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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본 드래곤의 등에 데스 나이트를 태운다면 아주 훌륭하겠어. 이른 바 드래곤 라이더로 만드는 거지. 철저히 언데드로 이루어진…….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드래곤과의 공중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른 뒤, 마법공격에 대한 방어는 자신이 맡고 공격을 데스 나이트가 담당한다면 상대가 아무리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게다가 드래곤 하트를 사용해서 본 드래곤의 마법저항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면 어지간한 마법공격 정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대마법 방어장을 친 본 드래곤이 방패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좋아.

데이몬은 그 때문에 만들어질 본 드래곤에 큰 기대를 가졌다. 제일 처음 얻은 지크레이트의 시체는 이미 오래 전에 본 드래곤이 된 상태였다. 지크레이트가 비교적 젊은 드래곤이었기에 만들어진 본 드래곤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쯤 인크레시아 속에는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의 시체가 본 드래곤으로 변하고 있을 터였다. 죽은 러셀런트가 본 드래곤이 된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본 드래곤을 만드는 것은 그리 여의치 않는 일이었다. 제조방법을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었고 어둠의 마력 역시 충분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극한의 냉기(冷氣)였다.

본 드래곤 자체가 프로스트의 속성을 가진 언데드 몬스터였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냉기가 필요했다. 냉기를 충분히 흡수해야만 본 드래곤이 프로스트 브레스를 쏘아낼 수 있을뿐더러 태양빛 아래에서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었다.

원래 데이몬은 그것을 인크레시아가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마법보고 속의 초저온이 본 드래곤 제조에 필요한 냉기를 넉넉히 공급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비록 초저온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인크레시아 속에는 냉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대자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그저 공간의 왜곡된 틈새에 불과했던 인크레시아라서 온도는 낮지만 본 드래곤에게 흡수시킬 수 있는 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그토록 온도가 낮은데도 본 드래곤에게 흡수시킬 냉기가 없다니…….

하지만 본 드래곤이 좀처럼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비밀병기의 완성은 그 때문에 상당히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지금 모습을 드러낸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는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존재였다. 지크레이트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혀를 찼다.

서둘러 인크레시아 속에다 집어넣어야겠군. 태양 빛 때문에 겉 부분이 녹고 있어.

아닌게 아니라 카트로이를 누르고 있는 지크레이트의 전신은 서서히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표면이 점차 녹아 들어가며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 아직까지 흡수한 냉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데이몬은 얼른 데스 나이트를 쳐다보았다.

녀석을 제압해 놓도록. 단 죽이지는 말고. 난 서둘러 본 드래곤을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어야겠어.

그러지.

본 드래곤의 상태는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은 두말 하지 않고 카트로이에게로 다가갔다.

챠챵.

네 자루의 장검이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머금은 채 카트로이의 머리통에 겨누어졌다.

사라미스와 라인델프의 장검은 양쪽 눈에 나눠 대어져 있었다. 프림베르그의 거검은 카트로이의 기다란 목을 누르고 있었고, 화이트 드래곤의 머리통 위에 뛰어 올라간 헬버트론은 뇌가 있는 부분에 장검의 끝 부분을 살짝 찍은 상태였다. 헬버트론이 장검을 그대로 쑤셔 박는다면 카트로이는 러셀런트처럼 뇌가 파열되어 깨끗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터였다.

카트로이가 빈틈없이 제압된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지크레이트를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었다.

슈우욱.

크기가 급격히 커진 인크레시아는 지크레이트의 거대한 몸을 삽시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화이트 드래곤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마법사와 데스 나이트 대 화이트 드래곤의 엄청난 접전을 관전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딱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 목격한 장면은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완벽한 드래곤 사냥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싸움이 시작될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의 승리를 예상했었다. 그들이 아는 드래곤이란 종족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기에…….

특히 카트로이의 힘을 실감했던 테렌베티 사절단 일행은 그 사실을 아예 확신했었다.

마법사 하나와 데스 나이트로 화이트 드래곤을 잡는 것은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렸다. 난데없이 세 명의 데스 나이트가 나타나서 돌격해 갈 때까지도 그들은 화이트 드래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지는 접전은 한쪽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데스 나이트들은 압도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을 밀어붙였다. 이미 동료들 수십 명을 얼음덩이로 화하게 했던 공포의 마법은 데스 나이트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사방을 종횡무진하며 화이트 드래곤의 피부를 갈가리 찢어발기는 데스 나이트들의 실력에 사람들은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앞에서 저토록 침착하고 냉정하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가 아니면 그 어떤 기사도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조금 뒤 데스 나이트들이 마법에 걸려 그 자리에 못 박혔을 때 사람들은 아쉬운 탄성을 내질렀다. 가공할 위력을 보인 데스 나이트들이 곧 소멸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마법사의 개입으로 데스 나이트들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견디다 못한 화이트 드래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장면에서부터 사람들의 벌린 입가에서는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 보는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본 드래곤의 등장에서부터였다. 마법사의 옆에서 공간의 틈새가 활짝 열리며 그 속에서 뼈만 남은 괴수, 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데스 나이트에 이어 본 드래곤까지 동원된 것이다. 하나 하나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껏 이토록 엄청난 전투를 볼 기회가 없었다.

놀라운 속도로 날아올라 화이트 드래곤을 추월한 본 드래곤은 허공에서 그대로 내려 꽂혔다. 이후의 결과는 그들이 본 대로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람들은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멍청히 서 있는 테렌베티 왕녀의 귀로 잡담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미치광이로 단정했던 자들의 대화소리였다.

햐! 이번에는 본 드래곤이로군요. 다음에는 뭐가 나올지 정말 궁금해요.

그래서 데이몬에게 드래곤의 시체가 필요했던 것이로군. 본 드래곤을 만들려면 반드시 드래곤의 시체가 필요하지.

그런데 저 본 드래곤은 일전에 사냥한 드래곤보다 훨씬 작지 않아요?

그렇군. 아무래도 저 녀석은 데이몬이 트루베니아에 건너가서 잡았다는 드래곤 같군.

화이트 드래곤보다 작은 걸로 봐서 아직까지 웜 급에 미치지 못한 녀석 말이야.

우와. 그렇다면 저번에 잡은 블랙 드래곤으로 본 드래곤을 만들 경우 엄청나게 큰 녀석이 만들어지겠군요.

그렇지. 본 드래곤은 생전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니까 말이야. 책에는 덩치가 클수록 파워와 마법저항력이 더 강해진다고 써 있더군

대화를 듣고 있는 테렌베티 왕녀는 완전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런 엄청난 용병단이 존재하고 있었니…….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데스 나이트 넷과, 9서클의 마스터 그리고 본 드래곤을 보유한 용병단이라면 어림잡아도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 봐야 했다. 그 어떤 기사단에도 꿀리지 않는 전력인 것이다.

