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몬의 얼굴에 쑥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들도 들었나?
네. 사실 마법사님의 음성이 크긴 했죠. 저희들 모두가 똑똑히 들었으니……. 아무튼 정말 잘 하셨습니다. 마치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카심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 역시 통쾌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텍의 소행에 대해서 누구하나 분통을 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통쾌해야 할 미첼과 율리아나는 그저 불안한 듯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일행도 아니고 남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테르비아의 법 집행은 유난히 혹독하죠. 모르긴 몰라도 그 마법사 녀석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것입니다. 운이 나쁘면 바로 교수형에 처해질 지도 모르지만.
그렇겠군. 멍청한 소드 마스터 녀석이 반역죄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무튼 눈에 상당히 거슬리는 녀석이었어.
그 때문에 순순히 잡혀주신 것입니까?
데이몬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저항하지 않고 사로잡힌 데에는 드래곤을 유인하려는 의도가 절대적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내심을 솔직히 밝힐 순 없는 노릇이다.
뭐 그런 점도 없잖아 있지. 그토록 거리낌없이 타인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녀석은 자신이 직접 누명을 써 봐야 해. 그래야만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지.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카심은 유쾌하다는 듯 가슴을 폈다. 그런 카심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정색을 했다.
그리고 해결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네.
무, 무엇입니까?
카심이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뜨자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엉거주춤 서 있는 미첼과 율리아나를 가리켰다. 감정이 아직까지 삭지 않았는지 데이몬의 표정은 비교적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우선 저 카르셀 왕녀 일행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카심의 얼굴에 다소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소행을 생각하면 여기서 인연을 가차없이 끊어 버리는 것이 합당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체포되는 것까지 감수한 율리아나에게 결코 함부로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자신들이 데이몬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저들 역시 카심 용병단을 부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흑마법사가 철없는 카르셀의 왕녀에게 단단히 빠져 있으니 지금으로썬 그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들에 대한 일은 마법사님께 일임하고 싶습니다만…….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카심. 하지만 데이몬은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닐세. 사실 자네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네. 자네들은 아마도 내가 저 카르셀의 왕녀에게 연정을 품었으리라 짐작했겠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카심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수긍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딜레마. 용병들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데이몬은 그런 용병들의 면면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세. 난 무척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일세. 백년의 세월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내가 아무리 악당이래도 손녀의 손녀 뻘도 되지 않는 어린아이에게 흑심을 품을 정도까진 아냐. 설사 마음이 동한다 하더라도 몸뚱이가 따라줄 지도 의문이고…….
데이몬의 넉살에 용병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주인공(?)이 되어버린 율리아나만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을 뿐이었다.
하하하.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평소와는 달리 데이몬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로지 저 왕녀의 용모뿐이라네. 그 외의 것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정확한 내 본심이라고나 할까. 이제부터 그 내막에 대해 설명하겠네.
용병들의 시선은 또다시 데이몬을 향해 집중되었다. 율리아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일세. 수백 년 전이라 생각해도 무방하지. 당시 한 소녀가 있었네.
과거의 추억을 상기하자 데이몬의 눈빛은 어느덧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청순한 소녀였지. 단 한 번 본 순간 내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아버릴 정도로…….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녀는 세상에서 감히 비견할 여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네. 그녀는 그 정도로 착하고 사랑스러웠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일세.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흑마법사의 사랑타령. 하지만 설명해나가는 데이몬의 어조가 너무도 절절했기에 용병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난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네.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참다못해 패터슨이 불쑥 끼여들었다.
혹시 죽었습니까?
데이몬의 얼굴에 쓸쓸한 감정이 서렸다.
많은 것을 알려 하진 말게. 그 이후로 난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으니 말일세.
이것은 그저 내가 가슴속에 곱게 묻어놓은 추억일 뿐이라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그저 마음속에 묻고만 살아왔다네.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말일세. 하지만 나는 저 카르셀의 왕녀를 보고 나서 엄청나게 놀랐다네. 왜냐하면 왕녀의 용모가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과 정말 똑같았기 때문이었네.
지금까지 줄곧 왕녀의 얼굴을 쳐다봤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일세.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오래 전 추억이 치밀어 올라 그 순간만은 잠시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일세.
그, 그랬었군요.
비로소 곡절을 알게 된 용병들은 심정을 익히 짐작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신파조의 사랑타령이었지만 데이몬의 말투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역력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슬픈 일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용병들은 데이몬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데이몬은 카심을 향해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사실 자네들과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에는 그런 곡절이 숨어있었네. 그 때문에 그동안 왕녀의 방종을 너그러이 묵인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여기서 끝맺겠네. 어차피 카르셀의 왕녀는 나에겐 단지 얼굴만 닮은 타인일 뿐이야. 자네들을 동료로 인정한 이상 그 동안 행해졌던 유희를 깨끗이 접어버리겠네. 그러니 다시는 왕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데이몬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옴에 따라 율리아나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중대한 착각을 한 것이다. 흑마법사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는 크나큰 착각.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율리아나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알다시피 저 카르셀의 왕녀가 우리 용병단에 끼친 손실은 결코 적지 않아.
이제 내 관심은 그녀에게서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곳에서 그녀의 거취에 대한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게 어떤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계획대로 임무를 완수하던지 아니면 여기서 계약을 파기하고 갈 길을 떠나던지, 둘 중 하나를 택일하게. 만약 헤어지는 길을 택한다면 위약금은 내가 부담하겠네. 그동안 즐거웠던 추억을 되새기게 해 주었던 보답으로라도 충분한 돈을 지불할 테니.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카심의 얼굴에 상당히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은 분명 쉽지 않은 결정임에 틀림없었다. 심문 받을 당시 율리아나가 자신들과 헤어졌다는 진술만 했더라도 이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벌받을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용병단과의 계약해지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계약이 유효하다 봐야 했다. 결국 카심은 율리아나에게 직접 의향을 물어보기로 작정했다.
율리아나 공주.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오.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거취를 결정할 테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주기 바라오.
정색을 하며 질문하는 카심을 쳐다보며 율리아나는 무언가를 결정한 듯 안색을 굳혔다.
아직까지 계약은 유효한 거죠?
크로센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유효합니다.
카심의 대답에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임무를 완수해주길 바래요. 나 역시 다른 용병단을 고용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용병들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저 돼먹지 않은 계집아이를 또다시 모셔야 한다니.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곤욕을 치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용병들은 카심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카심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기사는 아니었을망정 카심은 명예와 약속을 중시하는 사나이였으므로.
일단 율리아나 공주는 심문과정에서 우릴 부정하지 않았다.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린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견이 있는 사람 있나?
극도로 실망한 눈치였지만 용병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같은 대장의 결정이었기에 불만이 있건 없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카심은 휘하 용병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확실한 통솔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진로가 결정되자 카심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와 같이 결정이 났습니다. 마법사님께 혹시라도 이견이 있으십니까?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내심으론 기쁘기 한량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비록 겉으로 마음을 돌렸다고 말하긴 했지만 율리아나의 용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었으므로……. 하지만 어느 정도 딴지를 걸어놓을 필요는 있었다.
대장이 결정을 내렸다면 나도 순순히 따르겠네. 하지만 저들에게 단단히 서약을 받아야 할거야. 계속 말썽을 부리고, 혹시라도 날 또다시 제보할 지도 모르니 말이야.
