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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시 딸을 불러 의향을 물어보았다

사윗감으로 필립을 내정한 에드워드 후작은 넌지시 딸을 불러 의향을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일라이져는 무척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녀도 필립이 자상한데다 무척 잘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 정도라면 두 말 없이 시집가겠어요.

한시름 던 에드워드 후작은 지체 없이 필립을 불러들였다. 자초지종을 전해듣자 필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제겐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자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칠 작정인가?

하, 하지만…….

잘 생각하게. 이것은 아무나 잡을 수 없는 기회야. 만약 승낙하면 자네를 그 즉시 근위기사 단 분대의 분대장으로 임명하겠네. 일라이저와 결혼식을 올린 뒤 총 분대장으로 승격시켜줄 것을 약속하지. 언젠가는 부단장인 내 자리를 이어받을 테고……. 그러니 잘 생각해 보게.

그래도…….

거듭 망설이는 필립이었지만 에드워드 후작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네는 아마 순수한 실력으로 근위기사에 올랐다고 생각하나보군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야. 내 명령 한 마디면 자네는 그 즉시 일반 기사로 좌천된다네.

원래대로 말일세. 어쩌면 산간 벽지에 파견될 수도 있어. 사실 내 추천장이 아니었다면 자넨 백년이 지나도 근위기사가 될 수 없었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약 내 딸 일라이저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자네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될 것임을 보증하지.

무척 결정을 내리기 힘든 제안이었다. 필립이라고 가슴속의 야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예롭게 이름을 날리고 싶은 것은 전 테르비아 기사들의 염원이었다. 그 때문에 필립은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야 했다.

비록 케이트와 어린 아이 티미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금 박봉에 근무여건도 열악한 일반 기사로 돌아가기는 정말 싫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후작의 협박대로 산간벽지로 좌천된다면……. 아마도 그의 야망은 영원히 접어버려야 할 지도 몰랐다. 결국 필립은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생각을 좀 해 보겠습니다.

잘 생각하게. 자네의 미래가 걸려있는 일이야.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지만 한 번 지나간 기회는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네.

에드워드 후작의 앞을 물러 나온 필립은 그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케이트를 불러놓고 자초지종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케이트로써는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홀어머니를 여읜 채 오직 필립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단란한 가정을 송두리째 풍비박산내려는 에드워드 후작이 너무도 야속했다. 하지만 그가 남편의 운명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으므로 케이트로써는 오로지 남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작정이에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통 모르겠어. 하지만 난 도저히 당신과 티미를 버릴 수가 없어.

필립의 말에 겨우 가슴을 쓸어 내린 케이트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며칠동안 별 탈 없이 귀가하던 필립은 이후로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케이트를 볼 낯이 없었던지 필립은 일절 집에 오지 않았다. 그저 편지 한 장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을 뿐이었다.

[미안하오. 나를 용서하시오. 케이트.]

짤막한 글귀에는 필립의 뜻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야망을 위해 아내와 어린 자식을 서슴없이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케이트는 6개월 동안이나 홀로 티미를 키우며 필립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필립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꼬박꼬박 가져다주던 봉급조차 뚝 끊겨버린 터라 케이트는 무척 어렵게 살아야 했다. 어린 티미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식량이 모조리 떨어지자 케이트로썬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게 되었다.

며칠을 굶다 못해 그녀는 결국 용단을 내렸다. 어린 티미를 데리고 바얀카를 떠나가기로……. 하지만 영양실조로 약해진 그녀가 힘든 여행을 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곳에서 힘이 빠진 그녀는 세상을 비관하며 절벽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케이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래도 그 사람을 원망하진 않아요. 그런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니까요.

케이트의 사연을 모두 들은 용병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 자는 율리아나였다. 예쁜 입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개자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는지 그녀는 계속 씨근거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내와 자식을 버려? 천하에 나쁜 자식. 아니 어떻게 그런 자식을 가만히 내버려둬요?

왜 그냥 떠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시장바닥에 퍼질러앉아 소문이라도 퍼뜨려야지요. 그 자식이 바얀카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출세를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리는 그런 놈은 완전히 사회에서 매장시켜버려야 해요.

뜻밖의 반응에 케이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지금 분을 참지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였으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 할 건데…….

불쑥 끼여드는 데이몬을 노려보며 율리아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죽여버려야죠. 그런 놈은 살 가치도 없는 놈이에요.

살기가 주렁주렁 묻어 나오는 소름끼치는 말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율리아나의 말투를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도리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더군요. 그래도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거든요.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떠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흥! 그래서 그놈 좋으라고 자살을 결심한 것이로군요. 그게 그놈의 의도대로 되는 것임을 정녕 몰랐어요.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사람이 멍청해요?

율리아나는 이제 케이트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쏟아지는 비난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인간 말종 같은 놈. 내 어떻게든 그놈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어.

듣다 못한 케이트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율리아나의 입이 닫혔다.

그, 그만해요. 그래도 그는 티미의 아빠인걸요. 나 하나 사라져서 그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충분히 그러겠어요. 흐흐흑.

또다시 오열하는 케이트. 용병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애절한 사연에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율리아나가 카심에게로 고개를 팩 돌렸다.

카심. 도저히 이대로 갈 수가 없군요. 우린 케이트를 도와야 해요.

카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동정이야 충분히 가지만 도저히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근위기사단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낱 용병단이 간섭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카심은 무척 조심스럽게 율리아나를 달랬다.

