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이란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 고생을 무릅쓸 정도로 가치가 나갑니까?

물론.

단호하게 대답한 노인은 청년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이곳에서도 비싸지만 대도시에 가지고 가면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이란다. 이곳에서 매입한 가격보다 족히 백 배는 더 받을 수 있지.

털이 그리 부드러운 것은 아니지만 희소성 때문에 귀족부인들은 이것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단다.

말을 마친 노인은 여관 내부를 휘휘 둘러보았다. 무언가 정보를 캐내고자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하지만 여관 내부에 있는 손님들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기는 힘들 듯 보였다. 대부분이 얼음 낚시를 마치고 목을 잠깐 축이러 온 어부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보를 얻기가 쉽진 않겠군.'

생각다 못한 노인이 점원을 부르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렸다.

휘이이이.

눈보라가 파고들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충분히 몸을 데운 상태였지만 북부의 칼바람은 닿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점원이 서둘러 문으로 뛰어갔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문은 쉬이 닫히지 않았다. 온통 털가죽을 덮어쓴 인영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열 명이 넘어 보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올 것이지.'

하지만 불평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들은 처세술을 깊이 있게 터득한 경험 많은 상인들이었으므로……. 들어온 사람들은 한 마디씩 내뱉으며 탁자로 다가갔다.

햐! 스프 냄새를 도대체 얼마 만에 맡는 거지?

꼬박 1년 동안 느글거리는 고기만 먹었으니 반가울 만도 하지.

한 마디씩 내뱉은 사내들은 뒤집어쓰고 있던 털가죽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순간 이상야릇한 냄새가 여관 내부를 가득 채웠다. 식초처럼 톡 쏘는 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는 순간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코를 틀어쥐었다. 스쳐지나가듯 맡았을 뿐인데 냄새는 금방 오장육부를 뒤집어놓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냄새지?

우왜액.

통상적으로 카토 왕국의 사람들은 목욕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난방에 쓰기에도 모자란 연료로 물까지 데울 수 없기 때문에 목욕이란 오로지 상류층에 한정된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타지인들은 먼저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이상야릇한 냄새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지만 저 사내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토박이인 점원마저 코를 틀어쥐고 있는 것을 보니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할 수 있었다. 일행들의 반응을 보았는지 사내들은 겸연쩍은 표정들을 지었다.

냄새가 조금 지독한가 보군. 하긴 꼬박 1년을 씻지 않았으니…….

큰일이로군. 이곳에선 목욕을 하지 못할 텐데…….

냄새를 풍기는 것이 미안했는지 사내들은 다시 외투를 주섬주섬 걸쳤다. 점원의 반응을 봐서 자칫 잘못하면 여관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순간 노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서, 설마…….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말까지 떠듬거리고 있었다.

트, 틀림없어. 저, 저것은 아, 아이스 트…….

말을 이어나가려던 노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십년 동안 장사를 하며 다진 안목에 의하면 사내들이 걸친 것은 틀림없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노인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노, 놀랍군. 그것도 이어 만든 게 아닌 통짜 가죽이야. 대, 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야?

노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들에게 접근했다. 다가갈수록 악취가 더욱 심하게 풍겨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 실례합니다.

노인이 인사를 건네자 사내 중 하나가 앞으로 쓱 나왔다. 덩치가 무척 당당한 사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사냥꾼이십니까?

노인의 말에 사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치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하. 우린 사냥꾼이 아니라 용병들이라오. 몰골이…….

일행을 돌아본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좀 신통치 않기는 하지만…….

용병이란 말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노인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몸에 걸치신 것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인 듯 싶은데…….

사내는 그때서야 노인의 꿍꿍이를 알아차린 듯 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척박한 카토 왕국에서조차 귀중품에 속하는 물건이다. 누구라도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맞소. 우린 꼬박 1년을 이곳에서 살았지. 땀에 절어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인 것은 틀림없소.

사내의 말이 아니더라도 노인의 안목은 충분히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판별할 수 있었다. 노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우리에게 파십시오. 값은 충분히 쳐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일순 당황했다.

지, 지금 당장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희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구하기 위해 펜슬럿에서 온 상인들입니다. 충분히 매입할 여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에 눈독을 들인 것은 노인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어부들도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루 종일 얼음 위에서 추위와 싸우며 낚시를 하는 그들에게도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말 그대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심지어 점원과 여관주인조차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다가오는 판국이었다.

저, 정말이군. 그것도 통짜 가죽이야.

사내가 입고 있던 털가죽을 만져본 여관 주인도 지체 없이 흥정에 가세했다. 임자만 잘 만난다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그것도 흠집이 없는 통가죽이 아닌가? 단지 돈이 없어 보이는 어부들만이 흥정에 가세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에게 파시오. 부르는 대로 드릴 테니…….

나에겐 단 한 장만 파시오. 돈이 모자란다면 원하는 대로 숙식을 제공해 주겠소.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는 다소 왜소한 몸집을 가진 사람 하나가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요?

사내의 질문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대장이 알아서 하게. 어차피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 아니겠나?

그의 말에 사내는 마음을 굳힌 모양인 듯 느릿하게 외투를 벗었다. 외투와 붙어있는 모자를 벗자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을 가진 지극히 사내답게 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카심이었다. 북부의 중심부에서 수련에 몰두하던 카심 용병단원들이 마침내 카토 왕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외투를 벗자 이상야릇한 냄새가 더욱 짙어졌지만 이젠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땀 냄새에 절어있기는 했지만 외투는 자체가 값을 논할 수 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에……. 카심은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털가죽 값으로 얼마를 생각하고 있소?

카심을 마주본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고비였다.

자고로 상인의 사명이란 싸게 싸서 비싸게 파는 게 아니던가? 그러므로 가능한 한 값을 후려쳐서 싸게 사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노인은 협상을 시작했다. 이럴 경우 제일 먼저 상대가 생각하는 가격을 알아야 하는 것이 상례였다.

얼마를 원하시오?

원하시는 가격을 말해보시오. 적절한 가격이면 당장 매입하리다.

노인의 눈을 들여다본 카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그는 노인의 꿍꿍이를 알아차린 상태였다. 이럴 경우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법 상술이 뛰어난 듯 보이오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라오. 난 10년 이상 용병으로 굴러먹었지. 용병계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오. 상단의 호위도 적지 않게 맡았기 때문에 거래요령에 대해 어두울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이곳에서 처분하려는 이유는 단지 하나 귀찮기 때문이오.

