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눈부신 빛무리가 생겨나며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빛무리는 제단에 누워있는 한 사람의 머리 부근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빛무리가 뿜어내는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그곳의 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방이 돌로 되어 있는 석실. 그곳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의 비밀 거처였다. 다만 서가를 채우고 있던 사술의 이론서들이 남김없이 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지만 말이다.
머리에 빛무리를 가득 머금고 있는 자는 스물 남짓한 미소년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창백한 나신으로 제단에 누워있는 모습은 시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금발머리에 우뚝한 콧날을 가진 청년의 용모는 무수한 처녀들의 방심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뛰어났다. 창백한 낯빛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산사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앞에는 왜소한 체구를 한 흑포인이 쉴새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이미 몸을 덮고 있던 로브가 갈가리 찢겨져나간 상태. 자세히 보니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악의 언데드 몬스터로 지칭되는 존재인 리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리치는 무척 참혹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눈뜨고는 못 볼 몰골을 하고 있었으니…….
놀랍게도 리치의 팔과 다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맷돌에 넣고 갈아버린 듯 손과 발이 있던 자리에는 수북한 가루만 쌓여 있었고 남은 부분 역시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었다. 게다가 뼈만 남은 두개골 역시 점점 금이 가고 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퀭한 동공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쉴새없이 경련하는 몸뚱이만이 리치가 아직까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으니…….
뚝.
리치의 몸이 별안간 떨림을 멈췄다. 곧이어 두개골이 퍽 하는 음향과 함께 둘로 쪼개진 채 떨어져 내렸고 유일하게 남은 몸뚱이는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버렸다.
푸스스.
리치의 몸은 삽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흰 가루에 묻힌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찢어진 로브만이 리치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석실은 또다시 적막감에 묻혀버렸다.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제단에 누운 미소년의 알몸만이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마치 억겁의 시간동안 이대로 유지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변화는 오래지 않아 일어났으니…….
번쩍.
시체처럼 누워있던 미소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이하고 칙칙한 빛이 동공에서 흘러나왔다. 어찌 보면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한 눈빛. 곧이어 소년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웃음소리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쇠그릇을 긁는 듯한 무척 듣기 싫은 음성이었다.
크하하하. 성공이다. 드디어 베르키스의 손아귀를 벗어나 새로운 몸을 얻은 것이다.
도저히 미소년에게서 나왔다고 보기 힘든 눈빛과 음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년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사실 그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정말 천행이었어. 하늘이 도와줬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미소년의 눈가에는 조금 전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말 그대로 도박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시도였다.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대로 소멸해버릴 수밖에 없는 도박.
데이몬은 그 희박하기 그지없는 확률을 극복하고 마침내 새로운 몸을 얻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추악한 몸뚱이가 아닌 잘 생긴 미소년의 몸을 말이다.
더불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 얻은 몸에 적응하기를 기다리며 데이몬은 조금 전의 일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게덴하이드를 속박하고 있던 마법진이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 데이몬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 그에게는 지크레이트가 인크레시아에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이 없었다. 9써클의 리치인 게덴하이드에겐 눈 깜짝할 사이에 레어로 돌아갈 능력이 있다. 이 사실이 베르키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은 그 즉시 끝장이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다른 방법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데이몬은 지크레이트에게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인크레시아를 내가 가져야겠다. 가능하겠지?
완전히 귀령제혼술에 제압된 지크레이트는 도저히 그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지크레이트를 죽이더라도 인크레시아를 빼앗진 못하겠지만 만약 그가 자유 의지로써 넘겨준다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가능하다.
결국 지크레이트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인크레시아의 소유권을 데이몬에게 넘겨주게 된다. 마법 보고를 사용하는 방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르쳐주고 내친 김에 인크레시아에게 새로운 주인을 각인시켜 준 터라 이 천고의 마법보고는 마침내 데이몬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되었어.
시간관계상 보화들이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가에 대한 기억을 듣진 못했지만 데이몬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겐 서둘러 비밀거처로 돌아가 대법을 시행할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공간이동을 시전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지크레이트에 대한 처리문제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엄청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귀령제혼술에 의한 것이다.
그로써는 장차 강력한 적이 될 것이 분명한 지크레이트를 살려 둬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것도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던 종족 드래곤이 아니던가? 애당초 하찮은 동정심에 휘둘릴 성품이 아니었기에 데이몬은 그 즉시 지크레이트에게 자진(自盡)을 명했다.
지금 즉시 너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내어 나에게 건네주도록 하라.
드래곤 하트. 드래곤이 가진 힘의 원천으로 이것이 없다면 드래곤은 결코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귀령제혼술에 깊이 제압 당해 있는 지크레이트로써는 도저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지크레이트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오른 손을 목에다 박았다.
푸학.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목뼈와 함께 찬란한 빛을 발하는 드래곤 하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발마의 비명소리는 그 이후에 터져 나왔다.
콰우우우.
생명의 원천이 빠져나감과 함께 거대한 그린 드래곤은 자신의 처소에 몸을 뉘었다.
지크레이트가 최후를 맞이했던 전말은 바로 이러했다. 하찮은 리치 하나로 인해 보물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늘어진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놈의 시체를 가져가야겠군. 증거도 증거지만 쓸모가 있을 테니…….
그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인크레시아에다 집어넣을 심산에서였다. 이미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숙지하고 있던 터라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인크레시아는 아무리 큰 물건이라도 무리 없이 수납할 수 있었다.
드래곤 하트와 함께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인크레시아에 밀어넣은 뒤 데이몬은 즉시 공간이동을 시전했다. 목적지는 그의 비밀 거처에 그려놓은 마법진이었다.
때는 게덴하이드가 막 베르키스에게 보고를 시작한 순간이었고 돌아가자마자 데이몬은 영혼교환의 사법을 시행했다.
서둘러야 한다.
10%의 가능성만을 믿고 시작한 대법. 중간에 베르키스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대법에 집중했다. 고통을 참는 것은 그에겐 이미 이력이 난 일이었으므로…….
정신이 흐트러지는 위기를 몇 차례 극복한 결과 데이몬은 결국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공이야.
그의 영혼은 무사히 새로운 몸에 들어가 안착했다. 아마도 새로운 몸이 넋이 빠진 상태라서 대법이 비교적 수월히 이루어졌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법이 끝난 것과 동시에 라이프 포스 베슬이 깨어진 리치의 몸은 재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몸 말이다. 그러나 수북히 쌓인 재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별반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다소 섭섭했을 테지만 말이다.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겠지?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리치의 몸이 부서지며 발산한 마나의 기운을 베르키스가 놓칠 리는 만무할 터.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곧이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아직까지는 이 몸으로 마법을 전개할 수 없다. 그러니 우선은 놈들의 이목을 피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서가로 걸어간 데이몬은 그곳에서 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게덴하이드의 눈을 속일 수 없을 터. 이것을 사용해야겠군.
병 속에 든 용액은 역체변용술을 시전하는데 꼭 필요한 약품이었다. 전혀 다른 종족으로 변장한다면 놈들의 의심을 별달리 사지 않을 터. 이미 거기에 필요한 마나는 조그마한 마법진 하나에 가득 저장해놓은 상태였다. 가히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 데이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뚜껑을 제거한 데이몬은 주저 없이 병을 입에 대고 들이켜버렸다.
꿀꺽꿀꺽
흑갈색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간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법진 위에 섰다. 이미 마법진은 누군가가 위에 올라서는 즉시 발동되도록 조처해 놓은 상태였다.
츠츠츠츠.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피어올랐다. 데이몬의 몸은 곧 빛무리에 휘감겨버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변화가 일어났다. 빛무리 속에서 그림자로만 보이던 데이몬의 몸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180cm가 넘었던 그림자의 키가 점점 줄어들었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대조적으로 두터워졌으며 전체적으로 땅딸막하면서 당당한 체격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조금 뒤, 빛무리가 사라진 마법진 위에는 전혀 다른 종족이 버티고 서 있었다.