사실 난 감옥에 갇히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아. 욕설을 들어먹는 것은 더더욱 싫고.
데이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듯 카심은 율리아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을 때에는 가차없이 계약을 해지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용병단원들의 안전에 해가 되는 행동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제법 강하게 나가는 카심의 태도에 약간 골이 난 듯 보였지만 율리아나는 비교적 선선히 요구를 응낙했다.
알겠어요.
그리고 앞으론 마법사께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저 분은 우리 용병단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건 저 작자가 앞으로 날 어떻게 대하는지 봐서 결정할 문제예요. 그 문제에 대해선 당신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 같군요.
생각보다 당찬 율리아나의 대꾸에 카심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튼 성격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한 율리아나 공주였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카심은 몸을 돌렸다.
이젠 출발할 시간이었다. 워낙 끔찍했던 경험 탓에 더 이상 돈트렐에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의 심정이었다.
출발한다. 모두 채비를 갖추어라.
압수 당했던 짐이 모두 마차에 실려 있었던 터라 구태여 돈트렐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묵묵히 짐을 수습한 용병단은 도보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찾아와야 했지만 용병들 중에서 돈트렐로 다시 돌아가고픈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미첼과 율리아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일행은 그대로 여정을 시작하기로 작정했다.
지도를 들여다 본 카심이 가야 할 길을 정했다.
일단 관도로 해서 일주일 정도 걸어간 뒤 서쪽으로 빠진다. 다음에 경유하는 도시에서 말을 장만하기로 하자.
용병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삼류 용병의 신세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로 그들의 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도보로 여행을 시작한 일행은 만 하루만에 돈트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워낙 지긋지긋했던 경험이었으므로 돈트렐의 경계를 지나며 모두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이 차칫 잘못되었다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완만한 산등성이에 도착하자 카심이 잠시 휴식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쉬었다 간다. 두 시간 정도 머물 작정이니 준비를 하도록 하라.
용병들은 부산하게 휴식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음식을 만들고 나무와 사냥을 하러 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철저히 이인 일조로 역할을 분담했지만 지금은 한 가지 일을 딱 한 사람이 맡았다.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은 마나연공법을 수련하기로 했다.
이것은 모든 용병들간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항이었다. 특히 데이몬으로부터 마나연공법의 유래를 들은 다음에는 용병들은 틈만 나면 마나연공에 몰두했다. 그것은 바로 강해지기 위한 유일한 지름길이었으므로…….
이번에는 네가 수고해. 다음 차례엔 내가 일을 할 테니…….
그러지.
용병들은 선선히 맡은 바 임무를 하러 떠났다. 남은 이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자리에 걸터앉아 마나연공에 몰두했다. 그런 점에서 카심은 행운아라 할 수 있었다. 대장을 맡은 덕택에 쉴 때마다 마나연공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데이몬은 나뭇등걸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사위를 둘러보았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녀석들 꽤나 열심히 하는군.
그로써는 용병들이 열심히 수련에 몰두하는 것이 대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차원의 인물들이 출신 문파 배교의 수라사령심법에 심취하고 있는 만큼 자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크로센 대제가 전수한 정파 내공심법이 판을 치는 곳에서 바야흐로 마공이 뿌리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율리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일을 계기로 그녀의 성격은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주제넘게 나서지도 않았고 고집을 피우는 일도 없어졌다. 말수도 극히 줄어 여정 내내 묵묵히 지낼 뿐이었다.
한 가지 더 달라진 점은 그녀가 이따금 데이몬을 뚫어져라 응시한다는 점이다.
데이몬이 그녀에게 별달리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입장이 판이하게 뒤바뀌었다 봐야 했다. 물론 데이몬으로써는 송두리째 굴러 들어온 넝쿨이 아닐 수 없었다. 시선만 돌리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는 마법을 사용해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으니까…….
미첼은 무척 곤혹스런 표정으로 용병들이 마나연공에 빠져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는 용병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흑마법사가 거론한 이계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이 크로센 대제가 전수한 첫 번째 방법과 버금간다니…….'
물론 그가 익힌 펜슬럿 고유의 마나연공법은 크로센 기사단의 연공법과는 어느 모로 보나 차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력 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진다고 봐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오랜 시절 보완해 왔지만 펜슬럿은 아직까지 크로센 기사단의 마나연공법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기사들의 수준이다. 크로센 기사단 구성원들의 실력은 그만큼이나 강했다. 평범한 기사가 펜슬럿 근위기사를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보나마나 허풍이겠지? 맞아. 그럴 리가 없어.'
미첼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흑마법사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용병단의 막내인 제럴드에게 다가갔다.
마나연공을 멈추고 일어나거라.
데이몬의 말에 제럴드는 즉시 마나연공을 멈췄다. 이미 그에게 데이몬이란 존재는 거의 절대적인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다.
네, 마법사님.
얼른 몸을 일으키는 제럴드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한 가지 더 전수해 줄 것이 있다. 이것은 오직 너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이 자리에서 제럴드에게 좌수검법을 전수해 줄 작정이었다.
좌수검법(左手劍法)이 보유한 36개의 검형(劍形)과 72로의 검로(劍路),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응용초식을 모조리 말이다.
좌수검법은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인 제럴드에게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검법이었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에서 쏘아지는 좌수검법의 궤이신랄한 초식들은 이곳에서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극히 정형화된 이곳의 검술에 비교해 본다면 좌수검법은 말 그대로 파격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네게 전수해 줄 것은 바로 검법이다. 왼손으로 전개하는 검법이므로 네가 익히기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참고로 이 검법은 일전에 내가 얘기했던 그 이계 절대자에게서 흘러나온 것이기도 하지.
저, 정말입니까?
제럴드의 눈이 커졌다. 전설적인 존재인 크로센 대제와 쌍벽을 이뤘다는 이계 절대자의 검법을 전수받게 되다니……. 기쁜 나머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제럴드의 사의가 조금 쑥스러웠는지 데이몬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고마울 것 없다. 그저 네가 왼손잡이라서 전수해 주는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실 그가 유독 제럴드에 신경 쓰는 이유는 바로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동질성 때문이었다. 과거 그는 키가 작고 꼽추였다는 이유로 무공을 익히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때문에 왼손잡이에 절름발이인 제럴드의 애환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그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되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차피 아르카디아에 사파의 검술 하나 남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정확히 따지자면 좌수검법은 배교 고유의 무공이 아니었다. 대개의 사파 무공들이 그러하듯 좌수검법의 시초는 강호를 방랑하는 이름 없는 어느 낭인에 의해 유래되었다. 제럴드처럼 왼손잡이였으리라 짐작되는…….
하지만 좌수검법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가며 차츰 가다듬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대부분의 사도 문파에서 알고 있는 검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몬이 전수하는 좌수검법은 조금 달랐다. 총사였던 사준환이 수라사령심법을 만들어내면서 수십 명의 무공교두를 통해 보완해 낸 강력한 무공 중 하나였으므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특히 기습에 적합한 검법이었으므로 수호마왕군들 대부분이 이 검법을 익혔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지는데 대단한 역할을 했다. 그런 좌수검법의 유래를 잠시 떠올려 본 데이몬은 제럴드로 하여금 자세를 잡게 했다.
