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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크르르르.

인간의 등을 보면 지체 없이 달려드는 것이 산짐승의 본능. 늑대 무리 중에서 십여 마리가 날렵하게 미첼을 덮쳤다. 하지만 그간의 수련이 헛되진 않았는지 미첼은 가까스로 늑대의 발톱을 피해 나무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먼저 올라가 있던 율리아나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려 주었다. 나무에 올라간 뒤 아래를 내려다본 미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 세상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늑대 무리가 나무를 빙 둘러 반원형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도저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열 마리 가량의 늑대가 나무 아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늑대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무 위의 미첼과 율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만해도 기가 질리는 일이었다. 미첼의 입에서 별안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어슬렁거리던 늑대들이 그들의 짐에다 주둥이를 들이미는 것을 보자 미첼의 안색은 금세 거무죽죽하게 죽어들었다. 그 속에는 자신들의 식량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여행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식량을 잃어버린다면……. 미첼의 애타는 심정도 모른 채 늑대들은 짐을 풀어헤친 뒤 식량을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

크크크. 먹어라. 배가 터지도록.

어둠 속에서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녀석들의 식량을 축내겠다는 그의 계획은 어김없이 성공했다. 모르긴 몰라도 두 남녀는 굶주린 늑대들이 식량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했다.

사실 몰려든 늑대 무리 중에서 진짜는 고작 10여 마리에 불과했다. 지금 짐에다 주둥이를 박은 채 정신 없이 마른고기를 집어삼키는 녀석들 말이다. 나머지는 모두 가짜였다. 미러 이미지(Mirror image)로 연출한 환영인 것이다. 데이몬은 마법을 사용해서 늑대 무리의 수를 수십 배나 뻥튀기한 상태였다. 미러 이미지. 마법의 힘으로 물체의 상을 허공에 투영한 것으로 중원의 사술 중 분신술(分身術)과 흡사한 효과를 주는 마법이다. 차이점이라면 분신술로 만들어낸 형상은 실체가 없어 만지면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미러 이미지에 의한 환영은 놀랍게도 실체가 있었다. 물론 물리적인 데미지를 가할 순 없지만 현실성 면에서는 분신술보다 월등한 우위를 보이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늑대 무리들은 모두가 미러 이미지로 만들어진 환영이었다. 피 냄새를 낭자하게 풍겨 늑대 10여 마리를 끌어 모은 데이몬은 미러 이미지를 펼쳐 늑대들의 수를 비약적으로 불려놓았다. 그 수는 미첼과 율리아나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식량을 모두 먹어치우는 것은 진짜 늑대 10여 마리면 충분했다.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첼과 율리아나가 용병단으로부터 훔쳐온 식량이 모조리 거덜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결국 밤새도록 나무 위에서 뜬눈으로 지샐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포위한 늑대 무리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물러갔고 미첼과 율리아나는 그때서야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삭신이 쑤신 나머지 율리아나는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밤새도록 나무등걸을 부여잡고 있느라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 식량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부랴부랴 짐을 뒤져본 미첼이 뼈저린 탄식성을 토해냈다. 이젠 그들이 쫄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용병단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맥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식량을 살 수 있는 마을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그 동안 꼬박 굶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던 미첼과 율리아나. 그 모습을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둘은 그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데이몬이 세 번째로 벌인 작전은 그들의 돈줄을 말리는 작업(?)이었다.

그곳에서 머물러봐야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곧 길을 떠났다. 얼마 남지 않은 물로 목을 축인 미첼과 율리아나는 서둘러 마을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은 인비저빌러티를 펼친 상태로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미첼의 뒤로 접근했다.

'조심해야겠군. 그래도 미첼 녀석, 명색이 팔라딘인데 말이야.'

하지만 접근은 의외로 쉬웠다. 밤을 꼬박 지샌 데다가 극도로 지쳐 미첼은 꾸벅꾸벅 졸며 걸어가고 있었다. 미첼의 뒤에 바짝 붙은 상태로 데이몬은 탐색마법을 펼쳤다.

짐 속에서 돈이 들어있는 위치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돈은 배낭 제일 아랫부분에 들어있었다. 나름대로 잃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신경을 쓴 듯 하지만 애석하게도 데이몬에게 걸려든 것이 그들에겐 가장 큰 불행이었다.

'크크크. 이것쯤이야.'

작은 소도 하나를 꺼내든 데이몬은 거기에다 샤프니스(Sharpness)를 걸었다. 소도는 곧 면도날을 능가하는 날카로움을 지니게 되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이용해 배낭의 아랫부분을 솜씨 있게 베어내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얼마나 섬세했는지 미첼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크.'

배낭이 베어짐에 따라 돈주머니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고 데이몬은 얼른 그것을 받아들었다. 돈주머니가 제법 묵직했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절그렁.

돈 부딪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자 미첼은 걸음을 뚝 멈췄다.

무슨 소리지?

데이몬은 돈주머니를 얼른 품속에다 집어넣었다. 그러자 돈주머니는 삽시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옆에서 걸어가던 율리아나가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짜증을 부렸다.

또 무슨 일이야.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쇳소리 같은 것이…….

미첼은 미간을 지긋이 모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교롭게도 그때 배낭의 찢어진 부분을 통해 물건 몇 개가 우루루 쏟아져 내렸다.

이, 이런.

뒤를 돌아본 미첼은 급히 배낭을 벗었다. 길게 찢어진 부분이 눈에 들어오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돈주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데이몬의 품속에 들어있는 돈주머니가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들의 여행경비가 든 돈주머니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둘의 안색이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크, 큰일이군.

돈주머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식량을 잃은 것보다도 더한 충격을 둘에게 가져다주었다. 식량은 마을을 찾아 사면 해결되지만 이번에는 식량을 살 돈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찾아야 되.

미첼과 율리아나는 부랴부랴 몸을 돌렸다. 온 길을 되짚어 가며 떨어뜨린 돈주머니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돈주머니는 이미 데이몬의 품속에 단단히 보관되어 있었다. 돈주머니를 되찾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둘은 눈에 불을 켜고 온 길을 거꾸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숲 속을 열심히 헤집어보고 오도록. 본좌는 느긋하게 낮잠을 자고 있을 테니…….'

데이몬은 적당한 나무를 골라 위로 올라갔다. 어차피 둘에게는 탐색 마법이 걸려있었으므로 뒤를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보나마나 허탕을 치고 올 것이 뻔했으니까…….

꼬박 한 나절을 숲 속에서 헤맸지만 둘은 결국 돈주머니를 찾지 못했다. 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상태로 맥없이 길을 떠났다. 이젠 크로센 제국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이 상태론 용병단도 고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심지어 먹고 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다시 카르셀로 돌아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카르셀을 떠나온 지 벌써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여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돌아갈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율리아나는 그에 대한 화풀이를 미첼에게 퍼부어 댔다.

이런 병신 같은 놈. 돈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하지만 미첼도 이젠 만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참을 만큼 참아왔으므로 더 이상 욕을 먹는 것도 지겨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미첼은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검을 보고 뒤로 주춤 물러선 율리아나를 노려보며 미첼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더러운 주둥이를 나불댔다간 단칼에 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

난생 처음 미첼에게서 험악한 욕설을 들은 율리아나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율리아나에게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는데……. 예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검을 보자 율리아나는 극도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왔던 협박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이 사실을 네 아버님께…….

