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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점이 무척 많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호통에 쌍방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악당 앞에서 싸워봐야 자신들만 손해였다. 두 패로 갈려 서로 노려보는 패거리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과연 이것들을 따라가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이미 데이몬은 이곳을 뜨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봉인구는 이미 몸 속에 박혀있는 상태였고 데스 나이트들도 인크레시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떠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거기에는 드래곤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아르카디아를 두루 여행하며 각지의 풍물을 구경하면서 짬짬이 데스 나이트를 강화시키고 비밀병기를 완성시키자는 것이 데이몬이 내린 가장 합당한 결론이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파티에 속하는 것이 여행하기엔 훨씬 용이할 터였다. 혼자서 여행하자면 귀찮은 점이 무척 많기 때문이었다. 먹고 자는 것을 모조리 직접 해결해야 했으며 항상 여정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이유로 데이몬은 오래 전부터 마땅한 파티를 물색해서 합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감춘 후에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패거리들의 난입으로 계획이 여지없이 바뀌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다른 파티와 합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보고 난 뒤 데이몬은 생각을 바꿨다. 우선 이들의 목적지가 자신과 같은 크로센 제국이었고 풀어주는 조건으로 동행을 요구한다면 쉽게 먹혀 들어갈 것 같았다. 물론 율리아나의 외모가 다프네와 흡사하다는 이유가 데이몬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다프네와 판박이인 율리아나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데이몬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질머리가 더럽고 어쩌고 간에 다프네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데이몬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의 본심은 오로지 다프네에게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다프네와 꼭 닮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려는 것이 바로 데이몬의 속셈이었다. 그는 곧 패거리들에게 내심을 털어놓았다.

좋아. 순순히 대답해 줬으니 대신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너희들 모두를 풀어주겠다.

예상치 못했던 말에 일행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보아 죽진 않겠지만 단단히 곤욕을 치른 후에야 풀려날 것을 예상했던 일행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풀어주다니……. 가장 신중한 카심이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로 풀어주는 대가를 물어보았다.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상대가 악당임을 감안하면 조건이 그들에게 아주 버거울 공산이 컸다.

하지만 상대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조건은 크로센 제국까지 나와 동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약속하면 너희들 모두를 무사히 풀어주겠다.

크, 크로센까지 당신과 동행하자고요?

일행의 눈이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조건이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 명성을 노리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도 많이 몰려들어 이 생활도 진력이 나려던 참이다. 그래서 진작부터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희들이 들어온 것이야. 내 목적지도 크로센 제국이니 그곳까지 나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떠냐.

데이몬이 일행들의 면면을 한번씩 훑어보며 말을 이어나가는데 한 쪽에서 뾰쪽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 같은 악당을 데리고 갈 수 없어. 난 공주야. 그런 내가 어떻게 흑마법사 나부랭이랑 동행할 수 있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물론 율리아나였다. 카심과 미첼이 그녀에게 정말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정말 상황판단 못하는 계집애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모질게 패주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지만 둘은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모시는 왕녀를 팰 수 없다는 것이 미첼의 이유였고 고용주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카심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동행시키는 문제는 전적으로 율리아나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둘은 묵묵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욕설을 있는 대로 퍼부어 가며 말이다.

'어서 카르셀을 벗어나야지 저년 꼴을 두 번 다시 안보지.'

'네년이 만약 내 딸이었다면 넌 내 손에 반쯤 죽었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절대로 안 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내젓는 율리아나. 하지만 데이몬은 그녀의 반응쯤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네년이 다프네만 닮지 않았다면 한 달을 꼬박 매달아놓았을 텐데…….'

하지만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니 또다시 마음이 포근해졌다. 분노가 흔적도 없이 사그러지는 것을 느끼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 참.

단지 얼굴이 닮은 소녀에게도 화를 내지 못할 정도로 다프네에게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데이몬.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데이몬은 다프네를 위해서라면 웃으며 죽어줄 수 있었다. 다프네는 그 정도로 데이몬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잠시 머리를 굴린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렇다면 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냐?

율리아나의 대답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렇다. 어떠한 경우에도 너 따위와 동행할 수는 없어.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미첼과 카심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만약 살아날 수만 있다면 두 번 다시 율리아나란 계집애와 상종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데이몬은 별반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도리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카심을 불렀다.

이봐 용병대장.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카심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날 불렀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말씀하시오.

이곳에 있는 자들이 네 용병단의 전부냐?

카심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휘하 용병들이 채 열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털어놓기가 지극히 부끄러웠던 것이다.

일단은 그렇소. 하지만 계속해서 용병을 모집 중이니 머지않아 수가 현저히 늘어날 거요.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꼈다.

혹시 용병단에 마법사가 한 명 정도 필요하지 않나?

네?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하는 카심에게 데이몬은 친절하게 추가 설명을 해 주었다.

상당히 막강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야. 흑마법 계열이란 것이 조금 께름칙할지도 모르지만 알다시피 공격마법 쪽으론 흑마법이 월등하게 위력이 강하지. 덤으로 팔라딘과 싸워도 섣불리 꿀리지 않는 듀라한이 하나 따라갈 걸세. 어떤가? 자네에게 고용할 마음이 있는가?

거기까지 설명했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오크 아니면 백치였다. 카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 용병단에 들어오겠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다네. 어떤가? 용의가 있나?

카심은 잠시 주저했다. 데이몬이 자신의 용병단에 들어오고 난 뒤의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결정하는데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금전문제. 현재 카심 용병단의 재정상태론 1서클의 마법 수련생조차 고용할 수 없다. 마법사는 그 정도로 비싼 존재였다. 그리고 데이몬은 그것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 보수는 걱정하지 말게. 받은 청부금에서 적당하게 나눠주면 만족할 테니…….

실은 나에게 보수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어떤가?

거기까지 말이 이어지자 카심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제의를 기꺼이 수락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카심 용병단의 일원입니다.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탁월한 판단이네.

앞으로 내민 데이몬의 손을 카심이 맞받아 마구 흔들었다. 비록 데이몬으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긴 했지만 카심은 지난 일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자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나에게 무얼 원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상관없다. 마법실력을 보아 이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의 용병단은 그 즉시 열 배 이상 강력해지니까…….'

정황을 보아 흑마법사는 율리아나와 동행하기 위해 자신의 용병단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율리아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건 말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병을 임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용병대장의 권한이었고 용병단의 일원이 된다면 율리아나가 동의하지 않아도 동행하는데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율리아나가 돌을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방지축인 그녀라도 용병을 뽑는 것이 용병대장의 고유권한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율리아나는 암암리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쳐버릴 노릇이군.'

심문을 받는 도중에도 그녀는 흑마법사의 기분 나쁜 시선을 계속해서 느꼈다.

음흉하고 느물느물한 늙은이의 시선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것 때문에 흑마법사의 동행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인데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공식적으로 용병단에 받아들여진 이상 저 기분 나쁜 얼굴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것은 현실이었다. 율리아나로써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심이 다가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보신 바와 같이 저의 용병단에 강력한 마법사가 가세했습니다. 왕녀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 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경호에 더욱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섭게 노려보는 율리아나의 시선을 카심은 슬쩍 외면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속은 벅차 오르는 희열감으로 메아리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최대한 용병단에 붙들어둬야 한다. 저자가 천고의 악당에 살인마라도 상관없다. 저자만 있으면 카심 용병단이란 이름을 아르카디아 전역에 널리 퍼뜨릴 수 있으니 말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카심은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법사의 가세는 모든 용병단의 단장이 꿈에라도 바라는 일이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자고로 고금을 통틀어 마법사란 최고의 고급 인력에 속한다. 자질이 없어도 노력여하에 따라 강해질 수 있는 검사와는 달리 마법이란 철저히 자질에 좌우되는 학문이다. 노력만으로써 마법을 익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법사는 검사에 비해 현저한 희소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용병단에서 쓸만한 마법사를 구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약한 체력을 가진 마법사가 힘든 용병생활을 견뎌내기란 무척 힘든 일인 데다가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궁정이나 기사단에 소속되기를 희망할 뿐 용병단에는 좀처럼 가려하지 않았다. 별달리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집단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마법사이니 만큼 용병단에서는 거금을 미끼로 마법사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모이는 자들은 채 3써클도 되지 못하는 허접 쓰레기들뿐이었다.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무리 거금을 준다고 해도 용병단에는 오지 않았다.

