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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사랑을 느꼈다

이를 악문 라일리는 수습기간을 마치자마자 근위기사단에 자격심사 신청서를 넣었다.

수석을 차지한 헤일즈와는 달리 그는 가문의 후광을 적절히 이용해야만 근위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방면의 인맥을 동원한 끝에 라일리는 마침내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헤일즈를 몰락시킬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근위 기사단에 들어간 뒤, 탄탄대로를 내달리던 헤일즈에게 사랑이 다가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훈련소를 찾아온 수석교관의 딸 엘리스를 본 순간 헤일즈는 생전 처음 사랑을 느꼈다. 엘리스 역시 헤일즈가 그리 싫지 않은 눈치라서 둘의 사랑은 금방이라도 무르익을 듯 보였다. 둘은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여기에 라일리의 방해가 끼여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된 수련 뒤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데이트를 즐기던 두 사람.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며 하나가 될 순간만을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라일리의 본가인 프리즈먼 가문에서 엘리스의 집안에 공개적인 청혼을 해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라일리가 꾸민 수작이었다. 아름다운 엘리스를 라일리 역시 호시탐탐 눈독을 들여왔던 것이다.

넉넉지 않은 귀족가문인 엘리스의 집안에서 그 청혼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프리즈먼 가문이라면 펜슬럿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기에 엘리스의 아버지는 그 즉시 헤일즈와 엘리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는 울며 매달리는 엘리스를 탑에 가두면서까지 프리즈먼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다. 프리즈먼 가문과 인연을 맺는 순간이 당당히 명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헤일즈는 낙담했다. 그로써는 사랑을 여지없이 깨어버린 라일리가 더할 나위 없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집요한 회유에 견디다 못한 엘리스는 마침내 라일리와 혼인식을 치렀고, 그 날 헤일즈는 술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사고를 저질렀다. 술김에 프리즈먼 가문으로 찾아간 헤일즈는 라일리를 불러내어 반쯤 죽도록 패버렸던 것이다.

갑옷도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행한 일이었지만 사고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프리즈먼 가문에서 근위기사단에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 항의를 해 온 것이다.

- 근위기사 헤일즈 브루노가 검과 갑주로 완전 무장한 채 프리즈먼 가문에 난입했다.

그는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본가의 후계자인 라일리 프리즈먼을 살해하려 했으며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내인 엘리스를 겁탈하려 했다.-

헤일즈로써는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증거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프리즈먼 가문의 모든 고용인들은 암암리에 입을 모은 상태였다.

맞습니다. 그는 장검뿐만이 아니라 헬버드와 단검까지 소지했었습니다.

우리 앞에서 라일리 내외를 깡그리 죽여버리겠다고 공언까지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엘리스의 판이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그는 날 겁탈하려 했어요. 만약 남편이 아니었다면 난 저 짐승에게 가차없이 능욕 당했을 거예요.

재판정에서 거침없이 증언하는 엘리스의 모습을 보고 헤일즈는 피눈물을 흘렸다. 그 착했던 엘리스가 벌써 돈과 권력에 물들어 버리다니……. 변심한 연인을 앞에 둔 헤일즈에겐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헤일즈는 유죄가 인정되었고 처벌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에는 살인미수 한 가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큰 중죄에 속했다. 만약 그를 아끼는 근위기사 단장과 기사학부 학장의 청원이 아니었다면 헤일즈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이렇게 쉽게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청원으로 중대한 처벌은 면하게 되었지만 내려진 판결은 그래도 헤일즈에겐 혹독하기 짝이 없었다.

-헤일즈에게서 5년 간 근위기사 자격을 박탈한다. 그 기간 동안 수습기사 신분을 유지하며 공을 세우도록 하라.-

하루아침에 수습기사로 강등된 헤일즈. 이미 그에게 펜슬럿에 대한 애정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 헤일즈는 아무런 의욕도 목표도 없이 5년 동안 묵묵히 수습기사 생활을 해 나갔다. 이삼일에 한 번씩 라일리가 찾아와서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헤일즈는 묵묵히 참아가며 5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약정된 5년이 지나자 헤일즈는 아무 미련 없이 근위기사단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을 채웠으니 근위기사 신분이 다시 복원될 터였지만 그는 추호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당시 라일리는 근위기사단 부대장이 되어있었고 평기사 신분으로 그의 마수를 벗어날 길이란 없었다. 무엇보다도 헤일즈를 실망시킨 것은 실력도 통솔력도 없는 라일리가 단지 가문의 후광만 가지고 높은 직책에 올랐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이미 제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아쉬운 눈길을 날리는 근위기사 단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헤일즈는 미련 없이 펜슬럿을 떠났다. 자유기사로써 정처 없이 대륙을 여행하던 헤일즈. 그러다가 결국 카르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과거를 남김없이 고백한 헤일즈는 무거운 낯빛으로 미첼을 와락 끌어안았다.

펜슬럿으로 가지 말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라일리의 가문은 펜슬럿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맞서봐야 버틸 승산이 전혀 없다. 그러니 넌 결코 펜슬럿에 가서는 안 된다.

그 이후로 미첼은 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정말 공교롭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보던 미첼은 기가 막혔다. 하필이면 라일리가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아버지와 끝없는 악연으로 점철된 라일리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미첼은 정신마저 아찔해졌다. 그런 미첼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라일리는 음흉한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펜슬럿 근위기사단은 개나 소나 들어오는 곳이 아냐.

시골 촌구석에서 어줍잖게 배운 검술 따윈 이곳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모멸감으로 인해 미첼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확실하게 모욕을 주기로 작정한 듯 라일리는 계속해서 미첼을 조롱했다.

헤일즈 녀석에게서 배웠다면 뭐 볼 필요도 없겠군. 실력이 모자라서 근위기사단을 탈퇴한 녀석이니 말이야.

미첼의 입술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경고하겠소.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시오.

얼씨구. 아비와 똑같은 녀석일세 그려.

라일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그에겐 미첼의 실력 따윌 보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헤일즈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에겐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근위기사가 되고 싶어 찾아온 용기 하나만은 가상하군. 하지만 애석하게도 근위기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냐. 어중이떠중이들이 심사를 받겠다고 일년에도 수백 명씩 찾아오는 판국이니 말이야.

미첼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니 필사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지. 동기생의 자식이라 특별대우를 해 주고 싶어도 부단장이란 직책이 허락하지 않는군. 정 심사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신청서나 한 번 작성해보게.

라일리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구석에 서 있던 근위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심사신청서를 미첼에게 내밀었다. 그의 투구가리개 사이에서 안됐다는 눈빛이 흘러나왔다. 라일리의 눈밖에 났으니 이미 탈락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그는 성의 없이 설명을 마쳤다.

대충 알아서 기재하시오.

이를 앙 다문 미첼은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재란을 하나도 빠짐 없이 채워 넣은 미첼은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 있소.

미첼이 내민 신청서를 받아든 근위기사는 그것을 라일리에게 전해 주었다. 순간 미첼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솟구쳤다. 신청서를 받아든 라일리가 보지도 않고 그것을 좍좍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익.'

아래로 늘어뜨린 주먹이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보였는지 구석에 있는 근위 기사들이 일제히 미첼에게로 다가왔다.

경고하건 데 경거망동할 생각 따윈 하지 마시오.

근위 기사들이 빈틈없이 앞을 가로막은 것을 확인한 라일리는 느물거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심사에서 통과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내일 이맘때쯤 다시 찾아오게. 그 때 심사 여부를 통보해 주겠네.

신청서를 찢어버린 뒤 심사여부를 알아보러 다시 오라니 미첼로써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미첼은 핏발선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귀로 라일리의 이죽거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참고로 얘기하지만 심사참가 여부는 전적으로 내 관할 하에 있네. 그러니 행여나 요행 따위는 바라지 않기를 권유하는 바이네.

모멸감 때문에 미첼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왜 이곳을 찾아왔는가 하는 회의가 뇌리 속에 밀려들었다. 급기야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미첼의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후 미첼은 궁성을 나설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첼이 파라다이스 여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미첼은 술에 떡이 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여관에 들어섰다.

아니? 손님.

점원 하나가 깜짝 놀라 미첼을 부축했다. 카심으로부터 거금을 팁으로 받은 그 점원이었다.

바,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미첼을 부축한 채 방으로 올라갔다. 거처가 바뀐 줄 몰랐기 때문에 점원은 미첼을 카심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니 미첼.

미첼을 받아든 카심은 깜짝 놀랐다. 함께 지냈던 1년 동안 미첼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였으므로 카심으로써는 이 자가 진정 미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곤드레가 된 미첼은 마치 주정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대, 대장이오? 대장?

그렇소. 나 카심이오.

카심을 쳐다보는 미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대장. 제발 날 좀 받아주시오.

내, 내가 별달리 해 준 것은 없어도 끅. 나, 나름대로 검술지도에는 열과 성의를 다했잖소.

나도 알고 있소. 미첼.

대장이 한 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소. 어, 언제든지 돌아오면 받아준다는 말 말이오.

바, 받아주시오. 이곳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 난 더 이상 갈곳이 없으니까…….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미첼의 일그러진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 고맙소. 대장. 아, 앞으로 잘 하리다.

모습을 보니 뭔가 곡절이 있는 듯 했기 때문에 카심은 일단 미첼을 부축해서 데이몬의 방으로 걸어갔다. 자세한 것은 미첼이 술에서 깨어난 내일 얘기해야 할 듯 싶었다.

많이 취하셨구려. 일단 자도록 해요. 나머지는 내일 얘기합시다.

연신 흐느적거리는 미첼을 데이몬의 방으로 데리고 간 카심은 그를 조용히 침대에 눕혔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데이몬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첼이 흐릿한 눈을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

맞소. 오늘은 데이몬 님과 함께 자도록 해요.

이불을 끌어다 덮어준 카심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시오. 당신에겐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 말이오.

