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따위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트루베니아 대륙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
그것도 모든 드래곤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복수이다.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아마 시도조차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할 것이다. 설사 이루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므로…….
망령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모호한 느낌을 주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잘들 있게. 여기서 영원히 산다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복수를 성공한다면 기필코 기별을 넣어 줄 테니…….
―잠깐 기다려라.
침묵을 지키던 4대 기사의 망령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머리가 붙어있는 헬버트론의 얼굴에는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만약 우리가 데스 나이트가 되어 널 도와준다면 복수를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것 같나?
상대가 반쯤 넘어왔다는 것을 직감한 데이몬은 슬며시 낚싯줄을 끌어당겼다.
멍청하기는…….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미리 얘기하지 않았나? 물론 도움이야 조금은 될 테지만 말이야.
―혹시라도 다른 일을 할 목적으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다른 일? 뭘 말하는 거지?
―사악한 네크로멘서들이 흔히 하는 일 말이다. 이를테면 인간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등등의 네 욕심을 채우는 일.
헬버트론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에는 일견 일리가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데스 나이트가 된 영혼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네크로멘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지력이 강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네크로멘서가 생전의 가족이나 군주를 처치하라 명한다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심정이 익히 이해가 되었지만 데이몬은 냉정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이로군. 그딴 소리하려거든 당장 꺼져버려.
―대답해 다오. 우리에겐 절실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망령들의 애절한 태도를 본 데이몬은 비로소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했다.
많은 것을 약속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드래곤과 싸우게 해 주는 것. 이것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
헬버트론의 얼굴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곧 나머지 세 기사의 망령들을 향해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망령들의 대화까지 엿들을 수 없었기에 데이몬은 그저 잠자코 기다렸다. 조금 뒤 헬버트론의 망령이 마치 대표자처럼 한 발 앞으로 나와 데이몬을 응시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다시 말해 데스 나이트가 되겠다는 뜻이다.
정말인가?
―물론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구제 받지 못하게 될 지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드래곤에게 복수하는 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감수하겠다.
―널 주인으로 모시겠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부리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직 하나. 드래곤의 몸뚱이에 검을 박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를 한낱 스켈레톤으로 만들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복수이니 말이다.
진심이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헬버트론의 말을 들으며 데이몬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강력한 조력자를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대법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데이몬은 짊어진 배낭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네크로멘시에 대한 지식이 모조리 머리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책을 볼 필요도 없었다. 데이몬은 헬버트론을 쳐다보았다.
마법진을 그리겠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준비는 되어있다.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계약에 동의한 영혼을 데스 나이트로 재 탄생시키기 위한 마법진이었다. 그러는 동안 네 명의 망령들은 데이몬이 그리는 마법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혼이 영원히 구제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 점의 후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끝났다.
맥이 빠진 듯한 음성과 함께 데이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시커먼 갑옷을 걸친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무척 얇은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신체 주요부분을 가리는 약식 갑옷이 아닌 전신 갑주였지만 두께가 비 이상적일 정도로 얇았다. 마치 갑옷 아래에 받쳐입는 가죽옷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갑주였다. 사슬갑옷 형식으로 되어 있었기에 움직이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방어력에 있어 현저한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법은 성공리에 끝났다. 데이몬이 그간 모아놓은 어둠의 마력(魔力)은 모조리 네 명의 망령들에게 주입되었고 그들은 드디어 실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의 몸체를 말이다. 데이몬에 의해 탄생된 데스 나이트들,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는 연신 안광을 희번덕거리며 서로를 둘러보았다.
그들 중 헬버트론이 극도로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기괴하게 공명되는 음성은 결계 속에서 들었던 것과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환영 때문에 한때 데스 나이트로 보였던 그들이 진짜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이것것이이 네네 마마력력의의 전전부부인인가가?
현재로써는.
마마왕왕이이 아아니니라라서서 예예상상은은 했했었었지지만만 조조금금 실실망망스스럽럽군군. 생생전전에에 내내가가 가가졌졌던던 능능력력의의 10%도도 되되지지 않않으으니니 말말이이야야.
나머지 세 기사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제제길길 드드래래곤곤의의 꼬꼬리리질질 한한 방방이이면면 가가루루가가 되되어어버버리리겠겠군군
스스켈켈레레톤톤보보다다 하하등등 나나을을 것것도도 없없겠겠어어.
가만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역정을 냈다. 사실 그가 모아놓은 마력은 겨우 이들을 데스 나이트로 변모시킬 수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네크로멘서가 끌어 모을 수 있는 어둠의 마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왕이 아닌 한 말이다.
잡담은 그만하도록. 이것이 전부가 아니니 말이야.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마법진을 거뒀다. 그러자 헬버트론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를를 더더 이이상상 만만들들지지 않않을을 것것인인가가?
그럴 필요가 없겠지?
그그렇렇다다면면 너너와와 우우리리 넷넷으으로로 드드래래곤곤을을 대대적적하하겠겠다다는는 뜻뜻인인가가?
현재로써는.
헬버트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무무리리라라고고 생생각각하하지지 않않나나? 이이 정정도도로로는는 드드래래곤곤은은커커녕녕 와와이이번번 한한 마마리리도도 제제대대로로 잡잡을을 수수 없없다. 우우리리에에게게 유유령령군군마마(幽靈軍馬: phantom steed )조조차차 만만들들어어 줄줄 마마력력이 이없없었었나나?
정정말말 실실망망스스럽럽군군. 이이러러려려면면 굳굳이이 우우리리를를 불불러러낼낼 필필요요가가 있있었었나나? 이이곳곳의의 망망령령들들 중중 아아무무나나 불불러러내내더더라라도도 이이 정정도도 수수준준의의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를를 만만들들 수수 있있을을 텐텐데데…….
데이몬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그래서 결정을 후회한다는 뜻인가?
아아니니 그그렇렇지지는는 않않다다. 계계약약을을 맺맺은은 이이상상 우우린린 너너의의 명명령령에에 절절대대 복복종종할할 것것이이다다. 하하지지만만 이이 상상태태론론 드드래래곤곤의의 일일초초지지적적도도 되되지지 못못한한다다는는 점점을을 보보장장할할 수수 있있다다. 그그러러니니 가가능능하하다다면면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를를 더더 만만들들어어내내기기를를 권권고고하하고고 싶싶다다.
목목적적을을 밝밝힌힌다다면면 이이곳곳의의 망망령령들들 중중 거거절절할할 자자는는 아아무무도도 없없을을 것것이이다다.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야. 더 이상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 낼 생각은 없다. 더 이상 질문이 없나?
실망감에 젖은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하긴 이 상황에서 물어볼 만한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불러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쓰쓰쓰쓰.
주문이 완성되자 왜곡된 공간의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였다. 데이몬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인크레시아를 가리켰다.
너희들에게 첫 임무를 하달해 주겠다. 너희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창고지기 일이다.
고고작작 창창고고지지기기?
데이몬의 말에 데스 나이트들은 맥빠진 듯한 대답을 해 왔다.
그렇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것은 드래곤들의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이 속에는 놈들이 평생을 모아놓은 보물들이 가득 들어있다. 내가 드래곤 한 놈을 처치하고 가로챈 것이지.
