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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처지가 되었다

혹시 오우거 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나? 좀 질기긴 하지만 씹는 맛이 정말 일품이지.

명심하도록……. 오우거를 잡는다면 그 고기는 모조리 내가 갖는다는 사실을…….

데이몬의 말이 떨어지자 츄가르의 관심은 단번에 다른 곳으로 쏠려 버렸다. 그들 자체가 먹이에 탐욕이 많은 종족이었고 또한 오우거 고기는 여간해서는 먹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각 터져 나온 츄가르의 대답은 오크족의 욕심 많은 일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취익. 그럴 순 없다. 이번 사냥은 우리 부족의 청부에 의한 것이므로 엄연히 고기의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

그렇다면 안되겠는걸? 나에겐 오랜 여정을 위한 식량이 필요하니 말이야.

그렇다면 대신 양고기를 주겠다. 취익. 알다시피 우리에겐 식량이 풍족하니까…….

마치 선심 쓰듯 내뱉는 츄가르의 말에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오우거 고기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악식가인 오크들이야 잘 먹을 수 있겠지만 사실 인간의 위장이 받아들이기에 오우거 고기는 너무 질겼다.

결국 합의점은 도출되었다. 투르카를 부른 츄가르는 데이몬을 인간 노예들의 거처로 안내해 주도록 명령했다.

너는 전사 오십 명을 데리고 저자를 즉시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물론 츄가르는 목소리를 낮춰 데이몬이 오우거 고기를 빼돌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란 명령까지 내렸다. 용케 그것을 알아들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단순한 오크 놈들이라 비웃으며 말이다.

취익. 가시지요.

데이몬은 이번에는 오십 명의 오크 전사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처지가 되었다.

마을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데이몬은 투르카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마을에 왜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거지? 마치 마법의 기운 같은 데 말이야.

취익. 그것 말이군요.

친위병들을 때려눕힌 일 때문에 투르카의 태도는 한층 더 고분고분해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위병들은 부족에서 손꼽히는 용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들을 혼자서 셋이나 때려눕혔으니 투르카가 주눅이 들 법도 했다. 그것도 그동안 얕봐왔던 떠돌이 오크에게 말이다.

실은 지금 부족에 베르키스님의 사자가 와 있습니다.

데이몬은 짐짓 딴청을 피웠다.

베르키스? 펠드리안 산맥의 레드 드래곤 말인가?

취익. 그렇습니다. 그 분의 가디언 중 하나가 도망쳤다고 해서 우리 부족에 사자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가디언이 도망쳤다고 굳이 츄가르 부족에 사자를 보낼 필요가 있었던가?

데이몬의 능청에 완전히 속아넘어간 투르카는 부족의 일급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사실들을 줄줄 털어놓았다. 물론 그 하나, 하나가 데이몬에겐 중요한 단서였지만 말이다.

취익.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깁니다. 도망친 가디언의 정체는 바로 리치로써 현재 떠돌이 오크로 폴리모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지금 전 부족에는 떠돌이 오크에 대한 추살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저희들이 사냥을 나가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취익.

자신 때문에 전 대륙의 떠돌이 오크들이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는 말을 듣자 데이몬은 등골이 오싹해왔다. 하지만 그는 일체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도리어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걱정이군. 북단으로 가려고 했는데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기겠어. 네놈 같은 애송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니 말이야.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투르카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젊은 오크 전사의 눈에는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취익. 그것이 걱정되신다면 우리 부족에 들어오십시오. 츄가르 부족의 일원이라면 그 누구도 건들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몬은 무척 태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아무래도 안되겠어.

왜 그렇지요?

내 이름이 뭐지?

돌연 튀어나온 질문에 투르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 황야의 무법자요.

황야의 무법자에겐 나름대로의 길이 있다. 그 길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무법자는 그 길을 가야만 하는 법이지. 비록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라도…….

말을 하는 데이몬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유치한 말이었지만 투르카에겐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젊은 오크의 가슴에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으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마침내 노예들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오크의 노예 신세가 된 인간들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을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폈다.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곳은 약 100호 가량의 가옥이 있는 전형적인 트루베니아의 마을이었다. 일단 데이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마을을 온통 휘감고 있는 무기력함이었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암울한 기운이 마을 전체에 칙칙하게 배어있었다.

데이몬은 투르카의 전사들과 함께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이미 마을 외곽에는 오크 보초병들이 다섯 명씩 짝을 지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 옆에서 마을 주민 서너 명이 밭을 매고 있었는데 데이몬에게 그 광경은 상당히 어색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크의 보호아래 밭일을 하는 인간. 적어도 과거의 트루베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들 옆을 지나쳐가며 데이몬은 농민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하나같이 비쩍 말라 있었으며 얼굴에는 전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리가 없으니…….'

농민들에게는 이미 오크에 대한 경계심마저 사라져버린 듯 했다. 매서운 눈빛으로 경비를 서는 오크 보병이 바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기계적인 동작으로 밭을 갈고 있는 인간들.

그 모습에서 데이몬은 과거 트루베니아를 지배했던 군주들에게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판단 착오 때문에 그들의 후손은 기구하게도 미개한 오크의 노예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찮은 자존심만 버렸다면 이들은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놈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상당히 가관이겠군. 아마도 아르카디아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저승에서 뼈저리게 후회하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마을 중심부를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몇몇 마을 주민과 마주쳤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완전 무장한 오십여 명의 오크 보병들이 마을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움찔거리며 몸을 피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오크를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데이몬은 잘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마을 주민들의 면면을 세세히 살폈다. 비쩍 마른 사내아이를 안고 가는 뼈만 앙상한 아낙네. 조그마한 나뭇짐을 짊어지고도 힘겨워하는 피골이 상접한 청년. 마을 사람 중에서 살이 찐 사람은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정상적인 체격을 지닌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으니 마을의 사정이 어떠한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오크들이 겨우 목숨을 이어나갈 만치만 남기고 모조리 털어 가나보군.'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투르카가 이끄는 대로 말이다. 오크 보병들이 도착한 곳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너른 공터였다. 그 바로 앞에 낡을 대로 낡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아마도 촌장이 사는 곳인 듯 했다. 앞에 도착한 투르카는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취익 촌장! 당장 나오라고.

놀랍게도 그는 유창한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과거 트루베니아 왕국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공용어 말이다. 무척 오랜만에 들었으므로 데이몬에겐 색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삐꺽.