만약 당신이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의 거래는 없소. 그럴 경우 우린 예정대로 펜슬럿이나 크로센 제국으로 가서 처분할 생각이니까. 물론 당신이 제시한 가격보다 더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러니 알아서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기 바라오.

노인은 맥이 탁 풀렸다. 10년 이상 용병으로 굴렀다면 섣불리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도 높았다. 결국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해 둔 최종가격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한 장당 100골드씩 지불하겠소. 물론 흠집이 없는 통가죽에 한정해서…….

카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싼 가격이로군. 하지만 터무니없이 후려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거래 할 만 하구려. 물론 통가죽을 100골드에 넘길 생각은 없소. 100골드에 팔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흠집 있는 가죽뿐이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눈빛을 빛냈다. 흠집이 있는 가죽이라도 100골드에 살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성과였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둘 것은 있었다.

흠집이라면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간단하오. 검에 뚫린 자국이지. 놈들이 워낙 빨라서 흠집을 낼 수밖에 없었소. 가죽 하나에 대략 하나에서 셋 정도 검 자국이 뚫려 있을 거요. 물론 조각난 가죽들은 예외요.

카심의 말을 들은 노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서 구멍 한 두개 정도는 흠집으로 칠 수도 없었다. 가죽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면 오로지 일격에 아이스 트롤의 목을 날려야 했고 그러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것은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봐야 했다. 행여나 상대의 마음이 변할세라 노인은 얼른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좋소. 거래는 성립되었소. 지금 즉시 대금을 지불할 테니 가지고 있는 털가죽을 모두 내놓으시오.

이번에는 카심이 어리둥절해 할 차례였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왔기에…….

충분할 것이오. 내 수중엔 현재 1500골드가 있소이다. 당신들이 입고 있는 털가죽을 모두 사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지.

후후후.

그 말을 들은 사내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카심이 빙글빙글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아마 불가능할 거요. 우리가 보유한 털가죽을 모두 사려면 적어도 그 열 배가 있어야 하오. 흠집이 없는 것도 일괄적으로 100골드로 쳐서 말이오.

노인은 아연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최소한 150장 이상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 잡기 힘든 아이스 트롤을 무려 150마리나 잡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노인은 일행의 면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잡았기에…….

카심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알 필요 없소. 거래를 할 생각이면 밖으로 나오시오. 털가죽을 썰매에다 실어놓았으니까…….

아, 알겠소.

상인들은 부랴부랴 카심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무로 짜 만든 커다란 썰매 위에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 산더미처럼 실려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이 그대로 달려있는 통짜 털가죽이었다.

사내 하나가 썰매를 지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덩치에 비해 키가 조금 작아 보이는 사내는 상인들이 다가가자 적의를 드러내려 했다. 왠지 모르게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괜찮아. 윈슬럿

카심이 손을 흔들자 윈슬럿은 들어올리려는 배틀 액스를 늘어뜨렸다. 두터운 털외투를 덮어씌운 상태였기에 그가 언데드란 사실을 상인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눈을 소복이 덮어쓴 윈슬럿을 본 상인들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 세상에……. 이처럼 추운 날씨에 파수를 세우다니…….

다, 당신은 춥지도 않소?

카심이 얼른 나서서 윈슬럿을 가렸다. 상인들이 윈슬럿의 정체를 알게 되면 조금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괜찮소. 북부 토박이인 데다가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능히 견딜 수 있소. 그건 그렇고 원하는 털가죽을 골라보시오.

알겠소.

상인들은 묵묵히 썰매로 다가가서 털가죽을 골랐다. 그러면서도 내심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 15장이라면 그들이 목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100장이 넘게 쌓여 있는 털가죽 중에서 달랑 15장만 고르려니 아깝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깝군. 이럴 줄 알았다면 돈을 모조리 털어 오는 건데…….

비교적 흠집이 적은 가죽 15장을 골라낸 노인은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중년인 하나가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여기 1500골드가 있소. 확인해 보시오.

상자 속에는 금화와 은화가 뒤섞여 있었다. 액수를 확인한 카심은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상적으로 금화보다는 은화가 사용하기에 훨씬 편했기 때문이었다.

맞구려. 그럼 거래는 끝났소.

상자를 닫은 카심이 고개를 돌리자 노인이 얼른 그를 잡았다.

혹시 이것을 가지고 펜슬럿으로 오실 용의는 없소? 모두 매입할 의사가 있는데…….

그 때는 100골드 이상 쳐서 후하게 드리리다.

카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것은 카토 왕국에서 모두 처분할 생각이오.

할 수 없구려.

노인은 아쉬움이 남는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골라낸 털가죽을 모두 마차에 실어라. 일을 마쳤으니 내일 돌아가기로 한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마차에 짐을 싣는 상인들을 흘겨보며 카심은 다시 여관으로 들어갔다. 잠시 머문 사이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외투를 벗었더니 더럽게 춥군.

투덜거리며 들어온 카심에게 누군가가 얼른 다가왔다. 여관 주인이었다. 그는 주뼛거리며 카심에게 말을 걸었다. 기세 좋게 흥정에 가세하던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변한 모습. 아무래도 상인이 부른 가격에 잔뜩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미, 미안하지만 조각난 가죽이라도 조금 팔 수는 없는지요?

솔직히 말해 제겐 100골드라는 거금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투리 가죽이 있으면 조금만 팔아주십시오.

자투리 가죽으로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시오.

되묻는 카심을 보며 여관 주인은 안색을 굳혔다.

아시다시피 북부는 토박이인 우리들에게도 무척 추운 곳입니다. 자투리 가죽으로 모자나 신발을 만들면 추위를 견디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두 번째 흥정에는 어부들도 가세했다.

저도 신발을 만들 정도만 사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얼음 위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하신다면 대신 생선이라도 드릴 테니 조금만…….

그들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이쪽이 덩치 좋은 용병들이 아니었다면 덤벼들어 강탈이라도 할 듯한 얼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보온성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물건이었다.

카토 왕국에서도 고위급 귀족이나 걸칠 엄두를 낼 정도였으니 평범한 사람들에겐 귀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잠시 그들을 쳐다본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가진 돈을 모두 꺼내보시오.

그 말에 사람들은 주섬주섬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부들 중 몇 명은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다고 여관을 나섰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탐내는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그러나 욕심과는 달리 나온 돈은 형편없는 액수였다.

여관주인이 금고를 탈탈 털어 계산해 본 뒤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무시는 동안 숙박비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깎아 주십시오.

