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셀 왕국에서의 경험으로 율리아나는 강하게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호통을 치는 것에 익숙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할 경우 수비병들은 의례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노기를 가득 머금은 율리아나는 거침없이 호통을 쳤다.
나는 카르셀 왕국의 왕녀다. 이리로 오는 도중 도적단을 만나 호위기사들을 모두 잃었느니라. 그러니 어서 성문을 열도록 하라.
수비병들의 얼굴에 당혹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외견상 빌어먹는 거지로밖에 보이지 않은 계집아이가 기세 좋게 호통을 쳐대고 있는 것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도저히 이해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수비병은 결국 수문부장(守門部將)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검문에 열중하던 부장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수비병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부장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귀족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카르셀의 왕녀이시라고요?
부장의 반응에 기가 산 율리아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잔인한 도적단에게 기사들을 모두 잃고 나와 기사대장만 겨우 도망쳐왔느니라.
그렇다면 카르셀이라는 왕국에서 발급 받은 통행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부장의 반문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것은 도적단에게 빼앗겨서…….
그것을 들은 부장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이미 그는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상태였다. 성문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작자들 말이다. 이럴 경우 대응할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태도를 싹 바꾸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세상에 통행증을 빼앗는 도적단이 있나? 내가 알기론 이 부근에는 도적단은 전혀 없어. 그러니 거짓말도 좀 그럴 듯하게 하시지. 북부나 서부면 몰라도 이곳에서 도적단이라……. 햐!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는군.
사, 사실이다. 우린 분명히…….
인상을 찡그린 부장은 율리아나와 미첼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게다가 난 지금까지 카르셀이란 왕국의 이름을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난 이미 10년 가까이 성문 수비병을 맡고 있는데도 말이야. 게다가 한 가지 더, 당신들은 도저히 도적단의 습격을 받은 몰골이 아냐. 세상에 아무리 다급하다고 옷을 뒤집어 입는 경우가 있던가?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가지 않자 율리아나는 애가 탔다.
정말이다. 난 분명히 카르셀의 왕녀로써, 이 기사는 나의 경호를 책임진…….
세상에 검도 없는 기사라……. 웃기는 군.
부장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부하들을 불렀다.
이들을 포박하라. 신분을 사칭한 죄로 재판에 처할 것이다.
자, 잠깐만…….
사색이 된 둘에게 수비병들이 달려들어 사납게 창을 들이댔다. 이미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듯 수비병들은 추호도 틈을 주지 않았다.
손을 들고 돌아서라.
어지간한 미첼도 검이 없는 탓에 결국 제압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극도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팔라딘다운 면모를 전혀 보이지 못한 것이다.
수비병에게 단단히 제압된 둘을 보며 부장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끌고 가서 우선 잡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가자.
수비병들이 거칠게 잡아당기자 둘은 맥없이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도 곡절을 많이 겪은 탓에 둘에겐 더 이상 항변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둘은 조용히 수비병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니 율리아나 공주님?
난데없이 옆에서 터져 나오는 음성에 율리아나의 고개가 뺨이라도 맞은 듯 세차게 돌아갔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괴었다. 이름을 부른 자는 그녀에겐 더 이상 반가울 수 없는 인물이었다.
비록 외딴 산중에다 버려 두고 오긴 했지만 더 이상 믿음직할 수 없는 존재. 그를 보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엉. 카심.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포승에 묶여 있는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율리아나의 이름을 부른 자는 놀랍게도 카심이었다. 돈트렐 시내의 여관에 박혀 마나연공법을 수련하고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응?
그 모습에 놀란 것은 부장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심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하게 카심에게 다가온 부장은 눈을 치켜 떴다.
카심. 혹시 아는 사람인가?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녀는 카르셀 왕국의 왕녀야. 일전에 그녀의 호위를 맡았다가 모종의 일로 헤어졌는데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군.
이번에는 부장이 놀랄 차례였다.
그, 그 말이 정말인가?
그렇다네. 모습을 보니 무척 험한 일을 겪은 것 같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청년은 카르셀 왕국에서 따라온 호위기사라네. 그런데 어쩌다 검까지 잃어버렸지?
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문했다.
확실한 사실인가?
그럼! 그는 오러 블레이드까지 시전할 수 있는 팔라딘인걸? 내가 확실하게 확인했어.
부장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일개 왕국의 왕녀와 그녀의 호위기사, 그것도 팔라딘 급의 기사를 묶어 감옥에 집어넣으려 했다니…….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그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카심이 인정했다면 모든 것이 사실이라 봐야 했다.
몇 해 전. 카심이 썬더버드 용병단의 일원이었을 시절 둘은 함께 싸웠던 전력이 있었다. 당시 테르비아 왕국은 부근의 탄블렛 왕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이 개입하기 전에 최대한 영토를 확장할 생각으로 테르비아 왕국은 당시 대대적으로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 때 썬더버드 용병단은 부장이 소속된 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였고 그 때문에 부장은 카심과 일년 남짓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부장은 카심이 무척 용맹할 뿐더러 강직하고 또 정직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심이 보증한다면 틀림없겠군.'
부장은 서둘러 수비병에게 포승을 풀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율리아나를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눈물로 젖은 율리아나의 고개가 슬며시 부장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눈에서 뭔가 빛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자 카심은 바짝 긴장했다.
'안 돼!'
그가 파악한 율리아나의 성미로는 다짜고짜 부장의 따귀를 날리고도 남았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괄괄한 공주를 포박해서 감옥에 집어넣으려 하다니…….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약소국인 카르셀의 왕녀를 테르비아에서 인정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판이하게 빗나가버렸다. 워낙 혹독하게 고생을 한 탓에 기가 완전히 꺾여 버렸는지 그녀는 의외로 관대한 반응을 보였다.
모르고 한 일이니 문제삼지 않겠어요. 그럼 우린 이만…….
카심은 천만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얼른 그녀를 안내했다.
일단 저희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시지요. 공주님.
그러면서도 부장에게 수고하란 한 마디는 잊지 않는 카심이었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럼 수고하게.
잘 가게나.
부장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카심은 미첼과 율리아나를 데리고 돈트렐 시내로 향했다.