문이 열리고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뼈만 앙상한 모습이 마을 사람들과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다소 특이한 것은 촌장의 나이가 갓 사십이 되었음직하다는 점이다.

'이상하군. 보통 촌장이라면 나이가 지긋한 마을의 제일 어른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데이몬의 의문 어린 시선 속에서 촌장은 투르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나으리. 그래 어쩐 일로…….

연신 굽실거리는 촌장의 모습에선 과거 트루베니아의 전역을 지배했던 인간의 당당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오크 족에 의해 사육되고 있는 가축. 데이몬은 촌장의 모습에서 대충 이런 느낌만을 느낄 수 있었다.

'불쌍한 사람들.'

착잡한 데이몬의 속도 모르고 투르카는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취이익. 오우거 자식을 상대할 용사를 데리고 왔다. 이젠 아무도 희생되지 않을 것이니 마음놓도록 하라.

말을 마친 투르카는 몸을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촌장의 힘없는 눈빛이 데이몬에게 향했다.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탓에 촌장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데이몬에게는 자신을 그리 탐탁지않게 여기는 기색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지만 말이다. 잠시 데이몬을 훑어본 촌장은 투르카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벌써 열 다섯 명의 주민이 오우거에게 잡혀갔습니다. 꼭 오우거를 잡아주셔야만 주민들이 일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능력으론 역부족입니다. 그러니 제발…….

연신 손을 비비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오크들에게 상당한 고초를 느꼈음을 알 수 있었다.

취익. 이번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투르카는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촌장의 눈빛이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투르카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듯 했다.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큰 은혜를 입었다는 듯 머리를 굽실거렸지만 말이다.

취췩. 그건 그렇고 저번에 얘기한 것은 분명히 준비가 되었겠지?

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그것을 보아 투르카가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한 듯 싶었다. 물론 노예신세인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음은 분명해 보였지만 말이다.

하, 하오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우거에게 잡혀간 때문에 일손이 현저히 모자랍니다. 그러니 그들이라도 있어야…….

취익. 안 된다면 네놈이라도 대신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결국 촌장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내일 사람들을 모아놓겠습니다.

무슨 말이 오고간 듯 싶었지만 데이몬이 내역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궁금증을 달랠 수밖에. 우거지상이 되어있는 촌장을 두고 투르카는 몸을 돌렸다.

취익. 가시지요.

전사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투르카. 그의 뒤를 따르던 데이몬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쳐지나갔다. 그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촌장에게 함부로 대하는 투르카의 태도에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한 데이몬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드래곤을 상대할 만큼의 힘만 기르기만 하면 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테다.'

데이몬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묵묵히 투르카의 뒤를 따라갔다. 언젠가 돌아와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데이몬이 안내된 곳은 마을 외곽의 조그마한 초소였다. 마을에서 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지어진 것으로써 한 눈에 보기에도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마한 움막이 전부였다.

사방이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초소 부근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어두컴컴했다. 귀기까지 감도는 것이 어지간히 담이 큰 자라도 감히 밤을 지샐 엄두를 낼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데이몬이 누군가? 트루베니아에서 간이 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가 아니던가.

오히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접근로와 도주로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도리어 투르카가 겁먹은 듯한 눈빛을 보였다.

취익. 이곳입니다. 보고에 따르자면 오우거가 산에서 내려오며 가장 먼저 접하는 초소이니 여기에 계신다면 놈과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은 듯 투르카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몸을 돌리려 했다.

휘하 전사들도 남김없이 따라가려는 것을 보니 아마 놈들도 이곳을 겁내는 듯 싶었다.

혼자만 놔두고 가려하자 데이몬은 적이 당황했다.

잠깐만.

데이몬이 부르는 소리에 투르카는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왜 그러시는지?

마을을 습격하는 오우거가 늙고 노련한 놈이라고 했었지?

그, 그렇습니다만.

지금까지 놈이 전사들의 포위망도 여러 번 벗어났다 했고…….

상대의 의중을 모르는 터라 투르카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미 놈의 손에 스물이 넘는 전사들이 당한 상태였다. 놈은 그만큼 노회하고 교활한 오우거였다.

투르카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엔 뭔가 확신했다는 듯한 빛이 서려있었다.

나 혼자 남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나만 남는다면 놈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지만 투르카에겐 애당초 대답을 유추해낼 만한 지능이 없었다.

취췩. 저, 저는 잘

멍청하기는……. 놈은 분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떠돌이 오크는 분명히 미끼다. 분명히 부근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 전사들이 매복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말이야.

투르카의 얼굴이 갑자기 멍해졌다.

취익! 그렇군요. 그렇다면

놈의 습격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보거라. 그때 전사들이 대체로 몇 명이나 배치되어 있었나?

대, 대략 다섯 남짓.

그 정도가 놈에게 가장 만만한 숫자로군. 그렇다면 이곳에 네 명의 전사를 더 배치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때서야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린 투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취익.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곳에 남길 만한 전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자 전사들은 하나같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하나같이 경험이 없는 어린 오크들이라서 오우거를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상황이 예상대로 진행되는군.'

장난기가 돈 데이몬은 슬며시 투르카의 비위를 긁기 시작했다. 그를 남겨서 마을의 상황을 물러보기 위한 심산이었다.

저쪽 녀석들이 그래도 제법 쓸만해 보이는군. 저들 넷만 남기고 나머진 내려가도록 해. 너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임무니까 말이야.

투르카의 얼굴에 약간 골이 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취췻. 이 중에서는 제가 제일 강력한데요?

오우거를 상대하는데 애들이 끼면 일이 안 돼.

예상대로 투르카는 심하게 반발했다.

애라니 터무니없습니다. 적어도 전 이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자부합니다. 취익.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 꼭 이곳에 남아야겠습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물론입니다.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미는 투르카를 보며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 멍청한 오크라고 한없이 비웃으며 말이다. 투르카는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앞으로 나와 섰다. 그러자 데이몬은 남은 오크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중에서 진정한 용사라고 생각하는 자는 나서라. 당당하게 오우거를 맞서 싸울 만큼 용기가 있는 자들 말이다.

그 말에 오크 전사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앞으로 나섰다. 진정한 용사라는 말에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데이몬은 그들 중에서 셋을 골랐다.

너, 너, 그러고 너 이렇게 셋과 나, 투르카가 남아 오우거를 상대하기로 한다.