공주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 역시 그 작자를 잡아죽이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없으면 만들어내야지요. 설마 케이트를 두고 그냥 떠나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율리아나가 또다시 고집을 부리자 카심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금의 사정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케이트를 위해서는 여비를 좀 보태주는 것이 가장 나을 듯 싶습니다. 그녀가 조용한 마을에 가서 걱정 없이 티미를 키울 수 있도록 적당한 금액을 용병단의 재정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카심으로썬 상당히 마음을 쓴 기색이 역력한 제안이었지만 율리아나는 그것조차도 매멸차게 거부했다.

그건 말도 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케이트가 행복해할 것 같아요? 게다가 티미는 또 어쩌고요.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아빠 없이 자라게 할 생각인가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카심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말싸움으론 도저히 율리아나를 제압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 율리아나는 에드워드 후작의 딸에게까지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감히 아내가 있는 남자를 노리다니……. 천하의 나쁜 년. 보나마나 그년은 싸가지가 하나도 없는, 고집만 부리는 못된 년이 틀림없어. 죽일 년 같으니라고…….

'그건 바로 너잖아?'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미첼은 사력을 다해 입술을 억눌렀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는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율리아나가 고개를 팩 돌려 미첼을 노려보았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미첼은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날 보는 거지?

아무래도 너와 내가 나서야겠어.

거침없이 내뱉는 것을 보니 뭔가 결정을 내린 듯 싶었다. 율리아나는 곧 심중의 말을 남김없이 미첼에게 털어놓았다.

내 생각에 모든 것의 시초는 바로 그 일라이전가 하는 년이야. 그러니 그년을 먼저 처리해야겠어. 그래야만 천하에 나쁜 필립이란 놈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은 밉지만 그래도 티미의 아빠이니…….

하, 하지만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딸을 무슨 수로…….

조금 뒤 율리아나의 설명을 들은 미첼은 머리털이 송두리째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미남계를 써야 할 것 같다. 일단 이 중에서 가장 인물이 나은 게 바로 너야. 그러니 네가 테르비아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 일라이전가 뭔가 하는 년을 꼬시도록 해봐. 그년은 보나마나 머리에 똥만 찬 멍청한 계집일거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꼬시지 못할 리가 없어. 그렇게 해서 그년의 마음이 돌아선다면 필립이란 작자가 다시 케이트에게 돌아올지도 몰라.

미, 미쳤군.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내 정신은 지금 지극히 맑아. 명심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후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도 몰라. 알다시피 네 아버님은 내 말이라면 결코 의심하지 않으니까.

졸지에 빼도 박도 못하게 된 미첼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의 제안은 용병들조차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여인을 돕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방법이 워낙 극단적이라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미첼이 안됐다고 느꼈는지 카심이 조심스럽게 둘 사이에 개입했다.

하지만 공주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현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물론 미첼이 실력이 있는 기사란 것은 인정하지만 근위기사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자고로 실력과 함께 충성심이 입증되지 않은 자는 결코 궁정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몰래 잠입해서라도 일을 성사시켜야 해요.

다짜고짜로 고집을 부리는 율리아나. 보다 못해 케이트까지 나섰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성의는 고맙지만 그만 하세요. 그렇게 마음 써주신 것만으로도…….

아니에요.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당신은 잠자코 가만히 있어요.

냉랭하게 케이트에게 쏘아붙인 율리아나는 데이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뭐 말인가?

출세 때문에 아내와 자식을 버린 빌어먹을 작자와 그래도 그놈을 못 잊어하는 불쌍한 케이트를 위해 마법을 한 번 써 줄 생각 없어요.

당신의 실력이라면 미첼의 얼굴을 그 어떤 여자도 반하게끔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어요.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고집불통인 점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불쌍한 여인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 주려는 율리아나의 마음씀씀이가 그리 밉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끼를 덥석 물 데이몬이 아니었다. 데이몬은 도리어 은근히 율리아나의 성질을 박박 긁고 있었다.

캬! 정말 아름다운 순정이야. 자신과 아이를 버린 남자를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희생할 생각을 하다니…….

케이트란 여인의 마음가짐은 전 아르카디아의 여인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의 가장 큰 덕목이지. 암 그렇고 말고…….

율리아나의 눈초리에 서서히 쌍심지가 돋워졌지만 데이몬은 모른 척 넉살좋게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 그렇게 되면 그녀의 고결한 희생정신이 도리어 희석되어버릴 테니…….

이런 빌어먹을 작자.

참다못한 율리아나가 손을 날렸다. 흑마법사고 뭐고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당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율리아나의 손은 데이몬의 뺨에 채 닿기도 전에 덥석 잡혀버렸다. 율리아나는 고함을 빽 질렀다.

이것 놔!.

잡힌 손을 빼려고 악을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맥문을 정통으로 잡힌 이상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데이몬의 능청스러운 말이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따귀는 별로 효과적인 수단이 아냐. 맞아봐야 별로 아프지 않거든.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팔을 들어봐.

율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몬이 잡은 손을 치켜든 것이었지만. 데이몬은 다른 손을 뻗어 율리아나의 겨드랑이 밑 오목한 곳의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사람의 몸에는 많은 급소가 있어. 같은 힘으로 치더라도 정확히 급소를 가격하면 효과가 훨씬 크지. 이를테면 이곳도 맞으면 무척 아픈 급소 중 하나야. 힘이 약한 여자들은 오로지 이런 급소를 노려야만 사내를 금방 무력화시킬 수 있지. 한 번 체험해 보겠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 부분을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물론 상대가 여자임을 감안해서 힘을 어느 정도 조절했지만 말이다.