그그, 그그 말말이이 사사실실인인가가?
데스 나이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9써클의 마스터를 결코 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정도 수준의 대마법사라면 그들 넷이 생전에 덤볐더라도 섣불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인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을 상대하는 일은 달랐다. 자고로 인간 마법사가 드래곤과 싸워 이길 가능성이 아예 제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데이몬이 천연덕스럽게 드래곤 하나를 처치했다고 털어놓으니 그럴 만도 했다.
멍청하기는……. 안에 놈의 시체가 들어있으니 들어가 확인해보면 되지 않은가?
노노, 놀놀랍랍군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를 보며 데이몬은 또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그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심어주기 위한 절차였다.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들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한 존재, 다시 말해 미완성 데스 나이트란 점이다. 유령군마를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상대로 데스 나이트들은 데이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가리켰다.
이 속에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구가 있다. 마법보고를 훔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지.
말이 떨어지자 마자 데스 나이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그렇렇다다면면 너너는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들을 정말 강력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로 만들 생각이다. 소드 마스터 열과 싸워도 지지 않는……. 너희들을 선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데스 나이트는 생전의 실력이 강할수록, 그리고 주입되는 어둠의 마력이 많을수록 강해진다. 따라서 나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에서 마력을 흡수해서 그것들 대부분을 너희들에게 주입할 생각이다. 너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점까지.
그그게게 정정말말인인가가?
데이몬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봉인구의 마력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백 명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보다 진정으로 강한 소수다. 생각해 보라.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무한정 주입 받는다면 너희들이 얼마나 강해질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데스 나이트들이 들뜬 목소리로 화답해왔다.
아아마마도도 사사상상 최최강강의의 마마스스터터급급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가가 탄탄생생할할 것것 같같군군. 능능히히 괴괴물물이이라라 칭칭할할 수수 있있을을 듯듯한한…….
그들 넷과 9써클의 마스터. 이 정도라면 드래곤을 사냥할 만 하지 않나?
충충분분히히 가가능능하하지지. 가가능능하하고고 말말고고.
데스 나이트들의 안광에는 묘한 기대감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드래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데이몬은 씩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좋아할 단계는 아니야. 봉인구가 이 속에 있긴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서 너희들이 필요한 거고.
성질 급한 라인델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우리리가가 무무얼얼 하하면면 되되지지?
이미 말하지 않았나? 창고지기라고……. 내가 알기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의 안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너희 데스 나이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터. 우선 이 속에 들어가라. 그리고 안의 물품을 찾아 그 좌표를 명확히 기억해 놓기 바란다.
마마법법보보고고의의 안안이이 그그렇렇게게 넓넓은은가가?
데이몬은 라인델프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멍청한 자식!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너희들을 들여보내는 것이지.
알알겠겠다다. 설설사사 수수백백 년년이이 걸걸리리더더라라도도 네네 말말대대로로 보보고고 속속을을 샅샅샅샅이이 뒤뒤지지도도록록 하하겠겠다다.
그래야지. 그래야만 예상치 못한 수확도 건질 수 있을 테니…….
예예상상치치 못못한한 수수확확이이라라니니?
데이몬의 얼굴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보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인크레시아의 안에는 드래곤들이 가진 보물들 중 가장 귀중한 것들이 들어있다. 물론 뛰어난 무구나 마법병기가 없진 않을 테지? 너희들은 오래지 않아 어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성 마법만 걸려 있지 않으면 어떠한 마법 무구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갑갑옷옷과과 무무기기를를 직직접접 고고르르란란 말말인인가가?
그렇다. 그 때문에 너희들에게 얇은 사슬 갑옷만을 착용시킨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속에는 지금까지 트루베니아에 존재했던 온갖 신병이기(神兵利器)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마법 갑옷에서부터 명검. 가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아티팩트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들은 이제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가서 찾아라. 입맛에 맞는 신병이기는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한도까지 모조리 허락하겠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설설사사 그그것것이이 르르헤헤르르트트 세세이이버버라라도도 말말인인가가?
두말하면 잔소리. 물론 그 전에 누가 가질 것인지 서로 상의를 해야겠지만…….
프림베르그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이거거 정정말말 영영광광이이로로군군. 지지금금까까지지 구구경경도도 하하지지 못못했했던던 무무기기들들을을 선선택택할할 수수 있있다다니니…….
신성마법이 걸린 무기를 선택하는 우는 범하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아마도 아직까지 너희들은 신병이기를 사용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고른 무기가 보관된 좌표만 기억해두도록 해라. 나중에 너희들에게 힘을 부여하게 된다면 남김없이 넘겨줄 테니 말이다.
고고맙맙군군.
데스 나이트들의 눈에는 묘한 열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안배라면 전 대륙의 드래곤과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자신감이 새록새록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록 해라. 난 이 길로 아르카디아로 넘어가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로부터 마력을 빼낼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겠다.
헬버트론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잠시 인크레시아를 응시하던 헬버트론은 데이몬을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슨 뜻이지?
진진심심으으로로 네네게게 감감사사한한다다. 나나에에게게 복복수수를를 할할 기기회회와와 힘힘을을 준준데데 대대해해서서 말말이이다다.
데이몬은 씩 웃으며 헬버트론의 손을 맞잡았다.
가능하다면 네 더듬거리는 말투나 고치도록 해. 듣기가 심히 거북하군.
노노력력해해보보지지.
헬버트론이 인크레시아 안으로 사라진 뒤 라인델프가 나섰다. 그 역시 데이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둘의 손으로 사나이의 교감 같은 것이 교차되었다. 다음에는 프림베르그가, 그 다음에는 사라미스가. 이렇게 해서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인크레시아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러자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다시 공간의 틈으로 숨겨버렸다.
이제 끝났군. 다음은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차례인가?
가장 중요한 조력자들을 섭외한 이후라서 그의 얼굴에는 홀가분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신대륙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척 궁금하군.
내려놓았던 배낭을 다시 짊어진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가 위치한 서쪽 방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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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류트. 이곳은 신대륙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큰 항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국가이다.
오백 년 전 아르카디아로 인간의 이주가 시작되었을 때 거의 모든 배들이 정박해 닻을 내렸던 곳이었고 지형 자체가 거대한 만(灣)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내륙 안쪽으로 둥글게 말려 들어간 만 덕택에 외해의 거친 파도가 거의 안쪽으로 침습해 들어오지 못했으므로 만 안쪽의 바다는 항상 평온을 유지했다. 그 탓에 페이류트는 아르카디아에서 으뜸가는 항구도시로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르카디아에는 해상 무역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대륙을 항상 감싸고 있는 거센 조류 때문도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치는 폭풍우 탓이 더욱 컸다.
