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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히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먼 곳에서도 고수들의 기척을 능히 간파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시전한 마법은 바로 씨크 마나 포스(Seek mana force).

마스터의 몸 속에 간직된 마나의 절대량을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리 순탄히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을 발견하자 슈렉하이머는 우선 다섯 명의 마법사를 시켜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은폐 마법을 풀고 마법사들이 접근하자 당연한 말로 상대 무사들은 무척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우선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 마법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실책이었으니…….

마법사들이 마법을 캐스팅하자 상대 무사들의 기색이 갑자기 험악해졌습니다. 그들은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공격을 가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원거리에서 단검 이나 표창같은 것을 던져 두 명의 마법사를 즉사시켰습니다.

독고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암기를 던졌나 보군. 하긴 배교 무사들에게 상대방의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일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놀란 마법사 한 명이 실드를 펼쳤지만 그들이 던진 표창의 위력은 정말 가공했습니다. 그들이 던진 표창은 실드를 유유히 뚫고 마법사에게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남은 두 명의 마법사는 그 즉시 은폐 마법을 펼친 터라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마법사에게 다가갈 때만 해도 저희들은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우리의 착각이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음성에는 뭔가 회한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그들이 마법사에게 뭔가 물어보는 듯 보였지만 아마도 그는 당시 대답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통역 마법의 캐스팅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그들은…….

그 대목에서 슈렉하이머는 잠시 주저했다.

마법사의 목을 무참히 잘라버렸습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입니다.

아마 그럴 것이오. 그놈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슈렉하이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럼 그 자들을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들은 원래 내 수하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빌어먹을 사준환이란 놈이 반란을 일으켜 내 자리를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날 죽이려고 그 끈질긴 추격전을 벌였던 것이라오.

슈렉하이머는 비로소 독고성이 그토록 쫓기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없진 않았으니…….

그, 그렇다면 부,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말입니까? 당신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그렇소. 놈은 가증스럽게도 수하들 상당수를 이미 포섭해 놓은 상태였소.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처참히 당할 수밖에 없었소.

오. 신이시여.

슈렉하이머는 말문을 잊었다. 적어도 그는 기사도 정신이 지배하는 트루베니아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반역을 일으켜 군주의 자리를 찬탈한다는 것이 감히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각 국 군주들이 실정을 일삼아 왔어도 그는 감히 반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선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최대의 덕목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럴 거요.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힘이 곧 법이니까…….

그, 그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까?

그렇소. 셀 수도 없을 만큼…….

슈렉하이머는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가 있다는 자체가 크나큰 위험요소였으므로…….

하지만 경각에 처한 트루베니아 대륙의 사정을 생각하니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던 슈렉하이머였다.

지금으로썬 그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였으므로 슈렉하이머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독고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기 영웅(Hero)님.

나는 영웅이 아니오. 차라리 마인(魔人)이라 불러주시오. 그것이 나에게 더욱 어울릴 테니…….

슈렉하이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 존함이 데몬(Demon)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진 않소.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이름은 독고성이오 독고(獨孤) 성(成)

트루베니아의 통역 마법은 서로간의 언어의 괴리를 완벽하게 극복한다. 때문에 독고성이 말한 뜻은 정확히 슈렉하이머에게 전달되었다. 뜻글자인 한자의 속뜻까지도 말이다.

홀로(獨) 외로이(孤) 이룬다(成). 괴상한 이름이군요. 아무튼 좋습니다. 이곳에 계시려면 이름이 있으셔야 할 테니 제가 그곳의 뜻에 맞게 이름을 하나 지어드리겠습니다.

잠시 상념에 빠진 슈렉하이머는 곧 성과 이름 하나씩을 생각해냈다.

솔로(Solo). 어떻습니까? 아마도 독고(獨孤)란 성에 가장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몬(demon)이란 이름은 아마도 이곳에서 사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데이몬(damon)이라 하심이…….

하지만 독고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상관없소. 부르기 편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데이몬 솔로(Damon solo). 트루베니아에서의 독고성의 이름은 이렇게 작명(作名)되고 있었다.

그럼 데이몬. 이제 저희들이 데이몬을 초빙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알고 있소.

그러시다면 틀림없이 저희들을 도와주시겠지요.

슈렉하이머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독고성을 직시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독고성은 그러나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애석하지만 나는 도와줄 수 없소.

슈렉하이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 어째서……. 저희 대륙의 사정에 대해 모두 들으셨잖습니까? 비록 다른 세계라지만 저희 역시 인간입니다.

물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소. 나 역시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정도로.

하지만 당신들은 결정적으로 사람을 잘못 골랐소. 왜냐하면

독고성의 음색에는 자신도 모를 서글픔이 잔뜩 배어있었다.

나는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상태라오. 다시 말해 나는 이제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심지어 검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폐인이 되어버렸단 말이오.

물론 슈렉하이머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독고성은 안색을 굳히며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 무사들이 어떤 방법으로 수련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내가기공이란 것을 익힌다오. 그리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인체 내의 단전이란 기관이 가장 중요하오. 이것이 있어야만 검강이나 검기, 이곳에서 말하는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상실했소. 탈출하면서 겪은 악전고투로 인해 내 몸에서 내력, 당신들이 말하는 마나는 몽땅 사라져버렸다는 말이오. 이제 알겠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음을…….

슈렉하이머의 안색이 딱딱히 경직되었다. 그것을 보며 독고성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당신네들에겐 마스터를 알아 볼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들었소. 그것을 시전해 본다면 능히 내 몸 상태를 알아볼 수 있을 터. 한 번 시전해 보도록 하시오. 내 말의 진위를 즉시 알 수 있을 테니…….

잠시 독고성의 얼굴을 주시한 슈렉하이머는 지체 없이 캐스팅에 들어갔다. 시크 마나 포스(Seek mana force)를 시전해서 독고성의 상태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검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슈렉하이머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독고성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차라리 범인의 그것보다도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마스터는커녕 평범한 병사보다도 못한 자를 초빙해 온 것이다.

불연 듯 슈렉하이머는 절망감이 전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탈한 듯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 숱한 고초를 겪고 차원이동에 성공했는데…….

도와주지 못함을 나 역시 유감으로 생각하오.

말을 마친 독고성은 책상다리를 한 채 몸을 돌렸다. 우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 싫었거니와 도저히 그를 대할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이 아니긴 했지만 슈렉하이머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저버린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등뒤의 슈렉하이머는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꽉 잠긴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단 이 사실을 로젠가르트 군주께 보고해야겠습니다. 그리고 ……

홀로 흐느낀 듯 슈렉하이머의 음성은 어느덧 젖어있었다.