여관 주인이 내민 돈은 도합 15골드였다. 그 밖의 사람들 중에는 채 1골드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니 얼마나 궁핍한지 익히 알 만 했다. 그들의 얼굴을 슬쩍 훑어본 카심은 그들을 일렬도 도열시켰다.

모두 줄을 서시오.

그러는 동안 소문이 퍼졌는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여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사려는 일념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은화 몇 닢을 꼭 그러쥔 소년도 끼여 있었다. 그들은 곧 용병들의 통제하게 길게 줄을 섰다. 카심은 가장 앞에 선 여관주인을 쳐다보았다.

15골드라……. 혹시 당신에게 가족이 몇이나 되오?

뚱딴지같은 질문이었지만 여관주인은 공손히 대답했다. 털가죽 조각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아내와 아들 하나 그리고 네 딸이 있습니다. 점원 녀석이 바로 제 아들이지요.

가족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아내가 워낙 추위를 많이 타서 그녀에게 장갑과 신발이라도 만들어주려고 금고를 털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여관주인이 내민 15골드를 챙긴 뒤 정색을 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일행의 목욕물을 데워주면 가죽을 좀 더 드리겠소. 어떻소?

여관주인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목욕물을 데운다는 것이 그리 쉽진 않았지만 겨울나기용 장작을 모두 땐다면 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작이야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평생 가도 다시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관주인이 승낙하자 카심은 소리쳐 패터슨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장.

썰매에 가서 털가죽 두 장을 가지고 오도록 해라. 15골드에 두 장이면 좀 싸지만 어쩔 수 없다.

두, 두 장이나요?

깜짝 놀랐지만 패터슨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한 달음에 썰매로 가서 털가죽 두 장을 가지고 들어온 그는 그것을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손톱, 발톱이 그대로 달려있는 통가죽 두 장을 받아든 여관 주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투리가죽이나 조금 얻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장이나 주다니.

이, 이렇게나 많이 주셔도 됩니까? 제, 제겐 15골드가 전부인데…….

여관주인의 감격한 듯한 눈빛을 맞받으며 카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당신들에게 더욱 절실한 물건 같소. 우리에겐 돈이 그리 필요치 않으니 거래는 이것으로 성사되었소. 그럼 다음 사람.

카심은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닥치는 대로 팔아 넘겼다. 가격도 제각각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를 내밀던 간에 무조건 털가죽을 넘겨주었다. 심지어 단돈 5실버에 털가죽 두 장을 판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의 외투를 만들어주겠다면 소년이 내민 1실버짜리 은화 다섯 닢을 받은 카심은 두말도 하지 않고 털가죽 두 장을 내주었다.

저, 정말 고마워요. 이젠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외투도 만들 수 있겠어요.

기뻐서 달려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카심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해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 150장은 삽시간에 팔려나갔다. 그 모습에 기가 막힌 것은 마차에 짐을 싣고 들어온 상인 일행이었다.

어찌 이런 경우가 있소? 우리에겐 1백 골드에 팔고 어찌해서 저들에겐 터무니없는 가격에 넘기는 거요.

눈을 치뜨며 항의하는 상인들에게 카심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난 저 사람들의 전 재산을 받고 털가죽을 판 거요.

아무리 그래도…….

장사란 오로지 파는 사람 마음이오. 당신도 원한다면 전 재산을 주시오. 그럼 털가죽 한 장을 드리리다.

말문이 막힌 노인이 침묵을 지키자 카심은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났다. 아직까지 털가죽을 사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집에 갔다온다고 늦었거나 아니면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당신들도 털가죽이 필요하오?

카심의 말에 비쩍 마른 사내 하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보아도 궁기(窮氣)가 주르르 흐르는 사내였다.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겐 돈이 하나도…….

돈이 없으면 물건도 좋소. 옳지. 그러면 되겠군. 당신은 지금 즉시 집으로 가서 가장 좋은 외출복을 한 벌 가지고 오시오. 그런 다음 우리와 바꿔 입으면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오.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흠집이 하나도 없는 통가죽이니 세탁한다면 그런 대로 쓸 만 할거요.

사내의 얼굴이 확 펴졌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옷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여관을 달려나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카심 용병단이 보유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입은 것까지도 모조리 팔려나갔다.

이제 모두 처리했군.

카심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털가죽을 조금 황당하게 팔아버렸지만 용병들 중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대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는데다가 카심 용병단의 재정상태가 지극히 풍족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도 카심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대장이군. 잘 했어.

카심의 결정으로 용병들은 마을사람들의 열렬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횡재한 마을 사람들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물건들을 하나씩 가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궁핍한 형편과는 달리 마음씀씀이 하나만은 무척 넉넉한 사람들이었다.

목욕하시려면 장작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 좀 잡숴보시구려. 딸아이 결혼식에 쓰려고 눈에 묻어놓았던 건데.

사람들이 가지고 온 생선과 장작, 옷 따위가 여관 홀에 수북히 쌓였다. 보온성이 뛰어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그들에게 정말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은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를 데리고 와서 시중을 들게 하려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용병단원들은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넉넉하게 장작을 때서 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새로 지은 옷으로 갈아입은 용병들은 여관 주인내외가 성심껏 마련한 저녁을 먹은 뒤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의 고된 수련을 잊게 할 정도로 꿀 같은 단잠이었다.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난 용병들은 지체 없이 한 자리에 모였다. 소기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할 차례였다. 데이몬은 판이하게 변한 일행의 면면을 하나씩 둘러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수고들 많았어. 북부에서 보낸 11개월 동안 모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군.

아닌게 아니라 1년 가까운 세월을 북부 중심부에서 보내며 일행들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대부분의 용병들이 초보적인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매일 매일 이어진 혹독한 수련과 함께 끊임없이 연공한 수라사령심법 덕택에 용병들은 이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통상적인 팔라딘에 비하면 손색이 있겠지만 발전속도를 보면 머지않아 근위기사에 못지 않은 수준까지 오를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이따금 벌어진 아이스 트롤과의 접전은 그들의 실전경험을 더욱 키워주었다. 바야흐로 아르카디아에 전원 팔라딘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우선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대장의 집념은 알아줄 만 하군. 헬버트론과도 싸워도 너끈히 10분을 버티는 판국이니 이젠 어지간한 팔라딘과 싸워도 섣불리 지지 않겠어.

카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과찬입니다. 그거야 헬버트론 님께서 봐주시니까 그런 거지요.