부장은 아직까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셋은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성문에서는 편을 들어주었지만 묵은 앙금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카심의 표정은 이제 냉랭하게 돌변해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묵묵히 카심의 뒤를 따랐다.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걸어가던 카심의 눈에 갑자기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반가운 손님이란 게 이들을 칭하는 건가?'
사실 그는 데이몬의 지시로 성문에 간 것이었다.
흑마법사 데이몬은 자신들을 꼬박 열흘동안 돈트렐의 여관에 박아두었다. 그 탓에 카심과 휘하 용병들은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결코 쉴 겨를이 없었다. 흑마법사에게서 전수받은 마나연공법을 익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반응 하나는 정말 빠른 마나연공법이었다.
난생 처음 몸 속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것을 움직여 보는데 정신이 팔려 용병들에게 열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수련할수록 움직여지는 마나의 양이 조금씩 늘었기에 연공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걸어가던 와중 카심은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과연 이 연공법이 효과가 있을까?'
비록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그들에겐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마법사가 만든 마나연공법일지라도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만 수련해야 했다.
하지만 재미는 무척 쏠쏠한 편이었다. 흑마법사가 시키는 대로 하니 몸 속의 마나를 점차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카심은 이제 그것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된 상태였다. 물론 기억했던 경로대로 돌리는 것은 아직까지 무리였지만 마나는 조금씩 그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말이 정말 신통하게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부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기대에 부풀어 걸어가는데 돌연 옆에서 모기소리 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돈트렐엔 언제 들어왔어요?
그것이 율리아나의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카심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 것 없소이다.
미안해요.
평소답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율리아나였다. 먹을 것을 가지고 간 자신들도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용병들이 식량도 없이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서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뭔가가 생각이 난 듯 율리아나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
곤경에서 구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런데 성문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일순 카심의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성문에 가면 반가운 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흑마법사의 장담 때문에 반신반의하며 달려왔는데 미첼과 율리아나를 만나다니…….
이들과 대면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카심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순 없었으므로 카심은 얼렁뚱땅 둘러댔다.
실은 그 부장 녀석과 조금 안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둘러앉아 옛날 얘기라도 나눌까 하고 갔었지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부장과 아는 사이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근무시간에, 그것도 검문에 몰두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부장과 한가롭게 잡담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그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정말 공교롭군요. 우리에겐 더 없는 행운이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들과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에 잠겨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흑마법사가 이들을 따라다녔단 말인가?'
정황을 보아 그것이 합당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흑마법사가 열흘 가량 사라진 것은 아마도……. 우뚝 걸음을 멈춘 카심이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찔끔한 율리아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식량을 가지고 간 사실을 들먹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카심이 다시 몸을 돌렸다.
'설마 흑마법사가 저 성질 더러운 공주에게 연정을?'
어이가 없는 추측 같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고위급 마법사이니 추적 마법을 펼친다면 충분히 저들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고 뒤를 계속 미행하다 돈트렐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에게 통보한 것일 수도 있었다.
카심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법 골치 아픈 문제였기에 카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젠장. 그렇다면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야 하잖아? 흑마법사가 공주에게 마음이 있으니 말이야.'
흑마법사가 공주를 사랑하건 말건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데이몬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주를 붙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가입했는지는 모르지만 흑마법사는 자신의 용병단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은 것이 카심의 심정이었다.
만약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계약해지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는 율리아나를 보는 순간 계약 해지서에 도장을 찍게 한 뒤,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심은 흑마법사의 입장을 감안해 마음을 바꿨다.
고개를 돌린 카심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지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소.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공주.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소? 계약대로 크로센 제국까지 우리와 동행하시겠소? 아니면 계약 해지서에 서명을 하고 헤어지겠소?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카심의 태도에 다소 얼떨떨해 했지만 율리아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선택할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현재로써는 믿고 기댈 구석이 용병단 밖에는 없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장 먹고 자는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계약대로 행동해야겠지요?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헤어진 것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되잖아요?
카심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식량을 훔쳤다는 사실은 입에 담지도 않는 율리아나. 저 철부지 공주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서라도 계약내용을 유지하는 것이 합당해 보였기 때문에 카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안전한 경호를 위해 오늘 이후부터는 제 말에 철저히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위약금을 물더라도 제 쪽에서 계약 해지를 생각할 테니까요.
제법 당차게 나오는 카심의 태도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께요.
사실 일이 이렇게 무마된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천만 다행이었다. 계약해지를 하게 될 경우 그들은 이곳에서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안색이 핀 율리아나는 연신 재잘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침통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첼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언제 들어왔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질문을 퍼붓는 율리아나를 보고 카심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이상 그녀는 변함 없이 자신의 고용주였고 서로 불편하게 대해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우린 이곳에서 정확히 열흘을 머물렀습니다.
율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열흘이라면 자신들과 헤어진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에 그녀로써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처음엔 저도 답답했지요. 하지만 흑마법사 데이몬이 공간이동을 시켜주어서 쉽사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열흘동안 정말 잘 푹 쉬었지요.
사실을 들은 율리아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기껏 식량을 훔쳐 도망쳤건만 용병들은 정작 하나도 고생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들이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 용병들이 이곳에서 푹 쉬었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율리아나는 한 마디 내쏘고 말았다.
그래요? 편하게 와서 좋았겠네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냉랭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미첼만이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으로 뒤를 따를 뿐이었다.
기세 좋게 들어서는 미첼과 율리아나를 보자 용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용주를 또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용병들이었다. 오직 데이몬만이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이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카심을 성문으로 보낸 뒤 데이몬은 이곳에 머무르며 용병들의 성취를 살펴보던 참이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여든 용병들은 서둘러 카심에게 연유를 물었다.
대장.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들을 대관절 어디서?
운이 나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니 임무를 완수해야 하지 않겠어?
태평스런 카심의 대답에 용병들은 인상을 구겼다. 모든 게 제멋대로인 데다 고집불통인 계집아이를 또다시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용병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천연덕스럽게 내실로 향했다.
몹시 피곤해요. 들어가서 씻고 올 테니 식사를 부탁해요.
율리아나가 들어가자 미첼은 맥없이 바닥에 철버덕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먹질 못해 기력이 없는 탓이었다. 그를 본체만체 하며 용병들은 카심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미첼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주저앉은 순간 곯아 떨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식량을 깡그리 털어 달아난 것만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일인데…….
