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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난데없는 질문에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설명을 서로에게 떠넘기려는 듯한 투였다. 율리아나는 더 이상 가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팔짱을 꼈다.

난 이리로 가기 싫어요. 그러니 다른 길로 안내해 줘요.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압송하던 기사 하나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인상이 상당히 험악해 보이는 기사였다.

다른 길은 없소. 당신이 있을 곳이 바로 이곳이니.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율리아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자신을 감옥에 수감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도리질을 쳤다.

마, 말도 되지 않아요. 제가 왜 감옥엘 가야 하죠?

죄를 지었으면 수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말을 마친 기사는 율리아나의 팔을 잡고 거칠게 잡아끌려 했다. 율리아나는 매몰차게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빽 질렀다.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난 카르셀의 왕녀. 예의를 지켜주길 바래요.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이미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흥. 인구가 고작 팔천 사백 명인 곳이 왕국인가? 웃겨서 말이 안 나오는군. 돈트렐의 인구만 해도 그것의 열 배가 넘어. 그러니 쓸데없는 자존심 따윈 내세우지 않는 게 좋을걸? 그런 왕국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곳의 왕녀 따윈 쳐주지도 않으니 말이야.

판이하게 바뀐 말투. 다짜고짜 으르렁대는 어조에 율리아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까지 파악했다면 상대가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불길한 기분에 그녀는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 난 흑마법사를 제보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제보자를 가두는 곳이 어디 있어요?

제보자? 우리는 모르는 일이야. 아무튼 당신은 범인의 동료이므로 수감되는 것이 당연하지.

율리아나의 말을 냉랭하게 일축한 기사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 율리아나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이것 놔!.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었지만 힘센 기사들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은 율리아나를 번쩍 들어올린 상태로 감옥으로 걸어갔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 사실을 크로센 제국에서 안다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후후. 한낱 죄인의 말을 누가 믿을까? 도망칠 수 있다면 가서 일러보지 그래?

느물거리는 기사의 대꾸에 율리아나는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버님께 일러 카르셀의 모든 병사들을 끌고 올 거야. 그리고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거야.

기사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것 재미있겠군. 인구가 팔천이면 병사라고 해 봐야 기껏 일천 명 안팎일 테고…….

돈트렐 수비대 1개 지단만 동원하면 간단히 해결되겠군. 아! 참고로 알아두도록. 1개 지단은 각각 1천 5백 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돈트렐엔 총 15개 지단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율리아나는 말을 잃었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비로소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실감한 율리아나. 그녀는 이제 고함을 지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에서 카르셀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이 정도밖에 안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맥이 탁 풀렸던 것이다.

사실 도박이라고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율리아나는 크로센 황태자비로 간택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은 당당한 일국의 왕녀였으며 적어도 다른 왕국의 왕녀들과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반응을 보니 그것은 애당초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카르셀 정도의 소국은 왕국으로 치지도 않는다는 기사의 대답. 율리아나의 자부심은 거기서 송두리째 꺾여버리고 말았다. 발악하던 율리아나가 잠잠해지자 기사들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얼른 감옥 속에 수감했다.

철컹.

율리아나를 구석진 곳에 위치한 독방에 수감한 기사는 손을 툭툭 털었다.

자 그럼 좋은 꿈꾸고 있으라고……. 내일쯤이면 소버린 요새에서 소드 마스터이신 윌커슨 경이 도착하실 테고, 그 때 너희들과 흑마법사를 수도로 압송할 계획이니까 푹 자두는 것이 좋을 거야.

말을 마친 기사는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털썩.

얼이 빠진 율리아나는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잘못했어. 제보를 하는 것이 아니었어.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착잡한 감정에 율리아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차라리 카르셀에 남아 있을 것을…….

애당초 좁은 카르셀에 진력이 난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 때문에 황태자비 간택식을 빌미로 카르셀을 미련 없이 떠나오지 않았던가? 율리아나에겐 모든 것이 후회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를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발한 사람이 당신이었군.

난데없이 터져 나온 음성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철창 속을 쳐다본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카, 카심.

놀랍게도 건너편 감옥에는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잔인하게도 율리아나를 용병들을 수감한 바로 맞은 편에 가뒀던 것이다. 카심의 얼굴에는 냉랭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진상을 알아차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카심의 눈빛을 견디다 못해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카심은 휘하 용병들과 함께 숙소에서 마나 연공을 하고 있었다. 워낙 재미가 쏠쏠했기에 틈나는 대로 수련하는 마나연공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덜컥.

난데없이 문이 열리며 수백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용병들을 체포하려 했다. 워낙 수가 많았기에 용병들은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나연공에 몰두하느라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랏줄에 꽁꽁 묶인 카심은 거세게 항의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릴 체포하는 이유를 밝히시오?

하지만 병사들은 체포 이유를 순순히 밝히려 하지 않았다.

일단 시청으로 가면 죄명을 알게 될 것이오.

짧게 일축한 병사들은 용병들을 지체 없이 시청으로 연행했다. 물론 미첼도 함께 체포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용병들과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율리아나와 베르텍 사이에 오고간 밀담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그는 순순히 저항을 포기했다. 곧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시청의 지하감옥에 수감되게 되고 지금까지 체포된 이유를 머리가 빠져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등장과, 그녀와 기사들 사이에 오간 대화내용을 통해 체포된 이유가 명백히 밝혀졌으니……. 카심은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정말 몹쓸 사람이군.

…….

세상에 동료를 팔아 넘기다니?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카심의 질책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더욱더 깊이 수그렸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흑마법사가 당신에게 무얼 잘못했기에 팔아 넘길 생각을 했소?

내가 알기로 그가 잘못한 것은 당신을 빤히 쳐다본 것뿐이었소. 그게 그렇게도 싫었소.

결국 율리아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만, 제발 그만해요. 나도 괴로워서 미치겠어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율리아나. 그러나 카심은 추궁을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시선이 싫었다면 깨끗하게 계약해지를 하지 그랬소? 그러면 더 이상 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지 않소? 당신이 계약철회서에 서명을 했더라면 난 분명히 청부금의 일부를 돌려주었을 것이오. 그럼 우린 갈 길을 가면 되고 당신은 그 돈으로 다른 용병단을 고용하면 되잖소?

………

비록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이긴 해도 난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당신처럼 동료를 팔아먹는다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없을 것이오.

율리아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묵묵히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심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미첼이 사색이 된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율리아나가 수감되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 하나만을 믿고 저항을 포기했던 미첼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자신 혼자만은 꺼내줄 줄 알았던 것이다. 잠시 미첼을 쳐다보던 카심은 다 안다는 듯 안색을 굳혔다.

아마 자네는 그녀와 얘기가 다 되어있었겠지?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순간 저항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했네. 자네는 자네 왕녀와 한 통속이 되어 동료를 팔아 넘겼어.

미첼은 카심의 시선을 감히 맞받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을 항변하려 했다.

난 흐, 흑마법사가 결코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물론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우린 아냐. 언젠지 모르겠지만 약식 심문이 있을 터 그때 행동을 보면 우리 마음을 알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카심은 몸을 돌렸다. 마치 미첼과는 잠시라도 함께 있기 싫다는 듯 감옥 끝 부분으로 간 카심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상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함께 수감된 용병들도 카심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물론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고 용병들도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결국 침묵을 깬 것은 수다쟁이 패터슨이었다.