게다가 드래곤이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크로센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여길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저 용병단원들은 드래곤을 한낱 동네 강아지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결국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아까처럼 무시해야 할지를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그들의 대화내용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끄으으.

깨어난 카트로이는 괴로운 듯 머리를 슬며시 들었다. 순간 귓전으로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죽고 싶다면 대가리를 움직여도 좋다. 어차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놈의 시체뿐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목과 정수리 부분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머리를 움직임에 따라 데스 나이트들의 장검이 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또 다른 장검 두 자루가 눈에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카트로이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평소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들에게 사냥 당하는 수모를 겪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괜히 유희를 결정했다는 후회가 물밀 듯 치밀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는 이제 꼼짝없이 죽을 때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저벅저벅.

카트로이의 머리통 옆으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눈알을 굴리자 인간 마법사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카트로이의 머리 속은 이제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아무 거리낌없이 인간을 얼음덩이로 만들어왔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인간들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입가에 모호한 미소를 머금은 데이몬은 포획된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의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어때?

-

이제 우리가 드래곤 슬레이어란 사실을 확실히 믿겠나?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말 그대로 완벽한 드래곤 사냥꾼들이었다. 공포를 모르는 데스 나이트 넷과 9서클의 대마법사, 그리고 본 드래곤을 보유한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는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카트로이는 설사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놀랍군. 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니…….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 정도로 놀랄 것까지는 없어. 나에겐 그보다 더 강력한 에인션트 급 본 드래곤도 있으니까……. 저번에 사냥한 블랙 드래곤의 시체로 한창 제조중이지.

이제 카트로이는 마법사의 말을 믿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미 그는 저들의 엄청난 힘을 온몸으로 실감한 상태가 아니던가? 저들의 실력이라면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하고도 남았기에 카트로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공포의 빛이 짙게 드리워졌다.

-이제 날 어쩔 생각인가?

데이몬의 대답에는 추호도 거리낌이 없었다.

물어보나마나 아닌가? 사로잡아야 할 필요가 없으니 죽일 생각이야. 드래곤의 시체는 상당히 비싸게 팔리거든. 아니면 본 드래곤으로 제조해도 되고…….

듣고 있던 카트로이는 등골이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곧 이승을 하직할 것이며 시체마저 본 드래곤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훨씬 컸다.

드래곤 자체가 천적이 없다시피 한 강력한 종족이었고 수천 년을 살아온 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 인간보다 수십 배 강할 수밖에 없었다. 카트로이는 결국 드래곤의 자존심을 버리고 목숨을 애걸하기 시작했다.

-살려다오.

-돈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나의 레어에는 엄청난 보물이 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날 죽이지 말아다오.

데이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칭 지상최강의 종족이라고 으스대는 드래곤의 비굴한 모습을 보니 뭔가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평소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고 아무 거리낌없이 목숨을 빼앗던 드래곤이 아니던가? 트루베니아 드래곤들의 소행을 떠올린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우린 이미 두 마리의 드래곤을 사냥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어. 네깟 녀석이 평생 모은 보물이라고 해 봐야 나에겐 푼돈에 불과해.

-그렇지 않다. 내가 사는 북부는 엄청난 귀금속 광석이 묻혀 있다. 추위 때문에 인간의 발이 닿지 못하기 때문이지. 나는 드워프들로 하여금 광산을 개발하게 해서 엄청난 보물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보물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아마 내 시체를 판다해도 그만큼 받지 못할 것이다.

카트로이가 열과 성의를 다해 설득했지만 데이몬은 조금도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화이트 드래곤이 아무리 많은 보물을 모았다 하더라도 인크레시아 속의 보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터였고 결정적으로 데이몬에겐 물욕이 전혀 없었다.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조건이로군. 나에겐 그깟 보물보다도 복수심을 충족하는 것이 더 중요해. 너희 드래곤들은 엄청난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학살했다. 마치 벌레를 밟아 죽이듯 말이야. 널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으니 이만 마음의 정리를 하도록.

-나, 난 트루베니아의 멸망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하지?

왜냐하면…….

데이몬의 눈동자는 복수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네놈이 드래곤이기 때문이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이유가 된다. 또한 네놈이 지금껏 인간을 죽인 일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네놈과 함께 온 저들의 반응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테렌베티 왕녀와 그 일행을 가리켰다.

처음 대했을 때 저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역력히 배어있었다. 다시 말해 네놈의 손에 다수의 동료들이 당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지.

카트로이의 눈망울에 절망감이 배어 나왔다. 설득해 볼 여지가 이젠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데이몬의 말은 사실이었다. 카트로이는 이곳으로 오며 다수의 테렌베티 기사들을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결국 카트로이는 죽음을 기정사실화 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 그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명령만 내리면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는 깨끗하게 이승을 하직하게 될 터였다.

그럼 잘 가라.

데이몬이 막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자, 잠깐만요.

데이몬은 말을 하려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와 카트로이 사이로 끼여든 자가 율리아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빛이 어려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율리아나는 성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아요.

단순히 드래곤이란 이유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이유가 대관절 어디에 있어요.

또 시작이군.

데이몬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떠올랐다. 덮어놓고 끼여드는 율리아나의 괴벽이 또다시 발동된 것이다. 그녀는 카트로이의 커다란 머리통 앞에 버티고 서서 데이몬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당신의 사정은 들었어요. 그런 원한이 있다면 갚는 것이 당연하겠죠. 하지만 대상이 틀렸어요. 원한을 갚으려면 죄를 범한 트루베니아 드래곤에게 갚아야지 엉뚱한 드래곤을 대상으로 갚는다는 것은 화풀이밖에 되지 못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의 되지도 않는 궤변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이놈은 사냥감이야. 사냥하는데도 이유가 있나? 노루나 토끼 같은 것을 사냥했을 때 넌 가만히 있었잖아?

사냥이란 그것으로 인해 확실한 이익이 발생했을 때 비로소 사냥이라 말할 수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드래곤을 죽이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멍청하게 반문하는 데이몬을 보며 율리아나는 허리에 손을 척 걸쳤다.

이 화이트 드래곤은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도 몇 배나 말이에요. 그렇다면 몸값을 받고 살려주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나요? 구태여 목숨까지 빼앗을 것은 없다고 봐요.

골치가 아파진 데이몬은 머리를 짚었다. 율리아나를 설득할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했던 카트로이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인간하나가 자신을 살리고자 노력하는데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순 없었다. 어쨌거나 목숨이란 누구에게도 소중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율리아나는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았다.

당신은 지금 전 트루베니아 드래곤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아르카디아의 드래곤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싶은가요? 이 화이트 드래곤을 죽인다면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는 드래곤들마저 당신을 쫓아다닐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이 날 쫓고 있는 것은 내가 놈들의 마법보고를 강탈했기 때문이지 동족을 죽여서 그런 것은 아냐.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철저히 개인 생활을 하는 놈들이지. 따라서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복수를 꾀하거나 하지는 않아. 모르긴 몰라도 이놈이 죽는다면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은 이렇게 생각할걸? 병신 같은 놈, 얼마나 멍청했으면 인간 따위에게 목숨을 잃었을까? 잘 죽었어, 이렇게 말이야.