일단 제 이야기를 관심 갖고 들어주신 데는 감사 드립니다. 임무에 실패한 이상 이제 저는 더 이상 데이몬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등뒤로 슈렉하이머가 몸을 돌리는 기척이 전해졌다. 하지만 독고성은 끝까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슈렉하이머가 완전히 방밖으로 나간 후에도 그의 몸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뒤로 독고성은 슈렉하이머를 당분간 보지 못했다. 또한 시중드는 시녀로 보이는 여자 하나 외에는 사람구경도 하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 여인조차도 극도로 독고성을 두려워했다. 부들부들 떨며 들어와 음식접시를 내려놓고 외면하며 나가버리는 통에 독고성이 말을 붙여 볼 틈은 도무지 없었다.

젠장. 내가 뭐 사람 잡아 먹는 귀신인가?

하지만 이곳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통역마법을 캐스팅 할 수 있는 마법사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독고성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무료한 나날들이 하루 이틀 계속되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마침내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독고성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활짝 열린 문가에는 화려한 복장을 걸친 색목인 몇이 자신을 주시하며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중년인의 얼굴이 독고성의 눈에 들어왔다. 멋지게 수염을 기른 푸른 눈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그가 바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구한 마법사 베니테스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독고성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독고성의 얼굴을 한참 주시하던 색목인들은 곧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통역마법을 펼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독고성은 그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힐끔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서 독고성은 몸에 익은 반응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극도의 업신여김이 담겨있는 멸시의 눈빛이었다.

이것들이?

분통이 터졌지만 그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이렇게 쳐다보는 동안 색목인들의 대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이자가 그자인가?

베니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전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세르게이는 독고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추악한 생김새로군. 꿈에라도 볼까 두려워. 그런데 저자가 그렇게나 강하단 말인가?

그 말에 베니테스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저자의 손에 의해 죽은 소드 마스터는 저희들이 센 것만 해도 오십에 육박했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그 대륙의 전신(戰神)이 현신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 말에 세르게이 공작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소드 마스터 50명을 혼자서 어떻게…….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 소드 마스터들은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한 술 더 떠서 착용하고 있던 손톱 달린 건틀릿 전체가 물들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정도였습니다.

흐음.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에 손을 가져갔다. 상대는 아무리 보아도 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추악하고 왜소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베니테스가 어지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솔직담백한 성격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세르게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대승정께서는 어째서 저자가 힘을 잃었다고 했을까?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저는 이미 이자가 보유한 마나량을 측정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슈렉하이머 대승정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자는 이제 평범한 사람에게도 못 미치는 마나를 보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호오. 이유는?

베니테스는 상당히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차원이 달라져서 그런지도…….

세르게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끊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지. 차원이 틀려서 힘을 못 쓴다면 크로센 대제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텐가? 내 생각에는 필시 저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 싶네

네? 거짓말을 말입니까?

그렇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왔지만 저자는 필시 아무 대가없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거야.

그, 그럴 리가?

세르게이는 거의 확신하는 듯 호언하며 독고성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몸은 회복되는 법. 나는 지금까지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소드 마스터가 가진 마나가 사라진다는 경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 필시 이자를 대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라고 볼 수 있지. 슈렉하이머 대승정의 방법 말이야. 이봐 베니테스.

네.

통신마법을 시전하도록 하게. 내가 대화를 해 볼 테니…….

내 말을 알아듣겠소?

한참동안 수군거리던 자들 중 하나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이 들려오자 독고성은 눈을 크게 떴다. 어쨌거나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듣고 있소.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나는 이 이카롯트 제국의 총리를 맡고 있는 세르게이 폰 네르만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이다.

동감이오.

슈렉하이머의 경우와는 달리 둘의 대화는 상당히 무미건조했다. 일단 이곳의 역사를 통해 군주들의 처사를 알게 된 데이먼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세르게이의 성격 자체가 다소 직선적이란 데 기인한 바가 컸다.

이미 슈렉하이머 대승정에게서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대륙은 지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소.

물론 본인도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대화가 쉽게 풀리겠군.

세르게이는 독고성의 눈을 뚫어지게 직시했다.

얼마면 되겠소?

우리를 도와주는 대가로 얼마를 지불하면 되는지 말해 주시오.

독고성의 얼굴이 점차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도와주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말이오?

바로 그렇지. 비록 전쟁중이라 많은 돈을 장만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당신이 이곳에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만큼의 금은보화를 지불할 순 있소. 아. 원한다면 여자도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말이오.

세르게이의 얼굴에는 점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일단 저 이방인이 얼마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필시 살아 돌아올 확률이 희박한 곳으로 파견될 터이니…….

설사 무사히 임무를 끝마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센 대제의 전례를 보아 이계의 인물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위험요소가 될 터, 서약석만 손에 넣는다면 저자는 그 즉시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리라.

물론 정면 공격이 아닌 독약이나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세르게이는 상대방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정말 추악한 생김새로군. 도저히 사람의 용모로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니…….

고민이군. 저 자를 마다 않는 여자를 구하려면 필시 노예시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을 테니.'

그의 상념은 상대의 냉랭한 대답으로 여지없이 깨어져버렸다.

네놈은 저번의 슈렉하이머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못한 놈이로군.

세르게이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뭐, 뭐라고 하셨소?

독고성의 어조는 추상같았다.

적어도 슈렉하이머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금전적 논리로 사람을 평가하는 네놈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지. 내 대답은 오직 한 가지다. 내 몸에는 이제 너희들을 도와줄 조금의 능력도 남아있지 않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거절이다. 네놈의 상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도 도와줄 수 없다.

전혀 뜻밖의 욕설에 세르게이는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껏 지녀온 이카롯트의 총리라는 지고한 신분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이런 험악한 욕설을 들을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상대의 입에서는 욕설이 거듭해서 튀어나왔다.

자칭 한 나라의 총리라는 놈을 보니 이곳이 이렇게 된 데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멍청한 놈. 그럴 시간이 있거든 목숨을 걸고 아르카디아로 건너가라. 그리고 크로센 대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라. 제발 저희 국민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말이다.

뭣이?

왜? 내 말에 화가 나는가?

독고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세르게이를 계속 약올렸다.

결국 보다 못한 베니테스가 나서고 나서야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슬립.

베니테스가 행한 수면마법에 독고성은 침대 위에 쓰러져 그대로 곯아 떨어져버렸다.

내 이놈을?

베니테스는 치를 떠는 세르게이를 달래는데 여념이 없었다.

참으십시오. 보아하니 이 자는 의도적으로 공작 전하를 능멸한 것 같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렇습니다. 이자는 우리들이 구하기 직전 그곳에서 수많은 검사들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뭘 어떻게 했기에?

그는 즉시 절벽으로 가서 뛰어내렸습니다. 다시 말해 쉽사리 뜻을 꺾는 성품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 제반 여건을 유추해 보면 이 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부러 공작 전하를 화나게 한 것 같습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세르게이는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그는 곯아떨어져 있는 독고성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놈을 시험하도록 하겠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세르게이는 독고성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지하 감옥 중 가장 튼튼한 곳에 이놈을 집어넣어라. 그리고 그곳에다 사로잡은 오크나 트롤을 집어넣도록 해라. 산 채로 무장을 모두 갖춰서 말이다. 때에 따라서는 오우거도 좋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실력을 보여야 할 터, 놈이 실력을 감추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곧 밝혀질 것이다.