그런데 대장.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패터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건너편 감옥을 쳐다보았다.

우리야 체포되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치더라도 저들까지 체포된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상한가?

저들은 고자질을, 아니 제보를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감옥에다 수감하지요?

카심의 눈동자에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세상 경험이 많은 만큼 그는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원래 법이란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도 하지. 법이란 게 돈 있는 자의 편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거야. 상황을 넓은 안목으로 보면 대충 짐작이 되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패터슨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 저는 잘.

잘 듣게. 저 카르셀의 왕녀는 애당초 우리와 함께 갈 마음이 없었어. 여기서 우릴 떼버린 다음 흑마법사를 제보한 현상금을 받아 다른 용병단을 고용한다는 것이 저들이 애초에 꾸민 계획이었을 거야. 뭐, 우리들의 안위야 안중에도 없었을 테고…….

그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고개를 발딱 들었다.

아니에요. 제겐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어요. 난 단지 흑마법사를, 흑마법사만 떼어놓으려는 의도로 그랬을 뿐이에요. 그만 없었다면 평탄하게 크로센 제국으로 갈 수 있지 않았나요?

카심이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의 말은 틀렸소. 공주. 사실 난 흑마법사를 용병단에 받아들인 순간부터 죄를 범한 것이었소. 만약 그가 세바인에 머물면서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엄격히 소급되어 적용되지. 다시 말해 공범이 된다는 뜻이라 생각하시오. 이것은 대부분의 왕국에서 적용되는 항목이오. 따라서 우린 이미 흑마법사와 한 배를 탄 운명이었소.

그, 그런데 왜 흑마법사를 받아들였지요?

카심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감돌았다.

그것까진 알 필요 없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책임을 끝까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 당신도 명목상 우리 용병단의 고용주이니 의당 책임을 져야 하오. 하지만 당신은 흑마법사를 제보한 공로가 있소. 다시 말해 공범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안은 대부분 법을 집행하는 자의 아량에 달려 있소. 당신이 제보한 자가 나쁜 마음을 먹을 경우 당신도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수도 있소.

나, 나쁜 마음?

카심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하자면 공을 독차지하려는 마음 말이오.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제보에 의해 체포한 것과 독자적으로 체포한 것과는 보상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게다가 현상금을 독식할 수 있다는 불로소득도 있을 수 있고.

그, 그렇다면…….

율리아나의 얼굴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빛이 일어났다.

그녀를 쳐다보며 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것이 분명할 것 같소. 솔직히 그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대충 상황은 이렇게 흘러갈 것 같소. 제보한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도리어 당신을 일당으로 몰아 재판에 회부하는 것. 그렇게 되면 흑마법사를 체포한 공로는 단 한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지. 당신이 제보했던 바로 그 사람 말이오.

세, 세상에……. 말도 되지 않아요.

말이 되오. 혹시 당신이 제보할 때 다른 사람이 있었소? 시청에 소속된 서기라든지 공증인 말이오?

율리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요. 나와 미첼 밖에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상황은 명백하오. 제보를 받은 자는 십중팔구 공을 독식하려 할 것이 틀림없소. 게다가 당신은 제 3자가 아닌 같은 일행이었으니 일을 꾸미는 것이 더욱 쉬울 테고…….

카심의 말이 끝나자 율리아나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파고들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카르셀을 나선 이후 자신의 고집대로 해서 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비로소 떠올랐다. 자신은 철저히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율리아나는 울먹이며 사과 한마디를 겨우겨우 내뱉었다.

미, 미안해요. 흐흑.

미안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오. 지금 우리 실정으로썬 흑마법사가 세바인에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길 절실히 바라는 수밖에 없소.

흑흑흑.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계속해서 흐느끼는 율리아나. 그녀가 다소 측은했던지 카심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를 내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소.

율리아나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카심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재판에 회부되면 이렇게 진술하시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우리 용병단과 계약을 해지했다고 말이오. 그렇게 되면 비교적 경미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물론 제보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부터 잊어버리시오. 굳이 밝히려 하다간 더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으니까…….

율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럼 당신들은 어떻게 되죠?

어떻게 되긴. 운에 맡길 수밖에……. 만에 하나 흑마법사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던가 생체 실험을 했다는 등의 중죄를 저질렀다면 우리 모두는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오. 아무래도 십중팔구 그렇게 될 것 같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잖아요.

카심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이 당신에게 한 것을 생각하면 모르겠소? 그는 어떻게 해서든 흑마법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도 남을 작자요. 죄가 없다면 만들어내서라도 걸겠지? 그래야만 자신의 공로가 올라가니 말이오.

세, 세상에…….

바깥세상의 매운 인심을 실감한 율리아나가 입을 딱 벌렸다. 미첼 역시 벌린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순박한 카르셀에서 살아온 그들에겐 너무도 벅찬 상대였다. 율리아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흘려냈다.

그, 그렇다면 당신들도 흑마법사가 용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건가요?

카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소. 우린 이미 그를 동료로 받아들였소. 지금에 와서 그를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지. 동료란 게 원래 그런 것이오. 좋고 나쁘고 힘들고 괴롭고 기쁜 일을 모두 공유하는 것이 바로 동료라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존재라면 이미 동료가 아니라고 봐야지.

말을 마친 카심은 착잡한 기색으로 휘하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중에서 만약 죄를 면하고 싶은 녀석이 있으면 이따가 있을 심문에서 이미 용병단을 탈퇴했다고 진술하라. 내가 그것을 인정해 주겠다. 서로의 진술이 일치한다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갈 것이다. 아마 죄를 완전히 면하긴 힘들어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순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가벼운 술렁임이 있었지만 동요는 전혀 없었다. 서로의 눈을 잠시 쳐다본 용병들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로 패터슨이 입을 열었다.

그럴 녀석이 없다는 것은 대장도 아시잖습니까?

최악의 경우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라.

하지만 용병들 중에서 나서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눈을 꼭 감고 벽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죽음일지라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모습. 그들을 지켜본 카심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내가 데리고 있는 대원들은 동료애란 게 무엇인지 아는 녀석들인 것 같소.

심문 받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판가름되겠지만 말이오.

율리아나와 미첼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동료를 팔아 넘긴 자신들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마음들이었다. 동료란 것이 그런 의미를 지니는지 지금껏 생각조차 해 본적 없던 그들이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졌다. 카심도 입을 닫았고 미첼과 율리아나도 묵묵부답이었다. 용병들만이 착잡한 시선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약식심문이 시작될 때를 기다리며…….

흠! 이름은 카심. 현재 32세로 개인 용병단의 대장이라…….

굴비두릅 묶듯 묶여 있는 죄수들을 앞에 두고 베르텍은 손에 든 수첩을 읽어나갔다.

그것은 바로 용병길드에서 발급 받은 카심의 용병수첩이었다. 현재 모든 용병들의 용병수첩이 베르텍의 수중에 있었다. 용병들은 수첩뿐만 아니라 무기를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압수 당한 상태였다.

