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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시오

트루베니아의 천년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시기였던지라 그만 거기에 꼬박 몰입해버린 것이다. 창 밖을 보고 시간을 가늠한 슈렉하이머는 독고성에게 빙긋 미소를 보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내일 들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은 저도 몰랐군요.

난 괜찮소. 그러니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시오.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병자입니다. 안정이 필요할 터 오늘은 푹 숙면을 취하십시오. 당신을 이리로 초빙한 이유는 아마도 내일 정도면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지금 당장 듣고 싶소.

애석하게도 독고성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슈렉하이머가 시전하던 통역마법이 그 효력을 다 해버린 것이다. 의사소통이 차단된 이상 독고성으로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조바심이 날 정도로 이곳 트루베니아의 역사가 흥미진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 별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푹 쉬도록 하십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뜻이 전해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던 독고성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독고성을 힐끗 쳐다본 슈렉하이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아직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아있었다.

다음날 아침. 독고성은 어제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독고성을 본 슈렉하이머는 빙긋 웃으며 통역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제 인간계에 닥친 두 번째 대 참사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바로 어제 제가 설명 드린 상황. 인간의 힘이 극도로 약해진 상황 말입니다. 훗날 사가(史家)들에게 블러디 문(bloody moon)의 대 참사로 기록된 어둠의 전쟁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암흑 군단의 침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암흑군단이라니요?

마계의 언데드 군단입니다. 그들의 침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제와는 달리 독고성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가 계속 거론되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인 그에게 언데드란 그저 강시 따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강시 따위가 오크 군단보다 오히려 인간계를 더욱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다니.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슈렉하이머의 말을 경청하리란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이 대륙의 상황을 가장 잘 전달해 줄 인물인 것이다.

암흑군단은 죽음을 관장하는 마계의 마왕 나이델하르크에 의해 힘을 부여받았지요.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네크로멘서의 몸에 화신하여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네크로멘서?

소환술사를 칭하는 말이지요. 주로 고위급 흑마법사들이 소환술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따르자면 그 나이델하르크란 마왕이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어둠의 힘을 대대적으로 결집해 이 트루베니아 대륙을 자신의 휘하에 넣으려 했다고 한다. 이미 종족 전쟁과 종교 분규로 말미암아 많은 힘을 상실한 인간계는 그 때문에 또 한번의 힘겨운 싸움을 겪어야 했다.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트루베니아는 인구의 반을 잃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어둠의 마왕 나이델하르크와의 전투. 그것은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인구 반을 쓸어버릴 정도로 처절했다. 때는 공교롭게도 인간들의 힘이 가장 약할 시기였고 각 왕국의 방어군은 너무도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나이델하르크가 불러들인 마계의 마물들과 언데드 군단은 허약해진 인간의 군대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며 그야말로 거침없는 진군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유서 깊은 왕국의 수도들이 하루아침에 불바다로 변하고 시민들은 곳곳에서 학살당했다. 바야흐로 트루베니아 역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쳐 버린 것이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트루베니아 대륙의 모든 왕국들이 마침내 하나로 뭉쳤다.

크로센 대제가 떠나간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연합군이 다시 결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운명을 건 대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나이델하르크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들의 서약석을 손에 넣으려 했습니다.

반대로 저희들은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보호하려 애썼지요. 수많은 공방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영웅과 용사들이 피를 뿌렸고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병사들이 전쟁터의 이슬로 스러져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결집된 인간의 힘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처음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으니까요. 결국 마왕 나이델하르크는 조바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위력을 보일 수 있는 배경은 바로 서약석이란 사실을 나이델하르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이델하르크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어둠의 군대를 총 집결시켰다. 그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언데드 군대를 모은 다음, 그는 서약석이 보관된 이카롯트 왕국으로 향했다. 서약석을 탈취해서 인간들의 사기를 꺾어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당시 연합군 역시 서약석을 수호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카롯트 평원에서 양 군대는 인간의 운명을 놓고 역사적인 한 판 승부를 벌였지요. 그 공방전에서 인간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희생이 헛되지 않았던지 결국 저희들은 마침내 마왕 나이델하르크를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으로 말미암은 것도 있지요.

당연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전과. 그러나 슈렉하이머의 미간에 침중한 기색이 감도는 것을 독고성은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그 승리의 배경에는 뭔가 속사정이 있는 듯 하구려.

정곡이 찔린 듯 슈렉하이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방인인 독고성에겐 왠지 숨기고 싶은 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베르하젤 교단의 교세가 꺾인 것이 바로 그 전쟁 때문이었다. 언데드 군대는 자신들의 병력을 공급하기 위해 점령한 지역의 인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학살했다. 심지어 젖먹이 어린아이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 유해들은 고스란히 스켈레톤과 좀비 병사가 되어 검을 들고 언데드 군대에 가세했다.

정말 눈뜨고는 쳐다볼 수 없는 참사가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암흑군단과의 처절한 전투에서도 주신 베르하젤은 인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신관들이 밤을 세워가며 구원해 줄 것을 빌었지만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둠의 군대를 물리친 원동력은 오히려 수많은 인간들의 희생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이름 모를 영웅들과 병사들이 전장에서 장렬히 산화해가며 어둠의 군대를 몰아내는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결국 슈렉하이머는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만약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의 인간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잡한 배에 몸을 싣고 아르카디아 대륙으로 떠난 크로센 대제 일행. 그 누구도 개척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선원들에 의하면 그곳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흉포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개척을 훌륭히 성공시켰다. 쉴새없이 공격해오는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곳의 기후는 작물을 가꾸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고 했다. 일조량도 충분하고 강수량도 넉넉했기 때문에 개척 국가는 빠른 시일 내에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비보가 전해졌으니... 멸망한 왕국의 한 군주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트루베니아의 사정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트루베니아는 지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무수히 학살당하고 있으니 제발...

그 말을 들은 크로센 대제는 두말도 하지 않고 기사단을 소집했다. 오크와의 전투에서 신화를 이루었던 바로 그 기사단이었다. 모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자 신대륙을 개척 중이던 병사들 역시 대대적으로 지원군으로 자원했다. 비록 자신들을 버리기는 했지만 모국의 멸망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삽시간에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모였다. 크로센 대제는 개척 도시를 지킬 수 있는 극소수의 경비대만을 남겨둔 채 군대를 진두지휘해서 배에 올랐다. 그들이 이곳으로 타고 온 바로 그 배를 타고 말이다.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원군은 이렇게 트루베니아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때는 바야흐로 트루베니아 대륙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시기였다. 바로 최후의 결전이라 할 수 있는 이카롯트 공방전이 벌어지려는 시기.

아르카디아 지원군은 오랜 항해로 지친 심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이카롯트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르카디아 지원군의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약 10만으로 추정되는 아르카디아 지원군 중 살아 남은 자가 반을 넘지 못할 정도로 희생은 컸지요. 대부분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크로세나의 기사단도 절반이나 전장에 묻혔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이카롯트 공방전은 인간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자신들을 험하디 험한 신대륙으로 쫓아낸 원한을 아르카디아의 병사들은 도리어 목숨을 다 바친 은혜로 풀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지원병에 모든 휘하세력을 잃고 패주할 수밖에 없었던 나이델하르크.

그는 이를 갈며 험준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들었다고 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 말을 남긴 채,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의문스럽게 실종되었다. 그리고 대륙에 닥쳤던 두 번째 위기도 이렇게 극복되었다. 그들이 축출한 한 존재에 의해 말이다.

하지만 트루베니아 대륙의 군주들은 그 누구도 그 지원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크로센 대제를 중상모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결국 거기에 진저리를 친 것은 크로센 대제 본인이었다.

정말 뼈 속까지 썩은 자들이로군. 내 두 번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크로센 대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무런 미련 없이 배를 다시 준비시켰다. 이런 추악한 권력투쟁이 없는 새로운 조국 아르카디아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기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아르카디아의 지원군은 약 오백여 척의 배에 십만에 조금 못 미치는 병사가 타고 왔습니다. 그들 중 생존자는 채 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르카디아로 돌아가는 선단은 어느새 일천 이백여 척에 육박해 있었지요. 배를 타고 가는 인원만 해도 물경 이십 만이 넘었습니다.

허!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이미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크로센 대제의 신념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할까요.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각 국 군주들과 베르하젤 교단의 횡포가 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말해 뜻 있는 자들이 대거 신대륙 아르카디아로 건너간 것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베르하젤 교단의 고위급 성직자이면서도 슈렉하이머는 그들 교단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사실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크로센 대제는 새로운 추종자들을 데리고 다시 아르카디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참전 여부는 알게 모르게 금기상황이 되어 버렸지요. 바로 각 국 군주들의 소행입니다. 그들에게 크로센 대제라는 존재는 이미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지요.

