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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찢어놓은 옷을 보여주며 말도 되지 않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미첼은 그만 두손두발 모두 들고 말았다. 물론 달려온 사람들도 미첼의 처지를 공감했을 것이다. 카르셀 궁정 사람들은 대부분 한 두 번씩 율리아나에게 당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율리아나의 마수에 걸리지 않으려면 오로지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미첼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반드시 중앙에 진출하고야 말겠다. 내가 갈고 닦은 검술실력이라면 큰 왕국에서도 능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터, 분명 나의 진가를 알아보는 귀족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극히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카르셀에서 살아가며 미첼은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중앙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물론 여행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미첼의 가슴을 부풀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화려한 궁정. 사치의 극에 달한 귀족들의 풍요로운 생활.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들. 아름다운 레이디와의 낭만적인 로맨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호시탐탐 카르셀을 벗어날 방법만을 궁리하던 미첼에게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주어졌다. 모종의 일로 왕녀 율리아나가 크로센 제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자네가 율리아나와 동행해 줘야겠어.

카르셀 제일의 검사였던 미첼에게 당연히 동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미첼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승낙했다. 물론 여정 도중 율리아나에게 당하는 것은 감수해야 했지만 이번 기회는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다시 잡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다시는 카르셀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크로센 제국에 눌러앉고 말 테니까…….'

묵묵히 다짐을 하며 미첼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꼭 거머쥐었다. 적어도 검술에서만은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던 미첼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네크로멘서의 거처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네크로멘서가 설치해 놓은 알람마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따르르릉.

귀에 익은 알람소리가 울려 퍼지자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그는 거처에서 한 시간 거리에까지 알람마법을 전개해 놓았고 거기에 침입자들이 여지없이 걸려든 것이다.

애송이들이 또 기어 들어오나 보군. 심심했는데 잘 되었어.

이제 데이몬도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송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힘들여 환영미리진을 펼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봉인구의 마력을 삼분지 일 이상 흡수한 상태였다.

봉인구의 마력을 대상으로 운기조식을 한다는 그의 계획은 마침내 성공했다.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봉인구는 지금 데이몬의 몸 속에서 마력을 거침없이 내뿜고 있었고, 데이몬의 단전은 그 마력을 줄기차게 빨아들여 충만해진 상태였다. 그 탓에 지금까지 소환하지 못했던 마계의 마물들을 손쉽게 소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단 매직 미사일과 윈슬럿으로 침입한 애송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나이트 메어(Nightmare:夢魔)를 소환해서 애송이들에게 꼬박 일주일동안 악몽을 꾸게 했다.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나이트 메어에 의한 악몽은 오히려 환영미리진에 의한 것보다 더한 고통을 애송이들에게 가져다주었으니까…….

게다가 이젠 놈들의 상태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악몽을 꾸는 것만으로 사람이 죽을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일주일동안 먹지도 못하고 악몽에 시달린 애송이들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거처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마음이 사라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데스 나이트들도 충분히 강화시켰으니 오래지 않아 이곳을 떠야겠군. 솔직히 이곳은 소문이 너무 많이 퍼졌어. 그러니 일단 비밀 병기만 완성시킨다면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봉인구가 데이몬의 몸 속에 들어있는 이상 굳이 한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한가롭게 유람이나 하며 드래곤들의 추적을 피하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판단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을 강화시키는 작업은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운기조식으로 빨아들인 마력을 끊임없이 주입해준 덕택에 그가 보유한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그야말로 최강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생전의 실력이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을 무한정 제공받은 때문에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오히려 생전의 실력을 웃돌 정도로 강력해졌다.

게다가 그들이 걸친 무구는 하나같이 최상의 것들이었으니.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 데스 나이트들은 데이몬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우선 그들이 보유한 무구들은 가격으로도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드래곤들이 트루베니아 전역에서 긁어모은 최상급 마법 무구들 중 최고의 것들로만 걸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걸친 갑옷은 최고위급 마법진이 그려진 최고급품들이었고 태반이 미스릴이나 드래곤 스케일로 되어 있었다. 언데드라서 오르하리콘으로 된 갑옷을 걸칠 순 없었지만 그 정도로도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고도의 마법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져 있었다. 드래곤들이 직접 새겨 넣은 것들로만 말이다.

그들의 무기 역시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헬버트론의 검은 바로 이카롯트를 상징한다는 명검 르헤르트 세이버였다. 평범한 기사가 들더라도 무리 없이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다는 최상의 아티팩트.

라인델프의 무기 역시 위력 면에서는 르헤르트 세이버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름하여 스컬 블레이드, 레드 드래곤의 비늘을 재료로 드워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검으로 예리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무기였다. 샤프니스(Sharpness)나 인챈트(Enchant), 그리고 각종 드래인(drain) 따위의 효과를 주는 마법들이 영구적으로 걸려있는 검으로써 벌써 일천 년 동안이나 인크레시아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티팩트였다. 그러던 것이 라인델프의 손에 들려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프림베르그의 검은 무게만 해도 범인은 들 수 없다고 알려진 자이언트 킬러(Giant killer)였다. 족히 일백 킬로그램이 넘어가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重劍)로써 우연히 발견된 금속질 운석을 드워프들이 수백 년 동안 담금질을 거듭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전설이 있었다. 날은 별로 날카롭지 않지만 무게로 인한 파괴력이 엄청나서 이 검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었다. 어지간한 검과 방패는 부딪치는 순간 부서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중검을 즐겨 쓰던 프림베르그에겐 가장 적합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생전이었다면 아무리 프림베르그라고 해도 엄청난 무게 때문에 휘두르기조차 쉽지 않았지만 언데드가 된 이후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때문에 자이언트 킬러는 프림베르그의 새로운 애병이 되어 버렸다.

사라미스의 검은 긴 샤벨이었다. 한쪽에만 날이 서 있고 완만하게 휘어져 베기에 적합한 검으로 이것 역시 드래곤의 비늘을 가공해서 만든 명품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검이라서 항상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므로 기질 상 사라미스와 가장 어울리는 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데스 나이트가 선택한 검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없었던 검으로 사라미스가 프로스트 소울(frost soul)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도의 프로즌(frozen) 마법이 걸려 있어 검에 적중되면 그대로 몸이 얼어 붙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검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신병이기와 어둠의 마력으로 무장한 채 데스 나이트들은 인크레시아 속에서 드래곤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가 데이몬의 체내에 있었으므로 굳이 밖에 나와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밀 병기가 완성된다면 더 이상 드래곤을 겁낼 필요가 없어지지.

이제 데이몬은 드래곤을 상대할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그들의 지휘 하에 있는 오크들과 그들의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들이었다. 드래곤 한 마리 정도 맞닥뜨리는 것은 이젠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과 9서클 마스터인 데이몬이라면 넉넉하게 사냥이 가능했으니까……. 거기에다 비밀병기까지 가세한다면 드래곤 두 마리까지도 맞상대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들이 일대 일로 싸워준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만약 놈들의 휘하의 가디언이나 오크들을 모조리 동원한다면 상황이 조금 어려워진다. 오크 보병이나 가디언을 화살받이로 앞세워놓고 뒤에서 공격마법을 펑펑 날려댄다면 승산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이것은 데이몬이 노스우드 결전에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었다. 용사단이 보유한 힘은 사실 결코 약하지 않은 전력이었다. 만약 정면 대결을 했더라면 충분히 드래곤 한 두 마리 잡을 수 있는 전력이라 봐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단 한 마리의 드래곤조차 잡지 못한 채 용사단 전원이 허무하게 몰살되어버렸으니…….

그 사실을 감안해 보면 어떻게 해서든 오크를 처리할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할 듯 보였다. 만약 데이몬이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넷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혼자서 달려들 드래곤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아르카디아의 군주와 손을 잡아야겠군. 다행히 이곳 인간들의 힘은 절정에 달해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오크를 상대하게 한다면 난 마음 편하게 드래곤 사냥을 할 수 있다.