빌어먹을……. 이르려면 일러!

미첼은 이제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버릇없는 계집아이의 입만은 막아버리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널 죽여버리면 과연 사실이 아버지에게 들어갈까? 나에겐 전혀 상관없는 문제야. 어차피 돌아갈 길도 막막한 판국인데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네년의 모가지를 잘라버리고 도적단(Bandits)에 투신해버리겠어. 그렇다면 아버지도 결국 날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율리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어,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왜 못할 것 같아? 그렇군. 죽여버리는 것보다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도 좋겠어. 돈을 받은 뒤 이름을 바꾸고 숨어산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니까 말이야.

율리아나는 결국 파리한 얼굴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미첼은 시퍼런 검날을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바짝 붙인 채 사납게 을러댔다.

한 번만 더 입을 연다면 정말 그렇게 할 지도 몰라. 그러니 가급적 날 자극하지 않도록 해.

아, 알았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아나를 노려보며 미첼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어차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가한 협박이었지만 생각해보니 효과는 만점이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자는 오로지 율리아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까지 온갖 거짓말로 자신을 중상모략해 왔으므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증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미첼은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첼이란 녀석. 이젠 이판사판으로 나가는군.'

바로 옆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미첼의 입장을 이해할 만도 했다. 율리아나는 그가 지금까지 겪어본 계집아이들 중에서 가장 성질이 더러웠으므로…….

자신이라면 오히려 더 했을 것이다. 한 달을 밥도 주지 않고 거꾸로 매달아서라도 성질머리를 뜯어고쳤을 것이 분명했다. 데이몬에게는 분명히 자신이 있었다.

세바인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말괄량이들을 순한 양으로 바꾼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단지 다프네와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어찌 보면 미첼이란 녀석이 내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는지도 몰라.'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던 데이몬은 둘이 걸음을 옮기자 다급하게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그는 미첼이 한 말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소라고둥을 품속에다 집어넣었다.

그것은 미첼을 꼼짝못하게 할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하는 것이 데이몬의 평소 지론이었으므로.

하루를 쫄쫄 굶은 끝에 둘은 마침내 산 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 넓게 초지와 드문드문한 인가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찾아다니던 마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둘은 신이 나서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에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배가 무척 고픈 상태였으므로 마을에 들어간 미첼과 율리아나는 그대로 식료품 상점으로 향했다. 일단은 뭐든지 먹어야만 될 것 같았다. 특히 율리아나의 경우 배고픔을 더더욱 참지 못했다. 곱게만 자랐던 그녀가 언제 굶주려보았을까.

식품점에 들어가자마자 율리아나는 진열대에 놓여있는 검은 빵을 집어들어 다짜고짜 먹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호밀 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자고로 시장기보다 더한 반찬은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미첼은 조심스럽게 주인에게 걸어갔다. 물론 돈이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가진 물건과 먹을 것을 바꾸려는 심산에서였다. 미첼은 불안한 눈초리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주인에게 주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이해하십시오. 꼬박 이틀을 굶은 나머지……. 그만 도적들에게 당해 돈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대신 가진 것들을 드릴 테니 먹을 것과…….

무척 험한 꼴을 겪으셨군요.

주인은 생각 외로 인심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선뜻 물품과 음식을 바꿔주었다. 물론 배낭 속에서 돈 될만한 것은 모조리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며칠 분 식량을 모든 소지품과 바꾼 둘은 빵을 씹으며 식품점 밖으로 나왔다. 미첼이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이젠 어떻게 할거야.

뭘 말이지?

돈도 하나도 없고……. 이대로는 크로센 제국으로 갈 수도 없잖아. 예복마저도 모조리 산에다 버리고 왔으니…….

율리아나는 빵을 씹는 것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물론 카르셀로 돌아가는 것 역시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며칠 먹을 것은 준비되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둘은 맥없이 길가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일단 목적했던 크로센 제국까지 가자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미첼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쳤군. 크로센 제국까지는 앞으로도 두 달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어. 당장 먹을 것도 없는 판국인데 어떻게…….

그럼 넌 다시 카르셀로 돌아갈거야?

율리아나의 대꾸에 미첼은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그는 이미 두 번 다시 카르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상태가 아니었던가? 카르셀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크로센 제국으로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으니. 맥없이 자리에 앉은 미첼을 향해 율리아나가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네 마음은 알고 있어. 그럴 듯한 왕국에 가서 기사가 되는 것. 그러려면 어떻게 해서든 크로센 제국으로 가야 할 테지? 물론 나 역시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기는 싫어. 그러니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이지?

율리아나의 제안을 들은 미첼은 머리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율리아나는 지금 그에게 강도짓을 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참지 못한 미첼은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쉿 목소리가 커.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일단 내 말이나 들어봐.

율리아나의 채근에 미첼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금 엉덩이를 묻었다.

조금만 더 가면 큰 관도가 나올 거야. 물론 부유한 장사치들도 그 길을 이용하겠지? 그러니까 딱 한 건만 하자. 어차피 우리에겐 돌아갈 여비도 없잖아? 물론 장사치들에게 호위무사들이 딸려있겠지만 그들 정도는 네 실력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나, 난 못해. 명예로운 기사로써 어찌 그런 짓을……. 혹시라도 이 일을 아버님께서 알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집요하게 채근해왔다.

그럼 이대로 돌아갈거야? 그건 너도 바라는 바는 아니잖아? 그러니 눈 딱 감고 한 건만 벌이자. 내가 함구한다면 네 아버지가 어찌 알겠어? 어차피 넌 도둑질도 한 번 했잖아?

하지만…….

거듭 고개를 가로젓는 미첼을 보며 율리아나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다.

좋아. 이번 건만 성사시켜 크로센 제국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널 자유롭게 풀어줄게.

돌아가서 네 아버지께 좋게 얘기해 줄 것을 약속해주지. 게다가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했던 불미스러운 일들 역시 덮어두겠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여비도 없긴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결국 미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하겠어. 하지만 이번 단 한 번 뿐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하는 미첼을 보며 율리아나는 얼굴을 활짝 폈다.

잘 생각했어.

미첼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지금까지 줄곧 생각했던 것이지만…….

것이지만?

넌 정말 무서운 아이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 무서운 것 이제 알았어?

태연스레 내뱉은 율리아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 서두르자. 복면을 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자기들 딴에는 아무도 듣지 못한 밀담이라 생각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모의는 누군가의 귀에 정통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들은 누군가가 바짝 붙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강도 모의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군가는 인비저빌러티를 펼치고 있던 데이몬이었다. 대화내용을 들은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절박하긴 했군. 강도 짓까지 생각하다니 말이야.

이미 데이몬의 머릿속에는 둘을 골탕먹일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크크크. 이놈들 어디 한 번 죽어봐라.

그는 곧 율리아나와 미첼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둘은 계획을 곧바로 착수하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외진 산골 마을이었고 그런 곳을 적당한 물주(?)가 나타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둘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큰 도로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이 정도면 되겠군.

