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소를 흘려듣던 촌장의 얼굴에 어두운 기미가 서렸다. 사실 안트로스는 왕국이라 불리기에도 아까운 국가였다. 세바인 마을을 비롯한 산간 마을 몇을 아울러 놓은 것이 안트로스 왕국의 전부였고 인구가 모두 합쳐 2만도 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초미니 국가라고 봐야 했다. 워낙 영토가 척박해서 부근 왕국이 눈독을 들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안트로스 국왕이 보기 드물게 발이 넓어 크로센 제국의 귀족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왕국의 유지에 한 몫을 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어우러져 겨우 왕국이라는 명칭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힘이 없는 것이 사실인데……. 촌장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엘케인과 사리나는 담소를 계속 해 나갔다.
그런데 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단 하나도 죽지 않았다니 정말 놀라워. 도대체 놈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까?
글세 놈의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어요. 그런데 놈의 소굴에 정말 시체가 그리 많아요?
엘케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정말 지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어. 그러니 아마 넌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리나의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 절 무시하시는 건가요? 이래뵈도 전 워 소서리스라고요.
엘케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말을 들어. 아무리 너라 해도 시체에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데다 비어져 나온 내장에 파리가 새카맣게 꾀어 있는 것을 보면 속의 것을 죄다 게우지 않고는 못 버틸 테니 말이야.
말을 마친 엘케인은 촌장을 돌아보았다.
혹시 마을사람들 중에 놈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놈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엘케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왜냐하면 놈이 이따금 마을로 물건을 사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네크로멘서의 행동패턴은 그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관절 무슨 물건을 사러…….
생필품입니다. 이따금 술을 사가는 경우도 있고요. 야채와 고기를 주로 가져갑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놈인지 알아차렸습니까?
촌장은 엘케인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놈이란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긴 것과 차림새는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정말 끔찍한 괴물을 짐꾼으로 데리고 다니거든요.
끔찍한 괴물이라니…….
갑옷을 입은 기사의 형상을 한 괴물입니다. 놀랍게도 머리통이 목에 붙어있지 않고 왼손에 들려 있지요. 엄청나게 덩치가 큰 괴물인데 오른 손에는 큰 도끼를 들고 있습디다. 힘이 엄청나서 일전에는 커다란 송아지를 아예 통째로 짊어지고 가더군요.
손짓발짓까지 동원된 촌장의 설명에서 엘케인은 괴물의 정체가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임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마을에 정기적으로 내려와서 물품을 강탈해가다니…….
엘케인의 말에 촌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놈은 물건을 산 뒤 반드시 대금을 지불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가져가지 않지요.
엘케인은 결국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상대하러 가는 자는 정말 괴팍한 네크로멘서였다. 통상적인 네크로멘서의 범주를 벗어나는 정도 말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리나가 한 팔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놈의 본성이 그리 나쁘진 않아 보죠?
아니 그렇지 않아.
엘케인은 단호하게 사리나의 말을 잘랐다. 그는 이 중에서 유일하게 놈의 거처를 목격한 경험자였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를 확인한 만큼 네크로멘서에 대한 증오심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촌장의 얼굴을 살폈다.
마을 사람들이 놈에게 물건을 팔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놈이 밉지 않습니까?
촌장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서렸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들은 그저 운이 나빠 사고를 당했거니 생각할 뿐입니다. 사실 최근 들어 살기가 그리 어렵지 않거든요. 놈의 거처에만 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죽을 일이 없고, 게다가 놈이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용히 왔다가 물건만 사갈 뿐이지요. 어쨌거나 저희들이 놈을 상대할 방법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무기력함이 감도는 촌장의 얼굴을 보며 엘케인은 반드시 놈을 잡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꿀맛이군.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가를 닦았다. 자화자찬을 하긴 싫었지만 자신의 요리실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뛰어났다. 마을에서 사 온 재료로 오랜만에 솜씨를 부려보았던 데이몬이었다. 500년 동안 먹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그는 한껏 식도락에 취미를 들인 상태였다.
나 혼자 먹긴 정말 아까운 걸…….
배를 두드리던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목이 없는 기사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언데드, 바로 듀라한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너도 먹고싶은가 보군? 하지만 머리통이 손에 들려 있으니 그럴 수 있을까?
듀라한은 그저 멍청히 눈알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듀라한은 지성이 없다. 구울이나 와이트 따위의 하급 언데드와 마찬가지로 내려진 명령만 철저히 수행할 뿐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힘든 마물이었다.
그 때문에 듀라한은 가공할 만한 전투능력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 투입하는 전사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암흑군대의 지휘관을 맡는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데이몬은 느긋한 눈빛으로 듀라한의 전신을 둘러보았다.
윈슬럿. 이거 아느냐? 지금 네 전투력이 원터데일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보다 적어도 열 배는 강해졌다는 사실을…….
물론 듀라한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멍청하게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는 윈슬럿. 녀석은 애초에 윈터데일이 만들어낸 듀라한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완성시킨 이후 윈슬럿의 전투력은 파격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중급 언데드 몬스터에 불과하지만 평범한 데스 나이트(마스터 급이 아닌)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듀라한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윈슬럿을 데이몬은 거처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쓰고 있었다. 이따금 짐꾼으로도 쓰긴 하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또다시 마력을 뽑으러 가봐야겠군.
그는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보관해 놓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여곡절 끝에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데이몬의 손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샅샅이 뒤지던 데스 나이트들이 마침내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마법의 구슬을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봉인구를 손에 든 데이몬은 마침내 복수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제 나는 드래곤에 맞설 힘을 보유할 수 있다.
봉인구에서 아른거리며 피어나는 어둠의 마력. 데이몬은 그만 거기에 매료되어버렸다.
봉인구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지금껏 자신이 끌어 모아온 마력보다 순도 면에서도 월등했고 또한 강력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데스 나이트들을 강력하게 만드는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없진 않았으니…….
한 번에 일정분량이상 뽑아낼 수 없을 듯 하군. 봉인구의 균형이 깨어져 나이델하르크가 눈을 뜬다면 말짱 헛고생이니 말이야.
이것은 한 달간의 연구 끝에 데이몬이 내린 결론이었다. 봉인구에는 드래곤들이 펼친 것으로 짐작되는 여러 가지 마법의 힘이 총 결집되어 있었고 이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이델하르크를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만약 그 균형이 깨어진다면 놈은 다시 현세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돼.
나이델하르크가 깨어난다면 복수는 거의 틀림없이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놈이 드래곤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다프네를 되찾는 것은 말 그대로 염원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의 마왕이 성녀를 살려둘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이상 그가 마왕에게서 벗어날 길은 없으므로.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무척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정석적인 방법을 이용해야겠군.