아무리 쉬쉬하려 했지만 지원군과 함께 싸웠던 병사들 모두의 입을 막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트루베니아 대륙을 다시 한 번 구한 크로센 대제의 무용담은 발 없는 말을 타고 또다시 트루베니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는 이번 승리가 오로지 인간들의 투혼과 아르카디아의 지원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는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대륙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어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주신 따위는 필요 없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더욱이 아르카디아 대륙으로 건너간 개척자들이 훌륭히 국가를 세우고 신대륙을 개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 이후로는 크로센 대제의 신념은 공개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베르하젤 교단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간섭할 수 없었다.

30년 전과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 베르하젤 교단의 교세는 점점 쇠퇴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신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하구려.

독고성은 그 크로센이란 자에게 실로 호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슈렉하이머의 말대로라면 그는 능히 영웅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중원의 인물로 짐작되는 자가 아닌가?

암흑전쟁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벌어졌다면 그 크로센이란 자도 꽤나 나이를 먹었겠구려.

그렇습니다. 그 때에도 백발이 성성하셨으니 아마 지금쯤은 더 늙으셨을지도...

불연 듯 상념에 빠져드는 슈렉하이머를 쳐다 보다 독고성은 미간을 슬며시 모았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날 데리고 온 연유에 대해 말하지 않았소.

슈렉하이머는 만면에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제 이야기는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계에 진정한 위기라 할 수 있는 세 번째 참사는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서약석 탈취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몸을 은폐한 채 인간들에게 더 이상 소중할 수 없는 보물이 드래곤들에게 탈취당하는 그때의 상황을 독고성에게 낱낱이 설명한 뒤, 슈렉하이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그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에겐 정말 한스러웠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은 지금 세 번째 위기를 한창 치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크 족과 연합한 드래곤들과의 사투입니다. 오크와 드래곤. 그 둘만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서약석마저 탈취당했으니 가히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 수 있지요.

일이 벌어진 것은 서약석을 탈취당한 후 정확히 십 년 후였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호언대로 트루베니아 대륙은 또다시 전화의 불구덩이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했다. 암흑군단과의 전쟁을 통한 상흔이 채 치유되기도 전에 벌어진 전쟁. 그 시발점은 펠루시아 산맥과 가장 인접한 왕국 칸두라스에서부터 제일 처음 시작되었다.

슈렉하이머는 기억을 저장하는 마법석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독고성의 뇌리로 직접 전해주었다. 절박한 상황을 직접 체험하도록 배려해서 그의 조력을 얻으려는 마음에서였다.

때는 어스름이 깔릴 즈음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달빛 속에 거대한 성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쳐졌다. 달빛은 성벽을 밝게 비추다못해 성벽 뒤에 포진된 병사들의 경직된 얼굴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사방은 온통 쾨쾨한 적막감에 휩싸인 상태. 그러나 달빛 아래 비친 성의 모습은 지금의 상황이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모든 장면이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독고성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병사들의 두런대는 대화소리까지 독고성에게 전달되었다.

야밤에 벌어지는 전투. 모든 병사들이 잠을 잊은 듯 분주하게 오가며 사방을 경계했다. 곳곳에 세워진 횃불로 인해 성안은 온통 불야성을 이룬 상태였으며 성벽의 망루 위에는 지휘부로 보이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성 밖 어둠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준비는?

수성전(守成戰)을 치를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궁수대와 포대는?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투석기와 투석구 역시 준비완료입니다.

음!

호화찬란한 복장을 갖춘 무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가 그다지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중장갑주를 물샐 틈도 없을 정도로 갖춰 입은 모습이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노장군은 힘겨워하는 기색 없이 꼿꼿하게 서서 성 내부의 방비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성성한 백발이 인상적인 무장이었다. 옆에는 로브를 걸친 노 마법사가 하나 서 있었고 신관 복장을 한 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 중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격이 과연 언제 시작될까요?

글쎄요? 오크 놈들이 비록 밤눈이 밝긴 하지만 이처럼 야밤에 전투를 벌이는 일은 거의 없는데...

노장군은 눈매를 가늘게 모으며 성벽 저편의 어둠을 쳐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터라 성벽 저쪽은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노장군은 허리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불끈 움켜쥐었다.

그의 이름은 이라무스 폰 루드비히입니다.

슈렉하이머에 의해 무장의 이름이 독고성의 뇌리로 전해져왔다. 그는 칸두라스 왕국의 기사들 중 유일하게 오크 군대와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있는 무장이기도 했다. 그런 때문에 자신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가 이번에 왕명으로 불려왔고 이렇게 웨스트 가드 성의 방어군 사령관을 맡게 된 것이다. 칸두라스 왕국은 인구에 비해 군사력이 상당히 막강한 왕국이다. 불모지라 할 수 있는 펠루시아 산맥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펠루시아 산맥은 오크 족 잔당들이 대거 숨어있는 장소. 오크 잔당들은 복수를 위한 일념 하에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도발을 해 왔고 그 주된 대상이 바로 칸두라스 왕국이었다.

때문에 칸두라스 왕국의 국민들은 항상 전쟁 준비에 몰두해 있어야 했고 지금껏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크에 의해 성이 함락되거나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선 수많은 전투를 통해 칸두라스 왕국의 병사들은 하나 하나가 일당백의 용사라고 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뒤에 위치한 다른 왕국에서 칸두라스 왕국에 대한 지원을 전혀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병참 문제도 전혀 걱정될 것이 없었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사실을 각 왕국의 군주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휘하 병사가 희생되는 대신 칸두라스 왕국에 전쟁을 수행할 자금을 대어주는 쪽을 택했고 때문에 칸두라스 왕국은 총 삼십만에 못 미치는 인구를 가지고도 십 오만에 달하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기형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대리 전쟁을 치러주고 대가를 받는 용병국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칸두라스 왕국도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라무스 장군은 어제 칸두라스 왕궁을 발칵 뒤집어놓은 패전 소식을 떠올렸다.

도대체 두 성이 어떻게 함락되었을까? 그것도 이틀 동안에...

밀튼과 하르멜 성. 이 두 성은 펠루시아 산맥과 가장 접경지에 있는 성으로써 칸두라스 왕국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었다. 왕국에서도 고르고 고른 용사들만 배치되는 성으로 지금껏 수도 없는 오크 족의 도발을 막아온 전례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락되지 않는다고 칸두라스 국왕이 장담한 성이었고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오크 족이 패전해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든 다음 인간들은 당연히 그 접경지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왕국들의 역량이 총집결되었다. 성이란 본시 인간이 만든 최강의 방어막. 제대로 축조되어 있다면 성은 족히 세 배에 달하는 병력차이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때문에 수성전(守成戰)은 오크와의 전투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었고 또한 오랜 종족전쟁을 통해 인간들의 축성기술은 비약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밀튼 하르멜 그리고 지금 이라무스 후작이 지키고 있는 하트모스, 이 세 성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당시 최고의 축성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성을 축조했으며 각 왕국의 궁성 마법사들이 성벽에다 각종 보호마법을 걸어놓아 어지간한 투석기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는 성들.

이렇게 모든 왕국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축성된 성이었기에 지금껏 수도 없이 행해진 오크들의 도발을 세 성은 아무런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오십 년 동안 성을 공격하다 죽어간 오크의 원혼이 끊임없이 떠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철옹성의 전설은 단 이틀 사이에 허물어져버렸다. 처음 오크들의 대군이 밤을 틈타 침공했다는 첩보가 날아왔을 때, 칸두라스 왕국의 각료들은 자신만만했었다.

머리 나쁜 오크 놈들이 또 죽으러 오는 군.

내년엔 풍년이 들겠구려. 오크 놈들의 시체가 땅을 비옥하게 할 테니 말이오.

침공한 오크의 수가 다소 많긴 했지만 지금껏 수도 없이 있어왔던 일이라 각료들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공격을 막아온 세 성의 신화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너무도 허무하게 빗나가 버렸다. 개전 단 하루만에 밀튼 성이 함락되었고 패전을 알리는 전령이 채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르멜 성이 떨어졌다.