거친 흑빵을 씹어가며 여정을 이어나간 둘은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잘 다져진 넓은 관도였다. 가에 경계석을 세우고 가운데 자갈을 채운 다음 무거운 롤러 따위로 눌러 다진 도로. 한 눈에 보아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세워진 관도(官道)임을 알 수 있었다.

적당한 곳에 도착하자 둘은 곧 거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기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복면을 만든 다음 옷을 뒤집어 입기만 하면 끝났으니까 말이다.

범행에 사용할 도구도 만들었다. 미첼에게는 검이 있었지만 율리아나에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럴 듯한 몽둥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미첼과 율리아나는 길 옆 으슥한 곳에 숨어 적당한 사냥감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군. 강도짓을 하자고 제안하는 왕녀나 그것에 동의한 호위기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헬버트론을 보며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표정이 없는 데스 나이트라고 하나 동작을 보면 어느 정도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이 돼. 왜냐하면 내가 며칠 따라다니며 괴롭혔거든…….

하긴 네 녀석 손에 걸렸다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헬버트론. 그의 옆에는 라인델프가 서 있었다.

데이몬은 짜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데스 나이트 둘을 인크레시아에서 불러낸 상태였다. 미첼과 율리아나를 확실하게 골탕먹일 계획 말이다.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인델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린 무얼 하면 되지?

데이몬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계획은 간단해. 우린 먼저 놈들이 노림직한 사냥감으로 변장한 채 접근하는 거야.

부유한 상인 정도면 적당하겠군. 물론 너희들은 내 호위 역할을 맡아야겠지?

호위가 데스 나이트라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멍청한 녀석. 그러니까 모습을 바꿔야지. 데스 나이트는 흑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던데 무슨 상관이야.

데이몬의 말에 헬버트론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리들이 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5서클 정도가 한계야. 모습이야 가까스로 바꿀 수 있다 하더라도 분위기나 기운 때문에 바로 탄로나 버릴 거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도와줄 테니…….

결국 헬버트론과 라인델프는 데이몬의 계획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헬버트론이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젠장.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지. 그럼 난 마차를 준비해 오겠어.

그러니 준비 단단히 하고 있도록 해.

말을 마친 데이몬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공간이동을 통해 적당한 복장과 마차를 준비하러 간 것이다. 데스 나이트들은 툴툴거리며 모습을 바꿀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에겐 마법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캐스팅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온다.

관도 끝 부분을 쳐다보던 미첼은 눈을 빛냈다. 벌써 여러 대의 마차가 지나갔지만 그들의 식성에 맞는(?) 사냥감은 단 하나도 지나가지 않았다. 대부분 농사꾼의 우마차가 아니면 이, 삼십명의 용병들이 호위하는 거상의 행렬이었다.

비록 실력이 있다지만 목격자가 많은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들 둘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구미에 딱 맞는 사냥감이 어슬렁어슬렁 접근하고 있었다.

마차를 보니 전형적인 장사치 같군. 대도시로 뭔가를 사러 가는 것 같은데?

잘 되었어. 호위하는 녀석이 둘밖에 없으니 말이야.

둘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복면을 뒤집어썼다. 그들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사냥감이 나타난 것이다. 이리로 다가오는 마차는 전형적인 사두마차로써 뒤에 물품을 싣기 위한 수레가 달려 있었다. 수레가 텅 비어있는 것을 보아 대도시로 물품을 사러 가는 상인의 마차가 분명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말을 몰고 있는 중늙은이는 상인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는 덩치 좋은 녀석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호위를 맡은 용병들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율리아나는 눈빛을 빛냈다.

잘 되면 충분한 여비를 건질 수 있겠어.

이번 한 건만이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엔 동참하지 않을 테니…….

미첼의 다짐에 율리아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만약 이 사실이 카르셀에 알려진다면 그녀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호위하는 녀석이 고작 용병 둘이니 실패할 확률은 없겠지?

걱정하지 마. 저런 녀석들은 눈감고도 때려눕힐 수 있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초보 도적(?)들은 긴장한 채 마차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멈춰라.

기세 좋게 뛰어나와 길목을 막은 복면인 두 명을 보자 상인은 즉시 마차를 멈췄다.

응?

달아날 것을 대비해서 말을 베어버릴 채비를 갖추고 있던 미첼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말에 채찍질을 해서 강행 돌파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깊이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용병 둘이 날렵하게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자 그는 자세를 잡고 상인과 용병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상인은 무척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중늙은이로 눈알을 재빨리 굴리는 모습이 한 눈에 닳고 닳은 상인임을 알 수 있었다.

용병들 역시 평범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당당한 체구를 하고 있었으며 약속이라도 한 듯 구레나룻을 짙게 기른 모습이 아무래도 형제 같았다. 미첼과 율리아나를 보자 상인은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웬 놈들이냐?

누구긴 누구야. 강도님들이지.

꾸민 듯한 둔탁한 음성이 미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자란 것이 탄로 날까봐 율리아나는 일언반구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의 역할은 오로지 머릿수를 채우는 것뿐이었다. 혼자 강도짓을 하는 도적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용병 둘 처리하는 것 정도는 미첼에겐 일도 아니었다. 잽싸게 제압해버린 다음 상인에게서 돈만 빼앗아 사라지면 되니까 말이다.

꼼짝 마라.

그 사실을 떠올린 미첼은 불문곡직하고 용병들에게 덮쳐 들어갔다. 저 정도 상대라면 굳이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물론 자신이 팔라딘이라는 증거를 남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므로 서너 차례 검을 나누다 기회를 보아 제압해버리면 그만이었고 미첼에겐 충분히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웃.

회심의 공격이 아주 간단히 가로막히자 미첼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놀랍게도 용병들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다. 검을 뽑지도 않고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퉁겨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뒤로도 미첼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사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었다. 빨리 일을 마치고 사라져야 했으므로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용병들은 놀랍게도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어가며 미첼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도저히 용병으로 볼 수 없는 실력이었다.

이건 뭐야? 애송이잖아?

이 정도 실력으로 도적질을 하려고?

기가 찬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장담했던 미첼의 공격을 용병들은 간단한 검놀림으로 모조리 차단했다. 그것을 보면 용병들은 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검술실력의 소유자들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자신의 실력이 수준 이하던가.

이익.

결국 부아가 치민 미첼은 오러 블레이드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지금까진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 없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살인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 평범한 용병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보자 용병들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하지만 둘 다 검을 뽑아들지도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라……. 제법 한 가닥 하는 녀석이로군.

이런 녀석이 왜 도적질을 하지?

용병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미첼은 기가 막혔다. 그가 아는 상식으론 용병들이 시퍼렇게 질려 꽁무니를 빼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나름대로 파훼법까지 대화해가며 도리어 자신에게 접근해 들어오고 있었으니…….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과는 결코 부딪혀서는 안 돼. 그대로 검이 잘려버리거든.

철저히 피해야 돼. 그러고 난 뒤 기회를 봐서 애송이를 제압하자고…….

미첼로써는 화가 나서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이것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뭘로 보고?'