그는 우선 마법진을 이용해서 봉인구에서 조금씩 마력을 흡수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봉인구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조금씩 데이몬에 의해 모여졌다.
그것으로 윈슬럿을 완성시켰지. 더불어 헬버트론과 함께…….
데스 나이트 모두를 강하게 하는 것은 아직까지 시기 상조였다. 때문에 그는 우선적으로 헬버트론에게만 마력을 주입했다.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아직까지 인크레시아에서 보물찾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헬버트론이 아직 충분히 강해지지 못하다는 점이다. 생전에 가지고 있던 능력의 50% 정도를 간신히 발휘할 수 있을 뿐이었다. 데이몬이 충분한 마력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강해지려면 마력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난다면 극복될 문제라서 데이몬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작정했다. 봉인구의 마력이 마법진에 의해 지속적으로 뽑아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헬버트론은 오래지 않아 생전의 위력을 되찾을 것이었다.
밀실에 들어가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나서 데이몬을 맞았다.
오늘은 조금 늦었군.
데이몬을 맞은 것은 데스 나이트였다. 투구의 눈구멍사이에서 이글거리는 광망은 지옥의 업화인 양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고 칠흑같이 검은 갑옷을 두른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지옥의 전사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무표정하게 데스 나이트를 돌아볼 뿐이었다.
봉인구에는 별 일 없지? 헬버트론.
물론 있을 턱이 없지.
놀랍게도 헬버트론의 말투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기괴하게 공명되는 데스 나이트 특유의 음성이 아니었다. 물론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음산하기는 했지만 데이몬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스터 급으로 올라선 이상 음성 정도는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히죽 웃었다.
혼자만 식사해서 미안하군. 살아있을 때 내가 만든 요리를 상당히 좋아했었지.
강렬하던 헬버트론의 안광이 조금 옅어졌다.
그랬었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젠 미각을 느낄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하긴.
데이몬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헬버트론으로 하여금 봉인구를 지키게 한 것은 정말 탁월한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생전의 50%에 지나지 않는 실력만으로도 헬버트론은 충분히 강했다. 살아있을 때 워낙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 정도는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실력이라고나 할까?
조금만 기다려. 어둠의 마력을 뽑아내는 대로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데스 나이트가 된 보람이 없을 테니까…….
헬버트론의 퉁명스런 대꾸에 데이몬은 얼굴을 구겼다.
이런 빌어먹을……. 명색이 네놈들을 만들어 낸 주인인데 좀 고분고분한 면이 있어라.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에다 이젠 비꼬기까지 하냐?
어쩔 수 없다. 네가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고위급 네크로멘서가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낼 경우 통상적으로 전투력은 극대화시키는 반면 생전의 지성은 상당수 억제한다. 그래야만 데스 나이트가 명령을 충실히 받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데스 나이트 넷의 지성을 거의 생전의 수준까지 복원시켰다. 어차피 전투력이야 나중에도 향상시킬 수 있는 법. 맹목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데스 나이트보다 상황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놈들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데스 나이트들의 태도가 무척 불경스럽게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을 말아야지.
데이몬은 쯔쯔 혀를 차며 마법진으로 향했다.
덜컥.
문이 열리자 커다란 석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의 기괴막측한 문자와 도형들이 마법진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마법진은 마나가 흩어지지 않도록 모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이 마법진만은 용도가 달랐다. 중심 부분에서 모종의 기운을 계속해서 빼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진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구슬이 하나 놓여있었다. 칙칙한 검은 빛을 띠는 사람 주먹만한 구슬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 바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였다. 어둠의 군대를 규합해서 인간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만 드래곤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봉인되어버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
그가 바로 이 구슬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왕이 보유했던 마력은 봉인구에서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었다. 마치 마계의 수하들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듯이 말이다. 마법진은 바로 그 마력을 끌어 모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마력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그런 내력을 가진 봉인구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얼굴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무공과 마법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사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난 뒤 데이몬은 전력을 다해 무공을 연성하려고 마음먹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드래곤을 상대하기가 더욱 용이하리란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단전이 파괴된 이전과는 달리 새로 얻은 몸으로 무공을 익히기란 충분히 가능했다.
이미 내공심법과 무공의 구결은 그의 뇌리 속에 남김없이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그는 마법의 극한에 다다른 대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법과 무공은 같은 마나를 이용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운용방법 면에서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그 때문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연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
무공은 주위에서 같은 성질의 마나를 조금씩 끌어 모아 내공심법을 통해 정제시킨 뒤 몸 속 단전에 저장한다. 따라서 단전에 저장된 내공은 극도로 정제되고 농축된 상태의 마나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내가고수는 바로 그것을 이용해서 검기나 호신강기를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은 달랐다.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은다는 점에서는 일치했지만 그 마나를 체외에서 재배열해서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현저한 운용방법의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법사와 내가고수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두 가지를 함께 병행한다는 것은 아무리 데이몬이 과거에 절세고수였어도 불가능했다. 물론 익히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마법 능력이 퇴보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마법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침내 무공을 익히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나에겐 네 명의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가 있으니…….
비록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에겐 소드 마스터에 결코 못하지 않는 조력자가 있었다. 물론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 녀석들이긴 해도 말이다.
무공에 대한 것은 잊고 마법에만 열중해야겠군. 체력단련은 결코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지만 말이야.
사실 무공을 익힐 수 없다고 해도 데이몬에겐 충분히 위력적인 몸놀림과 체술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사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은 크게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따르르릉.
그것이 알람 마법에서 전해지는 소리란 것을 알아차리자 데이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고 원래 윈터데일이 설치해 놓은 것을 데이몬이 복원해놓은 경보망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침입자가 생긴 것이므로 데이몬의 얼굴에 재미있겠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달 전 안트로스의 토벌군을 상대한 뒤로 처음이었다.
무료한데 잘 되었군.
그는 얼른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침입자들의 실력과 구성을 가늠해본 뒤 대응할 생각에서였다.
저기입니다.
촌장은 떨리는 손을 들어 멀리 떨어진 동굴입구를 가리켰다. 평소라면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아주겠다고 머나먼 크로센 제국에서 토벌대가 왔는데 위험을 각오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연신 동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촌장의 얼굴에는 극도로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엘케인이 손을 뻗어 촌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촌장님께서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만 돌아가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웃는 낯으로 촌장을 안심시킨 뒤 엘케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근엄하게 변해있었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대원들에게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팔라딘 둘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경험이 없는 수습기사들이었으므로 작전에 앞서 군기를 확실히 잡아야 했다.
평소 교육받았던 대로 진용을 짜서 진입한기로 한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허둥지둥하는 놈이 있다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 그리고 명심하도록.