꺄아악.

데이몬이 가격한 곳은 바로 액내혈(腋內穴)이었다. 심경의 요혈로서 극천이라고도 불리는 이 혈도는 치명적이진 않지만 엄청난 통증을 유발하는 급소 중 하나였다.

율리아나는 삽시간에 양팔을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얼마나 아팠던지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그 상태로 율리아나는 한참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금 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율리아나는 표독스런 눈초리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넉살을 떠는 데이몬.

어때 효과가 확실하지? 앞으론 구태여 따귀를 날리는 것보다 급소를 노리는 것이 좋을 거야. 시간이 나면 인체의 급소를 하나씩 가르쳐 주지.

선심이나 쓰듯 내뱉는 말투였지만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몸을 돌린 율리아나는 미첼에게로 똑바로 걸어갔다.

안되겠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야. 네가 그 얼굴 그대로 미남계를 써야 할 것 같다.

미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미남계를 펼친다는 것은 명예로운 기사가 할 행동이 절대로 아니었으므로…….

아무래도 안되겠어.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런 짓은 결코 할 수 없어.

미첼을 노려보는 율리아나의 눈빛은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불쌍한 여인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이구나.

사정은 측은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율리아나는 미첼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뜻이야?

미첼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의 손길을 막을 만반의 채비를 갖춘 채 말이다. 경험에 따르면 이럴 경우 그녀는 십중팔구 따귀를 날릴 것이 분명했다.

이 나쁜 자식.

미첼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율리아나의 손이 파공성과 함께 허공을 가르자 미첼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얼굴을 덮은 손위로는 어떠한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통증은 겨드랑이에서 전해졌다. 그것도 지금껏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통증이.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커어억.

숨통이 콱 막히는 듯한 통증이었다. 율리아나는 따귀를 날리려다 말고 데이몬에게서 배운 급소를 그대로 질러버린 것이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탓에 겨드랑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총명한 율리아나라서 그녀의 주먹은 정통으로 미첼의 액내혈을 가격했다.

애석하게도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서 미첼은 통증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두 팔을 감싸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미첼.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끙끙 앓는 모습은 조금 전 율리아나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아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것 꽤 쓸만한 기술이네?

그 소리에 용병들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맞아보진 않았지만 미첼의 모습을 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성격을 보아 상대를 가릴 율리아나가 아니었기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마치 철없는 개구장이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쥐어준 것과 다름없는 격이었다.

그런 용병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이번에는 카심에게 다가왔다.

할 수 없군요. 부득이 대장이 수고할 수밖에 없네요. 미첼보다 용모가 좀 떨어지지만 대장도 나름대로 남자다운 매력이 있으니 한 번 시도해 볼 만 해요.

카심은 본능적으로 양쪽 겨드랑이를 가렸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립니다. 나에겐 그 어떤 여자도 넘어오지 않을 겁니다.

눈이 삔 여자가 아닌 이상.

해 보지도 않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둘의 말싸움. 느긋하게 듣고 있던 데이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헛수고야 그만 하도록 해.

율리아나의 눈썹이 급격히 휘어졌다. 하지만 데이몬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보기엔 여기에서 필립이란 녀석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만에 하나 근위기사단 부단장 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그녀석이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율리아나는 말문이 콱 막혔다. 데이몬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에겐 고유의 자존심이 있다. 특히 기사라면 정도가 더 심하겠지? 버림받았다고 자신이 한 번 내친 여자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어. 상황을 보니 그 녀석은 필경 결심을 단단히 했을 거야.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는 말인가요?

방법은 분명히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지만.

데이몬의 장담에 율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용병들의 시선도 일제히 데이몬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이미 필립과 케이트를 재결합시키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지어놓은 참이었다. 케이트 역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는지 애절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런 일행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가슴을 쭉 폈다.

내가 나선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야. 알다시피 난 9서클의 마스터.

불가능한 일도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

저, 정말인가요?

그럼. 하지만 문제가 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것은 나로써도 상당히 힘을 들여야 하는 일이야. 엄청난 심력과 마나를 소모해야 하고 땀을 엄청나게 흘려야 성사시킬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케이트란 여인은 오늘 처음 본 여인이다. 나로써는 힐링을 펼쳐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비로소 데이몬의 속마음을 깨달은 율리아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사람이 왜 그래요? 케이트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불쌍한 것과 도와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야.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엄청난 노력을 들여 도와줘야겠다는 필요성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겠군.

빌어먹을 늙은이.

결국 율리아나는 막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그래도 과거보다 많이 누그러진 것은 데이몬의 엄청난 능력을 실감한 때문인 듯 싶었다.

그래서 당신이 사악한 악당이라 불리는 거예요.

맞아. 난 엄청 나쁘고 사악한 악당임에 틀림이 없지.

가슴을 쭉 편 데이몬은 카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한 번 쳐다본 데이몬은 음흉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거죠?

하지만 상황은 항상 변하는 법이야. 만약 네가 내 요구를 하나 들어준다면 케이트를 도와줄 수도 있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떠올린 율리아나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지금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이 일을 미끼로 내 몸을 요구하려는…….'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케이트가 울먹이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에요. 그렇게 마음써주신 것만 해도 전 더 이상 여한이 없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세요. 결코 요구를 들어주지 말아요.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힐끔 쳐다본 율리아나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미 그녀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요구조건이 도대체 뭐죠?