아니야. 일전에는 헬버트론이 감탄하더군. 대장 특유의 변칙적인 무예가 막기 힘들다며 말이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토록 실력을 키우는 데 집착하는 거지?

데이몬의 질문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애틋한 빛이 카심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간파한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내 더 묻지는 않겠네.

감사합니다.

카심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잠시 지켜본 데이몬은 이번에는 제럴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럴드. 이제 네가 우리 용병단에서 두 번째 실력자다. 물론 미첼을 제외하고 말이다.

묵묵히 앉아있는 미첼을 슬쩍 흘겨본 데이몬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네 좌수검법은 거의 완성된 상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이다. 좌수검법의 완성을 위해서는 풍부한 실전경험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제럴드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데이몬을 필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직까지 풋내기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터였고 복수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 속을 헤집으며 용솟음치는 기운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설사 팔라딘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당당히 맞서 싸울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늘어난 검술실력으로도 합법적인 복수를 할 수 없을 테지만 힘을 얻었다는 데에서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조용한 편이었지만 좌수검법을 익힌 다음 제럴드는 더욱 과묵해졌다. 마치 잘 벼려놓은 한 자루 검과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

제럴드를 잠시 쳐다본 데이몬은 나머지 일행들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입담 좋고 쾌활한 패터슨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제 제법 남자다운 티가 흐르는 하인리히를 비롯하여 헬튼, 비에리, 잭슨 등 나머지 용병들을 데이몬은 하나씩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내공을 익힌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유난히 반질반질한 그들의 태양혈(관자놀이)은 내공이 완성될수록 눈에 띄게 도드라질 것이며 일정경지를 통과한다면 그들의 얼굴은 다시 평범한 상태로 복귀할 것이다.

이른 바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인종은 틀렸지만 내공에 의한 신체의 변화는 거의 동일했다. 데이몬은 그 시점을 소드 마스터와 팔라딘을 가르는 경계라 생각하고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다면 어렵지 않게 강기를 구사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전속도를 가늠해 본다면 이들은 적어도 5년 이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물론 그 이상은 마공 특유의 한계상 힘들겠지만…….'

과거 그의 휘하에 있던 수호마왕군 무사들도 대부분 절정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병기에다 강기를 응축시킬 수 있는 단계. 그들은 단 10년 만에 절정고수가 되었고 그 모든 것이 속성이 가능한 수라사령심법의 덕이었다. 단시일 내에 1천 명의 절정고수를 키워낸 이 천고의 내공심법은 데이몬의 동료용병들을 팔라딘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충분한 실전경험만 받쳐준다면 그들은 당당히 제 몫을 해 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본다. 이들과 함께라면 복수의 길이 그리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미첼과 율리아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북부에서 보낸 1년여의 세월동안 가장 얻은 것이 없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선 무위도식하다시피 한 율리아나가 얻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놀라운 점은 데이몬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1년 동안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시시각각 장난을 걸다가 흠씬 얻어터지는 것은 변함 없었지만 데이몬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뭔가 기이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데이몬에게 장난을 거는 횟수는 줄어들었으며 데이몬이 소환술 연구에 심취해 있는 동안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장면도 벌써 여러 번 목격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태도를 생각하면 놀랄만한 변화였다. 율리아나가 그럴수록 데이몬은 그녀를 더욱 냉랭하게 대했다. 이미 그의 가슴속에는 다프네 외의 다른 여자가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원천적으로 그는 율리아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다프네와 닮은 외모만을 제외하고는…….

데이몬이 쳐다보자 율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데이몬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종잡을 수 없는 년이로군. 설마 이제 와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을 텐데? 하긴 그래봐야 헛수고겠지만…….'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북부에서 보낸 세월동안 그가 얻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니,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을 통해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자고로 고수와의 대결은 실력을 키우는데 가장 효과적인 법. 그는 적어도 카르셀을 나설 때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첼의 얼굴에는 항상 쓸쓸함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용병들의 실력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이리라.

속성 내공심법을 익힌 용병들과는 달리 미첼은 평범한 펜슬럿의 내공심법을 익혔다.

그런 만큼 용병들만큼의 내공증진을 기대할 수 없음이 당연했고 점점 좁혀져 가는 실력차이는 그가 지금껏 익힌 검술에 대한 회의까지 들게 만들었다. 이를 악물고 수련했지만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그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암암리에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 자신이 익힌 내공심법에 회의를 갖다니…….'

정파 내공심법이 마공에 비해 연성속도가 느리기는 하지만 절정의 경지를 넘어 최절정으로 오르는데는 더욱 뛰어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일행들을 죽 둘러본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럼 대장이 한 마디 하게. 이제부터 시작될 여정에 대해 말이야.

카심은 마다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일일이 체면을 살려주는 데이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억눌렀다. 이미 그는 데이몬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각오를 굳힌 상태였다. 중원에서 수호마왕군의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았던 데이몬의 특기가 바야흐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뒤로 나앉는 것을 쳐다본 카심은 고즈넉이 말문을 열었다.

이제 우린 여정을 시작한다. 목적지가 크로센 제국이기는 하지만 연기된 간택식이 열리기까진 아직까지 1개월 남짓 남았으니 그 기간동안 아르카디아 북단을 두루 여행할 계획이다.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으므로 도보로 여행할 것이니 지휘에 잘 따라주기 바란다.

말을 마친 카심은 미첼을 쳐다보았다. 카심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애틋한 빛이 서려있었다.

제일 먼저 갈 곳은 펜슬럿이다. 우린 그곳에서 미첼과 헤어질 것이다.

카심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첼에게 검술교습을 받으면서 적지 않게 정이 쌓였기 때문에 하나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만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지내면서 미첼에 대한 나쁜 인상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의 진면모를 알게 된 터라 아쉬움이 짙을 수밖에 없었다.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용병들은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을 파악한 듯 카심은 나지막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미첼과 얘기가 끝난 상태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말을 듣자 용병들은 맥이 탁 풀렸다.

미첼의 실력이라면 펜슬럿에서 충분히 근위기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감히 용병단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카심 용병단이 앞으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할 계획이긴 하지만 용병기사와 근위기사 사이에는 애당초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긴. 그의 실력이라면 근위기사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용병으로 남으려 하겠어.'

묵묵히 듣고 있던 미첼의 얼굴에도 고뇌가 서려있었다. 사실 그가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용병들의 지도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떠날 것이란 마음을 먹지 않았다. 용병단의 일원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곧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배경에는 용병들의 남다른 성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는 용병들의 실력. 비례적으로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는 자신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성취였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수련을 시작한지 무려 8년이 지나서야 초보적인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철저한 개인교습 하에 뼈를 깎는 수련을 했어도 그 정도였지.