지목된 오크들은 천만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나머지 오크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애초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자 투르카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날이 져서 어둑어둑했고 전사들은 그들 다섯만 남겨두고 모조리 마을로 내려간 상태였다. 적막한 산중에 달랑 다섯만 남게 되었으니 두려움이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머지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야성이 살아있는 오크였지만 이들은 이미 집단 생활에 익숙해진 종족이었다. 따라서 집단에서 떨어진 이상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라 말할 수 있었다. 언제 오우거가 나타나서 목뼈를 부러뜨릴지 몰랐기 때문에 투르카를 비롯한 전사 네 명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암암리에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녀석들…….'

이미 그는 사방의 경계를 전사들에게 맡겨놓고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야행성 종족인 이들이 자신보다 밤눈이 밝을 것이란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편한 자세로 누워 사방을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에 문득 이채가 서렸다.

'재미있군. 오크 놈들이랑 어우러져 오우거 사냥을 나서다니……. 그런데 아까 일은 무얼 말하는 것이었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데이몬은 소리쳐 투르카를 불렀다.

이봐 투르카. 이리 와봐.

투르카는 깜짝 놀라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취췻. 큰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합니까? 오우거란 놈은 우리보다 청각이 월등히 좋습니다.

원래 놈을 불러들이려고 한 것 아니었어?

비로소 실책을 눈치챈 투르카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췻. 그건 그렇군요.

그런데 내일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촌장이 상당히 난감해하던 것 같은데…….

취익. 그것 말씀이시군요.

투르카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태평스레 설명을 이어나갔다.

췻. 노예들 중에서 늙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을 선별해내는 일입니다.

오우거 사냥이 끝난다면 그놈들을 끌고 부족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자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투르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말이다. 하지만 듣고 있던 데이몬에게는 결코 가벼운 일이 될 수 없었으니…….

취익. 쓸모 없게 된 노예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때문에 놈들을 부족으로 데리고가서 요절을 낼 생각입니다.

데이몬은 멍한 눈빛으로 투르카를 쳐다보았다. 투르카의 얼굴에는 뭔가 기대한다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먹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고기는 상당히 연하고 부드럽습니다. 취익. 일이 예정대로 끝난다면 부족에서는 대대적인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오우거 고기가 더해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모든 실정을 알게 된 데이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세상에 노인들을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이다니…….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참담한 느낌이었다.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이런 처참한 처지에까지 전락해버렸다니……. 같은 인간으로써 침통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와 함께 오크에 대한 살기가 모락모락 치밀어 올랐다.

혹시 인간을 먹어보셨습니까? 오백 년 전에는 전사들이 하루 세 끼를 인간의 고기로 때웠다고 하던데, 지금은 구경하기가 쉽지 않죠.

태평스레 말을 이어나가는 투르카를 노려보며 데이몬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 같아서는 단방에 때려 죽였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었다. 하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놈은 구태여 이놈뿐만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트루베니아 전역의 오크들이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데이몬의 가슴속엔 한 가지 결심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맹세컨대 기필코 트루베니아에서 오크의 씨를 말려야겠군.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말이야.'

마음을 가라앉힌 탓에 데이몬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하게 되돌아갔다.

아니. 난 인간의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

왜 그러시죠? 그처럼 연하고 감칠맛 나는 고기는 드문데.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켜야 했다.

한 번 목에 걸려 죽을 뻔한 경우를 넘긴 이후로 먹지 않기로 했지.

그럴 듯한 대답에 투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데이몬의 눈에서 빛이 일어났다.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듯한 빛이었다.

'뭔가가 접근하고 있다. 묵직한 발자국소리. 십중팔구 오우거라 생각되는군.'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오크들의 동정을 살폈다. 놈들은 전혀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바야흐로 데이몬의 감각이 오크의 본능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놈이 오는 방향을 가늠했다.

'보폭이 상당히 넓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오우거가 틀림없군. 방향은…….'

데이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맹수들은 거의 틀림없이 바람을 안고 사냥을 행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냄새를 간파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쪽에는 한 마리의 오크가 초소의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놈은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오우거는 그놈을 노리는 것 같았다. 조심성이 많은 놈인지 금방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무릎 위에 얹어놓은 스파이크 건틀릿을 슬며시 집어들었다.

'한 놈이 당한 뒤 나가면 되겠군.'

당할 놈이 불쌍하긴 하지만 데이몬에겐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크란 족속은 결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할 종족이 아닌 것이다.

오우거가 기습해오길 기다리며 데이몬은 건틀릿을 소중하게 매만졌다. 들고 있던 건틀릿은 그가 유일하게 스승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가 사로잡힌 후 건틀릿은 잡동사니 창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졌고 리치가 된 이후 데이몬은 상당히 고생한 끝에야 이것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백 년의 세월동안 무척 소중히 간직해왔다. 그런 유래가 있는 물건이었지만 데이몬은 단순히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해 꺼낸 것이다.

'가급적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 필시 드래곤들은 나에게서 마법보고를 돌려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득 인크레시아 속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지 궁금해져왔다. 보고 자체를 넘겨받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있는 물품 목록은 하나도 넘겨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목록 자체가 몽땅 지크레이트의 머리 속에 들어있었으니…….

'좌표만 파악한다면 물건을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으면 될 테니까 걱정할 것은 없다.'

드래곤들이 꼭꼭 숨겨놓은 것들이니 만큼 가치가 얼마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의 보물 중 가장 진귀하고 값진 것만 모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어쩌면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데이몬의 얼굴엔 기뻐하는 표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애초부터 그는 물욕이 그다지 없는 무사 출신이었으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얼굴에 긴장하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놈이 공격하려나 보군.'

그는 얼른 건틀릿을 고쳐 잡았다. 초소의 거친 나무 벽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갔다.

콰지직.

나무 벽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가마솥 뚜껑 만한 커다란 손이었다. 손은 기대앉아 있던 오크의 머리통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취에엑.

운 없는 오크 전사는 구슬픈 비명만을 남기고 나무 벽 너머로 끌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서야 기습을 알아차린 오크들이 부랴부랴 글레이브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취익. 놈이다.

그들의 앞으로 뭔가 바람 같은 것이 휙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데이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투르카가 반색을 했다.

무, 무법자님.