미첼의 머리 속에는 건방진 용병 둘을 단칼에 두 조각 내어버리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용병들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미첼은 거센 기합성을 토해내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이야압.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가 용병들의 무기와 함께 몸마저 두 토막 낼 것임을 꿈에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지만 일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비록 오러 블레이드가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신기의 기술이라고 하나 명중되지 않으면 허사였다.

용병들은 놀라운 기술로 미첼의 오러 블레이드를 피해냈다. 하나는 거의 자신의 키만큼 도약해버렸고 나머지 하나는 몸을 납작 숙이며 피해냈다. 아니 피해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납작 엎드린 용병은 몸을 돌리며 미첼의 발목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발목에 강한 충격을 받은 미첼의 몸이 휘청했고 그 틈을 타서 뛰어오른 용병의 공격이 이어졌다.

퍽.

검집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미첼은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정말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용케 정신을 잃지 않은 미첼이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싸늘한 예기를 풍겨내는 검날이 목덜미를 지긋이 누르고 있었으니…….

왼쪽의 용병이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할래? 여기서 목이 잘릴래? 아니면 돈트렐에 가서 재판을 받고 목이 잘릴래?

미첼로써는 뭐라 말할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자신의 패배가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얼떨떨해하는 미첼을 보고 오른 쪽 용병이 몸을 일으켰다.

자네는 이 녀석을 포박하라고……. 난 나머지 강도 놈을 잡아올 테니.

그러지.

눈 깜짝할 사이에 용병들에게 제압된 미첼을 보자 율리아나는 반사적으로 줄행랑을 쳤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채 몇 걸음 달아나기도 전에 용병의 손에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 놔.

뾰쪽한 교성과 함께 율리아나는 필사적으로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둘렀다.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로잡히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미첼도 당해내지 못한 상대가 그녀의 몽둥이질에 당할 리가 만무했다.

뿌직.

몽둥이가 힘없이 부러져나가고 율리아나는 그만 용병의 굳센 손아귀에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처지가 되었다. 용병이 강제로 복면을 벗겨내자 율리아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용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것 봐 헬버. 강도가 계집인걸?

계집이 강도짓을 하다니 놀랍군. 라인. 그년을 이리로 데리고 와.

알았어.

불쌍하게도 율리아나는 용병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마차로 압송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미첼은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결박된 상태였다. 여자라고 사정 봐주지 않는 성격인 듯 용병들은 율리아나마저도 단단히 결박했다. 손을 뒤로 돌린 뒤 굵은 동아줄로 단단히 틀어 매고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 용병들은 이를 누렇게 드러내며 웃었다.

멍청한 녀석들. 노릴 것을 노려야지 하필이면 우리 마차를 습격해?

그럼. 우리들이 얼마나 경험 많은 용병인데…….

둘이 완벽하게 제압되자 이번에는 상인이 다가왔다.

그는 개기름이 주르르 흐르는 얼굴을 숙여 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겁도 없는 애송이들이로군. 백주대낮에 강도 짓을 하다니……. 얼씨구? 또 하나는 계집일세. 낯짝이 제법 반반한 년이 강도 짓을 모의하다니 정말 세상 말세로군.

이죽거리는 상인의 말을 듣고도 둘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로잡힐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특히 율리아나는 조금 전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 마차를 습격하기로 한 것부터 애초에 강도짓을 구상한 것까지 전부 말이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이제 어떻게 해? 이 사실이 카르셀에 알려진다면…….'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런 처지에 놓이다니……. 그녀는 이제 자신의 운명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도시로 가서 재판을 받고 목이 잘리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신분만은 털어놓지 않을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카르셀의 왕녀가 호위기사와 함께 강도 짓을 하다 사로잡혔다.―

만약 이 사실이 카르셀이나 주변국에 알려지면 상상도 못할 결과가 초래될 것이었다.

국가 이미지 실추는 불 보듯 뻔했다. 또한 안 그래도 심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율리아나는 이를 악물며 미첼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어떤 지경에 처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신분만은 숨겨야 해.'

무언의 약속이었지만 미첼은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 입장에 놓여 있었다. 자신 하나만 믿고 있는 아버지 헤일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식음을 전폐하실 것이 분명했다.

성공을 확신하며 시도한 강도짓이었지만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아직까지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미첼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쳐다보던 상인은 혀를 쯔쯔 찼다.

불쌍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목적지인 돈트렐에 가서 재판에다 넘겨야 되겠어. 그 전에 이름이나 알아둘까? 이봐 헬버. 녀석들의 이름과 신분이나 파악해보도록…….

알겠습니다.

헬버라고 불린 용병이 다가와 문초를 시작했다.

이봐. 이름이 뭐야.

어디 출신이지?

헬버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둘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헬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말을 하지 않는뎁쇼

그래?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상인은 무척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차 뒤에 매달린 수레에서 긴 판자조각을 꺼낸 상인은 둘을 수레에다 싣고 단단히 결박해놓으라고 지시했다.

튼튼하게 묶어놓게. 결코 도망치지 못하도록…….

염려 붙들어놓으십시오.

용병들이 달려들어 둘을 하나씩 들쳐 맨 뒤 수레에다 실었다. 그리고는 둘의 손목과 발목을 튼튼하게 고정했다. 수레는 아무래도 노예 이송용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쇠고랑을 고정시킬 수 있는 고리가 좌석마다 몇 개씩 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수레에 묶이면서도 율리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체념한 듯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었다.

크크크. 이 정도면 되겠군. 어떤가? 훌륭하지 않나?

조금 뒤 상인이 의기양양하게 들어올린 판자를 보자 율리아나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 판자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설픈 도적단. 백주대낮에 마차를 털려다 실력부족으로 사로잡힌 애송이 강도들.]

대충 이런 어귀가 큼직하게 판자에 새겨져 있었다. 상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율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 그러지 말아요.

얼씨구? 벙어리는 아니군. 좋아. 팻말을 달고 싶지 않으면 어디 이름과 신분을 솔직하게 털어놔 보실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과 신분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묵묵부답이던 둘을 쳐다보던 상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아. 어차피 재판에 회부되어 목이 잘릴 것들이니 상관없지. 혹시 모르잖아? 돈트렐에 가는 도중에 알아볼 녀석들이 있을지…….

상인은 무정하게도 판자를 수레 옆면에다 못질해서 붙였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묶여있는 부분 아래에다 정확히 말이다. 그것을 보며 미첼과 율리아나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결국 율리아나는 평소 찾지 않던 신까지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경에서 만에 하나 자신들을 알고 있는 자와 마주친다면…….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들이 버리고 온 용병들과 마주친다면 그보다 더한 창피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곤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율리아나는 다급하게 마차에 오르려는 상인을 불렀다.

저, 저기요.

무슨 일이지?

율리아나는 억지 웃음을 지어가며 상인에게 애걸을 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를 풀어주면 안되나요? 두 번 다시 강도짓을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상인은 애석하게도 애원이 먹혀드는 인물이 아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 소행을 보아 강도짓을 벌써 여러 번 한 놈들로 보이는데 그럴 순 없지. 함부로 타인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녀석들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

저, 저희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그걸 어떻게 믿어? 혹시 모르지. 이름과 신분을 솔직히 토설한다면 한 번 생각해 볼지도…….