하지만 이들은 단 1년 만에 그 경지에 올라섰다. 아직은 내가 이들보다 강하지만 머지않아 추월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미첼로써는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으로 실력이 늘기는 하지만 용병들의 성취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미첼은 데이몬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모두 버린 채 용병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랭한 거절이었다.

이제 와서 네가 이걸 익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이 마나연공법은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만 익힐 수 있다.

데이몬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미첼에겐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미첼은 용병단을 떠날 생각을 굳혔다. 이미 율리아나에게 허락을 받은 터라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들과 어울려 드래곤 사냥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렇게 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초라해지는 날 감당해야 한다.'

비록 아버지인 헤일즈가 펜슬럿에 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상태였지만 미첼은 그것을 과감히 묵살했다. 지금 상황에게 그가 근위기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펜슬럿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격시험을 통과한다면 능히 근위기사가 될 수 있었으므로……. 미첼은 착잡한 얼굴을 억지로 폈다.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와 이들과는 생각하는 바가 틀리니까.'

미첼의 표정을 본 카심은 그의 결심이 굳었음을 알아차렸다. 이미 여러 번 회유했지만 듣지 않았던 터라 카심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마음을 굳힌 모양이군. 하지만 명심하게. 우리 용병단의 문은 언제라도 열려 있으니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받아 주겠네.

미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갈 곳은 펜슬럿이다. 그곳에서 미첼을 보낸 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로 한다. 그간의 정리 때문이라도 그가 근위기사가 되는 것을 보고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 뒤의 여정은 그 때 알려주겠다.

용병들은 섭섭함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더 이상 잡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율리아나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미 넌 카르셀에 있을 때부터 근위기사가 되길 갈망했었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아버지께는 잘 얘기해 줄게. 넌 충분히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고맙군. 크로센 제국까지 동행하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너도 부디 뜻하는 바를 이뤘으면 좋겠어.

미첼은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껏 그녀에게 지겨울 만큼 당해왔지만 머지않아 헤어진다고 하니 조금 섭섭했다. 그는 모호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어찌 보면 그만큼 율리아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터, 율리아나가 변하는 모습을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이가 바로 그였다. 틈만 나면 데이몬을 멍하니 쳐다보던 율리아나의 모습을 떠올린 미첼은 묵묵히 되뇌였다.

'너보다 몇 십 배나 더 산 흑마법사에게 대관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겠어. 한때나마 모신 왕녀에 대한 내 배려라고 생각해.'

이야기를 마치자 카심이 손뼉을 쳤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떠나기로 한다. 아직까지 북부의 추위가 매섭지만 모두가 마나를 운용할 수 있으니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 없더라도 능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회의가 끝나자 용병들은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지금쯤 아래층에는 주인 내외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차려져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구수한 수프냄새가 풍겨왔고 입맛을 동한 용병들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마친 뒤 용병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데이몬이 카심에게 다가갔다.

이 길로 곧장 펜슬럿으로 갈 작정인가?

그렇습니다.

길은 잘 알고 있겠지?

예. 상단의 호위를 맡느라 몇 번 오간 경험이 있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카심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헤어져야겠군.

생각을 마친 뒤 데이몬이 내뱉은 말에 카심은 깜짝 놀랐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딜 좀 다녀와야겠어. 아무래도 1년 동안 아르카디아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곳에 심어놓은 정보원이 하나 있거든…….

카심은 그때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데이몬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대마법사인 데이몬이니 공간이동을 사용한다면 자신들보다도 먼저 펜슬럿에 도착할 공산이 컸다.

여기서 펜슬럿까지는 저희끼리 가도 별 위험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략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고맙네. 그럼 펜슬럿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지.

고개를 끄덕이던 데이몬은 돌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안전한 공간이동 좌표가 문제인데 말이야. 엉터리 좌표에 한 번 당했더니 놀란 가슴이 영 진정되지 않는군.

카심이 빙그레 웃으며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미 레이토나에서 공간이동 전용 좌표책자를 사 두었으니까요.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심이 벌써 거기까지 신경을 써 두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언제 이것을…….

무지막지하게 비싸더군요.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튼 고맙네. 과연 대장이라니까…….

그는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카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정말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 카심이었다.

그럼 다녀오겠네. 사람들이 놀랄 테니 침실에다 마법진을 그려 바로 출발할 생각일세. 그러니 자네들도 곧 출발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올라간 뒤 용병단원들은 출발준비를 했다. 아직까지 1개월이란 여유가 있었지만 들러야 할 곳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여관을 나선 용병들의 눈이 별안간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들은 뭐야?

여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눈보라를 덮어쓴 상태에서 그들은 환히 웃으며 용병들을 맞이했다.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얻은 터라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마중 나왔던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말린 생선이나 물병 따위의 물품들이 수북하게 들려 있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그들 나름대로 여행에 쓸모가 있을만한 물건들을 장만해 온 것이다.

벌써 가시다니 섭섭합니다.

다음에라도 시간이 있으면 저희 마을을 방문해 주십시오.

풍족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나갈 때는 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게 된 것이다.

고맙소.

마을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용병들은 크로센 제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힘을 얻은 터라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공간이동으로 멀리 떠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아르카디아 서남단에 위치한 교역도시 로르베인은 오늘도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안과 내륙의 접경지에 위치한 천혜의 조건은 날이 갈수록 로르베인을 부유하게 만드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로르베인의 남쪽에는 거대한 주택가가 위치해 있었다. 부유한 이들만 모여 사는 부촌(富村)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로르베인 제일의 부자인 로메인 남작의 저택이었다. 시내 중심가의 상권 절반 이상을 한 손에 그러쥔 천문학적인 부를 소유한 재력가 로메인 남작. 그런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로메인 남작은 근래 로르베인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사실 그는 예전에 꽤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모두가 꺼려하던 노예매매를 거리낌없이 행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악덕상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그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고 그를 향해 쏟아지는 원성이 끝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원성은 지금에 와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불과 6년이라는 짧은 세월. 그 기간동안 로메인 남작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변모한 모습을 보였다. 그 변화는 한 마디로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시청을 찾아간 로메인 남작은 시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껏 재산을 모으기 위해 못할 짓을 많이 했지. 모을 만큼 모았으니 이젠 착한 일을 좀 하고 싶구려.