놈의 퇴로를 차단해라. 도망치지 못하도록…….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오우거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데이몬의 뒤를 오크 전사들이 부랴부랴 뒤따르고 있었다.

제법이로군.

초소 밖 공터로 달려나온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우거란 놈이 끌어당긴 오크를 정신 없이 먹고 있으리란 기대가 여지없이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크르르르.

어둠 속이었지만 한 눈에 보아도 육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실루엣이 달빛을 받고 서 있었다. 끌려나간 오크는 놈의 발치에 맥없이 나동그라져 있는 상태였다. 목이 기괴하게 돌아간 것을 봐서 즉사한 것처럼 보였다.

놈은 늘어진 오크에게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데이몬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두 개의 구슬이 데이몬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상대가 머리가 하나인 오우거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트윈헤드 오우거보다 힘은 떨어지지만 지능 면에서 낫기 때문에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존재.

그런 오우거를 노려보며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오래 전 이곳으로 처음 왔을 때 데이몬은 오우거와 무척 힘겨운 싸움을 해야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다. 결국 승리하긴 했지만 대가로 몸이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그의 손에 의해 수십 마리의 오우거가 이승을 하직하지 않았던가? 비록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오우거 정도는 결코 데이몬의 상대가 아니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오우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크롸?

눈앞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간 큰 오크를 보자 오우거의 눈에 우습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자고로 하이에나가 사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가 떼로 뭉쳐 덤벼야 하는 법.

다 자란 오우거에게 오크 다섯 정도는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전사로도 보이지 않는 떠돌이 오크에 불과했다. 그런 놈이 달랑 혼자서 다가오다니 우습지도 않았던 오우거였다.

하지만 놈은 지금까지 무수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던 노련한 오우거. 나이를 헛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오우거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우선 자신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듯한 오크 전사 셋. 갑옷은 걸쳤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세 살도 되지 못한 풋내기들이었다. 자신의 손에 목이 꺾인 놈과 한 치도 틀림없이 동일했다. 그밖에 오크들이 매복한 기척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우거는 경계심을 완전히 버렸다. 이 정도 방비라면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돌파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오우거였다.

겁도 없이 다가오는 떠돌이 오크를 먼저 죽여버릴 요량으로 고개를 돌린 오우거의 눈에 난데없이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코앞에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놈을 찾는데 갑자기 하복부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크와아악.

오우거는 펄쩍 뛰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었기에 놈은 깨금발로 펄쩍펄쩍 뛰며 고통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눈물과 콧물이 배어 나와 제대로 앞을 분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옆으로 조그마한 녹색 실루엣이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런, 이런. 빗나갔나?

뒤로 살짝 물러 나와 오우거가 광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녹색 몸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젠장.

그는 돌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건틀릿의 송곳에 피와 함께 척 보기에도 지저분한 오물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공격을 가한 곳은 오우거의 회음혈. 항문과 생식기 사이에 위치한 신경이 밀집된 혈도로써 이곳을 공격받는다면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그렇게 놈의 발을 묶어놓고 느긋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오우거의 두꺼운 피부 때문에 송곳이 미끄러져 그만 항문을 찔러버린 것이다. 쉬운 말로 오우거는 정통으로 똥침을 맞아버렸다.

지저분한 놈. 밑을 제대로 닦지도 않는군.

엉덩이를 잡고 펄쩍펄쩍 뛰는 오우거를 흘겨본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린 뒤 바닥의 나뭇잎을 집어 건틀릿을 닦았다. 피와 함께 지저분한 배설물이 따라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오우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찮은 떠돌이 오크 나부랭이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놈을 뭉개버릴 생각에 오우거는 필사적으로 통증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부우우웅.

오우거는 상대를 향해 바람처럼 쇄도해 들어갔다. 주먹 한 방이면 피떡이 되어버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오우거의 몸놀림은 과연 빠르기 그지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척으로 접근해 들어간 오우거는 솥뚜껑 만한 주먹으로 데이몬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파파팟.

때맞춰 터져 나온 엄청난 파공성 소리에 보고 있던 오크들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저 주먹에 맞는다면……. 아마도 몸과 갑옷이 사이좋게 뒤섞여버릴 것이 분명했다.

기세 좋게 내뻗어진 오우거의 주먹.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기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주먹이 가까이까지 오기를 기다렸던 데이몬이 몸을 살짝 돌려버리자 주먹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 지나가 버렸다. 닳고닳은 싸움꾼인 데이몬이 그 틈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퍽.

팔 오금부분에 송곳을 박아 넣자 오우거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신경이 극도로 밀집된 곳에 금속이 파고드는 통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콰우우.

입을 딱 벌린 채 고통으로 몸을 파르르 떠는 오우거. 하지만 데이몬의 공격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상대가 저항을 하건 말건 상관없이 말이다.

퍼퍼퍼퍽.

데이몬의 송곳은 닥치는 대로 오우거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어느 것이 사혈이고 어느 것이 혼혈인지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리는 혈도는 남김없이 송곳을 박아 넣고 보는 것이다.

사시나무 떨 듯 계속해서 몸을 뒤흔들던 오우거.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장난처럼 툭툭 건드리는 듯한 공격이었지만 강인하다 자부해왔던 자신의 몸은 맥을 추지 못했다. 골수까지 치밀어 오르는 극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오우거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 없는 역경을 헤쳐 나온 역전의 노장이었다. 강한 적은 무조건 피하고 약한 적은 철저히 눌러가며 끈질기게 살아왔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판단한 죄로 놈은 정말 허무하고도 처절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인간을 즐겨 잡아먹은 죄로 말이다.

목뼈와 척추사이에 위치한 대추혈이 파헤쳐지자 오우거의 몸이 기역자로 꺾여 버렸다.

놈은 곧 비명도 없이 대지에 몸을 뉘었다.

쿵.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오우거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헉 헉.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데이몬의 몸 역시 피투성이였다. 물론 그의 피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팽팽히 당겨진 근육과 거기서 전해지는 피로감은 언제 겪어보아도 상쾌했다.

데이몬은 우선 건틀릿을 벗어 수습했다. 오크의 모습으로 변용한 상태라 건틀릿이 손에 맞지 않았던 탓인지 드러난 손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놈! 인간을 먹은 대가로 생각해라.

늘어진 오우거에 대고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렸다.

응?