'소드 마스터 윌커슨 경과 휘하 기사들이 도착하려면 아직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흑마법사를 압송할 호송대가 도착할 때까지 베르텍은 약식이나마 심문을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것을 위해 베르텍은 돈트렐에 소속된 10여 명의 팔라딘을 모조리 소집해 놓았고 그들은 이곳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죄수가 달아날 걱정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죄상과 처벌은 재판에서 결정될 것이지만 죄수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 두려는 것이 베르텍의 의도였다. 그것을 위해 베르텍은 모든 죄수들을 심문실에다 모아둔 상태였다.

물론 거기에 미첼과 율리아나도 빠질 리가 없었다. 둘은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율리아나를 눈여겨보던 베르텍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눈치가 빠른 계집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생각을 얼른 접은 베르텍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이미 수첩에 적힌 내용은 그의 머리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상태였다.

썬더버드 용병단에서 10년 남짓 활약하다 4개월 전 개인 용병단을 창설해서 독립했다, 재미있는 전력을 가진 녀석이군. 큰 용병단에 있는 것이 벌이가 백 번 나을 텐데.

사람에겐 누구나 생각이 있는 법이오. 구태여 그것까지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않소.

카심의 대답은 무척 퉁명스러웠다. 율리아나가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상대의 인간성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에 가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상대의 성질을 긁어서 좋을 것은 없었지만 고운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텍은 카심의 반응에 별달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것을 보아 용병들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 일단 대면을 시켜볼까?

베르텍은 묵묵히 앉아 있는 카심을 쳐다보며 손뼉을 쳤다.

짝짝.

신호를 보내자 기사 하나가 한쪽 벽에 쳐져있는 휘장을 젖혔다. 그 뒤로 마치 번데기처럼 묶여 있는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데이몬이었다. 전신을 꽁꽁 묶인 채 입에 재갈이 물려있는 모습. 양팔에 대여섯 개의 팔찌를 주렁주렁 매단 채 마법진 한가운데의 의자에 묶여 있는 모습이 상당히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보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엇갈렸다. 용병들의 얼굴에는 낙심, 절망 같은 것들이, 반대로 베르텍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볼 엄두도 나지 않는 듯 미첼과 율리아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베르텍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용병들과 데이몬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겨, 결국.'

빈틈없이 묶여 있는 흑마법사를 보자 카심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쳐지나갔다. 사실 그는 흑마법사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의 흑마법사라면 쉽사리 당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흑마법사의 몰골을 보자 그 희망은 덧없이 꺾여 버렸다. 이제 그와 휘하 용병들은 꼼짝없이 압송되어 재판 받을 때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과연 내 판단이 잘하는 짓인가?'

이미 처벌을 각오하고서라도 흑마법사를 동료로 인정하겠다고 마음먹은 카심.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자 갈등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상황을 보니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받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었고 흑마법사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처벌이 다소 경감될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카심의 성미에 결코 맞지 않는 일이었다.

평소 동료애를 극도로 강조했고 스스로 사나이라고 자부해 왔기에 위기에 처했다고 동료를 버린다는 것이 카심에게 결코 내키지 않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카심의 심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율리아나를 체포한 것을 미루어 다소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심문하는 마법사는 한 눈에 보기에도 출세지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심문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주변 모든 것을 짓밟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인 것이다. 미첼 역시 비슷한 부류였지만 정도로 따진다면 마법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들은 정말 고약한 놈에게 걸린 것이다.

카심은 암암리에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정말 골치 아프군.'

만에 하나 흑마법사를 용병단에 받아들인 사실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그리 먹혀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나를 잡는 것보다 일당을 몽땅 잡는 것이 훨씬 공이 크다는 사실은 고금을 통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놈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공범으로 옭아매려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심의 행동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다. 어차피 한 배에 탄 몸. 차라리 의리를 지키는 쪽을 택하겠다.'

마음을 정한 카심은 고개를 들었다. 베르텍의 번들번들한 눈동자가 어느새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카심은 지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그럼 심문을 시작하겠다.

겁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용병대장을 쳐다보며 베르텍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태도가 다소 불손하긴 했지만 상관할 것은 없었다. 이미 그는 용병 모두를 공범으로 몰아붙여 재판에 회부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것이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심문내용을 머리 속으로 정리한 베르텍은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저자는 악명이 파다한 세바인의 흑마법사다. 이미 본국의 정보부에서 저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상태이니 조만간 죄상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성심성의껏 심문에 응해주기 바란다. 그래야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선처가 베풀어질 것이다.

말을 끊은 베르텍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우선 대장인 너에게 묻겠다. 저 자가 네 용병단의 구성원이 맞느냐?

이미 베르텍의 머리 속에는 상대가 부인할 것에 대비한 반론이 준비되어 있었다. 머리 좋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베르텍의 머리는 특히 비상한 편이었고,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말재주 역시 겸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덧없이 빗나가 버렸다.

그렇소. 그는 틀림없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정확히 십이일 전에 내가 직접 그를 우리 용병단에 받아들였소.

뜻밖의 반응에 베르텍은 잠시 멍해졌다. 이럴 경우 죄수는 대부분 관련된 사실을 부인하기 마련이다. 절박한 지경에 몰린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랄까? 죄를 조금이라도 경감 받을 수 있다면 죄수들 대부분은 동료를 팔아 넘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상식을 깨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베르텍은 확인이라도 하듯 되물었다.

확실한가?

그렇소.

네 자백으로 인해 중형이 구형될 수도 있다. 그래도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가?

미리 준비해놓은 반론이 아까웠는지 베르텍은 거듭 되물었다. 하지만 카심의 대답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용병단의 일원이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대장인 나도 의당 대가를 함께 치를 것이오.

뜻밖의 반응에 베르텍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그럼 다른 녀석들은 어떤지 볼까?

이번에는 카심 휘하 용병들에게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묻겠다.

그들에게 흑마법사가 동료인지, 또 카심 용병단의 구성원이 맞는가 하는 종류의 질문이 퍼부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카심과 다르지 않았다.

카심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용병들 대부분이 동료를 버리는 것보다 의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비록 데이몬이 자신들을 호되게 혼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비교적 잘 지내왔으며, 특히 그에겐 자신들에게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준 은혜도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맞습니다. 그는 동료이고 우리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분명합니다.

카심 용병단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베르텍은 그들의 뜨거운 동료애에 전혀 감명 받지 않았다.

'끌끌끌. 골빈 녀석들.'

물론 순순히 자백한 만큼 베르텍에게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밤새워 반론을 준비했던 것이 아까워 견딜 수 없었던 베르텍이었다. 이대로 끝내기가 싱겁다고 느꼈는지 그는 용병들 중에서 가장 어린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붙잡고 늘어졌다.

잘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다. 양심상 도저히 너희들을 감옥에서 평생 썩게 할 순 없구나. 그러니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확실한지 그것만 대답하라.

제럴드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사실을 시인하고 나섰다.

틀림없습니다. 전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고 흑마법사는 분명한 제 동료입니다.

어차피 홀로 풀려난다 하더라도 집안의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에 제럴드는 차라리 동료들과 함께 행동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노련한 베르텍의 입담에 심성이 유약한 하인리히가 조금 머뭇거렸다. 처벌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흔들리는 것을 간파한 베르텍이 계속 하인리히를 자극했다.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너에겐 의당 부모와 형제가 있을 것이다. 대답 한 번 잘못해서 그들을 평생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느냐?