조건은 간단해.

데이몬의 요구조건을 들은 율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용병들과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내 볼에 입을 맞춰주며 최대한 상냥하게 날 불러주는 거야 '아저씨' 라고 말이야. 어때?

미, 미쳤군.

율리아나는 도리질을 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물론 몸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조건이 너무 엉뚱했다. 게다가 그것은 율리아나에겐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나, 난 못해. 죽어도…….

세차게 도리질치는 율리아나를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겉과 속이 다른 모양이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필사적으로 케이트를 도와주려 하더니……. 미첼과 카심에게 미남계까지 시키려 하면서 자기는 그런 작은 일조차 할 마음이 없는 건가?

그, 그게 작은 일이에요?

그럼 큰 일인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용병들을 죽 둘러보았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불행에 빠진 여인을 도와주는 대가로 매일 아침 입맞춤 한 번이 그리 큰 일인가? 그것도 입술이 아닌 볼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눈짓의 진의를 알아차린 카심이 너스레를 떨었다.

뭐 그 정도야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죠. 누가 뭐래도 흑마법사님은 할아버지 뻘이잖습니까. 만약 저희들이라면 하루에 백 번이라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

이번에는 데이몬이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를 차례였다. 험상궂은 용병들의 키스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하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케이트를 돌아보았다.

이것 봐. 케이트 내 조건이 무리한 조건인가?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데이몬이 제시한 조건은 결코 무리하다 볼 수 없는 요구였으니까.

싫으면 할 수 없고……. 어차피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잘 되었군.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데이몬. 용병들은 슬그머니 율리아나를 긁기 시작했다. 아주 지능적으로 말이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그 정도로 불쌍한 케이트를 도울 수 있다면 난 백 번이라도 하겠는데…….

아마 그건 흑마법사님께서 거부하실 걸? 자네 얼굴이 오죽 험상궂어야지.

이 사람아 그것은 피차 일반 아닌가?

두런대는 용병들의 대화를 들으며 율리아나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반드시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거죠?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만약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는 네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해 주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적어도 내일 이내에 필립이란 녀석을 한달음에 달려와서 케이트 앞에 무릎 끓도록 할 테니까. 제발 날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이야.

정말이죠?

물론.

데이몬의 호언장담을 들으며 율리아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매일은 죽어도 못하겠어요. 그러니 딱 한 번으로 끝내는 게 어때요?

그럴 순 없지. 정 못하겠다면 시한을 한 달로 정하는 게 어떨까? 30번.

싫어요. 일주일 이상은 절대로 용납 못해요.

옥신각신 하던 둘은 마침내 기한을 열흘로 못박았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얼굴을 쭉 내밀었다.

그럼 오늘 첫 번째 입맞춤을 한 번 받아볼까? 최대한 애교를 부려 날 기쁘게 해 주도록…….

율리아나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미쳤군요.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릇 일을 청부할 때는 선금이란 게 있는 법이야. 이를테면 계약금이라고도 부르지.

나는 지금 계약금을 받으려 하는 거야. 여보게들. 사실이 그렇지 않나?

용병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데이몬에게 호응해왔다. 정말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파티였다.

맞아. 암. 계약금도 없이 일을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선금이 없다면 거래가 이루어질 턱이 없지요.

용병들이 일제히 데이몬을 두둔하고 나서자 율리아나는 울상을 지었다. 케이트 때문에 승낙하긴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작 열 번이야. 열 번만 하면 그만해도 된다고……. 오직 불쌍한 케이트만 생각해야 해.'

율리아나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데이몬의 볼을 향해 쭈뼛쭈뼛 입술을 가져갔다.

얼굴이 그게 뭐야? 상냥하게 하랬잖아?

이게 최대한 상냥한 거라고요.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율리아나. 결국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데이몬의 볼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췄다.

좋아. 이번에는 아저씨라고 할 차례야.

아, 아저…….

기어 들어가는 율리아나의 목소리에 데이몬은 눈을 부라렸다.

점심도 못 먹었나? 최대한 상냥하게 하라고 했잖아?

아, 아저씨

상냥하지 않아. 다시!

아저씨.

이를 악문 율리아나가 최대한 상냥하게 부르자 데이몬은 그때서야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좀 어설픈 감이 없지 않았지만 용서해 주겠어. 앞으론 계속 이렇게 해 주길 바란다.

말을 이어나가는 데이몬의 눈동자엔 모호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쩌면 그는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며 다프네와의 옛 추억을 되새기는 대리만족 말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입술의 감촉을 음미하던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박박 문지르는 율리아나를 본체만체 하며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좋아. 대장. 이곳에다 한 이틀 머물 채비를 갖추게. 나는 그동안 필립이란 녀석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준비에 착수할 테니…….

말을 마친 데이몬은 산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카심은 무척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카심의 생각으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고로 돌리기 힘든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돌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더구나 일국의 당당한 근위기사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굴복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심의 의구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할 수 없지. 이곳에다 천막을 친다. 모두들 천막을 칠 준비를 하라.

용병들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데이몬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필립의 마음을 돌려놓을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케이트. 당신은 나와 한 천막을 써요.

우거지상을 한 채 다가온 율리아나가 케이트에게 다가와 티미를 받아들었다. 케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 절을 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괜찮아요. 미친개에게 한 번 물린 셈치죠. 뭐.