이제부터 네게 검로와 검형을 가르쳐 주겠다. 그러니 네가 지금까지 익힌 검술은 깡그리 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제럴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럴드는 지금껏 익힌 검술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잊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카심 용병단에 받아들여진지 고작 5개월 남짓. 카심에게서 기본기와 자세는 배웠지만 본격적인 검술은 맛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검술을 익혔으니 동작이 무척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네 검을 다오.
제럴드는 긴장한 표정으로 허릿춤의 검을 데이몬에게 건넸다. 시골마을 대장간에서 산 싸구려 검이었지만 그동안 무척 정성 들여 닦아왔으므로 제법 서늘한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잘 보아라.
검을 받아든 데이몬은 너울너울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제럴드가 똑똑히 알아볼 수 있도록 초식을 일부러 천천히 전개하며 말이다. 비록 펼쳐본 적은 없었지만 좌수검법의 요체는 모두 데이몬의 머리 속에 들어있었다. 그것은 데이몬의 과거 경험과 맞물려 제럴드에게 똑똑히 전달되고 있었다.
이 검법의 요체는 의외로 간단하다. 치고 찌르고 후리며 최대한 방어와 견제동작을 하다가 틈을 발견하면 공세로 돌변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우선 몸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선결과제이며 불필요한 동작을 최대한 자제하며 점과 점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선에 가장 유의해야 한다.
비록 정파 무공에는 못 미치겠지만 사파의 주요검법중 하나인 만큼 좌수검법은 충분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검법이었다. 극쾌(極快)를 요체로 하는 만큼 무거운 장검이나 낭창낭창한 연검을 쓰지 못하고 비교적 적당한 길이의 가벼운 검을 사용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아르카디아에서는 별달리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검사들이 극히 정형화된 장검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합당한 기술만 전수해 주면 되는 것이다.
중원에는 정말 방대한 무기가 존재했다. 황실 근위병에게조차 18반 병기에 대한 무예를 전수할 정도였으니 그 외 외문병기의 수는 간략히 생각해봐도 상상을 초월했다. 도(刀) 검(劍) 창(創) 모(矛) 극(戟) 과(戈) 등 기본적인 무기의 종류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물론 좌수검법의 구결에는 그 모든 무기에 대한 대처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제럴드에게 그 모든 것을 전수해 줄 필요는 없었다. 장검이나 창에 대한 몇 가지 기술만 전수하면 되었기에 데이몬은 제럴드가 오래지 않아 좌수검법의 검형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뒤에는 거듭되는 수련을 통해 응용동작이나 숙련도를 쌓아 가면 되는 것이다. 제럴드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데이몬이 펼쳐 보이는 동작을 머리 속에 새겨 넣는데 주력했다. 이것만 철저히 익힌다면 집안의 복수가 이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용병들은 이제 마나연공을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데이몬이 펼치는 검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검무를 쳐다보던 카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생소한 검법이로군. 왼손을 사용하는 검법이라…….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모르지.
짧게 내뱉은 카심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데이몬이 펼쳐내는 검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전무예의 대가인 탓에 카심은 검술의 위력을 대번에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 검의 방어동작이 거의 모든 종류의 공격에 대처하게 되어 있어. 음.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군. 거기에다 틈틈이 뻗어 나오는 공격은 모두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막아내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뜻이지. 정말 한 번 싸워보았으면 원이 없겠군.'
만약 데이몬이 정통으로 검을 익힌 검사였다면 카심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련을 신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에게 검술대결을 신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로 좌수검법의 완성도는 뛰어났다. 하지만 카심에겐 굳이 그 검법을 익히고 싶다는 욕망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지금까지 익혀왔던 검술을 모조리 버려야 했으며 또한 익숙하지 않은 왼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단련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때문에 감탄은 오직 감탄으로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카심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용병들에겐 데이몬의 검무가 그저 생소한 움직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무의 비밀은 오로지 고수의 눈에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으니까. 여기서 카심 못지 않게 충격을 받은 이가 또 하나 있었으니…….
'정말 놀랍군.'
입을 딱 벌린 채 정신 없이 검무에 심취해 있는 이는 바로 미첼이었다. 상당한 고수에 속하는 그인지라 좌수검법의 위력 정도는 한 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가며 혹독하게 단련된 터라 미첼은 검술을 보는 안목에 상당히 조예가 있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봤을 때 마법사가 전개하는 검법은 결코 소홀히 볼 것이 아니었다.
'놀랍군. 저 검법과 붙는다면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겠어. 틈을 쉽사리 찾을 수 없어 방어동작을 쉽사리 허물어뜨리지 못하는 데다 공격의 경로가 통상적인 상식을 벗어나고 있으니…….'
물론 검법이 탐나기는 하나 익히지 못한다는 것은 미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카심과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사람에겐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감탄 어린 눈빛과 나머지 용병들의 곤혹스런 눈빛을 받으며 데이몬은 검무를 마쳤다.
초식을 모두 눈에 익혔느냐?
아, 아직……. 워낙 동작이 많아서…….
당황한 듯 고개를 내젓는 제럴드를 보며 데이몬은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전수해 줄 테니…….
일단 기억한 것만 연습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는 제럴드를 흘겨보며 데이몬은 또다시 나무등걸에 걸터앉았다.
제럴드는 곧 수련에 들어갔고 나머지 용병들도 분분히 제 위치로 돌아갔다. 데이몬의 검무를 훔쳐보느라 식사준비가 상당히 늦어졌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식사당번을 함께 맡은 제럴드가 검술수련을 하고 있으니 그 혼자서 모두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조금 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휴식 이래봐야 여전히 마나연공에 몰두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느긋하게 용병들을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응?
식사를 마친 율리아나가 어느새 자신의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이다. 재미있다는 듯 그녀의 시선을 맞받던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날 찾아왔지?
할 말이 있어요.
거침없이 내뱉는 그녀의 태도에 데이몬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나에게 할 말?
그래요.
또 무슨 사고를 치려하나 싶어 카심이 얼른 다가왔다. 그에게 율리아나란 존재는 이미 화약고 속의 불씨처럼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었다. 용병들의 시선도 일제히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재미있군. 그래 할 말이 뭐지?
데이몬의 눈을 들여다보던 율리아나는 손가락을 들어 카심을 가리켰다.
일전에 용병대장에게 들은 말이 있어요. 그에 따르면 당신은 큰 실수를 한 것이 확실해요.
실수?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원래대로라면 용병단에서는 구성원 중 한 명이 진귀하거나 값나가는 몬스터를 잡을 경우, 그것은 엄연히 용병단의 전체재산이 된다고 하더군요. 전 분명히 들었어요. 물론 분배할 경우에 직접 잡은 용병에게 가장 많은 몫이 돌아가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용병대장과 다른 용병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관례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 법칙을 어겼어요. 비록 당신과 휘하 데스 나이트들이 드래곤을 잡았다 치더라도 그 시체를 당신 혼자서 독차지할 수는 없다는 뜻이죠. 일단 당신이 용병단의 소속인 이상 관례를 따라야 하는 것이 합당한 듯 싶네요. 그게 바로 내가 할 말이에요.
데이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너와 네 호위기사도 끼여들어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 그건가?