뜻밖의 패전에 칸두라스 왕국은 발칵 뒤집혀버렸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조사할 시간은 없었다. 우선 물밀 듯 밀려오는 오크의 대군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칸두라스 왕국의 군주 베젤리우스 3세는 부랴부라 이라무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칸두라스 왕국의 무장들 중 오크 족과의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한 이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라무스 후작이 이렇게 하트모스 성의 방어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놈들이 어떤 방법을 썼기에...

당시 축성과정을 감독했었기에 이라무스 장군은 두 성의 방비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두 성이 떨어진 과정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옆에는 오랫동안 그를 모셔왔던 부관이 서서 곤혹스럽다는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항상 자신만만했던 이라무스 후작이었기에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그는 억지로 이라무스 후작을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작님. 놈들은 고작 미개한 오크 족일 뿐입니다. 이처럼 튼튼한 성을 방어막 삼아 싸우는 이상 놈들은 우리 칸두라스 왕국의 땅을 한 치도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노장군은 시선을 돌려 부관을 힐끗 쳐다보았다. 문득 자조하는 듯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흘러가듯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이미 놈들의 손에 넘어간 밀튼과 하르멜 역시 이곳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방비가 잘 된 성이었다. 그런데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으니 속단할 순 없어.

부관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든 놈들의 침공을 여기서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칸두라스 왕국을 비롯해 모든 왕국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의 서약석을 되찾아와야만 한다.'

이라무스 후작은 뒤에 이어진 말만은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일반 병사들이 알게 된다면 파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인간의 서약석이 탈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출정하기 전 살며시 부른 칸두라스 왕의 입에서 말이다. 사실을 알게 된 이라무스 후작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쉿, 이 사실은 결코 병사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되오. 사실이 밝혀진다면 오십 년 전 오크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병사들의 사기 역시 극도로 저하될 것이오. 그러니 경은 어떻게 해서든 이 사실을 병사들에게 숨기고 놈들의 선진을 막아주기 바라오.

아, 알겠습니다.

출정하기 전 국왕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이라무스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진 않겠어.

오십 년 전 종족전쟁 당시 그는 십대 후반의 젊은 수련기사였다. 당시 이름난 기사의 휘하에서 전쟁을 치렀기에 그는 오크 족이 얼마나 전투에 능한 종족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시 저들의 서약석을 빼앗지 않았다면 펠루시아 산맥 서쪽으로 밀려나는 것은 인간임이 분명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걱정은 무척 컸다.

그때 후작의 귀에 찢어지는 듯한 경고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온다!

상념을 지운 후작은 성벽 가까이 붙어 성벽 너머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원 나온 마법사와 신관들도 그의 뒤에 붙어 곧이어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후작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기랄. 엄청나군.

어둠 속을 물밀 듯 밀고 오는 오크의 군대는 일견해보더라도 엄청난 규모였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라무스 후작도 도저히 규모를 예상할 수 없을 만큼의 대군.

그러나 그는 추호도 겁을 먹진 않았다. 성을 함락시키는데 병력의 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우선적으로 적들의 공성 장비를 살폈다. 어둠 속을 훑어본 그의 얼굴에 다소 기뻐하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불행 중 다행이군. 놈들에게 투석기가 보이지 않으니…….

언뜻 살펴본 결과 몰려오는 놈들은 대부분 특유의 경 장갑을 걸친 오크 보병들이었다.

병력의 양옆으로 다수의 울프 라이더 부대가 보이긴 했지만 이라무스 후작은 거기엔 하등 관심도 갖지 않았다. 늑대에 올라타서 기동성을 살린 울프 라이더가 분명 위협적인 존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넓은 평원에서나 유용할 뿐 공성전에는 하등 쓸모 없는 존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병력의 후미에 위치한 오우거들을 주시했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것들이 오히려 수성전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라무스 후작이었다.

놈들이 성문을 공격한다면 곤란해.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인 오우거. 과거에는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육상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냥감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오우거를 잡아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수한 기사들이 오우거에게 잡혀 죽었지만 반대로 사냥 당한 오우거도 많았다.

때문에 펠루시아 산맥 이쪽에서는 이제 거의 오우거를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크 군단 내부에 그런 오우거 무리가 보이다니……. 이라무스 후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리에게 앙심을 품은 나머지 오크와 동맹을 맺었나보군.

동작이 다소 느리긴 했지만 오우거들의 가죽은 무척 질기다. 화살 공격으로 모두 처치하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 놈들의 공격에 의해 성문이 부서질 우려가 있었다.

어쨋거나 힘 하나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즉각 부관에게 대응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놈들이 돌격해 올 경우 궁수대는 오우거들만 골라서 집중사격을 퍼붓도록 하라. 또한 투석기들 중 상당수를 추려서 오로지 오우거들만 노리도록 시켜라.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전투를 치러왔기에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칸두라스 병사들이었다. 하트모스 수비군은 후작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싸울 태세를 갖추어갔다.

석궁수들 제 자리로!

부대장들의 명령에 따라 전통을 둘러맨 석궁수들이 성벽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가죽으로 보강된 커다란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석궁의 시위를 먹였다.

그들 뒤로 투석기와 발리스타가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커다란 돌덩이와 쇠뇌를 오크 부대에 퍼부을 채비를 마치고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하트모스 수비군은 숨을 죽이고 오크 군단이 사정거리에 들 때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응?

이라무스 후작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번져갔다. 당장이라도 성벽을 들이받을 듯 돌격해 오던 오크 군단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선 것이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전략이었기 때문에 수비군 병사들도 무척 의아해했다.

저것들이?

왜지?

통상적으로 성을 공격해오는 오크 병사들은 먼 거리에서부터 달려와서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달려오는 탄력을 이용해 성벽에 구름사다리를 대고 일제히 성벽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변변한 공성 장비가 없는 오크에게 유일한 공성법이었다. 간혹 가다 급조한 투석기로 성안에 포격을 퍼붓긴 했지만 워낙 명중률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멈춰선 오크 무리를 쳐다보던 이라무스 후작의 얼굴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멈춰선 오크 병사들이 구름사다리를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의 일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로써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공성전에 나선 오크들이 구름사다리를 휴대하지 않다니…….

그 때 그의 뒤에서 경악성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것은?

고개를 돌려보자 사색이 된 마법사의 얼굴이 들어왔다.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후작의 물음에도 마법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지 경직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궁금해진 후작이 재차 질문을 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마법사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후작에게 돌렸다.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즉시 모든 병력을 성밖으로 대피시켜야 합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후작은 멍해졌다.

당신 제 정신이오? 이 상황에서 성밖으로 나가라니…….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여기서 떼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법사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릉.

그 뒤를 비명과도 같은 마법사의 절규가 뒤따랐다.

메테오 스톰(Meteors storm), 아니 이것은 메테오 스웜(Meteors swarm)으로 봐야겠군요. 누군가가 하트모스 성을 대상으로 이 공포의 마법을 전개했습니다. 당장 병사들을 대피시키십시오. 곧 있으면 이 하트모스 성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법사의 경고는 한 발 늦어버렸다. 메테오 스웜에 의한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불붙은 돌덩이들이 하트모스 성을 표적으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운석에 적중된 병사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하트모스 성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살려 줘. 으아악.

크악.

이만 명의 병사들이 운집해 있던 하트모스 성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온갖 보호마법이 전개되어 있던 성벽도 운석의 공격에는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쿠르르릉.

어이없이 허물어지는 성벽, 떼죽음을 당하는 병사들. 그 모습을 보던 이라무스 후작은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눈 꼬리에선 어느새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 드래곤들이었군. 이 이놈들을…….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정통으로 내려꽂힌 운석 하나에 그만 직격해 버린 것이다.

늙은 노장의 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부관만이 겨우 노장의 최후를 목격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한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었다.

모두들 성을 버리고 탈출하라. 그리고 후퇴하라.

이미 병사들은 살길을 찾아 높디높은 성벽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버린 하트모스 성을 쳐다보던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아비규환의 참상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응시하고 있는 자는 창백한 안색을 한 청년이었다. 타는 듯 붉은 머리칼을 한 그는 불바다가 되어버린 하트모스 성을 한 동안 응시하다 돌연 툴툴거리며 웃었다.

과연 힘들긴 하군. 메테오 스웜을 사흘 연속으로 시전한다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아.