크크크. 과연 놈들이 눈치를 챌까?
괴소를 흘리던 땅딸막한 그림자는 허리를 굽힌 뒤 무언가를 집어들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끝났군.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고 뭔가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덩어리가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로 수면기를 지내기 위한 베르키스의 처소인 것이다. 베르키스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용기의 조각들이 산산이 깨어진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리치의 생명력을 담고 있던 라이프 포스 베슬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깨어진 것을 보니 용기의 주인이 도저히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베슬 조각들을 내려다보던 베르키스의 거대한 눈동자에 이채가 맺혔다. 마치 무언가를 느낀 듯한 눈빛이었다.
놈!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었군.
라이프 포스 베슬이 깨어진다면 대상 리치의 몸은 거의 동시에 소멸되어버린다.
하지만 리치 역시 고도의 마법사인지라 순순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몸뚱이가 부스러지는 과정에서 상당한 마나의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다. 드래곤인 베르키스는 당연히 그 기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곧 벽 너머의 심복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라. 게덴하이드. 놈의 소멸을 확인하는 동시에 놈이 가지고 있던 보화들을 수습해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리던 게덴하이드는 만면에 희열을 떠올리며 냉큼 머리를 숙였다. 상대는 자신을 장장 다섯시간 동안 마치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팼던 가증스런 존재였다. 직접 복수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애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통쾌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즉시 몸을 돌렸다. 때문에 그는 벽 너머의 주인이 지금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지크레이트가 처소를 나선 뒤에도 베르키스는 수면에 들어가지 않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실 데이몬의 행동은 베르키스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대체 놈이 왜 지크레이트에게 갔으며 어째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물론 놈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다. 이미 자신은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하나도 빠짐없이 몸 속에 보관하고 있던 상태. 제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도 도망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게덴하이드를 암습한 일은 그 즉시 정체가 탄로나는 일이므로 정체를 숨겨야 하는 놈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게덴하이드를 공격했다. 게다가 자신이 잠을 자는 사이 지크레이트의 레어에까지 갔다왔다니…….
혹시?
베르키스의 뇌리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만약 놈의 목적이 지크레이트였고 만에 하나 그가 당했다면……. 하지만 베르키스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비록 상대가 9써클의 리치라고 하더라도 지크레이트가 당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어. 지크레이트가 아무리 경험이 없더라도 고작 리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불안한 심정은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만약 놈이 지크레이트의 손에 당했다면 이곳까지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온유한 성질의 그린 드래곤이라도 침입한 적을 순순히 살려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결국 베르키스는 직접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미 잠 생각은 뇌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우선 지크레이트에게 가보고 와야겠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으니…….
생각이 끝나자마자 베르키스의 거대한 몸은 레어에서 사라져버렸다. 10써클의 드래곤에게 공간이동 마법진 따위는 하등 쓸모 없는 것에 불과했다.
게덴하이드는 수하 오십을 대동한 채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서둘러 놈의 소멸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도대체 놈이 어떤 방법으로 9써클의 마스터에 올랐을까?
머리가 빠지게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머리 속에 잠재한 세뇌 마법으로 인해 마법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500년의 세월이면 그 역시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라 봐야 했다. 마법은 익힌 기간과 정확히 비례해서 성장하는 학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이 그로 하여금 암암리에 마법수련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게덴하이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답답해진 그는 휘하의 리치들만 독촉해댔다.
서둘러라. 빨리 끝내고 경비 업무에 복귀해야 하니 말이다.
명령을 받은 리치들이 부쩍 속도를 올렸다. 게덴하이드로썬 공간이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기만 했다. 불행히도 그 장소는 좌표가 파악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두에서 달려가는 리치들이 별안간 멈춰 섰다. 그들을 보자 무언가가 화들짝 놀라며 길옆으로 비켜서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동이 멈춰지자 게덴하이드는 짜증 섞인 일성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냐?
난데없이 오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차림새로 보아 떠돌이 헌터로 보이는 자이온데…….
리치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게덴하이드가 앞으로 쓱 나섰다. 일단 앞의 상황은 리치의 보고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길옆에는 남루한 차림새를 한 오크 한 마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켜 서 있었다.
부족의 표식이 없는 것을 보아 무리에서 쫓겨난 수컷 오크가 아닐까 생각되는 놈이었다. 게덴하이드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너는 웬 놈인데 감히 베르키스님의 영역에 들어섰느냐?
취익. 베, 베르키스님이 누구신지…….
떠돌이 오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호전적인 오크라도 리치에게만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한 눈에 보아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오크가 틀림없었기에 게덴하이드는 곧 경계심을 지워버렸다.
이곳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 님의 영역이다. 몰라서 그런 것 같으니 문제삼지 않겠다. 그러니 즉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라.
레드 드래곤이란 말이 떨어지자 오크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대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만족한 게덴하이드는 곧 휘하 리치들에게 출발할 것을 명했다.
그만 출발한다.
사실 이곳에 침입한 것만으로도 죽을죄를 지은 것이었지만 게덴하이드는 떠돌이 오크를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조만간 오크족과 연합해서 아르카디아를 정벌할 것이란 사실 때문에 전혀 그답지 않은 자비심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떠돌이 오크가 대답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때문에 오크의 눈에 스산한 한광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게덴하이드는 미처 보지 못했다.
이런 완전히 허물어졌잖아?
목적지에 도착한 게덴하이드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동굴로 보이는 곳이었지만 이곳은 지금 완전히 무너져있는 상태였다. 베르키스가 지목한 곳은 이곳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린 동굴을 파헤치고 들어가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게덴하이드로써는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에겐 상대의 소멸을 확인하고 또한 보검 르헤르트 세이버를 비롯한 보물들을 되찾아와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결국 게덴하이드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경량화 마법을 캐스팅하라. 바위를 가볍게 만들어 제거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당연한 말로 리치란 존재에게 육체적인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무서운 점은 오로지 고위급 마법에 의한 것이었고 순수한 힘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범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리치였다. 때문에 리치들은 부산하게 캐스팅에 들어갔다. 마법을 시전해서 바위를 가볍게 해야만 그들이 겨우 들어 옮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돌연히 일어난 상황에 의해 경량화마법은 전개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리치 하나가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다.
베, 베르키스님.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게덴하이드 역시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곳에는 레어에 있어야 할 그들의 주인이 애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표정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냉정을 되찾은 게덴하이드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저희들이 오기 전에 이미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바위를 치우기 위해…….
비켜라.
냉정하게 게덴하이드의 말을 자른 베르키스가 앞으로 다가섰다. 명령이 떨어지자 리치들은 분분히 옆으로 물러섰다. 베르키스의 명령은 그들에겐 말 그대로 법(法)이었다. 설사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할지라도 지켜야 하는…….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앞에 선 베르키스가 손을 슬쩍 들었다. 그의 손에 언뜻 광구가 맺히는 듯 싶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콰콰콰.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던 바위들이 마치 풍선으로 변한 것처럼 일시에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바위들은 무서운 속도로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무너진 동굴 내부의 정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베르키스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날아올랐던 바위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콰쾅.
굉음과 함께 작렬하는 바위 때문에 리치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피해야만 했다.
게덴하이드 역시 다급하게 마법을 캐스팅해서 자신을 향해 내려꽂히는 바위 하나를 가루로 만들어야 했다. 부스러진 바위 가루를 온통 뒤집어쓴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게덴하이드는 서둘러 베르키스에게 다가갔다.
이미 베르키스는 동굴의 정 중앙으로 짐작되는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위들이 몽땅 치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동굴은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 놓여 있던 석제 제단은 형체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고 벽면의 서가들 역시 바닥에 흩어져있는 나뭇조각이 아니었다면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가장 큰 집기들이 그 모양이었으니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베르키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것들을 샅샅이 노려보았다. 열심히 관찰한 끝에 그는 오래지 않아 목적했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기 있군.