혹자는 그것이 오백 년 전부터 시작된 실버 드래곤의 저주 때문이라는 의견도 내었지만 아르카디아 대륙 부근의 바다는 그 전부터 풍랑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대륙이 이렇게 늦게 발견된 것도 모두 거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트루베니아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로 짐을 가득 실은 해상 무역선은 폭풍우에 가장 무기력한 선종이었다. 때문에 아르카디아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무역활동은 내륙을 통해 이루어졌고 페이류트의 항만을 가득 채운 배들은 대부분이 고기잡이 어선들 일색이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중인 배들은 도저히 어선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대부분이 복층 구조의 선실을 가졌으며 간혹 가다 마스트(돛대)가 세 개씩이나 달린 거선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고기를 잡는데 이 정도 큰배가 소용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법도 한 모습. 하지만 페이류트의 역사를 되새겨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페이류트는 아르카디아의 포경선(捕鯨船)들이 총 집합해 있는 고래잡이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고래(鯨). 육지에서는 그 거대한 몸집을 도저히 추스를 수 없는 동물이다. 오로지 체중을 받아줄 수 있는 바다에서만 생존이 가능한 고래는 덩치만큼이나 쓸모가 많은 동물이었다.
한 마리를 잡을 경우 나오는 엄청난 양의 고기도 고기였지만 장식물로 가치가 높은 고래뼈에서부터 다방면으로 사용되는 지방. 거기에다 머리 속에 간직된 향유는 수준 높은 귀족들의 애호품으로 깊이 있게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그 때문에 페이류트의 뱃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자란 고래 한 마리 잡기만 하면 팔자 고치기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위험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일년에 수백 마리의 고래가 잡히기는 했지만 그를 능가하는 수의 포경선들이 풍랑으로 또는 고래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침몰되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바다에서 생을 마친 선원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류트에는 아르카디아 각지의 사내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찾아오곤 했다. 단시일 내에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포경선에 타는 것 이상의 일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도박과도 같은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그렇지 못한 경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탓에 페이류트는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무수한 포경선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도 세금이었지만 뱃사람들이 풀어놓고 가는 돈 또한 엄청났던 것이다.
거금을 손에 쥔 선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술과 여자였다. 물론 몇몇 견실한 선원들은 가족들을 위해 바로 집에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선원들의 오랜 항해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주점을 찾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선원들을 위해 페이류트 시내에는 엄청난 수의 주점과 여관들이 존재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모여든 엄청난 수의 상인과 여자들이 선원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았다. 페이류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페이류트의 번영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페이류트 외곽에는 다소 초라하고 볼품 없는 주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론 페이류트 중심부에는 황제도 부러워할 정도로 호사스런 술집과 여관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곳은 바로 포경에 실패한 선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곳이다. 고래를 잡지 못했다고 해도 선원들은 어김없이 주점을 찾았다. 그렇게 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지 않으면 선원들은 도저히 오랜 항해를 배겨나지 못했다. 물론 주머니가 얇은 탓에 술값이 비싼 중심부에는 가지 못하고 이런 허름한 주점에서 싸구려 술이나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 술집들 한 군데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이라고. 이건 우리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거야.
거짓말하지 마. 세상에 서펜트(바다뱀:serpent)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인간이 어디 있어?
미치겠네. 정말이라니까.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자는 전형적인 뱃사람이었다. 머리를 묶은 수건 아래에는 강한 햇살과 거친 바다 바람에 단련된 구리빛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쪽 눈가를 스쳐지나간 흉터가 무척 인상적인 사내는 실버 블레이크란 이름을 가진 포경선의 갑판장이었다. 그의 옆에는 함께 승선했던 선원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멀리서 관찰하기는 했지만 그 서펜트의 머리 위에는 분명 인간이 타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바다의 폭군이라 불리는 거대한 킹 서펜트였어.
갑판장이 열을 올려 설명했지만 주점 내부의 선원들은 그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펜트라면 포경선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바다의 악마라 불리는 괴물. 서펜트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면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서펜트는 아무리 큰 포경선이라도 유유하게 뒤집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놈들은 그래놓고 바다에 빠진 선원들을 하나씩 삼켜버리기를 곧잘 했다.
그 때문에 페이류트의 선원들에게 서펜트란 보기만 해도 줄행랑을 쳐야 하는 상대였다. 아무리 작살로 무장한 포경선이라도 단단한 비늘을 가진, 바다에서만은 무적이라 자부하는 서펜트에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친 선원들조차 서펜트에게만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서펜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인간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왔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서펜트가 인간의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죽했으면 내해 근처까지 들어와 자맥질하는 아이들까지 물어갈 정도인데 그게 가능한 얘기야?
혹시 모르지. 나중에 먹으려고 머리 위에 올려둔 시체를 보았을지도.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애초에 말을 꺼낸 갑판장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시력 하나는 자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아예 눈 뜬 장님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친 뱃사람에 불과한 그에게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큼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갈 재간은 없었다. 그런데 연신 옥신각신하던 그들을 쳐다보던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주점 구석에 술잔을 기울이던 자의 것이었다.
'재미있군. 날 본 자가 있다니?'
고개를 들자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정말 수려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으니. 그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마침내 그가 아르카디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대륙이라. 그래도 이곳의 인간들은 살 만한 것 같군.'
무척 오랜만에 인간들 틈에 끼이게 된 터라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돌려 주위의 정경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뼈만 앙상한 리치들 사이에서 바짝 긴장한 채 오백 년을 살아왔던 터라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웠던 데이몬이었다.
노스우드에서 데스 나이트 넷을 거둔 뒤 데이몬은 그 즉시 서쪽 해안으로 이동했다.
또다시 떠돌이 오크의 모습으로 변용한 탓에 데이몬은 비교적 무난하게 아르카디아에 접한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추적을 염려한 때문에 그는 공간이동을 하진 못했다. 아니 베르키스가 수면중인 사실을 알았더라도 공간이동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르카디아의 좌표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바다를 건너가기 위해 상당히 고심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우연히 해안으로 다가온 킹 서펜트 한 마리가 눈에 띄었으니…….
잘 되었군.
데이몬은 즉시 마법을 펼쳤다. 그것은 서펜트로 하여금 자신을 동족으로 생각하게 하는 현혹 마법이었다. 물론 그가 펼친 마법은 정통 마법보다 효과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것이었다. 거기에는 뱀의 심령을 조종하는 영사술이 가미되었기 때문이었다.
영사술(靈蛇術). 뱀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막고 또한 적의 이목의 흐리는 목적으로 중원에서 즐겨 사용되는 술법이다. 물론 이것은 배교 이외에도 많은 집단들이 사용했다. 특히 힘이 약한 하오문같은 방파에서는 문도들에게 기본적으로 숙지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술의 종주문파인 배교의 술법이 효과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덩치가 크기는 했지만 서펜트 역시 바다뱀의 일종이었으므로 영사술이 먹혀들지 않을 순 없었다. 게다가 마법까지 병행해서 사용되었으니. 데이몬의 의도는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캬오오오.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숙인 서펜트를 보며 데이몬은 쉽게 바다를 건너갈 수 있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킹 서펜트라면 바다에서만은 무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드래곤을 빼고…….
킹 서펜트 덕택에 데이몬은 무척 수월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서펜트는 그 어떠한 쾌속선도 낼 수 없는 빠른 속력으로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바닷길을 가로질렀다. 데이몬은 무척 느긋하게 바다의 정경을 감상했고 먹고 자는 것은 모조리 서펜트의 머리 위에서 해결했다.
간혹 인간의 냄새를 맡은 상어 따위가 다가왔지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어들은 데이몬이 타고 있는 킹 서펜트를 보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
그것은 다른 서펜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용을 부려 가까이 다가온 서펜트 한 마리가 그대로 킹 서펜트의 위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데이몬은 자신이 탈것 하나는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정확히 57일만에 데이몬은 아르카디아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고했다.