도, 동료?

그렇소. 우린 이미 당신을 진정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소.

말을 마친 카심은 계속해서 동료란 말을 되뇌이는 미첼을 두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미첼은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한참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미첼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잠시 망설이던 미첼은 나지막이 데이몬을 불렀다.

데, 데이몬.

듣고 있어. 말해

뜻밖에도 데이몬의 대답은 바로 터져 나왔다. 자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 안 잤소?

빌어먹을……. 드래곤 녀석이 사흘동안 날 못 자게 하더니 이번에는 네 녀석까지 술 주정을 해서 내 수면을 방해하는군.

데이몬은 나지막이 욕설을 퍼부으며 몸을 일으켰다.

미, 미안하오.

미안할 건 없어. 원래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어지니까……. 그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술을 퍼먹었나?

나, 난.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혀가 꼬부라진 탓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술에서 깨게 해 줄까?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미첼을 본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마법이 구현되자 미첼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몸 속의 알콜 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비록 완전히 깬 것은 아니었지만 듣고 말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 정신이 든 미첼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미, 미안합니다. 하도 울적해서…….

근위기사가 되겠다며 기세 좋게 나간 녀석이 왜 곤드레가 되어 들어온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용병단에 다시 들어오겠다고 하는 거지?

카심과의 사이에서 오간 얘기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벌써 오래 전부터 깨어있었던 것 같았다.

근위기사가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나?

순식간에 어두워진 미첼의 안색을 본 데이몬은 그에게 뭔가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구태여 물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씩은 있는 법. 이미 데이몬 자신도 엄청난 비밀을 가슴속에 품고 있지 않던가?

원한다면 근위기사가 되게 해 줄 수 있다. 어떤가?

아닙니다. 이젠 근위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미첼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출세하는 데 순수한 실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미 펜슬럿이란 국가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라일리 같은 인물을 근위기사단 부단장으로 삼았다면 나머지는 안 봐도 뻔했기에 미첼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내심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허영심에 사로잡혀 살긴 싫습니다. 앞으론 한 명의 용병으로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데이몬은 미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있나?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도움이 되어 주지.

미첼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죠. 뭐. 동료가 된 마당에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될 테니.

미첼은 곧 그의 아버지와 라일리에 얽히고 설킨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대에 맺은 악연을 남김없이 털어놓은 미첼은 조금 전 겪었던 일까지 모두 얘기해 주었다. 끝으로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직책이 순수한 실력이 아니라 가문의 후광에 결정되는 곳이라면 몸을 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전 카심 용병단의 대원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

사정을 모두 들었지만 데이몬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전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뻗어 미첼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일단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괴롭혔던 것은 깨끗이 잊어버려.

미첼이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무슨 말씀을……. 그땐 제가 정말 못되게 굴었죠.

아냐. 사실 난 네 녀석에게 못할 짓을 정말 많이 했지. 뭐 사연을 설명해 줬으니 나도 비밀을 하나 얘기해 줄까? 이것 한 번 들어보겠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 데이몬은 그것을 미첼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은 어른 주먹만한 소라 껍질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미첼에게 데이몬은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고 그것을 귀에 댄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율리아나에게 했던 험악한 말이 고스란히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이것은?

그 때 너희들이 겪은 것은 모두 내 연출이었다. 늑대 떼도 그랬고 돈을 잃어버린 것도 그랬고……. 그때 난 너희들을 단단히 혼내주려고 작정했었거든.

세, 세상에…….

네 사연을 설명해 준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도록. 이것만 없앤다면 그때의 일은 완전히 묻혀버릴 테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미첼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퍽.

손에 마나를 모아 소라껍질을 부숴 버린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데이몬도 참 사악하십니다. 세상에 그런 일을 계획하실 수 있다니…….

원래 내가 좀 사악한 면이 있는 편이지. 그건 그렇고 한 번 돌아앉아 보겠나?

미첼은 영문도 모르고 돌아앉았다. 순간 그의 명문혈로 데이몬의 장심이 밀착되었다.

그 때의 일을 사과하는 뜻으로 네 연공을 좀 도와주겠다. 지금 즉시 익히고 있는 마나연공법을 운용하도록 해라.

네?

시간이 없어. 마나를 끌어다 불어 넣어줄 테니 전력으로 연공을 시작해야 해.

데이몬의 의도를 알아차린 미첼은 즉시 연공을 시작했다.

그의 단전에 뭉쳐져 있던 마나가 전신혈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헤일즈로부터 전수받은 펜슬럿 고유의 마나연공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명문혈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마나가 물밀 듯 파고들기 시작했다. 데이몬이 끌어 모은 마나를 줄기차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 차있었다.

네가 익힌 것이 정파 내공심법이라서 얼마만큼 효과를 볼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주입하는 것이 순수한 대자연의 마나이고 네 녀석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어쩌면 예상치 못했던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불러주는 무리(武理)를 머릿속에 새겨듣도록 해라.

미첼에게는 미처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등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노도같은 마나의 물결을 제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서클의 대마법사인 데이몬이 전력으로 끌어 모아 불어 넣어주는 마나의 양은 심히 방대했다. 아니 그것은 여타의 마법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한 때 고도의 내가 고수였던 마법사가 아니라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심지어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몸 속을 흐르는 미묘한 마나의 흐름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자는 두 대륙을 통틀어봐도 오직 하나 데이몬 뿐이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미첼의 귀에 데이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무(武)의 극의(極意)는 곧 깨달음이다. 각 무도의 끝은 오로지 하나로 귀일(歸一)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바. 정(正)과 사(邪)는 비록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만 정점(頂點)에 이르면 일체의 차이가 없다.

데이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바로 무의 극의였다. 과거 마공의 고수였던 데이몬이 정종내공심법을 익힌 미첼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바로 깨달음이 그것이었다. 미첼 같은 고수는 이제 수련만으로는 쉽사리 실력을 올리기 힘들다. 오로지 깨달음을 얻어 벽을 깨뜨려야만 더 높은 경지에 쉽게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과거 느꼈던 경험을 바탕으로 미첼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수많은 고수들과 싸우며 얻었던 경험을 모조리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검을 단순한 도구로만 생각하지 마라. 검은 곧 손이며 또한 뼈의 연장된 부분이라 생각하라. 검에다 기를 채워 넣을 수 있으면 그 나머지 것에도 능히 가능한 법, 생각하라. 허공 역시 기를 응축시킬 수 있는 통로일 뿐이다. 그것을 행하는 것이 바로 강기의 발현이다.

미첼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알아듣기 힘든 주문처럼 들려오는 데이몬의 말이 점점 머릿속 깊이 스며들며 눈앞에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흐릿한 안개 같은 것에 싸여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그 형상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미첼이 형상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머리 속에서 터져 나왔다.

푸우.

미첼은 분수처럼 선혈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의식을 사라지기 전 미첼은 용케도 데이몬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기력을 모조리 소진해 버린 듯한 맥빠진 음성이었다.

그, 그 녀석 정말 대단하군. 반신반의했는데 결국 깨달음을 얻다니……. 후, 무척 힘들군. 아무튼 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축하한다. 이놈아. 넌 이제부터 소드 마스터다.

'소, 소드 마스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미첼의 의식은 아득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음날 미첼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응?

상체를 반쯤 일으킨 미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룻밤 사이에 마치 몸이 제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가뿐했다. 어리둥절해진 미첼은 몸 속의 마나를 한 번 돌려보았다. 순간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방대한 마나가 그의 통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실로 엄청난 변화였기에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도, 도대체 무슨…….

돌연 저쪽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고개를 돌리자 용병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미첼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심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하네. 미첼.

얼떨결에 내민 손을 맞잡은 미첼의 귀로 용병들의 환호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축하하오 미첼.

이젠 미첼에게 감히 못 개기겠군. 소드 마스터에게 어찌 개길 수 있겠어?

미첼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눈만 끔벅거리다.

'내가 정말 소드 마스터가 된 걸까?'

이번에는 데이몬이 다가왔다. 어제의 일로 상당한 기력을 소진한 듯 얼굴이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미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 데이몬. 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이놈아. 고마우면 알아서 기어. 너 때문에 내 수명이 10년은 축났겠다. 임마.

저, 정말 고맙습니다.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신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용병들의 마음이 가슴속 깊이 와 닿았고 이런 동료들이 여덟이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못내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데이몬의 걸쭉한 입담

도 지금 이 순간 그토록 정겨웠다.

원. 사내녀석이 울긴 왜 울어. 임마. 그만 울고 짐이나 챙겨.

떠, 떠나는 겁니까?

가야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펜슬럿 궁정에 잠시 들러야겠다.

구, 궁정에는 왜?

네가 말한 라일리란 녀석을 손봐주고 가야하지 않겠나? 이미 그놈을 단단히 혼내주기로 모두의 의견이 통일되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미첼이 안색을 굳혔다.

그냥 떠나면 안되겠습니까? 그래도 펜슬럿은 아버님의 조국이었습니다. 그곳에 피해를 입히긴 싫……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몬이 미첼의 머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걱정하지 마라. 이 녀석아. 펜슬럿엔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고 라일리란 녀석만 혼내줄 생각이니까……. 응?

미첼의 머리에서 전해지는 반탄력이 상상 이상이자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놈은 확실하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군. 몇 마디 불러준 말에 깨달음을 얻다

니 네놈도 참 어지간한 놈이다.

저, 정말 제가 소드 마스터가 된 겁니까?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하지만 자만하지 마라. 이들 역시 적어도 5년 이내에 너와 같은 경지에 오를 테니까. 저들이 익힌 마나연공법이 비록 속성이 가능하긴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정, 즉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경지를 초월하기가 현저히 힘들다는 점이다. 하지만 넌 달라. 차근차근 수련에 몰두하면 어쩌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도 있어.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미첼은 결코 겉으로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동료들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데이몬의 말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그래도 소드 마스터가 어딘데요? 1년 전까지만 해도 우린 3류 용병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만 되어도 여한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이상은 언감생신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란 자고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입

니다.