그곳에는 두어 뼘 정도 크기의 갈가리 찢겨진 로브 자락이 돌에 묻혀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리치들이 입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재질이었다.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려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명령하는 듯한 눈빛.
알겠습니다.
베르키스의 눈짓을 받은 게덴하이드가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그는 마법을 써서 무척 조심스럽게 돌덩이들을 제거했다. 그러자 로브 자락 아래서 곱게 갈아진 뼛가루가 아주 조금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게덴하이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베르키스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리치들이 흔히 남기던 것이었으므로…….
뼛가루를 한 주먹 쥐고 들어올린 게덴하이드는 그것을 베르키스에게 펼쳐 보였다.
상황을 봐서 놈이 소멸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거의 확실하다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기이한 표정만이 감돌았다. 어찌 보면 슬픔에 잠겨있는 듯한, 달리 보면 극도로 화가 치민 듯한 복합적인 표정. 게덴하이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하명을 기다렸다. 조금 뒤 착 가라앉은 베르키스의 음성이 들렸다.
지크레이트가 놈에게 당했다.
무척 짧은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이 가져온 파장은 정말 어마어마할 정도였으니…….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리치들은 그 말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드래곤이 리치에게 당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래가 없었던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부분의 리치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게덴하이드조차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베르키스의 눈에 떠오른 안광이 짙어졌다.
감히 내 말을 의심할 셈이냐?
아, 아닙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수그린 게덴하이드. 그런 그의 등허리를 내려다보며 베르키스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크레이트는 드래곤 하트를 빼앗긴 뒤 목숨을 잃었다. 인크레시아 또한 놈의 수중에 들어갔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세, 세상에…….
게덴하이드는 입을 딱 벌렸다. 단신으로 드래곤을 처치할 수 있는 리치가 있다는 일은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써클의 리치가 열 명이 있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많은 수가 있어도 낮은 써클은 높은 써클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마법의 특징 때문이다. 자신이 데이몬이란 놈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게덴하이드였다. 또한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의 탈취였다. 이미 여러 번이나 지크레이트에게 보화를 전달했던 탓에 그는 인크레시아가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크레이트의 동의가 없다면 설사 신이라고 해도 빼앗지 못하는 완전무결한 보고. 그것을 데이몬이란 놈이 빼앗아 갔다니……. 그를 쳐다보던 베르키스는 눈을 빛냈다.
놈은 소멸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인크레시아를 만들어낸 드래곤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크레시아는 주인이 죽는다면 자동적으로 다음 차례의 드래곤을 새로운 주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놈이 소멸되었다면 반드시 나에게 와야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인크레시아는 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놈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충격으로 인해 게덴하이드는 아직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그가 듣건 말건 상관없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크레이트의 죽음을 확인한 뒤 나는 트루베니아 전역에 탐지 마법을 전개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에 행해진 공간 이동이라도 감지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놈은 걸려들지 않았다. 그것을 보아 놈이 공간이동으로 도망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동굴의 가운데 놓인 제단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대지의 정령인 노움을 불러 이곳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보려는 심산에서였다.
쓰쓰쓰.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부름이라 대지의 정령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반신이 없는 투명한 소년의 모습을 한 노움이 나타나서 베르키스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베르키스님. 무척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남김없이 나에게 고하도록 하라. 네가 기억할 수 있는 한도까지 모조리 말이다.
알겠습니다.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베르키스의 명령이라 노움은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른 대답했다. 만에 하나 그의 성질을 거스른다면 그 즉시 소멸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움은 열심히 대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바위와 흙의 기억을 추출해내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노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설사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작업은 그 정도로 방대했고 또 어려웠다. 조금 뒤 작업을 마친 노움은 알아낸 사실을 베르키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동굴에는 원래 인간 하나가 누워있었습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의 인간이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위나 돌 같은 암석의 기억은 하루를 넘기기 힘들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좋다.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 약 두시간 정도 전 갈가리 찢겨진 로브를 걸친 리치 하나가 공간이동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미리 그려져 있던 마법진으로 나타난 리치는 곧 무언가 이상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일은 작업에 열중하던 리치가 간헐적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치는 결국 전신이 부스러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시체처럼 누워있던 인간이 리치의 소멸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키스는 무척 놀라워했다. 노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리치의 영혼이 인간에게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혼교환(靈魂交換). 그것은 베르키스조차도 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신이나 마왕의 귄능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하찮은 리치가 그것을 행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지의 정령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법.
베르키스로써는 노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놈은 이후 어떻게 행동했느냐?
이후 인간은 머뭇거림 없이 이곳을 빠져나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동굴을 나설 때 인간의 모습이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변했지?
놀랍게도 그는 완연한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폴리모프를 사용한 듯 합니다.
부정확한 암석의 기억을 되살렸음에도 불구하고 노움은 비교적 정확하게 동굴 속에서 일어난 상황을 묘사했다. 모든 일을 들은 베르키스는 한숨을 내쉬며 노움을 돌려보냈다.
너의 도움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이후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베르키스님께 도움이 되어 드린 것이 오히려 영광이지요.
노움은 옅은 미소를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선 무서운 안광이 이글거리며 쏘아져 나왔다.
이제부터 놈을 찾는다. 레어를 경비하는 리치들을 모조리 동원도 좋다. 어떻게 해서라도 오크로 폴리모프한 놈을 사로잡아 나에게 데리고 오도록 하라.
말을 마친 베르키스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즉시 터져 나와야 할 게덴하이드의 응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게덴하이드는 무척 안절부절못해 하고있었다.
마치 큰 죄를 지은 듯한 모습이었기에 베르키스는 버럭 호통을 쳤다.
무슨 일이냐? 게덴하이드.
게덴하이드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했다.
사실 이리로 오던 도중 오크 한 마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떠돌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유추해보니 아마도 놈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를 향해 벼락같이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멍청한 놈. 멀쩡히 두 눈뜨고 놈을 놓치다니……. 가만 있자. 이럴 시간이 없다.
애가 탄 베르키스는 리치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모두 흩어져서 서둘러 수색에 들어간다. 명심할 것은 반드시 놈을 산채로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만, 놈은 이미 9써클의 마스터이니 너희들로썬 역부족이겠구나.
그렇다면 너희들은 우선적으로 놈의 위치만을 파악하도록 해라. 떠돌이 오크를 발견하면 먼 거리에서 탐색 마법을 펼쳐본 뒤 마법의 기척이 느껴지면 그 즉시 나에게 통보하도록 한다. 알겠느냐?
트루베니아에 돌아다니는 떠돌이 오크가 하나 둘이 아니었기에 베르키스의 명령은 일견 합당해 보였다. 리치들은 군소리 없이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놈은 분명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것이다. 그러니 서부로 향하는 길목을 중점적으로 수색하도록 하라.
지엄하신 명령 틀림없이 봉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리 높여 대답한 리치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행마법으로 날아오른 자도 있었고 주요 길목으로 공간이동을 해 간 리치들도 있었다. 게덴하이드는 경비하던 리치들을 모조리 소집하기 위해 레어로 워프를 해 갔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있는 리치들이 모조리 수색에 동원된 것이다. 때문에 베르키스는 놈이 오래지 않아 걸려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미 나는 트루베니아 전역을 탐지하고 있다. 따라서 놈이 공간이동을 한다면 그 즉시 좌표가 파악될 터. 놈은 결코 내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 설사 걸어서 가더라도 리치들의 이목은 피할 수 없을 테니 놈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라고 볼 수 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베르키스에게 별안간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데이몬이란 놈이 펼친 술법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술법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군.
사실 베르키스는 그것 때문에 놈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리란 마음을 먹은 것이다.