바다를 건네준 킹 서펜트를 돌려보낸 뒤 데이몬이 찾은 곳은 바로 주점이었다. 오백 년 만에 마실 수 있게 된 터라 술 단지에 묻히고 싶은 생각이 정말 간절했다. 또한 말린 고기만 먹어왔던 까닭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겐 돈이 없었다. 인크레시아의 속에는 분명 가치를 논할 수 없는 보물들이 그득할 테지만 지금 데이몬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좌표를 몰라 꺼낼 수가 없는 것이다. 리치였던 그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젠장 어떻게든 되겠지?
술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데이몬은 그만 무전취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허름한 주점 하나를 찾아 들어간 데이몬은 닥치는 대로 음식과 술을 시켰다.
별로 비싸 보이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지금껏 말린 고기만 먹어왔던 데이몬에겐 별미일 수밖에 없었다. 삶은 고래고기와 생선 수프. 그리고 뱃사람들이 즐겨먹는 럼주를 시킨 데이몬은 그야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런 뒤 툭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우연찮게 자신을 목격한 뱃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재미있군. 날 본 자가 있다니…….'
배를 채우고 나자 고민거리가 밀려들었다. 물론 그에겐 술값을 계산할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애꿎은 육체의 원래 주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 고위급 귀족 같은데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니…….
툴툴거린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떠돌이 오크의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했다. 팔꿈치와 무릎밖에 오지 않는 지저분한 가죽옷에다 허름한 배낭. 만약 뱃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반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즉시 미치광이로 간주될 차림새였다.
그 상태 그대로 데이몬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출구 옆의 카운터에는 상당히 당차 보이는 젊은 여자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는 모습이 자신에 대해 이미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몸으로 한 번 때워볼까?
사실 그에겐 곤경을 헤쳐나갈 방법이 많이 있었다. 그의 장기인 마법을 사용한다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최면술을 걸던가 아니면 돌을 은화로 보이게 하는 현혹마법을 걸면 된다. 그 이상의 방법을 쓰고 싶다면 인비저빌러티를 시전해서 슬쩍 빠져나가면 그 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게 마법을 쓴다는 것은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비록 사파 고수이긴 했지만 과거에 그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겐 살수를 쓰지 않는 전형적인 무림인이었다. 그것 때문에 데이몬은 마침내 몇 대 맞아주는 것으로 술값을 치르려고 마음먹었다.
데이몬이 다가가자 술집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출입구 앞을 막아섰다.
많이 드셨군요. 모두 25동화되겠습니다.
25동화가 얼마나 되는 금액인지 몰랐지만 애당초 상관없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생각해 보니 돈이 없군.
상당히 황당해 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여인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듯한 반응이었다. 데이몬의 아래위를 한 번 훑어본 여인은 주방 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오빠! 이리 나와봐요.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무전취식하는 놈이 걸렸어요. 손을 좀 봐줘야겠는걸요.
알았어.
걸쭉한 대답과 함께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힘깨나 쓰게 생긴 건장한 사내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손님들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되었다. 밀가루를 미는 봉 같은 것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본 데이몬의 얼굴에 재미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젠장. 제대로 맞으면 성치 못하겠어.'
선선히 맞아주려고 생각했던 데이몬은 마음을 바꿨다. 그는 은근슬쩍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에 프로텍팅(Protecting)을 걸었다. 물리적인 타격에서 몸을 보호해주는 보호 마법. 이것이라면 사내의 힘이 아무리 좋더라도 자신에게 타격을 가할 수 없음은 기정사실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데이몬은 다가오는 사내에게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안하군.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놈이…….
사내는 더 이상 사정 봐줄 것도 없다는 듯 데이몬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두건이 벗겨져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때 짤막한 경악성이 바로 옆에서 터져 나왔다.
흡.
경악성은 바로 사내를 불러낸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에게 단단히 멱살을 잡힌 데이몬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제대로 씻지 않아 지저분했지만 먼지가 옥을 가릴 수는 없는 법. 항구도시에서 여간해선 보기 힘든 미남자의 모습에 여인은 마치 넋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을 주시하던 여인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자, 잠깐. 오빠.
막 데이몬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려던 사내가 잠시 멈칫했다.
무슨 일이지? 마리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분의 사정도 이해가 되네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무슨 소리야? 얼굴이 제법 곱상하긴 하지만 이런 놈은 혼줄을…….
그만하고 그 사람을 내려놓으세요. 안 그러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사내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데이몬을 내려놓았다. 뜻밖의 상황전개에 얼떨떨해진 데이몬에게 여인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미리 얘기를 하시지 그랬어요? 그렇게 배가 고프셨나요?
지, 지금은 아니오.
떠듬떠듬 내뱉는 데이몬을 향해 여인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훅훅하고 내뿜는 숨결이 생생히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이리로 오세요. 제 이름은 마리네랍니다.
얼떨떨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둘러보고 있던 사내는 그때서야 상황을 눈치챘다.
'이 계집애가 설마…….'
남루한 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놈의 용모는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빼어났다. 험한 바다 사나이에게만 둘러싸여 있던 동생이 언제 이런 미남을 보았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험험. 이거 미안하오. 요즘 하도 나쁜 놈들이 많아서.
갑자기 돌변해버린 상황에 데이몬은 미칠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덤비던 두 남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변하다니……
여행자신 듯 한데 숙소는 정하셨나요?
아, 아니 아직.
그럼 저희 집에서 주무세요. 숙박비는 받지 않을 테니…….
그, 그래도 되겠소?
마리네는 떠듬떠듬 대꾸하는 데이몬을 억지로 떠밀어 2층에 올려보냈다. 그 와중에서 보여지는 눈초리에 여간 난처하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순 없는 노릇이라 그는 조용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을 받아놓을 테니 씻으신 뒤 푹 쉬도록 하세요.
살짝 눈웃음을 보낸 뒤 마리네는 얼떨떨한 기색의 데이몬을 남겨놓고 문을 닫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마리네에게 사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마리네.
아잉, 오빠는 다 알면서…….
마리네가 슬며시 얼굴을 붉혔지만 사내는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얼굴은 곱상하다만 놈의 정체를 모르지 않느냐? 어디 나쁜 짓을 하고 도망쳐 온 놈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섣불리 마음을 주는 것은…….
괜찮아요. 그 사람의 맑은 눈빛은 결코 나쁜 짓을 하고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사내는 계속해서 마리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자고로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사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주방에 들어가야 했다. 다시 카운터에 앉은 마리네의 마음은 어느덧 콩닥콩닥 뛰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일까? 옷차림을 봐서 부근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예상이 틀렸구려. 아가씨. 나쁜 짓을 하고 도망쳐 온 것이 맞으니 말이오.
천리지청술을 펼쳐 아래층의 대화를 모조리 엿들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 생긴 용모 탓에 곤경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게 결코 반갑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그에겐 이런 대접이 결코 친숙하지 않았다.
젠장. 여자들이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족속들이라니까…….
지금껏 그가 여자들에게 받았던 대접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경멸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추악한 외모를 타고 난 탓에 데이몬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에게도 다정한 눈빛을 받아보지 못했다. 오로지 다프네말고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여자는 없었다.