나, 나는…….

하인리히는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발설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해 카심이 나섰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꾸민 음성이었다.

넌 이미 저번에 탈퇴서를 제출하지 않았느냐? 서둘러 대답해라. 넌 이미 카심 용병단원이 아니다.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인리히에게 집중되었다. 놀랍게도 그 시선에는 질시나 분노 따위의 감정이 전혀 깃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인리히를 격려하려는 듯 용병들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도 부인해서 형을 경감 받으라는 무언의 동료애. 그 모습에 하인리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것이다. 하인리히는 베르텍을 쳐다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전 카심 용병단의 일원입니다. 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베르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준비했던 반론이 깡그리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죄수들 모두가 죄를 시인했으니 더 이상 심문은 진행되지 않았다.

카심과 용병들은 하인리히에게 애석하다는,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인리히 역시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고 나니 속이 정말 시원했던 것이다. 이제 하인리히는 처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테르비아의 수도로 가서 재판을 받는 일 뿐이었다. 서기가 질문과 답변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을 확인한 베르텍은 이번에는 시선을 미첼과 율리아나에게로 돌렸다. 그들은 아직까지 고개를 푹 수그린 상태였다.

이번에는 당신들에 대한 심문을 시작하겠소. 하지만 그리 걱정하지는 마시오.

당신들은 용병단의 구성원이 아닐뿐더러 이미 용병대장이 당신들과의 계약을 철회했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간단한 조사만 받으면 풀려날 수 있을 것이오.

베르텍의 말에 율리아나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마치 세상을 살 의욕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표정. 예상대로 베르텍은 율리아나의 제보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베르텍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용병대장이 계약철회사실을 밝혔으니 그것을 인정한다면 당신들의 혐의는 풀리는 것이오. 대신 용병들이 구금되는 관계로 위약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서 본 돈트렐 시에서는 위약금의 일부를 시에서 대신 지불하기로 결정을 내렸소. 계약서에 따르면 당신들과 카심 용병단은 10골드에 계약을 체결했더군. 그러니 수도에 가서 조사를 받고 온다면 당신들에게 위약금 10골드를 지불하도록 하겠소. 그러니 당신들은 우리 시의 관용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오.

말을 마친 베르텍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녀의 대답 여부에 따라 기소내용을 달리 작성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제보 사실을 들먹인다면 그는 추호도 사정보지 않고 그녀를 한 패거리로 옭아매어 버릴 생각이었다. 일단 공범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녀의 진술내용은 별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주제에 맞게 행동한다면 당연히 선처를 베풀 용의가 있지.'

상황이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10골드로 입막음을 하고 나머지 현상금을 착복할 수 있다.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로 베르텍의 얼굴은 유난히 번들거렸다. 게다가 그에겐 흑마법사를 체포한 대가로 내려질 보상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카르셀의 왕녀는 자신의 예상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제보한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다행이군.'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둘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이미 용병대장이 계약해지사실을 진술하였소. 거기에 동의하시오?

하지만 모기 소리만 하게 들려온 대답은 베르텍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렸다.

동의하지 않아요. 난 카심 용병단과 계약을 해지한 기억이 없어요.

뭐라고?

깜짝 놀란 베르텍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카르셀 왕녀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다시 한 번 캐물었다.

정말이오? 잘 생각해서 대답하시오.

다시 말해도 마찬가지예요. 난 카심 용병단과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계약은 아직까지 유효해요. 물론 흑마법사가 용병단에 가입한 사실 또한 빠짐없이 목격했으니 나도 죄가 있어요.

베르텍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게 이 패거리는 용병단이나 고용주나 하나같이 해괴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인 것이다. 빠져나갈 길을 주려는데 굳이 마다하는 죄수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이가 없는지 베르텍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놀란 것은 베르텍 뿐만이 아니었다. 맥없이 주저앉아 있던 미첼 역시 율리아나의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안한 감정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는 있었지만 머지않아 풀려날 것을 확신하고 있던 미첼이었다. 그런데 철없는 율리아나가 또 사고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안 돼! 나, 난 아니야.'

하지만 그 절규는 속으로만 퍼져나갈 뿐이었다. 항변해보아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미첼은 잘 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랬다. 왕녀가 자백한 사실을 호위기사가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베르텍은 미첼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미치겠군.'

결국 미첼은 속만 끙끙 태울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도 전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카심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지켜보았다. 때마침 율리아나도 고개를 돌렸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카심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라도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그 모습에 카심은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것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본바탕까지 나쁘지는 않았나 보군.'

하지만 속마음을 겉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야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걸어야 하지만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카심은 계속해서 눈짓을 했다. 진술을 번복해서 자신들만이라도 풀려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고집은 역시 고래심줄이었다.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율리아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텍은 혀를 찼다.

할 수 없군. 모조리 수도에 압송해서 재판에 회부할 수밖에…….

베르텍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들을 모두 투옥하시오. 내일 윌커슨 경이 도착하는 대로 압송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은 용병들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가자. 소란 피우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용병들은 하나씩 끌려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에서 후회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율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미첼 만이 다소 허탈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재판 때 봅시다.

그 때까지 잘 지내요. 데이몬.

용병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데이몬을 향해 인사말을 건넨 후 끌려나갔다. 미첼과 율리아나만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직까지 그들 사이엔 감정의 앙금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끌려나가고 심문실 안에는 마침내 베르텍과 데이몬만 남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동료들을 뒀군. 하나같이 의리가 있지만 멍청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지.

비릿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주시한 베르텍은 지체 없이 휘장을 닫아버렸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기에 그는 보고서만 작성하면 되었다. 사악한 흑마법사와 그 일당들의 죄상을 기록할 보고서 말이다.

내일 출발하려면 서둘러야겠군.

마법진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본 베르텍은 자신의 집무실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카르셀 왕녀 일행이 감옥에 갇힌 지도 하루가 지났다. 베르텍은 기소 내용을 모두 보고서로 작성해 놓고 호송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죄수가 자신의 실력을 능가하는 마법사이니 만큼 그를 호송할 소드 마스터가 오기까진 출발할 수 없었다.

소버린 요새까진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하겠군.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베르텍은 호송할 채비를 완전히 갖춰놓고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 마침내 호송단이 도착했다. 호송 책임을 맡은 소드 마스터 윌커슨의 지휘 하에 두 명의 실력 있는 팔라딘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베르텍을 보고 호송대장 윌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노검객이었다. 테르비아를 통틀어 모두 18명이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능히 5위안에 드는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정도라면 크로센 기사의 중간 부대장 급 소드 마스터에도 뒤지지 않는 실력이었다.

그래, 세바인의 흑마법사를 직접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베르텍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누가 뭐래도 훌륭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윌커슨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베르텍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도 세바인의 흑마법사에 의해 크로센 토벌대가 격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청난 거물을 잡았군. 정말 수고했네.