그의 말에 옆에 도열해 있던 오크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불타고 있는 하트모스 성이 도대체 어떤 성인가? 축성술에 일가견이 있는 인간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던가? 아니 하트모스 성은 차지하고라도 그들은 지금껏 밀튼이나 하르멜 성조차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오십 년의 세월동안 무수한 공성전을 치러왔지만 성벽 단 한 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그들이 단 이틀만에 두 성을 함락시키고 지금 이렇게 하트모스 성마저 붕괴시킬 수 있다니……. 적어도 오크들에게 이 상황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의 옆에 서 있는 위대한 존재 드래곤. 그 때문이었다. 베르키스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오크 지휘관들에게 냉소를 쳤다.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부하들을 풀어 살아남은 잔당들을 토벌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오크 지휘관들은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군 출정이다. 인간들을 정벌한다.

라이더 부대는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후미를 차단하라.

쿠르르르.

명령이 떨어지자 도열해 있던 오크 보병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인간들로 인해 오랫동안 척박한 펠루시아 산맥에 숨어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막상 복수의 기회를 잡게 되자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와아! 쳐부수자.

크르륵. 인간 놈들을 죽여라.

평지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다는 오크 보병단이 맹렬히 돌진을 시작했다. 빠른 기동성을 살린 라이더 군단이 선두에 선 채 말이다. 그들의 뒤로 흙먼지가 질펀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헉.

간신히 성을 빠져 나온 생존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정신 없이 탈출하던 상황이라 제대로 무장을 갖춘 자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들은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 울프 라이더가 퇴로를 차단해가고 있는 상태. 인간 병사들의 얼굴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법석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독고성의 안색은 어느새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세 번째 전쟁에서의 첫 패전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절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숱한 전투경험을 가진 독고성에게도 이번 위기는 인간들이 쉽사리 극복할 수 없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마법이라 불리는 엄청난 술법을 너무나도 쉽사리 전개하던 드래곤이란 존재가 그에겐 가장 충격이었다. 무림인이었던 그에게 이 트루베니아란 대륙은 정말로 의문 자체였다.

정말 가공하구려. 무수한 수를 자랑하는 오크. 그리고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드래곤이란 존재. 그들은 족히 상호보완할 수 있는 존재들이오. 서로의 단점을 충분히 메워줄 수 있는 상생의 관계란 뜻이지.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이미 대륙의 반 이상이 저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남은 왕국들이 힘을 한데 끌어 모으긴 했지만 이미 역부족입니다.

독고성의 뇌리에 문득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아르카디아 대륙에 조력을 청하지 않았소? 당신에게 들은 바로 크로센 대공이라는 자는 충분히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갑자기 분노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각 왕국 군주들에게 발하는 순수한 분노였다.

하지만 아무리 치졸하다고 해도 그들은 어김없는 자신의 군주. 이방인인 독고성 앞에서 그들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각 왕국 군주들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크로센 대제의 그림자가 다시 이곳에 드리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제가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지원을 요청하자는 의견을 가차없이 묵살했습니다.

급기야 독고성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단순 과격한 그의 성격에 각 왕국 군주들의 보여준 치졸한 처사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크로센 대제의 말대로 정말 빌어먹을 놈들이었군.

난데없이 터져 나온 욕설에 슈렉하이머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속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해진 것은 단순히 그의 착각 때문일까? 그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독고성을 만류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을 이리로 데리고 오도록 조처하신 분들이 바로 그 군주들입니다.

그놈들이?

그렇습니다. 군주들의 고집으로 인해 우리 트루베니아는 그만 아르카디아에 지원을 요청할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세 번째 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바로 드래곤들. 특히 그들의 로드는 물을 관장하는 실버드래곤입니다. 때문에 그로써는 우리가 아르카디아에 조력을 청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기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두 대륙간의 해로는 곧 단절되었습니다.

그 말에 독고성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 그렇다면 놈들이 이곳과 아르카디아와의 사이를 막았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실버드래곤 크라누스는 다름 아닌 물을 관장하는 절대자. 그는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해저에 위치한 조류를 임의로 조정했습니다. 그 결과 양 대륙 사이에는 단 한 척의 배도 통과할 수 없는 무수한 소용돌이 군이 새로이 생겨났습니다. 아무리 큰배라도 그 소용돌이를 헤치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소용돌이와 함께 크라누스는 바다 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왜곡 마법장을 설치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공간이동을 통해서도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수 없는 실정입니다. 다시 말해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는 지금 말 그대로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실은 독고성에겐 말 그대로 경악이었다.

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려. 아무리 용(龍)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수 있다니…….

독고성의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당신 세계의 용(龍)은 우리 대륙의 드래곤과는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드래곤은 단일개체로써는 감히 당해낼 수 없는 당대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는 생명체이니까요.

그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소.

설명드리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주저하지 않고 드래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라니안의 [에스]님께 감사드립니다. 님의 말씀대로 메모장에 복사했다가 올리니 정체불명의 사각형이 없어지더군요. 거듭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투표 다들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했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 투표해 봤는데 제가 투표한 후보는 애석하게도 하나도 당선되지 않더군요.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그럼 이만…

드래곤이란 존재는 이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족히 일만 년 이상 살아갈 정도로 기나긴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고성의 입이 딱 벌어졌다.

햐! 일만 년씩이나? 무지하게 오래 사는구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은 거대한 체구에 어울릴 만큼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드래곤의 표피를 덮고 있는 거죽은 세상에 존재하는 금속들 중 가장 강도가 뛰어나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개인 보호장구로 드래곤 본이 입혀진 갑주를 가장 상등품으로 치고 있습니다.

본(bone)이라 함은 뼈를 칭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드래곤이란 생물은 거죽과 뼈가 동일한 소재로 되어있습니다. 비교적 어린 드래곤의 경우에는 거죽의 강도가 그다지 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나이를 먹은 드래곤은 피부 전체가 뼈와 같은 성분으로 변하기 때문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상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피부를 뚫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오러 블레이드라……. 혹시 검강을 말하는 것이오?

그쪽 대륙에선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오러 블레이드란 소드 마스터가 갈고 닦은 마나를 검에 불어넣어 유형의 기운으로 승화시킨 뒤, 검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닿은 물체는 설사 그 어떤 강도를 가졌더라도 여지없이 꿰뚫어버릴 수 있는 궁극의 검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검에 마나를 응축시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기술 모두를 통틀어 오러 블레이드라 칭하는 것입니다. 드래곤의 피부를 뚫을 방법은 오직 그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으음.

독고성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러 블레이드란 검기(劍氣)와 검강(劍岡) 모두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물론 몸이 성했을 당시 그는 단숨에 석 자가 넘는 강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실력자였다. 호조의 강철 손톱 열 개에 모두에 석자 길이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 그의 상태로는 검강은 물론이오 검기조차도 꿈도 꿀 수 없는 실정. 별안간 서글픈 감정이 치밀어 오른 독고성은 화제를 바꿨다.

드래곤이란 생물이 그토록이나 강한 위력을 지녔다니 정말 놀랍구려. 중원에서 물론 드래곤에 비견되는 용(龍)이란 존재가 있소이다. 하지만 우리세계에서는 단순히 오래 산 이무기를 용이라 칭하는 경우가 태반이오. 승천하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의 수련을 거친 이무기가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힌 경우가 종종 있었소.

사람들은 그것들을 바로 악룡(惡龍)이라 불렀소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악룡들은 몇 본 적이 있고 직접 사냥도 해 보았소. 하지만 진정한 용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소이다.

무릇 정말로 용이라 지칭할 수 있는 신룡(神龍)들은 어떠한 일이 인간계에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슈렉하이머가 털어놓는 사실에서 독고성은 드래곤이란 존재가 자신이 사냥한 바 있는 악룡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설사 전설 속의 신룡이라 하더라도 이곳의 드래곤보다 약할 것이다. 몬스터라 불리는 미물들이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가공할 존재마저 이곳에 존재하다니…….'

잠시 생각에 잠긴 독고성의 귀에 슈렉하이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지하더라도 정작 드래곤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 마법에 있습니다.

마법?

슈렉하이머에게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던 터라 독고성은 이제 마법이란 술법에 대해 어렴풋이 감을 잡고 있었다. 그가 익힌 사술이 대부분 눈을 속이는 미혼술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마법은 사술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술법이라 칭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술법 역시 마법이 아니었던가. 독고성은 이미 마법에 대해 깊이 호기심을 가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 드래곤이 인간만큼이나 마법을 쓸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슈렉하이머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씁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원래 마법은 드래곤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오랜 옛날 인간들과 친분을 맺은 드래곤 몇이 금기를 깨고 마법을 전수해 준 것이 이 땅에 마법사가 나타나게 된 시초였으니까요. 그러므로 마법의 원조라 하면 단연 드래곤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독고성은 어이가 없었다.