순간 그의 눈에 의혹의 빛이 가득 차 올랐다. 오크들이 하나같이 멍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몬은 오래지 않아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크란 종족은 힘을 극도로 숭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빛에는 위대한 용사에게 보내는 경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신으로 오우거를 처치해버린 용사를 만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우거라면 설사 그들의 족장인 츄가르라고 할 지라도 감히 일대 일로 붙을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한낱 떠돌이 오크에 불과한 자가 이런 믿지 못할 일을 이루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크 전사들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데이몬은 차갑게 일갈을 했다.

뭐 하는 건가? 마을에 있는 놈들을 불러다 놈의 시체를 날라야 하지 않는가?

취익. 아, 알겠습니다.

투르카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휘하의 전사 하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쉭, 너는 지금 당장 내려가서 마을의 전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전사 한 명이 급히 달려 내려간 뒤 투르카는 모호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극도의 연모가 담겨있는 시선이었다.

사, 사실이었군요. 단신으로 오우거를 처치했다는 말이…….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은 비교적 쉬운 상대였어. 예전엔 트윈 헤드 셋과 맞서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급하게 되묻는 투르카는 눈에 불이 번쩍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딱.

머리를 감싸쥐고 나뒹구는 투르카를 향해 데이몬은 엄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멍청한 놈. 내가 살아있는 것을 보면 결과를 모르겠나? 조금 힘들긴 했지만 놈들은 모조리 내 손에 시체가 되어버렸다.

세, 세상에…….

투르카와 남은 전사 한 명은 또다시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오크였지만 같은 종족이 이렇게 강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크란 오로지 뭉쳐야만 강해지는 종족이었다. 개개인의 능력을 따진다면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종족인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뇌리에는 무척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황야에서 떠돈다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열망이 번들거리는 투르카의 눈을 들여다보며 데이몬의 머리 속에는 무척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온갖 역경을 견디고 생존한 떠돌이 오크에게는 그에 합당한 신의 보상이 있다.

난 그 보상을 받은 것뿐이다.

취익.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하지요?

데이몬은 투르카의 코앞에다 주먹을 불끈 쥐어 내밀었다.

무조건 싸우는 거다. 싸우다 힘이 부치면 도망쳐라. 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목숨을 걸고 물고늘어져라. 그것이 자신의 실력을 늘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취익. 아, 알겠습니다.

투르카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크게 인심쓰는 척 하며 늘어진 오우거의 사체를 가리켰다.

난 이만 떠나도록 하겠다. 이미 약속했으니 오우거 고기는 모조리 너희들에게 넘기겠다.

취익.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약속했던 양고기입니다.

투르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아든 데이몬은 그것을 배낭 속에다 쑤셔 넣었다.

그럼 잘 있거라.

짧게 한마디 내뱉은 뒤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능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등으로 투르카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눈망울에는 뭔가를 기대한다는 듯한 열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격정을 참지 못한 듯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취익. 저렇게 강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어느덧 떠돌이 오크의 삶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부족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되는 삶이 아닌 자의로 택한 삶 말이다.

크크크 멍청한 오크 놈들.

좁다란 산길을 걸어가며 데이몬은 연신 흉소를 머금었다. 모르긴 몰라도 츄가르 부족의 젊은 전사 중 상당수가 황야로 나갈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 투르카가 앞장 설 것이다. 물론 데이몬은 그런 무모한 만용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야에서 백 번 떠돌아봐야 놈들이 뭘 얻겠어?. 죽음?

하지만 그와 함께 착잡한 생각 또한 물밀 듯 밀려들었다. 오크 치하의 인간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직접 목격한 터라 기분이 결코 좋지 않았다. 그가 본 대로라면 가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한창 나이에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늙어서는 고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인간의 일원으로써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이들의 삶보다는 낫겠지?

이 한마디로 자신을 위안하며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 같아서는 중원으로 건너가서 무림의 고수들을 몽땅 끌어오고 싶었다.

이들의 처참한 삶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두말할 것 없이 찬성하고 따라올 터였다.

정사지간을 불문하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것이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우선 그에겐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매개물이 전혀 없었다.

드래곤 하트는 있다. 차원이동의 방법 역시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에겐 가지고 온 물건, 차원이동의 좌표를 잡을 수 있는 소지품이 없다.

때문에 돌아가는 것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이리로 온 지 대략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물론 중원에서 가지고 온 물건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있어야만 자신이 살던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실력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으니 우선은 드래곤부터 처리하고 보자. 어떻게 해서든 스승의 원수를 갚고 다프네를 구해내야 한다.

가능하다면 트루베니아에서 오크 놈들을 몰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데이몬은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그에게 당면한 현실적 과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일단 북쪽으로 가자. 그곳에서 조력자를 얻은 다음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서 마력을 쌓는다면 방법이 생길 테니…….

데이몬은 목적지를 상기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틀렸군.

베르키스의 얼굴에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부근의 오크 부족에게서 물경 오천 명이라는 병력을 차출했던 그였다. 그들로 하여금 근 한 달 동안 레어 주변을 물샐틈없이 수색했건만 결국 놈의 머리카락 하나조차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앞에는 게덴하이드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눈 버젓이 뜨고 놈을 놓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놈은 필시 일을 저지른 직후 이곳을 빠져나갔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의문투성이였다. 분명 공간이동이 일어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인비저빌러티나 에이비에이션도 전개된 징후가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5써클 급 이상의 고급 마법이다. 때문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놈이 도보로 빠져나갔다는 가정인데…….

그것 역시 결코 수월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레어를 지키는 모든 리치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길목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그와 병행해서 떠돌이 오크에 대한 대대적인 추살령이 내려져 있었으니 놈의 종적은 반드시 드러나야 했다.

이미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만이 넘는 떠돌이 오크가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날아올랐는지 종적이 묘연해져 버렸으니. 베르키스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실수다. 놈을 가디언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하더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런 짓을 저지를 놈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베르키스였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살려두었던 놈인데 이런 큰 일을 벌이다니…….

특히 이해하지 못할 점은 놈이 어째서 자신의 세뇌마법을 극복했는가 하는 것이다.

10써클의 정신계 마법인 세뇌마법은 인간이라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절대 마법을 극복하는 인간이 있을 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담이 크기로 따지자면 인간들 중에서 제일이겠군. 감히 나의 마법서가에 들어가 마법을 훔쳐 배우고 그것도 모자라 지크레이트를 살해한 뒤 인크레시아를 훔쳐가다니…….