반백의 머리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윌커슨은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검객이었다. 벌써 40년에 달하는 세월을 검에 매진한 만큼 눈빛에서 한 자루 잘 벼려진 검을 연상시킬 정도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출발 시간은 언제인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지금 당장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윌커슨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군. 놈이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지금 바로 출발하세나. 그런데 준비한 호송대 규모는 얼마나 되나?

이미 돈트렐 수비대에서 일류급 병사들로만 5백 명을 차출해 놓았습니다. 거기에다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 중 5명이 대기하고 있고 제가 함께 동행할 것입니다. 윌커슨 님과 두 분의 수행기사가 계시니 놈은 감히 달아날 마음을 품지 못할 것입니다.

윌커슨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소 부담스러웠는지 베르텍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사실 나와 이들 둘만 있어도 충분할 테지만 만약을 위해서 병력을 조금 데리고 가는 게 나을 테지.

사실 같은 팔라딘이었지만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과 윌커슨이 데려온 팔라딘들은 실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같은 팔라딘이라도 엄연히 실력차이가 있는 것이다.

윌커슨은 기사단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로써 부근 요새에 파견근무를 맡고 있다.

때문에 휘하의 팔라딘들은 기사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인재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자들이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은 그들보다 질이 떨어졌다. 돈트렐이 제 아무리 거점도시라고 하나 주요 요새보다 중요할 순 없었기에 비교적 경험 없고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들이 파견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썬 그들의 조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만에 하나 흑마법사가 마법진을 벗어난다면 실력이 떨어지는 자신은 물론이었고 돈트렐의 팔라딘만으론 조금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소버린 요새에 지원요청도 그 때문에 한 것이었다.

윌커슨이 당도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기에 베르텍은 곧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놈의 몰골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어차피 재판에 회부되면 놈의 면상을 물리도록 봐야 할 터.

출발이나 서두는 것이 낫겠네.

조금 뒤 돈트렐 시청 앞에는 세 대의 마차와 완전 무장한 5백 명의 병사가 도열했다.

체포한 흑마법사를 수도까지 압송하기 위한 호송대의 행렬이었다.

대상이 마법사란 점 때문에 워프를 통한 이동은 배격되었다. 그 정도 수준의 흑마법사라면 공간이동마법의 방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으므로 시간이 걸리지만 대신 안전한 육로를 택한 것이다.

베르텍은 사로잡은 흑마법사의 수준을 7서클 남짓으로 알고 있었다. 늘어선 병사들을 사열하는 윌커슨에게 다가간 베르텍은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놈은 아마 7서클의 엑스퍼트 정도 될 것입니다. 아마도 마스터까지는 오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관없네. 내가 입은 대마법 방어갑옷은 7서클의 마법정도는 막아낼 수 있으니 말이야.

윌커슨의 장담에 베르텍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론 소드 마스터의 마법 저항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7서클의 마법까지 견딜 수 있다니…….

그렇다면 자신은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윌커슨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놀랍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베르텍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쳐다보았다. 이미 사악한 흑마법사와 그 일행들은 마차에 단단하게 실어놓은 다음이었다.

가운데 위치한 큰 마차에 바로 흑마법사가 갇혀 있었다. 마차 세 대중 가장 크지만 속에는 단 한 사람만 들어 있는 것이다. 나머지 두 대의 마차 중 하나에는 용병과 카르셀 왕녀, 그리고 그녀의 호위기사가 갇혀 있었다. 나머지 마차는 베르텍과 윌커슨이 탈 것이었다. 가장 선두에 배치된 마차 말이다.

베르텍은 윌커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마차에 타십시오. 상당히 걸리는 여정이니 말을 타고 가시는 것보다는 나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윌커슨의 반응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의 임무는 놈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것일세. 그러니 난 부하들과 힘께 놈이 탄 마차 지붕에 타겠네.

그, 그러시다면…….

정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가 먼저 청하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던 베르텍. 윌커슨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운 나머지 베르텍은 서둘러 출발 명령을 내렸다.

출발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호송단은 서둘러 위치를 잡았다. 5백 명의 병사들은 서둘러 진형을 갖춰 마차를 에워쌌고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도 마차 주변에 튼튼하게 자리를 잡았다. 물론 가장 신경 써서 세심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흑마법사가 수감된 마차였다.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대국답게 테르비아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배치를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라딘 두 명과 함께 선두의 마차에 탑승한 베르텍은 의기양양한 표정대로 호송대를 둘러보았다. 확 펴진 미래가 눈앞에 생생했기 때문에 그는 절로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로를 생각하면 궁정 마법사도 영 불가능하진 않아. 후후후. 끝내주는군.'

속으로 쾌재를 불러가며 베르텍은 마차에 몸을 싣고 수도로 향했다.

그런데 호송대열을 쳐다보는 사람들 속에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 하나가 있었다.

짙디짙은 흑발. 핏기 없이 흰 얼굴에 얼음 같은 차가움이 감도는 젊은 청년. 바로 러셀런트였다. 그는 드디어 목표물을 찾은 것이다.

놈! 도망쳐 봐야 독 안에 든 쥐 신세렸다.

그토록 찾아다녔던 가증스런 목표가 바로 저 마차 안에 있었다. 하지만 러셀런트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조금만 있으면 인적이 뜸한 관도로 들어설 테지. 그 때를 노리는 것이 낫겠군.

그는 에인션트급 블랙 드래곤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고 해서 목표물을 노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개미 같은 인간들은 아무리 많이 모여있더라도 러셀런트에겐 결코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달려들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이목 때문이었다.

조만간 가해질 드래곤들의 전면적인 침공.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가 없었다.

아르카디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인간들에게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를 노려야 했다. 그것을 상기하며 러셀런트는 놈의 종적을 간파할 수 있었던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돈트렐 전역에 광범위한 탐지 마법을 펼쳐놓고 목표물이 걸리기를 기다리던 러셀런트에게 미약한 마법의 기척이 느껴진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의 탐지 마법이 돈트렐 시 전역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마법일지라도 그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촉각에 마법의 신호가 걸려들었다.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8번의 재배열을 마친 마법 신호, 곧 8서클로 구현된 것이라는 점이다.

놈이로군.

그것을 알아차린 러셀런트는 신호를 보낸 자가 목표물임을 직감했다. 대관절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모르지만 아르카디아에 8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놈밖에 없을 터였다.

마침내 꼬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러셀런트는 곧장 신호의 진원지를 역추적해 들어갔고 마침내 놈이 갇힌 마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차를 보자마자 러셀런트는 왜 신호가 8서클로 전개되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마법진이군. 멍청한 녀석, 동족들에게 사로잡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마법진. 마법진의 힘이 작용하는 곳에는 마나의 분포가 극히 희박하다. 때문에 어지간한 마법은 전개할 수조차 없으며 한다 해도 고서클로 돌려야만 제대로 마법이 구현된다. 워낙 마나가 희박하기 때문에 효율을 비약적으로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러셀런트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이상하군. 놈은 9서클의 마스터라고 했다. 그런 놈이 저 정도 수준 낮은 마법진에 구속될 리가 없을 텐데?

그것은 마나의 응집을 제약하는 또 다른 마법무구를 착용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9서클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드래곤에 비할 수는 없더라도 9서클의 마스터는 일개 왕국의 흥망을 간단히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한낱 마법진에 구속되어 있다니……. 뭔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지만 러셀런트는 간단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놈이 날 불러들이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실수한 것이다.