이번 기회가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데 가장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너희들이 알다시피 팔라딘이 되는 것은 실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을 세우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만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한다. 알겠는가?
말을 마친 엘케인은 수련 기사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경험이 많은 팔라딘들은 비교적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수련 기사들의 얼굴에는 오로지 긴장감만이 가득했다. 엘케인은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중에서 놈을 잡거나 처치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 즉시 팔라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내 명예를 걸고 보증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줄 테니까…….
와아아아.
수련 기사들은 비로소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련기사들에게 팔라딘이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엘케인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전투준비.
열 다섯 명의 수련 기사들은 부산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부관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대동해 온 두 명의 팔라딘 중 한 명이었다.
윌터라는 이름을 가진 부관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엘케인의 귓전에 소곤거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잠깐 사이에 저들에게 투지를 불어넣다니…….
교관 노릇을 오래 해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지.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놈을 분명히 잡을 수 있겠지?
윌터 역시 1차 토벌군의 일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놈이 흑마법과 소환술을 쓰는 이상 이번에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미 패밀리어를 추적하는 스크롤까지 준비해왔으니까요.
확실하겠지?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엘케인은 이번에는 소서리스를 돌아보았다.
사리나. 자네도 준비하게.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엄연히 자네 임무니까…….
걱정 마세요. 네크로멘서라 해도 고작해야 4서클의 엑스퍼트인데 그 정도도 제압 못하겠어요? 전 5서클의 마스터라고요.
그런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엘케인은 지체 없이 진입을 명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열 다섯 명의 수련기사들이 일제히 동굴의 입구로 뛰어들었다. 대 마법 갑옷을 입은 자들을 선두에 세운 채 말이다. 그 뒤를 팔라딘 두 명이 받쳤으며 소드 마스터인 엘케인과 소서리스는 바짝 뒤따랐다.
소드 마스터라……. 아무래도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토벌대 같군.
침입자들의 정체를 파악한 뒤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마법을 배우기 전에도 적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물며 마법까지 사용해 탐지까지 했으니 침입자의 능력 정도는 완벽히 파악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럼 손님 맞을 준비나 슬슬 해 볼까?
소드 마스터란 존재가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상관할 것은 없었다. 이곳에 온 뒤 그는 팔라딘과 소드 마스터의 차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젠가르트에게 아르카디아에 대한 제반지식을 설명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만이 소드 마스터로 불린다는 사실. 그 외 검기만을 운용하는 자들은 아르카디아에서 모조리 팔라딘으로 불린다. 물론 검기 정도야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소드 마스터는 어떠한 경우에도 얕봐서는 안 된다. 그들의 오러 블레이드는 데이몬이 펼친 9서클의 실드라고 해도 가를 수 있었으니까…….
물론 데이몬이 전력을 다한다면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상대가 되지 못함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소드 마스터라도 헬 파이어 한 방이면 그대로 재로 변할 테니까……. 하지만 칠종단금술 때문에 데이몬은 결코 상대를 죽일 수 없다.
접전의 와중에 실수로 놈들이 하나라도 죽는다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데이몬은 봉인구를 지키고 있는 데스 나이트의 조력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헬버트론을 한 번 이용해야겠군. 두 명의 팔라딘은 윈슬럿에게 맡기면 될 테고…….
대응 전략을 짠 데이몬은 지체 없이 침입자를 마중 나갔다.
기세 좋게 동굴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토벌대. 이미 네크로멘서가 4서클 정도의 수준 낮은 흑마법사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기사들은 별반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도리어 지휘관인 엘케인은 꼭꼭 숨은 네크로멘서를 찾아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뒤 즉시 산개해서 혹시라도 있을 퇴로를 차단한다. 스크롤을 사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놈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은 네크로멘서가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꼭꼭 숨어있을 것이라 간주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가장 큰 오산이었으니……. 동굴 속으로 들어간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헤아릴 수 없는 빛무리가 그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콰콰콰콰.
엄청난 규모였으므로 선두에 선 기사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노래져버렸다.
서, 선제 공격이다.
매직 미사일이다. 서둘러 방어진을 쳐라.
엘케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서둘러 진형을 정비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는지 익히 짐작할 만했다.
대마법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방패를 치켜세웠고 그렇지 못한 기사들은 뒤를 단단히 받쳤다. 물론 마법 저항력이 강한 엘케인과 두 명의 팔라딘들이 선두로 나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캐스팅했는지 사리나의 전신에도 푸른 광막이 씌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준비를 갖춘 토벌대의 위를 빛무리가 사정없이 덮어씌웠다. 물론 그것은 데이몬이 대면인사 삼아 퍼부은 매직 미사일 세례였다.
퍼퍼퍽.
연이어 터져 나오는 둔중한 타격음. 그 속에는 고통에 겨워하는 비명소리가 간간이 섞여 있었다.
크윽.
물론 가해진 것이 화살공격이었다면 토벌대의 진용은 정말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직선이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화살은 대부분 방패에 맞고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진 공격은 애석하게도 매직 미사일 세례였다. 또한 그것을 조종하는 자가 9서클의 마스터였으니 위력이 상상불허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콰콰쾅.
대부분의 매직 미사일이 방패를 때렸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몇 발의 매직 미사일이 마치 살아있는 미꾸라지처럼 원활히 움직이며 뒤편의 기사들을 가격했다.
비명소리는 바로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공격이 한 차례 지나가자 엘케인은 벼락같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공격이 끝났다. 돌격! 으헉?
막 튀어나가려 하던 엘케인은 기겁을 하며 다시 방패로 몸을 가렸다. 마법 공격의 특성상 한 차례 공격을 가했으니 마법사에겐 2탄을 날리기 위한 준비기간이 반드시 필요한 법. 그 틈을 노리려고 마음먹었는데 그만 엘케인의 예상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엄청난 수의 매직 미사일이 또다시 동굴 내부를 새카맣게 뒤덮으며 날아들고 있었다.
파파파팟.
오히려 1차 공격보다도 더한 규모였다. 방패 뒤에 움츠린 엘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제기랄. 뭐가 어찌된 거야.
퍼부어진 매직 미사일 세례가 몸을 움츠린 토벌대 진용을 무자비하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이번에도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주위를 돌아본 엘케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런.
수련기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날아온 매직미사일에는 대마법 갑옷도 소용없었다. 단 한 방으로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고 두 번째 공격에 갑옷이 부서졌다. 그 상태에서 수련기사들이 버틸 리는 만무했다. 자신이나 팔라딘이면 몰라도 수련기사들이 이 정도 마법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미치겠군.