놈에게서 인크레시아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도 놈이 사용한 술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했던 것이 베르키스의 심정이었다. 마법의 극한을 추구하는 드래곤에게 새로운 술법은 말 그대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영혼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신과 마왕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상식이 여지없이 깨어져버렸군. 도대체 놈이 어떤 방법을 썼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르키스는 마침내 놈이 이계에서 건너온 존재라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군. 아마도 놈이 살던 곳의 술법일수도 있어. 아마 지크레이트가 당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군. 경험해보지 못한 술법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베르키스는 보고가 도착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법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리치들이 빠짐없이 수색할 터, 오크로 폴리모프한 이상 놈의 종적이 오래지 않아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설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더라도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간이동을 할 수 없는 이상, 하늘에서 또는 길목에서 시퍼렇게 뜨고 있는 리치들의 이목을 피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베르키스는 비교적 느긋한 심정으로 놈을 발견했다는 리치들의 보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놈이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모습을 바꿨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저기 또 한 놈이 오는군.
이번에는 맞아야 할 텐데…….
조그마한 계곡 위에서 리치 둘이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연신 계곡 아래쪽을 힐끔거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계곡 아래에는 제법 큰 소롯길이 나 있었다. 과거 인간들의 손에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길. 이미 이곳은 중형 몬스터나 오크의 것이 된 지 오래였다. 물론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도로의 형상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도로 위에 땅딸막한 그림자 하나가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미터 50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키였지만 제법 탄탄한 근육을 가진 종족인 오크였다.
등에 큼직한 보퉁이를 짊어진 채 열심히 걸어가는 오크를 두 리치들은 열심히 관찰했다. 이미 그들에겐 이곳을 지나는 모든 떠돌이 오크를 검사해야 하는 임무가 내려져 있었다.
이상한 점이 있어?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없는 것 같군. 저놈은 이미 이곳을 지나는 127번째 떠돌이 오크이니까 말이야. 트루베니아에 웬 놈의 떠돌이 오크가 그리도 많은지…….
우리가 찾는 놈은 겉모습만 오크인 놈이야. 폴리모프한 상태일 테니까 일단 마법의 기운을 한 번 검색해보자고…….
그럴까?
리치들은 곧 탐색 마법(view magic force)을 캐스팅했다. 대상 물체에게서 마법의 기운을 감지하는 상당히 수준 높은 마법이었지만 대부분 6써클의 마스터인 리치들에게는 결코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마법이 완성되자 둘은 서로간의 거리를 넓게 벌렸다. 만약 찾던 존재가 맞다면 그들은 도저히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추적의 대상은 리치들을 훨씬 능가하는 고위급 마법사였고 그런 자가 자신을 탐지하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리치들은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을 요량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조심해. 놈은 이미 게덴하이드님조차 능가하는 9써클의 마스터라고 했어.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베르키스님께서 도착할 때까지 하나는 살아남아 보고를 해야 해.
그래야겠지?
수군거리던 리치들은 준비가 완료되자 곧 캐스팅에 들어갔다. 한 리치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일어나더니 오크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파파파팟.
인간 마법사들과는 달리 리치들은 마법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 자체가 마법 지팡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나의 흐름에 걸림돌이 되는 피와 살, 근육이 전혀 없는 때문에 굳이 마법 지팡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손만으로도 충분히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는 것이다.
리치의 손에서 발사된 탐지 마법은 삽시간에 오크를 덮어 버렸다.
취익.
뭔가 이상한 기운이 전신을 감돌자 오크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리치들은 개의치 않고 탐지에 몰두했다. 하지만 마법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리치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제기랄. 저 놈도 아니군.
하긴. 게덴하이드님께서 아마도 놈이 아르카디아로 건너가기 위해 서부의 항구로 가실 것이라고 했어. 이곳은 북부로 향하는 곳이므로 아마 오지 않을 공산이 클 거야.
리치들은 맥빠진 말을 주고받으며 탐지 마법을 거뒀다. 의아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오크의 시선이 그들에게 와서 닿았지만 리치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들을 보고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오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통을 뒤흔들며 말이다. 하지만 리치들의 관심은 이미 그 오크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의 시선은 지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낸 128번째 오크 방랑자에게 향하고 있었으니까…….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떠돌이 오크는 곧 장내에서 사라져버렸다.
크크크. 멍청한 놈들.
완전히 계곡에서 벗어나자 오크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몹시 웃겨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예상대로 베르키스가 나의 생존을 눈치챘나 보군. 필시 대지의 정령을 불러 동굴 속의 상황을 물어보았을 테지?
혼잣말을 지껄이면서도 오크는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작달막한 다리가 다소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아직까지 새로운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탓이었다.
탐지마법(view magic force)이라……. 내가 폴리모프를 사용했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크크크. 역체변용술이 탐지마법 따위에 걸릴 턱이 없지.
오크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동굴을 빠져나온 뒤 그는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걸어서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먼저 볼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향하는 것이다.
데이몬이 생각하는 목적지는 당연히 아르카디아였다. 오크의 소굴인 트루베니아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곳에서는 마법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베르키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이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터.
항상 드래곤의 감시망 속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데이몬은 필연코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야 했다. 그곳에서 흑마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을 때까지 힘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경비가 심하지 않군. 아마도 놈들의 감시망이 서부로 통하는 길목에 집중된 모양이야.
머리를 뒤흔든 데이몬은 또다시 길을 나섰다. 사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머나먼 곳이었다. 하지만 급할 것이 없었기에 그는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우선 그에겐 새로 얻은 몸을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베르키스 때문에 당분간 마법을 캐스팅할 수는 없어 보였다.
따라서 그동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잊혀졌던 위력적인 체술을 가장 먼저 복원할 필요가 있었다. 오랜 여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기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9써클의 마법에 이어 강력한 언데드 전사들의 힘을 합한다면 드래곤을 때려잡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기다려라. 드래곤들이여. 너희들이 얼마나 강력한 적을 만들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몸을 떨며 격정을 진정시킨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방향은 북쪽이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여정이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쾅
이런 빌어먹을…….
베르키스는 불같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가디언들 모두를 풀었지만 정작 놈의 종적을 찾지 못한 것이다. 놈이 지크레이트를 죽이고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탈취해간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하지만 놈의 행방은 마치 땅 속에라도 꺼진 듯 오리무중이었다.
도대체 놈이 어디로 갔지? 분명히 공간이동을 한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있다면 오로지 나의 가디언들뿐이다. 그렇다면 놈이 분명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미 베르키스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광범위하게 탐지하고 있었다. 9써클과 그 이하의 써클과는 마나가 모이는 수준에서부터 판이하게 차이가 나는 법. 혹시라도 놈이 에이비에이션(Aviation:비행마법)이나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투명마법)을 써서 도주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베르키스는 그야말로 탐지마법을 극도로 돋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어떤 기척도 베르키스의 촉각에 걸려들지 않았다. 놈은 필시 아무런 마법도 캐스팅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도보로 탈출했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미 레어를 지키는 모든 가디언들이 동원되어 수색에 나선 상황.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베르키스는 근처 오크 부족을 닦달해서 수많은 병력을 차출했다. 그들이 모두 동원해서 길목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그런 이상 놈의 종적은 반드시 드러나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놈은 발견되지 않았다.
설마 놈이 가까운 계곡이나 동굴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수색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였다. 베르키스는 결국 레어 주변을 샅샅이 수색할 결심을 굳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의 손에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되찾아와야 해.
베르키스에겐 그것은 별달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드래곤들에게 1천년 동안의 충성을 맹세한 만큼 수색에 나설 병력 정도는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놈이 벌써 이곳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대륙에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졌다.