하지만 그들에게 이름과 신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숨겨야 하는 사항이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율리아나를 매섭게 흘겨보며 상인과 두 용병은 묵묵히 마차에 올랐다.

이랴.

조금 뒤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미첼과 율리아나는 불쌍하게도 수레에 실려 돈트렐로 이송되는 처지에 놓였다. 강도짓을 모의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말이다.

수레의 옆면에 더 이상 부끄러울 수 없는 어귀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둘은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너도 참 사악한 인간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털북숭이 용병의 말에 상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뭐가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왕녀인데 저런 창피를 당하고도 살려고 그럴까?

상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저렇게 성격이 괄괄한 계집아이는 처음 보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놓아야만 저 성질머리가 좀 수그러들 거야.

하긴 네 손에 벌써 여러 여자들이 길들여져 순한 양이 되어버렸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텁석부리 용병은 실상 인간이 아니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영혼을 매개로 저주받은 몸을 가진 죽음의 기사였던 것이다.

그는 바로 데이몬에 의해 생명을 얻은 데스 나이트 헬버트론이었다.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대화를 경청하는 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라인델프였다. 그것은 '헬버'와 '라인'이라는 급조한 이름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첼이 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 지라도 아르카디아를 통틀어 충분히 열 손가락 안에 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데스 나이트들에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지금 전혀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데이몬의 탁월한 솜씨에 의해서.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상인의 정체는 역체변용술로 모습을 바꾼 데이몬이었다.

헬버트론이 놀랍다는 듯 데이몬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쳐다볼수록 놀라워. 어떻게 그렇게 전형적인 상인의 모습을 할 수 있었지?

의외로 간단해. 왜냐하면 이것은 실존 인물의 모습이기 때문이지.

데이몬은 우습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용모는 바로 로르베인의 보석상 지배인 안토니의 것이었다. 상인으로 변하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용모가 안토니의 것이었고 기억에 남아있는 이상 변장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로르베인과 이곳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만큼 알아볼 만한 자는 거의 없었다.

얼마나 완벽했는지 미첼과 율리아나마저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였으니…….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라인델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 저 계집아이는 보면 볼수록 예전의 성녀와 닮았어. 미리 말하지 않았다면 착각할 뻔했으니 말이야.

너도 속을 뻔했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두 명의 데스 나이트를 보며 데이몬은 조용히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대화에서 이름이 거론되기만 해도 다프네에 대한 추억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자신이 이토록 다프네에게 빠져 있을 줄은 몰랐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귓가에 속삭이던 상냥한 어조. 그리고 볼에 와 닿던 부드러운 입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비록 그것이 500년 전의 추억이긴 하지만 데이몬에겐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라인델프가 고개를 돌리다가 바로 얼어붙었다.

그러고 보니 넌 성녀를 상당히…….

추억에 사로잡혀 있던 데이몬을 보자 라인델프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다급하게 손가락을 입에다 댄 헬버트론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헬버트론이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주었다.

쉿. 조용히 해. 녀석과 성녀와의 관계가 어떤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

하긴.

추억에 빠져든 데이몬을 대신해 말고삐를 받아든 헬버트론은 조용히 마차를 몰았다.

데스 나이트의 몸이긴 해도 마차를 모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수레에 묶여 끌려가던 미첼과 율리아나는 오래지않아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소 진정되자 상대방에 대해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녀석. 그까짓 용병들 하나 제대로 처치 못해?

미첼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저들은 결코 평범한 용병이 아니야. 고르려면 제대로 골라야지. 아무튼 네 말대로 했다가 결과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니까.

그래도 입만 살아 가지고……. 따지고 보면 그럴 법도 해.

율리아나의 눈에는 묘한 광기가 돌고 있었다.

듀라한에게 당한 것도 그렇고, 게다가 넌 마법사와의 격투에서도 졌잖아? 그러니 용병에게 진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네 실력을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이런 썅.

눈이 뒤집힌 미첼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율리아나가 이판사판으로 따지고 들자 마침내 울화가 폭발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추호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차라리 평범한 카르셀의 수비대원을 데리고 올 걸 그랬어. 너보단 백 배 나았을 거야.

닥쳐.

연신 옥신각신하던 둘을 보다못해 헬버트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것들아. 조용히 해.

하지만 보이는 것이 없어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단히 결박되어 있어만 않았어도 달려들어 사생결단을 낼 듯한 태도였다. 결국 둘은 데이몬이 개입하고 나서야 싸움을 멈췄다. 데이몬은 일부러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둘을 쏘아보았다.

이런 건방진 것들이 도적질을 하다 잡히고 나서도 싸움질이야. 당장 그치지 않겠다면 둘 다 홀랑 벗겨서 마차 뒤에 매달고 갈 테다.

아주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협박에 둘은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상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 생각했기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그런 둘을 향해 데이몬은 거듭해서 으름장을 놓았다.

조금 더 가면 노예 시장이 있다. 계속 떠든다면 구태여 데리고 갈 것 없이 그곳에서 팔아버릴 테니 알아서들 해.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음흉한 눈빛으로 둘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미첼과 율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인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 계집은 제법 반반하니 창부로 팔면 제법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사내 녀석은 검을 쓸 줄 아니 북부의 노예병으로 팔아버리면 그만이겠군. 어디 그렇게 한 번 해 볼까?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말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었기 때문에 미첼과 율리아나는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말 걸려도 더러운 놈에게 걸렸다고 속으로 수없이 투덜대며 말이다.

수레에 묶여 있는 둘이 싸움을 그치자 마차 위의 일행들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수레에서 들리지 않도록 모종의 결계를 치고 난 뒤에 말이다.

그런데 저들을 어떻게 할거야?

헬버트론의 질문에 데이몬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돈트렐까지 끌고 갈 생각이야. 물론 갖은 구박을 좀 퍼부어가며 말이지.

돈트렐엔 용병들이 있으니까 우연을 빙자해서 만나게 하면……. 크크크. 그것 상당히 재미있겠어.

너무 하는 것 아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 녀석들은 너와 용병들을 두 번 다시 보려하지 않을 텐데…….

뭐. 마차에 묶인 상태로 대면시킬 생각은 없어. 일단 돈트렐까지 가서 적당히 기회를 보아 풀어줄 작정이야. 물론 녀석들이 제 발로 탈출하게끔 기회를 만들어줘야겠지?

사악한 녀석.

헬버트론은 혀를 끌끌 찼다. 생전에도 결코 착하게 보이지 않았던 녀석이지만 지금은 더했다. 힘을 가진 지금은 그 힘을 아주 적절히 이용해서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트루베니아에는 언제 건너갈 작정이야? 우린 지금 드래곤과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 죽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머지않아 좋은 사냥감이 생길 테니…….

드래곤 한 마리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말에 헬버트론은 반색을 했다.

그것 정말 반가운 소리로군. 그 때가 기다려지는 걸?