입담 좋은 패터슨이 너스레를 떨자 일행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에 휩쓸린 미첼도 따라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마음이 그토록 편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일행이 웃음을 그치자 카심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빨리 계획에 착수하자. 이미 데이몬께서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니 우린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짐을 챙겨든 용병들은 일제히 여관을 나섰다.

펜슬럿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인 라일리는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문득 어제 찾아온 헤일즈의 아들 녀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돌연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그 녀석이 나갈 때의 표정이 정말 볼만하던데 말이야. 정말 멍청한 놈이야.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찾아오다니…….

과거 헤일즈를 몰아내고 난 뒤 그는 말 그대로 탄탄대로를 내달렸다. 아내가 근위기사단 수석교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는 해마다 치러지는 자격심사에서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물론 거기에 불만을 가진 자가 없진 않았지만 그는 가

문의 후광을 이용해 불만을 쥐도새도 모르게 무마했다. 적어도 그의 관점에서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란 없었다. 그 결과 이처럼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헤일즈 녀석이 조금이라도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그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놈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상관할 바가 없다고 생각한 라일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헤일즈의 아들 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찾아오지는 않겠지?

그의 독백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에서 근위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단장님. 어제의 신청자가 자격심사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왔답니다.

라일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눈앞에서 신청서를 찢어버리는 것을 봤으면서 또다시 찾아오다니…….

그놈, 혹시 바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왔다니 만나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라일리는 거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데리고 와라.

잠시 후 미첼은 또다시 라일리와 대면했다. 라일리는 징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미첼을 쳐다보았다.

그래 자격심사 여부를 알아보러 왔다고?

미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애석하군. 자네의 심사신청은 자격미달로 반려되었네. 먼길을 왔는데 헛걸음을 시켜서 미안하군.

하지만 미첼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격미달로 심사가 반려되었다는 사실을 문서로 증명해줄 수 있소?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라일리는 즉시 펜을 집어들었다. 기사 지망생들의 자격심사 여부는 전적으로 부단장의 권한이기 때문에 그에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문서를 작성한 라일리는 친절하게도 그것을 읽어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잘 듣게. 당 지망생은 현격한 결격사유 때문에 근위기사단 자격심사 신청서를 반려한다. 인품과 검술실력, 용모 등 모든 면에서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에 도저히 본국의 근위기사가 될 수 없다고 판단된다. 이에 근위기사단 부단장인 라일리 프리즈먼의 권한으로 직접 신청서를 반려하는 바이다. 이 정도면 되겠는가?

충분하오.

상대가 의외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라일리는 문서를 옆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곧 문서를 미첼에게 넘겼다. 문서를 접어 품

속에 집어넣은 미첼은 라일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탁이 하나 있소.

뭔가 말해보게.

혹시 근위기사들의 연무장을 한 번 구경할 수 있겠소?

뭐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지. 물론 참관에 한정된 것이네.

라일리는 즉시 서류를 작성했다. 바로 연무장을 참관할 수 있는 서류였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냉소를 짓고 있었다.

'흐흐흐. 기사들을 상대로 실력을 증명해서 눈에 띄어보려는 속셈인 것 같은

데 철저한 오산이야. 참관을 허락 받은 자가 기사들에게 시비를 건다면 그 즉시 법에 의해 체포될 테니까……. 그럴 경우 내가 감옥에 가둬놓고 차근차근 요리해 주지.'

그런 꿍꿍이도 모르고 미첼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겐 동료가 있소. 모두 여덟 명이니 그들에게도 참관을 허락해 주었으면 하오.

그거야 문제없지.

라일리에게는 더욱 반가운 소리였다. 떼거지로 몰려들어 소란을 피운다면 죄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여덟 명의 참관증을 완성한 라일리는 그것을 미첼에게 전하게 했다.

그럼 잘 가게. 부디 무운을 비네.

미첼은 대답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라일리는 음흉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집무실을 나선 미첼은 곧장 궁성의 정문으로 갔다. 일행들이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문을 지키는 수문 병사들에게 참관증을 건네자 그들은 두말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확인되었습니다. 기사 지망생 미첼 외 여덟 명에게 연무장 참관을 허락하겠습니다.

카심 용병단 일행은 곧 펜슬럿 궁성에 들어섰다. 그들은 수문병사의 안내 하에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입구도 정문과 마찬가지로 강철로 보강되어 있었고 다수의 수문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조금 뒤 그들은 참관증을 제시하고 연무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멀리서 근위기사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에 몰두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상당히 규모가 큰 연무장이었는데 기사들이 무기와 갑주를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기초체력만을 단련하는 장소 같았다. 미첼에게 행여나 숨겨진 검술실력이 있을지도 몰라서 라일리는 참관장소를 이곳에 한정해 놓았다. 안내를 마친 수문병사는 연무장의 한 쪽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참관하시면 됩니다.

병사가 안내를 마치고 나가자 데이몬이 우두둑거리며 손마디를 꺾었다.

그럼 이제부터 슬슬 몸을 풀어볼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미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잔말말고 싸울 채비나 갖춰라. 데스 나이트 넷을 꺼내줄 테니 지금껏 해왔던 대로 한 판 붙으면 된다. 한 단계 올라섰으니 이젠 그놈들과 제법 오랫동안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영문을 몰라하는 미첼에게 데이몬이 눈을 부라렸다.

멍청한 녀석. 신나게 싸우고 있으면 펜슬럿의 고위층들이 모두 몰려오지 않겠나? 그놈들도 눈이 있을 테니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겠지? 그들 앞에서 네 진정한 실력을 뽐내보란 말이다. 그리고 뭐가 걱정이냐? 합법적인 참관증을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끼리 대련하는데 말이야.

비로소 데이몬의 의중을 알아차린 미첼이 손뼉을 딱 쳤다.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해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까불지 말고 갑주나 차려입어라. 데스 나이트 놈들도 지금쯤 몸이 근질근질할 테니…….

알겠습니다.

미첼은 두말도 하지 않고 짐을 풀었다. 오랜만에 환상의 갑주를 착용하는 것이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인크레시아에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모두 집합!

잠시 후 데스 나이트 넷과 듀라한 하나가 펜슬럿 궁성의 근위기사단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어젯밤 데이몬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터라 헬버트론이 눈빛을 빛내며 미첼에게 다가갔다.

크크크. 오랜만이로구나 애송아.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 얕봐서는 곤란하지.

오늘은 조금 힘겨우실 겁니다.

갑주를 다 차려입은 미첼이 미소를 띄우며 검을 곧추세웠다. 미첼의 변화가 기대되었는지 헬버트론은 가차없이 달려들었다. 장검에다 데스 블레이드(Death blade: 어둠의 오러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말이다. 마주쳐 가는 미첼의 장검에도 선열한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검에서 족히 1미터 이상 솟아오른 미첼의 오러 블레이드는 한 눈에 보기에도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었다.

잠시 후 펜슬럿의 궁성은 발칵 뒤집혔다. 연무장에서 인간과 언데드가 혈투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는 곧장 펜슬럿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느닷없이 데스 나이트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혼비백산한 근위기사들이 그 사실을 즉시 기사단장에게 보고했고 급기야 펜슬럿 국왕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던 것이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데스 나이트가 본국의 궁성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당장 근위 기사들을 파견해야 합니다. 그놈들을 깡그리 잡아죽여야만 본국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사들의 의견은 문관들과는 사뭇 달랐다. 의중을 묻는 국왕의 질문에 근위기사 단장이 고즈넉이 의견을 밝혔다.

제 생각에 그들은 아무래도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 슬레이어들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소문이 자자한 카심 용병단이란 말이오? 깜짝 놀란 것은 펜슬럿 국왕이었다. 테르비아 국왕과 마찬가지로 그도 벌써 오래 전부터 카심 용병단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비록 그가 호전적이거나 정복욕에 사로잡힌 국왕은 아니었지만 전쟁억지력 때문에라도 카심 용병단은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는 존재였다. 이미 그는 카심 용병단이 테제로스나 테르비아에 가세할 경우에 벌어질 위협을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펜슬럿 국왕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근위기사들을 소집하시오. 그리로 가봐야겠소.

그 말에 문관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국왕이 가는데 자신들이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위험하옵니다.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도 모르는데……

듣기 싫소. 이건 우리에게 천고의 기회라고 할 수 있소. 테제로스나 테르비아에 앞서 그들을 회유할 수 있는 기회 말이오. 펜슬럿 국왕은 휑하니 몸을 일으켰다. 이미 기사단장은 근위기사들을 소집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나간 상태였다.

저기 오는군. 연무장으로 오는 화려한 행렬을 발견한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흐흐흐. 라일리란 녀석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이미 미첼은 헬버트론과의 접전을 마치고 한창 라인델프와 검을 섞고 있었다. 단 하루만에 이룬 성취였지만 미첼의 발전은 정말 눈부신 지경이었다. 10분 넘게 풀 파워의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했지만 아직까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상대하던 라인델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요 애송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발전을 했지? 물론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인 그들에겐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같은 나이또래에서 미첼 만큼의 성취를 이룬 기사는 두 대륙을 모두 뒤져보아도 없을 것이었다.