놈은 분명히 떠돌이 오크의 차림새를 하고 있다 했다. 어차피 그놈들은 허약하다는 이유로 부족에서 쫓겨난 놈들이 전부일 터. 전 대륙의 오크 부족에게 명령을 내려야겠군.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명령 말이야. 그 과정에서 놈의 종적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베르키스는 놀랍게도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학살해버리려는 마음을 굳혔다. 레어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병행해서 말이다. 사실 그가 명령한다면 명령은 어김없이 실행될 것이다. 어차피 오크에게 떠돌이란 하등 쓸모 없는 존재에 불과했으므로…….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트루베니아 대륙이 오크 족의 수중에 들어온 지도 어언 오백여 년. 그 기간은 오크 족의 수를 엄청나게 불려놓았다. 인간들이 키워놓은 작물과 가축들은 오크의 엄청난 생산력을 감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따라서 인간의 빈자리를 차고앉은 오크는 번영에 번영을 거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종족전쟁 때의 규모를 거의 채우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서부터였다. 미개한 오크들에게는 경작과 목축을 할 지혜란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먹어치웠기 때문에 그들은 곧 식량부족이라는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너무나도 수가 불어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몇몇 현명한 오크 부족은 인간노예로 하여금 경작과 목축을 시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나간 경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오크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오크 부족들에겐 내일을 생각하는 지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곧이어 대두된 식량문제. 인간노예들조차 모조리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 심한 경우 같은 종족끼리 잡아먹는 참사도 다반사로 벌어졌다. 부족간에 전쟁을 일으킨 뒤 전사자와 포로를 대거 식량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물론 전사한 동료들의 시체도 어김없이 부족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트루베니아의 오크 족은 자연적인 균형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태고적 원리가 다시 대륙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인위적인 방법도 없을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오크 부족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마리나 되는 많은 오크가 태어난다.
물론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릴 정도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도태되어 버렸다. 말 그대로 강한 놈들만 어른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름하여 오크 족의 성인식. 만 한 살이 되는 시기에 벌어지는 성인식에 의해 힘이 있고 강한 전사들만이 종족의 후사를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한 놈들은 죽거나 부족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늙어서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는 오크까지 함께 말이다. 떠돌이 오크들이 생겨난 배경은 바로 이러했다. 부족에서 추방당한 오크들. 대부분 병들고 힘없는 오크였기 때문에 그들은 거친 황야에서 얼마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생존한 오크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추방되는 오크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로 떠돌이 오크였다.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 못한 채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오크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적은 오크를 잡아먹고 사는 중형 몬스터나 와이번이 아니었다. 바로 같은 종족인 오크를 더욱 두려워해야 했던 것이다.
오크란 종족은 그 어떤 고기라도 마다하지 않는 악식가(惡食家)들이다. 같은 오크의 고기라고 해서 먹지 않을 놈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떠돌이 오크는 발빠른 초식동물이나 강력한 중형 몬스터보다 사냥하기가 월등히 쉬웠다.
때문에 대부분의 오크 부족에서는 떠돌이 오크를 보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냥감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가했다. 그 탓에 떠돌이 오크들의 생명은 마치 파리목숨과도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베니아에는 수많은 떠돌이 오크들이 존재했다. 많은 방랑자들이 몬스터에 의해, 혹은 동족에 의해 잡아먹혔지만 그 수를 능가하는 오크들이 또다시 부족에서 추방되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는 바로 그 떠돌이 오크의 씨를 말리려는 발상을 하고 있었다.
인간노예들을 시켜 경작을 하는 부족들은 식량이 풍족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떠돌이 오크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 부족 모두에다 명령을 내려야겠군. 떠돌이 오크를 보는 족족 죽여 없애라고 말이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 떠돌이 오크 따위의 목숨에 연연할 필요 따윈 없을 듯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데이몬이란 놈을 잡는 것이 최선이었던 베르키스였다.
죽지 않으려면 놈은 반드시 마법을 사용해야 할 터. 오크 부족에다 대대적으로 가디언들을 파견해 놓아야겠군. 마법이 사용된 기미를 파악하면 바로 연락할 수 있게 말이야. 놈에 의해 오크 부족이 전멸된다 하더라도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생각을 정한 베르키스는 지체 없이 게덴하이드를 불러들였다.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란 말씀이십니까?
베르키스의 명령을 들은 게덴하이드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데이몬은 무척 한가롭게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지도 벌서 보름이 지났다. 아직까지 목적지는 한정 없이 남아있었지만 별달리 급할 것도 없었기에 그는 느긋하게 여정을 즐겼다. 드래곤들은 놀라울 정도로 수명이 길었고 그가 힘을 얻을 때까지 충분히 살아있을 터였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다프네뿐이었다.
다프네가 죽게되면 드래곤들도 곤란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놈들은 단순석화가 아닌 절대석화명령으로 다프네의 생명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녀의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문제는 디스펠에 관한 것이다. 드래곤 로드가 직접 마법을 시전했으니 만큼 나로써는 도저히 풀 도리가 없다.
다프네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방법뿐이었다. 그녀를 돌로 만든 장본인인 크라누스가 직접 마법을 풀어주는 것. 데이몬이 우여곡절 끝에 10써클에 오른다해도 석화마법을 푸는 것만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정말 갈 길이 첩첩산중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어떠한 경우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이미 그의 집념은 끈질기기로 공인된 것이라 할 수 있었으므로……. 생각에 팔려 있던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응?
500년을 리치의 몸으로 살았지만 다행히 예전의 감각은 다시 되돌아온 듯 했다.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살기(殺氣)를 느낀 데이몬은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살기의 형태가 무척 단순한 것을 보니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오크 나부랭이정도 되겠군.
그의 예상대로 길 앞에서 예닐곱 마리 정도 되는 오크가 후다닥 뛰어나와 길을 막았다. 데이몬이 걸음을 멈추자 뒤에서도 서너 마리의 오크가 달려나와 퇴로를 차단했다. 삽시간에 진퇴양난의 처지에 직면한 데이몬은 일단 놈들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폈다.
놈들은 하나같이 둔중한 갑주를 걸친 보병들이었다. 데이몬이 변장하고 있는 모습보다 덩치도 월등했으며 힘도 훨씬 좋아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전사(戰士)로 키워진 놈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데이몬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걸음을 멈춘 데이몬을 축으로 오크 보병들은 둥글게 포위망을 형성한 채 좁혀 들어왔다.
취이익. 이 놈이 열 여섯 번째 사냥감인가?
오크 전사 투르카는 억지로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말려 올라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료들 모두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투르카를 비롯한 일행들은 불쌍한 희생자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갔다.
상대는 도망갈 생각도 잊어버린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투르카의 뇌리에 무척 재미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떠돌이 오크를 사냥하는 재미도 상당하군. 물론 죽인 뒤 그냥 버려야 하겠지만 말이야.'
투르카가 소속된 부족은 트루베니아 동북부 지방에서 상당한 힘을 과시하고 있는 츄가르 부족이었다. 비교적 인간의 문물을 잘 받아들인 부족 중 하나로써 식량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한 부족이기도 했다.
츄가르 부족의 족장은 역전의 노장이라 할 수 있는 용사 츄가르였다. 투르카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며 용맹과 함께, 뛰어난 지혜까지 보유한 명실상부한 최고의 용사.
사실 그는 족장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경우였다.
취이익. 도망칠 생각 따윈 버려라.
동료들이 희생물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투르카는 과거의 일을 상기했다. 할아버지인 츄가르가 족장이 되게 된 경위를 말이다.
전대 족장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인간 노예들이 사는 마을을 습격하려던 마음을 먹었다. 눈앞의 고기에 정신이 팔려 다른 것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다.
취익. 안 된다.
당시 츄가르는 전대 족장의 앞을 과감히 막아섰다. 인간 노예들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린다면 종족의 미래가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어 족장과 츄가르 간의 일대 일 대결이 벌어졌고 승부는 결국 츄가르의 승리로 끝났다.
전대 족장의 숨통을 끊었으니 관례대로 그가 신임 족장이 된 것이다. 족장이 되고 난 뒤 그는 모든 부족원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취이익. 이제부터 인간노예를 죽이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경작과 목축을 해 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들이므로…….