데이몬의 말이 이어지자 카트로이의 얼굴에 다시 절망감이 배어 나왔다. 마법사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이었다. 마법사는 한 마디로 드래곤의 속성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하지만 율리아나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저 드래곤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단순한 복수심 때문에? 아니면 본 드래곤을 더 만들기 위해서?

무작정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드래곤들과 원한을 맺을 수도 있지만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죠.

참지 못한 데이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드래곤을 살리는 것이 목적인가

율리아나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몸값을 받고 풀어주세요. 어차피 당신에겐 본 드래곤이 둘이나 있잖아요. 충분한 몸값을 받는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그럴 수는 없어. 모르긴 몰라도 이놈은 이곳으로 오며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거야. 함께 온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고.

그거야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율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테렌베티 왕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멍청히 서 있던 왕녀가 당황한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 난…….

율리아나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당신들이 이 드래곤과 같이 온 사람들이죠? 한 가지 묻겠어요. 저 드래곤이 이곳까지 오며 당신 일행을 죽인 일이 있나요?

솔직하게 말해줘요. 드래곤의 생사가 달린 문제니까…….

테렌베티 왕녀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물론 드래곤의 손에 여러 명의 기사들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합당했다. 하지만 왕녀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거기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들이란 엄청난 파괴력과 거기에 걸 맞는 높은 자부심을 가진 종족이기 때문에 은원 관계가 확실하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원한을 맺은 인간이라면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갚아주고, 은혜를 입었다면 확실하게 베푸는 것이 드래곤의 성정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드래곤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기사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고, 한 번 죽은 자들을 되살릴 수 없는 법이니 드래곤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약간 돌려보면 또 다른 해결방법이 있었다. 테렌베티 왕녀에게는 충분히 그것을 감안할 만한 지혜가 있었다.

여기서 드래곤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그리하여 드래곤이 살아난다면 그 파급효과는 무궁무진할 터였다. 목숨을 살려준 은혜로 드래곤은 테렌베티 왕국에 확실한 반대급부를 보장할 것이 틀림없었다. 얼음덩이로 변한 기사들의 일을 묻어주기만 한다면 드래곤은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테렌베티 왕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드래곤은 이곳까지 오며 단 한 명의 일행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데이몬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휘하 사절단 개개인의 반응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왕녀를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테렌베티 왕녀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곳까지 오며 몇몇 기사들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다름 아닌 눈사태 때문입니다. 드래곤은 오히려 그들은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요. 하지만 힘이 닿지 않아 그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테렌베티 왕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데이몬을 향해 공손한 태도로 예를 올렸다.

저 역시 간청 드리겠습니다. 제발 드래곤을 살려주십시오.

그녀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는 무척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이다.

그것 봐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드래곤을 죽인다면 밝혀지는 사실은 한 가지 밖에 없어요.

그게 뭔데?

당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육자라는 게 증명되는 것이지요.

정말 어이가 없군.

기가 막힌 나머지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드래곤을 괜히 포획했나,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떨어지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죽여버렸다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다 못해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

글쎄?

데스 나이트들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기색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들 역시 드래곤에 대해 크나큰 원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포획해 놓은 화이트 드래곤이 복수의 대상이 아니란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원수는 엄연히 트루베니아를 멸망시킨 드래곤들이었다. 포획해 놓은 애송이 드래곤을 죽여 봐야 원한을 갚는데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다. 네 녀석이 지불할 수 있는 몸값이 얼마나 되지?

고맙다는 눈빛으로 연신 율리아나와 테렌베티 왕녀를 쳐다보고 있던 카트로이에겐 귀가 확 트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족히 20톤 정도는 될 것이다. 정련된 금궤로 말이다.

금궤라고? 젠장. 황금은 무게가 많이 나가잖아? 그것말고 값나가는 보석 종류는 없어? 쓸만한 아티팩트도 괜찮고…….

카트로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황금을 마다하는 인간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내려 깔았다.

-보석 종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광산에서 채굴되는 것이 모두가 금 종류이니 말이다.

젠장 쓸모 없는 금붙이 따위를 어디다 쓰지? 나에겐 그것보다 드래곤 하트가 훨씬 필요한데 말이야.

데이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황금을 보고 쓸모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역사를 뒤져봐도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데이몬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카트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물론 카트로이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입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결정 여하에 따라 목숨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이봐. 대장.

데이몬이 부르자 카심이 얼른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황금 20톤 정도면 골드화로 따져서 얼마나 되지?

한동안 머리를 굴린 카심은 겨우 금액을 추정해 낼 수 있었다.

대략 2만 골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얼마 되진 않는군.

데이몬의 말에 카심은 입을 딱 벌렸다. 말이 2만 골드이지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거금을 두고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니…….

자네 생각은 어떤가? 2만 골드 받고 풀어주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냥 죽여버릴까? 난 잘 모르겠으니 대장이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어쨌거나 명령권자는 대장이니 말이야.

카심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데이몬은 지금 많은 왕녀들이 모여 있는 곳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저들의 머리 속에는 카심 용병단이란 명칭이 뚜렷하게 새겨질 것이 분명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지만 카심은 억지로 얼굴표정을 고쳤다. 물론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지만 말이다.

크흠, 흠. 그 정도면 충분한 몸값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데이몬은 두말하지 않았다.

뭐 대장이 결정했는데 내가 할 말이 있겠나? 그렇게 하지. 하지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어. 그것은 나중에 얘기하지. 물론 들어주겠지?

카트로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만큼 그 어떤 조건이라도 거부할 수 없었다.

-내 힘이 닿는 한 들어주겠다.

카트로이가 승낙하자 데이몬은 그리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았다.

풀어줘라.

데스 나이트들은 거칠게 으름장을 놓으며 검을 거뒀다.

애송이 드래곤. 운 좋은 줄 알아라.

스릉.

데스 나이트들이 뒤로 물러나자 카트로이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몸을 겨누고 있던 네 자루의 장검 때문에 그 얼마나 가슴을 조였던가? 얼마나 긴장했던지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냉랭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힐링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허락하겠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즉시 실행하라.

-알겠다.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힘을 가진 자는 자신이 아닌 인간이었으므로. 치료에 몰두하는 카트로이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잘 되었군. 이 참에 극한지인 북부에 가는 것이 낫겠어. 그곳의 냉기라면 본 드래곤을 충분히 완성시킬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데이몬은 꿍꿍이가 있어 화이트 드래곤을 살려둔 것이었다.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면 아무리 율리아나가 만류했다 하더라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화이트 드래곤의 목을 잘라냈을 것이다.