데이몬이란 놈을 꼭 잡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놈을 놓치는 일 따위야 조금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그에겐 별로 큰 일이 아니었다.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마법사 따위는 드래곤에게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베르키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였다. 그 속에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모든 드래곤들의 귀중한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평생을 걸쳐 모은 보물들 중 가장 귀중한 것만 들어있었으니 베르키스의 속이 쓰릴 만도 했다. 그 역시 보물을 극단적으로 좋아하는 드래곤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인크레시아를 회수해야 한다. 놈만 처치한다면 마법보고는 다음 차례인 나에게 반드시 돌아올 터이니…….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면 이 넓은 트루베니아에서 놈을 찾아내는 것은 말 그대로 사막에 떨어진 바늘 찾기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놈이 어디에 있건 우리에겐 기다릴 수 있는 수명이 있다. 목적이 있는 놈이니 반드시 마각을 드러낼 터, 그 때 요절을 내어버리겠다.

베르키스는 결국 수색을 중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속해서 탐색마법을 펼치느라 심신이 극도로 피로했다. 하물며 그는 정해진 수면기간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더 이상 무리하다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듯 싶었기에 그는 펼쳤던 마법을 풀어버렸다.

10년 후면 모든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들이 함께 탐색마법을 펼친다면 반드시 놈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놈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설사 놈이 아르카디아로 건너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곧 그곳에 대한 침공이 시작될 것이니 놈이 숨을 곳은 양 대륙을 통틀어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모든 리치들을 철수시켜라.

알겠습니다.

이후 너희들은 레어의 보호에만 주력한다. 놈에 대한 추적은 십 년 후 모든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난 이후 시작할 것이다. 알겠느냐?

지엄하신 명령 어김없이 봉행하겠습니다.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게덴하이드를 보며 베르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러 가야겠군.

그는 곧 몸을 일으켰다. 처소를 향해 발길을 옮기는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휴우.

베르키스가 처소로 들어가고 나자 게덴하이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놈을 놓친 일로 큰 처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베르키스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수면에 들어가는 것이 더 급해서 그런 듯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게덴하이드가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드래곤이란 원래 망각을 모르는 종족. 십 년 후에 깨어나더라도 베르키스는 반드시 이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책임추궁이 언제 일어날지 짐작할 수 없었다. 게덴하이드는 별안간 살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가증스런 놈. 날 이 지경까지 몰아넣다니…….

하지만 생각할수록 놈의 능력에 대해 찬탄을 금하지 못했던 게덴하이드였다. 과거 자신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했어도 죽음을 면치 못했던 3써클의 햇병아리가 어느새 자신을 추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500년의 세월동안 거의 마법실력의 향상을 보지 못했던 게덴하이드로써는 놈의 실력변화가 부럽기만 했다.

놈이 어떻게 해서 9써클 엑스퍼트의 벽을 통과했을까?

게덴하이드는 그것이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을 단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트루베니아의 역사를 통틀어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대마법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는 것도 일조를 했다. 때문에 놈의 자질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상관할 바는 없겠군. 놈이 베르키스 님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니 말이야.

인간 마법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드래곤에 대적할 수 없다. 9써클의 마스터가 아니라 더한 경지에 올랐어도 불가능했다.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뛰어난 소드 마스터들과 파티를 이뤄 덤비기 전에는 어림없었다.

때문에 게덴하이드는 데이몬에 대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당면과제는 리치들을 통솔해 레어를 철통같이 지키는 것이었다.

휘유유융.

바람이 불었다. 날카로운 칼바람이 마치 생명체의 접근을 불허하겠다는 듯 매섭게 불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두터운 털가죽을 가진 짐승일지라도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아 동사하게 만들 정도로 매서운 죽음의 바람. 사방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적막한 평원이었다. 그런 곳이라 바람은 더욱 살벌하게 대지를 뒤덮은 얼음 위를 마구 휘저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벌판 위에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며 서 있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허술한 옷차림. 변변한 방한도구도 갖추지 않은 자였지만 마치 자신과 추위와는 무관하다는 듯 미동도 없이 서서 한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이미 동사한 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법했지만 코를 통해 새어나오다 바로 동결되어버리는 입김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죽음의 대지 위에 서 있는 자는 청년이었다. 그것도 용모가 무척이나 수려한…….

제대로 빗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지만 윤기가 흐르는 보기 좋은 금발 머리에다 푸른 눈동자는 마치 별을 그대로 박아놓은 듯 요요로왔다. 우뚝 선 콧날과 갸름하게 뻗어나간 얼굴 선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절세미남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꽉 다문 입술을 보아 의지가 철석같이 굳음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되던 입술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 오백 년만인가?

뒤로 펼쳐진, 조금 전 넘어온 만년설에 뒤덮인 준령을 보며 데이몬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절세미남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눈동자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감회가 새롭군.

그는 지금 500년 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다프네를 업은 상태로 사백 명의 용사들 틈에 끼여 이곳으로 들어섰던 기억. 그 때의 일이 마치 어제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물론 그에게는 결코 유쾌했던 경험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몬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 딱 석 달 만이었다. 이곳은 죽음의 절지인 노스우드 평원이었다. 인간의 운명을 구하려 노력하던 400명의 용사들을 인정사정없이 묻어버린 곳 말이다.

이곳으로 오며 데이몬은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러야 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떠돌이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생긴 일이었다. 중형 몬스터나 와이번이 습격했던 횟수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타 부족의 오크들에 의해 공격받은 적도 많았지만 데이몬은 체술과 함께 베르키스가 탐지하지 못할 정도의 마법을 병행해서 써 가며 천신만고 끝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베르키스는 이미 수면에 들어간지 오래였지만 데이몬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용사대가 펠드리안에서 공간이동을 해 온 장소였다.

그는 오백 년 전 용사들과 함께 넘었던 죽음의 장벽을 혼자 몸으로 넘어왔다. 온갖 역경을 혼자서 극복해내며 말이다.

물론 얼음호수를 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별다른 장비도 없었을 뿐더러 9써클에 달하는 마법 실력은 이곳의 혹한으로부터 그를 완벽하게 지켜주었다. 준령에 거주하는 아이스 트롤들 역시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극한에 이른 감각과 체술로 데이몬은 아이스 트롤의 습격을 무리 없이 방어해가며 준령을 넘어올 수 있었다.