물론 그렇다고 노예를 노리는 오크가 없을 수는 없었다.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노예들을 습격한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츄가르는 그런 사건에 무척 엄격히 대응했다.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잡아다 불문곡직하고 목을 쳐버린 것이다.
잘려나간 수급은 인간 노예들의 마을로 보내져 그들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했고 몸뚱이는 부족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되었다. 마음을 놓게된 노예들은 말 그대로 열심히 경작과 목축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츄가르 부족은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츄가르의 탁월한 판단이 부족 전체를 살린 것이다. 그 때문에 사냥감을 향해 다가가는 츄가르 부족원의 눈에는 별달리 식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같은 종족의 질긴 고기보다 소나 돼지의 고기가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이 예정대로 사냥을 해야 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그것은 며칠 전 트루베니아를 지배하고 있는 종족에게서 내려진 통첩 때문이었다. 바로 그들의 주인인 드래곤의 통첩.
―오늘부터 각 부족은 근처를 지나치는 떠돌이 오크를 모조리 사냥하도록 하라.
이것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이름 하에 내려진 명령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는 오크 부족들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들로써는 감히 드래곤의 명령을 거부할 담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츄가르 부족원들은 지금까지는 떠돌이 오크들을 그저 본체만체 해 왔다.
그들에겐 충분한 식량이 있었으므로 굳이 사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냥을 나설 때는 단 하나, 성인식이 벌어질 시기뿐이었다.
만 한 살이 된 어린 오크들에겐 떠돌이 오크만큼 손쉬운 사냥물은 없었다. 그 때를 제외하고는 굳이 떠돌이 오크를 사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투르카와 그 동료들 역시 아직 어린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부족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사냥감의 지척으로 다가선 것을 느낀 투르카는 손에 든 글레이브를 고쳐 잡았다. 호전적인 성품의 오크답게 측은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그는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취이익. 공격이다. 전사들이여! 모처럼 사냥감의 피를 흠뻑 만끽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의 눈이 경악으로 툭 튀어나오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공격해 들어간 전사 두 마리가 맥없이 나가자빠지는 것을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왜소한 떠돌이의 주먹과 발길질에 맞아서 말이다.
크크크 이런 비천한 것들이…….
명치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두 자루의 글레이브를 보고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새로운 몸에는 적응할 대로 적응한 상태였으므로 과거 익혔던 체술의 70% 정도를 사용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그에게 열 마리 정도의 오크는 식후 운동거리에 불과했다. 그것도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놈들이 아닌가? 게다가 그가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 오크의 체형은 과거 그의 모습과 무척 흡사했다. 따라서 새로 얻은 몸보다도 더욱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글레이브 날이 몸에 닿을 정도까지 접근하자 데이몬은 몸을 모로 슬쩍 틀었다. 간발의 차이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던 글레이브를 오른 손으로 움켜쥔 데이몬은 그 상태 그대로 팔꿈치를 쭉 밀었다.
퀙.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오크 한 마리가 목을 움켜쥐고 비실비실 나가떨어졌다. 달려오던 탄력까지 가미된 공격이라 오크의 낯빛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데이몬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리며 두 번째 오크의 인중을 걷어찼다.
바로 코앞에서 가해진 공격이라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퍽
처절한 비명과 함께 적중된 오크는 코와 입으로 피를 낭자하게 뿜어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 강하게 가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확히 급소를 가격한 때문에 두 마리의 오크가 순식간에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데이몬은 오크들이 떨어뜨린 두 자루의 글레이브를 냉큼 집어들었다.
우지직
발로 밟아 칼날이 달린 부분을 분질러버리자 글레이브는 그만 두 자루의 봉이 되어버렸다. 하나는 짧고 하나는 조금 긴 봉. 데이몬은 두 자루의 봉을 잡고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팟.
봉이 사정없이 공기를 가름에 따라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소림사에서 훔쳐 배운 봉술을 한 번 사용해볼까?
무척 오랜만에 체술을 사용하게 된 터라 데이몬은 지금 무척 신이 난 상태였다. 500년 동안 리치로 지내며 그가 언제 체술을 사용해보았을까? 경직되고 거북한 리치의 몸에서 벗어나 젊고 싱싱한 새로운 몸을 갖게 된 터라 그의 몸놀림은 더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어린 시절 소림사에서 섭렵했던 봉술의 원리가 모두 기억되어 있었다. 일꾼으로 일하면서, 혹은 연무장의 눈을 치우면서 무승들이 무술을 익히는 것을 데이몬은 틈틈이 훔쳐 배웠던 것이다.
이놈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춤거리는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선두에 선 오크가 엉겁결에 글레이브를 내밀었다. 하지만 짧은 봉이 그것을 쳐내고 긴 봉이 오크의 턱을 올려친 것은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딱 퍽.
한 놈이 나가떨어진 이후 오크들은 마치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가해지는 공격이 정확히 급소만을 노리는 데다 그들의 어설픈 기술로 소림사의 유서 깊은 봉술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들고 있는 무기가 검이었다면 데이몬이 그처럼 거리낌없이 방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무로 된 봉으로 시퍼렇게 날이 선 검날을 가로막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글레이브의 자루는 나무로 되어있었으므로 데이몬은 방어에 대한 부담 없이 마음껏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십여 마리의 오크는 그야말로 걸레가 된 채 사방에 널브러지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초 한 자루가 채 반도 타지 않을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데이몬은 쓰러진 오크들을 쳐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죽여버리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상대를 잘못 택한 네놈들의 개 눈깔을 탓하도록…….
데이몬은 아무 미련이 없다는 듯 무서운 위력을 발한 봉 두 자루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사실 죽여버릴 수도 있었지만 데이몬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살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위치가 베르키스에게 파악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드래곤을 감당할 힘이 없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오크들의 숨통을 완전히 끊지 않은 것이다.
헉, 헉.
봉술을 전개하느라 전신이 땀에 젖었고 숨마저 가빠왔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그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데이몬에게 별안간 시장기가 몰려왔다.
반갑군.
그 사실에 데이몬은 반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치로 있던 500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먹을 필요가 없긴 했지만 식도락가였던 데이몬에게 그것은 상당한 곤욕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늘어진 오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몹시 시장한데 이참에 한 놈 잡아다가 먹어버릴까?
그 말을 들은 오크들은 하나같이 몸서리를 쳤다. 풍족한 츄가르 부족에서 태어난 때문에 그들은 동족을 먹어본 적도 없었지만 먹혀본 일도 없었다. 아무리 오크라고 잡혀 먹히는 일이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투르카가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켰다.
취이익. 네놈은 도대체 뭐냐?
투르카는 오직 오크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공용어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제 오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있던 500년 동안 여러 종족들과 접촉을 했던 때문에 데이몬은 제법 많은 종족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물론 오크의 언어 역시 깊이 익혀놓은 상태였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상태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쏘아보는 젊은 오크를 보고 데이몬은 빙그레 웃었다.
퍽.
만용의 대가로 얼굴을 부여잡고 벌렁 나가자빠지는 신세가 되어버린 투르카. 적어도 데이몬은 오크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선 도가 텄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낀 바로는 오크만큼 힘의 논리에 충실한 종족은 없었다. 이것은 가디언으로 있을 시절에 파악해 둔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투르카의 눈빛은 상당히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오우거에게 맞을 때도 이렇게 아플것이라 생각되지 않았기에 그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군가? 취이익.
이제야 좀 듣기가 편해졌군. 보면 모르겠나?
투르카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취이익. 떠돌이 오크?
퍽.
이번 타격은 제법 매웠던 모양인지 투르카는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데이몬은 그런 투르카의 멱살을 그러쥐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험상궂은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협박의 효과는 충분했다. 또한 자신의 몸보다 한 배 반이나 큰 오크의 멱살을 쥐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버릇없이 떠돌이 오크가 뭐야?
투르카의 얼굴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알기로 떠돌이 오크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경험은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상대는 아무리 보아도 비루먹은 떠돌이 오크에 불과했다.