쓰러져 있는 독고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며 세르게이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만약 놈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뒤처리는 몬스터들이 해줄 테니까…….

독고성은 자신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의식은 지금 이곳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중원의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뎅. 뎅. 뎅.

고즈넉한 산사에는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승려들이 바쁘게 대웅전으로 몰려들었고 향화객들은 하산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늘어선 전각들의 모습에서 사찰의 역사가 무척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사찰이 그 유명한 숭산 소림사란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예불을 위해 승려들이 전각 속으로 사라지고 산사는 또다시 적막감속에 잠겨들었다.

그러나 산사의 뒤뜰, 그리 넓지 않는 잔디밭에서는 결코 절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한 눈에 보아도 주먹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란 것을 알 수 있는 음향. 그곳에는 지금 대 여섯 명의 인영들이 한참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산사에서 패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물론 소림사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패싸움을 벌이는 자들은 모두가 열 살 안팎의 소년들이란 데 있었으니…….

또한 그곳에서 벌어지는 패싸움은 일대 다수의 주먹다짐이었다. 다섯 명의 소년들이 한 소년을 둘러싸고 무자비한 집단 폭행을 벌이고 있었다.

퍽퍽.

무수한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소년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저 독기가 줄기줄기 피어나는 눈빛으로 무언가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퍼부어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아가며 말이다.

자세히 보니 소년의 용모는 예사롭지 않았다. 쭉 찢어진 눈에 전혀 어린 소년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휘어진 매부리코. 거기에다 소년은 허리를 바로 펴지 못하는 꼽추였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서 별달리 표시가 나지 않는다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등이 심하게 솟아오를 것이 분명했다.

덜컥.

턱에 정통으로 일격을 맞은 꼽추소년은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그의 몸은 한 소년의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발길질을 가하려했다. 그 때 다급한 경고성이 울려 퍼졌다.

조심해. 놈에게 물리기 전에…….

막 꼽추소년을 걷어차려던 소년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반응이 약간 늦어버렸으니.

악.

뒤로 물러나던 소년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나가떨어진 꼽추 소년이 달려들어 소년의 정강이를 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가에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꼽추 소년의 입을 벌리려 했다.

이, 지독한 놈.

소년들이 사력을 다해 꼽추소년의 입을 벌리려 했다.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고 자근자근 짓밟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꼽추소년은 그만큼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끄으으…….

물린 소년은 통증에 의해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보다 못해 청의를 입은 한 소년이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을 뽑아들었다. 경고성을 발한 바로 그 소년이었다. 체형에 맞게 제작된,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검의 모습에서 소년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저리 비켜. 내가 놈의 턱을 잘라버릴 테니…….

그 말에 소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래도 괘, 괜찮을까?

괜찮아. 놈은 마두(魔頭)의 자식이야. 팔이나 다리 하나를 떼어낸다고 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청의 소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곤 검을 꼽추소년의 턱에다 겨냥했다.

물지 않으면 네놈의 턱을 잘라버릴 것이다.

하지만 꼽추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듯 그는 눈을 감으며 다리를 문 입에 힘을 더욱 집어넣었다. 고통에 물린 소년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청의 소년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살광이 스쳐지나갔다.

이놈.

그는 검을 꼽추소년의 입 속에 쑤셔 넣었다. 입술이 베어지며 피가 낭자하게 치솟았다. 그래도 꼽추소년은 턱의 힘을 빼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듯이 말이다.

결국 난감해진 것은 청의 소년이었다. 턱을 잘라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그리 쉽사리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엄격한 소림사의 규율로 봐서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렵사리 들어온 소림사에서 혹시라도 쫓겨날 지도 몰랐기에 그는 일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때 꼽추소년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입이 벌어지며 꼽추소년은 입 속에 고인 피를 그대로 청의 소년의 얼굴에다 내뱉었다.

헉.

난데없는 선혈 세례에 청의 소년은 대경실색했다. 무림 명가의 자제로 고이 자란 그가 어찌 이런 경우를 당해보았을까? 그는 엉겁결에 뒤로 한 발 물러나서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러느라 손에서 보검이 떨어져버렸다. 그 찰라 꼽추소년은 물었던 다리를 놓고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청의 소년의 손에 들려있던 보검은 어느새 꼽추소년의 손에 들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죽인다.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 나오는 음성과 함께 꼽추소년은 청의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퍽.

꼽추소년에게 떠밀려 넘어진 청의 소년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예기가 줄기줄기 감도는 보검이 바로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

꼽추소년은 가차없이 검을 소년의 가슴팍에 박아 넣으려고 했다. 평소 청의 소년에게 무수하게 당해왔던 만큼 그의 행동에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둘러싼 소년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안 된다.

어디선가 들려온 굵직한 음성들. 음색을 보아할 때 소년들이 발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몸을 드러내어 달려오는 자들. 머리에 계인이 선명한 것을 봐서 소림사 승려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소림사 계율원의 승려들이었다. 명목상 꼽추소년을 보호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꼽추 소년이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그들은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자 가차없이 개입하고 나섰다. 하지만 상황을 볼 때 그들의 개입은 현저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미 보검은 청의 소년의 가슴팍에 닿아있는 상태.

하지만 승려들의 얼굴에는 별달리 급할 것이 없다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놀랍게도 비명을 지른 자는 청의 소년이 아니었다. 검으로 찌르려 한 꼽추 소년이 도리어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보검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고 꼽추소년은 머리를 감싸안은 채 그 자리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쉴 새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보아 극도의 고통이 소년에게 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청의 소년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엔 곧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싼 소년들. 청의 소년은 암암리에 그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어이없는 기습을 허용한 데 대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곧 꼽추 소년에게로 발산되었다.

낙법을 써서 몸을 일으킨 청의 소년은 지체 없이 꼽추소년에게로 다가갔다. 땅에 쓰러져 몸을 뒹굴고 있는 꼽추 소년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겁에 잔뜩 질려있던 소년들도 그 모습에 하나 둘씩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미 호법승들은 모조리 그 자리에 도착해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일방적인 구타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서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 독랄한 놈이로군. 그 틈을 놓치지 않다니…….

글세 말이야. 하마터면 산동 모용세가의 장자가 목숨을 잃을 뻔했지 않은가 그려?

이마에 계인을 선명히 찍어 넣은, 그들 중 수좌로 보이는 호법승이 문득 감탄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칠종단금술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군. 이것이 아니었다면 저 독한 놈은 지금까지 여럿 목숨을 잡았을 걸세. 살인하려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금제가 발동되다니, 정말 소림성승께서 직접 시술한 금제답네.