카심은 침통한 표정으로 용병들의 불평을 묵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계약 내용을 지키는 것은 용병단의 철칙. 비록 사람이 밉다하나 일단 맡은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
말을 마친 카심은 데이몬을 쳐다보며 눈을 찡긋했다. 눈치 빠른 데이몬은 대번에 카심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녀석. 머리 굴리는 것이 제법 쓸만한 걸? 동료로 삼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겠어.'
데이몬의 반응에 카심은 자신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용병들에게 서둘러 식사준비를 할 것을 지시했다.
하인리히와 제럴드는 아래층에 가서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떠날 채비를 갖추도록……. 내일부터 다시 여정이 시작된다.
알겠습니다.
비록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대장의 지시라서 용병들은 분분히 복명하고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없는 자들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열흘 전부터 익힌 마나연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재미 때문에 그들은 이제 틈만 나면 마나연공에 몰두하는 상태였다. 데이몬이 미소를 흘리며 카심에게 다가갔다.
자네 눈치가 꽤 쓸만하구먼.
제가 눈치는 좀 빠른 편이거든요.
쑥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그런데 부하들이 정말 대단하더군. 용병들 대부분이 마나를 미약하게나마 통제할 수 있었어. 제럴드와 하인리히 녀석이 가장 진도가 빠른 편이고……. 자넨 어떤가?
아직까지 경로를 타고 돌리는 것은 무리이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의 성취였기에 데이몬은 혀를 내둘렀다. 중원에서도 이렇게 빠른 성취를 보인 무사는 없었다. 수라사령심법은 아르카디아에선 대체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내공심법이었다. 중원보다 열 배 이상 충만한 대자연의 기를 모조리 소화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놀라워하는 데이몬을 보며 카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방법대로만 수련하면 팔라딘이 될 수 있긴 합니까?
카심으로서는 당연히 떠오른 의문이었다. 마법사가 만든 마나연공법인 만큼 충분히 일리 있는 의문이었다.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날 믿나?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날 끝까지 믿고 수련에 몰두하게. 노력하는 자에겐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말일세.
아직까지 자신에게 베풀어진 기연을 눈치채지 못하는 카심에게 찡긋 눈짓을 한 뒤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조금 있으면 율리아나가 멀끔해진 모습으로 나올 것이다.
다프네와 꼭 닮은 얼굴을 보리란 기대로 그의 마음은 벌써부터 부풀고 있었다.
차례대로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미첼과 율리아나는 둘러싼 용병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의 식욕을 보였다.
와구와구.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준비해 온 음식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 둘은 불쌍하게도 아래층을 여러 번 왕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날라야 했다. 마치 게눈 감추듯 음식을 뱃속으로 쓸어 담는 미첼과 율리아나. 그동안 먹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둘의 식욕은 엄청나기 그지없었다. 결국 10인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을 먹어치운 뒤에야 둘은 배를 두드리며 뒤로 나앉았다.
휴. 이제 살 것 같군.
잘 먹었어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아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도에 용병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철판이로군.'
'어지간한 강심장이야. 웬만한 사람이라면 미안해서 아는 체도 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용병들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율리아나의 심사는 그리 편치 못했다. 욕실을 나온 이후부터 집요하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마법사의 느물거리는 시선 때문이었다.
'정말 밥 맛 없는 작자야. 어떻게 저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볼 수 있지?'
벌써 여러 번이나 눈총을 주었지만 마법사는 막무가내였다. 아예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입장이 입장인지라 거칠게 항의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속으로 꾹 눌러 삼킬 수밖에…….
'두고보자.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능글맞은 눈알을 빼버리고 말 테니까…….'
율리아나는 용병단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 모두 데이몬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놈만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무척 평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 거야.'
애초에 불행의 씨앗이 자신의 고집에서부터 비롯된 줄도 모르고 율리아나는 모든 것을 데이몬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율리아나.
그녀는 혼이 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치 철부지의 표본과도 같은 소녀였다.
율리아나가 이를 갈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데이몬은 정신 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에 바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다프네와의 정다웠던 추억 속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행동은 용병들의 오해를 사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런. 흑마법사가 저런 성질 더러운 공주에게?'
'성질도 개차반인 데다가 어림 잡아도 나이가 손녀 뻘일 텐데…….'
하지만 용병들은 누구 하나 참견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흑마법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어떻게 보면 카심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비록 효과가 입증되지는 않았을지언정 자신들에게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준 은인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용병들은 데이몬의 어울리지 않는 연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었다. 흑마법사가 율리아나가 아니라 크로센의 왕녀에게까지 눈독을 들인다 하더라도 전혀 관여하지 않기로. 식사를 마친 뒤 율리아나와 미첼은 용병들과 둘러앉았다. 물론 데이몬은 뒷자리에서 율리아나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시선이 사뭇 따가웠지만 율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럼 이후의 진로에 대해 결정하기로 해요. 과거를 덮어버리자는 대장의 당부가 있었으니 지난 일은 일절 거론하지 않겠어요.
당돌하다고 볼 수 있는 반응에 용병들은 터져 나오는 욕설을 억지로 집어삼켜야 했다.
'이런 빌어먹을…….'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이렇게 뻔뻔스런 계집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병들의 속도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태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이 모든 것을 밝혔으니 더 이상 감추지 않겠어요.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 간택식이 두 달도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해요.
카심이 걸쭉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기일은 충분합니다. 여기서부터 당분간은 치안이 잘 유지되는 관도를 통해 갈 생각이니까요……. 두 달이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카심을 힐끔 쳐다본 율리아나는 손가락을 뻗어 미첼을 가리켰다.
그리고 계약 내용을 조금 변경하겠어요. 이곳으로 오는 도중 불운한 일을 겪어 내 호위기사 미첼이 갑옷과 검을 모두 잃었어요. 게다가내가 크로센에서 입을 예복까지 모조리 도난당해서 이대로는 크로센 제국으로 갈 수 없어요.
그러니 그것을 장만할 비용을 용병단의 재정으로 좀 충당해 줬으면 해요. 아! 추가되는 비용은 추후에 이자를 넉넉히 얹어서 치르겠어요.
그건 뭐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카심은 흔쾌히 승낙했다. 솔직히 용병단 재정이 그리 넉넉지 않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에겐 반드시 율리아나와 동행해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흑마법사 데이몬 때문에.