드래곤들은 분명히 아르카디아 침공을 계획할 것이다. 수면기에서 깨어나는 즉시 휘하의 오크들을 규합하여 아르카디아로 넘어온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만약 데이몬이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에게 가세한다면 가히 엄청난 전력이 될 터였다. 물론 그것은 이곳 병사들이 데이몬을 적대시하지 않아야 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다시 말해 데이몬은 반드시 이곳의 군주 중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일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결국 페르슈타인이란 작자와 손을 잡아야 하는가?

데이몬은 손을 잡을 만한 인물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병권을 절반 이상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로 제국의 황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심가. 만약 데이몬이 그를 찾아간다면 엄청난 환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나인 써클의 흑마법사와 최강의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 넷이라면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력이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힘을 끌어 모아야 하는 입장의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면 두 팔을 벌려 데이몬을 맞아들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를 꼬드겨 트루베니아를 침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보아 오크들은 결코 아르카디아의 군대를 감당할 수 없다.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은 이미 트루베니아가 멸망할 당시의 전력을 열 배 이상 상회하고 있으니까……. 참전할 드래곤들도 내가 가세하면 별달리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아르카디아의 힘이 상상외로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드래곤들은 다시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아르카디아를 도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데이몬이 곤란해진다.

트루베니아는 드래곤들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고, 오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마음 편하게 드래곤을 사냥할 순 없었다. 다프네를 구해내는 일 역시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지.

따라서 데이몬은 어떻게 해서든 페르슈타인을 꼬드겨 트루베니아 침공을 계획해야 한다. 오크들의 노예로 근근히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해 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으므로 데이몬의 얼굴에 고뇌가 서렸다.

골치 아프군. 페르슈타인 공작은 트루베니아 침공 자체를 불필요한 일로 간주하고 있으니…….

트루베니아 침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오히려 황제파 요인들이었다. 집정관인 테오도르와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만이 트루베니아 침공을 주장할 뿐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거기에 반발이라도 하듯 침공불가라는 반대 노선을 걷고 있었다.

힘을 가진 자는 그였으므로 전쟁불가론은 거의 결론까지 먹혀 들어간 상태였다.

상황을 보아 페르슈타인 공작으로 하여금 트루베니아를 침공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작업이었다. 머리가 아파 온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것은 추후에 생각할 문제야. 역시 머리 쓰는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

물론 황제파 요인들과 손을 잡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가능성 면에서 별로 타당하지 않았다. 일단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황제파 요인들이 악의 대명사인 흑마법사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무척 희박했다. 더욱이 일전에 자신에 의해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된통 당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기사들 대부분이 명예를 중시하는 고지식한 작자들이었으므로 모르긴 몰라도 근위기사 단장은 자신과 손을 잡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다 세력 면에서 현격히 밀리고 있는 황제파의 상황 역시 데이몬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좁히고 있었다. 백 번을 생각해도 페르슈타인과 손을 잡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왠지 모르게 페르슈타인에 대해 꺼리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반역을 일삼는 놈과 손을 잡아야 한다니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은 바로 사준환으로 인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수하의 배신으로 절대자의 자리에서 밀려난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쪽으로 쉽사리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 2의 사준환이라 볼 수 있는 놈을 도와 일을 도모해야 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싸워줄 만한 힘과 능력을 갖춘 권력자는 오로지 페르슈타인 밖에 없었으므로…….

따르르릉.

알람마법이 침입자들이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자 데이몬은 일단 생각을 접었다.

우선 놈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이번에는 어떤 놈들일까?

잠깐 마나를 재배열하자 수정구에 영상이 맺혔다. 대략 10여명 남짓한 녀석들이 조심스럽게 동굴 입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우선 놈들의 병력구성과 실력을 살폈다. 그의 입에서 짜증스럽다는 듯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완전히 애송이들이로군. 차림새를 보아 용병들인 것 같은데 고작 저 정도 인원으로……응?

일행의 후미에 제법 강한 기운을 풍기는 녀석을 발견하자 데이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용모를 보아 갓 스물을 넘긴 것 같았지만 실력이 제법이었다.

기운이 잘 갈무리되어있군. 어디서 검술을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단련이 잘 되어 있어. 애석한 것은 대마법 갑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지. 매직 미사일로 간단히 해결될 테니 윈슬럿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겠어.

수정구슬을 유심히 살피던 데이몬의 눈에 번쩍하고 반색의 빛이 일어났다. 가장 후미에서 걸어오는 계집아이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기대했던 일이라 데이몬의 눈빛은 금세 게슴츠레해졌다.

호오! 계집애라……. 정말 반갑군. 안 그래도 무료한 참이었는데 모처럼 실력발휘를 할 수 있겠어.

일행 중에 여자가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데이몬의 가슴속은 희열로 차 오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골탕먹일 대상을 찾은 것이다.

지금까지 데이몬은 여자들에게 극도로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아왔다. 유난히 추악한 외모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데이몬은 침입자들 중에 여자가 있으면 유난히 혹독하게 고생을 시켰다. 마법으로 모습을 흉측하게 바꾼 음식을 먹이는 것도 모자라서 거꾸로 매달아 놓기를 밥먹듯이 해 왔던 데이몬이었다. 불쌍하게도 그녀들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자 동료들보다 몇 배나 혼이 나야 했으니…….

데이몬의 거처에 침입했다가 풀려나는 경우 파티에 속해있던 여자들은 거의 빠짐없이 동료들의 등에 업혀서 나가야 했다.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말이다. 정말 악취미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는 유희였다.

오랜만에 신나게 계집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겠군. 내 너를 위해서 특별 요리를 준비해 두지.

신이 난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 규모라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 윈슬럿을 부를 것도 없었다. 데이몬의 장기인 매직 미사일 세례가 한 차례 돌아가면 모조리 뻗어버릴 테니까…….

목적지에 도착해서 멀리 보이는 동굴입구를 쳐다보는 일행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이 어려있었다. 악명이 자자한 네크로멘서를 사냥하러 왔는데 긴장하지 않을 자는 없었다. 가장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자가 카심이었다. 용병생활로 잔뼈가 굵은 그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들을 이리로 이끌고 온 율리아나가 가장 떨고 있었다. 음침하기 그지없는 동굴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저곳이 네크로멘서의 거처인가요?

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예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군요. 이곳에만 오지 않으면 해를 입을 일이 전혀 없다니까…….

카심이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율리아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뒤에서는 미첼이 주섬주섬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오랜 여행을 대비해서 벗어놓은 투구라든지 정강이 받이 같은 보호장구를 완벽히 갖추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 옆구리에 걸어놓은 방패를 집어들자 카심이 눈을 빛냈다.

그것은 북부의 강국인 펜슬럿 기사단의 방패로군. 자네 혹시 펜슬럿과 연관이 있나?

힐끗 카심을 쳐다본 미첼은 별달리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과거 아버님께서 그곳의 기사이셨죠.

문장을 보니 근위기사단 소속이셨군. 대단해. 어지간한 실력으론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기 힘든데 말이야.

용병대장이 정확하게 사실을 알아내자 미첼은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장차 강대국의 기사가 될 자신이 용병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미첼은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휙 소리나게 몸을 돌렸다. 카심은 머쓱해진 채 고개를 돌렸다.

'자식. 잘난 체 하기는……. 저놈도 밥맛 없기는 공주란 년이나 마찬가지야.'

뒤쪽을 쳐다보자 용병단의 가장 신참 둘이서 긴장한 채 핼버드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카심의 얼굴에 애틋한 표정이 감돌았다. 사실 용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저들은 아직까지 용병 생활이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불쌍한 녀석들. 부디 오래 살아남아야 할 텐데…….'

둘 다 앳된 기색이 역력한 소년들이었다. 갈색 머리를 한 순해 보이는 얼굴의 소년은 하인리히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는 녀석은 제럴드라 불렸다. 둘은 여행 중 만난 친구 사이였다.