믿을 수 없어하는 시장을 뒤로 하고 나온 이후 그는 대대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로르베인의 유일한 오점(汚點)으로 남아있는 빈민가에 대한 정비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리 부유한 도시라고 해도 빈민가가 없을 수는 없었다.

로메인 남작은 하층 인생들, 다시 말해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에 대대적으로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다리를 놓고, 어지럽게 널린 폐가를 정비하며 고치거나 새로 짓는 등, 로르베인의 빈민가에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동원된 인부들은 바로 그곳에 사는 빈민들이었다. 일당을 받으며 자신이 살던 집을 고치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물론 거기에 소요되는 건축자재는 모두 로메인 남작이 제공했다.

별일이군.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그래.

빈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열심히 일을 했다. 사는 집을 고치는 일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손해볼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로르베인의 빈민가는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로메인 남작의 재산 중 반이 투입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방대한 공사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로메인 남작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쌓아온 악명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뭐 바라는 게 있었으니 그 놈이 이런 일을 벌였겠지.

간악한 놈의 수작에 넘어가서는 안 돼.

기껏 선행을 하고도 욕을 얻어먹은 판국이 되었지만 로메인 남작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두 번째 계획에 착수했다.

이젠 상단을 정비해야 할 때다. 앞으로는 정정당당한 상술로써 승부한다.

로메인 남작은 보유한 상점과 상단을 과감히 개편했다.

지금껏 로메인 상회는 독점(獨占)과 매점매석(買占賣惜)으로 이윤을 남겨왔다. 다른 상회들과 연합해서 한 가지 물품을 집중적으로 매입, 가격을 확 올린 뒤 되파는 수법으로 부를 축척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지금까지의 관행을 과감히 타파하고 공정한 경쟁을 할 것을 천명했다. 항상 앞장서서 매점매석을 부추기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우리 로메인 상회는 무한 경쟁을 시작할 것이오. 더 싼 가격에 더 좋은 물건을 공급하도록 노력할 테니 앞으론 독점이익을 절대 기대하지 마시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로메인 남작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산지에 가서 물건을 구매해오는 상단의 규모를 열 배로 늘인 그는 대신 지금껏 독점을 가능하게 했던 점포의 수를 반 이하로 줄여버렸다. 거리마다 하나씩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조리 처분해버린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로메인 상회의 변화에 다른 상회들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미친 놈. 망하려고 작정했구먼.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보자.

하지만 로메인 상회는 망하지 않았다. 비약적으로 수가 불어난 상단이 아르카디아 구석구석을 돌며 양질의 상품을 사들이고, 그것을 적정한 마진만을 붙인 싼값에 팔자 사람들의 발길은 점차 로메인 상회로 몰리기 시작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파니 고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로메인 상회의 매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고 다른 상회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용을 단단히 쌓은 로메인 상회를 따라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상회의 생명은 신용이다. 정직하게 고객을 대해야만 번영할 수 있다.

로메인 상회의 박리다매 전략으로 인해 오히려 득을 본 것은 로르베인이었다. 다른 상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로메인 상회를 벤치마킹하다 보니 로르베인 자체의 상권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커져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힘들여 산지로 가지 않았다. 로르베인으로 가면 모든 것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로메인 상회는 아르카디아 제일의 상회가 될 수 있었다.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국가들 중 로메인 상회의 분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장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로메인 남작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할 수 있었다. 3년 전 빈민가를 정비하려고 쏟아 부은 금액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제 두 번째 선행을 시작할 때인가?

로메인 남작은 또다시 재산을 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그의 손을 통해 팔려나갔던 노예들에 대한 보상이었다. 상단을 대거 투입해 과거 팔아 넘겼던 노예들을 다시 사들인 로메인 남작은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내가 많이 밉겠지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 바라오. 이 돈은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시오.

뜻하지 않게 자유의 몸이 된 노예들에게는 귀가 번쩍 트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자신들을 팔아 넘긴 장본인이었지만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은 증오를 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거금을 손에 쥐어주지 않았던가? 그들은 무척 기뻐하며 고향으로 떠났다.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팔려간 노예들을 모두 거두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미 죽은 자들도 있었고 다른 곳으로 팔려간 노예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의 몸이 되길 원하는 노예는 머뭇거리지 말고 로메인 상회의 문을 두드리시오.

그러면 원하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로메인 남작의 손에 의해 많은 노예가 해방되었다.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재산이 소진되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단지 뿌린 것을 거둔다는 한 마디로 내심을 밝힌 그는 세 번째 선행으로 트루베니아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하층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로르베인으로 가면 트루베니아 사람들도 마음놓고 살 수 있다는구먼…….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어수룩하다고 이용하려들지 않는다지?

소문을 들은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대거 로르베인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로메인 상회의 고용인이 되거나 혹은 그들의 보호아래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로메인 남작에 대한 칭송이 시작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정말 놀랍군. 이렇게 변하다니…….

세상은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로메인 남작은 그 뒤로도 해마다 거둬들이는 막대한 이익금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그에 대한 악명은 이렇게 해서 잊혀졌고 그 자리를 끝없는 칭송이 채워나갔다. 이렇게 해서 로메인 남작은 로르베인 최대의 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제의 주인공인 로메인 남작은 지금 고용인들과 함께 한창 월말결산에 몰두하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남작님께서 오히려 더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결산은 저희들이 마칠 테니 들어가서 좀 쉬십시오.

선한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 사내는 빙긋 웃으며 남작에게 들어가 쉴 것을 종용했다.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얼마 전 로메인 상회의 문을 두드려 자유의 몸이 된 노예 출신이었다. 이재에 밝아 상회의 고용인이 된 마틴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택에 남작의 신임을 단단히 얻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잠시 떠올려 본 로메인 남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아닌게 아니라 오늘은 조금 피곤하군.

머지 않아 끝날 테니 걱정 마시고 푹 쉬십시오.

그럼 부탁하겠네.

서류뭉치를 넘긴 로메인 남작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계산을 맞추기 위해 하루를 꼬박 새웠던 터라 몸이 물먹은 솜처럼 노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고용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작님.

뒷일은 저희들에게 맡기십시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고용인들은 로메인 남작에게 극도의 경의를 표시하고 있었다.

얼마만큼 그를 존경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내실에 들어온 로메인 남작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휴! 무척 피곤하군.

주위를 살짝 돌아본 남작은 별안간 쓴웃음을 지었다.

'저주로 몸을 바꿨어도 체력은 바뀌지 않았는가 보군. 허허허.'