그런 카심의 꿍꿍이를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율리아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출발은 언제쯤 할 작정이에요?
뭐 급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한 모래 정도?
새로 얻은 마나연공법에 한창 재미를 붙인 판이라 카심은 당연히 돈트렐에 더 머물고 싶어했다. 그것은 용병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시간만 나면 마나연공에 빠지는 것이 이젠 용병들의 일상사가 되어버렸으므로.
하지만 미첼과 율리아나에겐 이곳에 머무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간악한 상인의 눈에 띈다면 그 무슨 창피를 당할지 몰랐다.
그냥 내일 떠나도록 해요. 굳이 이곳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잖아요?
카심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반문했다.
그래도 상관없지만 시간이 충분한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부탁해요. 이곳을 가급적 빨리 떠나고 싶어요.
다급한 김에 속내를 내비친 율리아나. 카심은 별안간 둘이 지금까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졌다. 처음 봤을 때 느낀 뒤 잊고 있었던 의문점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과 모든 짐을 잃었으며 먼지투성이에 옷까지 뒤집어 입은 채 돈트렐에서 맞닥뜨리다니……. 결국 참지 못한 카심은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도적떼라도? 아니야. 테르비아의 군사력이 워낙 막강해서 부근에는 변변찮은 도적단도 없는데…….
미첼과 율리아나의 안색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그 때의 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둘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말과 짐은 어디 갔습니까? 게다가 옷은 또 왜?
집요하게 파고드는 카심. 결국 율리아나는 궁여지책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왜 그래요?
찔끔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카심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율리아나에 대해 겪을 대로 겪었던 카심이었다.
아무래도 늑대 떼를 만났나 보군요?
카심의 추측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상황설명이었다.
마, 맞아요. 늑대! 늑대 때문에 말과 짐을 모두 잃었어요.
늑대 떼를 피해 도망치느라 검과 갑옷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소.
하지만 카심의 의구심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늑대를 만났다손 치더라도 말이나 식량을 잃어버렸을지언정 나머지 짐까지 잃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추궁할 사항이 아니라서 그는 납득한 척하며 일어서려 했다. 그 때 옆에서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대장.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질 않은가? 자기들이 늑대를 만났건, 아니면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혀 두들겨 맞았든 아무 상관없는 일일세. 우린 그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될 터. 더 이상 캐묻지 말게.
데이몬의 넉살에 용병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도짓을 하다 붙잡혀 두들겨 맞았다는 대목이 무척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그것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가장 아픈 부분을 정통으로 찔려버린 것이다. 율리아나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예욧!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율리아나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첼 역시 두 눈에 살기를 진득하게 머금은 채 데이몬을 쏘아보았다. 뜻밖의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카심이었다.
진정하시오. 농담으로 한 소리가지고 왜 그렇게 화를 내시오?
아무리 농담이래도 어떻게 그런 소리를 입에다 담을 수 있죠?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데이몬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면 말고……. 아니라면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잖아?
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매섭게 데이몬을 쏘아보는 율리아나. 주위의 용병들이 이상하게 여길 즈음, 눈치를 챈 미첼이 율리아나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자, 자, 그만해. 농담으로 그런 거라고 하잖아?
네겐 그 말이 농담으로 들려?
고개를 돌린 율리아나에게 미첼이 짐짓 눈을 찡긋했다. 더 이상 반응한다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미첼은 연신 눈짓을 해 대자 율리아나는 겨우 상황을 알아차렸다.
흥. 사악하고 비열한 악당 주제에…….
냉랭하게 내뱉고 내실로 들어가 버리는 율리아나였다. 미첼도 데이몬에게 눈총을 한 번 준 뒤 그녀를 따라 내실로 들어갔다. 용병들은 그때서야 편하게 발을 뻗을 수 있었다. 입담 좋은 패터슨이 내실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랄같은 성질하고는……. 운이 좋아 황태자비로 뽑혔다 치더라도 저런 성질머리로는 단 하루만에 소박맞을걸?
아냐. 뽑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거야. 크로센 제국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공주를 황태자비로 삼겠어?
용병들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몬도 거기에 끼여 웃음을 흘렸다. 익히 예상하긴 했지만 율리아나의 성격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살짝 떠본 것으로 욕을 진득하게 얻어먹었으니 말이다.
누가 데리고 살지 정말 의심스럽군.
혹시 알아요? 자기랑 똑같은 남자 만나서 오순도순 살지도?
오랜만에 터져 나오는 하인리히의 익살에 장내는 일시에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하하하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율리아나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얼굴에 노기를 가득 떠올린 채 따라 들어온 미첼을 불러 앉혔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저 흑마법사 녀석을 단단히 손봐줘야겠어.
미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에겐 힘이 전혀 없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도대체 무엇으로 손을 봐 준단 말이야? 놈의 실력을 몰라서 그래?
방법은 분명히 있어.
미첼에게 바짝 붙어 앉은 율리아나는 눈을 빛냈다. 곧이어 그녀는 미첼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귀엣말을 들은 미첼의 얼굴에 그럴 듯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도 괜찮겠군.
이 방법으로 흑마법사 놈을 떼어놓고 용병단만 데리고 가자. 어때?
좋아.
그토록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두 남녀의 모의는 또다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계획의 실행을 위해 둘은 서둘러 외출할 채비를 갖추었다.
무척 한가로운 오후였다.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돈트렐에 파견 나온 마법사 베르텍은 느긋하게 한낮의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태평세월이라서 여간해서는 그가 나설 일이 없었다.
돈트렐이 속한 테르비아 왕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비록 크로센 제국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테르비아 왕국은 북방의 강국 펜슬럿과 더불어 당당한 2인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국가였다. 그 이유는 테르비아 왕국이 뛰어난 마나연공법을 보유한 데 기인했다.
크로센 대제로부터 전래된 마나연공법.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왕국들이 이 마나연공법을 전수받은 뒤 독자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마나연공법의 보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떤 왕국도 펠젠틴과 테르비아 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두 왕국이 보유한 마나연공법은 여타 왕국의 것보다 위력이 뛰어날뿐더러 훨씬 안정적이었다. 제대로 익히기만 한다면 일정 수준에 오르는 것이 시간문제일 정도로 말이다. 물론 거기에서 크로센 제국은 엄연히 제외해야 하지만. 그런 이유로 테르비아 왕국은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할 수 있었다.