잔뜩 찡그린 율리아나의 얼굴은 방긋 웃는 티미를 보자마자 환하게 밝아졌다.

조금만 기다리렴. 티미. 저 흑마법사가 사악하고 못된 것은 확실하지만 실력 하나는 틀림없는 작자이니 반드시 아빠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케이트의 얼굴에도 의구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 역시 남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일행들과 떨어져 인적이 드문 산 속으로 들어온 데이몬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큰 소릴 쳐놓기는 했는데 과연 가능할까?

아내와 자식을 버릴 정도라면 분명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봐야 했다. 그런 필립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자신이 있었다.

지금껏 겪어온 경험에다 그가 가진 흑마법의 힘을 감안하면 충분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데이몬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바닥에 난 잡초들이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화르르르.

그곳엔 금세 기괴하게 생긴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버린 재가 모여들어 형성된 마법진은 다름 아닌 소환마법진이었다. 데이몬은 몽마를 이용해서 필립의 마음을 돌리게끔 하려는 것이다.

평범한 나이트 메어론 불가능해. 몽마들의 군주라 불리는 인큐버스 정도만이 이 일을 해 낼 수 있어.

인큐버스(Incubus). 몽마들의 군주로써 거의 마왕 급에 근접한 존재였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침입하는 능력이 일반 몽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만큼 소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데이몬인 만큼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이델하르크는 인큐버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마왕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소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처럼 데이몬이 일행과 떨어져서 소환을 행하는 이유는 인큐버스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일행들이 인큐버스의 영향을 받는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라서 데이몬은 부득이 인적이 드문 산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콰콰콰콰.

소환마법진에 마력이 집중되며 소름끼치는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력은 언데드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마계의 존재를 소환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조금 뒤 마법진은 가공할 만한 광망을 토해내었고 그와 동시에 소멸되어버렸다.

마력의 소모가 극심했으므로 데이몬의 낯빛은 조금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되었군.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몽마들의 군주인 인큐버스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인큐버스 역시 평상시에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조금 뒤 허공에서 음산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나를 부른 자가 너인가? 하찮은 네크로멘서 따위가 날 불러내다니 놀랍군.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미 그는 소환마물에겐 항상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천한 것이 감히 누구 안전에서…….

인큐버스의 태도는 금세 돌변했다. 데이몬의 몸 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원천을 파악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네크로멘서의 몸에서는 방대한, 그리고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이 분출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대마왕 급에 필적하는 마력이었다.

이, 이 기운은…….

건방을 떤 죄로 인간계에서 소멸되고 싶으냐? 과연 내게 그럴 힘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인큐버스는 주저 없이 모습을 드러내어 부복했다. 적어도 마계의 생물들은 철저히 힘의 논리에 승복하는 존재들이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인큐버스는 상당히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몸에 요요로움이 흘러나오는 벌거벗은 젊은 남성의 모습, 머리와 몸을 둘러싼 뿔과 날개만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귀공자의 형상이었다. 그는 절대 복종을 뜻하는 오체투지로 데이몬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나이델하르크 님의 힘을 얻으셨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천한 종에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인큐버스의 지극한 태도에 데이몬은 안색을 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네가 몽마들의 군주라는 인큐버스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인큐버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네크로멘서의 몸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어둠의 마력. 만에 하나 네크로멘서가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런 인큐버스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시킬 일이 있다.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하지만 조금 뒤 데이몬의 말을 들은 인큐버스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그, 그런 일을 제게 시키시다니…….

할 수 없다는 뜻이냐?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명령이 너무 뜻밖이라서…….

인큐버스는 인간에겐 악명 높은 존재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침투해서 광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그의 주요 장기요 취미였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켜 망가지는 과정을 감상하는 것은 인큐버스의 가장 큰 유희였다.

그런데 네크로멘서는 지금껏 생각지도 못한 일을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그가 즐겨왔던 유희에 철저히 괴리되는 일이었다. 인큐버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을 하게 되리리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가능하겠느냐?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네크로멘서의 시선에 인큐버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즉시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거의 동시에 새로운 인큐버스가 마계에 생겨나겠지만 그래도 소멸되는 것은 그리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지엄하신 명령, 어김없이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구체적인 방법을 이제부터 일러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일을 수행해야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데이몬이 해야 할 일을 설명하는 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인큐버스의 얼굴은 곤혹감으로 일그러져갔다. 네크로멘서가 시키는 일이 마계의 존재로서는 내키지 않는 선행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테르비아의 수도 바얀카.

강대국의 수도답게 바얀카는 방대한 인구와 규모를 보유한 도시였다. 테르비아의 국력을 상징하듯 바얀카 중심에 위치한 황궁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완전무장을 한 채 석상처럼 늘어선 근위병들의 모습에서도 강렬한 힘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궁의 동쪽에 위치한 별궁. 그 한쪽에는 근위기사들의 숙소가 있다. 아직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독신 근위기사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난데없이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한숨을 몰아쉬는 젊은 기사의 각진 얼굴에서는 강직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금방 교대를 마치고 나온 듯 갑주에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닦을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젊은 기사의 이름은 필립 로렌스, 당당한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의 일원으로 전도유망한 기사였다. 그는 며칠 후 근위기사단 부단장인 에드워드 후작의 딸 일라이저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식을 치르고 나면 곧바로 분대장으로 승격한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근위기사는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걱정이라곤 있을 것 같지도 않은 필립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맺혀 있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용서하시오.