예상 밖으로 율리아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럴 만큼 제 낯짝이 두껍진 않거든요. 제 몫을 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미첼도 마찬가지이구요. 하지만 당신에겐 동료 용병들이 있어요.
드래곤의 시체를 동료들과 어느 정도 나눠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뜻밖의 태도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렇다면 너는 지금 다른 용병들을 배려하고 있는 건가?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드래곤의 시체를 당신 혼자 독차지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마치 할 말을 다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데이몬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대장. 그녀의 말이 과연 맞는 말인가?
카심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율리아나가 저렇게 당돌한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런 관례가 없진 않았다. 용병단의 결속을 강화한다는 원래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개인이 사냥한 몬스터는 소속된 용병단 전원이 나눠 가진다는 것은 관례로 분명히 존재하는 일이었다. 물론 몬스터의 반은 엄연히 사냥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카심은 드래곤 사냥을 지켜보며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위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고 데이몬이 없었다면 용병단 전원은 드래곤의 손짓 한 방에 몰살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드래곤의 시체가 가지는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감히 값을 논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드래곤 하트를 비롯하여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싼 값에 팔리는 드래곤 본과 스케일, 심지어 고기와 피도 마법사들에겐 중요한 연구재료가 되었다.
그 탓에 데이몬이 잡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시체는 말 그대로 엄청난 재산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카심도 사람인지라 거기에 대한 탐욕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카심은 어렵지 않게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런 관례가 있긴 하지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야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요. 저희에겐 도저히 드래곤을 잡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획물을 마법사님께서 가지시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그건 아닐세.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는 조직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관례가 있으면 따르는 것이 합당했다. 비록 그가 아니었다면 잡을 수 없었다고 하나 동료는 엄연히 동료였다. 만약 드래곤의 시체를 자신이 독차지해버린다면 여타 용병들의 신뢰를 얻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데이몬은 용병들을 쳐다보며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 관례가 있는 줄은 몰랐군. 용병단에 소속되어 본 것이 생전 처음이라 알지 못했네.
카심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거기에 대해 추호도 섭섭한 마음이 없습니다.
카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용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에겐 마나연공법을 얻은 것 자체만으로도 데이몬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이었기에…….
하지만 데이몬은 쉽사리 뜻을 꺾지 않았다.
아니야. 용병단원으로써 규칙을 어긴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야. 나도 엄연한 용병단원이니 가급적 규칙을 지키고 싶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을 가져다 턱에 대었다.
흠. 그런데 어떻게 하지? 저 드래곤의 시체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데…….
가만있자. 이러면 어떨까?
데이몬은 카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드래곤의 가치가 얼마나 될 것 같나?
그, 글쎄요?
카심으로써는 오로지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아르카디아에서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 잡힌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웜 급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운 나쁜 천살 안팎의 어린 드래곤만 서넛 잡혔을 뿐이었다. 그런 작은 드래곤이라 해도 족히 일천 골드는 받을 수 있었다. 카심의 입장에서는 실로 천문학적인 액수인 것이다.
드래곤이 나이에 비례해서 성장하는 생물임을 감안하면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시체는 그것보다 족히 몇 배는 더 나간다고 봐야 했다. 덩치가 그 정도나 더 컸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심에게는 애당초 데이몬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푼돈(?)을 얻으려다 마법사의 마음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순수한 속마음이었다.
이건 진심입니다. 저희는 결코 드래곤의 시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딴 소리 말고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말해보게.
참다못한 데이몬이 역정을 내자 그때서야 카심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혔다.
대, 대략 사천 골드 정도…….
액수를 듣자 데이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절반은 내 몫이라 했으니 자네들이 나머지 절반을 나눠주면 되는 것이로군.
과, 관례를 따지자면 그렇습니다만.
데이몬은 오른 손을 불쑥 품속에 집어넣었다. 조금 뒤 그의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 하나가 들려 나왔다.
이것을 받게. 2천 골드일세. 원래는 드래곤의 시체를 처분해서 나눠 가지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내게 꼭 필요한 것이니 양해를 부탁하네.
데이몬은 젠가르트에게서 받은 2천 골드를 미련 없이 카심에게 건네주었다. 돈에 그리 미련이 없는 데이몬인데다 인크레시아 속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보물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까울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용병단 전체가 사용하는 경비인 만큼 건네줘도 무방할 듯 싶었다. 데이몬에겐 그다지 돈이 필요 없었으니까. 게다가 데이몬은 2천 골드보다는 용병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카심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주머니를 건네 받았다. 설마 이 조그만 주머니 속에 2천 골드나 되는 거금이 들어있으랴,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주머니를 풀어헤친 카심은 눈이 불쑥 튀어나왔다. 주머니 속에는 정확히 금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카심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거금은 처음 만져보았다.
저, 정말이셨군요.
조금 무거워서 경량화 마법을 걸어두었지. 아마도 액수는 정확할 걸세.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머니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무게로 인해 체격 좋은 카심의 덩치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뜻밖의 일에 카심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이러시면…….
괜찮네. 난 어차피 물욕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게다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속에는 그 돈의 수십, 수백 배가 넘는 보물이 들어있으니 말일세. 어차피 그 돈 자체가 보고 속의 보물 몇 가지를 처분한 것이야. 이래뵈도 난 상당한 부자거든.
말을 마친 뒤 씩 미소를 짓는 데이몬. 뜻밖의 횡재에 용병들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첼도 마찬가지였고 율리아나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패터슨이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다.
마법보고 속에 그렇게 보물이 많습니까?
당연하지 않겠나? 탐욕스러운 드래곤들이 수천 년 동안 긁어모은 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들만 들어있으니 말일세. 게다가 보물들 대부분이 드워프의 세공품이더군.
드워프의 세공품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은 용병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사악한 흑마법사로만 생각했던 데이몬이 그런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니……. 황당해하는 용병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이 짐짓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내 보물창고를 노리지는 말게. 인크레시아는 훔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마법보고이니까. 나도 드래곤 놈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겨우 빼앗았다네. 알겠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네들은 믿겠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풀었다. 그때서야 마음을 추스른 카심이 금화가 든 주머니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시다면 이 돈을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뭐 어차피 자네들 돈이니까 감사할 필요는 없네. 그 정도면 용병단 재정에 제법 도움이 될 거야.
'되지요. 되고 말고요.'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킨 카심은 희열감으로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말이 2천 골드이지 정말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용병단 전부를 족히 1년 동안은 고용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정말이지 흑마법사를 맞이하게 된 것은 내 필생의 행운이야.'
크로센 대제와 맞먹는 실력을 가졌다는 이계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을 얻게 되고 더불어 2천 골드라는 거액을 챙겼으니 카심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는 것이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일단 이 돈은 임무가 끝날 때까지 용병단의 공동재산으로 보관하겠습니다.
뭐 그것은 대장이 알아서 하게.
당분간 용병단의 공동재산으로 보관하겠다는 말에도 용병들은 누구하나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카심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펼쳐질 자신들의 미래를 더욱 신뢰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거금에 눈이 멀어 큰 일을 망칠 이들은 없었으니까……. 용병들은 곧 환호성을 질렀다.
'잘 생각했어.'