하하하. 자 갑니다. 미첼의 낭랑한 고함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장검이 허공에서 연속으로 부딪혔다. 자욱한 스파크를 튀기며 장검들은 정신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미 수없이 대련을 치러본 만큼 둘은 서로의 검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것은 약식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자세만 봐도 어디로 검을 날릴지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전에서는 다르겠지만……. 그러나 제 3자가 보기에 둘의 대결이 더없이 험악한 결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자는 바로 펜슬럿의 근위기사 단장이었다. 멀리서 결투를 지켜보던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저, 정말 엄청난 실력을 가진 데스 나이트로군요. 가히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상대하는 기사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소드 마스터로 보이는데 데스 나이트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군요. 데스 나이트의 그렇게 실력이 강하오. 그,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보다 훨씬 강할 것 같습니다. 데스 나이트와 맞붙는 자신을 상상해보던 근위기사 단장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 역시 소드 마스터이긴 하지만 데스 나이트에겐 도저히 맞서 싸울 자신이 없었다. 같은 길을 걷는 자가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그는 이미 벌어지는 공방을 통해 상대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저런 무시무시한 데스 나이트가 넷이라면 역부족입니다. 거기에다 본 드래곤이 가세한다면……. 아무래도 동원중인 병력을 철수시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펜슬럿 국왕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회유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병력동원령을 내려놓았는데 뜻밖에도 근위기사 단장이 맥빠진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려울 것 같소? 그렇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근위기사단 전체가 몰살할 수도 있습니다. 안색이 대변한 국왕은 즉시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명했다. 기사 한 명이 즉시 명을 받들기 위해 달려갔다. 접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시선을 거둔 기사단장은 이번에는 그들의 일행이 있는 곳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두커니 서 있는 세 명의 데스 나이트였다. 그 옆에는 머리통이 없는 시체(?) 한 구가 버티고 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언데드의 일종인 듀라한 같았다. 남은 사내들은 의외로 평범한,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관자놀이가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것을 봐서 모두가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놀랍군. 용병단 전체가 팔라딘이라니……. 그들 중에서 기사단장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자는 바로 검은 로브를 걸친 노인이었다. 한참동안 그를 살펴본 기사단장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차림새를 보니 저자가 바로 소문의 흑마법사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찾아가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하겠소. 부디 조심하도록 하시오.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단장은 열 명의 근위기사를 대동한 채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근위기사 10여 명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일행은 그저 못 본체 했다. 이미 데이몬이 단단히 주의를 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펜슬럿 기사단장이 지척에 접근할 때까지 일행들은 누구 하나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기사단장이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단 두 명이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돌린 자들 중에 다행히 흑마법사로 짐작되는 노인이 끼여 있었다. 기사단장은 흑마법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전 펜슬럿 왕국의 근위기사 단장인 카르수스 드 스콜세지라 합니다. 펜슬럿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뭔가 심사가 편치 않은 듯 노인은 잔뜩 골이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뒤 퉁명스런 대답이 들려왔다.

환영한다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구려. 별로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었지만 기사단장으로써는 대화의 물꼬를 튼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기사단장 카르수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문을 이어나갔다.

실례지만 당신들이 우리 펜슬럿 왕국에 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본국 궁성의 연무장에서 결투를 벌이는 것인지 무척 궁금하군요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소? 우린 합법적인 참관증을 가지고 이곳으로 들어왔소. 게다가 귀국의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대련을 하는 것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기사단장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저들에게 참관증을 발급했지?' 하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신분을 밝혀줄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기사단장의 예상 대로였다.

우린 카심 용병단의 소속원들이오.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드래곤 사냥만을 도맡아 하고 있다오.

아. 그랬군요. 혁혁한 명성 많이 들어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기사단장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사실이 확인된 이상 이젠 어떻게 해서든 저들을 회유해야 할 때였다. 이미 무력(武力)으로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에게 남은 것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해서 호감을 사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소드 마스터와 데스 나이트가 대결을 마쳤다. 실컷 싸웠는지 접전을 멈추고 물러나는 둘을 힐끔 쳐다본 기사단장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원하신다면 더 넓고 시설이 잘 된 연무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저들 정도의 실력자가 싸우기에 비좁은 것 같군요. 아니 괜찮소. 노인은 딱 잘라 거절했다.

우린 단지 검술교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대련을 벌이는 것뿐이라오. 땀을 충분히 흘렸으니 기분이 다소 풀렸을 터. 이젠 갈 길을 가야지. 노인의 말에 다급해진 것은 오히려 기사단장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머물게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데스 나이트의 실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저런 실력자들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저들은 바로 500년 전 멸망한 이카롯트 제국의 4대 기사들이라오. 드래곤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데스 나이트가 될 것을 자청한 것이지. 거기까지는 이미 각 왕국의 정보망에 알려진 사실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사단장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저 소드 마스터도 귀 용병단의 일원입니까? 정말 실력이 대단하군요. 그의 말이 이어지자 노인의 눈에 강렬한 빛이 일어났다.

지금 날 놀리는 거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찔끔한 기사단장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한 마디로 신랄한 추궁에 가까웠다.

흐흐흐. 대 펜슬럿의 근위기사 단장이라면 데스 나이트 넷이 덤벼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을 테니 굳이 위로해줄 필요는 없소. 우린 우리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심 용병단의 위명은 전 대륙에 쩌렁쩌렁하게 퍼져있는 상태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기사단장은 쩔쩔 매며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노인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노인은 오래지 않아 안색을 풀었다. 솔직히 난 심사가 그리 편하지 않소. 거의 폭발할 지경이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아 참겠소. 게다가 우리 검술교관이 단단히 당부한 말이 있으니……. 무엇 때문에 노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연유를 물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노인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저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데스 나이트와 혈투를 벌이던 소드 마스터가 나무등걸에 앉아 쉬고 있었다. 투구를 쓴 상태였기 때문에 용모나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저 기사가 누군지 혹시 짐작하시겠소? 기사단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혹시 귀 용병단의 검술교관이 아닙니까? 맞소. 그럼 당신은 저 기사의 실력에 대해 어떻게 느꼈소? 기사단장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기사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펜슬럿의 근위기사들 중에서도 저 기사와 맞서 싸울만한 기사는 몇 명 되지 않을 것 같군요.

물론 상대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아부성 발언에 가까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펜슬럿 근위기사들 중 소드 마스터는 도합 서른 둘 뿐이었고 그들말고는 아무도 저 자와 맞서 싸우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와 싸울 수 있는 자는 오직 소드 마스터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말에 또다시 심기가 상했는지 얼굴에 노기를 짙게 떠올렸다.

계속 날 놀릴 생각이오? 아, 아닙니다. 자격미달로 근위기사단 자격심사조차도 받지 못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띄워주니 도대체 나더러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이오? 기사단장에겐 말 그대로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소드 마스터가 뭐가 아쉬워서 자격심사를 신청할 것이며 게다가 자격미달이라니……. 죄송하지만 자세한 정황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전 도저히 이해를……. 내가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오. 우리 검술교관은 오래 전부터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소. 용병단에 남아달라고 아무리 회유해도 소용없었지. 그 때문에 우리 용병단 전체가 이리로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오. 바로 어제, 검술교관은 이곳을 찾아와서 자격심사 신청서를 제출했소. 귀국의 근위기사가 되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신청서가 보기 좋게 반려되었소.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실력미달 때문에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소. 얼마나 놀랐는지 기사단장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소드 마스터라면 굳이 자격심사를 받을 필요도 없는데 어찌? 어쨌든 검술교관이 떠나가지 않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우리 용병단으로써는 무척 잘 된 일이오. 하지만 문제는……. 노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기사단장을 쳐다보았다.

우리의 실추된 자존심이라오. 검술교관은 우리 용병단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소. 데스 나이트와 더불어 드래곤의 목숨을 끊는 일을 도맡아하고 있으니 말이오. 게다가 그는 우리 대원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소. 다시 말해 우리 중 최고의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말이오.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노인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우리 검술교관이 어째서 자격심사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거요? 그래도 명색이 소드 마스터 아니오? 그러고 보니 귀국의 근위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채워져 있겠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소드 마스터가 자격심사에 탈락할 이유가 없지 않소? 기사단장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상대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풀고 자시고 할게 어디 있소. 기가 막혔는지 검술교관이 탈락사유를 아예 문서로 받아왔소이다. 심사를 한 자가 자필로 작성한 것이니 조사해 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오. 그 말에 기사단장의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 도대체 누가 그를 심사했답니까? 잘 기억나지 않소. 대충 듣기로 귀국의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라고 하던데, 이름이…….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가까스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이것은 부단장인 라일리를 불러 추궁해본 뒤 결정해야 할 사안 같았다. 급히 몸을 돌리려던 기사단장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시오. 귀 용병단의 검술교관께서 왜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려하는지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교관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라고 들었소. 그의 아버지가 과거 이곳의 근위기사였다고 하던데……. 그 말에 기사단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술교관의 아버지가 펜슬럿의 근위기사였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평기사로 시작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사단장까지 오른 그가 아니었던가?혹시 그분의 이름을 아십니까? 거듭되는 질문에 짜증이 난 듯 노인은 역정을 부렸다.

검술교관을 불러 직접 물어 보시구려. 아, 알겠습니다. 잠시 후 밝혀질 일이라서 기사단장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그에게 가장 급한 것은 라일리에게 어떻게 된 연유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펜슬럿 국왕에게 다가간 기사단장은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낱낱이 고했다. 그 말을 들은 국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니…….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의문을 풀어줄 자는 오직 부단장인 라일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위기사들이 모두 출동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단장인 그도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와있는 상태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는지 라일리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기사단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궁을 시작했다.

프리즈먼 부단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그, 그게……. 라일리로써는 눈앞이 깜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출동 명령이 떨어졌을 때부터 기분이 조금 이상했는데 이곳에 와보니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헤일즈의 아들이 설마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었다니. 머뭇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라일리의 태도에 기사단장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어허! 감히 국왕 전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이오? 묵묵히 지켜보던 펜슬럿 국왕이 둘 사이에 개입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카르수스 공. 아무래도 그 용병단의 검술교관을 불러 자세한 연유를 물어보는 것이 나을 듯 싶소. 탁월하신 판단이십니다. 전하.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대질심문이 가장 확실했기 때문에 기사단장은 즉시 몸을 돌렸다. 그러기 전 그는 부관에게 눈짓으로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라일리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라는 지시였다.

