의 명성을 아르카디아 대륙 전역에 드높였다. 그것도 모자라 불굴의 투지와 용기로 아르네 영지를 무단 침입한 마계마물들을 무찔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이에 짐은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작위를 내린다. 앞으로 짐이 내린 남작의 작위는 카심 플로렌스의 자손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기계적인 말투로 어명을 읽어 내린 기사단장은 웃는 낯을 지었다.

카심. 만약 당신이 동의할 경우 그대는 남작의 작위를 얻을 수 있소. 그렇게 되면 공식적으로 영지를 세습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지. 만약 아르네 영지를 세습하게 될 경우 그대는 즉시 백작으로 봉함 받을 수 있을 것이소. 어떻소? 동의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