매직 미사일이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번의 매직 미사일 공격에 수련기사 15명은 완전히 궤멸되어버렸다. 다행히 죽은 이는 없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의 수련기사들이 갑옷과 방패가 산산이 으스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서 있는 것은 자신과 두 명의 팔라딘, 그리고 사리나 뿐이었다. 마법 방어력이 높은 자들과 실드를 펼쳐놓았던 사리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쓰러진 수련기사들에게서 끊임없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으으.
아, 아파.
그 모습을 본 엘케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자식을?
엘케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그의 뇌리 속에는 공격을 가한 마법사를 잡아 회를 떠버릴 생각밖에는 없었다. 팔라딘 두 명이 그의 뒤를 바짝 붙어 뒤따랐다.
실드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사리나의 입은 어느새 딱 벌어져 있었다.
저, 정말 엄청난 매직 미사일이야. 어찌 저렇게 많은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까?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사리나는 곧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놈의 종적을 찾아내어 달라붙으면 그들을 배후 지원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의 임무였고 그녀는 지금껏 수없이 임무를 성공시켰다. 5서클의 마스터답게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다발이 순식간에 캐스팅되었다.
파파파팟.
보편적으로 흑마법사들은 빛을 이용한 공격에 취약한 면을 보인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빗나가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이 정도 라이트닝 볼트 다발이라면 아무리 강한 네크로멘서라도 일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틈을 타서 기사들이 공격을 가한다면 네크로멘서는 분명히 두 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사리나는 그 사실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크로멘서가 어디에 있지?
라이트닝 볼트를 잔뜩 캐스팅한 상태로 사리나는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네크로멘서를 찾는 즉시 실드를 풀고 라이트닝 볼트를 날릴 계산이었다. 그녀는 특히 기사들이 공격해 들어가는 쪽을 면밀히 살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득의한 듯한 빛이 일어났다.
저기 있군.
기사들이 돌진하는 쪽으로 검은 로브를 입고 서 있는 자 하나가 보였다. 목표를 발견하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실드를 풀었다.
츠츠츠.
라이트닝 볼트가 캐스팅 된 마법 지팡이에서 급격히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뭔가 캐스팅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마법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라이트닝 볼트의 속도를 능가하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명백한 오산이었다.
까아악.
라이트닝 볼트가 채 발사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서 뾰쪽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갑자기 허공에서 벌렁 뒤집혔던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사리나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올린 형상이었다. 막 실드를 풀고 공격을 감행하려던 그녀로써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것은 업셋(upset)?
자신에게 걸린 것은 중력의 방향을 일정시간 거꾸로 바꿔버리는 마법이었다. 거꾸로 뒤집혔으니 치마가 흘러내리는 것은 당연지사.
어머머.
여자로써의 본능에 의해 사리나는 반사적으로 흘러내리는 치마를 부여잡았다. 그 탓에 마법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고 기껏 캐스팅해 놓은 라이트닝 볼트는 정말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꺄아아악.
급속히 침습해 오는 공포에 사리나는 한껏 비명을 내질렀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치마를 잡은 두 손을 한껏 뻗어 속옷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적의 공격에 완전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었다. 물론 네크로멘서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유유하게 날아온 매직 미사일 한 방이 우아하게 복부를 가격하자 그녀는 그대로 까무러쳐 버렸다.
퍽.
손에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졌고 결국 치마가 흘러내렸다. 의식을 잃은 사리나는 거꾸로 매달린 채 속옷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 계집을 상대하는 방법은 중원이나 이곳이나 똑같단 말이야.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사리나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괴소를 머금었다. 사파 고수였던 그가 적을 상대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릴 이유란 없었다. 여자로써의 본능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한 공격. 그 덕에 5서클의 소서리스 한 명을 아주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그냥 싸웠어도 금방 제압했을 테지만.
그나저나 금방 끝나겠군.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남은 세 기사를 느긋하게 쳐다보았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기사들은 뜻밖의 복병을 만나 고전 중이었다. 데스 나이트 하나와 듀라한에 의해.
푸캉.
헬버트론과 윈슬럿이 압도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것을 흘겨보며 데이몬은 느긋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싸움구경이었지만 이미 데이몬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다.
그럼 굴러 들어온 떡이나 느긋하게 감상해볼까?
그의 고개가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갔다. 기절한 채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소서리스에게로 말이다. 사리나의 새하얀 허벅지를 주시하던 데이몬의 입가에는 어느새 군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햐! 고것 보면 볼 수록 괜찮네?
이, 이럴 수가?
엘케인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하지만 놀랄 틈이란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존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당해낼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는 죽을힘을 다해 수비에만 열중해야 했다. 뼈저린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 글렀어. 도저히 당해낼 상대가 아니야.
말을 하는 사이에도 상대의 매서운 공세가 방패에 작렬했다.
콰쾅.
마나를 한껏 불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패의 상단 부분이 잘려나갔다. 그냥 막았다면 방패가 그대로 두 쪽이 나버렸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상대는 데스 나이트였다. 그것도 갑옷과 검에서 거무스름한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올리고 있는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놀랍게도 데스 나이트의 실력은 자신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매서운 공격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퇴. 틈이라 생각되면 가차없이 파고들었고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도 간단한 손동작으로 손쉽게 흘려버렸다.
방패를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았으니 생전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데스 나이트가 이렇게 강하다니…….
데스 나이트에게 밀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엘케인이었다. 상대는 소드 마스터인 자신을 아예 가지고 놀 듯 다루고 있었다.
이익.
부아가 치민 엘케인이 맹목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일체의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
하지만 놈은 검을 휘둘러 아주 가볍게 자신의 공격을 차단했다. 뒤로 주춤 물러선 엘케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길 수 없어. 절대로…….
이미 휘하의 팔라딘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한 명은 오른 팔이 부러진 채 기절해 있었고 그나마 남은 윌터 역시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이었다. 머리통을 왼쪽 옆구리에 꼭 낀 채 오른 손의 배틀 엑스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 모습은 윌터를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콰쾅.
거대한 배틀 액스가 방패에 작렬하자 윌터는 뒤로 형편없이 쭉 밀려갔다. 엄청난 괴력. 그와 싸우는 듀라한 역시 비정상적으로 강한 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통상적으로 팔라딘 정도 되는 기사는 충분히 듀라한을 상대할 수 있다. 검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검기를 끌어올린다면 듀라한을 충분히 두 조각 낼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듀라한은 달랐다.
우선 놈이 들고 있는 황금빛 배틀 엑스는 검기가 서린 윌터의 검을 무리 없이 방어하고 있었고, 한 손만으로도 윌터를 아예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롭게 그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또다시 무시무시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엘케인은 사력을 다해 검에 곧추세우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파파파팍.