미첼은 곧 펜슬럿 국왕 앞으로 안내되었다. 확실한 효과를 위해 데이몬이 동행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을 위해서인지 국왕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춘 기사단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과거 근위기사였다는 자의 아들이라 생각하니 결코 외인(外人)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투구를 좀 벗어보시겠소? 알겠습니다. 미첼은 묵묵히 투구를 벗어들었다. 순간 근위 기사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드러난 미첼의 얼굴이 너무나 젊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서른이 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세, 세상에 저렇게 젊은 자가 소드 마스터라니……. 기사단장도 적이 놀랐다. 펜슬럿 근위기사단의 소드 마스터들은 하나같이 장년, 아니면 중년이었다. 기사단장 역시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혹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자가 아닐까 해서 기사단장은 나이를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올해로 정확히 스물 여섯입니다. 파, 팔목을 잠시 만져봐도 되겠소? 미첼은 아무 머뭇거림 없이 팔을 내밀었다. 기사단장이 뭘 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들, 특히 일국의 기사단장을 맡을 정도의 기사라면 능히 마나의 종류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익힌 마나연공법이 펜슬럿의 것인지를 감별하려는 것이다. 트, 틀림없군. 이것은 분명히 펜슬럿 고유의 연공법으로 생성된 마나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근위 기사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기사단장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펜슬럿의 기사들 중에서 30대 이전에 소드 마스터가 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써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자질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면 어쩌면 그랜드 마스터 급도 가능하겠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기사단장이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아버님의 존함을 가르쳐주시겠소? 나지막하지만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미첼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버님께서는 헤일즈 브루노란 이름으로 불리십니다. 전 그 분의 외아들인 미첼 브루노라고 합니다. 기사단장은 돌연 손뼉을 쳤다. 태도를 보니 헤일즈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지. 헤일즈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기사를 키울 수 있겠나? 아버님을 아십니까? 기사단장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에 헤일즈가 속해 있던 분대를 지휘했었소. 당시 내가 분대장이었으니 헤일즈에겐 직속상관이라 볼 수 있지. 정말 과묵하고 책임감 있는 기사였는데 하필이면 그 일 때문에…….

기사단장은 말꼬리를 슬며시 흘렸다. 나머지 말은 결코 흘려서는 안될 비사였다.

이럴 게 아니라 국왕전하께 갑시다. 전하를 뵙고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소. 헤일즈의 아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기사단장은 미첼의 손을 잡아끌고 국왕에게로 향했다. 데이몬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전하. 그는 과거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헤일즈 브루노의 아들이라고 하옵니다. 오오. 그렇소? 펜슬럿 국왕은 유난히 반갑게 미첼을 맞았다. 어떻게 해서든 카심 용병단을 회유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용병단의 검술교관이 과거 펜슬럿 근위기사의 아들이라면 그에게 더 이상 반가운 일이 없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왕국에 앞서 확실하게 카심 용병단을 회유할 고지를 점령한 셈이다. 국왕을 대면한 미첼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만나서 반갑소. 이렇게 찾아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오. 펜슬럿 국왕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장이 때를 놓칠세라 못을 박았다.

그는 아버지의 당부에 의해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옵니다. 근위기사직을 떠났어도 충성심이 남아있다니 이것은 정말 전하의 인자하심에 의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오. 정말 기쁜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미첼이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꾸며놓은 말이 술술 풀려 나오는 것을 보니 자질이 일급 배우 뺨칠 정도였다.

비록 몸은 떠나오셨지만 아버님의 마음만은 한시도 펜슬럿을 떠난 적이 없사옵니다. 절 교육시키는 와중에도 아버님께서는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부디 내가 못 다한 충성을 네가 맡아 다하도록 해라. 그래야만 국왕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 전 대륙을 떠도는 동안 그 말씀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카르셀에 있는 헤일즈가 듣는다면 눈이 뒤집힐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펜슬럿에 환멸감을 느끼고 떠난 그가 어찌 그런 말을 했겠는가. 하지만 듣고 있는 펜슬럿 요인들의 얼굴에는 감격의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를 이어 충성하는 충신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카심 용병단과 약속한 1년이 지난 후 전 아버님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아버님의 뒤를 이어 전하께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 말을 들은 기사단장은 바짝 긴장했다. 조금 전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미첼의 얼굴이 갑자기 착잡해졌다. 이미 그는 얼굴 표정까지 마음대로 바꾸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전 아버님의 말씀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실력미달로 인해 자격심사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착오인 것 같소. 당신 정도의 기사에게 자격심사 따윈 필요 없소. 기사단장이 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미첼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품속에 들어갔다 나온 미첼의 손에는 문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부단장인 프리즈먼 경께서 직접 서명하신 문서입니다. 제 신청서가 왜 반려되었는지 그 이유가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어, 어디 한 번 봅시다. 문서를 받아든 기사단장은 재빨리 읽어보았다. 곧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인물과 검술실력, 용모 등 모든 면에서 기준에 미달한다니 라일리 부단장!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오, 없는 사람이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망발을 거침없이 문서로 작성할 수 있다는 말이오. 필적을 보니 당신의 것이 분명한 터.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필경 엄중한 추궁을 각오해야 할거요.

기사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라일리에게로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라일리의 얼굴은 이미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미쳤지.' 어제의 결정을 수없이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런 순간에 직면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문서 내용이 어땠는지 펜슬럿 국왕도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짐에게 문서를 한 번 줘보시겠소. 근위기사를 통해 문서를 받아든 국왕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 소린가? 대를 이어 충성하려는, 그것도 이토록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훌륭한 기사가 기준 미달이라는 것은 짐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 그렇고 말고……. 노기 띤 표정으로 라일리를 한 번 쏘아본 국왕은 기사단장을 불렀다.

카르수스 공. 공에게 이 일에 대한 조사를 일임하겠소. 라일리 부단장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공께서 책임지고 확실하게 밝혀내도록 하시오. 어김없이 봉행하겠나이다.

내친 김에 국왕은 허리춤에 찬 홀까지 풀어 건네주었다. 분노한 카심 용병단을 달래기 위해 그는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어명이오. 기사단장의 조사에 그 누구라도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하오. 방해하는 자가 있을 시에는 가차없이 역적으로 간주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라일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명까지 떨어졌으니 그의 가문은 더 이상 방패막이 되어줄 수 없었다. 아무리 명문 가문이라도 어명만은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꼼짝없이 처벌받을 순간만을 기다려야 했다. 곧 기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펜슬럿 근위기사단 단장의 권한으로 프리즈먼 가문의 라일리에게서 부단장 직위를 박탈한다. 죄인의 신분이 된 그를 지금 즉시 투옥하고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라. 알겠습니다. 근위 기사들이 달려들어 라일리를 체포했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사색이 된 라일리를 쏘아본 기사단장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급한 일을 처리했으니 이젠 미첼을 달래야 할 차례였다.

보시다시피 이번 문제는 우리 쪽의 착오로 드러났소. 죄를 저지른 라일리 프리즈먼을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니 이만 마음을 푸시기 바라오.

현명하신 판단에 감사 드립니다. 기사단장은 때를 놓칠세라 재심사를 권유했다.

소드 마스터인 이상 심사를 받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굳이 받길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재심사를 실시하겠소. 더 이상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기사단장인 내가 직접 심사하겠소. 미첼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고마운 말씀이지만 한 발 늦었습니다. 전 이미 카심 용병단의 입단서에 서명을 마친 상태입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제겐 택할 길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미, 미첼. 아버님의 당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기사단장은 필사적으로 미첼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는 곧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 이미 기사로써의 서약을 마쳤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단장님께선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사로써의 서약. 그것은 바로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와 직결된 것이었다. 물론 한낱 용병단에 적용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기사단장에게 그들은 결코 평범한 용병단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설득이 불가능함을 직감한 기사단장은 끌려나가는 라일리를 다시 한 번 쏘아보았다.

'빌어먹을 자식.' 펜슬럿을 끝없이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순간이 라일리 하나 때문에 무산되려 하는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제 누가 뭐래도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용병단이 해체되는 순간까지 그는 우리와 함께 드래곤 사냥을 해 나갈 것이오. 원래 난 펜슬럿이란 국가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소. 검술교관이 대를 이어 충성을 맹세할 정도의 국가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죽 늘어선 펜슬럿 요인들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우리 용병단이 비록 소수정예이긴 하지만 병력의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므로 우린 진작부터 강대국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때마침 검술교관이 펜슬럿으로 떠난다고 해서 우리도 함께 동행했소. 펜슬럿 정도의 강대국과 협력할 수 있다면 서로가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거지. 사람들은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 검술교관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난 모욕만 주었소. 비록 일개 용병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린 실력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오. 그런 우리의 검술교관이 근위기사 자격심사조차 받지 못한다니 우리에겐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소. 그, 그것은 모두 착오입니다. 기사단장으로써는 오로지 착오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말에 하나도 틀린 점이 없는 데다 잘못은 모두 라일리가 저지른 일 뿐이었다. 데이몬은 냉정하게 말을 맺었다.

그의 자격심사가 반려된 이상 펜슬럿과 우리의 인연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오.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느릿하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이 서 있는 쪽의 공간이 활짝 열리며 그 속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솟구쳤다.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인크레시아에서 본 드래곤들을 꺼낸 것이다.

콰루루루. 괴성과 함께 육중한 몸체를 드러낸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은 날개를 퍼득이며 연무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한 연출이었는데 효과는 확실했다.

보, 본 드래곤이야. 엄청나게 크군. 근위기사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번져 가는 것을 간파한 데이몬은 속으로 냉소를 쳤다.

'크크크. 이 정도면 섣불리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병력의 우위는 펜슬럿에 있다. 최악의 경우 순순히 보내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암암리에 무력시위를 계획한 것이다.