놈과 맞닥뜨리면 실수나 하지 말도록 해. 드래곤을 상대하는데 있어 실수는 바로 죽음과 직결되니까 말이야. 너희들이 아무리 데스 나이트라도 전신이 산산조각 나면 되살리기 힘들어.

걱정하지 마. 우린 자나깨나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헬버트론과 라인델프의 눈에는 분노의 광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돈트렐로 향하는 일주일의 여정동안 미첼과 율리아나는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낮에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있을 수도 없었다. 그게 모두 다 저주받은 팻말 때문이었다.

드넓은 관도라서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다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 붙인 팻말 때문에 그들은 하루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옷자락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수밖에.

저것 봐. 뭐라고 적혀 있지? 어설픈 도적단? 쯔쯔쯔 보아하니 젊은 녀석들 같은데 불쌍하군.

하나는 계집아이 같은데 맞나? 보아하니 남자한테 단단히 반한 년 같군. 보나마나 남자녀석에게 푹 빠져 범행을 저질렀을 테지?

저런 녀석들은 절대로 사정 봐주지마슈. 단단히 콩밥을 먹여야지.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내뱉는 말에 미첼과 율리아나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지간한 율리아나라도 상인에겐 제대로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우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데다 그들을 압송해 가는 상인이 말 그대로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비칠 냉혈한으로 보였던 것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율리아나도 그 괄괄한 성질 한 번 부리지 못하고 순순히 압송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상인은 결코 자신의 투정을 받아 줄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강도질하다 잡힌 처지이니 더욱 그러했다.

자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용병으로 짐작되는 녀석이 음식 한 접시를 탕 소리내며 내려놓았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그것을 집어들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체면 가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빵과 고기가 전부였지만 율리아나는 군소리하지 않고 입 속에 집어넣었다. 묵묵히 씹고 있자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엄마. 흑흑.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인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차라리 카르셀을 떠나지 말 것을……. 아니 용병단에게 복수한다며 식량을 챙기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처지에는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놀랍게도 율리아나는 지금 용병대장인 카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했지. 그 정도로 임무에 충실한 사람은 드물 테니까. 불쌍한 용병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할 테지? 그 산간벽지에서 식량을 깡그리 챙겨 왔으니…….'

사람이란 본시 위기에 처하게 되면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해 왔던 소행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자기 고집대로만 행동했던 것,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던 것 모두가 절실히 뉘우쳐졌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엎질러진 물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들이 돈트렐에 가서 목이 잘릴 날만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카르셀의 왕녀란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야. 죽어도 아버님의 왕국에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율리아나는 묵묵히 다짐하며 빵을 집어삼켰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이다.

미첼 역시 정신이 반쯤 나가긴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굳은 결심으로 카르셀을 떠났건만 거듭되는 시련으로 인해 그의 자신감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물론 거기에는 평범한 용병에게도 패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

지금 그는 고향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금 따분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임무에 충실한 수비대원들. 거의 매일이다시피 자신에게 추파를 보내는 마을 처녀들. 심지어 미첼은 아버지의 매질까지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강한 기사로 키우겠다는 명목아래 미첼을 유난히도 혹독하게 단련시켰던 아버지 헤일즈였다. 수련을 조금만 게을리 하면 불호령과 함께 호된 매질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하지만 지금 미첼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

'만약 카르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헛된 망상을 품지 않겠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 미첼이었다. 그런 둘을 싣고 마차는 묵묵히 돈트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돈트렐은 테르비아 왕국에서 수도 다음의 위치에 놓여있는 도시였다. 그런 만큼 상주하는 인구가 어마어마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보니 드나드는 사람의 행렬 역시 잠시도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동부 해안지방에서 서부의 크로센 제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기에 돈트렐의 성문은 항상 북적북적하게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돈트렐은 일반적인 도시가 아닌 테르비아 왕국의 주요 거점도시였다.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검문이 상당히 엄격한 편이었기에 돈트렐의 성문에는 항상 검문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대열과 마차의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입성(入城)하려는 자는 신분이 특별한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이상은 누구를 막론하고 검문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돈트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미 기다리는데 만성이 된 듯 사람들은 짜증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길게 늘어선 줄을 본체만체하며 곧장 성문으로 다가갔다. 무료하게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누구지? 어지간한 신분으론 바로 들어가지 못할 텐데…….

복장이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귀족 같기는 한데 왜 수행원이 하나도 없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가며 성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는 흑발을 길게 기른 청년이었다. 한 마디로 절세 미남자라 칭할 수 있는 용모. 주위 사람들에게 일체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성문으로 다가가는 이는 바로 러셀런트였다. 데이몬을 잡기 위해 트루베니아에서 파견된 에인션트 급 드래곤. 그가 마침내 돈트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지.

그가 다가가자 성문 수비병들이 창을 십자로 교차해서 앞을 가로막았다. 다소 신분이 높아 보이는 병사 하나가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성문 수비병 부대장 정도의 직책을 맡은 병사 같았다. 러셀런트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본 병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분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러셀런트의 시선이 힐끗 병사에게 돌아갔다. 그 상태로 그는 잠시동안 병사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흑발의 청년이 곧 성문에서 쫓겨날 것이라 간주했다. 테르비아 왕국은 강력한 법치국가였고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특혜를 받기 힘들었다. 차림새는 그럴 듯 했지만 수행원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청년은 그리 높은 신분의 귀족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사의 반응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곤혹스러워했던 병사는 러셀런트의 눈에서 모종의 빛이 번쩍 하자마자 태도가 싹 바뀌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일국의 군주에게나 보일 법한 경의를 표시하며 병사는 러셀런트를 공손히 성문으로 안내했다. 부대장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데 휘하 병사들이 이견을 제시할 리가 만무했다. 결국 러셀런트는 전혀 검문을 받지 않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러셀런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부대장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성문 안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병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부대장님. 그가 대관절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무사 통과를 시켰습니까?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부대장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그건……나도 모르겠다.

떠듬떠듬 대답한 부대장은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자 지체 없이 병사들을 다그쳤다.

지금 그런 문제로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다. 네 눈엔 저기 늘어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 서둘러라.

결국 병사들은 의문을 가슴속에 묻어버린 채 다시 검문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현혹마법을 사용해서 간단히 돈트렐에 들어온 러셀런트는 느긋하게 시내를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수많은 돈트렐 시민들이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과거 트루베니아의 일류 급 도시에 능히 비견될 수 있었다. 신대륙의 인간들이 이 정도나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러셀런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인간들의 저력이란 과연 무섭군. 불과 500년 사이에 이런 번영을 이룩했으니 말이야.

500년 전에 벌어진 종족전쟁에서 드래곤들은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인간을 트루베니아의 주인 자리에서 밀어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그것은 반쪽 짜리 승리일 뿐이었다. 쫓겨난 인간들이 어느새 신대륙에다 트루베니아에 못지 않을 정도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골치 아프군.

데이몬을 찾아 신대륙의 곳곳을 돌아다닌 탓에 러셀런트는 아르카디아의 힘이 트루베니아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기사들의 수나 수준 따위의 세세한 것까지는 간파하지 못했지만 언뜻 살펴본 인구와 거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을 감안했을 때 아르카디아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러셀런트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혀를 내둘러야 했다. 드래곤에게 이곳의 인간들이란 단지 멸종시켜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즉시 이 사실을 베르키스님께 보고 드려야겠군.