그는 얼마 전 버린 부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혼인식을 올리진 않았지만 그는 이미 한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가슴속의 야심 때문에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말았으니……. 필립은 입술을 악문 채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다. 나로서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으니…….

어린 아들 티미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금 우울해졌지만 필립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며칠 전 부하의 보고로 케이트와 티미가 바얀카를 떠났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필립은 착잡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케이트와 티미를 버린 사실에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홀가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진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기를 바라겠소.

나지막이 지껄인 필립은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누구요?

저예요. 당신의 약혼녀.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필립은 벌떡 일어나서 문으로 다가갔다.

덜컥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필립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일라이저, 어쩌자고 이곳까지 왔소?

약혼자가 보고 싶어서 왔지요.

일라이저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필립의 입술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복도에 서 있던 기사들이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지만 일라이저는 막무가내였다. 난처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일라이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필립은 묵묵히 그녀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었다.

조금 뒤 일라이저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필립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을 좀 내줘요. 당신과 함께 바얀카의 야경을 구경하고 싶군요.

그, 그건…….

필립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해졌다. 이미 그에겐 야간근무가 내정되어 있었다.

엄격한 근무수칙을 떠올린 필립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설득했다.

그것은 조금 힘들 것 같소. 오늘밤에는 근무가 있어서…….

괜찮아요. 아빠에게 얘기해서 근무에서 빼달라고 할게요.

순간 필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 될 말이오. 그렇게 되면 나 대신 다른 동료가 근무를 서야 하오. 명예로운 근위기사로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임무를 동료에게 떠넘길 수는 없소.

쳇! 고지식한 사람.

일라이저는 잔뜩 골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렸다.

모처럼 시내에 좋은 자리를 예약해 뒀는데……. 관둬요. 당신 아니면 갈 사람이 없는 줄 알아요?

미, 미안하오. 내일은 근무가 없으니 당신에게 충실할 수 있을 것이오.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잔뜩 토라진 기색의 일라이저를 필립은 열심히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노력이 성과가 있었던지 일라이저는 마침내 얼굴을 풀었다.

좋아요. 그럼 내일을 기대할게요.

생긋 미소를 떠올린 일라이저는 필립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뒤 그의 방을 빠져나갔다. 복도에 서 있는 기사들이 다급하게 얼굴가리개를 내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필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당돌한 아가씨야.

근위기사들의 숙소는 철저히 금녀의 구역이다. 원래대로라면 일라이저는 결코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후광을 적절히 이용해 벌써 여러 번 필립을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필립이 이처럼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햐! 좋았겠는데?

바얀카에서 으뜸가는 미인의 애정공세를 한 몸에 받다니……. 부러워서 잠이 안 올 지경이야.

근무 서던 동료들의 부러움 섞인 놀림을 받자 필립은 어깨를 으쓱했다.

놀리지들 마. 그만 하라고.

일라이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매일매일 우유 목욕을 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에 칠흑같이 새까만 눈동자, 붉은 입술은 항상 필립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케이트도 그리 못난 용모는 아니었지만 일라이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미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니 필립의 가슴이 벅차오를 법도 했다. 하지만 무언가 공허한 것이 항상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필립도 잘 알고 있었다.

야간 근무를 하려면 눈을 좀 붙여둬야겠군.

항상 따라다니는 종자를 불러 갑옷을 벗기게 한 뒤 필립은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꼬박 여섯 시간동안 서야 할 근무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할 듯했다. 하지만 이 수면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란 사실을 필립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근무가 무척 고단했던지 필립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았으므로 피곤함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립은 오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만큼 주위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척을 금방 감지했던 것이다.

필립은 충혈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놀란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헉!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군가가 침상 가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머리맡에 놓아둔 검을 잡으며 필립은 의문의 불청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불청객은 사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중년의 기사였다. 주름잡힌 얼굴에는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필립은 우선 그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상대의 정체를 간파하는 데는 복장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금세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상대는 뜻밖에도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현 근위기사단 부단장은 바로 에드워드 후작이다. 그 말고는 누구도 부단장의 제복을 입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필립은 벼락같이 검을 뽑아들려 했다. 모르는 사람이 부단장의 제복을 입고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스파이란 뜻이었다.

이런 발칙한……. 감히 부단장님으로 위장하려 하다니…… 헉.

필립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맡에 놓아둔 검이 도무지 잡히질 않는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 한 번 검의 손잡이를 쥐려 했지만 허사였다. 놓여져 있는 검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물건처럼 손에 걸리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필립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묵묵히 보고 있던 불청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걸걸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음성이었다.

헛수고일세. 자네는 이 방 안의 물건들을 하나도 잡을 수 없네.

마침내 검을 잡는 것을 포기한 필립은 불청객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너, 너는 누구냐? 왜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있는 거지?

자네 방이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내 방이라 보는 것이 옳을 듯싶네. 주위를 한번 둘러보겠나?

불청객의 말에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곧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놀랍게도 이곳은 자신의 숙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가 원래 쓰던 숙소보다 족히 네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집무실이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장식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커다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립은 본능적으로 책상 위의 명패를 살폈다.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테르비아 근위기사단 부단장 필립 드 로렌스 백작]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필립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필립 로렌스라면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가운데 성과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신분이라니…….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게. 어디 내가 누군지 자세히 한번 살펴보겠나?

불청객의 말이 떨어지자 필립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처음에는 의심 섞인 눈빛이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다, 당신은…….