한 호법승이 무척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영 못마땅하네 그려. 우리 소림에서 제일 고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성승께서 저 딴 마두의 자식을 위해 내공을 소모하시다니……. 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휴! 그 분의 고집을 누가 꺾겠나? 이미 소림사 안팎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집이신데…….

수좌 호법승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꼽추 소년은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무자비한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호법승은 별달리 내키지 않는 듯 내뱉었다.

슬슬 싸움을 말려야겠네. 까딱하다간 저 독종 놈, 숨이 넘어가겠네 그려.

그럴까?

호법승들이 가세하자 집단 구타는 일단락되었다. 이미 충분히 분풀이를 했다 여겼는지 소년들은 하나씩 물러나서 몸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용이란 성을 가지고 있는 청의소년은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돌리려다 말고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꼽추 소년의 복부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퍽.

이 자라 같은 자식. 감히 내 얼굴에 피를 묻히다니…….

청의 소년은 소매 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쳤다. 그리곤 밝은 얼굴로 소년들을 돌아보았다.

자. 가자.

소년들이 우르르 몰려가 버리자 호법승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성깔이군. 저 성격에 자질 역시 출중하니……. 속가제자란 게 정말 아까워.

자, 자, 잡담 그만하고 이 녀석 치료나 도와줘. 괜히 성승께서 아신다면 단단히 꾸지람을 들을 테니…….

알았어.

해가 저물어 가는 소롯길을 웬 왜소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심하게 다리를 절며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는 이는 다름 아닌 꼽추 소년이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형상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특유의 독기 서린 눈빛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윽.

돌부리에 걸려 꼽추소년은 그만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독기가 줄기줄기 어린 음성이 배어 나왔다.

비겁한 놈들. 단체로 덤비다니 으윽.

검날에 벤 입술에서는 쉴 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에 전, 침을 탁 내뱉은 꼽추소년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멀기 그지없는 숙소였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지금 오늘따라 더욱 멀어 보였다.

산을 하나 넘어가야만 보이는 누추한 초막. 그것이 바로 꼽추소년의 숙소였다. 그리고 소년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암암리에 호법승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의 입에선 또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개 같은 놈들. 모두 다 한 통속이야.

연신 씨근거리면서도 소년은 힘을 내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독고성.

꼽추 소년은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된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떠올리고 있었다.

백도 명숙들에게 협공 당해 죽어가던 사파의 절대자. 아직 사물을 인지할 수 없는 어린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고성은 그 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비록 당시에는 그가 아버지란 사실은 몰랐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했었다는 것만은 인지하고 있던 독고성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독고성은 소림성승에 의해 칠종단금술의 금제를 시술받았다. 시술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통증에 의해 정신을 잃은 독고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림사에 옮겨지게 된다.

그가 소림사에 기거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놀랍게도 배교에서는 소림사에 억류된 독고성의 존재를 알고서도 구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전대 교주 독고무기의 유일한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소림사에서는 생각하고 있는 꿍꿍이가 있었다. 전대 교주의 아들을 손에 넣은 만큼 소림사에서는 그를 조건으로 당시 포로로 잡힌 자파 제자들과의 교환을 꿈꾸었었다. 제자들을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림성승 역시 반대할 수 없는 상황.

소림 방장은 소림사의 의도를 빠짐없이 서신에 적어 배교로 보내게 된다.

당시 배교는 총사 사준환의 손에 새롭게 재정비되어 있었다. 독고무기의 죽음으로 초래된 방도들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한 그가 배교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뒤엎고 독고성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신을 받았음에도 그는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소림사에서는 그 사실에 무척 당혹해했다. 이미 독고성에 대해 금제를 시행했던 터라 후환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교에서 독고성을 거두려들지 않다니. 갈 데가 없어진 때문에 독고성은 소림사에서 쭉 기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한 마디로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렸다.

문제는 그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까지 성장하고 나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추악한 외모, 그리고 사파 절대자의 아들이라는 배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는 바야흐로 백도와 사도간의 힘 겨루기가 극대화되기 시작한 시점. 소림승이나 수련제자들이 독고성을 보는 눈이 그리 고울 리가 없었다.

더러운 잡종 꼽추 놈.

수많은 사람을 죽인 마두의 자식놈.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에게 퍼부어진 멸시와 괄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그런 멸시 속에서 성장한 독고성이 평범하게 성장하기란 불가능의 도를 넘어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였던 독고무기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파 고수였었고 그의 손에 수많은 백도의 무사들이 명을 달리했다.

그러므로 독고성에게 가해진 멸시와 냉대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구박 속에서 독고성의 성품은 점점 비뚤어져만 갔다.

오늘 당한 집단 린치 역시 그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던 독고성의 눈에 어딘 가로 기어가고 있는 조그마한 뱀 한 마리가 들어왔다. 싸늘한 미소를 지은 독고성은 말없이 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으직.

바삐 기어가던 뱀의 머리는 독고성의 발에 밟혀 그대로 으스러졌다.

그와 함께 반사적으로 뇌리에 전해지는 다소의 통증. 물론 칠종단금술로 인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의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미했다.

독고성이 능히 참아낼 수 있을 정도. 그의 입에서 갑자기 욕설이 터져 나왔다. 소년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험악한 욕설이었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금제법만 아니었다면 오늘 모용 진 그놈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칠종단금술. 소림사에서 살계(殺戒) 다음으로 지정할 정도로 위력이 엄청난 금제술이었다. 피 시술자의 살심 자체를 말살하는 금제법으로 이 대법을 시술받은 자는 살인 자체가 불가하다 했다. 독고성은 이미 소림성승에게 직접 이 금제법을 시술받은 바가 있었다. 오늘 모용진의 명을 끊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젠장. 그놈의 고통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니…….

칠종단금술은 원천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살심을 일으킬 때 발동된다. 독고성은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지금까지 무수한 벌레와 동물들을 죽여본 적 있었다. 그 결과로 동물을 죽일 때는 비교적 참을 수 있을 정도의 통증만 전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살심을 일으킬 때는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뇌가 그대로 타 들어가는 수준의 고통이 가해지기 때문에 그는 벌써 여러 번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독고성의 눈에 살기가 급격히 떠올랐다.

이 금제법이 사라지는 날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 버릴, 아악.

그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감정이 치밀어 오른 탓에 칠종단금술을 잠시 잊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살심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나름대로 인내력이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이 고통만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조금 뒤 낭패한 몰골로 몸을 일으킨 독고성은 말없이 자신의 묘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머리가 처참하게 으깨어진 채 놓여있는 뱀의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조금 뒤 어둠 속에서 극도로 화가 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이지 저놈만 보면 구역질이 나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어째서 저런 놈을 본사에 기거하게 하는 거지요? 전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쉿. 목소리가 커.

상관하지 마십시오. 비록 미물이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뱀을 저토록 잔인하게 밟아 죽이다니 과연 마두의 자식놈이로군요. 저런 놈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쳐야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군요?