드래곤과의 두 번에 걸친 접전. 거기에서 데이몬은 공중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와 데스 나이트들의 조합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공중에서 가해지는 공격에는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유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는 본 드래곤은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데이몬으로써는 서둘러 본 드래곤을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고 화이트 드래곤을 살려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의 서식지는 만년설로 뒤덮인 극히 추운 지방이다. 그곳이라면 본 드래곤을 완성시킬 냉기가 충분히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본 드래곤에게 냉기를 충분히 흡수시킨다면 더 이상 태양 빛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욱 빠르고 높이 날 수 있을뿐더러 프로스트 브레스의 위력도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에인션트 급 드래곤과 공중전을 벌이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게다가 그 동안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에서 용병들을 수련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물론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화이트 드래곤은 데이몬의 요구를 섣불리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의 노림수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철저히 개인적인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카트로이가 치료를 마쳤다.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긴 했지만 데스 나이트에게 입은 상처는 대부분 아문 상태였다. 상처를 치료한 카트로이는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테렌베티 왕녀를 쳐다보았다.

-고맙다.

별 말씀을…….

-날 구해준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다.

드래곤의 진심 어린 감사표시에 테렌베티 왕녀는 슬쩍 얼굴을 붉혔다. 앞으로 드래곤에게서 받을 보상을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였다. 이제 그녀가 소속된 테렌베티 왕국은 앞으로 영원히 드래곤의 보살핌 속에 놓이게 될 터였다. 드래곤의 손에 죽은 기사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죽음을 달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하듯 카트로이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값이 해결되는 즉시 테렌베티 왕국으로 찾아가서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돌아가서 부탁할 소원을 생각해 놓거라.

알겠습니다.

카트로이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을 살린 일등 공신 중 하나였다.

-너도 왕녀의 신분을 가지고 있느냐?

그래요. 엘리시아 산맥에 위치한 카르셀 왕국의 왕녀랍니다.

-엘리시아 산맥이라면 무척 먼 곳이로군. 날 구해주었으니 그 대가로 너에게도 역시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 단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드래곤의 약속이므로 한 번 맹세한 이상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질 것이다.

율리아나의 얼굴에 함지박 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래곤이 들어주는 소원이라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호의에 감사드려요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나와 함께 가서 몸값을 받아가겠는가?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해결할 문제가 하나 남았거든…….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몸값을 받으러 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군.

그게 뭐죠?

의아한 듯 반문하는 율리아나를 보며 데이몬은 간단한 손짓으로 주위에 결계를 쳤다. 둘은 곧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느긋하게 작업(?)에 들어갔다.

난 네 요구대로 드래곤을 살려줬다. 그러니 너도 내 요구를 하나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율리아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흑마법사의 요구가 뭔지 듣지 않아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 설마…….

데이몬은 파랗게 질린 율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맞았어. 매일 아침 볼에다 뽀뽀 한 번과 '아저씨' 알지?

미, 미쳤군요. 나더러 그런 소름끼치는 짓을 또다시 하란 말이에요. 난 못해요.

정말이냐?

그래요. 죽어도 못해요.

율리아나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데이몬의 얼굴이 별안간 냉랭해졌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이 드래곤을 죽여야겠군. 이봐. 지금 즉시 놈의 모가지를 잘라내.

고개를 돌려 데스 나이트를 부르려는 찰나에 율리아나가 다급하게 데이몬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물론 결계 때문에 음성이 전해질 턱이 없었지만 율리아나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정말 이러기예요. 정말 치사해요.

내가 치사한 줄 이제 알았어?

눈을 치켜 뜨며 항의하던 율리아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신은 천고의 악당이에요. 무지무지 비열한 악당.

고마워. 비열한 악당이란 말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 중 하나야.

느물느물 흘러나오는 데이몬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결국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데이몬은 그녀에게 있어 철저한 천적이었다. 이제 그녀는 꼼짝없이 아침마다 데이몬의 볼에 입을 맞추며 상냥하게 '아저씨'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녀가 거절한다면 드래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약속 또한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마음을 정리한 율리아나는 선심이라도 쓰듯 한 마디 내뱉었다.

좋아요. 저번처럼 열흘동안만 할 게요. 괜찮죠?

데이몬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게는 안되지. 아무리 양보해도 1년 동안은 받아야겠어.

미쳤어요? 보름 이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락할 수 없어요.

좋아. 6개월.

지루한 협상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기한은 1달로 결정되었다. 율리아나는 풀죽은 기색으로 떠듬떠듬 내뱉었다.

좋아요. 하지만 내일부터 시작할게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죽어도 못하겠으니.

뭐, 그러던지.

소기의 성과를 거둔 데이몬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율리아나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데이몬의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일을 끝낸 데이몬은 결계를 걷은 뒤 늘어선 용병들에게 고함을 쳤다.

자 모두들 드래곤의 등에 탑승하라. 몸값을 받으러 가야지.

그 말에 놀란 것은 카트로이였다.

-나, 날 타고 가겠단 말인가?

왜? 싫어.

-그, 그건 아니지만…….

네놈을 어떻게 믿고 공간이동을 맡기겠어? 그러니 잔말말고 우릴 태우도록…….

용병들을 한 번 둘러본 데이몬은 내친 김에 으름장을 놓았다.

언제든지 본 드래곤을 꺼낼 수 있으니 행여나 우릴 떨굴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알겠나?

-물론이다. 난 드래곤. 한 번 약속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어기지 않는다.

좋아.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탔다.

그의 뒤를 이어 데스 나이트가 하나씩 탑승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인크레시아에 들어가지 않고 동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드래곤의 등에 탄다고 생각하니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안 갈 거야

네, 네 갑니다.

카심이 후닥닥 달려와 드래곤의 등에 뛰어올랐다. 대장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겁이 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별 거부감 없이 탔고 미첼을 비롯한 나머지 용병들도 하나 둘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결국 드래곤의 등에 모두 몸을 실어야 했다. 멍하니 쳐다보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이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그럼 출발. 어디 한 번 드래곤의 몸값을 받으러 가볼까?

-날아오르겠다. 떨어지지 않도록 잘 붙잡아라.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워낙 덩치가 컸기에 일행을 태우고도 전혀 힘겨워하지 않았다.

화르르

날개를 활짝 펼친 화이트 드래곤은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곧장 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햐. 상쾌하군.

내 평생에 드래곤의 등에 타 볼 줄이야.

용병들은 얼굴에 와서 부딪히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생전 처음 행하는 비행을 즐겼다. 그들의 목적지는 일년 내내 만년설에 뒤덮여 있는 북부였다.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을 사람들은 눈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믿어지지 않는 듯 멍한 표정으로 말이다.

세, 세상에…….

노관리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카르셀 왕녀 일행을 접대했던 바로 그 관리였다. 그는 지금 일생에 걸쳐 놀랄 일들을 단 하루에 겪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드래곤을 상대해 보았고, 그 드래곤이 사냥 당하는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본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드래곤의 등을 타고 떠나는 장면까지 목격해야 했다. 그것만해도 놀랄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앞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분의 권력자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동을 통해.