엘케인의 건장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간신히 공격을 차단하기는 했다. 하지만 맞닿은 검에서 자욱한 스파크가 튀기며 자신의 검에 서린 푸른 빛 기운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정황을 보아 상대의 검에도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있음이 분명했다. 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위력의 오러 블레이드가…….
미치겠군.
기가 질린 엘케인은 또다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을 들을 대상이 아무도 없었다. 윌터마저 그가 보는 앞에서 쓰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크으윽.
듀라한의 도끼에 허벅지를 찍힌 윌터가 힘없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듀라한은 넘어진 윌터의 가슴을 지긋이 밟으며 쥐고 있던 검을 쳐서 멀리 날려버렸다.
퍽.
죽일 생각은 없는지 듀라한은 도끼의 뒷면으로 투구를 후려갈겼고 윌터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이제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는 엘케인만이 유일했다.
이미 사리나는 정신을 잃고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당했는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데스 나이트와 잠깐 싸우다가 물러나 보니 상황이 완전히 종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훤히 드러난 사리나의 속옷과 허벅지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엘케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끄, 끝장이야.
이미 앞에는 맹위를 떨친 데스 나이트가 안광을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놈 하나만도 자신이 없었는데 듀라한마저 뒤를 차단하고 있으니 승산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챙그렁.
그는 검을 버리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저항해봐야 도리가 없었으므로 깨끗하게 최후를 맞이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엘케인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퍽
둔중한 타격 소리와 함께 그의 의식은 어두운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엘케인의 건장한 육체가 힘없이 허물어지며 검을 늘어뜨린 데스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끄으응.
엘케인은 머리에서 아련한 통증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그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통증이 전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내, 내가 살아있었나?
부지불식간에 정신이 번쩍 든 엘케인은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비로소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주위의 상황이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보이는 것은 굴비두릅처럼 줄지어 묶여 있는 부하들이었다. 윌터를 필두로 팔라딘과 수련기사들이 일렬로 벽에 묶여 있었고 가장 끝에는 사리나가 있었다.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보니 그녀 역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의 상태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이군
다행히도 죽은 자는 없는 듯 보였다. 하나같이 부상을 입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깨어나셨습니까?
옆에 묶인 윌터가 말을 걸어왔다. 머리에 피가 흥건히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제법 호되게 당한 것 같았다. 엘케인의 시선이 윌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모두들 이렇게 묶여 있더군요.
그럼 우린 네크로멘서의 포로가 된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엘케인의 얼굴에 극도의 상심이 어렸다. 명예로운 기사로써 네크로멘서 따위의 포로가 되다니……. 엘케인에게는 차라리 전사하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방도가 없었다. 네크로멘서가 거느린 전력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아르카디아에 이렇게 강한 네크로멘서가 있을 줄은…….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사리나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 상당히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엘케인은 한 가닥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사리나. 혹시 마법을 쓸 수 있겠어?
사리나는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그녀의 주위에는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불가능해요.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단 한 점의 마나도 끌어 모을 수 없네요.
놀랍군. 놈의 실력으로 사리나를 제압하다니…….
그 말에 사리나는 고개를 팩 돌렸다.
놈은 결코 4서클의 엑스퍼트가 아니에요. 나에게 가한 업셋(upset)은 적어도 5서클이 넘어가는 고위급 마법이니까…….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매직 미사일을 발사한 수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어요. 상황을 미루어 놈은 최소한 7서클, 최악의 경우 8서클을 상회하는 대마법사일 가능성이 농후해요. 대관절 4서클의 엑스퍼트란 말이 어떤 녀석의 입에서 나왔는지 궁금하군요.
그녀의 눈빛에는 광기 같은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네크로멘서에게 발하는 순수한 분노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잠깐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에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자신의 허벅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침까지 질질 흘리며 말이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였으므로 사리나로썬 다급하게 치마를 밀어 올리며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악.
네크로멘서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구경 한 번 정말 잘 했군.
그가 손짓을 하자 데스 나이트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놈은 자신을 벌렁 둘러메더니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일을 상기한 사리나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을 이어나갔다.
데스 나이트는 날 이방으로 메고 와서 의자에 묶었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자 듀라한이 기절한 기사들을 하나씩 데리고 와서 벽에다 묶더군요. 엘케인님이 가장 나중에 들어왔어요.
도대체 놈의 꿍꿍이가 뭘까?
엘케인을 비롯한 토벌대 대원들은 네크로멘서의 의도에 대해 머리가 빠져라 고민해야 했다. 이미 모든 무기를 빼앗긴 상태였고 사리나마저도 마법을 전혀 쓰지 못했다. 말 그대로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네크로멘서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은 누구하나 살아남을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로썬 시시각각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척 지루하게 자신들의 종말을 기다리던 토벌대 기사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덜컥.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의외로 평범한 용모를 지닌 늙은 마법사였다. 물론 사리나는 한 눈에 사악한 네크로멘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괴소를 흘렸다.
크크크. 무척 오래 기다렸지? 준비할 것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시간을 끌었네.
미안하군.
그 말에 사리나의 눈에서 쌍심지가 돋았다.
이런 나쁜 자식. 감히 내, 내
아무리 전장에서 단련된 워 소서리스라 하더라도 본성이 여자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사리나는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씨근거리기만 했다. 무슨 뜻인지 익히 짐작하면서도 능청을 떠는 데이몬이었다.
내가 뭘 어쨌기에?
나쁜 새끼! 멍게, 말미잘, 비루먹은 오크 꼬랑지 같은 놈. 풀려나기만 하면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야.
사리나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자 데이몬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물론 여자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하물며 한 때 절대자였던 데이몬에겐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냉랭한 기가 돌았다.
한 번만 더 욕을 한다면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다.
혼? 어떻게 혼을 내려고? 고작해야 네 녀석이 죽이기밖에 더 하겠어? 한 번 해보지 그래? 난 죽음 따윈 하나도 겁나지 않아.
사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지긋한 나이의 늙은이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봐서 그녀의 성질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이런 일에 이력이 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어떤 방법으로 협박을 해야 정통으로 들어먹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등뒤에 서 있는 윈슬럿에게 고개를 돌렸다.
윈슬럿. 당장 저년을 발가벗겨서 거꾸로 매달아라. 기다린다고 지루했을 텐데 저놈들에게 눈요기라도 조금 시켜줘야지.
그 말에 사리나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 그것도 하급자인 수련기사들에게 알몸을 보이고 싶은 여자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 물론 데이몬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것이었다. 듀라한은 심령으로 움직이는 언데드였고 지금처럼 말로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생각만 하면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뜻이 충분히 전해졌는지 윈슬럿은 어슬렁거리며 사리나에게 다가갔다.
윈슬럿의 흉측한 몰골을 보자 사리나는 또다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살려줘요.