바로 그것 하나 때문에 데이몬이 다프네를 그리 끔찍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용모를 바꾸자마자 바로 대접이 틀려지다니…….
결코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군. 지금의 얼굴은 엄연히 따져 내 것이 아니니 말이야.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데이몬은 생각을 바꿨다. 다른 용모로 살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받은 대접과 판이하게 다른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을 위해 데이몬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로 결심했다.
우선 돈이 필요하겠군.
그는 우선 문을 잠궜다. 그가 이제부터 하려 하는 일은 결코 누가 엿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그는 지금 드래곤들에게서 탈취한 보물을 조금 사용하려는 것이다.
쓰쓰쓰쓰
공간의 입구가 열리자 데이몬은 거기다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이봐! 거기 누구 없어?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계속해서 이름을 불러댔다. 그가 인크레시아에 들여보낸 데스 나이트들의 이름을 말이다.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이봐 사라미스.
한참 만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데이몬.
음성으로 봐서는 누구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었다. 공간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이라 그런지 데스 나이트의 음성이 공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넌 누구지?
난 사라미스야. 나머지 녀석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금방 오지 못할 거야. 이 안이 워낙 넓어서 말이지. 얼마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야. 가서 놈들을 불러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사라미스를 말린 데이몬은 곧 요구사항을 이야기했다. 보석이 필요하단 말에 사라미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딴 것을 부탁하려고 우릴 부른 거야?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금화나 은화 중에서 찾은 게 있으면 좀 건네다오.
젠장. 금이나 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음 한가지 있긴 하군. 여기서 발견했는데 이것으로 되려나 모르겠군…….
조금 뒤 인크레시아의 입구를 통해 무언가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것이 던져졌다. 그것은 전체가 눈부신 보석으로 뒤덮여 있는 커다란 왕관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트란벨 왕국의 왕관이군. 이걸 여기서 어떻게 팔아먹지? 다른 것은 없어? 좀 덜 귀해 보이는 것 말이야.
잠깐 기다려봐.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목걸이 하나가 던져졌다. 사라미스가 상당히 고른 티가 나긴 했지만 그것 역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어른 손톱 만한 진주를 수십 알 꿰어만든 데다 가운데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루비가 박혀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할 수 없지. 풀어서 판다면 가능할지도……. 이봐 사라미스. 수고했어.
앞으론 이런 일로 부르지 말라고…….
잔뜩 골이 난 듯한 음성과 함께 사라미스의 기척이 사라졌다.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트란벨 의 왕관을 다시 속으로 던져 넣고 인크레시아를 닫아버렸다.
빌어먹을 놈. 데스 나이트가 되었어도 성질은 여전하군.
잠시 씨근거리던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우선 나가기 전에 목욕이나 할 심산이었다.
이것 받으시오.
어머나. 이게 뭐죠?
데이몬이 불쑥 내민 진주를 보자 마리네의 눈동자가 왕방울만 해졌다. 상대가 내민 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극상품의 진주였다. 비록 구멍이 뚫려 있어 가치가 다소 떨어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크기를 봐서 결코 만만히 생각할 물건이 아니었다. 돈 한 푼 없을 것 같은 남루한 차림새의 여행자가 내놓을 물건이 아니란 뜻이다. 놀라는 마리네를 보며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숙박비라 생각하시오. 원래는 처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신의 고운 마음씨에 내가 반한 것 같소.
저, 정말이에요?
마리네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마음을 두고 있는 사내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가슴이 뛰어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냉정함만이 가득했다.
'저 여인은 오로지 껍데기에만 현혹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하자 데이몬.'
어쩔 줄 몰라하던 마리네를 보다 못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데이몬이 내민 진주를 집어들고 유심히 살폈다.
'구멍이 뚫린 것을 봐서 목걸이에서 풀어낸 것으로 보이는데 진품은 틀림없군.
그나저나 이 정도 크기의 진주를 꿰어 목걸이로 만들었다면 원래는 대단한 물건이었겠는걸?'
순식간에 진주의 진위여부를 파악한 사내는 곤혹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진주라면 식대와 숙박비의 열 배도 넘습니다. 아마 거스름돈이 없을 텐데…….
괜찮소. 있는 대로 주고 나머지는 그냥 가지시오. 당신들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겠소.
그,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는 데이몬의 마음이 변할까 두렵다는 듯 서둘러 돈이 들어있는 통을 털었다.
진주를 감안한다면 속의 돈을 모조리 건네주더라도 확실하게 남는 장사였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오빠가 야속하다는 듯 마리네가 연신 눈을 흘겼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눈에 보아도 동생의 배필감이 아니었으므로 현실적으로 행동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돈이 든 주머니를 건네 받은 데이몬은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가보겠소.
등으로 마리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데이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가자 반사적으로 따라 나가려던 마리네. 하지만 그녀는 오빠의 제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진정해라. 마리네. 저 녀석은 결코 너와 어울리지 않아. 그것은 너도 잘 알지 않니?
오빠, 흑흑흑.
한 바닷가 처녀의 방심은 이렇게 산산이 깨어지고 있었다.
휴우. 혼났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생전 처음 여자의 그런 눈빛을 받아본 터라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리네의 눈빛은 다프네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한 눈에 보아도 한껏 들뜬 데다 자신에게 완벽히 매료된 듯한 눈빛. 물론 정말 색다른 경험임에는 분명했기에 데이몬은 시험을 계속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옷차림과 분위기를 좀 바꿔봐야겠군.
데이몬은 사내에게서 받은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절그렁.
예상과는 달리 제법 묵직했다. 데이몬은 그것을 들고 일단 가까운 옷가게를 찾았다.
오랜만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상 그에 걸 맞는 옷을 입는 것이 급선무였다.
물론 변한 용모에 어울릴 만큼 말이다. 시내 중심부로 걸어 들어간 데이몬은 그곳에서 가장 화려한 옷가게를 골라 들어갔다.
모두 얼마요.
헤헤헤. 다 해서 2실버 50동화되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이 어울리지 않게 헤실헤실 웃으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자기 가게의 한달 매출을 일시에 올려준 특급 손님이었던 것이다.
데이몬이 처음에 남루한 차림새로 들어섰을 때 주인은 무척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모습은 한 눈에 보기에도 빌어먹는 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이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탕 소리내며 탁자에 올려놓았을 때 주인의 태도는 180。 바뀌어버렸다.
이 가게에서 가장 고급 옷으로 한 벌 대령하시오. 당신이 봐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듯한 옷으로 말이오.
허름한 차림새의 데이몬이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어 던졌을 때 주인은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상대의 용모가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헤헤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주인은 말 그대로 열과 성의를 다해 데이몬의 차림을 코디해 주었다. 물론 가게에서 가장 비싼 옷들로만 말이다. 오랫동안 옷가게 주인을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데이몬의 외모를 단연 돋보이도록 차려 입혔다.
코디가 끝나자 데이몬은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몸에 걸친 값비싼 옷에 전혀 손색이 없는 용모를 가진 귀공자로 말이다.
여기 있소.
데이몬은 묵묵히 대금을 지불하고 나왔다. 그러고도 주머니 속의 돈은 반이나 남아있었다. 걸어가던 도중 데이몬은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단장인가.