군대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누가 뭐래도 기사단과 마법 부대였다. 하지만 마법사의 수준은 각 왕국별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왕국에 소속된 마법사의 수준은 거의 국력에 영향을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은 달랐다. 뛰어난 마나연공법을 보유한 때문에 테르비아는 주변국들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당당하게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강력한 기사단과 우수한 기사들을 보유한 덕분에.
여러 왕국과의 분쟁을 성공리에 끝낸 테르비아는 그 댓가로 방대한 영토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한 산물(産物)로 나날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베르텍은 자신이 테르비아에 소속된 마법사란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테르비아 왕국은 기사나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정말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원래부터 테르비아 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텍은 테르비아에 충성을 다 바치고 있었다.
그의 직책은 다름 아닌 워 메이지였다. 전쟁이 일어날 때 마법 부대의 중심 역할을 맡지만 평시에는 6개월 간격으로 주요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마법 경보망을 점검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돈트렐이 상당히 매력적인 도시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점도시인 만큼 경계망이 잘 갖춰져 있었고 도시 자체가 상당히 부유했기 때문에 근무하기가 무척 편했다. 파견되는 곳이 소규모 도시라면 마법사는 그리 편하게 근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좋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의 일부를 맡아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하지만 돈트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파견된 관리들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마법사는 느긋하게 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애석하군. 보름 뒤면 돈트렐을 떠나야한다는 사실이…….
돈트렐은 테르비아에 소속된 모든 마법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였다. 그런 만큼 어지간한 실력의 마법사는 이곳에 파견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상관없지. 곧 있으면 대마법사란 칭호를 들을 수 있는 6서클의 마스터이니 말이야.
베르텍은 상당한 야심가였다. 고국인 쉘브런 왕국을 미련 없이 버리고 테르비아에 몸담은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공을 세워 직위를 높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직위 향상에는 전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평화로운 시기였기에 기회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베르텍은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하지만 난 어떻게 해서든 궁정 마법사가 될 것이다.
과거였다면 6서클의 마스터인 그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궁정마법사가 될 수 있다.
500년 전 멸망한 트루베니아의 경우라면 마법사가 6서클에만 올라서면 어지간한 강대국의 궁정 마법사가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는 사정이 달랐다. 기회의 대륙답게 이곳에서는 귀족이 아니더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질만 있다면 능히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법사들의 전반적인 실력은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작금에 와서는 궁정마법사=7서클이란 공식이 거의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물론 자그마한 왕국이라면 베르텍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궁정 마법사 자리를 꿰어찰 수 있겠지만 테르비아 정도의 강대국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우선 그에겐 경쟁자가 다섯이나 있었다. 같은 서클의 워 메이지가 말이다. 하지만 불타는 야심가인 베르텍은 반드시 꿈을 이루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베르텍은 얼른 생각을 접었다.
무슨 일인가?
문 밖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익히 알고 있는 경비병의 목소리였다.
저 헤일러입니다. 현관에 마법사님을 뵙고자 하는 이들이 도착해 있습니다.
누구라던가?
자칭 카르셀의 왕녀와 호위기사라는 신분을 밝혔사온데…….
베르텍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서렸다. 우선 카르셀이란 국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거니와 일국의 왕녀가 자신을 찾아올 까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 명성을 듣고 카르셀이란 왕국으로 초빙하려고 왔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결국 베르텍은 그들을 불러 대화를 나눠보기로 작정했다.
만나보겠다. 들여보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조금 뒤 집무실로 안내되어 온 이들은 아름다운 소녀와 젊은 청년이었다. 베르텍은 날카로운 안목으로 인해 청년이 팔라딘이란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항상 탐색 마법을 전개해보는 습관 때문에 파악할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왕녀의 호위기사라면 팔라딘인 것이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인 베르텍은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돈트렐에 파견 나와 있는 워 메이지 베르텍이오. 그래 무슨 일로?
소녀와 청년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쳤다. 그것은 목적했던 자를 찾은 기쁨에 기인한 것이었다.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첼과 율리아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베르텍을 찾아온 것이다. 율리아나는 베르텍을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몇 가지 여쭈어 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베르텍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셀이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왕국의 왕녀에게까지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말씀하시오.
마법사께서 혹시라도 흑마법을 익히지는 않으셨습니까?
베르텍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요.
흑마법을 익히지 않았느냐는 소리는 마법사에게 있어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었다.
마왕과의 계약 하에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흑마법. 마법사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극도로 경원시 되는 것이 바로 흑마법사였다. 특히 마법사들의 흑마법에 대한 반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관이나 마법사는 흑마법을 악(惡) 자체로 간주하고 극도로 배척하고 또 경멸했다. 그런 만큼 베르텍의 반응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다.
나는 돈트렐을 책임지는 워 메이지요. 그러니 예의를 지켜주시기 바라오. 물론 본인은 흑마법 따위는 지금껏 구경도 하지 않았소이다.
베르텍의 거센 반발에 율리아나는 자신이 찾던 인물을 정확히 찾아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무례를 저질렀다면 머리 숙여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희는 상당한 악명을 떨치는 흑마법사가 돈트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찾아온 것입니다.
오! 그렇소?
베르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베르텍에 있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토록 잡기 힘든, 공을 세울 기회가 펼쳐진 것이다.
과거 베르하젤에 대한 신앙심이 무척 돈독했던 대륙 트루베니아에서는 흑마법사를 죽여도 전혀 죄가 되지 않았다. 흑마법을 익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중죄였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도 흑마법사는 여전히 경원시되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흑마법을 익힌 마법사들 대부분이 마왕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사악하고 잔인한 심성을 띠기 때문이다.
물론 흑마법을 익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대부분 엄격한 법치국가였으므로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형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마법사라면 거의가 알게 모르게 악행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잡아넣고 추궁한다면 반드시 죄를 밝혀낼 수 있다. 베르텍이 반색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놈들은 마법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즐겨 행한다. 그 놈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잘 되었군.'
모처럼 공을 세울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베르텍의 눈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그 놈이 지금 어디에 있소?
그건 잠시 후에 알려드리겠어요.
미소를 지은 율리아나는 슬며시 협상에 들어갔다.
먼저 놈에게 현상금이 걸렸는지를 알아봐야겠어요.