카심이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썬더버드 용병단에는 총 네 명의 마법사가 종군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겨우 4써클의 유저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전투에 현격한 도움이 되었기에 썬더버드 용병단에서는 거액의 봉급을 지급하며 계속 데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카심은 데이몬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별로 겪어보진 않았지만 이자는 진짜다. 최소한 6써클은 상회하는 실력자란 말이지.

이런 자를 영입하게 된 것은 내 일생 일대의 행운이다. 그것도 얼마 안 되는 봉급으로 말이야.'

휘하 용병들의 불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카심은 묵묵히 말을 털어놓았다.

그럼 준비하도록 하시오. 크로센 제국까지 갈 길이 머니…….

그러지.

흔쾌히 대답한 데이몬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윈슬럿에게 무기와 짐을 모두 돌려 받은 일행은 동굴 밖으로 먼저 나왔다. 이미 윈슬럿이 그들의 말을 모두 끌어다 동굴 입구에 묶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조금 뒤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나온 데이몬을 보고 일행들은 혼비백산했다.

세, 세상에…….

데이몬은 놀랍게도 윈슬럿에게 짐을 산더미처럼 지운 채 옆에 세워놓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짐꾼으로 데리고 갈 것 같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기에 율리아나는 또다시 히스테리를 부렸다.

저 괴물을 데리고 돌아다니자니 도대체 제 정신인가요? 차라리 난 당신네 용병단과 계약해지를 하는 쪽을 택하겠어요. 미첼과 단 둘이서 가는 한이 있어도 저자는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어요.

물론 듀라한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카심도 별달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린 아주 나쁜 악당들이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다니는 것과 전혀 다름없었으므로…….

사실 율리아나가 계약해지를 해 주는 것은 카심이 도리어 바라는 일이었다. 이미 청부금은 선금으로 모두 받은 상태였으므로 이대로 헤어져 다른 일거리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양심상 그럴 수 없었기에 카심은 묵묵히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네. 뭐 문제될 게 있나?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을 보고 카심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약간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야 뭐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서…….

듀라한을 이곳에 두고 가자는 말이 차마 카심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을 구슬러 용병단에 남게 하는 것이 카심의 본심이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상 밖으로 데이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 녀석을 사람들 눈에 띄게 하지 않게 하면 되는가?

카심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하시면 제가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말과 그리 친하지 않은 편이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몸쓰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니……. 과거 용병단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항상 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떠올린 카심은 없는 돈을 쪼개서라도 마차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예상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나는 말을 잘 타는 편이니까.

카심의 얼굴이 확 펴졌다. 항상 쪼들리는 그에겐 마차를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반가울 수 없는 소리였다. 물론 뛰어난 무인이었던 데이몬이 말을 못 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놈을 즉시 처리하도록 하지.

데이몬이 수인을 맺자 허공에 인크레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펼쳐진 일렁거리는 공간의 틈새를 보자 일행들의 얼굴이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뭐야?

그들은 지금까지 마법 보고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아르카디아 전역의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일행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데이몬은 윈슬럿에게 명령을 내렸다.

들어가라. 그리고 내가 부를 때에만 나오도록 해라.

크아아아.

알았다는 듯 기성을 지른 윈슬럿은 지체 없이 인크레시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게 뭡니까?

의아한 눈초리로 인크레시아에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려는 카심을 보자 데이몬은 질겁을 했다.

거기에다 손을 대면 큰일나네. 그 속은 나조차도 들어갈 수 없어.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오직 언데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린 카심. 그것을 보며 데이몬은 태연하게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그런 뒤 일행을 돌아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임시로 듀라한을 보관해 두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그럼 출발해 볼까?

그, 그러죠. 그럼 저 말을 타십시오.

떠듬떠듬 대답한 카심은 짐을 집어들었다.

데이몬이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말에 다가가는 것을 본 카심은 지체 없이 출발 명령을 내렸다. 지긋지긋했던 이 동굴에서 한시도 지체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달랐다. 무려 5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 동굴에 상당히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데이몬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랴.

이렇게 해서 새로운, 그러나 말썽 많은 동료들을 얻게 된 데이몬은 마침내 크로센으로써의 여정을 시작했다. 어떤 고달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바로 로메인 남작이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는지?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뜨는 중년인을 보던 이의 눈동자에는 희열의 빛이 가득했다.

드디어 찾았군.

무, 무슨 말씀이오?

상대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없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는 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창백한 피부가 무척 인상적이었으며 짙디짙은 흑발에 흑요석같은 검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더없이 요요로운 기운을 풍겼다. 한 마디로 귀기(鬼氣)까지 감돌 정도의 용모를 가진 절세 미남자였다.

옥에 티라면 청년의 얼굴에 한없이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청년의 매력을 결코 반감시키지는 않았다. 청년의 용모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눈동자였다.

인간이라면 의당 떠올라 있어야 할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정이 눈빛에서 일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였다. 데이몬을 처치하고 인크레시아를 회수할 사명을 부여받고 파견된 드래곤. 그가 마침내 아르카디아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은 무척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이었고 앞에 앉아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로메인 남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젠가르트가 저주(?)에 걸려 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러셀런트는 천신만고 끝에 데이몬을 잡을 한 가닥 실마리를 붙잡은 것이다.

러셀런트의 시선은 지금 젠가르트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틀림없군. 저 반지는 분명히 내 것이야. 인크레시아 속에 단단히 보관해 놓은…….

그렇다면 저 녀석에게 저주를 건 녀석은 분명히 찾던 놈이 맞을 것 같군.

젠가르트의 손가락에는 고색 찬연한 반지 하나가 끼어져 있었다. 움찔한 젠가르트가 얼른 손가락을 말아 쥐었지만 러셀런트는 이미 반지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큼지막한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는 정말 아름다웠다. 사파이어가 박힌 링 주위의 세공이 극히 정교한 것을 보아 한 눈에 보아도 드워프의 세공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섣불리 가치를 논할 수 없을 정도의 보물.

원래 이 반지는 데이몬이 처분하라고 넘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지에 한 눈에 반한 젠가르트가 팔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금은 로메인의 개인 금고에서 지불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원주인(?)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

반지는 공교롭게도 러셀런트의 것이었다. 망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드래곤의 기억력이었으므로 한 번 자신의 손을 거쳐간 보물을 러셀런트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또한 러셀런트가 워낙 애기중지한 나머지 도난을 막기 위해 특별히 인크레시아에 보관한 반지인 만큼 알아보지 못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므로 러셀런트는 목적했던 녀석에게 한 발 다가섰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놈. 이젠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러셀런트가 데이몬의 뒤를 추격해 온 배경에는 그의 노련한 경험이 일조를 했다. 사실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아르카디아에서 인간 하나를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무리 탐지마법을 쓰더라도 상대가 기척을 감춰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러셀런트는 말 그대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에 비유될 수 있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임무를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공통적인 행동패턴을 보인다. 그러므로 놈이 할 만한 행동을 역추적해 들어간다면 반드시 꼬리를 잡을 수 있다.

러셀런트는 드래곤의 모습으로 두 대륙 사이를 가르고 있는 바다를 날아서 건너왔다.

자신을 목격한 포경선 두 척을 단번에 침몰시켜버리는 용의주도함을 보이며 말이다.

마침내 신대륙 아르카디아에 첫발을 디딘 러셀런트. 데이몬의 종적을 찾아내기 위한 일환으로 러셀런트는 가장 먼저 도둑 길드를 찾아갔다.