녀석. 드래곤이 왜 마법의 조종으로 불리는 지를 뼈저리게 실감시켜 주겠다.

9서클이 아니라 9서클 할아비라도 드래곤에게만은 통하지 않는다. 마법은 철저히 높은 서클에 눌리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변하지 않는 진리! 때문에 러셀런트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상황을 보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수 있는 녀석은 소드 마스터 하나 뿐이다.

나머지 녀석들은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오로지 소드 마스터만이 강철보다 단단한 자신의 비늘을 뚫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벌 한 마리에게 급소를 쏘여 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는 드래곤에겐 마치 독을 가진 벌에 능히 비견될 만한 존재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별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한 놈뿐이니 정신계 마법으로 미리 제압해 놓고 시작하면 되니 말이다.

정신계 마법. 대략 웜급 이상 되는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시전할 수 있다. 물론 익힌 수준에 따라 위력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이 인간 한 명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정신계 마법에 당한 인간은 일정기간동안 드래곤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그것이 한 번에 인간 하나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런 단점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우려할 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인간은 단 하나 뿐이었다.

물론 목표물인 가증스런 마법사가 있었지만 신경 쓸 바는 없었다. 9서클의 마스터라도 마법사인 이상 그에게 조금도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으므로…….

생각을 정리한 러셀런트는 흰 이를 드러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관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마차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어차피 너는 죽은목숨이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테니 조금 더 살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라.

나지막이 지껄인 러셀런트는 건물의 그늘 사이로 조용히 사라졌다. 이미 마차에 추적마법을 펼쳐 놓았으므로 놓칠 우려는 없었다.

돈트렐의 성문을 나온 호송단은 수도를 향해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500명의 보병들이 섞여 있는 탓에 이동속도가 느리기 짝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급할 것이 없었기에 베르텍은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묻은 채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가는 길은 수도까지 직통으로 연결되는 관도였다. 치안이 잘 유지되기로 정평 있는 테르비아의 영토라서 출몰할 만한 도적단도 없었고 또한 나타나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500명의 병사들은 차지하고서라도 소드 마스터 하나와 팔라딘 7명의 호위라면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어떠한 도적단이라도 덮칠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까.

그런 까닭으로 호송대 대부분은 느긋하게 관도를 이동했다. 하지만 초대하지 않은 자가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응?

넓디넓은 관도 한 복판에 떡 하고 버티고 선 그림자 하나를 보자 윌커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뛰어난 소드 마스터인 만큼 그의 시력은 범인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마치 자기 집 안방 마냥 관도 중앙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윌커슨의 주름진 노안에 주름살이 그려졌다.

무슨 꿍꿍이지?

도적단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통상적으로 도적단은 길가 풀숲에 다수의 병력을 숨겨놓고 소수의 병력만 보여 이쪽을 안심하게 한 뒤 들이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이곳은 몸을 숨길만한 곳이 전혀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관도 옆에 은폐할 만한 공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마치 자신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길목을 막고 서 있다니…….

윌커슨이 고민에 휩싸여 있는 사이에도 마차는 꾸준히 전진을 해 나갔고 마침내 정체불명의 인물은 호송대 병사들 대부분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까지 접근했다.

뭐야?

정신나간 놈인가?

의아하기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호송하는 마차에는 테르비아 왕국의 문장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담량을 가진 사람은 감히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런데도 단신으로 길목을 막은 간 큰 자가 있는 것이다. 베르텍 역시 의심 섞인 눈초리로 상대의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길목을 막은 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절세미남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수려한 용모.

짙디짙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어지간한 처녀들의 방심을 흔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호송대에는 여자가 속해 있지 않았기에 청년의 용모에 넘어갈 만한 자는 없었다. 길을 비키지 않을 기세였기에 결국 베르텍은 호송대열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지.

마차가 멎자 팔라딘 하나가 잽싸게 뛰어내렸다. 청년에게 다가가서 길을 막은 연유를 물어보려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우리는 테르비아 왕실에서 파견된 호송대다. 길을 비키지 않으면 법에 따라 엄한 처벌을 받을 테니 허튼 수작하지말고 비켜라.

하지만 청년은 팔라딘의 으름장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벅저벅.

그는 느릿하게 걸어 마차로 다가왔고 선두의 병사들은 긴장한 채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물론 혼자가 확실했기에 후미의 병사나 기사들은 아직까지 상대가 하는 양만 뚫어지게 주시할 뿐이었다. 선두의 마차 가까이 다가온 청년은 베르텍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 대열의 책임자냐?

'네가?'

베르텍은 기가 막혔다. 어디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대뜸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스물 남짓해 보이는 애송이였고, 제법 옷차림이 멀끔하긴 했지만 그리 신분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이놈이'

베르텍은 본능적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흑마법사를 체포한 공으로 조금 있으면 궁정 마법사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울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넨 누군가?

무슨 이유로 대열의 앞을 가로막았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비키게? 단단히 경을 치고 싶지 않으면 말일세. 우린 아주 중요한 범인을 잡아 압송중이네.

그 말을 듣자 청년의 눈에서 빛이 일어났다.

물론 청년의 정체는 러셀런트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마법사를 내놔라? 그렇게 한다면 네놈들의 보잘것없는 목숨 따윈 살려주겠다.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호송대 전원이었다. 조용한 톤으로 흘러나왔지만 내용은 정말 경악할 만한 수준이었으니……. 만약 이 말이 천 명 가량의 도적들을 지휘하는 도적대장의 입에서 나왔다면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단신으로 길을 막은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베르텍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냉랭하게 내뱉었다.

미친놈이군. 체포하라. 함께 수도로 압송해서 법이 얼마나 준엄한지 가르쳐 줄 것이다.

베르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랭한 음성이 호송대원 전원의 귀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럴 줄 알았다. 그 대답으로 너희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콰콰콰콰.

청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엄청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청년의 몸을 축으로 해서 부채꼴 형상으로 퍼져나간 파동은 땅을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우르르르.

대지가 진동하며 비명을 질러댔고 흔들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비틀거렸다. 마차를 끌던 말들도 요동치는 대지에 놀라 난리를 피워댔다.

히히히힝

워, 워, 진정해라.

깜짝 놀란 병사들은 말을 달래기에 바빴다. 윌커슨을 비롯한 기사들은 이미 마차에서 뛰어내린 상태였다.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뽑아들어 청년에게 육박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추호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과연 정예는 정예였다. 하지만 기사들의 돌격은 오래지 않아 차단되었다.

욱.

파동과 함께 퍼져 나온 빛에 하나같이 눈을 가리며 몸을 돌려야 했다. 눈부신 광구가 청년의 몸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기사들은 채 눈을 뜨지 못했다. 물론 돌격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빛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도저히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변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헉.

저, 저게 뭐야?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된 병사들의 눈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거대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느닷없이 나타난 것은 키가 30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괴물이었다. 전체가 검은 빛 비늘로 덮여 있었고 거대한 날개가 몸통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뿔이 솟은 거대한 머리통에서는 날카로운 엄니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잔혹한 빛은 병사들의 심금을 여지없이 사로잡은 상태였다.