카심이 처음 그들을 본 것은 용병이 되겠다고 썬더버드 용병단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원래 용병단에서 용병을 뽑을 때는 엄격한 심사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용병계에서 초심자들이 1년을 버틸 수 있는 확률은 통상적으로 10% 미만이다. 경험부족으로 전사하던지 아니면 견디지 못해 달아나는 경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용병단에서는 입단 조건을 무척 엄격하게 적용했다. 1년 이내에 죽거나 달아난다면 용병단으로써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제럴드와 하인리히 둘은 가차없이 탈락 판정을 받았다. 하인리히는 심성이 너무 유약했고 제럴드는 절름발이에다 왼손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어쩐지는 모르지만 둘은 어떻게든 용병이 되게 해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어서 용병선발 담당자는 냉혹하게 그들을 내쳤다.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둘은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용병단 정문에 주저앉아 흐느끼기만 했다.

당시 독립하기 위해 휘하 용병들을 데리고 나가던 카심이 그들을 목격했다. 애처로운 느낌을 받은 카심은 그들을 자신의 용병단에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물론 그것은 카심의 상황에서 결코 적절한 행동이 아니었다. 소년 둘은 적어도 5년 동안은 임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밥만 축낼 존재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돌보기 위해 전력이 분산된다는 위험요소도 있었다. 그런 부정적인 일면이 있었지만 카심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소년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고마워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러 번이나 용병단에서 퇴짜를 맞아왔던 것이다. 하인리히와 제럴드가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된 것은 대충 이러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 3개월 동안 같이 지내며 정이 들만큼 든 상태였다.

'녀석들 부디 살아남아야 할텐데…….'

보기보다 정이 많은 성품인 듯 카심은 한참동안 두 소년들을 쳐다보았다. 그가 퍼뜩 정신이 든 것은 율리아나가 들어가자고 신호를 보냈을 때였다.

뭐해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아야지…….

그럽시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불퉁하게 대꾸한 카심은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렸다. 과거의 경험을 살려 그는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병력을 배치했다. 불과 일곱 명으로는 제대로 된 병진을 구성하기란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너, 그러고 너는 나와 함께 선두에 선다. 공주님과 기사님은 가운데에 위치해 주시고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그 뒤에 선다. 그리고 패터슨은 한 명을 데리고 뒤를 맡아라.

율리아나와 미첼을 최대한 보호하는 형태로 병진을 구성한 카심은 그래도 가장 실력이 있는 용병 둘을 데리고 선두에 섰다. 내심 기사인 미첼이 힘을 보태주기를 기대하며 말이다.

하지만 미첼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율리아나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심은 바짝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인원이 없는 상태에서 녀석이 외곽을 맡아준다면 많은 힘이 될 텐데…….'

하지만 미첼에게도 꿍꿍이가 있었다.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네크로멘서에게 가차없이 달려들어 필살의 일격을 먹이고자 하는 것이 미첼의 속셈이었다. 대마법 갑옷이 없으므로 선두에 나설 수는 없었다. 외곽의 용병들이 몸으로 때우고 있는 사이 기회를 포착할 심산이었으므로 그는 율리아나의 옆에 꼭 붙어 있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율리아나를 철저히 보호하는 척 하면서 말이다.

'이깟 용병 놈들이야 죽더라도 내 알 바가 아니지. 청부금을 받았으니 몸으로라도 때워야하지 않겠어?'

그는 힐끗 율리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톰한 입술을 꽉 다문 채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보니 겁이 나긴 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미첼은 무척 고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제가 제일인 줄 아는 말괄량이가 이번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군.

카르셀 말고는 널 공주 취급해줄 데가 있는 줄 알아?'

내심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목적이 궁금해져 왔지만 미첼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크로센으로만 가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미첼에게는 두 번 다시 카르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르니 정말 기괴한 패거리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앞에 어떤 위험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침입자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것을 감지한 데이몬은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았다.

환영 인사로 장기인 매직 미사일 다발을 퍼부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무수한 침입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던 무적의 무기였다. 대상이 소드 마스터나 팔라딘이 아니라면 매직 미사일 공격은 정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지금 들어오는 패거리들 중에는 이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내 거처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지. 인사가 조금 매울 거야.

순식간에 캐스팅을 마친 데이몬. 공기가 극도로 응축되며 새하얗게 빛나는 화살의 형태로 이루어져갔다. 그의 주위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수백 줄기의 매직 미사일이 생겨났다.

가라.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니 반갑게 맞아줘야지?

슈슈슈슛.

데이몬의 주위를 맴돌던 매직 미사일 다발들은 동굴 속이 좁다는 듯 통로를 가득 메운 채 쏘아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타날 침입자들의 허무한 종말을 예견하듯 말이다.

침입한 패거리들이 전멸하는 데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진용을 갖춰 진입했건만 엄청난 수의 매직 미사일이 가한 공습에는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까아악.

윽.

어린 용병들과 율리아나는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른 채 기절해 버렸고 나머지 용병들도 하나 둘씩 바닥에 쓰러져갔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미첼과 카심 만이 불과 1분 가량 버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계속해서 난타해 들어오는 매직 미사일 다발들. 그것을 줄기차게 막아내던 방패가 조각나자 결국 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검을 이용해서 서너 발 막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난입하는 매직 미사일은 끝이 없었다.

데이몬이 발사한 매직 미사일은 상대가 쓰러지면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대신 방향을 바꿔 서 있는 다른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저항하던 용병들이 쓰러질수록 남은 이들을 향해 날아가는 매직 미사일의 수는 증가되었다. 결국 카심이 버티다 못해 털썩 쓰러져버렸고 최후까지 분전했건만 미첼 역시 힘이 다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대마법 갑옷만 있었다면…….

미첼은 이 한마디를 겨우 토해내고 혼절해 버렸다. 침입자들이 모두 쓰러지자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매직 미사일들은 순차적으로 소멸되고 있었다.

크크크.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녀석들…….

통로에 한데 엉켜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애송이들을 바라보며 데이몬은 괴소를 터뜨렸다. 이들은 지금까지 데이몬의 거처를 침입한 녀석들 중 가장 약한 패거리로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전력으로 자신을 잡으려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상관없지. 이런 녀석들 열 무리가 왔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

이제 취미를 즐길 시간이 돌아온 건가?

신음을 흘리며 널브러진 용병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굴 입구에는 나무를 산더미처럼 짊어진 윈슬럿이 들어오다 말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눈짓을 받자 윈슬럿은 지체 없이 나뭇짐을 내려놓았다.

이 녀석들을 모두 특실에다 모시도록……. 계집이 끼여 있으니 오랜만에 만찬을 준비해야 할거야.

윈슬럿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와 늘어진 용병들을 집어드는 것을 보며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음식을 보고 파랗게 질리는 계집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근래에 새로 생긴 가장 큰 기쁨이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음이 급했다.

일단 음식을 만들어놓고 나이트메어를 불러야겠군. 어디 일주일 동안 고생을 좀 해보라고.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왔지만 그것을 들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매직 미사일에 난타 당한 나머지 하나도 빠짐없이 의식을 잃고 있었으므로…….

룰룰룰.

데이몬은 한가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양념에 버무린 야채와 고기가 기름을 두른 후라이팬에서 고루고루 잘 볶이고 있었다. 후라이팬이 어느 정도 가열되자 데이몬은 그 위에 기름을 살짝 부었다.

화르르르.

기름이 급격히 타오르며 불꽃이 솟아올랐다. 재료를 직접 불로 그슬려 풍미를 더해주는 기술. 중원의 요리가 명성을 얻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다양한 조리기술에 기인한 바가 컸다. 그릇에 수북히 담기고 있는 음식들에 데이몬의 마법 연출이 가해지면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끔찍한 모습으로 바뀔 터였다.

크크크.

계집아이에게 이것을 먹일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데이몬이었다. 커다란 그릇 두 개에 음식을 가득 담은 뒤 데이몬은 거기에다 환영마법을 전개했다.

음식은 곧 아무리 먹성이 좋은 자라도 뱃속의 것을 모조리 게워내지 않고는 못 배길 형상으로 변해버렸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데이몬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요리는 이쯤하면 되었고……. 애송이들의 몰골을 한 번 보러 가볼까?