처음에는 다소 낯설어 보였지만 불청객의 모습은 살펴보면 볼수록 자신과 똑같았다.

주름살에 덮여 있긴 하지만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과 눈매, 그리고 콧날의 선이 거울 속에서 본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몇 십 년 후에 볼 수 있을 듯한 자신의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정식으로 날 소개하지. 나는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필립 드 로렌스 백작이라고 하네. 정확히 말하자면 이십 년 후의 자네이기도 하지.

미, 믿을 수 없소. 어떻게 이런 일이…….

로렌스 백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필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우수가 깔려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이것은 세상의 순리를 철저히 거역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네.

…….

자네는 지금 영혼만이 존재하고 있다네. 간단히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망령이라고 할까? 이곳은 자네가 살던 시대로부터 이십 년 후의 미래고, 난 흑마법의 힘을 빌려 자네의 영혼을 잠시 동안 이리로 불러왔다네.

도, 도대체 왜?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필립을 보며 로렌스 백작은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난 그저 몇 가지를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을 뿐이야. 이십 년 전의 나에게 말이지.

필립은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의 말에 서서히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좋소. 그렇다면 당신이 이십 년 후의 나라고 합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날 불렀소?

자신을 쏘아보는 필립의 시선을 맞받으며 로렌스 백작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침착성이로군. 내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정말 놀라워.

말 돌리지 말고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 주시오. 도대체 날 부른 이유가 뭐요?

굳이 설명을 들을 생각 따윈 하지 말게. 그저 날 따라다니며 보고 느끼면 되는 일이니까.

뭘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부터 시작될 걸세. 자네에게 허용된 시간은 정확히 네 시간이니까 그동안 많이 보고 듣고 그리고 느끼도록 하게.

일방적으로 말을 끊은 로렌스 백작은 곤혹스러움이 가득한 필립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몸을 돌렸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자네가 이곳에서는 단순히 망령에 불과하다는 점일세. 나를 제외하면 이곳의 그 누구도 자네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네. 물론 말하는 것도 듣지 못하지. 자네를 볼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아, 알겠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몰랐지만 필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스 백작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돌렸고, 필립은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뒤를 다급히 뒤따랐다.

이곳이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집무실이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러 차례 에드워드 후작을 알현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필립의 눈에 낯이 익은 장소였던 것이다.

과거와 동일한, 그러나 세월의 풍상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장소를 둘러보며 필립은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집무실 밖에는 부관이 머무는 책상이 놓여 있어야 했다. 놀랍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부관 자리에 앉아 있는 이가 필립에게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관의 얼굴을 본 필립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로널드…….

자리에 앉아 서류 뭉치에 파묻혀 있는 중년인은 바로 자신의 동료 기사인 로널드였다.

얼굴이 온통 주름살에 덮이고 콧수염을 길렀지만 필립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 로널드는 오랜 친구와도 같은 동료였기에 몰라볼 리가 없었다.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로렌스 백작을 쳐다보았다.

로널드를 부관으로 삼았소?

그렇다네. 기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녀석이지. 충실한 심복이라고 할까?

로렌스 백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널드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부단장님?

아닐세. 그냥 혼잣말이야.

로널드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금 일에 몰두했다. 로렌스 백작의 옆에 버젓이 서 있는 필립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때서야 필립은 자신이 로널드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정말이었군요. 이곳에서 내가 망령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네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말을 마친 로렌스 백작은 로널드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결재서류는 모두 완비되었나?

조금 있으면 끝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기다리셨다가 직접 가셔서 결재를 맡으시겠습니까?

아닐세.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수고스럽겠지만 서류가 완성되는 대로 자네가 가서 맡도록 하게.

로널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필립은 로널드의 눈가에 스쳐 지나가는 측은함을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가 아는 상식으론 조금 이상했기 때문에 필립은 문을 나서는 로렌스 백작을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뭐가 말인가?

제가 알기론 기사단 단장과 부단장이 결재하는 서류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단장이 결재를 받다니요? 도대체 누구에게 받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결재 방식이 바뀐 것입니까?

로렌스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필립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무척 쓸쓸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난 이곳에서 철저히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네. 대외적으론 근위기사단 부단장을 맡고 있지만 사실은 실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정확하지.

어,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도대체 결재를 누구에게…….

에드워드 공작일세. 나의 장인 말이지. 아! 자네는 아마도 후작으로 알고 있겠구먼.

필립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후작께서 결재권을 직접 행사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그분께서 뒤에 버티고 있으니 난 허울 좋은 부단장에 지나지 않아.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로렌스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문을 나섰다. 필립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집무실을 나선 뒤 로렌스 백작이 향한 곳은 과거 에드워드 후작이 살던 저택이었다.

로렌스 백작과 필립은 화려한 팔두마차를 타고 대로를 질주했다.

두두두두

마차를 타고 대로를 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고급 귀족에게만 한정된 특혜였다.

필립은 의혹 가득한 얼굴로 달라진 기운이 역력한 바얀카 시내를 둘러보았다. 기억에 있는 건물들은 세월의 흐름을 겪은 기색이 역력했고 못 보던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테르비아의 국력을 과시하듯 바얀카는 더욱 번창하고 활기찬 모습을 필립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서 아름다운 저택이 모습을 드러내자 로렌스 백작은 필립을 쳐다보았다.

저곳이 내가 사는 저택일세. 근사하지?