거금 2천 골드를 동료들의 신뢰와 바꾼 데이몬은 무척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이몬과 그의 동료들이 기뻐하고 있는 사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한 사내가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것도 한 나라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에 있는 이가 말이다.
정말 걱정이군.
길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착잡한 눈빛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돌연 꺼질 듯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추진하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나머지 새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사내의 모습은 마치 불가항력의 벽에 부딪힌 사람의 그것과 하등 다름이 없었다.
역부족이야.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어.
사내의 이름은 바로 테오도르였다. 점점 허물어져 가는 황권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크로센 제국의 집정관. 하지만 그는 지금 크나큰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페르슈타인이라는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에 말이다. 테오도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정말 존경스럽소. 페르슈타인 공작. 나름대로 머리 쓰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는 나를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다니 말이오. 만약 당신이 황권만 노리지 않았더라면 난 당신을 가슴깊이 존경했을 것이오. 적어도 당신의 능력은 나 따위론 발치도 따라잡을 수도 없으니 말이오.
말을 이어나갈수록 뼈저린 패배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정관이라는 감투를 뒤집어쓰고 황실에 뛰어들 당시에만 해도 그는 반드시 허물어진 황권을 복원하겠다는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이제 대부분 꺾인 상태였다. 귀계에 능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정말 철두철미하게 테오도르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가 추진하던 모든 계획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방해에 의해 깡그리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지금껏 추진한 일 중 성공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진정으로 크로센 제국을 생각하는 두 충신들의 희생으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야망을 어느 정도 지체시킨 것.
다시 말해 차도살인지계로 알카리스 왕태자를 없앤 일 말이다.
당시 테오도르는 상황을 무척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밀던 알카리스 황태자가 죽었으니 유일한 대안은 둘째 황자인 드비어스 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공작의 야망을 분쇄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계략의 천재답게 페르슈타인 공작은 어렵지 않게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새로이 황제가 될 드비어스 황자를 철저히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계략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불어난 물에 치마가 젖듯 야금야금 실권을 빼앗기던 황태자는 마침내 크로센 기사단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만 남기고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아무리 페르슈타인 공작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크로센 기사단은 황제와 그의 뒤를 이을 황손에게만 충성을 서약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아보려고 줄곧 애를 썼지만 테오도르는 결국 역부족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페르슈타인 공작과의 능력 차이만을 뼈저리게 느낀 채.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은 크로센 제국의 전체 병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 주요 사령관들이 모조리 그의 심복들로 채워진 상태이니……. 기사단만으로는 도저히 전세를 뒤집을 수 없어.
이미 크로센 제국의 군대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된지 오래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용의주도하게 심복들을 군의 요직에 심어두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페르슈타인 공작의 탁월한 능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심복들의 능력이 하나같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군의 통솔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하나같이 지휘력이나 통제력, 조직 관리에 능한 전문가들이었고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가슴 깊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인재를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공작의 능력에 오직 감탄을 금치 못했던 테오도르였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황권을 노리는 반역도당의 무리란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미 테오도르는 사람을 시켜 지휘관들 중 몇과 접촉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자신의 모든 것은 엄연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것이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거나 냉랭히 축객령을 내리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답답하군.
테오도르는 참다못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왔으므로 이곳에 더 이상 머물기 싫었다. 비록 다시 돌아올망정 잠시나마 머리를 식히고 싶은 심정이 절실했다.
스승님을 잠시 뵙고 와야겠군.
결국 그는 출타할 생각을 굳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스승을 만나 뵙고 조언을 듣고 와야겠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마차를 준비하라. 아버님 댁에 잠시 다녀올 생각이다.
부관의 눈에 모호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테오도르는 미처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부관의 말을 흘려들으며 테오도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두.
화려하게 치장된 팔두마차가 관도를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일국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집정관의 마차인 만큼 호화로움이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도합 이십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마차를 철통같이 에워싼 채 호위에 열중했다.
테오도르는 흔들리는 마차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착잡한 감정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는지 눈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버지인 네르시스 공작의 저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양부(養父)말이다.
네르시스 공작. 한 때는 당당한 권력자의 일인이었지만 지금은 낙향해서 초야에 묻힌 몰락한 귀족가문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테오도르라는 걸출한 인재를 맞아들여 황궁에 들여보낸 탓에 조금 빛을 발할 수는 있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아직까지 역부족이었다. 그야말로 가문의 사활을 테오도르 하나에 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네르시스 공작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평민 신분의 자신을 받아들여 집정관이 될 수 있게 한 은혜는 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철저히 이해타산에 의한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가 가문을 찾아가는 목적은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사실상 네르시스 공작가에 연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자신에게 기회를 부여한 스승을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네르시스 공작과의 만남을 중재해 고급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비밀리에 발렌시우스 황제를 독대할 수 있게 배려해서 그에게 집정관이란 지고한 지위를 선사한 스승 말이다. 하지만 스승을 떠올리자 테오도르의 얼굴엔 측은한 빛이 떠올랐다.
불쌍하신 분.
테오도르의 생각에 그의 스승은 정말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비운의 인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해야 했지만 테오도르는 스승을 가슴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엄청난 지식과 배려가 아니었다면 테오도르가 이런 위치에 오르기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스승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두렵군. 스승님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집정관의 시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기세 좋게 네르시스 공작가를 향해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내 아들아.
자신을 향해 달려나오며 두 손을 활짝 펴는 늙은 귀족을 바라보며 테오도르는 얼른 얼굴빛을 고쳤다. 그는 바로 자신의 양부인 네르시스 공작이었다. 꿍꿍이가 어떻든 간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은인임에는 분명했기에 예의는 깍듯이 지켜야 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 워낙 공무에 매여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무슨 소리냐? 가문의 영광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네게 용서라니……. 그런 소린 하지도 말거라.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 듯 테오도르의 몸을 덥석 끌어안는 네르시스 공작. 비록 피가 섞이지 않을지언정 겉보기에 둘은 영락없는 부자사이였다. 테오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작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래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느냐?
노귀족의 탐욕 가득한 얼굴을 쳐다보며 테오도르는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모습에 네르시스 공작의 얼굴빛이 싹 바뀌어버렸다.
자, 잘 안되고 있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테오도르의 대답에 연신 안절부절못해하는 네르시스 공작. 그 모습은 패가망신한 채 복권 한 장에 목을 매단 늙은이의 모습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짐짓 안색을 굳혔다.
실은 스승님께 여쭈어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잘 계시겠지요?
네르시스 공작의 말투는 다소 퉁명스럽게 변해있었다. 그것을 봐서 성격이 극도로 단순함을 알 수 있었다.
물론이다마다. 그 사람 같지도 않은 녀석은 여전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살고 있지.
어머님과 동생들은 무고한지요.
뭐, 변함 없이 밥을 축내고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꾸벅 절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착잡한 기분을 도무지 감출 길이 없었다. 네르시스 공작은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줄곧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님.
오. 왔느냐? 흐흐흑.
테오도르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는 늙은 어머니. 그것을 봐서 네르시스 공작가문에서의 삶이 그리 평탄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비록 겉모습은 나무랄 데 없는 귀족부인이었지만 눈가의 주름이 많이 는 것을 보니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주 찾아오지 못한 절 용서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널 보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하거늘…….