장문인의 엄명이니 어떻게 하겠나? 우리로써는 따를 수밖에 없지.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자네 감히 살계를 어기려 하는 건가? 우린 승려라네. 상대가 비록 계도할 수 없는 악인이라 해도 섣불리 죽여서는 아니 되네.

선배의 질책에 기가 질린 듯 어둠 속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 음성을 끝으로 산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젠장 또 악몽인가?

독고성은 투덜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또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였지만 과거를 되새기는 꿈은 마치 숙명처럼, 그것도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뒤, 독고성의 기분이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이곳이 중원이었다면 그는 필시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그의 화풀이 상대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상념을 지워버리기 위해 독고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그가 원래 있던 장소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내실이었다. 중원에 있는 자신의 처소보다도 휘황찬란한 공간. 그런데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그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였다. 침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조. 한 눈에 보아도 중죄인 따위를 가두는 감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튼튼한 쇠격자로 된 문을 쳐다보며 독고성은 중얼거렸다.

나에게 이제 흥미를 잃었나보군. 이런 감옥으로 보낸 것을 보니…….

형태를 볼 때 감옥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갇힌 곳은 적어도 백 명 정도의 사람을 수감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감옥이었다. 독고성은 우선 주위의 경물을 샅샅이 살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닥에 놓인 한 자루의 장검이었다. 방패 하나도 옆에 놓여있었지만 독고성은 그것을 무시한 채 검을 집어들었다. 손가락으로 날을 퉁기자 다소 둔탁한 음향이 들려왔다. 별달리 질이 좋진 않아 보였지만 두께와 길이 하나는 정말 무지막지했다. 가운데 긴 혈조가 패어 있는 것을 봐서 아마도 찌르기 용의 장검 같았다.

무식할 만큼 두터운 검이군. 그런데 놈들이 이걸 왜 넣어둔 거지?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검을 지급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때문에 독고성은 자신을 이곳으로 가둔 자의 의도에 대해 머리가 빠져라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철창 저편에서 갑자기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기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독고성의 눈에 철창 너머로 네 개의 화등잔만한 불빛이 비쳐졌다. 그것이 짐승의 눈동자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간파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어둠에 묻혀 도저히 형태를 짐작할 수 없었다.

뒤이어 쇠격자문이 드르륵거리며 올라가자 독고성은 드디어 자신을 가둔 자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리자 그는 이를 굳게 악물었다.

나를 시험하려는 건가?

그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격자문은 완전히 열렸고 그 속에서 녹색을 띄는 무언가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가차없이 독고성을 덮쳤다.

으헉.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녹색 피부를 가진 그 무언가는 놀라울 정도로 몸놀림이 민첩했다. 놀랍게도 놈들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흔히 보는 맹수가 아니란 말이다. 기이하게 생긴 무기에서는 예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독고성은 순간적으로 무기의 형태를 살폈다.

참마도인가? 청룡도같기도 하군.

한 눈에 보아도 예리한 날을 가진 장병(長兵). 의문의 존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또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자루가 달린 장병기, 이곳에서는 글레이브라 불리는 무기가 독고성의 머리털을 서걱 자르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긴 했지만 마음을 놓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글레이브가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뻗어오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두 놈이로군.

그는 사력을 다해 수중의 장검을 곧추 세웠다.

까깡.

간신히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에 의해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균형을 잃은 몸을 겨우겨우 가누며 독고성은 가까스로 석벽에 등을 붙일 수 있었다.

일대 다수의 접전에서는 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 최선이란 사실을 그는 이미 몸에 익혀놓은 상태였다. 그의 앞에는 어둠에 묻혀 어렴풋이 형체만 드러나는 두 개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검을 기울여 방어자세를 취한 독고성은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 이것들은 뭐지? 힘이 정말 대단하군.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형태. 상대는 작달막하지만 단단한 체구를 가진 괴물들이었다. 사람과 같이 직립보행을 하며, 녹색의 짧은 털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마치 돼지와 머리모양이 흡사한 괴물. 그것들은 바로 오크 전사들이었다.

슈렉하이머에게서 이곳 역사를 들은 터라 독고성은 곧 놈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것들이 오크란 놈들이었군. 그렇다면 놈들의 의도는 바로 이것이었나? 잘 되었군. 고이 죽어줄 수도 있었지만 악몽을 꾼 데 대한 화풀이를 해야 하니…….

오래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인간에 대해 뿌리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듯 오크들은 수중의 무기를 휘둘러 맹공을 가해왔다. 뒤이어 벌어진 서너 차례의 칼부림. 겨우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독고성은 점점 힘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젠장. 내가 이까짓 미물들에게…….

우선 들고 있는 장검이 그에겐 무척 생소한 무기였다. 무예를 익히기 시작한 이후 그는 죽어라 호조만을 연마해왔기에 검술에는 거의 백지 상태였다. 또한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천자혈마공이 화근이었는지라 초식에는 그다지 조예가 없었으며 심한 상처를 입었던 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오크 두 마리와의 접전이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중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던 자신이 이깟 미물들에게 당한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내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의 혈투.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겪은 숱한 실전경험을 토대로 생전 처음 보는 괴물, 오크와의 접전을 수행해 나갔다.

지하 감옥의 상단 부분에는 두 명의 인영이 서서 독고성과 오크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희미한 마법장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중 한 인영이 돌연 탄식을 했다.

저토록 엉성하게 검을 휘두르는 꼴이라니? 한눈에 보아도 영 아니군. 계획은 실패했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검술에 서투른 면이 있지만 몸놀림 하나만은 일류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공격을 회피하는 동작은 정말이지 자로 잰 듯 정교합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무기가 손에 맞지 않아 그런 것 같습니다.

세르게이는 베니테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소 젊어 보이는 수려한 얼굴.

하지만 베니테스는 벌써 60이 넘은 노마법사였다. 그것도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워 메이지(War mage)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궁정 내부에서 마법시험 따위로 세월을 보내지 않은, 전장에서 전투마법을 갈고 닦은 실전 마법사란 뜻이다.

전투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만큼 베니테스는 상대의 상태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을 터, 그 사실을 믿은 세르게이는 다시금 감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 저자는 검이 아닌 다른 무기를 썼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저자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건틀릿에 칼날이 달린 듯한 기형 병기를 사용했습니다. 그것 두 자루만으로 검을 든 마스터 급 검사 수십 명과 한 치도 밀림이 없는 접전을 펼쳤을 정도니까요.

스파이크 건틀릿을 말하는 것인가? 놀랍군. 하지만 상태를 볼 때 놈이 마나를 상실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 같군. 오크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저자는 건틀릿을 완전히 감쌀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했습니다. 비록 믿지 않으실 지 모르지만.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감옥 내부의 접전은 점점 막바지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던 독고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완전히 승기를 잡고 오크 두 마리를 압도적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비록 전신을 여러 번 베여 피를 줄줄 흘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감옥 바닥은 쌍방이 흘린 피로 온통 얼룩이 져 있는 상태. 독고성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마치 악귀처럼 날뛰고 있었다.