마나도 운용하지 못하는 애송이들에게 매직 미사일은 상당히 매웠을 것이다. 아직까지 혼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테니 거기에다 대고 나이트 메어를 소환해 버리면 그 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놈들은 일주일동안 악몽을 꾸느라 살이 쭉 빠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데이몬의 관심사는 오로지 계집아이 뿐이었다. 어떻게 골탕을 먹일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지는 데이몬이었다.

성깔이 있는 계집아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래야 골려주는 재미가 있거든…….

흉측한 괴소를 머금으며 데이몬은 침입자들이 갇혀 있는 방에 들어섰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패거리들은 윈슬럿이 모두 거둬다 가지런히 늘어놓은 상태였다.

침입한 녀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오로지 계집아이만이 곱게 의자에 묶여 있을 뿐이었다.

지능이 없는 듀라한이지만 주인이 무얼 하려는지 정도는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릇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데이몬은 계집아이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어디 낮짝이 얼마나 반반한지 한 번 볼까? 응.

데이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거처에 침입한 계집아이는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인의 용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몸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럴 수가…….

정말 똑같았다. 유일하게 그에게 관심을 가져 준 여인. 데이몬으로 하여금 생전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만든 여인. 오백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도 단 한 번도 잊어본 여인의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데이몬은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다, 다프네…….

놀랍게도 율리아나의 얼굴은 다프네의 모습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까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쌍둥이처럼 다프네와 닮아 있었다. 데이몬이 일순 그녀를 다프네로 착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보아도 똑같았다.

무려 오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데이몬은 아직까지 다프네의 영상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고 눈앞의 여인은 바로 그 기억 속의 용모를 하고 있었다.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르르.

데이몬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프네와 닮은 여인을 보자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샘솟듯 치밀어 올랐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오는 기억들이었다.

이카롯트의 궁정에서 그녀와 나누던 대화. 볼에 살짝 와 닿는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

그저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세상의 행복을 모두 가졌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었다.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그때의 감정들. 그것들이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꽁꽁 얼어붙은 데이몬의 가슴을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잠시라도, 심지어 찰나의 순간이라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 얼마였던가? 그녀의 모습을 가슴속에만 깊숙이 간직한 채 이따금씩 떠올려 보곤 했던 데이몬. 그의 앞에 다프네와 꼭 닮은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정말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출현.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물론 그녀가 다프네가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지금 그 행동말고는 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율리아나가 깨어날 때까지 그녀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누, 누구시죠?

깨어난 율리아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웬 낯선 노인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삭신이 지끈지끈 쑤셔왔지만 율리아나는 얼른 냉정을 되찾고는 상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노인은 예상외로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그저 그런 얼굴이었다. 몸에 걸친 검은 로브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특이한 것은 노인의 표정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특히 노인의 눈동자에는 격정의 빛이 격렬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거침없이 들여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잠시동안 노인을 관찰한 율리아나는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제 얼굴을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죠?

노인의 시선이 율리아나와 딱 마주쳤다. 노인은 무척 주저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던 율리아나는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전 율리아나라고 해요. 카르셀 왕국의 공주이기도 하죠. 그런데 왜 제 이름을…….

대답을 들은 노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다가 여지없이 꺾여버린 듯한 형상이었다.

역시…….

참혹하게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을 율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결코 다프네가 아냐. 단지 용모가 흡사한 전혀 다른 계집아이일 뿐이지.'

마음을 거듭 다잡았지만 데이몬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냉정을 되찾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다프네가 아니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환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프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석화 마법에 걸려 돌이 된 상태로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는 그녀가 아르카디아에 나타날 리가 없었으므로…….

소녀와 다프네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사이 율리아나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해가고 있었다. 정황을 미루어 데이몬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판단한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죠? 혹시 이 동굴의 주인인가요?

데이몬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신 없이 율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그럴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율리아나의 눈빛은 사나워지고 있었다.

'틀림없어. 이곳은 사악한 네크로멘서의 거처가 분명해. 그렇다면 저 늙은이는…….'

단정을 내린 율리아나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굴하지 않고 맞받았다. 결코 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용병대장 카심이 고개를 드는 장면이 들어왔다. 용병 생활로 맷집이 단련된 탓에 카심은 깨어나는 것도 빨랐다.

아이고 머리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카심에게 율리아나는 잽싸게 눈짓을 했다. 다행히 사악한 네크로멘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무기가 없었지만 카심은 맨손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물며 대상이 마법사라면 더욱 손쉬운 상대였다. 그의 굳센 팔꿈치에 목이 휘감긴다면 제아무리 마법사라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희망사항에 불과한 일이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마법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잽싸게 목을 휘감으려던 카심은 등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커억.

척추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카심은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를 토해냈다. 얼마나 세게 얻어맞았던지 카심은 마치 곤두박질치듯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의 앞으로 전투용 도끼를 치켜세운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데이몬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윈슬럿이었다. 윈슬럿은 쓰러진 카심의 등판을 밟고 지긋이 힘을 주었다.

끄으으.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카심의 눈동자에서 핏발이 곤두섰다. 듀라한이 밟고 있는 곳이 정확히 허파 부분이었으므로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숨통이 콱 막힌 카심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까무러쳐 버렸다.

세, 세상에…….

율리아나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카심이 당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쓰러뜨린 상대가 보기만 해도 끔찍한 괴물이었으니……. 목 위부분이 텅 비어있는 것도 모자라서 잘려나간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괴물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옆구리에 끼여 있는 머리통이 마치 살아있는 듯 데룩데룩 눈알을 굴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더욱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을 봐서 기절해야 합당한 듯 보였지만 율리아나는 역시 당찬 소녀였다. 도리어 그녀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녀는 데이몬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한 상태였다.

네놈이 바로 사악한 네크로멘서였구나?

악독한 놈. 비겁한 방법을 써서 우릴 무력화시키다니……. 하늘이 겁나지도 않느냐?

맹랑하다고 볼 수 있는 율리아나의 반응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비겁한 방법이라니 무슨 소리지? 난 엄연히 공격 마법인 매직 미사일을 쓴 것이거늘…….

나타나서 통성명을 하고, 싸우겠다고 선포하고 나서야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기사도 정신이다. 넌 그런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억지였다. 그때서야 냉정을 되찾은 데이몬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난 기사가 아니야. 쓸데없는 기사도 정신 따위나 지키려다간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기 딱 알맞지.

더러운 놈. 그래서 네놈이 사악하단 말을 듣는 것이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욕설. 율리아나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입이 거친 소녀였다.

한 눈에 보더라도 천방지축에다 대단한 말괄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데이몬은 이런 왈가닥을 다루는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가 이곳에 머문 몇 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패거리들이 침입을 시도했고 그 중에는 여자도 적지 않게 끼여 있었다.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사냥하러 온 여자들인 만큼 개중에서 평범한 요조숙녀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닳고닳은 노련한 여자 용병이나 소서리스가 태반이었다.

거친 용병이나 병사들 과 오랜 시간을 보낸 여자들이라 성깔이나 성질머리들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성깔은 데이몬에겐 추호도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넋이 반쯤 나간 채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이곳을 나섰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듀라한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엄포 아래 보기조차 끔찍스런 음식들을 강제로 먹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를 꼬박 거꾸로 매달아놓기가 일수였다. 그러면 그녀들은 죽을힘을 다해 치마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어야 했다. 힘이 모조리 빠질 때까지 말이다.

이런 지경에 처하면 어떤 여자라도 필경 의지력이 꺾이기 마련이다. 일단 기세를 한 번 꺾어만 놓으면 여자들은 예외 없이 순한 양이 되었다. 하나같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제발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살려주세요. 엉엉.

제발.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흑흑.