그, 그렇다면 드래곤에게 훔쳐 배운 마법으로 당신들은 차원을 넘나들을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인간들에게는 타 유사 종족과 판이하게 다른 장점이 있지요. 바로 지식의 전수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드래곤에게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는 배운 지식과 자신이 깨우친 바를 모두 집대성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그 제자들 역시 전수받은 지식을 연구 개량해서 더욱 발전시킨 뒤 다시 후대들에게 전수했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인간들의 마법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차원을 넘나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직은 우리 인간들은 드래곤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답니다. 물론 마법 면에서 말이지요.

정말 놀랍구려.

독고성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새로운 세상. 그 세상이 중원과는 전혀 판이하게 다른 역사와 환경을 가지고 있다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독고성을 보며 슈렉하이머는 안색을 굳혔다.

그럼 이제부터 당신을 이곳으로 초빙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마법석을 통해 직접 체험하시는 것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미 트루베니아 대륙의 마법사들은 인간의 기억을 마법석에 저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이 마법을 통해 독고성에게 불과 얼마 전에 벌어진 군주들의 회합을 보여주었다. 이계의 무사를 초빙해오기로 결정이 내려진 바로 그 회합 말이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명실상부한 최고 강대국을 거론하라면 사람들은 단연 이카롯트 제국을 꼽을 것이다.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또한 거기에 걸맞게 방대한 인구를 가지고 있는 트루베니아 유일의 제국. 드높은 명성답게 이카롯트 제국의 수도 펠드리안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인 데다가 주요 귀족들이 모두 여기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펠드리안의 방어시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제 1차 종족전쟁과 뒤이어 일어난 어둠의 군대와의 전쟁에서도 함락되지 않은데서 그 중요성을 익히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명성은 얼마 전 무참히도 깨어져버렸다. 그것은 얼마 전 펠드리안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탈취사건 때문이었다. 소수의 오크 특공대와 함께 잠입한 드래곤들의 손에 의해 인간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탈취 당한 사건.

물론 이 일은 일반 시민들에겐 철저하게 비밀로 붙여졌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인간의 서약석이 도난당한 일은 구전을 통해 은밀하게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었다.

쾅!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필이면 왜?

주먹을 불끈 쥐고 노성을 지르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금은으로 치장된 화려한 옷을 걸치고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관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신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젠가르트 3세.

이카롯트 제국의 17대 황제이며 인간의 운명을 건 어둠의 군대와의 대전을 앞장서서 치러냈던 인간계 제일의 권력자. 같은 군주의 신분일지라도 그의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지고한 신분을 가진 절대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 이카롯트의 황제가 이처럼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앞에 선 신하들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는 놈이 없군.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희디흰 백염 끝이 부르르 떨리는 모습은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는 마치 뇌까리듯 탄식을 했다.

도대체 왜 내가 집권하는 시기에 이렇게 일이 연이어 터지는 거지?

과거 그는 어둠의 군대에 맞서 몸소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던 용장이었다. 그런 만큼 로젠가르트 3세의 모습에서는 옛날 전장을 질타했던 혈기가 여지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했나? 비밀을 알아차린 자들을 모두 죽여 입을 막으라고 하지 않았나?

하, 하오나.

지금 막 보고를 올린 듯한 중년 신하가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비밀을 발견한 자들 중에는 베르하젤 교단의 성기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권은 황권으로도 간섭할 수 없는 법. 저희들로썬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닥쳐라.

로젠가르트 3세의 노성에 중년 신하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호통을 치기는 했지만 자신의 명령이 애당초 실행될 수 없는 명령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로젠가르트 3세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물러가도록 하라.

황제의 호통에 신하들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을 물러 나왔다. 그들이 물러나고 나서도 로젠가르트 3세는 한 동안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빌어먹을 교단 놈들.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주제에…….

그 무렵 베르하젤 교단과 황권과의 충돌은 상당히 심각한 지경이었다. 물론 오십 년 전이었다면 제 아무리 이카롯트 제국의 황제라 할 지라고 감히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군대와의 오랜 전쟁은 교권을 형편없이 약화시켰다.

베르하젤이 인간들에게 아무런 구원을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이유였다.

그와 반대로 왕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베르하젤에 실망감을 느낀 백성들이 대신 왕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군주들 중에는 과거처럼 베르하젤에 대한 철저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이 드물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둠의 군대를 막아냈다는 자부심, 그리고 백성들의 지지가 베르하젤에 대한 절대복종을 거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물론 로젠가르트 황제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서약석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서약석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로젠가르트 황제는 오십 년 전에 끝났던 종족전쟁을 떠올렸다. 모든 면에서 오크 군대에게 밀리던 암울한 시절. 성벽 하나에 의지해 겨우겨우 버텨나가던 인간 병사들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승리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의 서약석을 탈취했다는 낭보가 전해지고 나자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병사들이 용기백배해서 오크들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상황은 명백했다. 비록 교권이 형편없이 실추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베르하젤은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아직까지 정신적인 지주였다. 교권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성공한 시민들, 일반 백성이나 하급 병사들 대부분은 아직까진 독실한 베르하젤의 신자라고 봐야 했다. 그러므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서약석을 되찾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어떻게…….

로젠가르트 4세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때 조심스런 시종의 음성이 전해졌다.

황제폐하. 회합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모든 왕국의 군주들이 한 데 모여 폐하께서 들어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로젠가르트 4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인간의 운명을 지켜나가기 위해 한 데 모인 각 국 군주들과의 회견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드넓은 대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복장을 걸친 자들로써 군데군데 중년인이 끼어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나이들이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트루베니아 대륙에 산재한 각 왕국들의 군주들이었다. 각 지방을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지금껏 그들이 회합을 가진 적은 단 두 번. 오십 년 전의 종족전쟁과 십 년 전에 벌어진 암흑군단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그것 말고는 각 국 군주들이 이곳 이카롯트 제국으로 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계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시기. 각 왕국들이 보유한 병력을 한데 끌어 모아야만 새로이 준동한 오크 족에 대항할 수 있다. 인간의 존망을 결정짓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들은 다시 한 번 뜻을 모으려 하고 있었다.

이카롯트 제국의 황제이신 로젠가르트 4세께옵서 드시옵니다.

황제가 들어온다는 시종의 말이 울려 퍼지자 군주들은 다급하게 자기 자리에 착석했다. 곧이어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인과 함께 로젠가르트 4세가 대청에 들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는구려. 그래 10년만인가?

그렇사옵니다. 암흑 전쟁 이후 처음으로 뵙는군요.

이카롯트로부터 비교적 가까운 왕국 디스페니아의 군주가 공손히 예를 올려왔다.

로젠가르트 4세는 격식에 맞게 답례를 한 뒤 자리에 착석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

로젠가르트 4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앞으로 나가 챠트를 좍 펼쳤다.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인. 로젠가르트 4세가 데리고 들어온 바로 그 자였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7회

그는 이카롯트 제국의 신임 총리라는 신분을 가진 이였다. 세르게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로젠가르트 황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자로 젊은 나이에 공작에 추대된 대단히 능력 있는 인재였다.

황제를 대신해 이카롯트 제국의 국정을 무리 없이 수행해 나가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능력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챠트를 펼친 세르게이 공작은 곧 전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군주께서 이번 상황이 심히 위급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이미 칸두라스 왕국을 비롯한 10여 개 왕국들이 오크 연합군의 손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놈들의 기세는 정말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1차 종족전쟁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수성전(守成戰)은 놈들에겐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놈들은 메테오 스웜으로 성을 완파시킨 뒤 병력을 투입, 공격을 감행해 왔다고 하옵니다. 아마도 드래곤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수성전으로는 이제 더 이상 놈들의 전진을 늦출 수 없사옵니다.

설명을 들은 군주들의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블러디 문의 참사를 겪은 지 삼십 년 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런 위기가 인간계에 닥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상황을 봐서 이번 위기는 앞서의 두 번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흉험했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존재. 상상만으로도 공포감을 주는 존재인 드래곤이 이번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세르게이 공작의 설명은 계속 진행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 오크 침공군에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가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우거나 트롤을 비롯한 무수한 몬스터, 심지어는 와이번까지 대거 놈들과 합세한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군대는 지금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크 놈들에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단의 위력이 현격히 감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신장이 월등한 오우거나 트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말 탄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오크 족에게도 기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기병에 버금갈 정도로 빼어난 기동성을 가진 울프 라이더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경장갑의 울프 라이더만으로는 중장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을 감당하기란 생각하기도 힘든 법. 따라서 1차 전쟁에서 인간들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과 함께 말 탄 기사들의 역할이 톡톡했다. 그런데 그 이점이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려 하는 것이다.