테오도르를 부여잡고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집정관 자리를 팽개치고 어머니와 두 동생들을 대동해 멀리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테오도르의 머리 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던 가문의 복수는 많이 희석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것이 단순한 망상이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테오도르에게 이를 박박 갈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지금껏 방패막이가 되어 주던 집정관 자리를 팽개치고 나면 테오도르는 평민이 되어 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페르슈타인 공작의 마수를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네르시스가를 버린다면 가족들은 그 즉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페르슈타인 공작뿐만 아니라 네르시스 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이래저래 빠져나갈 방법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해후를 나눈 모자는 그간의 그리움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한참동안 서로의 얼굴을 매만졌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무척 어렵게 입을 뗐다.
저는 이제 궁정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 전에 스승님을 잠시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어서 가보거라.
어머니는 오히려 발길을 떼기 어려워하는 테오도르의 등을 떼밀었다. 얼굴을 뒤덮은 눈물을 억지로 훔치며.
저벅저벅.
테오도르는 침통한 얼굴로 어두컴컴한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놀랍게도 그의 스승이 기거하는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드문드문 횃불이 밝혀져 있는 계단을 한참동안 내려가야 했다.
또옥. 똑.
여기 저기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지하 통로는 무척 음산했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스산한 통로. 통로의 끝에는 조그마한 철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녹이 슬어있었지만 워낙 두텁게 만들어진 탓에 감옥의 문이라는 제 역할은 충분히 해 낼 듯 보였다. 철문 앞에 버티고 선 테오도르는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철문에서 진동과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콰쾅.
마치 잔뜩 성난 맹수가 육탄으로 철문에 부딪힐 때 나는 듯한 음향. 그와 동시에 사나운 울부짖음이 통로 내부를 가득 메웠다.
캬아아아.
하지만 테오도르는 추호도 놀라지 않았다. 상황을 보아 이런 경험을 여러 번 겪어본 듯 했다. 그는 묵묵히 준비해 온 가죽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그 속에는 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금 전 그와 두 동생의 몸에서 빼낸 혈액. 그것은 스승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테오도르는 철문의 하단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가죽 주머니를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서도 기성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불쌍하신 분.
테오도르의 얼굴에 안타깝다는 기색이 서렸다. 이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스승의 운명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사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Vampire). 즉 흡혈귀인 것이다. 피를 흡수해서 목숨을 이어나가는 저주받은 생명체. 놀랍게도 테오도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뱀파이어를 스승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꿀꺽꿀꺽.
가죽 주머니 속의 피를 게걸스레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늙수그레한, 무척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테오도르구나. 지금 왔느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조아렸다. 비록 만인의 지탄을 받는 뱀파이어일망정 감옥 속의 사람은 그에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스승이었다. 그에게 기회와 지식을 제공해 준 은인인 것이다. 이미 그는 스승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10년 전 테오도르가 집정관의 신분으로 황궁에 들어갈 당시 스승은 자의로 이 지하감옥에 들어갔다. 밤만 되면 피를 찾아 헤매는 뱀파이어의 본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수감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스승은 감옥 밖으로 단 한 발도 나오지 않았다. 행여나 테오도르의 앞날에 누를 끼칠까봐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테오도르의 동생들이 매일매일 넣어주는 짐승의 피였다. 하지만 영기가 부족한 짐승의 피로 뱀파이어의 본성을 완전히 잠재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그 때문에 스승은 평상시에는 광인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피에 굶주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제정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인간의 피를 들이키는 것뿐이었다.
지금처럼 테오도르와 동생들의 몸에서 조금씩 빼낸 피를 들이키는 방법. 그 탓에 스승은 정말 오랜만에 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일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것 같구나?
그 말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습니다. 저로써는 도저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감옥 속에서는 익히 예상했다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럴 것이다. 페르슈타인은 정말 걸출한 인물이야. 그러니까 거대한 크로센 제국을 도모할 마음을 먹었겠지.
순간 테오도르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사실 그와 페르슈타인 공작간에는 이미 가문간의 오랜 원한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게 있어 반드시 복수해야할 원수입니다. 헬프레인 가문으로 인해 저희 가문은…….
테오도르의 말꼬리를 자르며 이어지는 스승의 말에는 짙은 회한이 깃들여 있었다.
그와 네 가문간에 얽히고 설킨 일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꽤나 오래 살아왔구나. 인간에게 허용된 수명을 몇 배나 어겨가며…….
테오도르는 묵묵히 스승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미 스승의 사연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던 테오도르였다. 그의 스승이야말로 정말 절박한 사연의 소유자였다.
과거에는 촉망받는 성직자의 신분이었지만 목적을 위해 뱀파이어가 되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엄청나게 성장한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을 이용해서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오크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
스승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테오도르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수백 년 이상 살아왔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다름 아닌 흡혈로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 뱀파이어의 특성 때문에. 그가 묵묵히 듣고 있는 사이 스승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은 정말 비약적으로 불어나 있다. 과거 트루베니아가 멸망할 당시를 열 배 이상 상회할 정도로……. 하지만 안타깝구나. 같은 동족으로써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오크 족의 노예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그냥 좌시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따지고 보면 아르카디아의 원류는 엄연히 트루베니아일진데…….
하지만 이곳 귀족들은 트루베니아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다. 과거 트루베니아의 군주들이 얼마나 못난 짓을 해 왔는지는 나만큼 알고 있는 자가 드물 테니…….
어떻게 해서든 뜻을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널 궁정에 들여보냈지만 결국 페르슈타인 공작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하는구나.
죄송합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스승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사실 이것은 스승의 염원만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숙원도 함께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껏 테오도르는 정말 무단히도 노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결국 페르슈타인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스승은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했다.
죄송할 것은 없다. 애당초 내가 너에게 너무 과중한 짐을 지워주었을 지도 모르니…….
제겐 페르슈타인 공작만큼 인재를 끌어들이는 포용력이 없습니다. 그는 조직관리에 대해서는 정말 철두철미한 인물이더군요. 비록 원수이긴 하지만 능력 하나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스승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쩌면 뱀파이어가 되면서까지 이루려던 염원이 덧없이 꺾인 데 대한 상심일 지도 몰랐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느낀 테오도르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궁정에 들어갈 시간이군요. 사태의 추이를 보아가며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크으으. 그러려무나. 너,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뱀파이어로써의 본능이 치밀어 오르는지 감옥 속 스승의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일행은 한창 산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곧바로 테르비아의 수도 바얀카가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하지만 카심은 바얀카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엄연히 크로센 제국이었으므로 바얀카를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바얀카에 들러서 물품구입을 하거나 휴식을 취해도 되었지만 카심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돈트렐에서 받은 대접이 있는지라 테르비아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인 윌커슨을 만나는 것도 지금으로썬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며칠 전에는 힘이 없어 흑마법사를 그냥 놓아보냈지만 수도에서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나올지 도무지 짐작하지 못했다. 본시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런 까닭에 일행들은 제법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말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껏 들뜬 기색으로 데이몬과 함께 걸어가던 카심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뭐가 말인가?
제가 드래곤 사냥을 목적으로 하는 파티의 일원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날 때부터 드래곤을 잡는 녀석이 세상에 있나? 모든 것은 경험이야. 잡다보면 요령도 늘어날 걸세.