드, 드래곤이야.

저, 정말이군. 여기서 드래곤을 목격하다니 꿈만 같군.

병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드래곤의 위용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드워프 뿐만 아니라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 역시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경향을 가진 탓에 지금까지 그들이 드래곤을 구경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차에 갇힌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쇠창살 사이로 용병들은 드래곤의 모습을 감상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햐! 드래곤이야.

살아 생전에 드래곤을 볼 수 있다니…….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의 몸에서는 강력한 힘과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찌 보면 아름답다고 볼 수 있을 듯한 모습.

정말 멋져…….

일행 중에서 유일한 여성인 율리아나는 몽롱해진 눈빛으로 대륙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의 모습을 정신 없이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전투준비. 드래곤은 호송중인 죄수를 노리고 있다. 모두 방어진을 형성하라.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린 윌커슨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신 나간 듯 드래곤을 쳐다보던 병사들은 호통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밀집대형으로 방어준비.

그들은 곧 훈련받은 대로 마차 주변에 둥글게 포진하려 했다. 물론 실력 있는 기사들은 모조리 흑마법사를 가둔 마차에 배치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대비할 틈을 줄 러셀런트가 아니었다. 경험 많은 그는 이미 몸 속의 기운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인간들이여. 아등바등 살아가는 너희들의 비천한 목숨, 내가 손수 끊어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지어다.

말을 마친 러셀런트는 아가리를 좍 벌렸다. 그리로 수없이 많은 미세한 물방울 같은 것이 스프레이 형태로 분출되었다.

콰콰콰콰.

마치 맹렬한 폭풍우를 만난 안개와도 같은 모습. 그것은 미처 대비할 사이도 없이 호송대 대열을 덮어버렸다.

햇빛이 쨍쨍 내려 쬐는 날이었기에 안개는 삽시간에 수많은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탄성이 절로 일어날 정도로 아름다운 무지개군(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서운 살인안개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크, 큭. 이것은?

사, 산이야. 살려줘. 몸이 녹고 있어.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몸에 걸친 갑옷이 삽시간에 퇴색되며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강철 갑옷이 그 지경이니 인간의 몸은 오죽하겠는가? 병사들의 몸은 어느새 뼈가 보일 정도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끄으으.

병사들은 부들부들 떨다 쓰러지기가 무섭게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정말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살인안개였다.

애시드 브레스(acid breath) 블랙 드래곤만이 뿜을 수 있는 브레스로써 일대 다수의 접전에서 가히 절대적인 위력을 보인다. 대기를 온통 뒤덮으며 휘몰아치는 강산의 안개 속에서는 그 누구도 무사하기 힘들었다. 이 브레스에서 무사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마법사 아니면 팔라딘 이상 되는 기사들뿐이었다. 그 외의 병사들이 애시드 브레스를 견딜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호송대에 소속된 500여 병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해버렸다. 갑옷의 골조와 뼈만 남은 참혹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본 베르텍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세, 세상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무려 500명의 병사들이 몰살되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행히 그를 비롯한 팔라딘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블랙 드래곤 특유의 애시드 브레스란 것을 파악한 순간 돈트렐에서 따라온 팔라딘들은 서둘러 베르텍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때맞춰 베르텍이 실드(Shield)를 펼쳤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러나 청년에게 용건을 묻기 위해 다가갔던 팔라딘은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다. 너무 가까이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에 미처 갑옷에 마나를 밀어 넣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이런.

베르텍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후미의 병사들 역시 전멸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같이 뼈만 남긴 채 녹아버린 상태였다.

오직 무사한 것은 윌커슨과 휘하의 기사들뿐이었다. 그들은 갑옷에 마나를 집중시킨 탓에 다행히 녹는 신세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갑옷의 표면에 맺힌 오러의 막은 살인안개로부터 그들의 갑옷과 몸을 지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살인안개가 호흡기를 통해 스며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호흡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텍은 서둘러 손짓을 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윌커슨은 휘하 기사들을 대동해 재빨리 베르텍에게 다가갔다.

쓰쓰쓰.

베르텍이 서둘러 주위에 실드를 펼쳐주자 그들은 겨우 가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있었다면 안개에 녹아버리기에 앞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헉헉. 고, 고맙다.

그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사방을 휩쓸고 있는 살인안개를 주시했다.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브레스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차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안전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죄수들이 십중팔구 뼈만 남기고 깡그리 녹아버렸을 터였다.

베르텍은 정황을 보아 그것이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궁정마법사가 될 것이란 꿈도 그와 함께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도, 도대체 드래곤이 왜 죄수를 노리는 거지?

저, 전들 알겠습니까?

생존자들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안개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거대한 드래곤의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의 무서운 파괴력을 그때서야 실감한 것이다. 그러던 사이 살인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후우우웁.

러셀런트가 브레스를 뿜는 것을 그치자 살인안개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을 뒤덮은 아름다운, 그리고 끔찍하기도 한 무지개들이 순차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닿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애시드 브레스. 물론 러셀런트도 안개에 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면역성을 가진 탓에 러셀런트의 피부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른바 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드래곤들이 마찬가지였다. 만약 자신의 브레스에 내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러셀런트는 채 브레스를 뿜어내기도 전에 신체 장기가 먼저 녹아버렸을 터였다.

산성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참혹한 장내의 정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쳐다본 러셀런트는 포효를 내질렀다. 이름하여 승리의 로어.

콰우우우우.

러셀런트의 포효는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의 심금을 사로잡아가며 멀리 멀리 울려 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일곱 명뿐이었다. 윌커슨과 베르텍은 호송대에서 살아남은 것이 자신들뿐이라고 단정했다. 평범한 용병들이 애시드 브레스를 견딜 수는 없는 노릇.

비록 거기에 팔라딘이 한 명 끼여 있긴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대마법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이상 산성 안개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 밖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마차 쪽을 쳐다본 베르텍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니?

골조만 남긴 채 녹아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던 마차는 의외로 멀쩡했다. 물론 표면이 이리저리 녹아있긴 했지만 철창이 쳐진 부분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베르텍은 철창 너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속의 죄수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차를 빠져나오려 하는 죄수들을 보자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차를 계속 주시하던 베르텍의 눈에 마차를 뒤덮은 푸른 빛 장막이 들어왔다. 은은하게 빛나는, 제대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장막이었다.

저, 저것은 실드?

장막의 정체를 알아차린 베르텍은 고민에 휩싸였다. 도대체 누가 실드를 전개해서 죄수를 보호했을까? 베르텍에겐 결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니 마차 두 대를 통째로 실드로 덮어씌울 만한 실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던 베르텍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혹시 드래곤이?

고개를 돌린 베르텍의 눈에 윌커슨이 기사 두 명을 대동해서 드래곤에게 육박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죽음을 무릅쓴 용감한 행동이었지만 베르텍의 눈엔 무모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보아 자신들이 살아날 길은 윌커슨이 드래곤을 처치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베르텍의 속은 점점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도 나서서 윌커슨을 지원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정도 크기의 드래곤이라면 틀림없이 에인션트 급이었고 그렇다면 10서클의 마스터란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사인 자신이 드래곤에게 덤벼드는 것은 한 마디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표현할 수 있었기에 베르텍은 부들부들 떨며 오직 윌커슨의 공격이 통하기를 염원했다. 비록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일이었지만 현재로썬 기대를 걸 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후후. 가소롭군.