여자들의 눈물어린 애원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뜻을 관철시켰다. 이곳에 들어온 여자들은 누구도 빠짐없이 데이몬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하루를 꼬박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결과는 거의가 대동소이했다.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동료들의 등에 업혀 나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법 성깔이 있어 보이는 눈앞의 소녀도 그 방법을 쓴다면 똑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만 두자. 너에게만은 그 방법을 쓰고 싶지 않다.

그래도 율리아나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데이몬은 화가 나지 않았다. 단지 다프네와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율리아나의 방종을 묵인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그러던 사이 미첼과 용병들이 하나 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여, 여긴 어디지? 응?

미첼의 눈이 가늘어졌다. 율리아나의 앞에 서 있는 데이몬을 발견한 것이다. 검은 색 로브. 상대는 한 눈에도 마법사란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법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냉랭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그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인다면 머리통이 무사하지 못할 걸…….

미첼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물론 네크로멘서의 경고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목덜미에 와 닿는 싸늘한 금속의 느낌. 바로 그것 때문에 동작을 멈춘 것이다. 미첼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목을 겨냥하고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그를 보자마자 미첼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헉.

아무리 남자라고 하지만 머리통이 없는 괴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듀라한을 본 적이 없던 미첼이라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 이건 뭐야.

의외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듀라한이라 불리는 녀석이지. 전투력이 상당히 뛰어나서 상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

상황을 봐서 네크로멘서의 수족으로 있는 녀석 같다.

미첼의 말을 받은 자는 카심이었다. 어느새 깨어났는지 그는 등판을 어루만지며 몹시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휘하 용병들도 대부분 깨어난 상태였다. 하나같이 얼굴이 우거지상이 된 채 끙끙 앓으며 전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패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답게 카심이 용감하게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이 동굴의 주인이오?

그렇다.

마법 실력이 대단하구려. 제대로 보지도 않고 뻗어버렸으니……. 혹시 흑마법을 익혔소?

이리 저리 너절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카심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잡담을 나누다 느닷없이 달려들어 상대를 제압하려는 심산에서였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마법사를 제압하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얄팍한 수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노련하기로 따지자면 이미 카심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던 데이몬이 아니던가?

빤히 보이는 수작이군.

짤막한 냉소와 함께 데이몬의 몸이 급격히 솟구쳤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서 10미터 가량 떨어진 허공에 몸을 둥둥 띄웠다. 물론 일행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겠지?

데이몬의 주위로 또다시 백색 화살 다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행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던 공포의 매직 미사일 다발이었다. 그것을 본 패거리들의 눈망울엔 또다시 공포의 빛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통증 때문에 본능적으로 두려운 감정이 치밀어오른 것이다. 보다 못한 카심이 앞으로 나섰다.

자, 잠깐. 공격하지 마시오. 보다시피 우리에겐 무기가 없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너희들은 엄연히 내 포로야.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왔을 테니 죽어도 여한은 없으렷다?

몸 주위로 매직 미사일을 빙글빙글 돌리며 하는 협박이라서 효과는 확실했다.

패거리들 대부분은 사색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매직 미사일에 여러 차례 얻어맞았던 미첼은 다리까지 후들거리고 있었다. 겁을 먹지 않는 것은 오로지 율리아나와 카심 밖에는 없었다.

이 비열한 자식. 비겁한……흡.

감정이 격양된 율리아나가 또다시 욕설을 퍼붓자 카심이 대경실색해서 율리아나의 입을 막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결코 상대를 격동시켜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상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패거리가 단숨에 몰살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우리들을 죽이지 않은데 대해서 감사드리오. 이렇게 가둬둔 것을 보면 뭔가 바라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얼 원하시오.

상황판단이 빠른 녀석이군.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의자 하나가 날아와 데이몬 옆 허공에 둥둥 떴다.

데이몬은 허공을 밟고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런 뒤 느긋하게 아래를 내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너희들을 단단히 혼내주려고 했다. 다시는 이곳에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신경 쓰실 필요가 없소. 실력차이가 현저히 난다는 것을 안 이상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겠소. 그것은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하겠소.

카심은 열심히 상대를 달래려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별달리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차피 1주일동안 꼬박 곤욕을 치르고 나면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마음이 싹 사라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네놈들의 정체와 목적이나 알고 싶구나.

카심의 손을 풀어낸 율리아나가 냅다 고함을 내질렀다.

우린 네놈 같은 사악한 악당을 잡으러 온 정의의 기사단이다. 악은 반드시……흡.

다급하게 틀어막은 카심의 손에 의해 율리아나의 말은 또다시 끊길 수밖에 없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참으로 앞뒤 못 가리는 천방지축에다 건방진 계집아이로구나. 하긴 네 말이 맞기는 하다. 사실 난 원래 사악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악당이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카심과 미첼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어들었다. 흑마법사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긴 상태에서 율리아나가 결국 일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카심의 얼굴은 눈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율리아나에게 으르렁댔다.

이런 빌어먹을……. 살고 싶으면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으시오.

진득하게 욕을 얻어먹은 율리아나가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욕을 먹고 가만히 있는다면 결코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입이 단단히 틀어 막혀 있는지라 율리아나는 한 마디 말도 못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카심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정말 다프네와 흡사하게 생겼군. 화를 내지 않는다면 도저히 분간을 할 수 없겠어.'

물론 그는 다프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프네를 떠올리자 데이몬의 머릿속엔 또다시 처연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돌이 되어 있을 다프네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왔다.

그 탓에 데이몬은 멍청한 얼굴로 율리아나의 얼굴을 한참동안 주시했다. 마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미첼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슬그머니 율리아나에게 다가온 미첼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귀엣말을 건넸다.

상황을 보아 놈은 너의 미색에 단단히 홀려있는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몸서리를 쳤다. 보기만 해도 가증스러운 사악한 흑마법사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니…….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었지만 율리아나는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처럼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첼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기름을 부었다.

우리의 목숨은 모두 저놈 손에 달려있어. 그러니 미안하지만 네가 우리를 좀 살려줘야겠다. 어떻게 하겠니? 여기서 모두 떼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말이 끝나자 율리아나는 타오르는 듯한 눈초리로 미첼을 쏘아보았다. 그의 말은 자신을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자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욕설을 냅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막힌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말을 용케 들은 카심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가 모시는 왕녀를 흑마법사에게 넘겨주고 이대로 우리만 달아나자는 것인가?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가 살아나야만 나중에라도 율리아나를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떠듬떠듬 변명을 늘어놓는 미첼을 보며 카심은 율리아나의 입을 막은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엔 냉랭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자네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그럴 수 없네. 밉든 곱든 간에 그녀는 내 고용주일세. 다시 말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지.

겨우 풀려난 율리아나는 카심에게 고맙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뒤 다짜고짜 미첼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정통으로 따귀를 얻어맞은 미첼은 얼굴을 감싸안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심은 무척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거만하게 행동하던 미첼이 결코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간 율리아나는 미첼의 멱살을 부여잡고 으르렁거렸다.

너 이 자식. 돌아가는 길로 이 사실을 당장 네 아버지에게 낱낱이 고해 바칠 테다…….

그 말에 미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버지인 헤일즈는 정말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은 그 즉시 초주검이 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들이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정 하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말이다.

복수(?)를 마친 율리아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쳇. 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하지만 헛수고야. 네놈에게 아양을 떠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 테니까…….

퍼뜩 정신을 차린 데이몬은 고소를 머금었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돌연 카심의 의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힘이 없어 당신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소. 내 비록 기사는 아니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나이의 한 사람이오. 나를 죽이기 전에는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을 테니 그렇게 아시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율리아나의 앞을 가로막은 카심의 모습에서는 사나이의 의기가 여과 없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휘하의 용병들도 부랴부랴 다가와서 율리아나를 에워쌌다.

자신의 목숨을 전혀 돌보지 않는 태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휘하 용병들조차 카심의 성격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럴 경우에 대한 해법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놈들을 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되겠군. 윈슬럿.

심령이 통하는 터라 윈슬럿은 생각만 해도 데이몬의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다.