문제는 용사대가 몰살했던 마법의 결계였다. 혼자서 들어섰지만 결계는 데이몬을 쉽게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다. 혼자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마물과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데이몬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사술에 이어 마법에도 통달한 때문에 데이몬은 그것들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도 환영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데이몬이 아니었다.

날 시험하려 하지 마라. 난 이미 너무나도 많은 시험을 치러온 몸이다.

데이몬은 눈썹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마물들이 휘두르는 이빨과 발톱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상대가 겁을 먹어야만 환상진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법.

퍽.

데이몬과 몸이 맞닿자마자 마물들의 환영은 허공에서 그대로 꺼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데이몬은 마침내 베르하젤의 신전이 있는 노스우드 평원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넘어온 과정을 잠깐 상기해본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사방의 정경은 50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 때 괴력의 스톤 골렘으로 변해 용사대를 궤멸시키는데 일익을 했던 돌무더기들이 그때 모습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성벽은 그때보다도 더 허물어진 상태였다.

오직 멀리 보이는 베르하젤 신전만이 완전한 모습 그대로 위용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곳은 데이몬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신전을 한 번 훑어본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던 곳, 용사대가 몰살했던 장소로 가려는 것이다.

이곳이군.

스톤 골렘의 잔해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곳에 도착한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물론 인간이나 몬스터의 시체는 세월의 풍파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갑옷만은 뻘겋게 녹이 슨 채 주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데이몬의 뇌리에 그때의 급박했던 순간이 스쳐지나갔다. 힘이 없어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을 당시 말이다.

격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그의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다프네를 빼앗기던 순간을 떠올리자 갑자기 베르키스에 대한 증오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 데이몬은 적막한 벌판에다 대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베르키스 네놈에게 반드시 처참한 최후를 안겨 주겠다. 네놈이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당하는 것은 예정된 네 운명일 것이다.

한껏 고함을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연신 불어대는 바람에 묻혀 힘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그렇게 가슴 속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버린 데이몬은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럼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그런데 놈들의 영혼이 아직까지 남아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린 데이몬은 곧 바닥에다 영혼을 불러내기 위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을 품고 죽은 기사의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데이몬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바로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을 상대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조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마법실력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마법으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드래곤을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 소드 마스터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오로지 그들이 전개하는 오러 블레이드만이 강철보다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아무리 고써클의 마법이라도 드래곤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드래곤을 상대할 때 마법사는 철저히 조연의 역할만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주연은 엄연히 소드 마스터의 몫이었다.

하지만 귀하디 귀한 소드 마스터를 끌어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은 법. 데이몬은 그 대안으로 데스 나이트에 기대를 걸었다. 그것도 소드 마스터에 뒤지지 않는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여야만 했다. 데이몬은 바로 그런 이유로 머나먼 노스우드까지 왔던 것이다.

데스 나이트를 소환하는데 가장 필요한 조건은 바로 한을 품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기사의 영혼이다. 그것도 반드시 생전에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기사여야 한다.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그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400에 달하는 소드 마스터가 몰살한 곳. 물론 그들 대부분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이곳을 떠도는 소드 마스터의 영혼이 있을 법도 했다.

많을 필요는 없다. 나에겐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보다 실력이 뛰어난 소수가 더 절실하니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은 바로 이카롯트의 기둥이었던 4대 기사였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거의 근접한 그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든다면 드래곤을 사냥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9써클의 마스터인 자신이 가세한다면 마법사의 지원은 충분하니까 말이다.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은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노스우드 평원은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규칙한 곳이므로 마법을 시전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의 경지는 인간 궁극의 경지인 나인 써클. 주위의 마나들은 오래지 않아 그의 의도대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쓰쓰쓰쓰.

마법진을 축으로 마나의 소용돌이가 뻗어나가며 사방으로 광범위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신호들은 정처 없이 이곳을 떠돌아다니는 망령들에게 시술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노스우드 평원. 마법진에서 퍼져나가는 신호는 노스우드 평원의 끝까지 데이몬의 뜻을 전파했다.

망령의 첫 번째 대답이 들려온 것은 데이몬이 마법을 전개한지 한 시간 남짓 된 시점이었다. 데이몬의 앞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무장을 한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망령이었지만 한쪽 팔이 떨어져나간 데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공포감을 조성하기엔 충분했다. 안개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은 또한 묘한 요요로움까지 가져다주고 있었다. 첫 번째로 나타난 망령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응시하다 말을 걸었다.

―날 부른 자가 그대인가?

마음 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음성.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날 부른 것인가?

몰골을 보아하니 과거 용사대에 소속되었던 자가 맞는 것 같군. 이름이 뭐지?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이 다짜고짜 할 말을 털어 내는 데이몬의 모습에 망령은 제법 당황한 듯 싶었다.

―간이 큰놈이로군. 내 이름은…….

애석하게도 그는 4대 기사의 일원이 아니었다.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데이몬은 즉시 축객령을 내렸다. 그 역시 생전에는 소드 마스터였을 터였지만 최고 강자가 아닌 이상 데이몬에겐 필요 없는 자에 불과했다.

널 부른 게 아니야. 그러니 넌 이만 가봐도 좋아.

―실없는 놈이로군.

분노 섞인 일갈을 남겨놓고 망령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데이몬이 불러들인 망령들이 끝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이름이 뭐지?

―나의 이름은…….

네놈도 아니로군.

지루한 확인작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찾는 망령은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용사들의 손에 의해 죽은 중형 몬스터의 영혼까지 데이몬을 찾아오는 실정이었다.

오우거나 트롤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꾹 참고 찾던 영혼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강력한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혼들이었다.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데이몬이 찾던 대답이 들려왔다.

―날 부르는 자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헬버트론이다. 용건을 말하라.

지루함에 지쳐 권태로움까지 떠올라 있던 데이몬의 얼굴이 확 펴졌다.

헬버트론? 너 맞아?

―날 아는가?

예상대로 이승을 떠나지 않았군.

데이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비록 망령이었지만 헬버트론은 트루베니아를 통틀어 안면이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모르겠는가?

몸의 반이 으스러진 모습으로 나타난 헬버트론의 망령은 데이몬의 모습을 훑어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널 본 기억이 전혀 없다. 누군가? 정체를 밝혀라.

멍청하기는……. 외모에 현혹되지 말고 영혼을 직접 보도록 해라. 망령이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을 테니.