눈코뜰새 없이 보냈던 6년 간의 세월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가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로메인이란 녀석이 워낙 악명을 떨쳐놓아서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어. 이제 그것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런데 은인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근래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셔서 조금 섭섭하군.'

그는 한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신의 인생에 일대 변혁을 가져다 준 인물.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뒤,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떠난 대마법사. 젠가르트가 아닌 로메인 남작의 삶을 살면서 그는 단 한번도 은인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자신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로메인 상회는 명실상부한 아르카디아 제일의 상회가 되었다. 젠가르트 상회라 이름지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귀에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쟁반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지만 눈매가 더할 나위 없이 선한 여인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는 바로 1년 전 맞아들인 그의 아내 제인이었다.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요즘 과로하시는 것 같아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고맙소 부인.

젠가르트의 말에 제인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고맙긴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서 견딜 수가 없는걸요?

무슨 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젠가르트는 다가가서 슬쩍 얼굴을 붉히는 제인을 살며시 보듬어주었다.

들어가서 쉬도록 해요. 난 더 생각할 것이 있으니 조금 있다가 자리다.

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제인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젠가르트의 눈매에는 따듯함이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제인은 그와 같은 트루베니아 인이었다. 그리고 무척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여인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트루베니아 인들이 그러하듯 몬스터 사냥을 나선 기사들에게 구해져서 동생 둘과 함께 아르카디아에 오게 된 제인은 이후로 무척 힘들게 살아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밑바탕 인생부터 새로 시작했던 것이다.

삯바느질부터 고된 식당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노예 상인 하나가 다가왔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간 제인은 동생들을 두고 노예상인의 마차에 올랐다. 그리하여 해안도시로 팔려가기 위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뒤늦게 자신이 창부로 팔려갈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해안도시로 팔려 가면 두 번 다시 바깥 세상을 볼 수 없대요.

함께 팔려가던 여인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탈출을 결심했다. 그녀가 가지 않는다면 남은 동생들은 험한 세상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질 것이었다. 어쩌면 굶어 죽을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목숨을 걸고 마차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리에 어두운 탓에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오래가지 못하고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노예상인들에게 얻어맞으며 끌려가던 그녀는 때마침 지나가던 로메인 상단의 눈에 띄게 되었고 사정을 들은 젠가르트는 많은 돈을 주고 그녀를 노예상인으로부터 사들였다.

이젠 걱정할 것 없소. 당신은 이제 동생들과 함께 이곳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트루베니아 사람들의 고충을 젠가르트만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는 곧 사람을 시켜 제인의 동생들을 로르베인으로 데리고 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늑하게 살아갈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

뜻밖의 호의에 제인은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지금껏 그들에게 이토록 마음써 준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하녀를 자청하고 젠가르트의 저택에 들어왔다.

평생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 진심이니 뿌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이후 제인은 젠가르트를 정성으로 모셨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산 조강지처처럼 알뜰하게 뒷바라지를 해 준 것이다.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고 일일이 건강을 챙겨주는 그녀에게 젠가르트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생 홀로 살아온 젠가르트가 정숙하고 다정한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거짓말이었으리라.

제인에 대한 애정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고 결국 그는 어느 날 견디지 못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말았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이건 진심이오.

그, 그건 안될 말입니다. 어찌 저같이 미천한…….

제인이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젠가르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 그는 제인이란 여인을 가슴 깊이 각인시켜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거듭되는 청혼에 제인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둘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늦은 나이였지만 젠가르트는 결국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인이 들어간 방문을 부드럽게 쳐다보던 젠가르트는 묵묵히 되뇌였다.

'당신의 고생은 이제 끝났소. 내가 한없이 행복하게 해 주리다.'

그 때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로군.

깜짝 놀란 젠가르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뉘, 뉘신지…….

눈매를 가늘게 좁히던 젠가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부여한 은인이었다. 젠가르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이, 이제야 오셨군요. 무척 많이 기다렸답니다.

정말 잘 살고 있더군.

데이몬은 조용히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아르카디아에 건너와서 처음 인연을 맺은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에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젠가르트.'

이곳에 온 뒤 데이몬은 바로 젠가르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미 드래곤의 마수가 한 번 뻗은 터라 조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런트 녀석이 죽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러셀런트가 찾아냈다면 다른 드래곤들이 찾아내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데이몬은 일부러 로르베인의 외곽으로 공간이동 해 왔다.

좌표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간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젠가르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깜짝 놀라야 했다.

놀랍군.

판이하게 달라진 로메인 남작의 평판은 데이몬을 놀라게 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베푼 일이었지만 젠가르트는 새로운 삶을 정말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데이몬으로써는 흡족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펴본 결과 다른 드래곤의 손이 뻗은 징후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바로 죽은 러셀런트의 용의주도함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종적을 파악한 러셀런트는 심문한 길드원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젠가르트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깡그리 저승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뒤이어 아르카디아로 건너온 게덴하이드도 그 때문에 젠가르트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메인 남작의 진정한 정체는 젠가르트와 데이몬만의 비밀로 완벽히 묻혀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파악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젠가르트를 찾아왔고 이렇게 대면하게 된 것이다.

결혼을 했나보군?

젠가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나이 차가 꽤 나는 것 같던데 능력이 좋군. 하긴 껍데기는 그리 늙지 않았으니…….

모두가 은공 덕택이지요.

몸둘 바를 몰라하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은 실소를 흘렸다. 따지고 보면 젠가르트보다 더한 도둑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다프네를 만날 당시의 나이 차이를 떠올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젠 괜찮겠군. 둘 다 500살이 넘었으니…….

젠가르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세.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한 일을 했더군. 자네 칭송이 로르베인에 자자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가?

뭐 별 거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주셨으니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했기에 열심히 노력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보기가 무척 좋더군. 역시 나에겐 사람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젠가르트는 돌연 정색을 했다.

그런데 이미 소문이 아르카디아 전역에 두루 퍼졌던데요?

엥? 그게 무슨 말이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는 데이몬을 보고 도리어 어리둥절해진 것은 젠가르트였다.

모르셨습니까?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을 대동해서 드래곤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대륙 전역에 파다한데…….

소문이 그리 빨리 퍼졌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하는 데이몬의 반응을 본 젠가르트는 그때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의문의 흑마법사는 바로 자신의 은인이었다. 워낙 유명했기에 그럴 것이라 추측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던 젠가르트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막강하다는 존재인 드래곤을 사냥하시다니…….