도둑 길드. 어둠의 세계에 소속된 밤신사들의 집단으로 세상에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존재할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할 정도로 세상에 뿌리내려 있었고 직업의 특성상 엄청난 양의 정보가 거래되곤 했다.

인간세상을 많이 여행해 본 만큼 러셀런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도둑 길드의 본부를 찾아갔던 것이다.

어둠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 도둑길드의 근거지였지만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길드원으로 보이는 인간 몇을 적당히 손봐주자 도둑 길드원들은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들은 복수를 위해 나타난 것이었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이 자신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러셀런트는 자신을 맞이하러 온 도둑 길드원들을 적당히(?) 주물러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입이 굳은 자라고 하더라도 러셀런트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그 역시 10서클의 마스터. 베르키스만큼은 못하더라도 인간의 심지를 조종하는 정신계 마법의 달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니……. 목적했던 곳을 찾아낸 러셀런트는 즉시 길드의 근거지를 찾아갔다. 물론 흉흉한 기색의 길드원들이 그를 보자마자 단검을 번뜩이며 달려들었지만 러셀런트가 전개한 고위급 마법 한 방에 태반이 재로 화해버렸다.

무, 무엇을 원하시오?

러셀런트는 사색이 된 길드 마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데이몬이 변장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 말해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 알카리스의 얼굴 말이다.

이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길드 마스터는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알카리스가 아르카디아 최강 제국의 황태자라 할 지라도 이런 변방의 길드마스터까지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알카리스가 정신지체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탓에 크로센 제국에서는 기를 쓰고 비밀을 숨길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알카리스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가?

길드 마스터의 대답을 듣자 러셀런트는 머뭇거림 없이 손을 내저었다.

콰콰쾅.

도둑 길드의 근거지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물론 길드 마스터를 비롯해 살아남은 생존자를 깡그리 집어삼킨 채 말이다. 러셀런트로서는 자신의 얼굴을 본 인간을 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억을 지우는 방법이 있었지만 러셀런트는 구태여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도둑 길드의 근거지를 몇 군데 초토화시킨 끝에 러셀런트는 마침내 종이의 얼굴을 보았다는 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교역도시 로르베인의 길드 마스터가 데이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알고 있습니다. 이 자는 몇 년 전 이곳으로 보석을 팔러 왔던 자입니다.

눈앞에서 길드원 대다수가 떼죽음을 당한 터라 길드 마스터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깡그리 털어놓았다. 종이에 그려진 것과 동일한 용모를 가진 자가 오래 전에 보석을 팔러왔다가 로메인 남작의 마수에 걸려 남색 노예로 팔려갔다는 사실.

물론 들어온 자와 팔려간 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지만 길드 마스터는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것도 로메인 보석상의 지배인인 안토니가 로르베인의 도둑 길드원이었기 때문에 어렵사리 얻을 수 있었던 정보였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을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길드 마스터는 목숨을 부지하진 못했다.

그런가 고맙군.

냉랭한 음성과 함께 로르베인의 도둑 길드 근거지도 여지없이 불타올랐다. 불운한 길드 마스터의 목숨과 함께 말이다.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 러셀런트는 즉시 로메인 남작을 찾아갔다. 놈이 어디로 팔려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로메인 남작을 보자마자 그가 상당한 고위급 저주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말았으니…….

러셀런트는 팔려간 자가 자신이 찾던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긴. 9서클의 마스터가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 테니…….

혼잣말을 하며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청년을 보자 젠가르트는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옷차림과 외모는 나무랄 데 없어 보였지만 하는 짓은 정신병자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질문에는 관심도 없었고 혼잣말을 해대며 자신을 샅샅이 관찰하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지 않았으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결국 젠가르트는 탁자 위의 벨을 눌러 버렸다. 경비병들을 불러 버릇없는 청년을 쫓아내려는 심산에서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완전무장한 십여 명의 경비병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데이몬을 체포했던 바로 그 경비병들이었다. 젠가르트의 눈짓을 받자 경비병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러셀런트에게 다가갔다. 험악한 으름장과 함께 말이다.

순순히 꺼지지 않는다면 단단히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러셀런트의 시선이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눈빛이 싸늘히 식어 가는 것을 보니 단단히 살심을 품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것은 자존심 강한 드래곤으로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후후후. 벌레 같은 인간들이 감히?

러셀런트는 서서히 손을 들어올렸다. 혈관이 훤히 비쳐 보일 정도로 희디흰 손가락에는 마나가 충만히 맺혀 있었다. 그는 허공에다 대고 손을 일자로 그었다.

촤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명도 없었다. 간단한 손짓 한 번에 병사들의 몸은 순식간에 두 조각으로 나뉘어버렸다. 잘린 허리춤에서 핏줄기가 맹렬히 솟으며 병사들의 상체 부분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아직까지도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병사들의 나동그라진 얼굴에는 공포와 놀라움이 역력히 배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젠가르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 아니 이런…….

대경실색한 채 몸을 벌떡 일으키던 젠가르트. 하지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미 러셀런트의 정신계 마법이 그의 골수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젠가르트의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는 것을 보며 러셀런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넌 나의 종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모조리 나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인간이라도 드래곤의 정신계 마법에는 당해낼 수 없다. 수련을 쌓은 기사들도 저항할 수 없는 판국인데 평범한 노인인 젠가르트가 버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의 의식은 어느덧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놈이 현재 세바인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유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게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밀려드는 잔챙이들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프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흠.

알아낼 것을 어느 정도 알아낸 러셀런트는 손을 가져다 턱에다 괴었다. 사실 젠가르트는 데이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진 못했다. 그저 세바인에서 은둔하며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 밖에……. 하지만 러셀런트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쨌든 상관없다. 종적이 드러난 이상 놈은 이제 죽은목숨이니까…….

나지막이 지껄인 러셀런트는 고개를 돌려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끌어올렸는지 그의 손가락은 마나가 모여들어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그어버리면 젠가르트도 병사들처럼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손을 움직이려던 러셀런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아니야. 만에 하나 놈이 달아날 가능성을 생각해서 이 녀석을 당분간은 살려둬야겠군.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만이니 말이야.

자신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젠가르트를 바라보며 러셀런트는 손가락의 마나를 흩어 버렸다. 놈을 잡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종적을 찾을 수 있는 한 가닥 실마리를 열어둬야만 했다. 그것이 젠가르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리미티드 리멤버런스 실(Limited rememberance seal, 제한적 기억봉인)

마법이 전개되자 안 그래도 흐리멍텅하던 젠가르트의 눈빛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이제 넌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살아가면 된다. 물론 내가 다시 방문하기 전까지 한정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조용히 중얼거린 러셀런트는 몸을 돌렸다. 병사들의 시체와 거기에서 흘러나온 피가 방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들을 괜히 죽였나? 놈이 정신을 차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할 수 없지.

손을 한 번 휘젓자 병사들의 시체가 마치 녹아 없어지듯 바닥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쓰쓰쓰.

심지어 흥건한 핏물마저 분해되듯 사라지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러셀런트는 유유히 방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데이몬이 이미 세바인을 떠났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젠가르트가 제정신을 차린 것은 러셀런트가 없어지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상하군. 왜 이렇게 머리가 무겁지?

고개를 가로젓던 젠가르트는 놀랍게도 조금 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새로운 동료들을 얻게 된 데이몬은 한동안 조용히(?) 여행을 해 나갔다.

아무래도 율리아나와 미첼은 데이몬을 무시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마치 소 닭 보듯, 거의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다프네와 꼭 닮은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던지 하등 상관없었다.

지금도 그는 율리아나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몸이 달아있는 쪽은 용병들이었다.

말 타시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까?

훤히 보이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녀석은 패터슨이란 이름의 용병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수작으로 보였고 체면 상 우두머리인 카심이 나설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가 총대를 맨 것 같았다. 율리아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데이몬이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뭐 괜찮네. 왕년에 말을 많이 타 보았지.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마법사들은 보통 말을 타지 못하던데…….