과연 그럴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자신이 동료 하나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힘이 되지 못하는 녀석들이지만 어차피 드래곤의 침공은 대략 5년 후의 일이었다. 그 때쯤이면 이 녀석들도 상당한 실력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전속도를 감안하면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상대할 적은 드래곤뿐만이 아니었다. 드래곤 휘하의 가디언이나 중형 몬스터,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오크 보병 등 적은 많고도 많았다. 아마도 이들이 드래곤 사냥에 합세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런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는데는 충분할 터였다.
게다가 용병들을 팔라딘 정도의 실력으로만 키워 놓으면 베르키스 휘하의 리치들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터였다. 어차피 인크레시아 속에는 일개 기사단에게 입히고도 남을 대마법 갑옷들이 들어있으니까. 그것도 최고급품으로만.
'게덴하이드는 힘들겠지만 남은 리치들 쯤이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카심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데스 나이트들이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가장 강했던 기사였다면서요.
그랬지. 그들은 최후의 결전에서 드래곤 놈들의 계략에 속아 노스우드에서 떼죽음을 당한 용사대의 일원이었어. 원통해서 이승을 떠나지도 못하고 방황하던 망령들을 붙잡아 데스 나이트로 만든 거지. 그러니까 강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듀라한도 엄청나게 강했는데 그보다 훨씬 강한 데스 나이트가 넷이나 된다니…….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앞으론 그들과 무척 친하게 지내야 할거야. 아마도 그 녀석들이 자네들을 단련시키는 교관 역할을 할 테니까…….
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카심은 이내 데이몬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들을 대련상대로 해서 수련을 쌓으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비록 데스 나이트일망정 그들은 엄청난 수련을 쌓아온 실력 있는 기사들일세. 자고로 실력은 고수와 싸워야만 느는 법이야. 그들을 상대로 대련을 거듭한다면 실력이 나날이 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햐. 이거 긴장되는군요. 한 대륙의 절대자였던 자들을 대련상대로 삼는다니…….
카심의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직까진 아니야. 일단 자네들이 대련상대로 삼을 녀석은 바로 윈슬럿이니까.
윈슬럿? 듀라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솔직히 말해 검술실력 면에서 자넨 아직까지는 그 녀석에게 못 미치네.
나머지 용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 틈틈이 그 녀석을 불러내 주겠네. 그러니 한 번 원 없이 싸워보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곧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듀라한의 이름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데이몬을 돌아보았다.
호, 혹시 윈슬럿이라면……. 10여 년 전 전 대륙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크로우 용병단의 용병대장이 아닙니까? 무려 500명의 수급을 잘라냈다는 사상 초유의 살인마.
그, 그렇군요. 도끼를 사용한다는 점과 도저히 듀라한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실력을 감안하면…….
이번에는 데이몬이 어리둥절할 차례였다.
윈슬럿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나?
모, 모르셨습니까?
글세? 윈슬럿은 원래 세바인에 원래 살던 네크로멘서 녀석이 가지고 있었어. 놈을 내쫓고 동굴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지. 워낙 원념이 짙어서 과거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전력을 가진 녀석일 줄은…….
제가 막 용병단에 발을 들인 10년 전에는 윈슬럿 때문에 세상이 무척 떠들썩했었습니다. 그 때가 놈이 막 잡혀 목이 잘린 때였거든요.
카심은 흥분된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윈슬럿의 엄청난 과거 무용 때문이었다.
마나를 다스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열이 넘는 팔라딘과 겨뤄 목을 잘라낸 가공할 실력의 소유자. 악명 때문에 다소 퇴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윈슬럿은 실력 하나는 정말 대단한 용병이었다. 그 때문에 카심이 이리 기뻐하는 것이다. 듀라한이 되어 이성은 사라졌을망정 윈슬럿은 그 때의 검술실력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윈슬럿과 대련을 거듭해 나간다면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거 기대되는군요. 그 유명했던 윈슬럿이 제 대련상대가 될 줄은…….
그 녀석은 당분간 자네뿐 아니라 모든 용병들의 대련상대가 되어 줄 걸세. 사정을 봐 줄 녀석이 아니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조용히 해 봐요.
율리아나의 음성이었다. 데이몬과 카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우선 미첼이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 들어왔고 율리아나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첼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안 들리지만 조금 전에 분명히 들었어. 틀림없이 아기의 울음소리였다고…….
그것도 극도로 기진맥진한.
인적이 드문 산길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으므로 용병들의 눈이 삽시간에 휘둥그레졌다. 카심이 얼른 미첼에게로 나아갔다.
이곳에 아기가 있을 리가 없는데? 틀림없는가?
그렇소. 조금 전에 분명히 들었소.
팔라딘들의 청각은 범인과 틀리다. 보유한 마나에 힘입어 팔라딘들은 월등히 밝은 청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미첼이 들었다면 엄연한 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지금은 들려오지 않소.
가만히 있어보게.
마침내 데이몬이 나섰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미첼이 잡아내지 못한 소리라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나를 재배열해서 주위의 소리를 끌어들인 데이몬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미첼의 말이 맞았어. 저쪽 절벽 아래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아주 가냘프게 들려오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아기야.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용병들이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산길이라서 관도 답지 않게 길이 무척 험준한 편이었으므로 불운한 누군가가 이곳을 지나다 발을 헛디딘 모양이었다.
일단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으므로 용병들은 일제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밝은 미첼이 가장 먼저 신음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저기 있어.
신음소리의 주인은 절벽 중간에 자라난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절벽이었지만 경사가 상당했다. 게다가 바닥이 돌로 덮여 있어 맨몸으로 떨어졌다면 도저히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멀어서 제대로 분간할 순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내가 내려가겠다.
카심이 서슴없이 몸에 걸친 갑주를 풀었다. 몸을 가볍게 한 뒤 카심은 용병들이 건넨 밧줄을 허리에 단단히 동여맸다. 용병들은 무척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말뚝을 박아 밧줄을 동여맨 것을 확인하자 카심은 조심스럽게 절벽을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아 그가 불행에 빠진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에서는 데이몬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저 녀석은 내가 마법사란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나봐. 마법을 쓰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을…….
성급하게 생각해서 고생을 사서하는 격이 되었지만 그래도 카심의 마음씀씀이가 밉지는 않았기에 데이몬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카심은 한참만에 나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나무에 걸린 이는 젊은 여인과 아기였다. 여인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까무러쳐 있었다.
행여나 놓칠세라 아기를 단단히 품속에 안고 있는 모습에서는 모성애가 역력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군.
맥을 살짝 짚어본 카심은 일단 몸을 고정시킨 뒤 허리의 밧줄을 풀었다. 일단 여인과 아기를 먼저 묶은 뒤 절벽 위로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때 바로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묶으면 안 되지. 늑골이 부러진 상태에서 허리를 묶는다면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즉사할 수도 있어.
깜짝 놀란 카심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데이몬이 허공에 둥둥 뜬 채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마법은 뒀다가 뭐할 건가? 제발 부탁이니 날 좀 마법사로 대접해 주게.
카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워낙 경황이 없었기에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도 급해서…….
여인을 죽일 생각이 아니거든 줄을 다시 풀게. 음. 우선 자네가 안는 게 좋겠군.