필립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아닌 게 아니라 저택은 정말 훌륭했다. 테르비아에서 지체 높은 귀족들만 사는 주택가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이었다. 워낙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이곳에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신이 장차 이런 멋있는 저택에서 살게 되다니……. 그러나 필립의 상기된 표정을 들여다보며 로렌스 백작은 씁쓸히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가 보군.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게. 어차피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니…….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닐세. 그럼 들어가 볼까?

거대한 철제 정문 앞에 마차가 서자 문지기인 듯한 병사 둘이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그들의 얼굴엔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인 일로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서둘러 안에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렌스 백작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어서 문이나 열도록 하게.

그, 그래도…….

마치 지은 죄라도 있는 듯 문지기들은 계속 쭈뼛거렸다.

어허!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할 생각인가?

결국 그들은 로렌스 백작의 호통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문을 열어 젖혔다.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집 안으로 마차를 진입시켰다.

이랴!

마차는 돌이 깔린 길을 따라 거침없이 내달렸다. 마차로 한참을 달려야 할 정도로 정원은 넓었다. 필립이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감상하는 사이 마차는 거대한 저택의 현관에 가 멎었다.

빨리 따라오게.

마차에서 뛰어내린 로렌스 백작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에 들어갔다. 필립도 부랴부랴 뒤를 따랐다. 저택 안에 들어간 백작은 곧장 이 층으로 올라갔다. 놀란 기색의 경비병들이 부동자세를 취했지만 로렌스 백작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화려한 문이 앞을 가로막자 로렌스 백작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 젖혔다.

덜컥

문이 열리자 안의 장면이 적나라하게 둘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뜻밖이라 필립은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벌거벗은 남녀 몇이 서둘러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비릿한 육향이 감돌고 있는 것을 보니 한눈에 보아도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난데없이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침실에서 벌어지는 난교 파티라니…….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입을 벌리고 있던 필립의 귀에 찢어지는 듯한 기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온다면 기별이라도 전하고 와야 할 것 아니에요!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죠, 노크도 없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이는 여인이었다. 이불 속에 파고 든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벌거벗은 몸을 훤히 드러낸 채 잔뜩 화가 난 듯이 허리춤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필립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녀는 바로 일라이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 세상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일라이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월의 흐름이 조금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틀림없는 일라이저였다. 팍 늙어 버린 로렌스 백작과는 달리 그녀는 거의 나이를 먹지 않은 듯 보였다. 아직까지 탱탱한 피부와 미모는 로렌스 백작과 너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돌연 옆에서 분기충천한 로렌스 백작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잘들 하는구려. 이번에는 하인들과 난교 파티라니…… 부끄럽지도 않소?

흥! 꼴에 자존심은…….

일라이저는 적반하장 격으로 대들고 있었다.

진즉에 당신이 날 만족시켰으면 내가 이랬을 것 같아요? 고작해야 오 분도 가지 못하는 토끼만도 못한 주제에…….

로렌스 백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자존심을 가진 남자로서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보고 있던 필립조차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이저의 태도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디 벨 테면 베어 봐요!

해보라는 듯 목을 들이미는 일라이저였다. 시퍼렇던 서슬과는 달리 로렌스 백작은 힘없이 검 자루를 놓았다.

그만 둡시다.

흥! 그럴 용기도 없는 작자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일라이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만 빠끔히 내놓은 남녀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라.

네.

그들은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다급하게 물러났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였고 집어든 복장을 보아 시종과 시녀가 분명했다. 특히 시종들은 하나같이 열다섯 살을 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녀석들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흘겨보던 일라이저가 성난 눈빛으로 로렌스 백작을 노려보았다.

오늘의 무례를 결코 간과하지 않겠어요. 반드시 아버지의 질책이 있을 테니 각오해요.

말을 마친 일라이저는 옷을 집어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화풀이라도 하듯 문을 꽝 닫아 버렸다.

엉거주춤 선 로렌스 백작의 얼굴은 허탈함으로 가득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필립이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거짓말이야. 설마 일라이저가 이럴 리가 없어.'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내심과는 딴판이었다.

믿을 수 없군요. 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로렌스 백작은 몸을 빙글 돌렸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필립은 별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택을 나선 로렌스 백작은 조용히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내가 무척 측은하겠지?

…….

하긴 자네에겐 남의 일이 아닐 테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자네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묵묵히 듣고 있던 필립은 안색을 굳혔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이런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는 거죠? 도대체 무슨 의도로?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에 이제 로렌스 백작까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립이었다.

하지만 로렌스 백작은 도무지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네. 난 자네에게 이 상황을 믿으라고 부른 게 아냐. 그저 보고 느끼라는 것이지.

저, 전 도저히 작금의 일을 믿을 수 없습니다.

굳이 믿을 필요는 없네. 그저 자네가 보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하니까 말이야.

그 후로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충격이 적지 않은 탓에 필립은 말을 잊었고 로렌스 백작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필립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말하게.

자식들은 어디에 있죠? 이십 년이 흘렀다면 분명히 장성한 아들이나 딸이 있을 텐데…….

행여나 자식들이 어미의 방종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로렌스 백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슬하엔 자식이 없다네. 일라이저에겐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녀는 몸이 늙는다는 이유로 자식을 낳는 일을 극구 피하지.

어, 어떻게 그런…….

사실이네. 자네도 익히 보지 않았나? 그녀가 나이답지 않게 무척 젊다는 사실을.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미모와 몸매를 유지하는 것뿐일세. 내 수입의 팔십 퍼센트는 그녀의 미모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