별로 막강하진 않았어. 지금껏 잡은 놈들은 잔챙이들뿐이니까…….

입을 딱 벌리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그건 그렇게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북부에 1년 가까이 박혀 있다보니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겠더군. 자네에게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젠가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대단히 떠들썩하지요. 왜 그런지 이유는 알고 계시겠지요?

현재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발칵 뒤집힌 상태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왕국의 군주들이 근위 기사단을 대거 풀어 데이몬의 종적을 찾고 있답니다.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이 뒤를 쫓던 일을 떠올린 데이몬은 눈매를 지긋이 모았다.

그놈들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날 쫓고 있는 거지?

젠가르트는 얼굴에 서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모르셨나 보군요. 그들은 바로 데이몬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찾는 거랍니다.

날 끌어들이기 위해?

그렇습니다. 현재 아르카디아에는 전운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크로센 제국을 장악한 페르슈타인 공작 때문입니다. 그가 오래지 않아 정복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추측이 각국의 정보망에 은밀히 돌고 있는 실정이지요. 데이몬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는 데이몬을 보며 젠가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셨습니까? 데이몬님이 보유한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의 힘이라면 족히 몇 개 기사단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륙 최강인 크로센 기사단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지요. 그런데 어느 왕국의 군주가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게다가 거기에는 세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답니다.

젠가르트는 테르비아와 펜슬럿, 테제로스 3국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서로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데이몬이 가세할 경우 우열이 금방 가려진다는 사실을 설명들은 데이몬은 비로소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이 자신을 쫓아다닌 연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쯔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

물론 데이몬은 그들에게 회유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보유한 전력을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전쟁에서는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데이몬은 칠종단금술로 인해 살인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시험해 보진 않았지만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자체가 칠종단금술을 발동시킬 수도 있었다.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병신 같은 놈들이로군. 머지않아 드래곤의 침공이 시작될 텐데 말이야.'

상념에 빠져 있는데 젠가르트가 솔깃한 얘기를 해 주었다.

아르카디아 제일의 권력자인 페르슈타인 공작도 데이몬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답니다. 제가 듣기로 일전에 레이토나에서 화이트 드래곤을 한 마리 사냥한 뒤 몸값을 받으러 떠나셨다면서요?

얼른 생각을 마친 데이몬이 급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데이몬님이 떠난 직후 페르슈타인 공작이 레이토나에 도착했답니다. 그가 데이몬님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런가?

데이몬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손을 잡을 만한 사람은 오로지 페르슈타인 공작뿐이었다. 오직 그만이 드래곤에 맞설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물론 인간들간의 전쟁에서는 힘이 되어 줄 수 없었지만.

잘 되었군. 어차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날 찾고 있었다니…….

네?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

잠시 데이몬을 쳐다본 젠가르트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머지 않아 아르카디아 전체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손아귀에 들어가겠군요. 지금도 무적(無敵)인데 데이몬님이 가세하면 거칠 것이 전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젠가르트의 얼굴에는 수심이 옅게 서려 있었다. 데이몬이 가세한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억지력이 사라진 이상 정복전쟁은 오래지 않아 일어날 터였고 그렇다면 아르카디아 전역이 전화에 휩쓸릴 것이 틀림없었다.

교역도시이긴 하지만 전략상 요충지에 위치한 로르베인도 전화를 피해가지 못할 것이라서 젠가르트로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어렵게 얻은 행복이 산산조각 나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젠가르트는 감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의 행복은 모두가 데이몬으로 인해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젠가르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데이몬은 미소를 짙게 머금었다.

내가 왜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으려는지 알겠나?

왜냐하면 그에겐 힘이 있기 때문이지. 트루베니아를 지배하는 드래곤과 오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말이야.

눈치 빠른 젠가르트는 데이몬의 말뜻을 금세 깨달았다.

그, 그렇다면…….

나 역시 트루베니아 인일세. 오크의 노예로 어렵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결코 없다네. 또한 트루베니아와의 전쟁은 내가 추구하는 바와 부합되는 일일세. 그러므로 난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부추겨 트루베니아를 침공할 생각이네.

가, 가능할까요? 페르슈타인 공작은 야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를 설득하는 일이 결코 쉽진 않을 텐데요.

안 된다면 흑마법의 힘을 빌어서라도 성사시킬 것이야. 설사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젠가르트의 얼굴에 열망의 빛이 번뜩였다. 데이몬이 말한 것은 그가 지금껏 수없이 상상했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했던 일이었다. 오크 족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 그가 꿈에라도 이루고자 갈망했던 일이 아니던가? 감정이 격양된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절 동참시켜 주십시오. 한낱 병졸의 신분으로도 참전하고 싶습니다.

힘들텐데……. 자넨 늙어서 헬버드도 들지 못하잖아?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들겠습니다. 안되면 화살이라도 나를 생각입니다.

열망에 가득 찬 젠가르트의 눈을 들여다보던 데이몬은 손을 뻗어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장기가 있는 법이야. 병졸 노릇은 자네에겐 어울리지 않으니 차라리 보급과 병참을 맡아 주는 게 어떤가? 자네라면 잘 할 것 같네.

젠가르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를 때가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 재산을 깡그리 털어서라도 군자금에 보태겠습니다.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중에 때가 되면 연락하겠네. 자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업에 열중하게.

혹시라도 날 뒤쫓는 드래곤이 자넬 찾아올지도 모르니 모든 일은 극비에 붙여야 해.

페르슈타인 공작과의 접촉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알겠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데이몬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참. 그리고 보석을 좀 넘길 테니 팔아놓도록 하게. 자고로 난세에는 귀금속과 황금의 가치가 치솟기 마련이니 지금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금궤도 꽤 있지.

한 20톤 될 거야.

젠가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몸값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모조리 현금으로 바꿔 놓겠습니다.

좋아. 그럼 보고로 안내하게.

젠가르트의 비밀 보고에 들어간 데이몬은 방대한 양의 보물을 풀어놓았다. 카트로이의 몸값으로 받은 황금 20톤 외에 상당한 양의 보석을 인크레시아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보석들이 하나같이 드워프의 세공품들이라 젠가르트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카디아 제일의 부자는 바로 데이몬님이셨군요. 설사 페르슈타인 공작이라 해도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진 못했을 겁니다.

난처했는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군소리가 늘었군. 나에겐 별달리 쓸모 없는 물건이니 몽땅 팔아버리게.

트루베니아 침공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야.

염려 놓으십시오.

그럼 난 가보겠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비밀금고 귀퉁이에 설치된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