데이몬의 뜻을 숙지한 윈슬럿이 배틀 액스를 내팽개친 채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왼손에 들린 머리통을 마치 블랙 잭(Black Jack: 양말에 모래나 돌맹이를 집어넣어 만드는 무척 간단한 무기.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키는데 아주 유용한 무기이다.)처럼 휘두르며 말이다.

크아아아.

머리통을 무기 삼아 달려드는 시체(?)를 본 용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경험 많은 카심은 상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조심해라. 저놈은 듀라한이라 불리는 언데드 몬스터다. 괴력을 가지고 있으니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 신호가 떨어지면 일시에 달려들어 놈을 깔아뭉갠다. 알겠나?

카심이 주의를 주자 용병들은 즉각 복명했다.

예.

좋다. 그럼 신호를 기다려라

용병들은 잔뜩 긴장한 채 다가오는 윈슬럿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심의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마침내 카심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병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도합 여덟 명이 깔아뭉갠다면 놈이 제 아무리 언데드라도 꼼짝할 수 없을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오산이었다. 비록 언데드가 되었지만 윈슬럿은 생전에 대단한 실력을 가진 용병이었고 그때 익혔던 기술은 거의 본능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방어력을 가진 언데드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이미 결정된 승부였다.

퍽, 퍽, 퍽, 퍽.

윈슬럿이 휘두르는 머리통에 얼굴을 얻어맞은 용병들은 그대로 기절한 채 뻗어 버렸다. 코피를 낭자하게 내쏟으며 말이다.

듀라한의 머리통은 엄청난 강도를 지녔다. 전투를 벌일 때 방패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검도 들어가지 않는 판국인데 맨 얼굴로 맞받았으니 충격이 오죽 하겠는가? 용병들은 순식간에 전멸해버리고 마지막으로 우두머리인 카심만이 남았다. 지금까지 먹은 용병밥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카심은 윈슬럿의 일격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틈을 발견한 카심은 강철같은 주먹을 윈슬럿의 복부에 사정없이 박았다.

퍽.

하지만 신음소리는 도리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크윽.

마치 나무둥치를 친 듯한 느낌에 카심은 주먹을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듀라한에 대해 소문만 들어보았지 실제로 상대해 본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몸뚱이가 이토록 단단할 줄 카심은 꿈에도 몰랐다.

웬 모기가 무느냐는 듯이 가볍게 몸을 돌려 머리통을 휘둘러대는 듀라한. 몸을 날려 피해내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윈슬럿의 반사신경은 카심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납작하게 몸을 숙여 머리통을 피해낸 것은 좋았지만 다음에 가해지는 발길질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퍽.

정통으로 면상을 걷어 채인 카심은 기절한 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완전히 큰 대자로 뻗어버린 것을 보니 당분간 일어나지는 못할 듯 싶었다.

마지막 방패막이 사라지자 율리아나는 사시나무 떨 듯 떨 수밖에 없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듀라한의 앞에 홀로 내팽개쳐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방해물을 모두 제거한 윈슬럿은 율리아나를 향해 어슬렁거리며 나아갔다. 그때 무언가가 윈슬럿의 등을 파고들었다.

이야압.

우렁찬 호통소리와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퍼퍽.

그와 함께 윈슬럿의 강인한 몸뚱이가 휘청했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흔들거리는 것을 보니 상당한 타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배틀 액스 하나가 윈슬럿의 등판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윈슬럿이 내팽개친 바로 그 배틀 액스였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듀라한을 보며 미첼이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놈 맛이 어떠냐?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이 몸으로 때우는 사이 미첼은 살금살금 걸어가 듀라한이 팽개친 전투용 도끼를 집어들었던 것이다.

되었어.

미첼은 무기를 들고나서야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고 무기만 있다면 듀라한 따위에게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미첼은 도끼에 마나를 충만하게 불어넣은 뒤 율리아나에게 다가서려던 윈슬럿을 덮쳤다.

공격은 정확히 적중했고 듀라한은 거의 전투불능으로 보일 정도의 큰 상처를 입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윈슬럿에게 타격을 입히다니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었군. 듀라한의 몸뚱이를 뚫기가 별로 쉽진 않은데 말이야. 게다가 기습을 가하는 것을 보니 정정당당한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녀석 같고…….

모욕적인 말에 미첼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정당당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그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멀리서 예고도 없이 매직 미사일을 날린 당신 역시 비겁하긴 마찬가지 아니오?

멍청하기는……. 난 마법사야. 게다가 사악하고 비열한 악당이기도 하니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전혀 없지.

능글맞게 되받아 치는 데이몬의 넉살에 미첼은 말문이 딱 막혀버렸다. 스스로 악당이라고 자청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단전에서 어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직까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윈슬럿을 향해 집중시켰다. 어둠의 마력은 허공을 격한 채 윈슬럿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아아아아.

생명의 근원이 주입되자 윈슬럿은 두 팔을 치켜들고 기성을 질렀다. 오른손을 뒤로 돌려 등에 박혀 있는 배틀 액스를 뽑아든 윈슬럿의 모습은 마치 되살아난 것처럼 활력이 넘쳤다. 비틀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쓰쓰쓰쓰.

등에 길게 패인 상처에 녹색 기운이 어리더니 급속도로 치료되기 시작했다.

듀라한이란 원래 죽어버린 시체에다 어둠의 마력을 주입해서 생명을 부여한 언데드 몬스터였다. 따라서 어둠의 마력만 충만하면 신체의 재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미첼을 매섭게 쏘아보는 윈슬럿. 그 모습에 질리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리라……. 미첼은 파리한 안색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의 귀로 네크로멘서가 발한 듯한 일성이 들려왔다.

도전을 받아주겠다. 검술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내 듀라한과 한 번 싸워보아라.

맨손으로 말이오?

무기와 갑옷은 돌려주지.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묵직한 것이 미첼의 옆에 떨어졌다. 그것은 동굴에 들어올 당시 미첼이 입고 있던 투구와 갑옷이었다. 곧이어 그의 검이 검집에 꽂힌 채 떨어졌다.

철그렁.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을 손에 쥐고 나서야 미첼은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묵묵히 갑주를 걸치기 시작했다. 먼저 건틀릿을 끼고 정강이받이를 착용한 미첼은 흉갑의 가죽끈을 잡아당겨 꼭 죄었다. 매직 미사일에 난타당한 때문에 보기 흉하게 패여 있었지만 나름대로 방어에 도움은 될 것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율리아나도 한 손 거들었다.

그녀가 갑옷 입는 것을 거들어주는 것은 지금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둘의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다.

꼭 이겨야 해. 알겠지? 넌 카르셀 제일의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는 검사야. 저까짓 언데드 몬스터를 당해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아. 만약 네가 승리한다면 아까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께.

무척 불안한 눈초리로 어떻게 해서든 미첼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려는 율리아나였다.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오로지 미첼 밖에 없었다.

갑옷을 모두 착용한 미첼은 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들자 미첼의 전신에서는 기사다운 풍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미첼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승부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오?

그렇다. 내 듀라한이 이긴다면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내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이긴다면…….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모조리 풀어주지. 하지만 그것은 대결에서 이길 경우에만 적용되겠지?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미첼은 체내의 마나를 끌어올려 보았다.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마나 연공법을 배웠던 탓에 그가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이지만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표출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카이트 실드(Kite Shield : 가장 오래된 방패 중 하나로써 나무 위에 가죽을 입히고 그 테두리를 금속 테로 둘러싸는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방어구)정도는 일격에 잘라버릴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미첼은 눈빛을 빛내며 윈슬럿을 쳐다보았다.

'듀라한에겐 오러 블레이드가 분명히 통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승산은 오히려 나에게 있다. 기회를 보아 오러 블레이드로 먼저 도끼를 잘라버린 뒤 놈을 두 조각 내어버리겠다.'

윈슬럿에게 한 번 치명상을 입혔던 경험 때문에 미첼은 필승을 자신하고 있었다.