취익. 그, 그럼 뭐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데이몬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로 인해 투르카가 몸서리를 쳤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황야의 무법자라 불러다오.
그것이 당신의 이름인가?
데이몬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지은 오크 식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 듯이…….
이, 이름이 그렇게 길단 말인가?
그럼! 난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빠져 있는 오크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오크들은 하나같이 살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네놈들이 날 운동시켰으니 의당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어디 보자. 어떤 놈이 가장 먹음직스럽게 살이 올랐는지.
불쌍하게도 오크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왜소해 보이게 몸을 움츠려 가며 말이다. 그런 동료들을 보다 못해 투르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취익. 먹을 것이 필요하면 주겠다. 대신 전사들을 잡아가진 마라.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먹을 것? 네놈들이 먹는 지저분한 것을 나더러 먹으란 말이냐?
하지만 투르카가 허리춤에서 풀어놓은 고기를 본 데이몬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틀림없는 양고기였다. 도저히 오크들이 먹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놈들이 어째서 이런 고기를…….
농장을 인간 노예들이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츄가르 부족은 여간해서는 오크 고기를 먹지 않는다.
투르카는 마치 부족의 일원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폈다. 하지만 날아온 것은 무정한 주먹 한 방이었다.
퍽.
길게 뻗어버린 투르카를 밟고 선 데이몬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오크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꽤나 말이 많은 놈이군. 그래 너희들은 어떤 고기를 내놓을 생각이냐?
비틀거리는 오크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취, 취익. 무슨 뜻인지?
허리춤에 찬 고기를 내놓겠느냐? 아니면 네놈들 몸에 있는 고기를 내놓겠느냐? 양자택일하라.
물론 그 상황에서 오크들의 선택은 당연히 정해져있었다. 앞을 다투어 내미는 고기를 받아든 데이몬은 그것을 주섬주섬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멀리 북단까지 가려면 상당히 많은 식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배낭 속에다 오크에게서 빼앗은 휴대식량을 모조리 털어 넣은 데이몬은 용무가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한 대 맞고 기절해있던 투르카가 그때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데이몬의 정체가 못내 의심스럽다는 듯 또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취익.
또 그 질문이군. 이미 말하지 않았나? 황야의 무법자라고…….
아니 그것말고 당신의 종족과 출신지를 알고 싶소. 취이익. 더불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는지도 함께 말이오.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 말인가? 뭐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상대의 질문을 가차없이 묵살해 버리려고 했지만 데이몬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유의 몸이 되어 신이 나 있던 참이었고 철부지 오크를 놀리려는 의도도 없진 않았다. 그는 곧 혈기왕성한 젊은 오크 전사에게 허황된 꿈을 불어넣으려는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낸 이야기였다.
좋아. 말해주지.
데이몬은 투르카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나에겐 출신 종족이란 없다. 왜냐하면 나를 버렸다는 이유로 나 또한 종족의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난 약하다는 이유로 종족에서 버림받은 몸이다. 하지만 그것이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몬의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오크들의 관심은 그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젊은 전사들이라 데이몬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의 엄중한 보호 속에서 자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황야의 환경이 얼마나 척박하고 위험이 많은지.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위험은 얼마든지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끊임없이 습격해오는 오우거, 트롤, 와이번 거기에다 타 부족의 위협까지……. 황야에서의 삶은 정말 위기의 연속이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떠돌이 오크들이 극복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음은 기정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한 자는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취칙. 그렇다면 당신이 진정한 강자란 말이오?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말을 끊은 오크를 노려보았다.
퍽.
기절한 채 저만큼 나가떨어지는 동료를 본 오크들은 몸서리를 쳤다. 데이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툭툭 털며 말을 이어나갔다.
강자이기에 앞서 무법자이기도 하지. 이름하여 황야의 무법자! 혹시라도 너희들은 오우거를 상대해 본 일이 있느냐?
물론 있을 턱이 없었다. 오우거 정도의 거물을 사냥하는 데에는 경험이 없는 어린 오크는 동원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세 살도 되지 않은 혈기 왕성한 오크들. 이번 사냥은 그들의 경험을 키워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는 오크들을 보며 데이몬은 가슴을 폈다.
아마도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이미 내 손에 이승을 하직한 오우거들이 스물을 넘는다는 사실을…….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취이익. 거짓말이오. 믿을 수 없소.
경험 많은 전사들조차 스물 이상이 모여야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오우거요. 헛소리.
데이몬은 싸늘한 눈빛으로 오크들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한 오크들이 하나 둘씩 입을 닫았다. 데이몬은 무척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긴. 이런 놈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가 미친놈이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려는데 다급한 투르카의 일성이 데이몬의 발목을 잡았다.
취이익. 당신은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소?
데이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투르카를 보자 그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책임질 수 있지. 하지만 네놈들이 오우거를 불러올 수 있을 리가 만무할 텐데…….
불러올 수는 없소. 하지만 날 따라간다면 한 마리 상대할 수는 있을 것이오. 취칙.
투르카의 말에 흥미를 느낀 데이몬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그의 손에 이승을 하직한 오우거는 스물을 훌쩍 넘었다. 만약 트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거의 백에 육박할 터였다.
좋다. 그럼 사정을 이야기해 보도록.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르카는 기다렸다는 듯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풍요로운 츄가르 부족에도 고민거리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한 마리의 늙은 오우거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사실 종족전쟁에서 연합군으로 함께 싸운 덕분에 오우거와 부족에 소속되어 있는 오크와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츄가르 부족은 상황이 더욱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에 부족에서는 오우거가 찾아왔을 경우 상당한 고기를 식량으로 내주었고 오우거는 그 답례로 떠돌이 오크나 잡아먹을 뿐 츄가르 부족원에게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인간고기에 맛을 들인 늙은 오우거가 나타난 이래로 츄가르 부족에서 엄청난 골칫거리가 생겨버렸다. 늙어서 노회한 데다 교활하기까지 한 오우거는 먹으라고 건네주는 가축의 고기도 마다한 채 오로지 인간 노예들만 노렸다. 가히 인간의 고기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밭을 갈던 그리고 양을 치던 많은 노예들이 놈에게 잡혀 먹혔고 그 결과 츄가르 부족으로 오는 식량은 반으로 줄어버렸다. 노예들이 오우거를 겁내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츄가르 부족에서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고 족장은 많은 전사들을 파견해서 오우거를 잡아죽이려 했다. 놈을 방치할 경우 식량공급이 완전히 끊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노련하고 교활한 오우거였다. 놈은 전사들이 많이 배치된 곳에는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할 수 있는 규모의 오크들만 상대했고 그 결과는 완전한 오우거의 승리였다. 언제나 허술한 곳만 파고들었기 때문에 전사는 전사대로 죽고 노예들은 계속해서 잃을 수밖에 없었다. 오우거는 혼자서도 열 명 남짓한 전사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츄가르 부족이 당면한 큰 골칫거리였다.
투르카는 바로 그 오우거를 잡아달라고 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말이 사실이라면 츄가르 부족에서는 큰 골칫거리를 덜게 되는 것이다. 설사 거짓으로 판명난다 하더라도 손해날 것이 전혀 없었다. 고작 떠돌이 오크 한 마리 객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때문에 투르카는 열심히 데이몬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투르카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데이몬에겐 뻔히 보이는 수작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냥 계략에 넘어가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려둬선 안될 놈이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잡아먹는 오우거를 그냥 두고볼 수가 없었다. 또한 오크 수중에 들어간 인간 노예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고싶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번 리치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본질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안내하라. 내 반드시 놈을 잡아 보이겠다.
데이몬의 말에 투르카는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자신의 책략에 넘어갔다는 생각에 그는 얼른 데이몬을 자신의 부족으로 안내했다.