마법진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소 안정성이 있긴 하지만 고위 인사들에겐 보편적으로 공간이동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안전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위급이라 칭할 수 있는 이가 공간이동을 통해 온다고 하니 노관리의 얼이 빠질 법도 했다.

'서, 설마 내 보고 때문에 온 것일까?'

운집한 왕녀들과 마찬가지로 펠젠틴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 역시 드래곤 사냥 장면을 끝까지 목격했다. 물론 대부분의 관리들이 정신 없이 사냥장면을 감상하기 바빴지만 그들 중엔 임무수행에 투철한 자가 전혀 없진 않았다. 지금 마법진 앞에 서 있는 노관리가 바로 그였다.

'이, 이 일은 반드시 수도에 알려야 해.'

사냥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정신이 번쩍 든 노관리는 항상 휴대하는 수정구슬을 통해 마법통신을 시도했다. 마법통신의 시전이 가능한 초급 마법사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벌어지는 드래곤 사냥은 일목요연하게 펠젠틴에 알려졌다.

서, 설마 그런 일이…….

통신을 받은 펠젠틴의 마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노관리 역시 상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드래곤 사냥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통신담당자는 그리 탐탁지 않은 눈치로 통신을 끊었다.

일단 보고는 올려보겠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엄중한 문책을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걱정 마시오. 나말고도 많은 목격자들이 있으니 말이오.

노관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통신을 접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 밖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통신을 마친 노관리가 몸을 돌리려던 찰라 다시 수정구에서 빛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노관리가 얼른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그곳에는 아까의 마법사가 얼이 반쯤 빠진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급했는지 그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의사를 전달했다.

지, 지급이오. 바, 바로 지금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신다고 하오. 호위 기사와 마법사까지 합치면 모두 일백 명 가까이 될 테니 맞을 채비를 하도록 하시오.

페, 페르슈타인 공작전하라고요?

노관리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면 명실상부한 크로센 제 1의 권력자였다. 이미 그의 명성은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발렌시우스 황제나 조만간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드비어스 황태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황제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크로센 기사단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실질적인 크로센 제국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때문에 노관리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몸까지 꼬집어봐야 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마법진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수도인 펠젠틴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노관리는 그려진 좌표가 어긋나지나 않았는지 빠짐없이 점검했다.

쓰쓰쓰.

펼쳐진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무리가 일어나자 노관리는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오시려나 보군.

혼잣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진은 눈부신 광망에 휩싸였다.

번쩍.

빛이 사라지자 거기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는 화려한 복장을 걸친 노인 한 명이 서 있었고 그 주위를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빼곡이 메우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는지 기사들은 전투준비를 완전히 갖춘 다음이었다.

뽑아든 검에서 솟아오른 푸른 기운을 보아 하나같이 소드 마스터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아무래도 듀크 기사단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를 모조리 데리고 온 듯 싶었다. 게다가 실력이 뛰어나 보이는 마법사들도 대거 공작과 동행한 상태였다. 궁정마법사들은 아니었지만 실력만큼은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 높은 마법사들. 그들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개인 마법사 군단이었다.

듀크 기사단이 아직까지 크로센 기사단을 감당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공작이 보유한 마법 군단의 규모는 이미 궁정마법사 집단을 추월한 상태였다. 물론 대마법사 필라모네스에 필적하는 실력자는 없었지만 그 외의 전력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헬프레인 가(家)의 재력은 이미 황실을 능가한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같은 소속의 마법사들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다. 노관리 자신도 낮은 서클의 마법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공작을 호위하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7서클을 능가하는 고위급 마법사였다.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호위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을 간파한 순간 노관리의 무릎은 자신도 모르게 꿇려졌다. 상대는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신분을 가진 이였다.

고, 공작전하를 뵈옵니다.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안전에 특히 신경을 쓰는 그가 공간이동을 통해 레이토나에 나타난 것이다. 주위를 슬쩍 훑어본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짜고짜 노관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누, 누구 말씀이신지?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짜증기가 어렸다.

드래곤 슬레이어들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흑마법사와 데스 나이트들. 어째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놀랍게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목적은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를 회유하기 위해 그가 직접 온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 발 늦고 말았으니……. 노관리는 마치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이미 드래곤의 등에 타고 이곳을 떠났습니다.

드래곤의 등에 타고?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이 커졌다. 설마 드래곤을 타고 이곳을 떠났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노관리가 보고가 들어갔던 시점은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사냥을 막 끝마친 때였으므로 공작은 슬레이어 일행이 아직까지 이곳에 있을 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근의 병력을 움직여 데이토나 부근을 에워싸긴 했지만 공중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공작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난감하군. 지금쯤이면 그들이 한창 드래곤의 시체를 해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드래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노관리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깜짝 놀랐다.

사, 사냥에 실패했단 말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자초지종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에, 몸값을 받고 풀어주다니……. 비록 2만 골드가 거금이긴 하지만 드래곤의 사체는 충분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텐데…….

페르슈타인 공작의 생각은 극히 지당한 것이었다. 이미 그는 크로센 제국 제일의 재력가였으므로 2만 골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다. 1년에 거둬들이는 소작료만 하더라도 그 액수를 능가하는 것이다. 공작에겐 황금보다는 고급무기를 만들 수 있는 드래곤 본이나 드래곤 하트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에 좀처럼 아깝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아쉽군. 웜급 드래곤 한 마리 분량의 드래곤 본이면 많은 기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을 텐데……. 실력이 떨어지니 무기라도 좋아야지. 그건 그렇고. 그들은 어디로 갔나?

죄송하지만 자세한 것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북부에 위치한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로 갔으리라는 짐작 밖에는…….

하긴, 날아서 갔다면 뒤쫓을 방법이 없겠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낙심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반드시 흑마법사를 회유하겠다는 각오로 오긴 했지만 당사자들이 사라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몸값을 받고 나면 그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때를 노려야겠군.'

마음을 정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시 마법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간다.

옛.

복명한 기사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공작은 느긋하게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것을 보던 마법사들이 지체 없이 워프를 전개했다. 혹시라도 행해질지도 모르는 마법방해를 위해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간이동을 캐스팅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마법진에서는 눈부신 광망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쓰쓰쓰.

조금 뒤 공작일행의 모습은 그곳에서 지워져버렸다.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르카디아 제일의 권력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쉽게 보기 힘든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놀랍군.

페르슈타인 공작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사람들은 아직까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 놀라운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본국에 알려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수많은 왕녀들이 운집한 곳에서 벌어진 드래곤 사냥. 그 일을 해 낸 카심 용병단에 대한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아르카디아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워낙 목격자들이 많았기에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것이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카심 용병단원들은 수많은 왕녀들과 그 호위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웜급 화이트 드래곤을 사냥했다고……. 그 뿐인 줄 알아? 완벽히 포획한 상태에서 드래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지불한다고 하자 그들은 미련 없이 드래곤을 살려줬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딱 벌려야 했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드래곤을 결코 요행으로 잡은 것이 아니란 말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말이 돼. 왜냐하면 그들은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데스 나이트 넷과 거대한 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네. 게다가 9서클의 대마법사가 용병단의 구성원이야. 그 정도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지 않겠나? 손발이 척척 맞았다는 것을 보니 벌써 드래곤을 여럿 사냥한 모양이야. 본 드래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겠어?