아까는 급한 나머지 배틀 엑스에 오러 블레이드를 그리 많이 끌어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가진 마나를 모두 검에 불어넣는다면 아무리 단단한 듀라한의 몸뚱이라도 배겨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미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윈슬럿이 들고 있는 황금빛 배틀 액스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실상은 엄청난 아티팩트에 속하는 것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무리 없이 견딜 수 있는 최상급의 신기였던 것이다.

이 도끼는 7백년 전 트루베니아 드워프족의 족장이었던 칼브룬의 독문 무기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체가 버너디움이라는 무척 희귀한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버너디움. 운석이 떨어진 곳에서만 아주 소량 발견되는 것으로 단단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금속이다. 운석이 작렬하는 충격과 고열로 인해 성질이 변한 철이란 설이 있으며 제련하기가 엄청나게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강도로 인해 제련만 제대로 한다면 엄청난 무기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련된 버너디움은 오히려 드래곤 본이나 미스릴조차 능가하는 강도를 보였다. 때문에 드워프들은 버너디움을 가공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거듭해왔다. 그 결과 탄생된 무기가 바로 윈슬럿이 들고 있는 배틀 액스였다. 오랫동안 도끼를 애용했던 칼브룬이 죽고 난 뒤 배틀 액스는 우여곡절 끝에 드래곤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인크레시아 속에 오랫동안 쳐 박혀 있어야 했다. 그것이 듀라한인 윈슬럿의 손에 들려서야 다시금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라인델프에 의해 도끼의 유래를 알게 된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그것을 윈슬럿에게 지급했다.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에게 유난히 약한 면모를 보이는 윈슬럿의 단점을 보강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끼를 사용한다면 윈슬럿이 팔라딘 따위에게 꿀릴 일이 없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면 조금 버겁겠지만 말이다.

준비가 모두 끝났소.

미첼이 방패를 들고 자세를 잡자 윈슬럿은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아.

황금빛 배틀 액스가 파공성과 함께 미첼의 방패를 향해 날아들었다.

푸캉.

방패에 가해지는 충격이 예상외라서 미첼은 잠시 중심을 잃어버렸다. 그것도 방패를 비스듬히 기울여 힘을 흘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정면으로 막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던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보나마나 팔뼈가 박살이 나버렸을 테지.

하지만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듀라한은 정말 무시무시한 기세로 미첼을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등판에 도끼가 박힌 원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윈슬럿은 흉흉한 기색으로 미첼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미첼은 비교적 무난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무시무시한 윈슬럿의 힘을 적절하게 흘려가며 말이다. 결투를 보고 있던 데이몬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 제법이로군. 무게 중심에서부터 균형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아. 힘을 흘려버리는 기술도 일품이고.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군.

한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는 경험에 힘입어 데이몬은 비교적 정확하게 미첼의 상태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힘과 기술의 우위에서부터 예상되는 결과까지 모두 말이다. 그는 이미 미첼이 지금 필살의 일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한 판에 결판을 지을 모양이로군. 기를 모은 뒤 윈스턴의 도끼를 일검에 잘라내고 여새를 몰아 가차없이 허리를 토막낼 심산 같군. 하지만 헛수고일걸?

데이몬의 예상대로 미첼은 열심히 공격을 막아내며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을 전개해서 상대를 무기와 함께 토막쳐버릴 생각인 것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전신이 마나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 미첼은 그것을 모조리 검에다 집중시켰다.

츠츠츠츠.

미첼의 검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오러 블레이드. 기를 검에 충만시켜 검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높임과 동시에 그 무엇이라도 베어버리는 고도의 기술이 발휘된 것이다. 푸른빛이 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완성되지 않은 오러 블레이드(검기)로 보였지만 색이 너무나 뚜렷하고 또한 찬연했다.

검에서 일정길이 이상 솟아나야 하는 검강(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에는 조금 못 미치겠지만 미첼의 검에 서려 있는 검기에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력이 있었다. 그러니 미첼이 승리를 확신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검에서 푸른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미첼은 상대에게 벼락같이 육박해 들어갔다. 지금까지 몰린 수세를 말끔히 떨쳐버리며 말이다.

하아앗.

거센 기합소리. 예상대로 듀라한은 도끼를 모로 세워 검을 막아갔다. 과연 지능이 없는 언데드다운 행동이었다. 미첼은 검과 도끼가 작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푸캉.

요란한 음향과 함께 미첼의 검은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단숨에 토막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도끼는 유유하게 검을 막아냈다. 뜻밖의 상황에 미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세상에 한낱 도끼가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어떤 기술인가. 단단하기로 이름난 드래곤 본조차 일격에 잘라버리는 무적의 기술이 아니던가.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종류의 오러 블레이드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그것을 익힌 검사의 성취에 따라 승부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없는 듀라한 따위가 자신이 펼친 무적의 기술을 가로막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이익.

부아가 치민 미첼은 몸 속의 기운을 깡그리 검에다 불어넣었다.

츠츠츠츠.

그럴수록 검에 서린 푸른빛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은은한 금빛이 나는 것만 제외하면 무척 평범해 보이는 듀라한의 외날 도끼는 오러 블레이드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둘은 마치 힘 자랑이라도 하듯 무기를 맞대고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윈슬럿 쪽이었다.

크아아아.

윈슬럿은 기성을 지르며 도끼를 왈칵 밀쳐버렸다. 그 바람에 미첼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야 했다. 다시 자세를 잡기는 했지만 미첼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순 없어…….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상대의 공세가 마치 폭풍우처럼 휘몰아쳐 오고 있었으니까……. 미첼은 한 눈 팔 정신도 없이 격전에 몰입해야 했다.

챵챵챵챵.

무시무시할 정도로 격렬한 접전이었다. 둘은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전사처럼 쉴새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놀라운 것은 듀라한의 기술이 상상외로 엄청나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조련 받은 탓에 미첼의 검술은 평범한 기사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었다. 회피기술이나 페인트 모션(허초)까지 모든 면에서 전혀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술이 뛰어나기는 상대하는 듀라한도 마찬가지였다.

윈슬럿은 아무 무리 없이 미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미첼이 전개하는 갖가지 기술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모조리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언데드로 볼 수 없는 실력이었다. 둘의 격전은 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 그 자체였다. 엇비슷한 실력이었으므로 어느 한 쪽도 쉽사리 승기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윈슬럿이 이긴 싸움이라 봐야 했다.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왔지?

미첼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지고 있었다. 물론 언데드인 듀라한이 지칠 까닭이 없는 반면 살아 숨쉬는 인간인 미첼은 필연적으로 지치기 마련이다. 지친 몸으로는 싸우는데 한계가 있다. 꼬박 30분 가량을 정신 없이 치고 받던 인간과 언데드의 접전에서 결국 승리의 여신은 듀라한의 팔을 들어주었다.

크윽.

검과 도끼가 맹렬히 격돌하는 순간 팔에 힘이 빠진 미첼은 결국 검을 놓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날 정도였다. 내친 김에 방패까지 쳐서 떨어뜨린 윈슬럿은 도끼를 들어 미첼의 목에다 붙였다. 꼼짝도 하지 말라는 듯한 행동.

에라. 죽이려면 죽여라.

미첼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개를 부스스 돌리자 절망감에 젖은 여러 쌍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겨, 결국 지고 말았어.

어느새 깨어났는지 용병들이 접전을 관전하고 있었다. 카심 역시 핏기 잃은 모습으로 멍하니 듀라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정확히 미첼이 듀라한을 향해 필살의 일격을 날릴 때였다.

세, 세상에…….

미첼의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를 보자 카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험 많은 용병인 그가 오러 블레이드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마나를 운용할 수 없었던 터라 카심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건방지고 교만한 애송이로만 보았는데 저렇게 뛰어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끝났군.