경악한 군주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카르나틱 왕국의 국왕이었다.

어, 어떻게 오크 놈들이 미개한 몬스터들을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이오? 나로써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정보부의 분석으로는 아마도 드래곤들의 입김이 개입해 이루어진 일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드래곤들의 레어에는 무수한 몬스터들이 기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으로 말입니다. 거기에다 그동안 각지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 기사들의 사냥 역시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모두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사냥을 피해 무수한 몬스터들이 펠루시아 산맥 저쪽으로 도망친 바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몬스터들이 드래곤들에게 내몰려 오크 무리와 합세하게 된 것 같습니다.

군주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따지고 보면 몬스터들이 오크에게 가세하게 된 것이 그들의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들이 그토록 극도로 경계했지만 크로센 대제가 트루베니아 대륙에 남긴 영향은 정말 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사들이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을 크게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단 10년 만에 250여 명의 소드 마스터를 키워낸 신화.

그는 전 대륙에 그만의 체계적인 마나 수련 방법을 널리 알렸다. 물론 자신의 기사들에게 사사하는 수련법보다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방법이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그 방법을 얻은 기사들은 마스터가 되기 위해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왕 검을 잡은 이상 마스터가 한 번 되어봐야겠다는 야망을 품은 것이다. 크로센 대제로부터 전래된 이 수련법을 익히려는 기사들이 그야말로 줄을 이었고 성과는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로 인해 삶을 위협받게 된 것은 오우거나 트롤 같은 중형 몬스터였다.

예로부터 사냥은 가장 효과적인 수련방법이었다. 물론 드래곤 사냥이 가장 효과가 확실하긴 했지만 그것은 목숨을 내걸어도 될까말까 할 정도로 위험도가 컸기 때문에 기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간혹 가다 그런 무모한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 대신 기사들은 주 사냥감으로 중형 몬스터들을 택했다.

자신의 위명을 드높이고 또한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몬스터 사냥에 나섰고 그 때문에 트루베니아 대륙에서는 오우거나 트롤의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중형 몬스터들은 생존을 위해 인간의 손길이 아직까지 닿지 않은 곳, 펠루시아 산맥의 저편으로 대거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험준한 펠루시아 산맥 저편에는 드래곤들의 레어가 밀집해 있는 데다 충분히 그들을 숨겨줄 수 있는 울창한 삼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명예욕으로 인해 가히 중형 몬스터의 엑소더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지금 가공할 만한 위협이 되어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몬스터라도 인간에 대한 적개심만은 잊지 않았을 터. 제 생각으론 드래곤들의 압력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은 자진해서 오크 군대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세르게이는 능히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백 번 해봐도 늦은 것.

지금 상황에서는 오로지 그에 대한 대비책만을 세워야 할 때였다.

일단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모든 왕국의 힘을 한데 모아야 합니다.

그 의견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존망을 위협하는 두 번의 크나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자고로 인간들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전 왕국의 군데가 한데 모여 동맹군을 결성한다면 충분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주들은 암묵적으로 그 의견에 찬성했다.

그 때 누군가의 음성이 장내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것만으론 안됩니다. 이번 위기는 앞서 벌어진 두 번의 전쟁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급합니다. 우리 트루베니아의 힘만으론 감당하기 어렵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군주들의 시선이 일시에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소리를 지른 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르게이의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세르게이의 입에서 당혹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슈렉하이머 대승정.

나선 자는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현 교단의 임시 대승정을 맡고 있는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서약석이 탈취당할 때 베르하젤 총 교단에 기거하던 성직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당시 대승정 이피크로스가 사망한 때문에 교단의 임시 대승정직을 승계한 그는 베르하젤 교단의 대리인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고위급 성직자는 오직 그만이 유일했기 때문에…….

슈렉하이머는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자신이 나선 이유를 밝혔다.

이미 트루베니아 대륙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쇠약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드래곤들과 오크 연합군을 막아내기란 말 그대로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종족의 보물인 서약석까지 탈취당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힘을 합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층 더 시급한 자구책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로젠가르트 4세의 눈썹이 꿈틀했다. 물론 대다수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슈렉하이머의 참석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베르하젤 교단의 영광은 과거 속으로 영원히 묻혀 버린 것. 그저 격식을 갖추고자 참석시킨 것뿐인데 그가 주제넘게 나서고 있는 것이다. 곧 그의 노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 상황에서 연합군을 결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왕국들이 오로지 힘을 합치는 것만이 방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의 두 위기를 겪으면서 증명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지금 이루어지는 연합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연합이라 볼 수 없습니다. 전하들께서는 인간들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힘을 잊으셨사옵니다.

슈렉하이마는 점점 굳어지는 군주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자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우리 인간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 뿐이옵니다. 아르카디아의 크로센 대공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시옵소서.

갑자기 장내는 적막감에 잠겨 들어갔다. 크로센 대제. 각 왕국 군주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인물의 이름이 마침내 거론된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발언은 군주들의 역린(逆鱗)을 여지없이 건드려버린 상태. 화를 참지 못한 로젠가르트 4세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쾅.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봐서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슈렉하이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벌어졌던 두 번의 위기에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들은 십중팔구 단 한번의 위기도 넘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업적은 역사를 통틀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망을 결정지을 가장 시급한 위기상황에서 그를 배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분노에 차서 채 말문을 열지 못하는 로젠가르트 황제를 보면서도 슈렉하이머는 아무 거리낌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번 전쟁은 서약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치러야 합니다. 이미 이 사실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널리 소문이 나 있는 상태. 한 마디로 말해 이번 위기는 우리 트루베니아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그러니 전하! 부디 자존심을 꺾고 아르카디아로 사절을 보내십시오.

말을 마친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돌려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모든 군주들의 얼굴에는 노기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크로센 대제. 전 트루베니아 대륙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구국의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애석하게도 각 왕국 군주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미천한 용병에서부터 시작해서 전 트루베니아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대 영웅으로까지 발돋움한 입지전적인 인물.

하지만 그런 크로센 대제에게 각 군주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단지 그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인물에 불과했다. 때문에 군주들은 베르하젤 교단과 적극적으로 영합해 그를 아르카디아로 쫓아보내지 않았던가? 특히 로젠가르트 4세가 느끼는 감정은 군주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다.

'제길. 이런 상황에서까지 놈의 이름을 들어야 하나? 크로센. 과연 네놈은 트루베니아에 얼마만큼의 그림자를 드리워야 만족해하겠나?'

종족전쟁이 벌어진 50여 년 전. 로젠가르트 4세는 혈기왕성한 10대 후반의 젊은 황태자였다. 부황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던 중 그는 젊은 혈기와 친위 기사들을 믿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그만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상황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였다. 오크들의 맹공에 호위하던 친위 기사들은 쉴 새 없이 죽어 넘어졌으며 멀리 떨어진 본진에서는 도저히 그를 구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로젠가르트 4세는 삶을 거의 포기했었다. 말로만 들었던 오크 족의 맹렬한 투기(鬪氣). 그리고 시체마저도 용서하지 않는 잔인성에 용기 같은 것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실정. 만약 오크 족이 포로를 살려두었다면 그는 서슴지 않고 항복을 선언했을 것이다. 당시 그는 그만큼 겁에 질려있던 상태였다.

그 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천신(天神)처럼 나타나서 철통같은 오크 족의 포위망을 여지없이 깨트려버렸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보기만 해도 전율이 일 정도로 그의 실력은 가공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그가 거느린 기사들 역시 무적(無敵)이라 하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 그의 정체가 바로 크로센 대제였다.

트루베니아의 최강대국 이카롯트 제국. 그 황태자를 수호하는 만큼 그의 친위기사들은 물론 고르고 고른 실력자들 중에서 뽑힐 수밖에 없었다.

가히 근위 기사단과 맞먹을 정도의 정예들로만 구성된 친위기사단. 하지만 그런 정예 친위기사들도 오크 대군의 폭발적인 공세 앞에는 허무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사방에서 찔러대는 창날에 그저 우왕좌왕하다 단 10분도 못 견디고 궤멸당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반수 이상이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크로센 대제의 기사단은 달랐다. 검광이 번쩍 하는 순간 어김없이 오크 한 마리가 조각이 나버릴 정도로 기사 개개인의 무용이 뛰어나기 그지없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였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대응했다. 심지어 바로 옆의 동료가 낙마하더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그 자리를 채울 정도였다.