우린 가겠소. 떠나는데 혹시라도 이의가 있소? 카르수스 기사단장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랜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넷과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이 상대라면 펜슬럿이 보유한 모든 병력을 쏟아 부어도 섣불리 승산을 점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근위기사단 전체가 몰살할 수도 있는 문제였고 무의미한 일에 병력을 소모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기에 그는 오래지 않아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떠나시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 미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떠나시는 것을 잠시만 보류해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소. 데이몬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단장은 착잡한 안색으로 미첼에게 다가왔다. 공적이 아닌, 사적으로 옛 부하의 아들을 대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례적으로 하대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유감일세. 모든 게 내 불찰이야.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네. 프리즈먼의 추궁은 내 명예를 걸고 행하겠네. 미첼 역시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의 상관이었던 이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니 기사단장은 라일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미첼은 이미 그에게 짙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써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비록 떠날지언정 영원히 펜슬럿과 단장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미첼의 진심을 느꼈는지 단장의 얼굴에서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돌연 음성을 낮췄다. 미첼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네에게 한 가지 더 약속할 것이 있네. 자네 아버지가 떠나게 된 사연에 대해 난 잘 알고 있네. 분대장으로써 직속 부하의 일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겠지? 당시 난 상당히 안타까웠지. 헤일즈의 정직한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결백을 믿었다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일대 분대장에 불과했던 내가 막강한 프리즈먼 가문의 압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으니까…….

미첼은 깜짝 놀랐다. 의외로 기사단장이 아버지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어명까지 내려진 마당이니 이참에 자네 아버지의 일까지 함께 파헤칠 생각이네. 이미 난 근위기사들을 보내 당시 증인들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조처했네. 헤일즈가 그토록 펜슬럿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니……. 지금 난 부하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네. 그리고 기사단장이 되고 나서도 그 일을 묻어둔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네. 그러니 펜슬럿의 근위기사단장으로써 반드시 자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겠네. 기사단장의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던 미첼의 가슴속에는 뭔가 뭉클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드디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린 것이다. 카르셀에 있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기사단장님의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미첼을 보던 기사단장의 얼굴에도 후련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해야 할 말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감돌았다.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십시오. 호, 혹시라도 카심 용병단이 다른 왕국과 손을 잡게 될 경우 말일세. 그, 그럴 경우 그 왕국에서 우리 펜슬럿을 침공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부디 자네가 그것을 마, 막아 줄 수 있겠나?

기사단장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옛 부하의 아들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펜슬럿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을 떠올린 기사단장은 열과 성의를 다해 미첼을 설득했다. 그의 내심을 알아차린 미첼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펜슬럿은 다름 아닌 제 아버님의 조국입니다. 그리고 전 이미 단장님의 인품에 깊이 감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펜슬럿에 검을 겨눌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생길 경우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막겠습니다. 기사단장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미첼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저, 정말 고마우이.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미첼의 위상을 띄워주고 라일리에 대한 처벌을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그는 입단 조건으로 그 문제를 확답 받은 상태라오. 그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입하지 않겠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허락했소.

앞으로 카심 용병단은 펜슬럿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귀국의 기사나 병사를 살상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을 것이오. 검술교관 미첼과 맺은 약속에 의해서.

칠종단금술의 제약을 받고 있는 까닭에 데이몬은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거리낌없이 약속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약속이 펜슬럿 국왕에게 미친 여파는 지대했다. 정복욕이 그리 강하지 않은 펜슬럿 국왕에겐 말 그대로 가장 우려했던 문제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에게 카심 용병단이란 힘이 별달리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크로센 제국이 아닌 이상 펜슬럿에 위협을 가할 힘을 가진 왕국은 없었으므로.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당사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선 펜슬럿 국왕은 미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펜슬럿의 안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대의 노고는 짐이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대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바이며 펜슬럿에 돌아올 경우 언제든지 효력을 발할 것을 약속한다. 눈치 빠른 기사단장이 허릿춤의 검을 뽑아든 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었다. 검을 받아든 펜슬럿 국왕은 미첼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으시오. 기사단장의 말이 떨어지자 미첼은 즉시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펜슬럿 국왕은 검을 들어 미첼의 양어깨에다 차례로 대었다.

그대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비록 지금은 높지 않은 작위이지만 그대가 펜슬럿으로 돌아올 경우 그에 어울리는 작위와 영지를 하사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대에게 일체의 심사를 받지 않고 근위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특혜 역시 약속하겠다.

국왕의 말에는 반드시 펜슬럿으로 돌아오라는 간접적인 권유가 깃들어있었다. 솔직히 그에게 소드 마스터 한 명이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수백 명의 팔라딘 중 극소수만 소드 마스터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미첼처럼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자라면 말 그대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탐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미첼이 아니었다.

전하의 은혜에 심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용병단의 사명이 끝난다면 전하의 후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반드시 펜슬럿으로 돌아오겠나이다. 어릴 때부터 엄히 교육받은 탓에 미첼의 태도는 예의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국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검을 다시 기사단장에게 건네주었다.

미첼 남작. 경의 활약을 주시하겠소. 앞으로 카심 용병단의 일원으로써 명성을 사해에 떨치길 바라며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경이 누구인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오.

전하의 말씀. 각골 명심하겠나이다.

그럼 떠나도록 하시오. 내 근위병들로 하여금 그대들을 환송하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국왕은 몸을 돌렸다. 펜슬럿에 가해질 위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기사단장이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근위병들을 시켜 환송식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앞으로 많은 드래곤을 사냥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소이다. 데이몬은 다소 공손해진 태도로 그를 맞았다. 그 역시 기사단장인 카르수스 공작의 태도에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력에서 인품, 충성심까지 한 나라의 근위기사 단장으로써 부족함이 없군.' 구태여 이목을 끌어 모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조용히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린 먼 곳으로 떠날 계획이오. 때문에 본 드래곤에 타고 이동하겠소이다. 대신 기사단장의 호의에는 감사를 표하는 바요. 무슨 말씀을……. 부근을 지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들러주십시오. 그러지요. 일(?)을 마친 용병들은 하나 둘씩 본 드래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타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단 한사람만 빼고 말이다. 카트로이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난 타고싶은 생각이 없다. 이런 저주받은 마물에 몸을 싣는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

데이몬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럼 알아서 따라와. 그렇게 하겠다. 많은 근위병들 앞에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카트로이는 말없이 비행마법을 캐스팅했다.

에이비에이션(Aviation). 주문영창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늘로 치솟았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차며 지켜보았다.

쯔쯔. 꼴에 드래곤이라고 동족의 시체를 타고 싶진 않나 보군.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사단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데이몬의 머릿속엔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되었다.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구려. 저 녀석은 바로 레이토나에서 사로잡은 화이트 드래곤이라오. 몸값을 받았기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었지. 사실 웜 급밖에 안 되는 드래곤은 거의 쓸모가 없소. 때문에 본 드래곤을 만드는 것도 아까워서 그냥 끌고 다니고 있지. 쯔쯔. 약해빠진 녀석이 자존심만 강해 가지고……. 데리고 다니다 까불면 확 없애버릴 생각이라오. 기사단장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웜 급에 이른 드래곤을 사로잡은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모자라 강제로 끌고 다니다니……. 그는 겨우 이 말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데이몬은 본 드래곤에 오르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대단할 거 없소. 드래곤은 잘만 상대하면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본 드래곤이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늘어선 근위 기사들이 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릴 정도로 강한 날개짓이었다.

콰루루루루.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은 기성을 내지르며 비상하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인간들을 태우고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지 본 드래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삽시간에 두 개의 점이 되어 사라지는 카심 용병단을 기사단장을 비롯한 펜슬럿 근위기사들은 말없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한참만에 기사단장이 탄성을 내뱉었다.

후. 정말 대단한 용병단이로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기사단장은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늘어선 근위 기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행여나 근위기사들의 머릿속에서 자라날 지도 모르는 허황된 생각을 지워야만 했다.

저들 말대로 방법만 잘 알면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껏 무수한 기사들이 드래곤을 사냥하겠다고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오늘의 일 때문에 드래곤을 얕보고 덤비거나 사냥을 나서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어야 한다. 알겠는가? 넷. 기사들이 입을 모아 복명하자 단장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즈가 있는 곳을 물어보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군. 오랜만에 그를 만나 회포를 풀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 도대체 헤일즈가 아들을 어떻게 수련시켰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군. 묵묵히 되뇌이는 기사단장의 머리 위로 구름이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먼 곳에 가겠다는 말과는 달리 카심 용병단은 오래지 않아 대지에 발을 디뎌야 했다. 본 드래곤의 등판이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일행들 대부분이 마나를 다스릴 수 있었기에 추위에 견디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졌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율리아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속 칭얼댔기 때문에 데이몬은 용단을 내려야 했다.

추워서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골치 덩어리로군.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본 드래곤을 착륙시켰다. 어차피 다음 목적지가 인접한 테제로스 왕국이었으므로 걸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율리아나에게 마법을 걸어주면 어떨까 생각하던 데이몬은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도 역시 하늘을 나는 것보다는 경치를 감상하며 유유자적 걸어가는 게 더 기꺼웠기 때문이었다.

콰루루루. 본 드래곤 두 마리는 기성을 토해내며 대지에 안착했다. 제일 먼저 뛰어내린 데이몬이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은 역시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니까.

율리아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얼른 뛰어내렸다.

휴, 차라리 얼음 위에 앉는 것이 낫지. 1년 가까이 북부의 냉기를 들이마신 탓에 본 드래곤의 몸체는 한 마디로 냉기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의 뒤를 이어 용병들이 하나 둘씩 바닥에 내려섰다. 사뿐히 착지하는 미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찼다.