노, 놀랍군. 세상에 그런 용병단이 있다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오직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엄청난 용병단이 출현한 것은 아르카디아 역사상 전무했다. 심지어 역사가 깊은 트루베니아에서조차 이런 용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그 어떤 왕국의 근위기사단과도 맞붙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때문에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의 국왕들은 카심 용병단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용병단만 고용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애가 타는 국왕은 단연 테르비아 국왕이었다. 진작에 흑마법사를 끌어들였다면 이처럼 전 대륙의 관심이 집중되는 일이 없었을 터였다. 지금에 와서 흑마법사를 회유한다면 주변국들이 바짝 긴장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깝군. 정말 아까워.

하지만 테르비아 국왕은 그래도 흑마법사를 회유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야심을 충족시켜 줄만한 인물은 오직 흑마법사 뿐이었다.

대륙의 패권에 관심이 있는 국왕이라면 지금쯤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한다. 아르카디아 전역에 파견된 정보망을 총 동원하라. 다른 일에 가장 우선해서 흑마법사의 종적을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은 아르카디아 제일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페르슈타인공작 뿐만 아니라 테르비아, 펜슬럿, 테제로스 등 쟁쟁한 강대국들의 정보부에서 대거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은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원들은 지금 척박한 북부의 오지에서 한창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썽꾸러기 고용주를 떼어놓을 찰나에 뜻밖의 일이 생겨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1년 뒤, 황태자비 간택식이 거행될 때까지 저희들의 호위를 받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율리아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카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깨를 폈다.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한 듯한 모습이었다.

바로 그래요. 내가 요구하는 것은 철저히 계약서 내용에 기초한 것이에요. 그러니 당신들은 반드시 이행해야 해요.

'미치겠군.'

카심은 얼굴을 팍 구겼다. 율리아나의 억지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큰 오산에 불과했다. 그녀는 전혀 얼토당토않은 억지로 카심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은 분명히 내가 식에 참가할 때까지예요. 그러니까 계약은 1년 뒤 황태자비 간택식이 벌어질 때가 되어야 종료되는 거죠. 알겠어요?

그것은 명백한 억지입니다. 그 어떤 용병단도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황태자비 간택식이 저희 때문에 미루어진 것은 아니잖습니까?

카심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황당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아나가 전혀 뜻밖의 일을 들먹이며 계약기간을 연장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둑해진 재정으로 말미암아 여분의 돈까지 주어가며 율리아나를 떼어놓으려고 했던 카심이었다. 지금껏 이리로 오며 그녀의 고집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겪었던가?

비록 그녀 덕택에 흑마법사 데이몬의 일행이 되긴 했지만 다시 동행하는 것은 카심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율리아나는 그 정도로 골치 덩어리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계약기간이 연장되게 생겼으니…….  율리아나는 계약서에 기한이 명확히 명시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계약기간을 내년까지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난 내년까지 경호를 받아야겠어요. 황태자비 간택식이 다시 열릴 때까지 말이에요.

'골치 아파 죽겠군.'

할 말이 없어진 카심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율리아나의 요구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계약서 작성을 꼼꼼하게 하지 않은 것이 그가 범한 최대의 실수였다. 계약서에 뚜렷한 기한 없이 그저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할 때까지라고만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율리아나는 그 문제를 집요하게 걸어 넘어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썬더버드 용병단에 있을 때 계약하는 요령을 좀 알아둘 걸 그랬군.'

자고로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이미 늦어버린 법. 큰 용병단에는 전문적으로 계약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으므로 일선용병 부대장인 카심이 계약을 해 본 일도 없을뿐더러 계약 요령에 대해 알 턱이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는 데이몬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둘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 그것을 본 카심의 심사는 더욱 복잡해졌다.

'골치 아프군. 데이몬은 분명히 그녀와 함께 있는 쪽을 원할 테니까…….'

따지고 보면 이번 문제는 전혀 골머리 썩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상당한 돈을 줄 생각이었으므로 깨끗하게 계약해지를 해 버리면 그 뿐이었다. 10골드에 계약을 맺었으니 그 세 배인 30골드만 주면 그들 사이의 계약관계는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런 다음 서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카심이 봉착한 최대의 고민은 바로 데이몬 때문이었다. 관심이 있건 없건 간에 데이몬의 주 관심사는 율리아나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녀도 이제 만성이 되었는지 그의 집요한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말해 냉정하게 그녀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카심이 처한 입장이었다.

'할 수 없지. 앞으로 또 얼마나 당할지는 모르지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년 황태자비 간택식이 열릴 때까지 왕녀님을 계속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율리아나는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미첼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 그를 슬쩍 쳐다본 카심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건진 것이 전혀 없진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미첼의 검술교습을 계속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썩 나쁘진 않군.'

논쟁이 끝나자 데이몬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얘기가 끝났나?

예.

1년 더 데리고 있기로?

그렇습니다. 첫 청부인지라 깔끔히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혀를 찼다.

쯔쯔. 엄청나게 손해보는 장사로군. 단돈 10골드로 저 골칫덩어리를 1년 넘게 떠맡아야한다니 말이야.

뭐가 어째욧.

화가 났는지 율리아나는 허리에 손을 척 걸친 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엄포에 쉽사리 겁먹을 데이몬이 아니었다.

솔직히 10골드론 너희들이 1년 동안 먹을 밥값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대장이란 녀석 마음만 무진장 좋지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흥.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밥벌이는 우리가 할 테니까…….

비록 요구조건은 관철시켰지만 그리 떳떳하지는 못했던지 율리아나는 눈총만 주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데이몬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않는 율리아나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본 데이몬은 카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 써 준 것은 좋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보나마나 자넨 나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 연장을 했겠지?

카심의 얼굴에 쑥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앞으론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저 계집아이에겐 용모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말이야. 알겠나?

데이몬은 무표정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틈나는 대로 율리아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외모뿐이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섭섭할 것은 없었다. 다프네와 율리아나는 그저 생김새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존재란 사실을 데이몬은 잘 알고 있었다. 난처해진 카심이 떠듬떠듬 핑계거리를 늘어놓았다.

뭐, 그것보다도 계약을 연기하게 되면 부하들이 미첼에게 검술교습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있지 않습니까? 전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데이몬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주는 카심의 마음씀씀이가 가슴 깊이 와 닿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인정에 휘둘리는 경향이 다소 있긴 했지만 카심은 정말 훌륭한 리더라고 봐야 했다.