크로센 대제를 중심 축으로 세모꼴의 진세를 형성한 크로세나 기사단은 오크의 포위망을 단숨에 깨트린 뒤 마치 학의 날개처럼 넓게 산개해서 오크를 밀어붙였고 그 많던 오크의 대군은 단숨에 지리멸렬해서 패주를 시작했다.

세, 세상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함을 받게 되었지만 로젠가르트 4세에게는 감사를 표할 정신도 없었다. 포위망을 깨트리는 과정에서 목격한 크로세나 기사단의 질서정연한 움직임.

그들의 움직임은 차라리 예술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했다. 황태자인 그마저도 크로센 대제의 위용에 매료되었을 정도.

하지만 본진에 돌아오고 나서 그 감정은 삽시간에 반전되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큰 전과를 거둔 위용으로 크로센 대제의 이름은 병사들 사이에서 마치 신화처럼 거론되었고 반대로 무모한 행동으로 휘하 기사들을 몽땅 잃은 로젠가르트 4세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막사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크로센 대제에 대한 칭송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자에 대한 질투심은 자연히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병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풍문, 트루베니아의 모든 왕국을 통합하여 그 초대 황제로 크로센 대제를 추대하자는 소문을 우연히 들은 이후 그는 크로센 대제를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그가 크로센이란 이름에 반감을 가진 이유는 바로 이러했다.

물론 여타의 군주들 역시 대동소이한 연유로 그를 질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로젠가르트 4세의 마음 속에 박힌 적개심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늙은 부황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로젠가르트는 마침내 이카롯트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힘을 가지게 되자 그는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계획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다행히 타 왕국의 군주들 역시 알게 모르게 로젠가르트가 가진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연합전선을 결성할 수 있었다. 반 크로센 연합전선 말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크로센에게 군주 자리를 빼앗길 것이란 위기감을 그들 군주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서 크로센 대제의 폭탄 발언이 터졌다. 주신 베르하젤을 공개적으로 불신한 사건 말이다. 물론 로젠가르트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사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베르하젤 교단에 사신까지 보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사태는 마침내 수습되었다. 교단과 군주들의 압력에 크로센 대제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 대륙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비록 그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갔지만 군주들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세월이 지난다면 인구는 자연히 보충될 터. 일단 자리를 보전하게 된 것만으로도 로젠가르트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2차 위기인 어둠의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로젠가르트 4세는 여기서 또다시 크로센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야 했다. 비록 그로 인해 어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점은 그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크로센이란 존재는 그에겐 위험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군주들이 생각하는 바가 한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도대로 크로센은 다시 한 번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새로운 추종자들이 탄 배가 수평선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들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모든 군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저주받은 이름이 세 번째로 거론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트루베니아 대륙의 군주들이 크로센이란 이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상념에 빠진 로젠가르트 황제가 침묵을 지키자 대신 세르게이가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물론 크로센 대제의 업적만큼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도 이젠 늙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만큼의 위용을 과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월이 흘렀으니 그분도 힘을 잃으셨겠지요. 하지만 그분께서 키워놓은 기사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1차 종족전쟁에서도, 2차로 벌어진 어둠의 전쟁에서도 크로세나 기사단은 단연 독보적이었습니다. 이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그들만큼의 위력을 가진 기사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르카디아 대륙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서약석을 되찾아 오게 한 다음 두 대륙의 힘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야만 이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내는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물론 그 방법이 가장 합당하다는 것은 군주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크로센이 또다시 이 땅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서 결정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주저하는 배경에는 자존심 역시 일조를 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로젠가르트 4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원 요청은 없소.

…….

주류(主流)인 우리 트루베니아가 아르카디아 따위의 방계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 따윈 없다는 뜻이오. 그 문제는 사태가 위급해지면 다시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으로썬 전 왕국의 군대를 한데 모아 적의 침공을 막아내야 할 때요.

말을 마친 로젠가르트 4세는 슈렉하이머를 외면하며 군주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놈들에게 우리 군대의 힘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아르카디아 따위의 지원이 없더라도 우리 병사들은 충분히 강하오. 서약석이 없더라도 우리는 이길 수 있소.

옳습니다.

폐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암묵적으로 로젠가르트 황제와 뜻을 같이하던 군주들은 일제히 동조하고 나섰다.

그들은 아르카디아로의 지원요청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갈 것을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결의했다. 아연해하는 슈렉하이머를 비웃듯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슈렉하이머는 처연한 표정으로 독고성의 얼굴을 직시했다.

결과는 거의 모든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처참한 패전이었습니다. 특히 트란보르 평원에서 벌어진 대 접전에서 우리는 무려 10만이나 잃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결과 트루베니아 대륙의 절반 이상이 놈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당시 회합에 참여한 군주들 중 절반이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요.

'당연한 결과였겠군.'

독고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미 그는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몸소 체험해 본 상태가 아닌가? 잘난 권력을 보전하자고 무려 10만에 달하는 인명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다니……. 군주들의 처사가 그저 어이없기만 한 독고성이었다.

결국 회합은 다시 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군주들도 아르카디아로의 지원요청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지요. 결정은 내려졌고 사절단이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지원요청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루어질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양 대륙 간의 해로는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실버 드래곤 크라누스는 물을 관장하는 절대자. 그의 마법으로 인해 양 대륙은 공간이동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격리되었습니다. 군주들의 결정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말입니다. 저희로써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아르카디아 대륙과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음성에는 상황판단을 늦게 한 군주들에 대한 섭섭함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결국 군주들은 다시 모여 인간의 운명을 지켜나가기 위한 최후의 회합을 벌이게 되었다.

드넓은 홀에 자리한 군주들의 얼굴은 너나 할 것 없이 굳어있었다.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아르카디아와 연합을 했더라면 이토록 어이없는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법.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권력뿐만 아니라 경각에 처한 국민들의 운명까지도 책임져야만 했다.

비통하기 그지없는 군주들의 낯빛과는 달리 로젠가르트 4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자신의 결정에 추호도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표정.

원탁의 구석에는 슈렉하이머의 낯익은 얼굴도 보이고 있었다.

구석에 앉아 로젠가르트 황제를 쏘아보는 슈렉하이머의 얼굴에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조소가 맺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10만 병사들의 목숨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무능한 권력자에 대한 조소였다. 하지만 로젠가르트 4세는 무표정하게 슈렉하이머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려는 듯 세르게이의 청량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럼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 그의 음색은 밝기 그지없었다. 그는 펼쳐두었던 챠트를 접어 넣으며 각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미 전세는 모든 군주들께서 익히 알고 계실 터, 더 이상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르카디아 대륙에 지원을 요청하려는 일 역시 애석하게도 무위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밝혀졌습니다.

여운을 남기는 말에 흥미가 감돌았는지 군주들의 시신이 일시에 세르게이에게로 집중되었다. 세르게이는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아르카디아 대륙과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격리되었습니다. 실버 드래곤 크라누스에 의해 아무리 큰배라도 통과할 수 없도록 거대한 소용돌이가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또한 광범위한 마법왜곡장에 의해 공간이동 또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히 단절되어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도움을 청할 곳이 그곳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이 사는 대륙은 오로지 우리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뿐인데?

물론 알려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차원을 들을 수 있겠군요. 그곳에도 어김없이 사람은 살고 있습니다.

군주들의 얼굴에 뭔가 기대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느끼며 세르게이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우리가 도움을 청하려던 크로센 대제는 바로 다른 차원의 인물입니다. 그가 이곳의 인물이 아니란 것을 군주들께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이 살던 대륙에서 제일의 실력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입을 직접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 그렇다면.

세르게이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듯 군주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르게이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세운 대비책은 그가 살던 차원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그곳 제일의 실력자를 초빙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크로센 대제의 실력으로 보아 그가 살던 곳에서 가장 강한 실력자라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검술을 지니고 있을 터, 그로 하여금 오크들의 본진 깊숙이 침투시켜 서약석을 탈환해 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저희들의 희망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필경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 하지만 차원이동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금껏 성공한 사례가 전혀 없지 않소.

너무도 터무니없는 제안에 테르비아 군주가 제동을 걸어왔다. 세르게이는 빙긋이 웃으며 화답했다.