그 모습을 보던 엘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험이 많은 그는 상대의 장난기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만하시오. 내가 부탁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욕설을 하지 않을 거요.
데이몬의 시선이 엘케인의 얼굴로 향했다.
그대가 지휘자인가?
그렇소. 나는 듀렐류드 가문의 엘케인이라 하오. 크로센 제국의 근위 기사로써 토벌대의 책임자를 맡고 있소.
전혀 굴하지 않고 데이몬의 시선을 맞받는 모습을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엔 겁먹은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 따윈 웃으며 받아들이겠다는 기백을 보니 마치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의 표상이라고 일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은 녀석이로군.
칭찬 따윌 받고 생각은 없소. 그저 힘이 모자라 당신을 처벌하지 못하게 된 것이 원통하기만 하니 말이오.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여한은 없소. 머지 않아 당신을 잡기 위해 더욱 강력한 기사단이 수도에서 도착할 것이니까……. 그들이 반드시 우리들의 원한을 갚아줄 것이오.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엘케인의 대답. 하지만 데이몬은 냉랭하게 코웃음 칠 뿐이었다.
그깟 녀석들 떼거지로 와봐야 하등 겁날 것도 없다.
그렇진 않을 거요. 크로센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1백여 소드 마스터 중에는 내가 가장 약하니 말이오. 비록 당신의 데스 나이트가 제법 강하긴 하지만 그들 모두를 감당하진 못할 것이오. 당신 뒤에 서 있는 듀라한까지 합세한다고 해도 말이오.
그 말에 데이몬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햐! 팔라딘도 아니고 소드 마스터가 백 명씩이나? 정말 대단한 전력이로군.
당신이 악명을 떨칠 날도 오래 남지 않았소. 머지않아 최후가 닥쳐올 테니 기대하시오.
데이몬은 엘케인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악명이라. 내가 그렇게 악명을 높았던가? 내 기억으론 이곳에 와서 그다지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엘케인의 두 눈에 분노의 광망이 줄기줄기 솟구쳐 올랐다. 저번에 들어왔을 때의 참상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증스러운……. 꼭 말로 해야 알겠소? 언제 치웠는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썩어 가는 장면을 목격했었소. 정확히 1년 전에 말이오. 사람으로써 어찌 그리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소?
서슬 퍼런 엘케인의 질책. 하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동요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군. 하지만 하나만 알아두게. 난 이곳에 와서 단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 말이야.
엘케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가증스럽게 거짓말을 하려 하시오? 당신의 죄악은 인간이 징벌하지 못한다면 신께서 반드시 징벌하실 것이오. 당신의 영혼은 억겁의 세월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을 테니 각오하시오.
추상같은 엘케인의 꾸짖음에 어지간한 데이몬도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아무래도 쓴맛을 보여줘야겠어.
마음대로 해 보시오. 발가벗겨 매달든 고문을 가하든 난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말을 마친 엘케인은 눈을 꼭 감았다. 데이몬은 무척 곤혹스런 눈빛으로 이 고지식한 기사를 어떻게 요리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는 우선 묶여 있는 기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좋아. 어떻게 생각하던 나에겐 상관없는 문제이니 일단 당면과제부터 해결해야겠군.
일단 너희들은 무단으로 내 거처에 침입한 죄를 지었다. 날 살상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침입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겠지?
물론 없소.
엘케인을 대신해 윌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당찬 태도였다.
심지어 수련기사들조차 죽음을 각오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크로센 기사단원의 마음가짐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이 이럴 진데 왜 명성을 떨치지 못하겠는가? 크로센 대제. 정말 부럽소. 배교의 수하들이 모두 이런 자들이었다면 진작 배교가 무림을 평정했을 텐데 말이오.'
물론 그를 따르던 수호마왕군은 이들에 비해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 불행히도 배교 무사들 대다수가 그렇지 못했기에 데이몬이 이런 처지에 놓여야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결코 나쁜 처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일단 저들의 기를 꺾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려면 실력행사가 필수였다.
그럼 어떤 놈부터 시작할까?
그의 오른 손에서 난데없이 푸른색 화염덩이가 이글거리며 생겨났다. 그의 마법실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마법, 헬 파이어였다. 삽시간에 사람 머리통만큼 커져버린 헬 파이어. 그것을 목격하자 인해 포로들의 얼굴엔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헤, 헬 파이어. 오, 신이시여…….
사리나는 헬 파이어를 보자마자 그대로 까무러쳤다. 9서클 궁극의 마법 헬 파이어.
이것은 그녀를 가르쳤던 스승조차 전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초고위급 마법이었다.
그것은 크로센 제국의 그 어떤 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센의 궁정을 맡고 있는 수석 마법사 필라모네스조차도 이제 겨우 8서클의 엑스퍼트에 불과했다.
벌써 일백여세가 넘은 노마법사도 그럴 진데 사리나는 오직 하겠는가? 그녀는 지금 마법계의 전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 세상에…….
어지간한 엘케인조차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역사상 9서클의 마스터에 오른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역사가 유구한 트루베니아에서조차 천년을 통틀어 단 두 명의 9서클 마스터가 나타났을 뿐이다. 그런 엄청난 마법사가 모습을 보였는데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엘케인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고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도,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오. 혹시…….
드래곤입니까?
엘케인으로썬 그렇게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9서클은 수명이 짧은 인간에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벽이었다. 심지어 마법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궁정 마법사 필라모네스 조차도 100여세가 되고 나서야 겨우 8서클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9서클에 오르기는 그만큼 힘들었다. 그러니 엘케인이 데이몬을 드래곤으로 간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데이몬의 분노를 자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엘케인이었다.
헉.
난데없이 상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살기에 엘케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맹렬한 살기가 데이몬의 눈에서 마치 이글거리듯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드래곤에게만은 거리낌없이 살기를 피워 올릴 수 있었던 데이몬. 그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경고하겠다. 앞으로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그 저주받은 존재를 거론하지 마라.
잔뜩 격양된 음성이었기에 엘케인은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봐서 상대가 드래곤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 엘케인을 향해 데이몬은 나지막이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네놈이 내 말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다. 내 말은 모두가 사실이니까…….
그리고 크로센 기사단이 이곳으로 몰려오더라도 난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겐 충분히 그것을 막을 능력이 있으니까…….
자신이 속한 기사단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에 엘케인이 발끈했다.
불가하오. 당신이 아무리 9서클의 마스터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리임에는 틀림이 없소. 물론 최고의 소드 마스터라도 헬 파이어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오.
그런 고위급 마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헬 파이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 번 전개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오. 아무리 당신이라 하더라도 고작 헬 파이어 대여섯 발이 한계일 터. 그것으론 우리 기사단을 당해낼 수 없소.