아르카디아를 도모하는 일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되겠어. 준비를 차근차근 한 다음에…….

나지막이 중얼거린 러셀런트는 돈트렐 시가지를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분명 저 속엔 자신의 동족을 죽이고 마법 보고를 훔쳐간 가증스러운 인간이 있을 터였다. 수 만 명의 인간 중에서 하나를 찾아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러셀런트는 그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놈은 마법사다. 돈트렐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마법의 캐스팅을 모조리 추적해 들어간다면 반드시 놈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작정한 러셀런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돈트렐 시가지로 진입해 들어갔다.

러셀런트가 시가지를 수색하고 있는 사이 데이몬 역시 돈트렐로 접근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마차를 타고 오며 데이몬은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온갖 수모를 안겨주었고 그 때문에 둘은 완전히 기가 꺾여 있는 상태였다.

풀죽은 기색의 둘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이제 슬슬 그들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고생시켰으니 화는 어느 정도 풀렸고……. 한나절 정도면 돈트렐에 들어갈 테니 이쯤에서 녀석들을 풀어주는 게 낫겠군.'

사실 데이몬은 둘을 크로센 제국까지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주일 가량을 허비해가며 둘을 잡아다 돈트렐로 끌고 올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율리아나 였다. 물론 다른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다프네에게만 사로잡혀 있었고 율리아나에게 다른 마음을 먹을 이유란 없었다. 오로지 다프네와 닮은 모습을 살짝살짝 훔쳐보며 그리움을 달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데이몬의 그런 꿍꿍이 때문에 둘은 불쌍하게도 모진 고초를 겪어가며 돈트렐로 오게 된 것이다.

부끄러운 팻말 때문에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둘을 다시 한 번 쳐다본 데이몬은 조용히 라인델프를 불렀다.

이번에는 네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다.

라인델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껏 데이몬은 헬버트론과 함께 둘을 무던히도 골탕먹였다. 잔뜩 굶겨놓고 지저분한 음식을 먹이거나 목이 마른 상태에서 입을 대고 마시던 수통을 건네는 일 따위 말이다. 하지만 라인델프는 철저히 열외였다. 그들에게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수레의 둘과 제대로 대화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악역은 우리 둘이 맡았으니 선행은 네가 하도록 해. 그러니까…….

데이몬의 설명을 들은 라인델프는 무척 재미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니까.

믿겠어. 눈치가 상당히 빠른 계집아이니까 조심하도록 하고.

미첼과 율리아나는 풀이 완전히 죽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돈트렐에 거의 도착했으니 이제 재판을 받고 목이 잘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르카디아에서 강도 짓은 상당한 중죄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왕국에서는 강도짓을 하다 잡힌 범인에게 무척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손목을 잘라버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물론 모든 왕국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노예제도가 허용되는 국가에서는 범인을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테르비아 정도의 강대국이라면 노예 제도를 승인할 리가 없을 터. 둘은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가 멎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수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처연한 기색이 서렸다.

그래도 다행이야. 노예로 팔리는 것보다는 목이 잘리는 게 훨씬 낫지.

지금까지 압송되며 그녀는 자신의 결정을 수없이 후회하고 또 뉘우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재수 없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에게 걸린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성질은 이제 많이 죽어 있었다.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 때문에 많은 것을 깨우친 것이다.

저벅저벅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들려오자 율리아나는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어차피 돈트렐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형당할 테지만 그 전까지는 얼굴을 팔고 싶지 않았다. 걸음소리는 바로 자신들의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쯔쯔쯔. 불쌍한 것들…….

어느 정도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과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얄미운 용병의 것은 아니었다. 한 가닥 기대감으로 인해 미첼과 율리아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이 왜 강도짓을 모의했어? 한심한 것들.

그들을 쳐다보며 혀를 차고 있는 자는 미첼을 제압했던 용병 중 하나였다. 상인과 함께 자신들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용병의 동생으로 짐작되는, 그리고 좀처럼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던 말수가 적은 용병. 그는 수염투성이 얼굴에 측은한 표정을 떠올린 채 연신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에 대한 한 가닥 기대를 떠올린 율리아나는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애원을 했다.

사, 살려주세요. 저희들이 잘못했어요.

아마 죽지는 않을 거야. 상인 녀석은 너희들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녀석은 너희들을 북부로 데리고 가서 팔아버릴 생각이니까…….

용병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과 율리아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에서 노예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고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둘은 극도로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둘을 쳐다보며 용병은 거듭 혀를 찼다.

쯔쯔쯔 비록 고용주 입장이긴 하지만 저 녀석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야. 너희 같이 앞길 창창한 젊은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릴 생각을 하다니…….

안됐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용병. 미첼과 율리아나는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눈앞의 용병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상인과는 달리 눈앞의 용병은 적어도 사정이 통하는 인물인 것이다. 때문에 둘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저희들을 풀어주세요. 앞으로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게요.

저희들을 살려주신다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용병은 여간해서는 마음을 돌릴 기색이 아니었다.

너희들의 사정도 안되었다만 나 역시 밥줄이 걸려있는 문제야. 미우나 고우나 내 고용주니까……. 미안하지만 안되겠는걸?

고개를 가로젓는 용병을 보고 둘은 애가 탔다. 마음 같아서는 카르셀로 데리고 가서 돈을 듬뿍 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분을 밝히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야 한다. 결국 그들은 인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발……. 아저씨에게도 저 같은 딸이 있잖아요? 그러니 한 번만…….

젊은 사람 살려주신다 생각하고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그러시면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착잡한 듯 둘을 쳐다보던 용병은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좋다. 너희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그저 두고볼 수는 없구나.

용병의 말에 둘의 안색이 확 펴졌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거듭 감사를 표하는 둘을 쳐다보며 용병은 짐짓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많은 것을 해 줄 수는 없다. 단지 너희들을 묶은 오랏줄과 쇠고랑만 표시 나지 않게 풀어주겠다. 그러니 도망치는 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말을 끊은 용병은 슬쩍 뒤를 쳐다보더니 음성을 더욱 낮췄다.

조금만 더 가면 돈트렐 시 외곽에 도착한다. 그 때쯤이면 상인과 헬버 녀석이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 때를 틈타 도망쳐라. 그리고 돈트렐 시내로 숨어들어라. 난 너희들이 지금까지 온 길로 달아났다고 말하겠다. 어차피 말도 없는 너희들이 마차를 피할 순 없는 노릇.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좋을 듯 싶다.

미첼과 율리아나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체념한 상태에서 다시금 생의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하지만 용병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쁜 상황에서 만난 인연이니 나중에 만나더라도 서로 난처할 수밖에 없을 터. 그냥 잊어라. 그리고 앞으론 나쁜 짓일랑 하지말고 살도록 해라.

감격에 겨운 나머지 율리아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병의 마음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때문에 그녀는 용병이 철저히 상인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위를 살피며 수레 위로 올라온 용병은 단도를 꺼내 둘의 오랏줄을 끊어주었다.