사실 그의 원래 정체는 500살이 넘은 늙은이였다. 하지만 겉모습은 그와 전혀 딴판이었다. 귀족들이나 입는 실크 셔츠에 최고급 복장을 받쳐입은 그의 모습은 황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족 귀공자였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페이류트의 시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어머. 저것 봐.
세상에……. 저런 미남자가 있었다니.
길을 가며 마주치는 여인들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몽롱해졌다. 그녀들이 지금껏 살아오며 단연코 제일이라 칭할 수 있는 미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한 번 보기만 해도 넋이 빠질 정도로 데이몬의 용모는 멋들어졌다. 심지어 잡고 있던 남자친구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데이몬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이는 여인들도 있었으니……. 데이몬은 그 모든 여인들에게 슬쩍 미소를 흘리며 대로를 걸어 올라갔다.
어머나. 날 보고 웃었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으면…….
데이몬의 미소를 접한 여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옷차림과 외모, 뇌쇄적인 미소까지 말 그대로 완벽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수록 남자들의 시선이 사납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였다. 외모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다른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다.
여자친구에게서 매정하게 뿌리침을 받은 사내 하나가 결국 데이몬에게 앙심을 품고 말았다.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은 듯 그는 일부러 데이몬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지?
사내는 불문곡직하고 어깨로 몸을 부딪쳐왔다.
퍽.
데이몬이 별로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는 마치 밀쳐진 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날렵하게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고 고함을 질렀다. 예기를 줄기줄기 발하는 상당히 좋은 검이었다.
이놈! 감히 날 밀치다니……. 모욕을 받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검을 뽑아라.
사내는 제법 서슬이 퍼렇게 으르렁거렸다. 물론 거기에는 데이몬을 낭패하게 만들 심산이 다분했다. 자세를 보아 제법 검을 잡아 본 듯 보였지만 데이몬의 눈에는 영락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하도 기가 막혀 데이몬은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겨서 말이 안나오는군.
거기에다 날 비웃기까지? 이놈!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지 않는다면 넌 오늘 이곳에서 살아날 수 없다.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지만 보고 있던 데이몬에겐 실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런 천둥벌거숭이에게 약이 될 것은 오로지 몽둥이 찜질밖에 없다는 사실을 데이몬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나에겐 검이 없는데 말이야.
결투를 벌이려는 것 같은데 나에게 검 한 자루 빌려주지 않겠나?
상대의 대범한 태도에 사내는 못내 찜찜한 표정이었다. 당차게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데이몬의 발치에 검 한 자루를 집어던졌다.
결투다. 이것은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결투이므로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처벌되지 않는다는 사항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런 사항이 있었나?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집어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구경꾼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의 태도가 성별에 따라 판이하게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인들의 눈빛에는 데이몬을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으며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데이몬이 당하기를 기원하는 듯 보였다. 거기에는 그들이 사내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도 큰 몫을 했다. 시비를 걸고 있는 사내는 이곳에서 상당히 이름을 날리는 검사(劍士)였기 때문이었다.
검을 집어든 데이몬을 보며 사내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얼굴만 곱상한 놈이 검을 수련했을 리는 없다. 설사 수련했다 하더라도 기사학부에 다닌 날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기사학부를 완전히 수료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돈 많은 부친을 둔 까닭에 입학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지만 워낙 자질이 떨어지는지라 그는 결국 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정식 기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페이류트에서 중앙의 기사 학부에 들어가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으므로…….
그럼 공격하겠다.
제법 자세를 가하려던 사내의 눈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상대의 검에서 솟아오른 현란한 청색 빛무리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오, 오러 블레이드. 세, 세상에…….
그는 채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정황을 보아 상대는 팔라딘이 확실해 보였다.
기사학부를 정상적으로 수료하고 10년 이상을 검술에 매진한 자들 중에서 단 10%도 될까말까 한 고급 기사인 팔라딘. 기사학부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교관들도 저처럼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하지 못했기에 그의 용기는 마치 물에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파, 팔라딘이었소?
팔라딘? 글쎄? 그것보다는 소드 마스터라 불러야 옳지 않을까?
아르카디아의 사정을 모르는 데이몬으로써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소…….
말을 하다 말고 사내는 몸을 돌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체면이고 뭐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상대가 팔라딘이라도 승산이 아예 없는 판국인데 그보다 훨씬 강하다고 알려진,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소드 마스터라니……. 그에게 선택할 길은 오로지 도망 밖에는 없었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뒤에서 뭐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사내에게는 그것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이봐! 검을 가지고 가야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사내를 보고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짝 혼만 내주려고 시도한 일이었는데 효과가 너무나도 컸다.
데이몬은 검에서 슬며시 오러 블레이드를 풀었다. 물론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암암리에 섬광과 함께 환영마법을 전개해서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한 것뿐이었다.
물론 진짜 소드 마스터가 보았다면 그 차이점을 대번에 지적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에서 그것을 분간할 만한 안목을 가진 자는 없었다.
원 녀석. 검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은 데이몬은 사내의 여자친구로 짐작되는 여인에게 걸어갔다.
아까 그 자가 당신의 남자친구 맞소?
예상외로 여인은 매몰차게 그 사실을 부인했다. 상당한 미모를 가진 것으로 보아 사내가 검을 뽑아들 법도 했다.
아니에요. 보지도 못한 사람인걸요? 제겐 남자친구가 없어요.
허 그렇소. 낭패로군. 검을 돌려줘야 할 텐데…….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소?
여인은 최대한 아름답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혹시라도 그 자를 만나게 된다면 이 검을 전해주시오. 나 원 참. 싸움을 먼저 걸어놓고 도망치다니 어이가 없군.
검을 여인에게 건네준 뒤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등으로 수많은 시선이 와서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열렬한 애모가 담겨있는 것은 여인들의 시선이었고 질투심과 함께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강자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는 것은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렇게 상반된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데이몬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새로운 반응에 대해 데이몬이 진력을 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여러 사내들의 결투신청이 이어졌기에 데이몬은 그때마다 마법을 써서 가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내야 했다.
물론 결과는 한치의 틀림도 없이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그 탓에 행로가 많이 지체되었고 처음에는 색달라 보이던 여인들의 반응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할 짓은 못되는군.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다섯 번째 사내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지만 이젠 슬슬 싫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예전의 경멸 어린 시선이 그에겐 더 편할 듯 싶었다. 수십 년 동안 단련되었기에 그만큼 더 친숙했던 것이다. 새로운 용모로 인한 데이몬의 관심은 그때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둬야겠군.
데이몬은 마침내 드러나지 않는 용모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어딜 가나 여인들이 졸졸 따라다녔기에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데이몬은 근처에 보이는 여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녀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선 데이몬은 먼저 사환을 불렀다. 열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환아이가 주뼛거리며 다가왔다. 한 눈에 보아도 데이몬의 외모에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데이몬은 사환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너 이 길로 옷가게에 가서 두건이 달린 로브를 한 벌 사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조금 뒤 데이몬은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여관을 나섰다. 여관의 앞에는 데이몬을 한번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여인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데이몬을 알아보지 못했다.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 쓴 덕택에 데이몬은 모처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여관 앞에서 아우성을 질러대는 여인들을 흘겨보며 그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차림새를 하지 않겠다.