이름을 한 번 말해보시오. 어지간한 흑마법사는 대부분 본국의 정보망에 파악되어 있으니까…….
초조한 듯 율리아나를 채근하는 베르텍. 하지만 율리아나의 설명을 듣자마자 그의 눈은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는 세바인에서 일년 가량 활약한 흑마법사예요. 이름이 아마 데이몬인가 그럴 거예요.
말이 끝나자마자 베르텍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그가 지금 어디에 있소?
얼마나 놀랐는지 베르텍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바인의 흑마법사라면 이미 각 국의 정보망에 비밀리에 회자되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크로센 기사단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한 방에 박살내어버린 사실이었고 파악된 것은 오직 이것 하나 뿐이었다. 흑마법사의 마법 실력이나 출신, 격파된 토벌대의 규모 등 이외의 것들은 하나도 파악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도 크로센 제국에 상주해 있는 첩자를 통해 어렵사리 알아낸 정보인 것이다.
물론 토벌대가 실패한 탓에 크로센 제국에서 자세한 정황을 밝히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파견한 첩자 때문에 세바인의 흑마법사는 여러 왕국에서 확실하게 주목받고 있었다. 그런 요주의 인물이 돈트렐에 머물고 있다니…….
베르텍의 눈은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렸다. 그를 체포하기만 한다면 승진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놈에겐 상당한 액수의 현상금이 걸려 있소.
대략 얼마 정도이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일백 골드 이상인 걸로 알고 있소.
햐!
율리아나와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일백 골드라면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 정도라면 카심 용병단에 청부한 금액의 열 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물론 신분이 신분인지라 돈에 그리 궁색하지 않은 그들이지만 지금은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목적을 이루려면 크로센 제국에 가서 상당히 많은 물품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일백 골드란 돈에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거처를 제보하는 것만으로도 현상금을 탈 수 있나요?
물론이오. 그러니 그의 거처를 알려 주시오. 일단 정체가 확인된다면 확실하게 현상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조처해 드리겠소.
베르텍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흑마법사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더불어 현상금이라는 추가 소득도 함께…….
율리아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데이몬의 거처를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 돈트렐 시내의 푸른 비둘기 여관에 묵고 있어요.
확실하군.
율리아나와 함께 한 달음에 푸른 비둘기 여관으로 달려온 베르텍은 희열감에 온 몸을 떨었다. 상대가 확실히 세바인의 흑마법사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거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전율할 정도로 퍼져 나오는 강력한 흑마법의 기운. 이것은 오직 마법사나 신관이 아니라면 파악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놀랍게도 베르텍조차 마법 실력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능가하는 고위급 흑마법사라는 사실은 탐색마법으로 상대의 서클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베르텍이 데이몬이 묵고 있는 방에 한정해서 탐색마법을 펼쳤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데이몬이 제럴드에게 추가로 개정대법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놀랍군. 저런 녀석이 돈트렐 시내에 어슬렁거리고 있다니…….
놈이 맞죠? 그럼 현상금을 탈 수 있나요?
옆에서 터져 나온 음성에 베르텍은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초조해 보이는 율리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시라도 빨리 돈트렐을 떠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지만 베르텍이 그 까닭을 알 수는 없었다.
물론. 현상금은 예정대로 지급될 것이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소? 대관절 놈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그, 그건…….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그래야만 놈을 체포할 수 있으니…….
율리아나는 결국 데이몬을 만난 과정을 세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의기의 발로로 놈을 잡으러 갔다가 거꾸로 사로잡힌 일이며, 흑마법사가 자신의 파티에 합류하게 된 경위 등이 낱낱이 설명되었다.
놈은 우습게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틈만 나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해요.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죠.
설명을 들은 베르텍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가 용병단에 가입해서 파티가 되었다는 대목을 듣자 베르텍의 눈빛이 갑자기 번쩍였지만 율리아나는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던 베르텍은 다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정황을 보니 확실할 것 같구려. 그런데 혹시 놈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줄 마음은 없소?
율리아나의 얼굴에서 의혹의 빛이 번져갔다.
무슨 뜻이죠?
당신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는 것이오. 놈을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사들의 조력이 필요하오. 하지만 부근의 요새에 연락을 취해 기사가 파견되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걸리지.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놈이 내일 정도면 떠날 생각 같은데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하오. 하지만 당신이 나서 준다면 일이 의외로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율리아나의 얼굴에 곤혹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놈의 실력을 아는지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첼이 그 잔악한 놈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던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거, 검술도 배우지 않은 제가 뭘?
아주 쉬운 일이오.
베르텍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이미 율리아나를 이용해 흑마법사를 잡을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지금으로썬 베르텍이 택할 방법은 오로지 그것밖에 없었다.
마법사의 대결은 철저히 마법 수준에 의해 좌우된다. 그 사실을 베르텍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윗줄의 마법사. 베르텍이 직접 나선다 하더라도 쉽사리 체포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반드시 소드 마스터나 상급의 팔라딘을 대동해야만 놈을 체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율리아나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기에 베르텍은 은근한 어조로 율리아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애석하게도 놈의 써클을 간파할 수 없소. 다시 말해 놈은 나보다 실력이 높은 마법사요. 하지만 잡지 못할 바는 아니오. 문제는 소집령이 떨어지고 나서 기사들이 투입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오. 테르비아엔 강력하고 우수한 기사들이 충분하지. 하지만 그들이 당도하기 전에 놈이 달아난다면 헛일이니 당신의 조력이 필요한 것이오.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오.
제가 뭘 도우면 되죠?
상대가 미끼를 덥석 물자 베르텍은 이때다 하고 설명을 해 나갔다.
일단 당신은 그 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오. 그런 다음 어떻게든 놈을 유인해서 내가 지정한 장소로 데리고 오도록 하시오. 지금부터 나는 그곳에다 놈을 잡을 함정을 파 놓도록 하겠소. 놈을 그곳까지만 데리고 오면 당신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오.
별로 어렵진 않군요.
율리아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별달리 어렵진 않았다.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놈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놈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 하나로 율리아나는 베르텍의 제안을 선뜻 승낙하고 나섰다.
알겠어요. 하겠어요.
모쪼록 부탁하오. 그럼 조금 뒤에 봅시다. 미리 준비를 끝내 놓을 테니…….