살다보면 나 같은 별종 마법사도 있는 법이지.

율리아나를 실컷 쳐다본 데이몬이 패터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실력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새로 동료가 된 녀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런데 자네들은 꽤나 별난 용병단이로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데이몬은 흔들리는 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용병들의 면면을 슬쩍 훑어본 뒤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의 실력도 제법이고……. 저 애송이들 둘 빼고 나머지도 제법 용병밥을 먹은 듯 보이는데 생각 외로 인원이 너무 적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 그것 말이죠?

패터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제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자신들이 원래는 제법 규모가 큰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대장 카심이 독립하겠다는 뜻을 밝힌 후 흔쾌히 따라나섰다는 사실이 데이몬에게 간략하게 설명되었다.

하인리히와 제럴드는 독립하고 난 뒤 용병으로 받아들인 녀석들이지요. 지금은 자신 몫들을 해내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입니다.

패터슨의 말에 데이몬은 제법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단하군. 용병단에 남아있었다면 능히 호의호식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대장을 따라나섰다는 사실이…….

저희들이 원래 의리가 좀 있지요. 게다가 녀석들 모두는

패터슨은 용병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에게 적어도 한 번씩 목숨 빛을 진 녀석들이지요. 저도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고요.

그랬군. 그래서 대장을 따라 훌훌 털고 나섰던 게로군.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의리 하나로 뭉친 녀석들이라 생각하니 그리 밉지는 않았다. 전체적인 전력이 정말 형편없더라도 말이다.

데이몬이 관심을 보이자 패터슨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정도로 강한 듀라한을 만들어내시다니…….

패터슨의 시선이 슬쩍 미첼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가 미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리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데이몬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저 애송이가 팔라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듀라한으로 팔라딘을 이기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가 아는 상식으론 금시초문입니다.

뭐. 세상을 살다보면 예외라는 것이 있지.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일부러 미첼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용병이라도 실력차이는 엄연히 있기 마련이지. 이를테면 자네들 대장과 저 아이들 둘 중 하나가 붙는다고 가정해보게. 그렇다면 어떤 결과가 나겠는가?

패터슨은 슬쩍 미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백 번을 싸운다 해도 대장님이 이길 테지요. 뭐.

마찬가지일세. 실력이야 어쨌든 둘은 다 용병임에는 틀림이 없지? 비록 듀라한이 팔라딘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겠나? 많이 싸워본 노련한 듀라한과 갓 출도한 애송이 팔라딘과의 싸움. 어떤가? 결과가 충분히 상상되지 않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미첼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의 행동에는 미첼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생각대로 미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습이었다. 자신을 애송이라 단정하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만약 상대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흑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폭발해버렸을 것이다.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는 미첼의 시선을 데이몬은 느긋하게 받아넘겼다.

'건방진 녀석.'

사실 데이몬은 미첼에게 상당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기분이 몹시 상해 있는 상태였으므로 언제고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둥이가 뛴다고 꼴뚜기도 따라 뛰는 격이군.'

사실 율리아나가 자신을 냉대하는 것은 그런 대로 참아 줄만 했다. 말 그대로 예뻐서 봐주는 것이다. 겉모습이 다프네와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 만은 한계에 달한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미첼은 달랐다. 어디 한 구석 예쁜 구석도 없는 데다 특히 출세 지향적인 성격이 데이몬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더라도 눈꼴 시린 판국인데 율리아나를 따라 자신을 무시하고 있으니 당연히 고울 리가 없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슬쩍 꼬투리를 잡아 미첼을 단단히 혼내줄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발점을 패터슨이 열어주고 있었으니 데이몬으로썬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마법사님. 목소리를 조금 낮추시는 것이…….

미첼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던 패터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데이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넨 내가 왜 세바인에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했는지 아나?

그, 글쎄요.

내가 가장 못마땅한 점은 바로 이것이네. 왜 마법사가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 따위에게 약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말일세.

그, 그건.

일순 말문이 막힌 패터슨이 떠듬거렸다. 물론 전장에서 정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마법사였고 패터슨도 지금까지 여러 번 마법사의 위력을 체험한 바가 있었다.

비록 용병단에 소속된, 3, 4서클 남짓한 수준 낮은 수련 마법사들의 것이었지만 그 위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전투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법사와 기사간의 싸움이라면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대마법 갑옷을 걸친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에게 마법사는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다.

마법사가 마법을 전개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반면 기사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빠르게 다가가서 검만 휘두르면 되었고 그 속도는 숙련도가 높을수록 빨라진다.

그렇다면 마법사는 주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목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상대가 대마법 갑옷을 걸쳤다면 승산이 아예 없다고 판단해도 무방했다. 그 사실은 고금을 통한 진리로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패터슨은 흑마법사가 난데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물론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라면 여간해서는 소드 마스터에게 당하지 않는 법이야.

캐스팅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데다 7서클의 공격 마법이라면 어지간히 강한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네. 하지만 언제 7서클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겠나? 때문에 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해 왔다네…….

그것을 위해 이곳의 팔라딘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도 여럿 수집했고.

그래서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바짝 다가선 패터슨의 눈망울에는 짙은 호기심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굳이 패터슨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 전부가 데이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율리아나와 미첼까지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데이몬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모두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데이몬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방법은 단 한 가지네. 마법사도 기사만큼이나 체력을 단련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야. 생각해 보게. 기사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마법을 전개한다면 마법사가 기사를 당해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데이몬의 대답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연구한 줄 알았던 터라 실망감도 컸다. 패터슨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마법사에겐 정신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이며 마법을 전개할 수가 있습니까?

멍청하기는……. 노력여하에 따라 평범한 사람도 충분히 소드 마스터가 되지 않나? 정답은 단 한 가지, 끊임없는 수련이야.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한다면 난 분명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네. 과정이 다소 힘들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용병들의 얼굴에는 그다지 수긍한다는 표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흑마법사의 심기를 가급적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엔 동감했지만 주장이 너무도 현실성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율리아나의 얼굴에는 모종의 경멸감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고개를 돌렸다.

관심을 기울인 내가 잘못이지. 저건 완전 거짓말쟁이 늙은이잖아?

미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네 말이 맞아. 저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말짱 헛소리에 불과하군.

하지만 사정상 용병들은 율리아나와 미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카심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물론 마법사님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 같습니다. 물론 검술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마법이야말로 익히기가 극히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론 몸을 움직이면 그대로 마나가 흩어져버린다는…….

데이몬은 눈을 부릅뜨고 카심을 노려보았다.

자네도 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말에 카심은 급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물론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검을 들고 마법을 펼칠 순 없는 노릇이야. 하지만 이것을 사용한다면 간단히 해결되지. 한 번 보겠나.

데이몬은 느긋한 표정으로 카심을 쳐다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를 꺼내 주섬주섬 펼치자 옅은 녹색을 띠는 건틀릿 한 켤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은 건틀릿을 집어 든 뒤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틀릿이야. 보다시피 손등 부분에 수정구슬이 달려 있어 움직이면서도 마법의 전개가 가능하지. 물론 어지간한 팔라딘 따위는 마법을 쓰지 않고도 간단하게 이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경우 이것을 쓰면 요긴하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미첼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런 애송이 정도는 이것으로도 충분해. 다시 말해 마법을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결코 남자가 아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미첼은 데이몬을 향해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허릿춤의 검 손잡이를 잔뜩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기세였다.

이크.

카심은 자연스럽게 데이몬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로 향했다. 미첼이 검을 날릴 경우 즉각 방패로 막을 수 있는 위치 말이다. 일단 용병단의 일원이 된 이상 카심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흑마법사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데이몬에게 다가온 미첼은 서슬 퍼렇게 으르렁거렸다.

늙은이.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왜?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그렇소. 솔직히 마법만 제외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당신의 늙어빠진 모가지를 간단히 비틀 수 있다는 뜻이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모욕이었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어린아이에게도 당하는 나지만 왠지 모르게 자네에겐 자신이 있군. 아! 물론 마법을 쓰지 않고 싸운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야.