조금 전의 일을 통해 여인들에 대해 환멸감까지 치밀어 올랐던 데이몬이었다. 한낱 껍데기에만 현혹되는 여인들의 안목은 언제 보아도 한심했다. 그 누구도 진면목을 보려 하질 않는 것이다.
진정으로 날 아껴주는 여인은 오직 다프네밖에 없다. 오직 그녀만이 내 진면목을 알고 있지.
이미 데이몬의 마음은 비 온 후의 땅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다프네 이외의 여인을 사랑해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데이몬은 그 결심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마음은 오직 다프네를 향할 뿐이다. 기다려라 다프네. 아저씨가 꼭 널 구해줄 테니.
나직이 다짐하며 데이몬은 여인들 사이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 이후로 데이몬은 평탄한 여행을 계속해 나갔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 덕분에 여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고 그 덕에 사내들의 결투신청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던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여행자들이 가장 즐겨 입는 복장인 로브 덕분에 데이몬은 홀가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내륙 쪽으로 계속해서 여정을 이어나갔다.
우선 아르카디아를 여행하며 절실히 느낀 점은 치안이 완벽하게 유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트루베니아에서는 여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온갖 몬스터는 물론이오 심지어 산적(Bandits)들까지 여행자의 재물과 목숨을 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루베니아에서 오래 살려면 결코 여행을 하지 말라는 속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덕분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는 달랐다. 여행을 시작한 한달 남짓 동안 데이몬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보지 못했다. 물론 산적의 습격도 없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접경지에는 완벽한 경비망이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다소 후미지다 판단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경비초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경비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지금 데이몬을 보고 다가온 경비대원의 얼굴에도 보기 좋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은 날씨입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르키아 방면으로 갑니다만.
얼마 전 15실버를 주고 구입한 지도에서 지명 하나를 골라낸 데이몬이 짧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경비병은 목적지에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억양이 낯선 것을 보니 부근의 분이 아니신가 보군요. 그럼 좋은 여행되십시오.
웃는 낯으로 인사하는 경비대원의 태도에서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치안이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데이몬은 나지막이 뇌까린 뒤 걸음을 옮겼다.
무척 재미있는 현상이군.
이럴 경우 트루베니아의 경비대원들은 결코 여행자를 통과시키지 않는다. 혼자 다니는 여행자는 몬스터나 산적의 좋은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숫자 이상이 모여야만 통과를 허락하는 것이 관례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덕분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겐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라 봐야하나?
지금 그가 찾는 곳은 인적이 전혀 없는 심산유곡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연구를 계속해서 기필코 데스 나이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야 했던 데이몬이었다. 그래야만 드래곤에게 대적할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필수였다. 만약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아르카디아의 군대가 벌떼처럼 몰려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당해내지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귀찮아지겠지?
고개를 앞뒤로 뒤흔든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해안지방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때문에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륙의 산간 지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을 듯 했다.
꼬박 하루를 걸은 후에야 데이몬은 해안지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번화한 도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하여 교역도시 로르베인.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지어진 곳으로써 지역적 이점으로 인해 나날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도시였다.
내륙과 해안의 특산품이 바로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그 과정에서 거둬지는 세금이 바로 로르베인을 살찌우는 원천이었다. 또한 상인들과 더불어 내륙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해안으로 나오려는 여행자는 빠짐없이 이곳에 들러 물품을 구입해야 했다. 오랜 여정을 위해서는 여행에 필요한 물품의 구입은 필수였고 부근에서 이 정도 큰 시장을 가진 도시는 로르베인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 여러 가지 제반 여건으로 인해 로르베인은 페이류트에도 뒤지지 않을 규모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잘 정돈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루비와 나머지 진주를 파는 게 나을 것 같군.
지금까지 그가 거쳐온 곳들은 페이류트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 이유로 데이몬은 보유한 진주를 무척 싼 가격에 넘겨야 했다. 작은 보석상이라 충분한 대금을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저 되는 대로 진주를 팔아 넘겼다. 여행할 경비만 충당되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루비를 처분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보석에 대한 안목이 없는 데이몬이 보기에도 루비는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로르베인의 보석상이라면 충분히 루비를 매입할 수 있을 듯 싶었기에 데이몬은 남은 보석을 이곳에서 모조리 처분해버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비는 충분할수록 좋을 테니…….
행로를 결정한 데이몬은 멀리 보이는 로르베인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교역도시답게 로르베인은 여타의 도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앞뒤로 하나씩 달려있는 문 외에 온통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일반적인 도시와는 달리 로르베인은 도시 외곽에 소규모 방어용 요새만을 가지고 있는 완전 개방형 도시였다.
다시 말해 도시의 동서남북 끝자락에 4개의 요새가 설치되어 있고 성곽이 없는 전형적인 교역도시인 셈이다. 그런 탓에 드나드는 것이 무척 자유로왔다. 물론 방어에 있어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만……. 오랜 전쟁경험 탓에 데이몬은 단숨에 로르베인의 허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요새들을 포위해서 고립시킨다면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겠군.
보급선을 끊어버린다면 요새의 수비병들이 오래 버틸 수 없을 테니…….
물론 보급로 확보를 위해 지하 터널을 뚫어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차단은 쉬운 편이었다.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인다면 터널은 금세 제 구실을 못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교역도시라는 특성상 로르베인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같은 인간끼리의 전쟁이 아닌 이상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천천히 로르베인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데이몬을 보자 경 무장을 한 경비병 한 명이 웃는 낯으로 다가갔다.
여행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병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로르베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목적지조차 물어보지 않고 데이몬을 통과시켰다. 오히려 도시 접경지의 수비대보다도 편하게 통과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조차 얼떨떨해 할 정도였다. 과연 교역도시의 수비대다웠다.
고맙소.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성벽이 없는 때문인지 곳곳에 방책과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지만 병사들의 태도엔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교역도시란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인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병사들을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묵묵히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이곳의 방어상태에 그가 신경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시내에 들어간 데이몬은 바로 중심가로 향했다. 보석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큰 보석상이라야 했고 통상적으로 그런 곳은 중심 가에 위치해 있는 법이다.
교역도시답게 로르베인은 무척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좌판대와 상점에는 각지의 특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혹은 사기 위해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데이몬은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니며 보석상을 찾았다. 목적했던 보석상은 오래지 않아 눈에 들어왔다.
『로메인의 보석상(Romein's jeweller)』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내건 휘황찬란한 보석상을 찾은 데이몬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척 젊어 보이는 점원이 데이몬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를 본 데이몬은 짐짓 인상을 썼다.
자네말고 주인을 부르게. 아무래도 그것이 나을 것 같네.
점원의 얼굴에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음성을 봐서 결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녀석인데 대뜸 하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님은 왕이라는 가게 방침을 떠올리며 점원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시면 지배인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따라오십시오.
몸을 돌린 점원을 따라 데이몬은 휘적휘적 내실로 걸어 들어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 하나가 데이몬을 맞았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데다 얼굴에 개기름이 주르르 흐르는 것이 전형적인 상인의 모습이었다. 또한 연신 눈알을 굴리는 모습에서 장사에 닳고, 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이 가게의 지배인인 듯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왜 절 찾으셨는지…….