키리릭.

기세에 질린 듯 오크 한 마리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독고성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물러나던 오크가 오지 말라는 듯 글레이브를 내밀었지만 독고성은 상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글레이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독고성의 허벅지를 파고 들어갔다.

푸슉.

허벅지에 글레이브가 박힌 그대로 독고성은 오크의 가슴팍에다 검을 찔러 넣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오크의 건장한 체구가 부르르 떨었다. 독고성의 전신이 잠시 멈칫 하는가 했더니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목표물을 향해 달려갔다. 남은 오크는 이미 독고성의 투기(鬪氣)에 전의를 상실한 채 뒤로 끝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용맹과 투지의 상징인 오크 전사가 도리어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추호도 망설임 없이 오크의 전신을 난자해 들어갔다. 이미 오크를 죽일 때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취에에엑.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선혈이 이리저리 치솟았다. 하지만 독고성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장검을 들어 오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려찍을 뿐이었다. 이렇게 무림의 고수였던 자와 몬스터 간의 대결은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싸우는 법을 잘 아는 놈이군.

싸움의 과정을 모두 지켜 본 세르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이방인은 마치 맹수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피를 보면 참을 수 없는 뱀파이어처럼 말이다. 그의 귀에 베니테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계속해서 몬스터로 하여금 시험을 하시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당 백 이상의 실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다. 비록 투지가 가상하다 하나 만신창이가 되어 오크 두 마리를 겨우 때려잡는 놈 따윈 필요 없어. 저 정도는 어느 정도의 용병 정도면 충분히 해 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처치해 버릴까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 본 세르게이는 서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아니야. 일단 시험을 더 해보는 것이 좋겠지? 놈을 치료해 준 뒤 다음에는 트롤과 붙여보도록 하라.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면 경험 많은 용병들도 고개를 내젓는 상대일 터, 아마도 좋은 대결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놈이 사용하던 병기와 비슷한 것을 지급해 주는 것이 낫겠지? 일전에 자네가 보았다는 무기 말일세. 궁금하군. 스파이크 건틀릿을 놈이 과연 어떻게 사용할지?

알겠습니다.

선혈과 떨어져 나온 살점 부스러기가 낭자하게 흩어진 곳에서 독고성은 멍하니 서 있었다. 시선은 자신의 손에 죽은 오크의 시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한없이 흉포해 보이던 오크 두 마리는 이제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고성은 전신에 무수한 상처를 입어야 했다. 무기가 손에 익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심후한 내력에 힘입어 패도 내가기공에 주력하던 버릇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천자혈마공이 건재하던 시절, 강기를 끌어올린 독고성의 호조에는 만병(萬兵)이 무력(無力)했다. 신병이기라 할 지라도 부딪치면 여지없이 부러져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절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는 내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몸.

오크의 글레이브를 막아내는데 그는 사력을 다 해서 검을 움켜쥐어야 했다. 직접 겪어본 결과 공격이 다소 생소하긴 했으나 오크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무림 고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 오크 두 마리에 이처럼 고전한다는 일은 그의 경력에 비추어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고성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늘어진 오크의 잔해를 쳐다보았다. 오크를 죽일 때는 다행히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진 않았지만 그를 고뇌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내가 왜 이깟 미물들과 피 터지게 싸워야 하지?'

이곳이 아닌 중원에서 그는 철저히 계산된 삶을 살아야 했다.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의도된 생각대로. 그런데 그가 살던 곳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이 트루베니아에서도 또다시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 생기다니……. 자신의 기구하기 그지없는 운명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독고성이었다.

괜한 짓을 했는가?

불연 듯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차라리 오크들에게 순순히 죽음을 당했다면, 그랬다면 이런 상념이나 고뇌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을 텐데.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격자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독고성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휴우. 대단하군.

자근자근 잘도 다져 놓았어.

등뒤에서 들려오는 생소한 목소리. 물론 병사들이 지껄이는 트루베니아 공용어가 독고성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저 감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감옥 속으로 들어왔으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일단의 병사들이 감옥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금속제 투구에 쇠사슬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신체의 주요 부분만을 가리는 약식 갑주인 것을 봐서 신분이 그리 높진 않은 모양이었다.

독고성을 극도로 꺼리는 듯 그들은 검과 방패를 들어 경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독고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애초부터 없는 존재인양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용기를 내어 감옥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 명의 병사가 오크의 시체를 수습했고 그중 신분이 제일 높아 보이는 병사가 독고성에게 다가와서 검을 들이댔다.

나를 따라 나와라.

당연한 말로 독고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참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지?

이마를 툭툭 친 병사는 독고성의 앞으로 가서 섰다. 순간 병사의 얼굴이 형편없이 찡그러졌다.

정말 못 생긴 얼굴이군. 오우거도 이 놈보다는 낫겠어.

그렇지 않아도 중원에서 역시 추면(醜面)으로 무수히 손가락질 당한 독고성이었다.

얼굴 형태가 판이하게 틀린 트루베니아 인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동일했다. 아니 독고성의 얼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우선 그들은 치켜 올라간 중원인 특유의 눈매를 본 적이 없었다. 특히 독고성의 눈매는 정도가 더 심했다. 가늘게 찢어진 눈, 거기에다 등이 휜 꼽추의 모습이니 병사가 느낀 감정을 익히 짐작할 만 했다. 그런 연유로 병사의 얼굴에는 잠시나마 경멸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자고로 인종이 틀려도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동질감이 있는 법이다.

독고성은 병사의 얼굴에서 자신에겐 무척 친숙한 감정, 바로 자신을 경멸하는 표정을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점차 무언가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놈도 날 멸시하느냐?

자신의 운명에 대해 심각히 고뇌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보게 되자 독고성은 급기야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미 그의 감정은 건드리면 터질 정도로 고조되어 있던 상황. 병사의 표정이 그 불씨에 불을 당겼으니……. 독고성은 마치 야수처럼 몸을 날렸다. 목표는 경멸의 표정을 지은 바로 그 병사였다.

헉.

병사는 다급하게 방어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동작은 그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고 있었다. 비록 내력은 잃었을지언정 전장에서 갈고 닦은 몸놀림만은 일반 병사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정도.

엉겁결에 내뻗은 검을 슬쩍 피해낸 독고성은 물 흐르듯 병사의 뒤로 돌아가서 병사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을 치켜올리자 투구 아래 가려진 목이 훤히 드러났고 독고성은 검을 목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뭐, 뭐야?

오크의 시체를 수습하던 병사들이 경악해서 몰려들었지만 이미 그들의 선임병은 완벽하게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놈. 놓지 못하겠나?