미첼의 얼굴은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살기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듯 보일 정도였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소?

물론이지.

기다렸던 반응이라 데이몬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에겐 정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데이몬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팔찌 두 개를 꺼냈다.

아마 이것을 본 적이 있을거야. 보다시피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라네. 이것을 하나씩 차고 결투를 벌인다면 공평한 승부가 되지 않을까 싶네. 어떤가? 나와 싸워볼 용의가 있나? 자네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나 역시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말일세.

미첼은 두 말도 하지 않고 팔찌를 낚아챘다.

그로서는 지금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상대가 얼마나 사악하고 얄미운 흑마법사였던가?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마법사와의 결투를 미첼이 마다할 이유란 없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었던지 미첼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거듭 확인했다.

당신은 분명히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소. 그 약속이 분명히 지켜지리라 믿겠소.

물론.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어차피 팔찌를 찬다면 같은 입장이야. 자네는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없고 나 또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말일세.

말을 마친 데이몬은 하나 남은 팔찌를 찼다. 싸우기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펑퍼짐한 로브를 벗어버린 데이몬은 꺼내 든 건틀릿을 손에 착용했다. 내심 웃음이 나왔다.

'크크크. 녀석 이 건틀릿이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고…….'

그에겐 미첼이 영락없이 호랑이 코털을 건드리려는 하룻강아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맨몸으로의 결투라면 데이몬은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우선 그에겐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체술이 있었다. 게다가 세바인에서 보낸 5년 동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해서 몸을 단련시켰다.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지 못한다면 미첼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가? 물론 9서클의 대마법사인 데이몬에게 이까짓 팔찌가 제약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팔찌가 마나의 응집을 방해할 수 있는 힘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팔찌가 제약할 수 있는 마법은 기껏해야 6서클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마법을 사용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원래부터 무인 출신이었기 때문에도 그런 점도 있었지만 그에겐 단단히 믿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건틀릿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놈이 설령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더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 건틀릿은 능히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으니까…….'

지금 데이몬이 차고 있는 건틀릿은 스승 도일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싸움으로 많이 망가진 터라 건틀릿을 곱게 싸서 깊이 간직해 둔 데이몬이었다. 스승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함부로 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신 그는 인크레시아 속에서 건틀릿을 대체할 수 있는 무기를 찾았다.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무수한 마법병기와 아티팩트 속에는 분명 적합한 물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데이몬의 예상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헬버트론이 한 벌의 마법 갑옷에 포함된 건틀릿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강도를 가진 버너디움 재질의 건틀릿을 말이다. 원래 이것은 일체형의 갑주 한 벌에 포함된 것이었다. 환상의 갑옷이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의 수집품 중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아티팩트의 일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갑옷을 만들겠다며 크라누스가 수많은 드워프들을 동원해 무려 60년의 세월동안 만들어낸 아티팩트가 바로 환상의 갑옷이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가 미스릴로 되어 있는 말 그대로 가치를 논할 수조차 없는 보물이었다. 표면에는 크라누스가 직접 그려 넣은 대마법 방어진이 상감(문양을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재료를 채워 넣는 기법)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건틀릿을 비롯해 힘이 작용하는 부분은 어김없이 버너디움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금속 중에서 최강의 강도와 경도를 자랑하는 버너디움으로 말이다.

정말 멋지군.

갑옷을 발견한 헬버트론은 그것을 차지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다. 데스 나이트에게조차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갑옷은 훌륭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헬버트론은 갑옷을 착용하지 못했다. 상감 기법으로 대마법 방어진을 채워 넣은 재료가 다름 아닌 오르하리콘이었던 것이다. 신성력을 보유한 금속인 오르하리콘이 포함된 갑옷을 데스 나이트가 걸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갑옷의 재질인 미스릴도 언데드와는 그리 친하지 않은 재질이었다. 그들이 워낙 강력한 데스 나이트였기에 미스릴의 속성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지간한 언데드가 미스릴과 접촉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파사(破邪)의 속성이 훨씬 강한 오르하리콘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착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타깝군.

헬버트론은 무척 아쉬워했다. 심지어 흑마법사인 데이몬조차도 역시 오르하리콘과는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갑옷이 쓸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몬의 부탁을 받자 그는 환영의 갑옷에서 건틀릿 부분을 골라 데이몬에게 가져다주었다.

버너디움을 씌운 건틀릿은 유일하게 오르하리콘이 들어가지 않은 부위였다. 데이몬이 건틀릿을 얻게 된 배경은 대충 이러했다.

좋군.

원래 사용하던 건틀릿과 형태가 조금 틀렸지만 데이몬은 새로 얻은 무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단 무리 없이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끌렸던 것이다.

그럼 한 바탕 몸을 풀어볼까?

채비를 갖춘 데이몬은 느긋하게 미첼을 향해 몸을 돌렸다.

미첼은 검을 뽑아든 채 상대가 준비를 마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첼의 옆으로 율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미첼을 독려했다.

이 참에 저 나쁜 놈을 사정 봐 줄 것 없이 무조건 죽여버려. 알겠지. 미첼?

미첼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율리아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살려두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놈으로 인해 얼마나 골탕을 먹었던가? 미첼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결투로 인해 도리어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카심이었다. 그는 무척 걱정스런 눈빛으로 데이몬을 주시했다.

'미치겠군. 어쩌자고 저런 엉뚱한 결투약속을…….'

물론 상대의 마법실력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힘간의 격투였다. 어떤 면을 보더라도 흑마법사가 불리했다. 일단 노인 대 청년의 싸움이었고 거기에다 장검과 무기라고 볼 수도 없는 스파이크드 건틀릿과의 대결인 것이다. 아니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마법사와 검사의 격투는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검사는 충분히 강하지만 마법사에겐 마법이 보유한 힘의 전부였다.

그 때문에 카심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어렵사리 합류시킨 마법사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카심은 데이몬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카심을 안심시킨 데이몬은 미첼을 쳐다보았다.

준비되었나?

모두 끝났소. 어서 덤비시오.

자세를 취한 미첼을 향해 데이몬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

율리아나는 무척 걱정스런 눈빛으로 미첼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듯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미첼의 얼굴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평소 준수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절정기의 시퍼런 멍 자국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눈두덩이 마치 터질 듯 부풀어올라 있는 데다 아예 찐빵이 되어버린 코와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계속 배어 나오고 있었다. 특히 오른쪽 볼에 깊이 새겨진 네 줄기의 상흔은 평생 가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엉망이 된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낡긴 했지만 나름대로 손질을 잘 해서 입고 있던 플레이트 메일은 아예 걸레가 되어 있었다. 온통 찌그러지고 패여서 성한 곳이 한 구석도 없을 정도였다.

오크 보병 백 마리에게 한 시간동안 집단린치를 당하고 난 뒤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할까?

정신차려. 미첼. 제발…….

율리아나는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미첼을 간호했다. 평소 미첼을 사갈처럼 싫어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변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율리아나에게 자기편은 오로지 미첼 밖에 없었다. 그러니 율리아나로써는 미첼의 몸 상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흐흐흐.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던 미첼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한 눈에 보아도 극도의 자괴감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듀라한에게 패할 때도 이렇게 까지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필승을 자신했던, 그것도 마법을 쓰지 않은 마법사에게까지 패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익힌 검술에 대해 회의감까지 치밀어 오르게 하고 있었다.

결국 미첼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반드시 크로센 제국의 기사가 되고 말겠다는 호기는 거듭되는 시련으로 인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울지 마. 미첼. 놈은 비열한 악당이야. 분명히 마법을 써서 널 이긴 것이 틀림없어.

율리아나가 거듭 위로를 해 왔지만 애당초 미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검을 섞어본 탓에 미첼은 자신이 마법에 의해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미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마법을 쓰지 않은 마법사에게 패했다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병사에게 패한 것보다도 더한 수모라고 생각했기에 미첼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흐흐흑. 아버지……. 왜 제게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나요.