잠시 데이몬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망령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 이 냄새는……

이제 알겠나? 나 데이몬이다. 너에게 요리를 만들어주었던…….

헬버트론은 그때서야 데이몬을 알아보았다. 망령이 되었어도 생전의 기억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랍군.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그런데 그 어울리지 않는 외모는 뭐지?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건 아니야.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꾼 몸이라고나 할까?

―트루베니아는 어떻게 되었지? 이카롯트 제국과 황제 폐하는…….

모처럼 외부의 사정을 알 수 있게되자 헬버트론의 망령은 데이몬에게 끝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기다려. 조금 뒤 모든 것을 설명해 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나머지 셋의 망령도 이곳에 있나?

―그렇다.

재미있군. 그들이 모두 모이고 난 뒤 용건을 밝히도록 하지. 더불어 트루베니아의 현재 사정까지 모두 말이야.

한 인간과 한 귀신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망령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보아 용사대에 소속된 모든 이들의 영혼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몰려드는 망령들에 지친 데이몬이 짜증을 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놈들은 죽어서 왜 저승으로 가지 않은 거야.

그 말에 헬버트론의 망령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모르고 있었나 보군. 이곳 노스우드 평원은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죽은 자들은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봐야겠지? 그 대가로 영혼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망령들이 많은 것인가?

―아마도…….

그러던 사이 그가 찾던 나머지 세 망령도 모여들었다. 노스우드 평원을 떠도는 모든 망령들이 데이몬에게 한 번씩 왔다간 셈이다. 원했던 영들이 모여들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망령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지워버렸다.

이제 되었군.

데이몬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4대 기사의 망령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헬버트론도 꽤나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셋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신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는 그저 희끄무레한 안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가슴 윗부분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사라미스의 모습에서는 예전의 수려했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 모였으니 이제 얘기를 시작해보자.

데이몬은 우선 그들에게 이카롯트 제국의 멸망과 함께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착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직접 들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군…….

―폐하는 어떻게 되었나? 황족들은 무사히 아르카디아로 건너갔겠지?

죽어 망령이 되어서까지 황가를 챙기는 4대 기사를 보고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그러진 못한 것 같아. 이카롯트 황가를 상징하는 르헤르트 세이버가 내 수중에 있으니까 말이야.

―저, 정말인가?

그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로써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꽤나 지극한 충성심이로군.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황가 따위에 죽어서도 충성을 다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야 .

그 말에 망령들은 발끈했다.

―발칙한 작자. 감히 황가를 능멸하다니…….

―우린 기사로써의 서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이후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데이몬의 표정이 별안간 냉랭해졌다.

멍청한 것들. 바보 같은 군주들 때문에 트루베니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놈들은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멍에를 지워놓은 자들이야.

―………

오크 치하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금부터 얘기해 주겠다. 정신 차리고 들어.

데이몬은 그들에게 츄가르 부족에서 본 오크족 노예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젊어서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오크 족의 식량이 되어버리는 기구한 인간들. 설명을 들은 망령들은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그런 일이…….

이것은 내가 두 눈으로 똑바로 확인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떠돌이 오크로 모습을 바꿔 이곳까지 왔기 때문이다.

망령들은 말을 잊었다.

그들이 이곳을 하염없이 떠도는 동안 트루베니아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절실히 실감한 듯한 모습이었다. 인간들이 그렇게나 기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니. 그들을 보며 데이몬은 나지막이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들이 이런 처지에 놓인 것에는 그대들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너희들이 군주들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아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절규하는 듯한 프림베르크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만, 그만 하라. 우리 역시 괴롭다.

쌍방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느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휘유우웅.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이 사방을 휘감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는 탓에 데이몬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고 게다가 한 번 죽은 망령들이 한기를 느낄 리가 없었다. 말을 걸어온 것은 라인델프였다. 생전에 소문났던 애처가답게 그는 가족의 안위에 대해 물어왔다.

―혹시 우리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모른다. 내가 알기로 극소수의 사람들이 간신히 아르카디아로 건너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 아마도 오크 족의 노예가 되었거나…….

데이몬은 말을 잠시 끊고 망령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죽어서 놈들의 식량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비정하기까지 한 말에 망령들은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그들의 노력은 결국 허사가 되어버렸다. 영혼마저 이곳을 떠나지 못하니 저승의 가족들을 만날 방법도 요원했다.

두 번째로 침묵을 깬 자는 헬버트론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불러냈는가? 이제 쓸모 없는 망령이 되어버린 우리들을…….

데이몬은 이때다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쓸모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 문제다. 난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우리들을? 왜? 어째서…….

난 너희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들려고 한다. 생전에 이카롯트 제일이라 불렸으니 훌륭한 데스 나이트가 될 테지?

이미 난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대마법사가 되었다. 너희들이 기억하던 초급 마법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따라서 너희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데이몬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망령들은 쿡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헬버트론의 망령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헛고생을 했군.

―결론부터 말하지. 우리에겐 결코 데스 나이트 따위가 될 생각이 없다.

4대 기사의 망령들은 한사람씩 돌아가며 대답을 했다.

―비록 몸은 죽었으되 우리의 정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결한 기사의 서약을 따른다.

―한 번 죽기는 했지만 명예를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뜻이지.

―장담하건 데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영혼 중 그 누구라도 너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데스 나이트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암흑 속에 가두는 것이므로. 설사 네가 아니라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직접 오더라도 우리의 대답은 마찬가지다.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런 대답을 예상이나 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가? 알겠다.

데이몬은 두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반응에 도리어 얼떨떨해진 것은 4대 기사의 망령들이었다.

―그냥 가는 것인가?

―무척이나 실없는 작자로군.

뒤돌아서 걸어가던 데이몬은 나지막하지만 망령들에게 충분히 들릴 법한 음성을 토해냈다.

하긴 너희같이 멍청하고 고리타분한 놈들을 데리고 드래곤 사냥을 하려 하다니 나도 정신나간 놈이지. 예정대로 소드 마스터를 물색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 말에 망령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헬버트론이 다급하다는 듯 데이몬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면 너는 드래곤을 상대할 생각인가?

데이몬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내 목표는 오로지 드래곤이다. 마법 또한 그것 때문에 익힌 것이고…….

특히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목숨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끊을 생각이다. 나머지 드래곤들을 결딴내는 것과 놈들에게 잡혀있는 성녀를 구해내는 것 역시 행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