졸지에 포로가 된 병사가 공포에 질려 고함을 내질렀지만 독고성은 도리어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애당초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거니와 설사 알아듣더라도 상관할 바는 없었다.

네놈이 뭐라 하든지 상관없다. 그저 운이 나쁘려니 생각해라. 나와 함께 황천길로 같이 가자.

독고성은 서슴없이 목에 댄 검을 그어버렸다. 아니 그것은 단지 바램일 뿐이었다.

커어억.

손에 힘을 불어넣으려는 순간 또다시 극도의 통증이 뇌리에서 밀려왔다. 칠종단금술로 인한 통증이었다. 살인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발동되는, 한 치의 틀림도 없는 가증스러운 금제법. 마치 망치로 정수리를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독고성의 뇌리는 하얗게 비어버렸다.

쨍그렁.

손에 힘이 빠지며 검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독고성은 병사의 목을 놓은 채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목이 달아날 운명에 처했던 병사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잘릴 뻔한 목을 어루만졌다. 정신을 차리자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자신을 죽일 뻔한 자에 대한 분노였다.

이런 개자식.

그는 들고 있던 방패 모서리로 바닥을 뒹굴던 독고성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퍽.

단 한 방에 독고성은 뇌리를 파고드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즉 기절해버린 것이다.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병사는 다시 한 번 방패를 들어올린 다음 가차없이 내려 찍으려했다. 그러자 주변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만류했다.

참으십시오. 대장님. 상부에서 이자를 다른 감옥으로 옮겨 치료하란 지시가 있었습니다.

놈을 죽인다면 필시 처벌이 있을 것입니다.

처벌이란 말에 겨우 이성을 되찾은 병사는 성난 눈빛으로 늘어진 독고성을 쏘아보았다. 규율이 엄격한 편이었는지 병사는 그것으로 화풀이를 끝냈다.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군. 천만 다행이야. 그런데 놈이 왜 날 끝내지 않았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가 이유를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는 받은 지시대로 병사들에게 독고성을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휘하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독고성의 왜소한 몸을 들어올렸다. 그 와중에 독고성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게되자 그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보아도 정말 못생긴 놈이군. 혹시 하프 오우거인가? 아니야, 그러면 체격이라도 당당할 텐데 말이야. 이놈은 오크보다 조금 클 정도니?.

잠시 고민하던 병사는 곧 상념을 지우고 부하들을 따라 감옥을 나섰다. 드넓은 감옥 안에는 오크와 독고성이 흘린 피만 남아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래. 놈이 근위병을 죽이려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병사들이 목격한 바로는 마치 극도의 고통을 겪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였습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자신의 실험물이 된 이방인에게 다소의 호기심을 가졌다.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면모가 많은 자였다. 우선 엄청난 경지의 소드마스터(베니테스의 증언으로 그는 이방인이 소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믿고 있다)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그에겐 의문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지금껏 트루베니아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은총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소드 마스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트루베니아에서는 말이다.

정말 기이하군. 놀라워. 한 번 연구해 볼 만한 일이로군.

놈의 처리를 어떻게 할까요?

베니테스의 말에 세르게이는 고개를 돌렸다.

일단 치료를 한 뒤 단단히 가두어두도록 하라. 상태가 호전되면 일전에 말한 것처럼 조처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어둠에 찬 감옥 속.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곳에 한 인영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방 3평방미터 남짓한 좁은 감옥이었지만 달빛을 정면으로 맞고있어서 얼굴형태를 똑똑히 분간할 수 있었다. 갇혀 있는 자는 바로 독고성이었다. 마치 삶의 의욕을 잃은 듯 무릎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있는 모습이 무척 처량해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오크와의 격투에서 입은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퉁퉁 부어있는 몸을 볼 때 내상은 그대로 남아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던 독고성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들었다.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이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조금 뒤 입술을 비집고 콱 잠긴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달빛은 중원이나 여기나 변함이 없군.

어차피 그에게 고향에 대한 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하기 싫은, 좋지 못한 기억이 더 많았던 곳이 중원이었다. 차라리 멀리 떨어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한 이곳 트루베니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독고성.

불연 듯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인 사준환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정말 철저히도 자신을 이용해먹은 뒤,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가차없이 내버린 가증스런 위선자.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독고성의 얼굴엔 분노보다는 도리어 자조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크크큭. 이 쓸모 없는 몸으론 놈에게 다가가지도 못할 터.

이곳이 트루베니아란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할 수 없는 몸으로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에겐 죽음보다도 못한 수모였다.

다시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독고성은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하게 관여한 존재, 사준환과의 첫 만남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누, 누구신지?

얼굴 가득히 당혹감을 담은 청년이 떠듬거리며 내뱉었다. 꽤나 흉물스럽게 생긴 추면이라서 나이를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피부를 봐서 대충 20대 후반 정도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등이 옷가지를 뭉쳐 넣은 듯 솟아있는 것을 봐서 청년은 꼽추였다.

남루한 옷차림에 전신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모습에서 아마도 고된 일을 마치고 온 듯했다.

소림사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온 청년.

그런데 그의 앞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난데없이 십여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 청년 앞에 부복했던 것이다.

나타난 모습을 볼 때 그들은 다름 아닌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능히 고수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이 소림사에서도 가장 비천한 계급에 속하는 자신에게, 그것도 절대 복종을 뜻하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으니 청년이 얼떨떨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청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아수라의 문양이었다. 물론 무림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은 그들이 바로 배교의 문도들이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치밀어 오른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그러자 부복한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극도의 경의를 표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가마솥 바닥처럼 시커먼 얼굴을 가진 흑면중년인이었다.

죽여주십시오. 소교주님을 지금에서야 찾아뵙게 된 것을 말입니다.

소교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청년의 추악한 얼굴은 온통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 사,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전대 교주의 아드님이신 독고성 공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독고성이라면 바로 난데?

여전히 얼떨떨해 하는 독고성을 힐끗 쳐다보며 검은 얼굴의 중년인은 공손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해합니다. 필시 소림사의 빌어먹을 중놈들은 공자님의 출생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생의 비밀?

흑면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공자님은 바로 사도의 하늘이라 자부하는 배교의 제 18대 교주 사령천존 독고 무기의 외아들이십니다.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 배교? 그럼 내 아버지가?

맞습니다. 공자님은 그런 지고한 신분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의 충직한 수하였던 흑면염라 도위청이라 합니다.

다시 한 번 부복한 뒤 독고성의 전신을 재빨리 흝어본 도위청이 갑자기 두 눈에 살광을 떠올렸다. 한 눈에 보아도 독고성의 현재 처지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증스러운 소림사 중놈들……. 감히 본교의 공자님을 이따위로 대하다니?

하지만 독고성은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의혹에 찬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도위청이라 밝힌 중년인에게 반문했다.

미안하지만 자세한 제반 사정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겠소.