이 녀석아. 쓸개빠진 놈처럼 뭘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는 거냐? 미첼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아버님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뻐서 그렇습니다. 모처럼 효도를 해 드린 셈이 되었거든요. 허허. 그 녀석.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효심은 있군. 제가 원래 인간성이 좀 좋은 편이지요……아이쿠. 데이몬이 냅다 쥐어박으며 눈을 부라리자 미첼은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갑자기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실력만 는 줄 알았는데 넉살은 더욱 더 늘었군. 아무래도 실력이 주둥이로만 몰려버린 모양이야. 잠시 미첼을 노려보던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좌우지간 잘 된 일이야. 그래도 네놈이 나중에 몸을 의탁할 곳이 생겨서 말이야. 미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결코 카심 용병단을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데이몬은 슬며시 시선을 하늘에 던졌다.

트루베니아에 있는 드래곤을 모조리 잡는다면 우린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겠지. 물론 목적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용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만에 하나 드래곤 사냥을 하다가 내가 죽는다면 그 즉시 달아나서 용병단을 해산해라.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 가진 힘의 원천은 바로 나, 때문에 내가 죽을 경우 그들의 생명 역시 사라진다. 그 때는 더 이상 드래곤 사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어느새 착잡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문제를 무척 잘 처리했다고 생각한다. 미첼이 몸을 의탁할 곳을 얻은 이상 나머지 녀석들 거취 문제도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미첼의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만에 하나 데이몬이 불행한 일을 겪는다면 저 역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우린 생과 사를 함께 하는 동료입니다. 미첼의 말에 용병들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합니다.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녀석들…….

따지고 보면 이들의 마음가짐은 수호마왕군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또 다른 수호마왕군들이 탄생한 것이다.

중원에 있을 때 그와 수호마왕군의 관계 역시 이와 다름없었다. 정파 무림과의 혈전 동안 그는 수하들을 아꼈고 항상 배려해주었다. 단 한 명의 수하라도 위기에 처할 경우 데이몬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기를 10여 년, 데이몬은 마침내 그들의 진심 어린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목숨을 초개같이 생각하며 몸을 던진 수호마왕군들 때문이었다. 그 일을 떠올리던 데이몬의 눈가에는 회한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좌우지간 내가 한 말을 머릿속 깊이 새겨놓도록 해라.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드래곤이란 너희들이 섣불리 복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뭔가가 쏜살같이 날아와 데이몬의 옆에 안착했다. 먼저 출발한 카트로이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녀석. 착륙하려면 미리 얘기라도 하던가……. 그건 그렇고 뭐가 복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지?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어 카트로이를 가리켰다.

이 녀석만 빼고……. 용병들 사이에서 폭소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기를 쓰고 웃음을 참는 용병들을 쳐다보며 카트로이는 연신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의문을 풀어줄 자는 오직 데이몬 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한 거지? 알 필요 없어. 짧게 일축한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본 드래곤을 집어넣기 위해 인크레시아를 연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대장. 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본 카심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테제로스를 거친 뒤 관도를 통해 레이토나로 곧장 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카심은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말해보게. 가는 길에 잠시 어디 한 군데 들르면 안되겠습니까? 제법 많은 거리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말하기가 난처했는지 카심은 주뼛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곳이 어딘데? 바, 바로 제 고향입니다. 카심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사람아. 자넨 명색이 카심 용병단의 대장 아닌가? 대장이 가자고 하는데 부하들이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지 않은가? 넌지시 동의를 구하자 용병들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하죠. 평소에 대장 고향이 어디인지 무척 궁금했었는데……. 고향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나보죠?

수다장이 패터슨이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카심의 눈에 순간적으로 애틋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눈빛이 워낙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자네 고향이 어딘가? 아르네입니다. 펜슬럿 최남단에 위치한 아름다운 영지이지요. 전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장의 고향이라니 기대되는군.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카심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걸어서 가면 아마도 보름 이상 걸릴 겁니다. 펜슬럿에 속한 영지이긴 하지만 극히 변방이거든요. 보름 정도 걸린다는 말에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그 정도 거리라면 본 드래곤을 타고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본 드래곤의 활강속도를 감안하면 도착하는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날아서 가도록 하지. 대장의 고향이니 며칠 머물러야 할 듯 싶으니까……. 괘, 괜찮습니다. 잠시 시내만 둘러보면 될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그곳에 살지 않는가? 카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부모님은 이미 오래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쯔쯔. 그것 안되었구먼. 고개를 내저은 데이몬은 잠자코 율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그녀는 데이몬의 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 쳐다봐라. 계집애야. 얼굴 닳겠다.

율리아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 냉소를 쳤다.

흥. 그 몰골에 닳아봐야 별 수 있으려구요?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 이놈의 계집애가? 흥. 쳐봐요. 누가 무서울 줄 알고……. 당돌하기 그지없는 율리아나의 태도에 데이몬은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해졌다.

그만 두자. 너와 다퉈봐야 얻을 게 없으니까……. 마법을 걸어줄 테니 춥다고 칭얼거리지나 말아라. 그 말에 율리아나는 함박 웃음을 떠올렸다.

정말이에요? 조금 전 냉랭하게 쏘아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차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조금만 관심을 보여줘도 이 모양이라니까.'여자는 역시 요물이라는 생각을 되새긴 데이몬은 사납게 으름장을 놓았다.

징징거릴 경우 본 드래곤 위에서 사정보지 않고 집어던져 버릴 테니 각오해라.

알겠어요. 데이몬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자. 출발하자. 용병들은 다시 본 드래곤에 탑승했다. 그 옆에서는 카트로이가 툴툴거리며 비행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미친 놈. 이럴 걸 왜 내려왔어? 콰루루루. 일행을 모두 태운 본 드래곤이 세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기껏 끌어 모아 놓은 마나가 흩어지자 카트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헬 파이어를 한 방 먹여버리고 싶군.

하지만 그것을 생각만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카트로이는 잘 알고 있었다. 본 드래곤에는 드래곤 하트에서 뽑아 올린 마나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대마법 방어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카트로이는 이미 사실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다. 헬 파이어 한 두 방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비행마법의 캐스팅을 마친 카트로이는 즉시 날아올랐다. 일행을 태운 본 드래곤은 벌써 까마득한 점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아르네까지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정오 정도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음날 새벽에 아르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일행 모두가 차가운 본 드래곤의 등판에서 밤을 꼬박 새웠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데이몬은 본 드래곤을 인적이 드문 야산 부근에 착륙시켰다. 바짝 따라왔기 때문에 카트로이는 이번에는 일행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군. 일행이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어 본 드래곤을 집어넣었다. 용병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비록 기공을 익힌 상태였지만 얼음보다도 차가운 본 드래곤의 등판에서 꼬박 하루동안 버틴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저번과는 달리 데이몬이 일체 실드를 전개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세찬 바람을 맨몸으로 받아야 했다.

자고로 혹독한 환경은 수련에 최고의 조건이라 할 수 있지. 데이몬의 이런 터무니없는 논리 때문에 일행은 하나같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법의 힘으로 보호받은 때문에 충분히 자고 깨어난 율리아나만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이곳인가? 대장. 데이몬의 질문에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먼저 여관에 투숙해서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러게. 일행은 카심의 안내를 받으며 조용히 아르네 시가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걸어가는 카심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수심이 깃들어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아르네의 정경을 살피는 모습에서는 초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데이몬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왜? 고향에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운가? 솔직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불쑥 끼여든 패터슨의 말에 카심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리 궁금한가? 대장의 과거 말입니다. 과연 이곳에서 대장이 무슨 일을 했을까? 평소에 그게 가장 궁금했거든요. 10년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단 한번도 밝힌 적이 없잖습니까? 고향이 아르네란 것도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겁니다. 패터슨의 말에 호기심을 가진 이는 일행 전부였다. 데이몬마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카심에게 과거를 밝힐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사실을 알고 싶군. 쓴웃음을 지은 카심은 결국 과거에 대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뭐 별 거 아닙니다. 전 원래 이곳의 영지 경비병이었지요. 한 3년 정도 근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지 경비병? 그렇다면 대우가 제법 괜찮았을 텐데 왜 힘든 용병의 길을 선택했지? 뭐 데이몬을 만나 드래곤 사냥을 하려고 그랬나 보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얼버무렸지만 데이몬은 용케도 카심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큰 아픔을 겪은 자의 눈빛이었다.

'대장에게 뭔가 밝히기 힘든 과거가 있나보군.' 뭔가 연유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데이몬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비밀을 밝히려 하는 것은 결코 데이몬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패터슨이 몇 가지 질문을 퍼부었지만 카심은 능구렁이처럼 은근슬쩍 넘겨버렸다. 아무래도 그 방법으로 10년 동안 과거를 묻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한 패터슨도 결국 두손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후. 역시 대장에게는 못 당하겠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아르네 성문 가까이 도착해 있었다.

성문을 통과한 일행들은 아르네 시가지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르네는 상당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잘 정돈된 시가지가 더 없이 수려했고, 늘어선 건물의 모양새를 보니 농경과 목축을 주축으로 하는 영지임을 알 수 있었다. 물건을 파는 점포가 드문 것을 보니 상업은 그리 번창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데이몬은 한 눈에 영지의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긴 외진 곳에 있으니 상업이 발달할 리가 없을 테지.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살기가 그런 대로 좋은 것 같군.

아닌게 아니라 아르네는 상당히 풍족해 보이는 영지였다. 제법 큰 강이 성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으니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데다 날씨가 따듯한 편이었기 때문에 농경과 목축에는 더 없는 천혜조건을 가진 영지인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영지로군. 외부인이 잘 찾아오지 않는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영지 대부분이 평야인 아르네에서 용병들의 일거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치안이 잘 유지되는 펜슬럿에 속해 있고 몬스터들이 전반적으로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것을 감안하면 아르네에서 용병을 보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용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행들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야 했다. 데이몬조차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거야 원, 우리 안의 고블린도 아니고……. 대장.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여관을 찾아 들어가자고. 그럴까요? 카심은 일행을 데리고 시가지 중심부로 들어갔다.