어찌 보면 상당히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이 빗나가서 미안하군. 난 적어도 하루에 20여 발이 넘는 헬 파이어를 전개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이 아니야. 나에겐 충분히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단 말이지.
엘케인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데스 나이트를 말하는 거요? 장담하건데 크로센 기사단원 다섯이면 충분히 당신의 데스 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을 거요.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 하나 가지고 큰소리치지 마시오.
미안하군. 내가 보유한 데스 나이트는 하나가 아닌데 말이야.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질렀다.
이봐! 모두 들어오도록 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시커먼 실루엣들이 소리도 없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엘케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가장 선두에 선 존재는 자신을 정말 무참히도 패퇴시켰던 데스 나이트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놈과 똑같이 생긴 데스 나이트가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
세상에…….
뒤따라 들어온 데스 나이트를 본 엘케인은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올 지경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강한 놈들이 하나도 부족해서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아예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런 엘케인을 감상하듯 지켜보며 데이몬은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이미 그는 완벽한 연출을 위해 인크레시아에 있던 나머지 데스 나이트까지 불러모은 다음이었다.
그럼 소개하지. 이쪽부터 이름이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라고 하지. 아! 헬버트론은 잘 알겠군. 네 놈을 제압한 녀석이니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망이 이글거리는 헬버트론의 시선이 엘케인의 얼굴에 쏘아졌다. 유부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애송이. 제법 실력이 쓸만하긴 했지만 아직은 멀었어. 수련을 한참 더 해야 할 것 같군.
이죽거리는 상대를 보고도 엘케인은 일언반구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월등히 말이다.
자신들의 지휘자이며 또한 우상이기도 한 엘케인을 애송이 취급하자 윌터를 비롯한 수련 기사들의 눈에서 분노가 샘솟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들이 끼여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들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기로 그 정도 큰 제국의 기사단이라면 할 일이 결코 적지 않을 터. 그렇다면 보내봐야 고작 이삼십 명 안팎일 테지? 그 정도야 이들이 나서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내가 합세한다면 사십 명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군. 헬 파이어 한 발에 한 명씩…….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엘케인은 겨우겨우 입을 떼었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황제폐하께서는 분명 기사단 전원을 파견하실 것이오. 당신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멍청하긴. 병석에 누워있는 황제가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크로센 제국은 귀족들의 권력다툼 때문에 완전히 난장판이라 하더군. 그 때문에 기사단의 주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도를 비울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권력장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귀족들이 얼씨구나 하고 황궁을 점령할 것이 분명하지. 그렇지 않은가?
상대가 너무도 정확하게 황궁의 사정을 짚어내자 엘케인은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놈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면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야. 아니.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깡그리 죽여버린다면 과연 이 사실이 수도에 전해질까?
구구 절절히 옳은 소리였기에 엘케인은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상황을 너무도 명철하게 꿰뚫고 있었다. 지금 크로센 제국의 사정으로는 눈앞의 네크로멘서를 감당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샘솟듯 치밀어 오르는 절망감에 엘케인은 가늘게 몸을 떨어야 했다.
'오 신이시여. 어찌 이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이제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너희들을 처리해야 할 시간인데…….
턱에 손을 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척 하던 데이몬은 그것이라는 듯 손뼉을 딱 쳤다.
그렇지! 이러면 되겠군. 나는 너희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기회?
엘케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데이몬은 상대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물론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네놈이 믿거나 말거나 이곳에서 지낸 1년 동안 나는 한 사람의 목숨도 끊지 않았다. 따라서 너희들을 죽인다는 것이 내겐 그리 탐탁지 않아.
촌장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지라 엘케인의 얼굴에 뭔가 미심쩍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더불어 9서클의 마스터에 오른 자가 섣불리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당신이 1년 전에 이곳에 왔다는 말이 사실이오?
데이몬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원래 이곳엔 윈터데일인가 하는 놈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 놈이 시체를 워낙 많이 널어놓아서 치운다고 고생을 좀 했지만 말이야.
엘케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 그자는 어디에 있소?
지하감옥에 있어. 패밀리어를 깡그리 없애 버렸더니 완전히 미쳐버렸어. 어쨌거나 그놈도 죽이기가 싫어 그냥 지하감옥에 가둬두고 있어.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데이몬. 이제 엘케인은 상대의 말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말과 유추해보면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얘기였다. 그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노, 놈을 나에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당신의 말을 완전히 믿겠소.
임무에 비교적 충실한 편인 엘케인의 태도에 호감이 가긴 했지만 데이몬은 짐짓 안색을 굳혔다.
네놈이 지금 나에게 요구를 하는 것이냐? 기회를 주긴 했지만 아직까지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은 내가 꼭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엘케인은 풀 죽은 모습으로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그때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린 듯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말한 기회란 것이 무엇이오. 한 번 들어 봅시다.
조건은 간단하다. 나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지.
너무나도 간단한 조건이었기에 엘케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정도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소.
아무리 심지가 굳은 자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런 엘케인의 모습을 데스 나이트 넷과 듀라한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가? 그럼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지.
그러나 준비된 식단을 본 엘케인은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릇 세 개에 가득 담겨 나온 음식은 도저히 인간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커다란 그릇에는 온갖 흉물스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구더기와 지네, 거미, 바퀴벌레 따위 징그러운 벌레가 종류별로 푹 삶긴 채 싯누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래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는 박쥐와 개구리, 도마뱀의 머리통이 아직까지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얹혀 있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릇을 쳐다보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깨어난 사리나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라고나 할까? 엘케인은 눈을 부릅뜬 채 그릇을 노려보았다.
이, 이런 것을 먹으라는 말이오?
물론. 얼마나 맛있는데…….
데이몬은 서슴없이 박쥐의 머리통 하나를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우적.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에 엘케인은 가슴속이 메슥거려옴을 느꼈다. 눈 버젓이 뜨고 저것을 먹는다면 분명 사람이 아닐 터였다. 박쥐 머리통 하나를 깨끗이 해치운 데이몬은 계속해서 손을 그릇으로 가져갔다. 벌레로 보이는 것 한 주먹을 입 속에 털어 넣은 데이몬은 길쭉한, 엘케인이 아직까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이건 숫말의 거시기야. 맛이 정말 끝내주지.
입 속으로 사라지는 거시기(?)를 보며 엘케인은 진저리를 쳤다. 만지는 것조차 끔찍스런 음식들을 상대는 아주,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왜액.
결국 보고 있던 사리나가 마침내 먹은 것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몇 몇 비위 약한 수련 기사들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욕지기를 참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데이몬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꺼억. 잘 먹었다. 자네도 들지 그래?