두 시간 뒤를 약속시간으로 잡은 뒤 율리아나는 몸을 일으켰다. 두 번 다시 흑마법사의 능글맞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베르텍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미처 보지 못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외출했던 율리아나와 미첼이 들어오자 카심은 의아한 듯 눈을 치떴다. 그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카심은 지금까지 계속 둘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냥 산책을 좀…….
앞으로 외출하시려면 미리 얘기를 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율리아나는 최대한 친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뒤 일어날 일을 대비해서 최대한 용병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피곤하네요. 올라가서 쉴게요.
내실로 들어가는 둘을 쳐다보며 카심은 눈매를 좁혔다. 그들의 태도가 평소와 조금 틀렸던 것이다. 하지만 별달리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기에 그는 다시 마나연공에 들어갔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에게 마나연공은 이제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내실로 들어간 율리아나는 약속시간이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지루하군.
두 시간 뒤면 흑마법사를 반드시 약속 장소로 데려가야 했기에 그녀로썬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가 지금 아래층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사실은 들어오며 파악했었기에 현재로썬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드르렁.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둘은 마음을 졸였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마침내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율리아나는 묘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네가 가서 놈을 데리고 올래?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 난 싫어. 놈의 얼굴만 봐도 오한이 치솟는단 말이야.
하긴.
심정을 익히 짐작한다는 듯 율리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현재로썬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네가 따라간다면 경계할 수도 있으니까 넌 이곳에 있도록 해.
미첼을 두고 혼자서 아래층으로 내려간 율리아나는 곧바로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까지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깨웠다.
이봐요.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데이몬은 여간해서는 깰 기색이 아니었다. 여러 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율리아나는 결국 소리를 빽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일어나욧!
그 통에 부스스 눈을 뜬 데이몬. 자신을 쳐다보는 율리아나를 보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자신과는 상대도 하지 않으려는 율리아나가 지금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영문을 몰라하는 데이몬에게 율리아나가 말을 걸었다. 평소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였다. 퉁명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나에게 할 말이?
별일도 다 있다는 듯 데이몬은 얼른 자리를 고쳐 앉았다. 지금까지 눈빛조차 마주치기 싫어했던 것이 평소 그녀의 태도이고 보면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닐 듯 싶었다.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는 곤란해요. 그러니 자리를 옮겨서 하는 게 어때요?
꾸민다고 꾸몄지만 율리아나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하고 퉁명스러웠다. 데이몬에 대한 반감이 이미 골수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율리아나에게는 다행이라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데이몬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탓에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단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뭐 나야 아무 상관없지.
냉큼 대답한 데이몬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훔쳐보는 것도 좋지만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 같았으므로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린 율리아나는 출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실로 가지 않는 거야?
밖에서 얘기해요.
문을 열고 나가는 율리아나를 보자 데이몬도 얼른 뒤를 따랐다.
숙소에서 나온 율리아나가 조금 떨어진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데이몬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지?
가 보면 알아요.
질문을 짧게 일축해버린 율리아나는 서슴없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벽돌로 지어져 무척 단단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데이몬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건물로 들어간 직후였다.
'이것은?'
데이몬의 눈에 모종의 빛이 일어났다. 들어온 건물이 평범한 용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벽이 두터운 데다 창문이 협소하고, 거기에다 두터운 쇠창살이 쳐진 것을 보니 일반적인 저택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래도 도둑 길드나 국가정보기관 따위에서 비밀리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 틀림없었다.
'재미있군.'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율리아나가 말을 걸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을 보면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평소 얼굴을 마주치기조차 싫어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파 놓은 함정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고 회피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평소 성격대로 데이몬은 일단 부딪혀 보기로 작정했다.
이리로 오세요.
그러지.
율리아나의 안내를 받으며 데이몬은 점점 건물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군. 목적이 이거였군. 날 사로잡으려는…….'
율리아나가 안내한 방 앞에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안에서 느껴지는 마법진의 기척으로 말미암아 율리아나의 의도를 짐작한 것이다. 은폐마법으로 가리긴 했지만 나인 서클의 이목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방안에는 분명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었고 그것은 십중팔구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종류가 분명할 터였다.
율리아나가 말을 건 것이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서란 게 밝혀지자 데이몬은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그녀에게 관심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방안에 들어간 율리아나는 데이몬을 손짓해 불렀다.
안 들어오고 뭐해요?
방문 앞에서 데이몬은 잠시 갈등에 휩싸여야 했다. 이대로 발길을 돌릴지, 아니면 그녀의 계략에 넘어가 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 마법진 따위가 데이몬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제법 잘 만들어졌지만 이 정도는 고작해야 7서클 이하의 마법사에게나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마법이란 재배열되는 횟수가 증가한다면 적은 마나로도 캐스팅이 가능한 법이다. 비록 마나를 흩어버리는 마법진 위에 서 있더라도 데이몬 정도의 마법사라면 마법의 시전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것을 믿은 데이몬은 계략에 순순히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괴롭힌 데 대해 다소 미안한 감정도 있었고 또한 자신의 실력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지.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예상대로 방안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널빤지 같은 것으로 덮어 위장하긴 했지만 데이몬은 마법진에서 풍기는 기운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마법진은 마나를 흩뜨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방안의 마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방안에 들어간 데이몬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장난기를 깡그리 지워버린 진지한 눈빛이었다.
내게 할 말이 뭐지?
그, 그건…….
율리아나는 말을 떠듬거렸다. 솔직히 그녀에게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약속대로 데이몬을 유인해 왔지만 마법사 베르텍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가슴 조이고 있을 때 갑자기 사방의 벽이 활짝 열렸다.
덜컥.
그리로 완전 무장한 기사 십여 명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푸른 기가 감도는 장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있는 검을 보니 모두가 의심할 나위 없는 팔라딘들이었다. 그 속에는 베르텍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끼여 있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뻗어 데이몬의 몸을 겨냥했다.
챠챵.
데이몬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 당해 버렸다. 전혀 저항할 생각이 없는 듯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을 한 치만 들이민다면 그대로 산적꽂이가 되어버릴 듯한 형상. 그 모습을 보자 베르텍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항하지 않는 것을 보니 너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나보지?
모르고 들어왔겠지만 이 방에는 마나를 흩어버리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발악은 하지 않도록…….