아르네에는 여관이 하나밖에 없는 걸로 기억합니다.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일이 무척 드물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을 되살리며 설명을 시작하던 카심이 채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들의 앞에 큼지막한 여관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파라다이스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규모가 큰 여관이었다.

새로 칠한 지붕과 벽을 보니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을 쳐다보며 카심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떠난 사이 생겼나 보군요. 장사가 잘 되진 않을 텐데……. 잘 되었군. 저곳에서 묵자고……. 난 지금 아르네의 요리가 어떤지 가장 궁금하네. 몹시 시장했던 모양인지 데이몬은 거침없이 여관을 향해 다가갔다. 뭔가 말을 꺼낼 듯 말 듯 하던 카심은 곧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뭔가 꺼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행자신 것 같은데 아르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젊은 점원의 안내를 받은 일행은 제일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꼬박 하루동안 건포만 먹어왔기 때문에 따뜻한 음식이 가장 그리웠다. 아직 식사시간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식당 내부는 한산한 편이었다. 카심은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지? 열 대여섯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점원은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대략 한 달쯤 전에 완성되어 영업을 시작했지요. 여행자들이 그리 많지 않은 아르네에서 과연 유지가 잘 될까? 점원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네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몇 번 들러본 적이 있지. 뜻밖에도 카심은 자신이 이곳 출신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일행들이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무렵 점원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 여관은 영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랍니다. 바로 내일 있을 행사 때문이지요. 아마 그 행사를 치르고 나면 마을 회관으로 활용될 겁니다. 행사라니? 아차 싶었는지 점원은 이마를 딱 쳤다.

참. 여행자시라 모르시겠군요. 아르네에는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일은 바로 영주님의 따님이 시집가시는 날이거든요. 관례에 따라 결혼식을 이곳에서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이 건물을 지은 거랍니다. 신랑측 손님들이 묵어야 할 숙소가 필요하거든요. 여러분들은 때를 참 잘 맞춰 오신 것 같네요. 내일은 이곳에서 제공되는 음식이 모두 무료랍니다. 말을 이어나가려는 점원은 깜짝 놀랐다. 상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 손님. 카심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진 눈동자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닐세.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주문은 되었네. 그만 가보게. 점원은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한 번 뒤흔들며 몸을 돌렸다. 카심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자리를 옮기면 안되겠습니까?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기에 데이몬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일행이 막 나서려던 찰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관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딱 마주쳤다. 순간 카심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헉.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은 카심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외면하며 미첼의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꺼리는 것이 분명했다. 의아해진 데이몬은 마주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자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선두에 서 있는 젊은이였다. 제법 그럴 듯한 용모였지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간 모습이 상당히 야비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당시 결혼하는 신부의 나이가 평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나이가 든 신부라 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가 시종과 호위병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아 제법 지체 높은 귀족의 행차인 것 같았다.

'카심이 도대체 누굴 겁내는 거지? 설마 이 젊은 녀석인가?' 손을 봐 줄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젊은 여인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카심? 역시 당신이었군요. 여인의 음성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카심이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 마틸다 아가씨. 여인의 아름다운 눈망울에는 쌍심지가 한껏 돋아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서 카심의 앞에 섰다. 영문을 몰랐기 때문에 일행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카심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쩔쩔 매기만 했다. 결국 돌아왔군요. 카심. 그, 그렇습니다. 아가씨. 비겁한 사람. 남자가 그렇게 용기가 없어요? 그러고도 당신이 남자라고 할 수 있나요? 당신 같은 사람을 10년 가까이 기다린 날 도저히 용납할 수 없군요.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예요. 아, 아가씨. 어차피 잘 된 일이에요. 늦었지만 내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지금의 난 10년 전의 철부지 마틸다가 아니에요.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아르네 영지에서 떠나주기 바래요. 할 말을 마친 듯 여인은 냉랭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당혹한 기색으로 서 있는 청년에게 한 마디 던진 채.

저 먼저 가겠어요. 저자를 보니 식욕이 딱 떨어졌군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카심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곧이어 청년이 다가와 카심에게 말을 걸었다. 귀족 신분인지 그는 대뜸 하대를 했다.

자네가 말로만 들었던 그 카심이로군. 소문이 자자했었지. 마틸다 양의 마음을 빼앗아간 경비병이라……. 언젠가 한 번 꼭 만나보고 싶었지. 청년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그녀는 이제 내 약혼녀가 되었거든. 우린 내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야. 그러니 결혼식에 부디 자네가 참석해 주었으면 하네. 그래야만 내 약혼녀가 쓸데없는 과거 따윌 기억에서 깡그리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네.

말을 마친 청년은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이 자에게 초청장을 주도록……. 시종이 다가와서 카심에게 초청장을 내밀었다. 말없이 받아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적지 않게 충격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나 초청하는 장소가 아니니 감사히 생각해야 하네. 초청장 한 장으로 두 명만 참석할 수 있으니 잘 생각해 보도록……. 후후후후. 냉소를 터뜨린 청년은 냉랭히 몸을 돌렸다. 야비하게 생긴 인상에 너무도 걸맞는 행동이었다. 보다못한 미첼이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빌어먹을……. 저 건방진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 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카심이 묵묵히 손을 뻗어 미첼을 제지했다.

그만 내버려두게. 미첼. 그, 그래도……. 부탁일세. 카심의 간곡한 부탁에 미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정리한 듯 카심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떠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그럼 모두들 들어가서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카심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일행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식사를 주문한 뒤 일행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카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도 그럴 엄두를 내지 않았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마냥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카심에게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요리가 나왔고 일행은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자네도 시장할 텐데 좀 먹지 그러나? 하지만 카심은 도무지 식욕이 없는 모양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가로젓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혀를 찼다.

'쯔쯔.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하지만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입맛이 있을 턱이 없었기에 일행은 음식을 두고 그저 깨작거리기만 했다. 요리의 질이 그런 대로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행이 식사를 거의 마쳐갈 무렵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쇠사슬 갑옷을 걸친 경비병 차림의 사내였는데 데이몬은 그가 아까의 일행에 끼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카심의 옆으로 다가온 사내는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카심. 느릿하게 고개를 든 카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테일러. 둘은 곧 손을 맞잡았다. 그것을 봐서 어린 시절의 친구이거나, 그 이상의 관계인 것 같았다. 테일러라 불린 사내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카심.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그런 대로 잘 지낸 편이야. 테일러 너도 나이를 꽤 먹었군. 내가 기억하던 풋내기 경비병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야. 후후.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냐? 차림새를 보니 용병이 되었나보군. 그렇게 되었어. 다소 안색이 나아진 카심이 일행에게 소개를 했다.

참 인사드리게. 이들은 내 동료라네. 참, 제 친구이자 동료였던 테일러라고 합니다. 제겐 절친한 친구나 다름없는 녀석이죠. 일행은 곧 테일러와 인사를 나눴다. 통성명이 끝나자 카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옛 친구와 잠시 얘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먼저 식사하고 계십시오.

그렇게 하게. 테일러의 손을 잡은 카심은 식당에서 제일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서 앉았다. 아무래도 일행들에게 들려주기 힘든 대화를 나누려는 듯 싶었다. 일행들을 한 번 쳐다본 카심은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틸다 아가씨가 아직까지 시집을 가지 않았다니……. 몇 년 전 용병단으로 날아온 서신을 보고 난 이미 그녀가 결혼을 한 줄 알았어. 테일러는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영주님께서 짜낸 계책이라네. 자네를 포기하게 하기 위한……. 난 이미 이곳을 떠날 때 모든 것을 포기했었네. 그 때문에 지금껏 아르네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것이고……. 하지만 아가씨는 포기하지 않았어. 아가씬 자네 아니면 영원히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 단언하셨지. 자네도 아가씨의 고집을 익히 알고 있지 않나? 아가씨가 고집을 부리자 영주님도 어쩔 수 없으셨지. 그 말을 들은 카심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내일 식을 올린다는 말을 들었네. 어찌 된 거지? 그 밥맛 없는 녀석은 또 누구야.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테일러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을 보아 그도 신랑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튜드렛 백작가문의 모르세르 공자라네. 코르도에서 제법 권세를 자랑하는 명문가의 외아들이지.

카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정략 결혼이로군. 나이가 아가씨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야. 뭐 목적은 우리 아르네 영지가 아니겠나? 영주님께 자식이라곤 무남독녀인 아가씨밖에 없으니까 결혼만 하면 훗날 영지가 송두리째 굴러 떨어질 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집요하게 청혼을 넣어왔던 것이고…… 테일러는 그리 편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고집 부리던 아가씨도 결국 포기하셨네. 이대로 가문의 대를 끊어야겠냐는 영주님의 회유가 제대로 먹혀 들어간 거지. 모르세르 공자를 만나본 아가씨는 기꺼이 결혼할 것을 승낙하셨네. 이것은 이미 1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야.

카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설마 마틸다 아가씨가 자신을 10년씩이나 기다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라 마음이 더욱 착잡했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테일러가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 시기가 좋지 않을 때 찾아왔군. 친구로써 권유하겠는데 아무래도 지금 당장 아르네를 떠나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래야만 나중에 찾아오더라도 마음이 편할 게 아닌가? 영주님은 건강하신가? 물론이지. 새로 맞이하게 된 사윗감이 마음에 드셨는지 아예 웃음을 입가에 걸고 사신 다네. 난 이만 가보겠네. 지금은 공녀님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 가봐야 할 것 같네. 나중에 찾아오거든 그 때 회포를 풀도록 하지. 알겠네. 할 말을 마친 테일러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떠나갔지만 카심은 한참동안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뒤 자리에 찾아온 카심을 일행은 반갑게 맞았다.

요리를 조금 시켜 놓았네. 일단 배를 좀 채우도록 하게. 그럴까요? 마음의 정리를 끝낸 모양인지 카심은 말없이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일행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입을 닦은 카심은 일행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