혹시 아크로폰트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군주들 중 몇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이카롯트 제국의 전대 궁정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아크로폰트 폰 네스발드. 공간 이동 마법의 명실상부한 대가이며 이카롯트 제국의 수석 마법사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의문스럽게 실종되었기에 세인의 궁금증을 자아낸 신비에 쌓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트루베니아 대륙을 통틀어도 몇 명 존재하지 않는 8써클의 경지에 오른 대 마법사였다. 하지만 세르게이가 뚱딴지같이 아크로폰트를 거론하는 의도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실종은 오랫동안 미스테리로 남겨졌습니다. 심지어 시신조차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연구실 지하에 위치한 던젼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중요한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그, 그것이 무엇이었소?

그것은 바로 차원이동에 대한 폭넓은 연구결과가 담겨있는 아크로폰트의 저서였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아크로폰트의 실종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바로 차원이동을 통해 타 차원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원이동이 성공했다는 말이오?

듣고 있던 군주들은 저마다 아연해했다. 차원이동이 성공했다는 것이 그만큼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원이동. 3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동마법보다 한 층 진보된 마법으로 이것을 사용하면 능히 4차원을 오고 갈 수 있다 했다. 하지만 차원이동은 그만큼 난이도가 높고 어렵기 그지없는 마법이었다. 지금껏 차원이동이 이루어졌다는 전례가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통상적으로 공간이동마법에는 엄청난 마나가 소모된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차원이동에는 이 공간이동보다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나가 필요하다고 알려졌다. 그 때문에 마법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대마법사들조차 차원이동이라면 우선 고개부터 절래절래 흔드는 실정이었다.

그런 차원이동이 다름 아닌 아크로폰트에 의해 성공되었다니…….

그의 논리에 의하면 차원이동은 충분히 공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적지를 지정해서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제반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충분한 마나의 공급원입니다. 아크로폰트의 저서에 의하면 다른 차원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곳으로 가는 마나의 총 필요량보다 적어도 열 배 이상이 소모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보부에서는 그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아마도 마나의 부족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수하게 존재하는 차원을, 그것도 크로센 대제가 살던 장소만을 골라 이동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지 않겠소?

세르게이는 걱정 말라는 듯이 빙긋 웃었다.

아크로폰트는 이미 그에 대한 연구마저 끝낸 상태였습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차원이동은 그 차원에 존재했던 매개물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리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지요. 이미 저희들은 암암리에 그 문제를 해결해 놓았습니다.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의 문이 열리자 군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자 속으로 집중되었다.

상자 속의 내용물은 평범했다. 반 토막으로 부러진 얄팍한 검 조각. 그리고 무척 특이하게 생긴 다 헤어진 로브. 애초에 천으로 된 신발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더러운 누더기. 대략 이런 물품들 다섯 점이 상자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려한 상자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물건들이었다.

이것은 바로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입니다. 그가 자신이 살던 차원에서 가지고 온 것이지요. 이것을 구하기 위해 저희 정보부에서 상당한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구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로 하여금 상자 뚜껑을 덮도록 명한 뒤 세르게이는 빙글 돌렸다.

이 차원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6 써클을 넘어서는 다수의 고위급 마법사와 함께 드래곤 하트가 필요합니다. 차원이동에 드는 마나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드래곤 하트밖에는 없으니까요.

말을 들은 군주들은 저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드래곤 하트. 말 그대로 드래곤의 심장으로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물질이었다. 외형상 오색 영롱한 보석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것은 감히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마법 수련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시약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도 다이아몬드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는 왕국의 군주라고 하더라도 감히 하나 이상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희귀했다. 국력이 떨어지는 중소 왕국의 군주들은 감히 구경도 못할 정도였으니…….

그러므로 각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드래곤 하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하지만 이 중 한 나라의 국왕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모든 군주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 그렇다면 가진 드래곤 하트를 모조리 내어놓으라는 말이오?

모든 군주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대상 국왕은 떠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바로 부유한 상업국가 트란벨의 국왕이었다. 광적으로 보석을 좋아하는 인물로써 그가 수집한 보석은 능히 일개 나라를 살 수 있을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부유한 트란벨에서 거두어들이는 엄청난 세금은 그런 그의 취미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드래곤 하트에 욕심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어린 드래곤을 사냥했다는 소문이 돌면 그는 드래곤 하트를 구입하기 위해 황금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그 결과 트란벨 국왕은 몇 개의 드래곤 하트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트란벨 국왕은 유난히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평소 보유한 드래곤 하트를 틈날 때마다 타 왕국 군주들에게 자랑한 것이 이제 와서 화근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해서든 드래곤 하트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로젠가르트 4세의 눈매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트란벨의 부(副) 역시 없소. 인간의 국가가 모두 멸망한다면 드래곤 하트가 더 이상 보물로 간주될 것 같소? 고로 나 역시 보유한 드래곤 하트를 아낌없이 내어놓을 작정이오. 우리 인간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한 보물도 내놓아야 하오.

각 왕국 군주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드래곤 하트도 문제였지만 6 써클 이상의 마법사를 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6 써클이라면 어지간한 왕국에서는 능히 궁정마법사 자리를 꿰어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므로 군주들로썬 순순히 내어놓기가 여간 아깝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당면한 현실이 너무 위급했기에 트란벨 국왕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드래곤 하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차원의 인물을 초빙해서 위기를 극복하자는 계획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슈렉하이머 역시 거기에 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대신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사절단 중 하나에 제가 참가하겠습니다.

군주들은 두말하지 않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슈렉하이머가 보유한 신성마법은 마법으로 따지자면 적어도 6 써클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한 명이라도 아쉬운 처지였기에 결정은 빨리 이루어졌다.

뒤이어 세르게이가 마지막 문제점을 설명하고 나섰다.

아크로폰트식 차원이동의 문제점은 바로 시간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공간적으로는 정확히 그곳을 찾아갈 수 있지만 시간 선택은 오로지 우연의 일치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운이 좋은 경우에는 크로센 대제가 존재했던 바로 그 시간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최고 강자를 초빙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만전을 기하기 위해 적어도 다섯 이상의 파티로 구성해서 사절단을 보내야 합니다.

보유한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은 도합 다섯. 그러므로 각 왕국에서 뽑힌 마법사로 하여금 다섯 개의 파티를 구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기 드래곤 하트 하나씩을 가지고 미지의 타 차원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면 각 군주들은 서둘러 마법사를 뽑아 보내도록 하시오. 그들에게 차원이동마법을 전수해야 하기 때문에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또한 트란벨과 에스테르에는 내가 특별히 근위 기사단을 보내드리겠소. 그러니 보유한 드래곤 하트를 그들에게 맡겨 보내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로젠가르트 4세는 힐끗 슈렉하이머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승정에게는 특별히 우리 이카롯트의 궁정마법사 베니테스를 붙여 주겠소. 그러니 임무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 주길 부탁드리겠소.

알겠습니다.

군주들의 회합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군주들은 각기 자신에게 배정된 마법사와 보물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과정을 설명한 슈렉하이머는 쓸쓸한 눈빛으로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바로 저희들이 중원이란 곳으로 가게 된 과정입니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구려.

말을 마친 독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제반 사정이 이해가 된 독고성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전혀 나무랄 데 없었다.

타 차원으로 가서 그곳 최강의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데 있어서 이들은 크나큰 실수를 했다.

독고성에겐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는 중늙은이에 불과했다. 서글픈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독고성은 마치 툭 내뱉듯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날 데려오겠다는 결정을 했소?

그것은.

슈렉하이머는 차원이동을 통해 중원에 도착한 다음부터의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차원이동은 정말 순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신비로운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으니까요. 공간이동 할 때를 감안해서 우리 모두는 잔뜩 에이비에이션(Aviation : 비행마법)을 준비해 놓았습니다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공간이동과는 달리 차원이동은 정확히 마법진 위의 공간 자체를 다른 차원의 것과 바꾸어놓는 것이었으니까요.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기후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사절단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슈렉하이머는 독고성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도착하자마자 저희들은 이곳의 마나 분포도를 광범위하게 검색했습니다. 강력한 실력자를 찾기 위해서였지요. 그 결과 저희들은 의외로 많은 마스터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쉽사리 말이지요. 당시 저희들은 그것이 베르하젤님의 보살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기뻐하며 지체 없이 그리로 향했습니다.

당시 슈렉하이머가 발견한 자들은 바로 사황교의 추적대였다. 총단에서 빠져나간 독고성을 잡기 위해 사준환이 대대적으로 고수들을 동원 독고성의 도주로를 추적해 가던 순간이었다.

슈렉하이머에게서 부근의 지형과 무사들의 복장에 대해 전해들은 독고성은 그들이 다름 아닌 배교의 추적대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저희들은 무척 놀랐습니다. 지금껏 이 정도로 많은 마스터를 본 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