이제 미첼은 자신에게 검술을 전수해 준 아버지 헤일즈를 원망하고 있었다. 너 정도의 실력이면 어지간한 왕국의 근위기사와도 무리 없이 검을 섞을 수 있을 것이란 아버지의 격려. 이제 미첼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듀라한에게, 아니 범인보다 못한 체력조건을 가진 마법사와의 격투에서까지 패한 때문에 자신감이 완전히 꺾여버린 상태였다. 율리아나가 흐느끼는 미첼을 열심히 위로했지만 애당초 허사였다. 마치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사람처럼 미첼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내가 너무했나?'

미첼과 율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멋지게 애송이를 혼내준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저렇게 퍼질러 펑펑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다소 계면쩍기도 했다. 그때 데이몬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용병대장 카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 경악, 회의 같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깃들어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심은 조심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맨몸으로 팔라딘을 이기시다니…….

내 익히 말하지 않았나? 오러 블레이드만 아니면 팔라딘을 전혀 겁낼 필요가 없다고…….

그래도…….

카심의 심사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데이몬의 승리를 전혀 점치지 않았다.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제외한다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의 체력은 평범한 병사에게조차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므로…….

하지만 상황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접전이 벌어지는 한 시간 동안 데이몬은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미첼을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마법을 사용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순수한 체술로만 전개되었으므로……. 결투 과정을 되새겨보던 카심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헤이스트를 펼치지도 않았어. 그리고 실드 또한 마찬가지야. 내 경험에 미루어보면 저 흑마법사는 순수한 체술로써 녀석을 이긴 것이 틀림없어.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위력적인 체술로 말이야.'

데이몬의 몸놀림은 카심을 감탄하게 만들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것은 검사와 많이 싸워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력적인 체술이었다. 그렇다고 상대했던 미첼이 결코 약했던 것이 아니었다.

정교한 동작과 매서운 공격, 적절한 회피동작은 보고 있던 카심에게도 절로 탄성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으니까…….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첼의 기술은 카심조차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보여주는 체술은 단연 한수 위라고 평할 수 있었다. 격투에서 그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자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맹수와도 같은 감각으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던 흑마법사. 압도적으로 짧은 무기를 가지고도 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격전 내내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스파이크드 건틀릿의 짧은 칼날로 검을 살짝 막은 뒤 마치 미끄러지듯 검신을 타고 올라가 손을 공격하는 기술도 놀라웠고 몸을 살짝살짝 돌려 탄력을 최대한 가미한 공격 역시 탄성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지는 절묘한 킥(kick, 발차기)은 보고 있던 카심의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다리 오금이나 복숭아 뼈 부분에 킥이 작렬하면 미첼은 예외 없이 중심을 잃고 심하게 비틀거려야 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카심은 자신도 모르게 미첼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대결이 정상적인 싸움이었다면 미첼은 열 번 죽어도 모자랐어.'

마법사와 기사와의 검술대결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격투. 물론 어느 한 쪽의 압도적인 우세일 것이라는 예상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승자와 패자가 서로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순수한 검술대결에서 기사를, 그것도 팔라딘 급 기사를 한시간 가까이 가지고 놀며 농락한 마법사. 그것도 여러 차례 봐 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데이몬을 쳐다보는 용병들의 눈망울엔 경의의 빛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마법사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머쓱해진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출발하지 않을 건가?

둘 간의 격투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므로 카심은 생각을 접고 조심스럽게 미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만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첼을 안고 있던 율리아나가 매서운 눈빛으로 카심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세상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다니……. 저자가 대관절 사람인가요?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애궂은 카심에게 화풀이를 시도하려는 율리아나였다.

하지만 이미 율리아나에 대해 겪을 대로 겪어보았던 카심이었다. 이어지는 카심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제가 보기에 싸움은 기사가 먼저 건 것 같은데요. 뭐 마법사께서 잘못하신 것이 있습니까? 마법사도 분명한 남자입니다. 남자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수가 없지요. 아 참! 여자 분이라서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선 잘 모르시겠군요.

이, 이…….

분을 참지 못해 입술을 파르르 떠는 율리아나. 카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서둘러 다음 도시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산중에서 노숙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미 쌍방 간의 감정은 격해질 대로 격해진 상태였다. 미첼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다는 율리아나와 고용주 신분이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카심의 언쟁을 들으며 용병들은 천천히 노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보았던 고용주 중에서 가장 별난 고용주였다.

데이몬은 느물느물 웃으며 율리아나와 미첼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오늘 밤 둘이 무슨 일이 벌일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던 상태였다.

'재미있겠군. 저것들이 과연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결국 일행은 그곳에서 밤을 지샐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했던 데이몬과 미첼의 결투, 거기에 이어진 율리아나의 고집까지 겹쳐 결국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노숙하기로 결정되자 용병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노숙에 익숙할 대로 익숙했던 용병단원들인 만큼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식사 준비를 한다. 패터슨은 한 명을 데리고 나무를 해 와라.

그리고 나머지 둘은 근처에서 토끼나 노루 같은 것을 사냥해 오도록…….

카심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서둘러 맡은 위치로 이동했다. 물론 데이몬에게는 어떠한 지시도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귀빈이었던 것이다.

캬! 일행들이 있다는 것이 이래서 좋군.

데이몬은 느긋하게 나뭇등걸에 몸을 묻고 물병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용병들은 거기에 한 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놀라운 실력 때문에 그들은 이미 데이몬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잠시 용병들이 움직이는 양을 둘러보던 카심이 조심스럽게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그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마법사님께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데이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심은 모종의 기대로 눈을 빛냈다.

아까 말씀하시던 와중에 팔라딘의 마나연공법을 몇 개 수집하신 것이 있다고 하신 것 같은데…….

눈치 빠른 데이몬은 카심의 내심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흠! 자네 의도는 혹시 내가 마나연공법이 적힌 종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것인가?

그, 그렇습니다.

카심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속셈을 들킨 것이 여간 쑥스럽지 않았지만 카심의 정신은 온통 데이몬의 대답에 쏠려 있었다. 자존심을 무릅쓸 만큼 마나연공법에 대한 매력은 컸다. 하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대답에 카심은 억지로 실망감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연구를 마친 뒤 깡그리 태워버렸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네.

그, 그렇습니까?

카심은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그는 쓸만한 마나연공법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연성하기 위해서는 마나연공법이 필수였고 그것을 얻는다면 강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나를 다스리는 경지에 올라 팔라딘의 대열에 끼는 것. 이것은 전 아르카디아의 용병들이 꿈에라도 이루길 바라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는 용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때문에 카심으로서는 데이몬이 흘린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나연공법이란 크로센 대제로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체내의 마나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크로센 대제가 양 대륙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기사들에게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길을 폭넓게 열어놓았다는 것이었고 그의 방식대로 수련한다면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가 이전보다 훨씬 용이했다.

그 때문에 마나연공법은 각 왕국에서 최고의 기밀사항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을 외부로 유출하는 행위는 반역에 버금갈 정도의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기사들에게만 전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반 용병들이 마나연공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가히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로센 대제가 남긴 마나연공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일단 가장 비밀에 쌓인 첫 번째 방법은 오직 크로센의 기사단에만 전수되는 마나연공법이었다. 세 가지 마나연공법 중에서 가장 위력적인 방법으로 지금까지 크로센 제국 밖으로 유출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것을 익히게 되면 거의 십중팔구 팔라딘이 될 수 있다고 알려졌으며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도 현격히 높았다. 말 그대로 완벽에 가까운 마나연공법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철저히 일대 일로 전수되었으며 심지어 크로센 기사단원이라 할지라도 충성심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전수 받을 수 없다. 다른 두 가지 마나 연공법이 무수한 변천과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만은 원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크로센 기사단 독문의 마나연공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크로센 대제가 동맹국의 기사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것으로 첫 번째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지만 나름대로 강력한 위력을 가진 마나연공법이었다.