항상 구성원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그의 능력은 데이몬도 익히 인정한 상태였다.

'하긴 그 때문에 내가 동료로 삼았으니까…….'

고개를 뒤흔든 데이몬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자네 생전 처음 드래곤의 레어에 와 본 소감이 어떤가?

그, 그렇군요.

카심은 그때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자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계약 문제로 입씨름을 벌였으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카심은 상기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훑어보았다. 순식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곳이 마,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레어라니……

북부의 오지에 위치한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는 카심의 얼을 빼 놓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드래곤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듯 방대한 규모로 지어진 레어는 전체가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가히 얼음궁전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일행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생전 처음 보는 드래곤의 레어를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드래곤의 레어는 인간들에겐 철저히 금역(禁域)인 곳이었으므로 호기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등에 탑승한 상태로 레이토나를 떠나온 일행들은 제법 오랫동안 비행해야 했다. 척박한 오지인 북부는 그 정도로 멀었다. 꼬박 하루를 비행하고 나서야 일행들은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북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의에 충실한 종족이란 것을 증명하듯 카트로이는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고 일행을 레어로 고이 안내했다. 레어로 데리고 가서 몸값만 지불하면 지긋지긋한 사냥꾼들이 곧 떠날 것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수 천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레어에 도착한 카트로이는 일행을 내려준 뒤 다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라. 광산에 가서 금궤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다.

금궤를 보고(寶庫) 속에 보관한 게 아니었어?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겁기 때문에 금궤를 이곳에 보관하지 못한다. 바닥이 금궤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그동안 네 녀석의 레어나 감상해야겠군.

-좋을 대로.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고 일행은 이렇게 드래곤의 레어에 남겨지게 되었다. 평생에 한 번 잡을까 말까 한 기회였기 때문에 용병들은 정신 없이 드래곤의 레어를 감상하는데 바빴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입씨름에 들어간 카심과 율리아나를 제외하고…….

캬. 정말 멋지군. 어떻게 이런 장관을 연출할 수 있지?

오직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로군.

어른 열 명이 손을 잡아도 에워싸지 못할 듯한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천장을 단단히 떠받들고 있었고 온갖 몬스터나 유사종족을 조각해 놓은 얼음 상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깎아지른 듯 한 벽과 족히 50미터는 될 듯한 천장은 한 눈에 봐도 인간들은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수다쟁이 패터슨이 몸을 덜덜덜 떨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이, 이 모든 것을 드, 드래곤이 만들었겠지요?

그, 그렇진 않을 거야. 아, 아마도 드워프를 시켰겠지.

카심 역시 이를 딱딱 부딪히며 몸을 떨고 있었다. 드디어 추위를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북부 깊숙한 곳이었고 숨결이 얼어 콧수염에 달라붙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 바람만 불지 않을 뿐이지 제대로 된 보호장구 없는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말 그대로 전무했다.

그들은 지금껏 드래곤의 등을 타고 날아오며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데이몬이 화이트 드래곤의 등에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실드를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날아가 버렸고 일행은 북부의 에는 듯한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버틸 만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냉기가 뼛속 깊이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된 방한장비를 갖출 틈이 없었으므로 용병들은 심각하게 추위를 느껴야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느낀 데이몬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많이 추운가 보군.

그, 그렇습니다. 이, 이곳은 정말 춥군요.

아닌게 아니라 용병들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숨결이 얼어붙어 콧수염에 얼음덩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떠는 모습은 추위가 참기 힘들 정도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멀쩡한 것은 오로지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들뿐이었다. 언데드인 그들이 추위를 느낄 턱이 없었고 데이몬은 이미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미첼은 그래도 참을 만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수준에 오르지 못한 용병들에게 추위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율리아나는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길게 한숨을 내쉰 데이몬이 잠자코 마나를 재배열했다.

할 수 없지.

그 때 카심이 다급하게 데이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시퍼렇게 언 얼굴이었지만 카심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혹시 결계를 치시려는 것 아닙니까?

그렇네. 일단 추위는 막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바닥을 보십시오.

카심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바닥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단단한 얼음덩이 같았지만 자세히 쳐다보니 얼음 저편으로 물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얼음이 워낙 두터웠기 때문에 유심히 쳐다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을 간파한 순간 데이몬은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 레어는 호수 위에 지어놓은 것이로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원래 그는 결계를 치고 그 속에다 화염의 마나를 재배열해서 공기를 데우려고 했었다. 만약 그랬다면 온기에 얼음이 녹아버렸을 터였고 일행은 큰 곤경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뼛속조차 얼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그대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카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금궤를 이곳에 두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보군. 아무튼 뭔가 방도를 찾아야겠어.

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얼싸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율리아나조차 미첼과 꼭 껴안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극도의 한기 때문에 드러난 피부가 거무스름하게 죽어들고 있었다. 데이몬은 결국 그들을 레어 밖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레어에서 나가는 게 낫겠군. 물이 없는 곳에다 결계를 쳐야 하니…….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위가 얼마나 혹독했던지 발이 얼어 하나같이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에게 조력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너희들이 저들을 좀 부축해 줘야겠어.

빌어먹을……. 창고지기도 모자라서 이젠 짐꾼으로 부리기냐?

헬버트론이 툴툴거리며 다가와서 카심을 들쳐업었다.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도 거의 실신 상태인 일행을 하나씩 어깨에 둘러맸다. 그들은 그 상태로 레어 밖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되겠군.

탐색 마법을 펼쳐 물 위가 아닌 곳을 찾아낸 데이몬은 즉시 결계를 쳤다.

쓰쓰쓰쓰.

푸른 빛 장막이 일행의 주위를 외부의 공기와 빈틈없이 차단했다. 그것을 확인한 데이몬이 수인을 맺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결계 속에 존재하는 화(火)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데이몬의 의도대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재배열 된 마나는 내부의 공기를 급속도로 데우고 있었다.

화르르르.

공기의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바닥의 얼음덩이가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 위가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카심이 고마움을 밝혔다.

고맙습니다. 이제 살 것 같습니다.

어지간한 대장이라도 추위만은 못 견디나 보군.

카심은 쑥스러운 웃음을 떠올렸다. 북부의 추위가 이토록 매서울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는 전투보다도 생존이 우선이었다.

북부가 왜 죽음의 오지로 남아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는 인간은 제대로 활동하기 힘들죠. 그 때문에 다수의 아이스 트롤들이 서식할 수 있는 것이고요.

아이스 트롤이라고?

아이스 트롤이란 말에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물론 그가 아이스 트롤을 모를 리가 없었다. 500년 전 용사대와 함께 베르하젤 신전을 찾아갈 때 맞닥뜨린 몬스터가 바로 아이스 트롤이고 당시 용사대는 이 교활한 몬스터에게 다수의 기사를 잃어야만 했다.