보석을 팔러 왔소.
데이몬의 말을 들은 지배인의 얼굴에 탐탁지 않은 표정이 떠올랐다. 남루한 차림새의 나그네가 가져온 보석이 별게 있으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보석을 내놓자 그의 반응은 돌변해버렸다. 데이몬의 손위에서 광채를 내뿜고 있는 커다란 루비를 보자마자 그는 눈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이, 이런 물건이…….
그는 마치 낚아채듯 루비를 받아들었다. 돋보기를 사용해서 루비를 샅샅이 관찰하기 시작한 지배인. 조금 뒤 그는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오랜 경험에 미루어 이것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틀림없어. 이 정교한 세공기술. 이것은 드워프의 세공품임에 틀림없어.'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면 이 보석은 정말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보물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물론 루비의 가치도 가치였지만 이것의 진면목은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세공했느냐 하는 차이였다. 이것이 정녕 드워프가 만든 것이 틀림없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루비를 들여다보던 로메인 보석상의 지배인 안토니는 지금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잡은 지배인 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안토니는 눈앞의 재신(財神)을 쳐다보며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겨, 결코 이자를 놓쳐서는 안 돼. 얼마를 주더라도 이것을 매입해야 한다.'
자신의 오랜 경험에 미루어 루비는 드워프의 세공품이 틀림없다고 단정할 수 있었다.
드워프(Dwarf)란 작달막한 체격의 유사종족으로써 주로 산간벽지에 모여 사는 종족을 말한다. 인간과 흡사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부족 이상의 군집생활을 하지 않으며 특히 귀금속에 대한 세공기술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이들의 극히 섬세한 세공기술은 도저히 다른 종족이 따라갈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 세공사라 할 지라도 드워프의 솜씨는 모방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재료와 같은 연장을 가지고 만들었다 하더라도 드워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물품은 어디가 달라도 달랐다. 물론 매겨지는 가치 역시 몇 배를 호가했다.
그 탓에 과거 트루베니아의 궁정에서 쓰이는 고급 물품들은 대부분 드워프들의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왕국의 군주들은 드워프의 세공품을 소장한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전통은 고스란히 아르카디아로 이어졌다.
특이한 점은 드워프의 세공품에 대한 가치가 아르카디아에선 극에 달해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트루베니아에서도 드워프가 만든 것이라면 같은 물건이라도 족히 두 배 이상 비쌌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는 아무리 작게 잡더라도 열 배는 넘어서는 가치를 지녔다. 왜냐하면 아르카디아에는 극히 적은 수의 드워프만 거주하기 때문이었다.
심산유곡에서 심심찮게 드워프를 만날 수 있는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에서는 드워프를 보기가 극히 힘들었다. 워낙 수가 적은데다 아르카디아의 드워프들은 극도로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인간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세공품을 얻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탓에 드워프의 세공품은 그만 부르는 것이 값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트루베니아에서 가지고 온 것과 이따금 드워프 마을을 습격해서 약탈한 것 외에는 드워프의 세공품을 구할 방법이란 없었다. 물론 그것으로 여러 군주들의 소유욕을 감당하기란 턱도 없이 부족했으므로 자연히 가격이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안토니가 들여다보고 있는 루비는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드워프의 세공품이었다.
루비의 표면을 물결 모양으로 가공한 솜씨와 주위 금장 장식의 섬세한 세공은 인간 세공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실력이었다. 기필코 매입하리란 생각에 안토니는 심호흡을 한 번 내쉬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래 얼마를 원하시오?
겉으로 보이는 안토니의 표정은 속마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별달리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심드렁하게 내뱉는 모습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상대하는 데이몬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물론 장사를 해 본적은 없었지만 이재(理財)를 타고난 중원인이었고 눈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아니던가? 살아온 경험 또한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그는 단숨에 안토니의 속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흠. 보석의 가치가 생각 이상인가 보군.'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안토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원래 매입하는 쪽에서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관례 아니오?
생각하고 온 가격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러니 받고 싶은 가격을 말씀해 보시오. 들어보고 적절하다 판단되면 대금을 바로 지불하도록 하리다.
능구렁이같은 돌려 치기였지만 데이몬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경우 상대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루비를 집어들었다.
날 보석의 가치도 모르는 바지저고리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잘못 짚으셨소. 예정대로 펠젠틴에 가서 처분하는 것이 나을 듯 하구려. 하도 멀어서 그냥 이곳에서 처분하려 했는데 안 되겠…….
부스스 일어서는 데이몬의 옷깃을 부여잡는 손이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원 사람 성격 급하기는…….
일이 생각대로 풀려나가지 않자 안토니는 다급해졌다. 행색을 보아 보석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로 보였는데 예상외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나그네를 보며 안토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소. 그럼 가격을 제시하리다.
말해보시오.
순간 안토니의 눈이 교활하게 돌아갔다.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절한 가격을 떠올렸다. 루비의 진정한 가치에서는 턱도 없는 가격이었지만 나그네에겐 충분히 거금이라 생각될 만한 금액 말이다.
50골드 내겠소. 이 정도면 어떻소?
데이몬의 머리 역시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50골드 정도라면 여행하는데 모자람은 없었다. 1골드가 100실버였고 5실버 정도면 충분히 일주일을 생활할 수 있다. 최고급 식단과 좋은 여관에서 묵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루비의 가치가 충분히 그 이상 되리라 생각되었기에 데이몬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널리고 널린 것이 보석상이었고 여러 군데 돌아다녀 본다면 루비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들어왔군.
짤막하게 내뱉으며 루비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데이몬을 보자 안토니는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좋소. 75골드 내리다. 이 정도면 내가 크게 인심 쓴 것이오.
데이몬은 두말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토니가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도저히 그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몸놀림이었다. 손수건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아낸 안토니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내가 졌소. 90골드 드리겠소.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안토니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럴 땐 침묵이 가장 좋은 협상 방법이었다. 내심 상대에 대한 괘씸한 생각도 함께 스쳐지나갔다.
'빌어먹을 놈. 감히 50골드로 후려치려 해?'
부아가 치민 데이몬은 가격을 있는 대로 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말고도 보석상은 있을 테니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데이몬을 마주보고 있는 안토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대가 한 마리라도 말을 한다면 좋은 협상거리가 되겠지만 침묵만을 지키고 있으니 그의 달변도 하등 쓸데가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안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110골드 주겠소. 로르베인의 그 어느 보석상을 가더라도 이 이상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증하겠소.
그래도 데이몬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무표정한 눈빛으로 안토니의 얼굴을 쏘아볼 뿐이었다. 결국 안토니는 자신에게 허락된 금액 모두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총 150골드요. 아시다시피 보석 하나의 가격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지. 이 이상은 절대 불가하오. 나에겐 지불할 능력도 권한도 없소.
거기까지 협상이 진행되자 마침내 데이몬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지만 150골드로는 안될 것 같구려.
그, 그럼 도대체 얼마를…….
데이몬은 손가락 세 개를 좍 펴서 내밀었다. 그것을 본 안토니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사, 삼백 골드씩이나?
그 정도는 되어야 적정한 가격이라 생각되는데?
안토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협상이 예상외로 자신의 참패로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