다가온 베르텍은 주머니 속에서 여러 개의 팔찌를 꺼내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철컥.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가 데이몬에게 주렁주렁 채워졌다. 상대의 수준을 고려해서 베르텍은 흑마법사의 양팔에다 빽빽이 팔찌를 채웠다. 그러는 동안 데이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채워지는 팔찌를 쳐다볼 뿐이었다. 조금 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증오라던가 분노 따위의 감정이 떠오를 법도 한데 데이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고즈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네 의도였나?
율리아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녀였지만 이런 상황에선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미안한 감정이 전혀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듯 율리아나는 데이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 같은 악당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해. 넌 그동안 우리들을 수도 없이 괴롭혀 왔잖아?
적어도 너에게만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지지 않겠다는 듯 계속 꼬투리를 잡는 율리아나.
음흉한 시선으로 계속 날 쳐다봤잖아?
단순히 쳐다 본 것도 죄인가?
그 말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사실 흑마법사는 집요하게 쳐다본 것말고는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를 보다 못해 베르텍이 앞으로 나섰다.
잡담은 이따가 하고,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 네가 세바인에서 온 것이 확실한가?
부인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상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렇다. 그곳에서 5년 남짓 머물렀지.
대답을 들은 베르텍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크로센 제국의 토벌대를 격파한 것도 당연히 너겠지.
물론. 그 녀석들 부끄러워 소문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테르비아까지 소문이 나 다니…….
솔직해서 좋군.
베르텍의 머리 속은 희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크로센 토벌대를 격파한 거물을 사로잡은 것이다. 자백까지 받았으니 베르텍은 이제 승진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테르비아 국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큰상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양팔에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를 주렁주렁 매단 채, 마법진 위에 서 있는 흑마법사의 모습은 베르텍에게 확실한 미래를 확신시켜 주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지급이오. 지금 즉시 마법사 호송용 마차를 이리로 가져오도록 하시오. 충분한 기사가 모이면 바로 수도로 압송할 테니…….
마법사 호송용 마차에도 어김없이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지금 그들이 들어있는 방의 바닥에 그려진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베르텍은 그 마법진을 손수 보강해서라도 흑마법사를 호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두르시오. 한시가 급하니…….
알겠습니다.
전령 역할을 맡은 기사가 서둘러 달려나갔고 남은 기사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데이몬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데이몬은 손가락 굵기의 포승줄에 꽁꽁 묶여 버렸다. 기사들이 묶는 것을 묵묵히 쳐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날 어쩔 생각이지?
아마 수도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할거야. 네 녀석을 튼튼하게 수감한 다음 세바인에 사람을 파견해 차근차근 증거를 수집할 생각이지.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을 테니 포기하는 게 좋아.
말을 마친 베르텍은 데이몬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캐스팅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6서클이 넘어가는 마법사는 의지만으로도 캐스팅이 가능했다. 하지만 직접 주문을 외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었으므로 베르텍은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되었군. 후후후
영락없이 미이라가 되어버린 흑마법사를 보며 베르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창창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렸기에 기분이 고조된 베르텍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일단의 기사들이 네 동료들을 체포하러 갔으니 머지 않아 대면할 수 있을 것이야. 아마도 심문 받는 데 그리 심심하진 않을 거야.
베르텍의 말에 놀란 것은 오히려 율리아나였다.
도, 동료들을 체포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베르텍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용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용병단에 가입했으니 그들 역시 죄가 있습니다. 이자를 받아들였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지요.
그, 그것은 얘기가 다르잖아요.
베르텍의 말에 율리아나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까지 체포될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용병들이 없다면 당장 곤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녀는 필사적으로 베르텍을 설득하려 했다.
흑마법사를 넘겨주었으니 되었잖아요. 죄가 없는 용병들까지 체포할 필요가 있나요?
죄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른 바 공범(共犯)들이니까요. 흑마법사를 받아들인 것 자체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뭐 주범인 이 녀석보다는 가볍겠지만 재판에 회부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베르텍의 말에 율리아나는 맥이 탁 풀렸다. 괜히 제보했나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용병들도 모두 수도로 압송될 것이란 말에 율리아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긴 했지만 이젠 용병들과 헤어질 도리밖에 없었다.
'할 수 없군. 현상금을 받은 뒤 다른 용병단을 고용해서 크로센으로 갈 수밖에…….'
생각을 마친 율리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텍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전 제 호위기사를 데리고 가겠어요. 그러니 약속했던 현상금을 지급해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베르텍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베르텍은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늘어놓았다.
현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시일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함께 수도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니까요.
그, 그게 무슨 소리죠?
율리아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자신도 수도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니…….
느물느물하게 이어지는 베르텍의 설명에 그녀는 분기가 충천하는 것을 느꼈다.
일단 당신은 용병단의 고용주입니다. 다시 말해 흑마법사가 용병단에 가입하는 것을 방조한 책임이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리 큰 죄가 되지 못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간단한 조사만 마친 뒤 풀려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나쁜 자식.
화를 참지 못한 율리아나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베르텍의 태도에 특유의 성질이 폭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베르텍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미리 기사 두 명을 율리아나에게 붙여두었던 것이다.
철컹.
율리아나의 손은 덧없이 기사에게 잡혀버렸다. 배치된 기사들 모두가 팔라딘들이었으므로 그녀의 손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목적을 이룰 순 없었다. 기사 둘이 달려들어 율리아나를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붙잡았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행동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느긋하게 대답한 베르텍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압송하라. 레이디임을 감안해서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율리아나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베르텍을 쏘아보며 끌려나갔다. 그녀의 시선을 슬쩍 받아넘기며 베르텍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흑마법사를 체포한 공로로 받게 될 보상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절로 벅차 올랐다. 어쩌면 필생의 꿈인 궁정 마법사에 오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호송하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군.
무표정하게 묶여 있는 흑마법사를 쳐다보며 베르텍은 호송용 마차가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사들은 율리아나를 데리고 돈트렐의 시청으로 향했다. 그곳은 시장 및 주요 요인들이 기거하는 곳과 동시에 법 집행 같은 시의 주요 사안들이 실행되는 장소였다.
시청에 도착한 기사들은 율리아나를 곧장 지하로 데려갔다. 놀랍게도 그곳은 감옥이었다.
오리알 굵기의 철창이 죽 늘어선 지하 감옥으로 들어서자 율리아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왜? 이리로 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