크로센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왕국에서는 이것을 근위기사에게 전수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연공법은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고 많은 아류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부의 강국인 펜슬럿의 경우에는 발전을 거듭한 나머지 크로센 제국의 것에 비해 그리 많이 뒤떨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자랑했다. 물론 애초의 것보다 위력이 현저히 줄어든 것도 없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 방법 역시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연공법을 보유한 왕국에서는 국력을 기울여 연공법이 유출되는 것을 막았고 그 탓에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기도 했다.

세 번째의 것은 그래도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일반 병사들 중에서 마나에 자질이 있는 자를 찾기 위해 크로센 대제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범용 연공법으로써 가장 폭넓게 보급되어 있을 뿐더러 많이 알려져 있었다. 중소 왕국의 기사단에서 채택하고 있는 연공법으로 웬만한 기사학부에서는 이것을 이용해서 수련생을 단련시킨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용병들은 대부분 이것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사례였다.

하지만 세 번째 방법은 앞의 두 가지와는 달리 일정 수준에 오르기가 극히 어려웠다.

특별히 자질이 있는 자가 아니면 경지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 때문에 강해지기를 바라는 자는 기를 쓰고 상승의 마나연공법을 구하려 했다.

심지어 목이 잘리는 것을 감수하며 크로센이나 펜슬럿의 궁정에 침입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상승의 마나연공법은 각 왕국에서 그만큼이나 기밀사항이었고 철저히 비밀을 지켰던 것이다. 때문에 카심이 데이몬의 말에 솔깃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긴……. 마나연공법을 그리 쉽게 얻을 순 없겠지. 아마도 흑마법사가 구한 것은 십중팔구 세 번째 방법일 것이야.'

낙심한 카심은 몸을 돌렸다. 식사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생각난 카심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들 둘은 데이몬이 보고싶지 않다는 이유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밉더라도 밥은 먹여야 했기 때문에 카심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카심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아니?

낙심한 채 울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미첼은 이제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 마나연공을 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정말 기이한 자세를 취한 채 말이다. 다리를 꼬아 양 발바닥이 하늘을 보게 앉은 뒤 양손을 떠받들고 있는 포즈로 미첼은 마나연공을 몰두해 있었다. 카심이 다가가자 율리아나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앞을 막아섰다.

다가가지 말아요. 그는 지금 중요한 수련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결코 몸을 건드려서는 안 되요.

카심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아니 율리아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카심은 마나연공 중인 기사의 몸은 어떠한 경우에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미첼의 일거수일투족에 극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뒤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군. 그의 아버지가 펜슬럿의 근위기사이셨다니 이제 이해가 되는군. 저것이 바로 소문이 자자한 펜슬럿 기사단 독문의 마나연공법이로군.

몸을 감싸고 있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호흡을 거듭함에 따라 서서히 미첼의 코와 입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카심은 미첼의 마나연공법이 쉽사리 볼 수 없는 상승의 연공법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카심의 얼굴에 몹시 부럽다는 빛이 떠올랐다. 미첼이 부러워 견딜 수 없었지만 그는 그저 겉으로만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결코 자신에게 전수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제기랄. 아비 잘 만난 덕에 쉽사리 팔라딘이 될 수 있었던 녀석이로군.

기사단에서 탈퇴를 할 경우 기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익힌 마나연공법에 대해 철저히 함구해야 했다. 그것은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해야 하는 서약이었다.

만약 허락 받지 못한 자에게 전수를 할 경우 대상자는 즉시 기사로서의 자격이 박탈됨과 동시에 추살령이 떨어진다. 그 때문에 많은 기사들이 사직을 함에도 불구하고 마나연공법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예외규정이 있었다. 이것은 오로지 펜슬럿의 기사들에게만 적용되는 항목으로서 예기치 못한 일로 사직을 할 경우 대상 기사는 이례적으로 아들 한 명에게만은 마나연공법의 전수가 허락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수받은 기사의 아들인 경우에는 펜슬럿의 팔라딘 자격심사에 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런 이유로 미첼이 만약 펜슬럿으로 간다면 상당한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약정된 시험을 통과하면 바로 팔라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미첼의 아버지 헤일즈는 이미 펜슬럿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아들 미첼에게 어떤 경우에도 펜슬럿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첼 역시 자신이 전수받은 마나연공법에 대해 함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설령 목숨이 위태롭다 하더라도 비밀만은 지켜야 했다. 만에 하나 비밀이 퍼져나갈 경우 가문의 명예가 하루아침에 바닥에 추락할 수 있었으므로…….

어느덧 대부분의 용병들이 다가와서 미첼이 마나연공법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부럽다는 빛이 역력했다.

저것이 바로 펜슬럿 고유의 마나연공법이래. 저것만 익힌다면 무리 없이 팔라딘이 될 수 있다는구먼.

캬! 정말 좋겠다.

데이몬도 어느덧 그 대열에 끼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다른 용병들과는 달랐다. 그는 미첼이 하고 있는 연공법에서 마나가 움직이는 경로를 특히 주의해서 보았다. 관찰을 통해 어떤 유파의 내공심법(마나연공법)인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내려졌다.

'틀림없군. 저것은 전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이야. 정기신 일체를 목적으로 대자연의 기를 칠공으로 빨아들이는 속가 계열의 내공심법. 많이 변형되긴 했지만 불문(佛門)이나 도문(道門)과는 운기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 이로써 크로센 대제가 정파의 인물이란 것은 한층 더 확실해졌군.'

카심의 혼잣말로 인해 데이몬은 마나연공법(내공심법)이 아르카디아에 퍼진 유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미첼의 마나연공법은 제법 정묘하긴 했지만 절정의 심법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구대문파의 것보다 위력 면에서 조금 떨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중견 방파의 독문심법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속가 계열이니까 비룡궁이나 신검문, 철혈문 정도의 문파에서 유래될 법한 심법이로군. 도대체 크로센 대제의 출신 문파가 어디일까?'

물론 연공법이 펜슬럿에 전래된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크로센 대제의 독문심법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단순히 동맹국 기사들을 위해 제공한 것인 만큼 대제의 독문심법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도대체 크로센 대제가 어디 계열의 내공을 익혔을까? 위력이 상당히 강맹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도가(道家) 계열은 아닌 것 같고……. 십중팔구 불가(佛家)의 내공이겠군. 속가의 내공은 그리 강력한 기운을 풍기지 않으니 말이야.'

물론 위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마도의 내공이다. 속성 자체가 패도(覇道)를 띠고 있는 만큼 그 어떤 정파의 내공도 마도의 것보다 파괴력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센 대제가 마도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데이몬은 어렵지 않게 그의 무공이 불문의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었다. 절정에 오르기가 다소 힘든 편이었지만 마도의 내공심법은 일정 수준까지는 정파의 내공심법보다 성취도 빠르고 익히기도 쉬운 편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통용되기는 마공이 월등히 유리해. 일정 경지까지 오르는 속도에서는 정파의 내공심법과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야.'

그 사실을 상기한 데이몬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부럽다는 듯 연신 미첼을 쳐다보는 용병들의 눈초리를 뒤로 한 채.

미첼의 연공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후우욱.

길게 한숨을 내쉰 미첼은 눈을 번쩍 떴다. 몸을 감돌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모조리 코와 입을 통해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전신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으며 온 몸이 기로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미첼은 그때서야 마음이 다소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미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모든 용병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선망의 빛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절로 우쭐해졌지만 그는 억지로 얼굴빛을 고쳤다.

뭐 구경거리가 생겼소?

퉁명스럽게 내뱉은 미첼은 몸을 일으켜 율리아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카심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걸었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생각 없소. 저 작자와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으니…….

미첼의 말에 율리아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먹지 않겠어요.

결국 카심은 용병들을 데리고 데이몬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속으로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한없이 투덜거리며 말이다.

밥이다.