검과 도끼가 격돌하는 순간 그는 승부가 결정된 것으로 간주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알아보았으므로 그것의 위력이 어떠한지 카심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듀라한은 무척 간단히 미첼의 일격을 막아내었고 곧이어 벌어진 접전에서도 전혀 우위를 잃지 않았다. 30분 동안이나 이어지는 접전을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관전했고 마침내 승부가 결정 나자 절망감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율리아나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카르셀 제일의 검사였던 미첼이 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미첼이란 인간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검술실력 하나만은 마음 속으로 인정했던 율리아나였다. 그런 미첼이 패배를 하다니……. 얼어버린 그들의 귀로 사악한 흑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너희들의 목숨은 완전히 내 것이다. 그런 줄 알도록…….

아래를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거기서 자도록 해라. 행여나 탈출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듀라한은 잠을 자지 않는다. 게다가 통로에는 내가 설치해놓은 마법 트랩들이 있으니 매직 미사일 세례를 다시 한 번 받고 싶으면 탈출을 구상해 봐도 좋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패거리들 전원을 얼어붙게 만든 뒤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뚜벅뚜벅

그는 허공을 소리내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운하게도 사악한 흑마법사의 포로가 되어버린 일행들은 하염없이 흑마법사의 뒷모습만 주시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는 언데드 듀라한의 빈틈없는 감시를 받으며…….

이름은?

미첼 브루노.

나이는?

21세.

나이에 비해선 검술실력이 제법이더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자 미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듀라한에게 패한 사실로 인해 극도의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던 미첼이었다. 솔직히 상대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젠장.'

놀리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쨌거나 그가 상대하는 자는 뼛속까지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데이몬은 지금 포로들을 대상으로 심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율리아나와 미첼, 그리고 카심만을 불러놓고 그들의 신분과 목적 등을 캐묻고 있는 것이다. 졸지도 않고 지켜보는 윈슬럿의 감시 때문에 포로들은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통로에 설치되어 있다는 매직 미사일 다발에 더 겁을 먹었을 테지만 말이다. 심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신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카르셀 왕국의 수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소. 이번에 왕녀를 보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호위 대장으로 임명된 것이오.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호위대장으로 발탁될 만하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 기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채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용병대장을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나름대로 정황을 상상해보았다.

'혹시 녀석들이 오다가 왕녀를 노리는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나? 그래서 기사들을 모두 잃고 궁여지책으로 용병들을 고용한 것인가?'

하지만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그렇다면 놈들이 어째서 날 잡기 위해 이리로 기어 들어왔지? 호위대장 하나만을 믿고 들어온 것인가? 대마법 갑옷도 없는 녀석을 믿고?'

녀석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워진 데이몬은 이번에는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목적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호위 대장이라는 녀석이 왜 크로센으로 가는지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모르오. 어떤 목적으로 가는지는 오로지 왕녀님만 알뿐이오.

그것 참 기가 막히는군. 그럼 너도 당연히 모르고 있겠지?

지명을 받은 카심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뿐이었다. 그가 청부받은 내용은 오직 왕녀를 크로센 제국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란 것뿐이었으므로……. 결국 데이몬은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네가 토설해야겠군. 도대체 어떤 이유로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거지?

예상대로 율리아나는 순순히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흥! 내가 그것을 대답할 것 같아? 날 죽일 순 있어도 입을 열게 하진 못할 거야.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찬바람이 돌 정도로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얼굴이 다프네만 닮지 않았어도…….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거꾸로 매달아놓았을 텐데. 경험으로 미루어 계집들은 하루만 매달아놓으면 있는 말 없는 말 모조리 털어놓더란 말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율리아나의 얼굴만 보면 다프네와의 추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지금도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이상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히니 말이다. 물론 달콤하다고 할 수 있는, 결코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하지만 보고 있던 미첼과 카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시원찮은 판국에 율리아나가 상대의 성질을 사정없이 긁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카심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게 뭔가 짚이는 것이 있소.

데이몬의 시선이 카심에게로 쏟아졌다. 카심은 데이몬의 시선을 거침없이 맞받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3개월 후 크로센 제국에서 어떤 행사가 대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는지 아시오?

데이몬으로써는 당연히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워낙 바빠서 젠가르트에게 다녀올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자 율리아나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말하지 말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휘저으며 카심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율리아나. 하지만 카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고용주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심중의 말까지 털어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악당을 달래 휘하 용병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특히 율리아나는 버릇없이 고집만 더럽게 센 계집아이가 아니던가? 비밀까지 지켜줄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 카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정확히 3개월하고 열흘 후에 크로센 제국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있소. 이름하여 황태자의 태자비 간택식이라고 불리지.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들의 왕녀를 크로센 제국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리고 그 과정에서 태자비를 황태자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오. 물론 대다수의 왕국에서는 그저 인사치례 삼아 왕녀를 파견할 뿐이오. 이미 황태자비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영애가 간택될 것이란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으니 말이오. 모르긴 몰라도 카르셀의 왕녀는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 같소.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내 추측은 일단 그렇소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유라서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황태자비 자리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율리아나를 보니 카심의 추론이 십중팔구 들어맞은 것 같았다.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데이몬이 율리아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인물은 그런 대로 인정해 주겠지만 그 성질머리로 황태자비 자리를 노린다? 허.

이해가 가지 않는군.

예상대로 율리아나는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내 성격이 어때서…….

율리아나의 격한 반응은 카심의 추론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미첼조차 어이가 없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이유로 크로센 제국에 가는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널리 퍼뜨릴 수 없는 내막이라서 카르셀 국왕은 미첼에게조차 비밀을 지켰던 것이다.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된 데이몬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재미있군. 공주를 보내서라도 크로센 황가와 사돈관계를 맺고 싶다? 무척 재미있는 국왕이군. 그런데 왜 이렇게 왕녀를 일찍 보냈지? 일주일쯤 전에 궁정마법사로 하여금 크로센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면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연신 씨근거리는 율리아나의 눈치를 슬쩍 보며 카심은 의중을 마저 털어놓았다.

카르셀 왕국에는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을 것이오. 내가 가 본 바로는 카르셀에는 궁정 마법사는 고사하고 초급이나마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는 전무한 실정이지요.

생각해 보시오. 인구가 채 일만도 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마법사가 있겠소. 호위할 기사가 없어 용병단에게 왕녀의 호위를 맡기는 실정이니 오죽하겠소?

미첼을 힐끗 쳐다본 카심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내친 김에 율리아나의 비위를 박박 긁어놓으며 말이다.

그런데 호위 기사의 실력은 생각 외로 제법이더군요. 검술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어지간한 왕국의 근위기사 정도는 될 것 같소. 하지만 거기에 걸맞는 인격과 소양을 전혀 갖추지 못했으니 그도 평생 카르셀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군요.

허. 참.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데이몬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 우선 그렇게 작은, 국가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왕국이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그 정도라면 세바인이 속해있는 안트로스보다도 오히려 작은 나라이지 않은가? 그런 작은 왕국의 국왕이 감히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왕녀를 보냈다는 것에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야말로 성공할 가능성이 1할의 반에 반도 되지 않는 일이 아니던가?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연신 혀를 차댔다.

쯔쯔쯔. 보내는 사람이나, 보낸다고 가는 사람이나…….

내친 김에 그간 쌓인 울화를 모조리 풀어버리려는 듯 카심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거의 발작하기 직전인 율리아나를 무척 고소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이다.

도박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거의 비슷하지요. 성공만 한다면 팔자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달려들지만 거의 대부분은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는…….

닥쳐요.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참다못해 율리아나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카심을 노려보며 제법 기세 좋게 을러댔다.

계속 이러면 계약위반으로 간주할 거예요.

카심도 지지 않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이미 그는 참을 대로 참은 상태였다.

흥. 누구 마음대로……. 우린 청부받은 대로 사명을 다 했소. 당신의 되지도 않는 고집으로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몽땅 사로잡혔으니 이제 직성이 풀리시오? 그런데 감히 누굴 탓하는 것이오. 아니면 당신들이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목적을 나에게 먼저 알려 주었소? 계약서에 비밀을 지키겠다고 명시한 바도 없는데 내가 왜 함구해야 하지?

다, 당신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입술을 파르르 떨어대는 율리아나. 옥신각신하는 일행을 보다 못한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이것들이 누구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