늑골이 부러진 상태니 조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카심은 조심스럽게 여인을 안아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카심의 몸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흑마법사의 마법이란 것을 알아차린 카심은 놀라지 않고 느긋하게 공중부양을 즐겼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절벽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심이 여인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자 용병들이 달려들어 치료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카심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치료 마법을 좀 전개해 주시겠습니까?
진작 그럴 것이지.
얼굴을 푼 데이몬은 곧 힐링(healing)을 시전했다.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극대화시켜 원상태로 돌이키는 힐링은 서클이 높을수록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이미 9서클의 데이몬인 만큼 대상이 죽은 시체만 아니라면 그 어떤 상태라도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었다.
여인은 상당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영양결핍 상태에서 무리하게 여행을 했는지 신체의 저항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거기에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늑골 세 대가 나가고 다리뼈마저 골절된 상태였다. 물론 절벽에 부딪히며 입은 타박상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아기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아기를 다치지 않게 애쓴 여인의 모성애가 돋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상세는 데이몬의 힐링에 의해 금세 정상을 되찾아갔다. 마나가 재배열됨에 따라 부러진 뼈가 이어지며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잠시 후 데이몬은 치료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되었네. 하지만 이 여인은 현재 심각한 영양실조상태라네. 그러니 먹을 것을 좀 준비하는데 좋을 듯 싶네.
그 말에 카심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제럴드와 하인리히. 너희들이 수프를 좀 끓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행은 예상치 못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물론 여인이 깨어날 동안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제외한 용병들이 마나연공에 들어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놀라운 것은 율리아나의 태도였다. 생각보다 동정심이 많은 성격인 듯 율리아나는 옆에 찰싹 붙어 그녀를 간호했다.
수건으로 여인의 얼굴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혀 준 율리아나는 아기가 깨어나자 다정하게 얼러주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까꿍.
얼러주자 아기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무척 귀여운 아기였다. 채 1살이 되지 않아 보이는 사내아이였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볼 때 멋진 젊은이로 자라날 공산이 컸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아기를 꼭 끌어안고 연신 입맞춤을 퍼붓는 율리아나를 보고 용병들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여인이 눈을 떴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용병들을 본 그녀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여,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티미는?
그것을 보아 아기의 이름이 티미인 것 같았다. 율리아나가 방긋이 웃으며 아기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긴 무사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오. 내 아가. 흑흑흑.
여인은 아기를 얼싸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상황을 보아 분명한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여인은 한동안 서럽게 흐느끼기만 했다. 하인리히가 수프를 끓여 가지고 왔지만 도저히 권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율리아나가 손을 뻗어 다정하게 여인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너무 울지 말아요. 아기의 이름이 티미인가요?
네. 흐흑.
수프를 좀 끓여왔어요. 그만 울고 이것을 좀 먹도록 해요.
하지만 여인은 도무지 먹고싶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무척 배가 고팠을 텐데도 그저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생각보다 총명한 소녀였다. 여인의 모성애를 가볍게 자극해서 수프 접시를 받아들도록 했으니 말이다.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해요. 티미가 몹시 배가 고픈 듯 한데……. 엄마가 먹어야만 아기가 젖을 빨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결국 여인은 수프 접시를 받아들었다. 구수한 냄새를 맡자 입맛이 동했던지 그녀는 허겁지겁 수프를 먹어치웠다. 보고 있던 하인리히가 수프 한 접시를 더 떠서 건넸고 여인은 그것마저 깨끗이 비웠다. 식사를 마친 뒤 율리아나가 건넨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여인은 쓸쓸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제 이름은 케이트예요.
묵묵히 보고 있던 카심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어쩌다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곳은 아기를 데리고 가기가 결코 쉽지 않은 곳인데…….
그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극도로 무거워졌다. 과묵한 편인 카심에게 율리아나같이 말하는 요령을 기대하긴 힘든 것이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케이트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어요. 흐흐흑.
말을 마친 케이트는 얼굴을 가린 채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듣고 있던 용병들이 큰 충격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기가 채 젖을 떼지 못한 젖먹이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서럽게 흐느끼는 케이트에게 차마 물어볼 엄두를 가진 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율리아나를 제외하고는…….
티미라, 아주 예쁜 이름이군요. 아이의 아빠가 지어준 이름인가요.
케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가 알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결정을 내리셨나요. 아이 아빠가 슬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요.
아, 아이 아빠는 모를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왔기 때문이죠.
뜻밖의 일에 용병들은 또다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곡절이 있었기에 아이 아빠가 모르게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용병들은 오직 율리아나만 응시했다. 오직 그녀만이 케이트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사정을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가 혹시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니…….
케이트는 야윈 얼굴에 처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말씀은 고맙지만 도와주실 방법이 없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말해줘요. 아이를 아빠 없이 키울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케이트는 결국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율리아나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케이트는 그간의 사정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율리아나의 특기가 오랜만에 빛을 발한 것이다.
케이트의 말에 따르면 티미의 아빠는 필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테르비아의 근위기사라고 했다. 평민 출신으로써는 보기 드물게 근위기사에까지 오른 필립은 검술실력이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 그야말로 전도가 창창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케이트는 그가 수습기사 시절 만나 오랫동안 사랑을 키워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홀로 자란 케이트는 그야말로 마음속 깊이 필립을 사랑했다.
필립 역시 사랑스럽고 다정한 케이트를 자신의 몸보다도 오히려 더 아꼈다. 수습기사 시절 고된 수련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도 케이트를 만나 밤새도록 사랑을 속삭일 정도였다.
필립이 정식 기사로 임용되고 얼마 되지 않아 불행히도 케이트의 모친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케이트는 하루아침에 사고무친의 고아가 되어버렸고 필립은 그런 케이트에게 청혼을 했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조를 했던 것이다. 작고 아담한 집에 살림을 차린 두 사람. 비록 돈이 없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진 못했지만 하루하루를 신혼의 단꿈에 젖어 살던 두 사람이었다. 그 이듬해 티미가 태어났고 때마침 필립이 검술실력을 인정받아 근위기사에 임명되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말해 경사가 거듭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애초부터 불행의 씨앗이었음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필립을 근위기사에 임명한 사람은 바로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에드워드 후작이었다. 그는 사실 모종의 꿍꿍이가 있어 필립을 근위기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근위기사 자리는 실력이 있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연줄이 전혀 없다면 제 아무리 검술실력이 뛰어나도 근위기사에 오를 수 없는 것이 테르비아의 현실이었다. 필립이 근위기사가 된 지 6개월 되던 날 에드워드 후작은 마침내 수작을 걸어왔다. 그것은 바로 필립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
에드워드 후작에게는 얼굴은 아름답지만 방종한 성격을 가진 딸 일라이저가 있었다.
숱한 귀족 청년들과 염문을 뿌린 나머지 에드워드 후작이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때문에 그는 큰마음을 먹고 일라이저를 시집보내기로 작정한다.
물론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신분상 아무나 사위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공을 들여 젊은 기사들 중 사윗감을 물색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바로 필립이었다. 에드워드 후작은 검술실력보다도 필립의 자상함과 강직한 성격을 높이 샀던 것이다. 비록 필립이 케이트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작에게는 별 문제는 되지 못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은 이상 아무 것도 걸릴 것이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