차려진 음식을 보자 데이몬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용병들이 준비한 음식이라 변변찮은 것은 없었지만 한바탕 격투를 벌인 뒤라서 입맛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는 데이몬을 보고 하인리히가 마른 고기를 넣어 끓인 수프를 한 그릇 더 퍼 주었다.

고맙다.

사양하지 않고 그릇을 받은 데이몬은 하인리히에게 싱긋 웃어준 뒤 마저 뱃속에 그러넣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럴드가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가져다 줄 심산 같았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안 먹겠다는데 굳이 가져다 줄 필요 있나?

난처한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제럴드는 그릇을 들고 둘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절름발이라서 그런지 수프를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안쓰러웠다. 보고 있던 카심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녀석.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소리에 정신 없이 수프를 들이키던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린가?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카심의 얼굴에는 무척 착잡한 빛이 서려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럴드는 십중팔구 미첼이란 녀석에게 마나연공법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쓸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얘기지만 제럴드는 지금 강해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이거든요.

무슨 사연이 있나?

말하자면 깁니다.

카심의 말에 의하자면 제럴드는 무척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하던 제럴드였지만 몇 개월을 같이 지내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되고 어느 날 카심에게 신세내력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제럴드는 악덕 상인 때문에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이 난 경우였다. 제럴드는 그것 때문에 용병이 될 마음을 먹었고 강해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소규모 용병단에서 강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은 북서쪽의 부유한 상업왕국 테제로스 출신입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제법 단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제럴드에게 보기 드문 미색을 가진 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 누이에게 호색가로 유명한 테제로스의 악덕 상인인 프록터가 눈독을 들였다는 것인데…….

제럴드 누이의 미색에 반한 나머지 프록터란 녀석은 공개적으로 혼담을 넣었다고 했다. 그 때 제럴드의 누이는 꽃다운 나이인 방년 19세였고 프록터는 마흔 다섯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벌써 다섯 명의 처를 갈아치운 전력을 가지고 있던 프록터는 몰염치하게도 제럴드의 누이를 여섯 번째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제럴드의 부모는 두 말도 하지 않고 혼담을 거절했다. 돈이나 권력에 환장한 집안이 아니고서야 프록터같은 호색가에게 딸을 줄 이유가 없었다.

제럴드 집안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프록터는 말 그대로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가며 제럴드 집안을 괴롭혔지요. 그의 입김으로 소작도 짓지 못하고 집마저 경매에 넘어가게 되어 빚이 산더미처럼 쌓였지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 처했어도 제럴드의 아버지는 딸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은 제럴드의 누이였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 부모와 동생을 잘 살게 하겠다는 욕심에 그녀는 결국 제 발로 프록터를 찾아갔다.

하지만 제럴드 가의 불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으니……. 프록터에게 시집갔던 누이는 1년도 되기 전에 미친 상태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변태성욕자인 프록터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국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 그 충격에 몸져누운 제럴드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만 술독에 빠진 폐인이 되어버렸다.

미쳐버린 누이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으니……. 그 모습을 보고 프록터에게 복수심을 품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당시 열 다섯이던 제럴드는 칼을 품고 프록터의 저택에 잠입해 들어갔다. 프록터를 죽여 누이와 어머니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중무장한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었다. 결국 제럴드는 말 그대로 죽을 만큼 두들겨 맞고 테제로스 수비대의 손에 넘겨졌다. 제럴드는 그 때 맞은 매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된 것이다.

살인미수죄가 비록 중죄이긴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제럴드는 다행히 2년만 복역하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제럴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집과 아버지의 쓸쓸한 무덤뿐이었으니……. 결국 제럴드는 힘을 길러 복수를 꾀할 생각에 용병단을 찾았고 마침내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제럴드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참 별 나쁜 놈도 많군. 테제로스 국왕은 대체 왜 그런 녀석을 살려두는 거지?

원래 법이란 것이 힘을 가진 자의 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놈은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더군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니 그에게도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숨기고 싶은 사연이 있는 법이다.

대신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다가간 제럴드는 뭔가를 계속 간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첼이 연신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니 일이 뜻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무릎까지 꿇어가며 애걸했지만 미첼의 고개는 끝내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심은 혀를 찼다.

쯔쯔. 어지간하면 가르쳐줄 법도 하건만…….

그의 눈에는 힘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제럴드가 한없이 애처롭게만 보였다. 물론 힘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프록터에게 합법적인 복수를 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거듭되는 거절에 제럴드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몸을 돌린 제럴드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기회를 보아 저 녀석에게 배교의 내공심법을 전수해 줘야겠군.'

사실 그에겐 이곳의 어떤 마나연공법보다 강력하다 할 수 있는 내공심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라사령심법이었다. 수호마왕군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준환이 수십 명의 무공교두들을 시켜 완성시킨 속성이 가능한 내공심법. 내공을 모으는 속도는 지금까지 존재한 어떠한 내공심법보다도 탁월했다.

게다가 좀처럼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 안정성까지 겸비한 때문에 역사는 짧지만 수라사령심법은 중원의 어떠한 내공심법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했다. 이미 수호마왕군의 활약에 의해 위력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던가? 물론 수라사령심법 역시 절정까지의 연성이 힘들다는 마공 계열의 단점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아르카디아에서는 하등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절정까지 오르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명성을 날릴 수 있었으니까…….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상황을 봐서 나머지 녀석들에게 전수해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야 형편없지만 마음씀씀이 하나는 괜찮은 녀석들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마나연공법이 수라사령심법일 수도 있겠군.'

수라사령심법은 효과가 탁월한 내공심법임에는 분명했지만 몇 가지 제약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연성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탓에 수라사령심법은 배교 무사들에게 폭넓게 보급되지 못했다. 사파 고수들은 보통 여러 가지 무공이나 내공을 섭렵한 상태로 문파에 투신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라사령심법의 진정한 효과는 지금껏 수호마왕군 무사들밖에 보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용병들이 지금껏 내공을 쌓았을 리는 없을 터. 이들에게 수라사령심법을 전수해 준다면 틀림없이 단시일내에 내가고수로 탈바꿈할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말하는 팔라딘 말이다.

터덜터덜 걸어와 힘없이 주저앉는 제럴드를 보며 데이몬에겐 또다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무공 중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제럴드에게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무공이었고 데이몬이 만일을 대비해 익힌 유일한 검법이었다.

'그렇지. 녀석이 왼손잡이이니 수라사령심법과 더불어 좌수검법을 전수한다면 무척 훌륭하겠군. 이곳 녀석들은 좀처럼 왼손을 사용하지 않으니 예상외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어.'

좌수검법(左手劍法). 왼손을 쓰는 아주 변칙적인 검법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한 각도에서 검이 날아오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검법이었다. 특히 기습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 검법을 익힌 검객들은 일부러 오른 손을 놔두고 왼손을 사용했다.

때문에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인 제럴드에겐 극히 적합한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을 상대할 경우를 대비해 익혀는 놓았지만 데이몬은 지금까지 이 검법을 단 한번도 펼친 적이 없었다. 물론 검로나 검형(劍形) 자체는 모조리 익혀 놓았지만 말이다. 이처럼 데이몬은 뜻하지 않게 생긴 동료들에게 강력한 내공심법과 무공을 전수할 욕심에 부풀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르카디아을 주름잡고 있는 정파 내공심법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록 지금은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는 원래 막강한 마공을 구사하는 사파고수였고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를 쌓아온 중원의 사파 무공 역시 위력 면에선 정파 무공에 추호도 손색이 없었으니…….

'좋아. 결심했어. 정파 무공이 판을 치는 아르카디아에 배교의 정통 마공을 전수하겠다. 크로센 대제가 성공했으니 나라고 못할 리가 없다. 우선 이들을 뿌리 삼아 아르카디아에 기필코 마공의 뿌리를 내리고야 말것이다.'

데이몬의 굳건한 결심 속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날이 밝자 뜻밖의 사단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일행의 식량을 깡그리 털어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불침번을 서던 하인리히와 패터슨을 꽁꽁 묶어놓고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