태연스레 음식을 권하는 데이몬을 보며 엘케인은 결국 이성을 잃어 버렸다.
이런 것을 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소. 비록 당신의 포로가 되었지만 난 당당한 크로센 기사단의 일원이오. 내 명예를 더럽힐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시오.
그래? 자네 부하들의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인데도 말인가?
엘케인은 눈을 부릅뜬 채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상대는 지금 자신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참다 못한 윌터가 고함을 질렀다.
놈의 수작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포로가 된 순간부터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신경 쓰시지 말고 명예를 지키십시오.
심지어 수련기사들조차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상관의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에는 비장함조차 감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뜻을 꺾을 데이몬이 아니었다.
만약 자네가 그 음식을 먹는다면 소서리스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것을 약속하지. 더불어 너희들이 잡고자했던 네크로멘서 윈터데일의 신병까지 함께 말이야.
엘케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이 교차했다.
그 말이 정말이오?
물론. 음식을 비우는 순간 자네들은 풀려날 걸세. 어차피 윈터데일이란 놈은 나에게 하등 필요가 없는 존재이니 원한다면 즉시 넘겨주겠네.
그런데 왜 사리나를 제외시키는 것이오.
데이몬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리나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욕을 한 계집애를 순순히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마도 풀려나고 싶으면 저년도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먹어야 할 걸?
불쌍하게도 사리나는 입가에 거품을 부글부글 물고 있었다. 아까 상대에게 욕을 한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은 몰랐다. 보다 못한 엘케인이 그녀 편을 들었다.
그, 그건 너무하오. 여자에게 어찌…….
내 요구조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아. 그게 싫으면 이 자리에서 죽던가.
엘케인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자신의 목숨만 걸려 있다면 달게 죽음을 받아들이겠건만 앞길이 창창한 젊은 기사들까지 잃을 순 없었다. 하물며 저들은 자신이 직접 검술을 전수해왔던 부하들이 아니었던가? 사리나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애당초 잘못은 그녀에게 있었다.
먹겠소.
엘케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릇을 끌어당겼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먹는 것을 직접 보는 순간 욕지기를 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로써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릇의 음식들이 끊임없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밀려들어갔다.
와구와구.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는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 모습을 수련 기사들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엘케인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함이란 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엘케인 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습니다.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엘케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애절하게 쳐다보았다. 앞으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엘케인에게 충성하리라는 각오가 그들의 가슴에 깊숙이 새겨지고 있었다.
응?
눈을 감은 채 정신 없이 음식을 집어삼키던 엘케인이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맛을 보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결국 음식 맛을 보고야 말았던 엘케인이었다.
놀랍게도 음식의 맛은 너무나 훌륭했다. 지금껏 그가 먹어본 음식보다도 훨씬 뛰어난 맛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음식의 맛은 엘케인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음식의 맛은 어느덧 혀에 또렷이 각인되어가고 있었다.
음식의 맛은 달고 맵고 쓰고 짠 인간의 오감을 모조리 충족시키고 있었다. 연신 음식을 털어 넣던 엘케인의 손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제 그는 음식의 맛을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구더기나 바퀴벌레 따위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먹는 속도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접시는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달그락.
그릇에서 아무것도 집혀지지 않자 엘케인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릇 바닥에 지저분하게 깔려있는 벌레의 다리와 진액을 보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그는 두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훑어다 입 속에 집어넣었다.
결국 그릇은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깨끗이 비워졌다. 입가에 묻은 찌꺼기까지 모조리 털어 넣은 엘케인은 이제 되었냐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건을 충족시켰으니 약속을 지키겠네. 부하들을 풀어줄 테니 데리고 동굴 밖에 나가서 기다리게.
사, 사리나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데이몬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 계집애는 어떠한 경우에도 식사를 마쳐야 나갈 수 있네. 먹지 못한다면 죽여 시체라도 갖다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일단 나가서 기다리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야.
원터데일은 그 때 넘겨주겠네.
하, 하지만.
데이몬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묶인 밧줄을 풀어주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말로 할 때 순순히 들어라. 만용을 부리는 놈에겐 톡톡하게 쓴맛을 보여줄 테다.
엘케인을 비롯한 토벌대 기사들은 결국 데스 나이트들에게 떼밀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무기도 없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썬 속수무책이었다. 엘케인 역시 한 마디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사리나. 눈 딱 감고 먹어버려. 그 정도로 죽지 않으니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든 기사들이 쫓겨났다. 물론 데스 나이트들이 입구를 철통같이 경계할 테니 그들이 다시 들어올 우려는 없었다.
혼자 남게 되자 사리나는 아예 이성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물론 데이몬은 돌아가는 상황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사리나의 결박을 풀어준 뒤 데이몬은 무척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 이제 네 차례가 돌아왔군. 이 순간을 무척 기다렸지?
오. 신이시여.
까무러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애석하게도 사리나의 정신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뱃 속의 것을 모조리 게운 터라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릇에 담긴 흉물스런 음식을 보자마자 또다시 욕지기가 밀려왔다.
우왜액.
한참동안 위액을 토해낸 사리나는 한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토사물이 질펀하게 묻어 있었지만 그녀는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 제발 용서해줘요. 여자에게 어찌 이런 것을 먹일 수 있어요?
당연히 먹어야지. 여자는 사람 아닌가? 먹고 싸는 것이 똑같은데 왜 못 먹지?
능글능글하게 받아치는 데이몬. 사리나도 결국 마음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날 죽여. 죽으면 죽었지 저것은 죽어도 못 먹어.
사리나가 이판사판으로 나오자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이 흉소를 머금었다. 이미 이런 상황 정도는 미리 예상했던 데이몬이었다.
멍청하기는. 넘겨짚지 말도록…….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도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에 사리나는 생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되새겼다. 이미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노련한 사리나였다. 심지어 몸을 요구한다고 해도 사리나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음식을 먹는 편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그럼 절 어쩌실 생각이죠?
데이몬은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윈슬럿이 머리통을 옆구리에 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사리나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저, 저것은 듀라한이잖아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리나에게 데이몬이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저 녀석을 소개하지. 이름은 윈슬럿. 보다시피 제법 쓸만한 듀라한이지. 애석한 것은 저 녀석에게 적당한 짝이 없다는 것이야. 평소에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려서 말이다. 좋은 기회가 생긴 이상 난 너와 저 녀석 둘을 짝 지워주고 싶어. 물론 그것은 네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지.
사리나는 전신의 털이 급격히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저, 절 저 흉측한 듀, 듀라한에게 시, 시집보내겠다는……
데이몬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야. 내가 보기에는 더 없이 어울리는 한 쌍인 것 같군. 아! 밤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도록……. 만들면서 녀석의 남성이 더할 나위 없이 우람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했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