당연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미 설명드린 대로 공자님의 영친, 아니 이젠 선친이라 불러야 겠군요. 공자님의 선친은 본교의 당당한 18대 교주이셨던 독고 무기 교주님이십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도의 대 효웅이시지요. 당시 그 분은 얼마 전에 태어난 외아들을 데리고 강호의 정세를 파악중이셨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분은 그만 소림사 중놈들의 계략에 빠져서 동행한 수하들과 함께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설명을 해 나가는 중년인의 어조에는 비분강개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독고성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의 외아들이 바로 공자님이십니다. 힘이 모자란 관계로 저희들은 이제야 공자님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독고성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난데없이 밝혀진 출생의 비밀을 이해하는데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는 현재 28세. 어린 시절을 소림사에서 줄곧 보낸 독고성은 이제 완전히 소림사의 허드렛 일꾼이 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이미 자신의 처지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내가 배교의 소교주라고?'

상념에 빠져 있는 독고성의 뇌리로 지금까지 그에게 가해진 각종 멸시와 경멸의 순간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간악한 사파 마두의 아들.

이것이 그가 겪어온 각종 고초의 주된 이유였다. 물론 꺾이지 않는 강직한 성격과 추악한 생김새 탓도 있었지만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 오랜 시간 동안의 냉대를 겪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모든 사실을 떠올리자 독고성의 눈빛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멸시를 가한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가 서서히 자라났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경험은 강렬했다. 상념을 모두 마친 독고성은 착 가라앉은 음성을 발했다.

그러니까? 내가 배교의 소교주란 사실이 틀림이 없소?

도위청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냉큼 대답했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공자님은 본교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소림사의 한낱 일꾼이 아닌, 사파 절대자의 후계자로 말입니다.

그 말에 독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알게 되자 그동안 겪어왔던 멸시의 나날들이 너무도 억울하게 느껴졌던 독고성이었다. 돌연 울음 섞인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너무, 너무 늦었군요. 당신들이 조금만 빨리 왔었더라면…….

반응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지 도위청은 그대로 고개를 푹 꺾었다.

용서하십시오. 당시 저희들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임 교주님의 사후, 그 틈을 타서 일신의 영달을 노리는 여러 무리들이 본교를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사준환 총사님이 아니셨다면 이미 본교는 자중지란으로 인해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터라 경황도 없었을 뿐더러 만약 공자님을 모셔온다 해도 신변의 안전을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음을 이해하십시오. 저희들은 불과 얼마 전에야 모든 불안요소를 척결하고 교중을 재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소공자님을 모시러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위청의 설명을 모두 들은 독고성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배교는 사준환이라는 총사가 통솔하고 있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습니다. 그 분은 오로지 독고가에 대한 충성심만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공자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셨다는 뜻이지요. 이제 공자님은 본교로 돌아가셔서 절세의 무공을 익히시고 멀지 않은 장래에는 반드시 본교 교주의 위에 오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도위청의 말에 독고성은 맥이 탁 풀렸다. 소림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에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문에 독고성은 도위청의 눈가에 서린 모호한 표정을 간파할 수 없었다. 독고성은 한동안 하늘을 올려보았다. 온통 검은 빛 일색인 하늘을 쳐다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바램이 이루어졌어.

어떻게 해서든 무공을 익혀 자신을 멸시했던 모든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어릴 때의 다짐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추악한 생김새 때문에 이곳에서 얼마나 멸시를 당했던가.

심지어 그는 함께 일하는 허드렛 일꾼들에게조차도 경원시되는 존재였다. 함께 밥을 먹으려는 자가 없을 정도로. 그런 상태에서 난생 처음 자신에게 극진히 대하는 자들을, 그것도 아버지의 수하라는 자들을 만나게 되자 그는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당면 현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때 독고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문득 호법승의 존재를 떠올린 그는 다급하게 도위청을 찾았다.

이 근처에는 나를 감시하는 소림승들이 있소. 그들이 알게 되면 큰일인데?

도위청은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띠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복한 인영 몇이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독고성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그것들은 바로 자신을 감시하던 호법승들의 잘려진 수급이었다.

이, 이들은?

이 놈들은 저희들이 처리했습니다. 이미 소교주님께 여러 번 죄를 범한 놈들이니 살려놓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제가 처리했습니다. 혹시 제 판단이 옳지 않았다면 거기에 합당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아, 아니오.

독고성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그를 감시하던 호법승들은 소림사의 무예승들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배교 교주의 유일한 아들인 독고성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배치된 고수들. 그런 호법승들을 이처럼 손쉽게 처리하다니…….

물론 그들 역시 자신을 멸시해 온 것은 사실이었고 따라서 독고성은 도리어 속시원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더욱이 소림 호법승들조차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고수들이 왔다는 생각에 새삼스럽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지배했다는 배교란 조직에 극도의 호감이 치밀어 오른 독고성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도위청에게 다가갔다.

그럼 지체 없이 배교로 떠나도록 합시다. 챙길 짐이란 아무것도 없소. 이대로 떠나면 될 것이오.

하지만 도위청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침통한 표정을 얼굴 가득히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저희는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독고성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왜? 무, 무슨 이유로?

비록 공자님을 감시하는 자들을 처치했다고는 하나 이대로 숭산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도 감당할 수 없는 절대고수가 이 근처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그자가 누구요?

도위청은 독고성의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바로 공자님의 선친을 무참히 살해한 자입니다. 혹시 소림성승 혜정이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 말에 독고성은 아연해했다. 물론 그는 소림성승에 대해 그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림사의 명실상부한 천덕꾸러기였던 독고성,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림성승 혜정이었다. 물론 직접 칠종단금술을 시술했다는 인연을 떠나서 그는 소림사에서 독고성의 출중한 자질을 알아본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무공방면에 대한 독고성의 자질은 정말 뛰어나다 말할 수 있었다. 그 자질을 제일 처음 알아차린 소림성승은 암암리에 하늘이 꺼질 듯한 탄식을 터뜨린 바 있었다.

허, 정말 대단한 자질이군. 이 아이는 소림 제일의 기재라는 명아에게도(영호명을 말한다) 전혀 뒤지지 않는 오성을 가지고 있어. 이런 아이가 사파라니 정말 애석하구나.

물론 자질이 뛰어나다고 사파 거두의 아들에게 무공을 전수할 순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소림성승은 애초의 목적대로 독고성에게 불법을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혜정은 독고성에게 하루에 한 번 자신을 찾아와 불법을 전수받도록 조처했다. 그런 연유로 독고성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소림성승을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불법을 전수받는 일은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불법이란 원래 자비를 최우선 덕목으로 삼는 법. 무수한 멸시 속에서 사람들에게 뼈에 사무친 증오심을 갖게 된 독고성에게 불법의 원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림성승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시간을 내어 독고성을 지도했고 그것은 소림사의 허드렛 일꾼이 된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독고성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불허했다.

그, 그가 아버지를 죽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비록 놈들이 비밀에 붙였지만 그 일은 이미 무림 각파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