자네 혹시 북부에 와 본적이 있나.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임무수행을 위해 한 번 온 적이 있습니다. 북부의 초입에 위치한 카토 왕국의 청부 때문이었죠. 그 때 카토 정규군과 합동으로 아이스 트롤 토벌전을 벌였습니다. 이곳만큼은 아니지만 그곳도 상당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토벌은 성공했나?

카심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이스 트롤은 상당히 교활한 몬스터입니다. 전투력 자체도 만만히 볼 수 없지만 워낙 치고 빠지는데 능한 놈들이라…….

전사자가 많았는가?

예. 출동한 용병들 중 삼분지 일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북부에서의 청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받지 않는 것이 썬더버드 용병단에겐 철칙이 되었지요.

카심은 묵묵히 그 때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사상자들 대부분은 아이스 트롤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추위 때문에 당했습니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거든요. 카토 왕국의 정규군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금속제 갑주를 걸친 자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털가죽으로 몸을 칭칭 감싼 상태였거든요. 심지어 방패도 나무에 가죽을 두른 것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추운 지방에서 금속제 갑주는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지. 기껏해야 살가죽이 달라붙어 찢기지 않으면 다행이니 말이야. 게다가 냉각된 상태에서 금속갑옷은 잘 깨어지는 경향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날카로운 파편 때문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지.

어? 알고 계셨습니까?

데이몬이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정확히 짚어내자 카심은 적잖이 놀랐다. 직접 전투를 치러본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둘러댔다.

오래 살았으니 그만큼 아는 게 많아야겠지? 그건 그렇고 아이스 트롤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보게.

예.

카심은 아이스 트롤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데이몬이 관심을 가진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보온효과가 무척 뛰어납니다. 하지만 구하기가 극히 어렵죠. 워낙 교활한 놈들이라 쉽사리 잡히지 않거든요. 때문에 카토 왕국에서도 지휘관 급에게나 겨우 지급한다고 들었습니다. 일반 병사들은 구하기 쉬운 곰이나 여우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더군요.

그래? 잘 되었군. 이 참에 아이스 트롤이나 몇 마리 사냥해 올까? 마냥 결계 속에서만 생활할 수 없는 노릇이니 가죽을 벗겨 입을 옷을 만들면 되겠군. 남으면 카토 왕국에다 팔면 될 테고…….

데이몬의 말에 카심은 반색을 했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견디기가 훨씬 괜찮을 테지요.

아이스 트롤이 비록 잡기 힘든 몬스터라고 하나 데이몬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카심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고도의 마법사이므로 아이스 트롤이 눈 속에 몸을 숨겨봐야 헛일인 데다가 그에겐 막강한 언데드 전사들이 있다.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듀라한인 윈슬럿만 내세워도 아이스 트롤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언데드는 아무리 춥더라도 몸이 얼거나 동작이 둔화되는 일이 없다. 이른바 언데드가 가진 최고의 장점인 것이다. 데이몬도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이 빠르다고 하나 언데드에겐 통하지 않을 거야. 안 그런가?

그렇죠.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헬버트론이 안광을 짙게 내뿜었다.

우리를 행여나 아이스 트롤 사냥에 투입할 생각 따윈 하지 말기 바란다. 사냥꾼 역할까지 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

흥.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걱정하지 마. 아이스 트롤 따위는 윈슬럿만 내세워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으니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내 카트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 밖에 결계를 친 채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일행을 쳐다 본 카트로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밖에 나와있는 거지?

데이몬의 얼굴에 성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드래곤만 대하면 괜히 부아가 치미는 데이몬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 보나마나 네놈은 우릴 수장시킬 계획이었지? 사냥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말이야.

카트로이에겐 전혀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토록 추운 곳에서 우릴 호수 위에다 올려놓는다면 뻔한 것 아니겠어? 추우니까 결계를 친 뒤, 보기 좋게 물 속으로 가라앉으라고 말이야.

그때서야 이유를 알아차린 카트로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이 추위에 약하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군.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냐. 보다시피 북부에서 이처럼 평평한 곳은 얼어붙은 호수 위밖에는 없으니까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은 분명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난 벌써 3천년 전에 이곳에 자리잡았다. 아마도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일 것이다. 네가 아무리 오래 살아왔다 하더라도…….

묵묵히 늘어놓는 카트로이의 대답에 데이몬은 말문이 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데이몬이 아무리 쏘아붙인다 해도 카트로이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두자. 벨 없는 드래곤과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그런데 넌 왜 드래곤을 그토록 미워하는 거지?

눈치 없이 질문을 늘어놓는 카트로이에게 데이몬은 싸늘한 눈총을 보냈다. 움찔한 카트로이가 입을 닫자 데이몬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잔말말고 가지고 온 보물이나 풀어보도록…….

-알았다.

카트로이는 들고 온 나무상자들을 내려놓았다. 드래곤의 덩치가 워낙 거대해서 작아 보일 뿐이지 상자의 크기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사방 1평방미터 크기의 상자 40여 개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은 카트로이는 묵묵히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상자 하나에 황금 반 톤씩 들어있다. 도합 40개이니 정확히 황금 20톤이지. 이로써 내 몸값은 모두 지불한 셈이다. 경량화 마법을 걸어놓았으니 들고 가기가 그리 힘들진 않을 것이다.

데이몬은 상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그건 그렇고 올려다보려니 머리가 아프군. 아까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게 어때?

-내게 볼일이 더 있는가?

물론이다.

데이몬의 대답에 카트로이는 머리를 한 번 뒤흔든 뒤 마나를 재배열했다. 화이트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이가 곧 눈부신 광휘에 휩싸였다.

파파파팟.

빛이 사라지고 나자 드래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은발을 한 잘 생긴 기사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레이토나에서 본 모습과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그를 보던 데이몬은 인상을 구겼다.

꽤나 잘 생긴 얼굴이로군. 어째서 드래곤들은 미남의 얼굴을 선호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 얼굴에 불만이 있나?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용건을 얘기하겠다.

데이몬은 카트로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난 네 레어에서 당분간 신세를 지려고 했었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조금 힘들 것 같군.

카트로이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내, 내 레어에서 신세를 지려 했다고?

그렇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거든……. 하지만 네 녀석의 레어가 호수 위에 있어서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너에겐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할 일이 뭐지?

알 필요 없어. 좌우지간 우리가 이곳에서 머물만한 곳을 책임지고 물색해 줘야겠다. 내가 원하는 곳은 두 군데다. 인간이 무리 없이 살 수 있을 만한 곳과 이곳에서 추위가 가장 혹독한 곳, 두 군데를 안내해 주기 바란다.

이해할 수 없는 데이몬의 요구에 카트로이는 미간을 지긋이 좁혔다.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아무튼 좋다. 그리 어렵지 않은 조건이니 들어주마. 추위가 가장 혹독한 곳이야 널려 있으니 걱정할 것 없지만 인간들이 생존할 수 있을 만한 장소라면 찾기가 그리 쉽지 않겠군.

턱을 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카트로이가 별안간 손뼉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