겁도 없이 자신을 향해 육박해오는 인간 셋을 보고 러셀런트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저들 정도의 기사라면 분명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고 그것은 물론 자신의 단단한 비늘을 쉽사리 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접근을 허용했을 때의 일이었다. 접근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강한 소드 마스터라도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러셀런트는 지체 없이 캐스팅에 들어갔다. 본체로 돌아온 이상 구현되는 마법은 용언 마법이었고 거기에 주문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으앗.

윌커슨은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발이 땅과 떨어진 이상 달려도 소용이 있을 턱이 없었다.

놀란 윌커슨은 발버둥을 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허공에서 함께 허우적거리는 휘하 기사들을 발견하자 그의 얼굴에 암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채 접근하기도 전에 드래곤의 마법에 당한 것이다.

드래곤에게 덤비는 녀석들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지.

냉혹한 일성과 함께 윌커슨의 양옆에서 대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쾅.

후끈 풍겨져 오는 열기로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의 대 폭발이었다. 눈을 뜬 윌커슨의 몸에 산산조각이 난 휘하 기사들의 살점과 갑옷조각이 와서 부딪혔다.

후두두둑.

절망감으로 인해 윌커슨의 얼굴은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의 파괴력을 절실히 실감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이, 이것은 정신계 마법.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윌커슨은 눈을 부릅떴다.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저항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허사였다. 허공에 고정된 채 몸부림치던 윌커슨의 동공에서는 점점 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끄, 끝이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텍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기사 두 명이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난 후 그는 사력을 다해 공간이동을 전개하려 시도했다. 윌커슨이야 죽던 말던 자신만 살아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간이동은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사방을 빙 둘러 공간이동 방해장이 쳐져있었고 도저히 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윌커슨조차 당해버린 상태라서 지금으로썬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허공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윌커슨은 검을 늘어뜨린 채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드래곤의 정신계 마법에 제압 당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베르텍은 정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의 살기 넘치는 눈초리가 자신에게 향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주르르.

당장이라도 육중한 드래곤의 앞발이 자신을 뭉개버릴 것 같았다. 멍청하게 서 있던 윌커슨을 한 번 쳐다본 드래곤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쿵쿵쿵

걸음을 옮김에 따라 대지가 비명을 질러댔다. 육중한 드래곤의 무게를 견딜 정도로 지반이 튼튼하지 못했던지 걸음을 옮김에 따라 깊숙한 구덩이가 패였다.

사, 살려주시오.

불쌍하게도 베르텍은 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에 넋이 완전히 빠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베르텍을 목표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다.

쿵.

금방이라도 베르텍을 밟아버릴 것처럼 보이던 거대한 발이 그의 앞에서 뚝 멈췄다.

부들부들 떠는 베르텍을 지척에 둔 상태에서.

드래곤은 그의 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베르텍 따위에겐 관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곧 벼락같은 음성이 베르텍의 귀를 자극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귀에 심각한 통증을 느낀 베르텍이 옆으로 물러나건 말건 드래곤은 상관없다는 듯 장내의 한쪽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반쯤 부서진 마차에서 걸어나오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에게 말이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러셀런트를 쳐다보았다. 그의 팔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팔찌들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채 마차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물론 마법진 역시 과도한 마나의 재배열을 버티다 못해 파괴된 상태였다.

드래곤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푸른 빛 장막에 덮인 마차가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여러 개의 눈동자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병들이 갇혀 있는 마차에 실드를 덮어씌워 살인안개로부터 구해준 것은 바로 그였다. 베르텍이 세심하게 신경 쓰긴 했지만 애당초 그의 실력으론 데이몬을 구속할 순 없었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동료로 삼을 가치가 있는 녀석들이었어…….

사실 그는 일부러 제압된 척 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베르텍 따위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일부러 체포되는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는 용병들의 마음을 한 번 시험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 수라사령심법의 틀을 잡아주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본시 알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일부러 위기를 만들어 용병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면 사람의 본마음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데이몬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용병들은 처벌을 감수해가며 자신을 동료로 인정했다. 그것이 비록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도 데이몬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저들에게만은 뒤통수를 맞을 일이 없어 보였으므로…….

마차에 갇힌 용병들의 면면을 한 번씩 돌아본 데이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블랙 드래곤의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고 있었다. 눈빛을 맞받으며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느라 수고했어.

러셀런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상대의 태도는 도리어 자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치 힘을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것. 러셀런트는 고개를 흔들어 불길한 감정을 떨쳐버렸다. 저까짓 마법사 따위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러셀런트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가증스러운 놈. 인간 따위가 감히 드래곤의 마법 보고를 훔쳐 달아나다니…….

인크레시아는 트루베니아의 모든 드래곤이 모은 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보관해놓은 마법보고이다. 그런 인크레시아를 훔쳤으니 백 번 죽어도 여한이 없으렸다.

러셀런트의 말에 놀란 것은 도리어 용병들이었다. 세상에 드래곤들의 마법 보고를 훔칠 담량을 가진 인간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그것은 베르텍과 긴장한 채 서 있는 네 팔라딘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가 그런 짓을 했을 줄은 정녕 모르는 사실이었다. 러셀런트는 인간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데이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비록 네놈의 손에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가 죽었지만 그것은 문제삼지 않겠다. 오죽 못났으면 인간 마법사 따위에게 죽음을 당했을까? 하지만 정녕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인크레시아를 훔친 죄이다. 그것은 너뿐만 아니라 네놈이 속한 종족 모두의 목숨을 바쳐도 치를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난 이 자리에서 네놈이 저지른 죗값을 받아내겠다.

추상같은 엄포였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주눅들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빙글빙글 웃으며 러셀런트를 살살 약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받아낼 생각이지? 난 별로 부자가 아니라서 죗값을 치르기 힘들텐데…….

이러면 어떨까? 인크레시아 속에 보물이 제법 많더군. 그것을 조금 꺼내 줄 테니 죗값을 치른 것으로 하면 어떨까?

기가 막힌 나머지 잠시 말을 잊었던 러셀런트는 거세게 분노를 토해냈다.

미천한 인간 녀석이 정녕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내 당장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방종을 저지른 데 대한 응징을 하리라!

그와 동시에 러셀런트의 몸 주위로 엄청난 마나의 파동이 휘몰아쳤다. 조금 떨어져 있는 데이몬의 로브 자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방대한 마나의 회오리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았다. 복수의 대상을 눈앞에 둔 때문인지 그의 눈빛은 더욱 가라앉고 있었으니…….

자…자…. 진정하라고. 일단 보물을 보고 흥정해야지. 성급하게 굴면 쓰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마법을 전개하려던 러셀런트가 인크레시아를 보고 잠시 멈칫한 순간 데이몬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나의 전사들이여!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 너희들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이 바로 앞에 있다. 어서 나와서 원한을 백 배로 갚아주어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인크레시아 속에서 네 줄기의 검은 빛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거무스름한 빛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러셀런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동시에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성이 러셀런트의 귀를 파고들었다.

손꼽아 기다렸다.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