끊은 부분을 잘 잡고 있도록 해라. 상인이나 헬버의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용병은 내친 김에 둘의 손목과 발목을 속박하고 있던 쇠고랑까지 벗겨냈다. 꼬박 일주일을 묶여 있었기 때문에 온 몸이 저려왔지만 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증거였다. 작업을 마친 용병은 수레를 내려가며 둘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조금 뒤 저들이 잠들면 내가 신호를 해 주겠다. 신호는 음……. 조용히 휘파람을 불겠다. 그 때 도망치도록 해라.

그럴 게요.

저, 정말 고맙습니다.

둘은 멀어져 가는 용병에게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그들의 상황에서 용병은 더 이상 고마울 수 없는 은인이었다. 물론 그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둘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끝났어?

그럼. 내가 누군가? 이래뵈도 난 소싯적에 수많은 연극을 섭렵한 몸이라고…….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라인델프에게서 조금 전의 상황을 전해들은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데스 나이트치고는 제법인걸? 수고했어.

뭐 수고랄 것까지야.

이제 데이몬에게 유희의 시간은 끝났다. 조금 후면 미첼과 율리아나는 탈출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갈 곳은 돈트렐 밖에 없었다. 뻥 뚫린 관도에서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으므로……. 별도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십중팔구 돈트렐에 숨어들 것이 분명했다.

용병 녀석들이 어느 정도 내가기공에 맛을 들였을 터.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먼저 그들을 데리고 와야겠군.

의자 좌석에 느긋하게 몸을 묻은 채 데이몬은 잠을 자는 척 했다. 그래야만 미첼과 율리아나가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라인델프만이 깨어있는 상태로 수레의 둘에게 신호를 보낼 때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때가 무르익자 그는 행동에 나섰다.

휘-휙.

휘파람을 불자 잔뜩 준비하고 있던 미첼과 율리아나는 잽싸게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삐를 잡은 라인델프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낸 뒤 몸을 날렸다. 정확히 돈트렐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라인델프는 데이몬을 깨웠다.

이봐. 성공했어.

라인델프는 맡은 바 임무를 깨끗이 완수한 것이다. 데이몬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수고했어. 너희들은 다시 인크레시아에 들어가 있도록 해. 준비 단단히 해야 할거야.

너희들이 다시 나올 때는 반드시 드래곤과의 접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지.

헬버트론과 라인델프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인크레시아에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데이몬은 다시 본래의 용모를 회복했다. 뒤쫓는 드래곤이 자신의 용모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데이몬은 굳이 다른 모습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는 순간 사생결단을 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마차를 버려야겠군.

마차에서 내린 데이몬은 묶여 있는 말 중에서 제일 힘이 좋아 보이는 말 한 필을 끌러냈다. 제법 많은 돈을 주고 산 마차였지만 굳이 가지고 갈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 두고 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주인이 생길 테니 말이다.

이랴.

말에 올라탄 데이몬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데이몬을 태운 말은 멀리 보이는 돈트렐을 향해 기세 좋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헉, 헉.

둘은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달렸다.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추격을 받게 될 것 같았으므로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추격해오는 자가 있을 리가 없었지만 둘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국 둘이 달리는 것을 그만둔 것은 멀리 돈트렐의 성문이 보일 즈음에서였다.

휴.

그때서야 둘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숨이 턱 밑까지 차 올랐지만 둘은 목숨을 건졌다는 기대로 인해 힘든 것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율리아나가 정말 끔찍했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내 평생 그렇게 잔악무도한 상인 녀석은 처음 보았어.

미첼 역시 이를 부드득 갈며 말을 받았다.

글쎄 말이야. 언제고 한 번 마주친다면 반드시 갈가리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놈이야.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첼에겐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상인은 자신들 최대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약점이란 게 결코 퍼져나가서는 안될 비밀인 만큼 그와 다시 대면하는 일은 결단코 피해야 했다. 그래야만 율리아나와 자신이 행한 짓이 카르셀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때문에 둘은 오로지 상상으로써만 상인에 대한 울화를 풀어야만 했다.

수비대원들을 풀어 놈을 몰래 카르셀로 잡아올까? 놈의 눈을 멀게 한 뒤에 잡아온다면 우리가 누군지 눈치채지 못할 테니 말이야. 그렇게 해 놓고 분풀이를 하면…….

그것보다는 어새신 용병단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 그들은 돈만 충분하면 그 누구든 죽여준다니까 말이야. 놈을 그냥 깨끗이 죽여 없애는 것이 나아.

하지만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이 누군지, 또 어디에 사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상인에 대해 욕설을 늘어놓던 율리아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단 돈트렐에 들어가도록 하자. 배도 고프고, 여기 있다간 놈들의 눈에 뜨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어?

미첼의 반문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물론 그들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가증스런 상인이 검을 비롯해 남은 짐들을 모조리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둘은 말 그대로 빈털터리 신세였다.

게다가 지금 상황으로썬 돈트렐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통행증이 없었다. 상인의 마차를 덮치기 전, 둘은 통행증이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서류들을 헝겊에 싸서 근처 풀숲에 묻어두었다. 만약을 위해 그런 것이었다.

그 덕택에 신분이 탄로나는 것은 면했지만 돈트렐로 들어가려니 이번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일반적인 도시나 교역도시라면 통행증이 없어도 입성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검사를 하지 않는 도시가 태반이었고 있다 해도 형식적으로 끝날 뿐이었다. 하지만 돈트렐은 자타가 공인하는 테르비아의 거점도시였고 통행증이 없으면 십중팔구 입성이 허용되지 않을 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미첼이 안색을 구겼다.

미치겠군. 어떻게 하지?

다시 그곳으로 가서 통행증을 파내어 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꼬박 일주일 동안을 수레에 실려 압송되어 왔으니 다시 돌아가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겐 그럴 만한 여비나 식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율리아나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잖아? 일단 부딪혀 봐야지. 신분을 밝힌다면 아마도 들여 보내줄 거야.

상인의 눈에 뜨일까 두려웠는지 율리아나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미첼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쳇. 무작정 부딪히는 방법이 카르셀에서나 통하지 여기서도 통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둘은 마침내 돈트렐의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 앞에는 입성하기 위한 목적의 대열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러셀런트가 보았던 사람과 마차의 대열 말이다. 그 모습에 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햐! 이게 모두 다 돈트렐에 들어가려고 줄 서있는 사람들이야?

정말 엄청나군.

사람들의 대열을 힐끔 쳐다본 율리아나는 줄을 무시한 채 성문으로 직행했다.

카르셀의 왕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쉽사리 통과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미첼도 부랴부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줄 서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김없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러셀런트와는 사못 달랐다.

저건 뭐야? 웬 상거지들이?

경비병에게 동냥을 얻으려고 하나?

둘의 외모가 워낙 남루했기 때문에 사람들로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은 데다 꼬박 일주일 동안 수레를 타고 왔기 때문에 둘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차림새. 그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미첼과 율리아나는 마침내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수비병들이 창을 십자로 교차시켜 앞을 막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둘이 마치 거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임자를 부를 필요도 없다는 듯 한 수비병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 입성할 생각이면 통행증을 들고 줄을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