오크 전사의 안내를 받아가며 본거지로 들어가는 데이몬에게는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의문에 쌓인 오크 족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래곤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오크 족은 그에겐 적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놈들의 습성을 알게 되면 상대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데이몬은 마침내 츄가르 족의 거주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투르카보다도 더 우락부락한 체구를 자랑하는 경비병들이었다.
취이익. 서라.
경비를 서던 오크 보병들은 무척 이상하다는 듯 데이몬의 아래위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떠돌이 오크 사냥을 떠난 젊은 전사들이 아주 떡이 되어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들이 한 눈에 보아도 떠돌이 오크임이 분명한 놈을 마치 귀빈 모시듯 공손히 모셔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르카가 곧 다가가서 귀엣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다소 못미더운 표정이었지만 경비병들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을 통과시켰다. 아마도 거기엔 투르카가 현 족장의 손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수백 명이 넘는 손자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취이익. 통과.
데이몬은 말로만 듣던 오크 본거지의 정경을 감상하며 한가롭게 걸음을 옮겼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오크들의 생활수준이 무척 미개하다는 점이다. 놈들은 대부분 가죽과 나뭇가지로 만든 거친 천막에서 생활했다. 거주지를 감싼 방벽 역시 아름드리 통나무를 그대로 잘라만든 듯 멋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철저히 실용적인 면만 추구한 방벽과 방어구들. 하지만 대조적으로 놈들의 무기만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오크들이 들고 있는 글레이브는 잘 벼려져 있을뿐더러 한 눈에 보기에도 담금질이 잘 되어 있었다. 물론 데이몬은 이유를 오래지 않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인간 노예들이 만든 것인 듯 하군. 세상에 오크 놈들의 노예가 되다니 그들의 운명도 기구하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일단의 병력이 앞을 막아섰다.
하나같이 경험이 많아 보이는 전사들이었기에 데이몬은 다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웬 놈들이지?'
그들을 보자 데이몬을 안내해 온 젊은 전사들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투르카가 얼른 달려나가는 것을 보니 부족 내에서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놈들인 듯 싶었다. 달려나간 투르카는 놈들 중 가운데 서 있는 나이가 지긋한 오크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데이몬은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놈들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둘 간의 대화는 상당히 길었다.
'괜히 왔나?'
크게 하품을 하던 데이몬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오크 본거지 안. 아마도 천막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퍼져나가는 마나의 기척을 눈치챘던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만에 하나 드래곤일 가능성도 있었기에 데이몬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선 천막 속에서 퍼져나가는 것은 광범위한 탐지마법에 불과했고 기운을 미루어보아 결코 6써클을 능가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은 아무런 마법도 시전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던가? 상황을 보아 베르키스 휘하의 리치인 듯 싶었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약하군.'
물론 실력이야 충분했지만 섣불리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베르키스에게 자신의 행방이 발각되게 하는 지름길이었으므로……. 역체변용술로 화신한 자신을 감지할 리가 없다고 굳게 다짐하며 데이몬은 태연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투르카와 대화를 나누던 늙은 오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데이몬은 그를 맞았다. 아무래도 그가 족장인 츄가르인 모양이었다.
취이익. 우리 츄가르 부족에 온 것을 환영한다. 방랑자여.
오크 특유의 콧소리와 함께 얼굴에 침이 튀자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대로 상대는 오크 부족의 족장이 틀림없어 보였다. 데이몬은 제법 당차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취익.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말라고……. 어차피 떠돌이 오크에게 대할 대접이야 뻔하니 말이야. 그래 상대 할 오우거는 어디에 있지?
상대가 지금까지의 어린 오크가 아닌 노련한 오크였기에 데이몬은 제법 그럴 듯하게 오크의 콧소리를 흉내내며 말을 받았다. 물론 상당히 도전적인 태도로 말이다. 그 태도에 부아가 치민 듯 츄가르 휘하의 친위병들이 글레이브를 데이몬에게 겨누었다.
췻. 고작 떠돌이 오크 주제에 버릇없이…….
취익. 죽고 싶으냐?
데이몬은 재빨리 놈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나같이 경험 많은 노련한 전사들로 보였다.
물론 그렇다손 치더라도 결코 데이몬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했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두 말도 하지 않고 투르카를 향해 손을 쓱 내밀었다.
내 놔.
뭐, 뭘?
영문을 모른 투르카가 눈을 희번덕거리자 데이몬은 잠자코 그의 손에서 부러진 글레이브의 자루를 받아들었다. 츄바카와 그 휘하의 전사들을 때려눕혔던 봉 말이다.
두 자루의 봉을 손에 나눠든 데이몬은 자세를 취했다. 자신을 얕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무력시위의 필요성을 느꼈던 데이몬이었다. 그는 무기를 겨눈 친위병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취익. 슬라임 한 마리도 못 잡을 것처럼 보이는 허약한 놈들이 날 어떻게 죽일지 궁금해 죽겠군. 취익. 어디 한 번 날 죽여보지 그래?
데이몬의 예상대로 친위병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물론 족장 츄가르를 비롯한 모든 오크들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결을 통해 실력을 증명하는 것은 오크 사회에서 가장 빈번한 일이었으므로…….
물론 싸움을 거는 데이몬에겐 속셈이 있었다. 이미 탐지 마법이 자신을 샅샅이 훑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접전을 치르며 천막 속에서 마법을 시전하는 존재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지금 상황에선 하찮은 리치 하나라도 섣불리 상대할 수가 없었다.
취이익. 죽어라.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친위병 하나가 다짜고짜 공격해 들어왔다. 여러모로 보아 투르카같은 어린 전사보다 훨씬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자세도 잘 잡혀 있었고 글레이브를 휘두르는 동작에 절도도 있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놈은 결코 데이몬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퍼퍽.
봉 하나로 글레이브를 막은 뒤 나머지 봉으로 글레이브를 잡은 손을 가격하자 친위병은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부분은 신경이 밀집된 만큼 통증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췌에엑.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레이브를 놓지 않는 것을 보니 과연 친위병으로 뽑힐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 따위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몸을 날린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자세를 잡으려는 친위병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엉겁결에 방어자세를 취한 친위병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두 자루의 봉이 글레이브의 양끝을 아래위로 두드리자 어지간한 친위병도 글레이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손이 글레이브에 가해진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퍼퍼퍽.
글레이브가 땅에 떨어진 이후로 이어진 것은 무자비한 구타였다. 데이몬은 친위병의 목과 허리, 그리고 허벅지를 연속해서 가격했다. 마치 빨래를 두드리듯 말이다.
모두가 갑주로 가려지지 않은 부위였다. 친위병은 비명을 지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사시나무처럼 떨기만 했다.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동료를 보다 못해 나머지 근위병들이 싸움에 가세했다.
이놈.
취이익. 멈춰라!
두 명의 친위병이 달려들었지만 데이몬은 싸늘한 미소만 날릴 뿐이었다. 어차피 봉술의 특성상 그에겐 일대 다수의 대결이 더욱 편하다고 볼 수 있었다.
퍽, 퍽, 퍽.
북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린 다음 세 명의 친위병은 큰 대자로 쭉 뻗어버렸다.
특히 처음에 당했던 친위병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을 하고 있었다. 녹색 피부를 가진 오크가 지금은 아예 검은 오크로 변해버렸다. 물론 멍자국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세 명의 친위병을 때려눕힌 데이몬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땀이 이렇게 상쾌할 줄은 여지껏 몰랐던 일이었다. 싸움과정을 지켜보던 족장 츄가르가 탄성을 내질렀다.
취이익. 떠돌이 오크치고는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우리 부족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원한다면 전사로 받아들여 주겠다.
떠돌이 오크에겐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제안이었지만 데이몬에겐 애당초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사양하겠어. 어디에 소속된다는 것이 영 거북해서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황야의 무법자라는 이름을 버려야되겠지?
이해할 수가 없군. 우리 부족이 된다면 항상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츄가르를 보며 데이몬은 정색을 했다.
그딴 소리는 집어치우도록. 그런데 오우거는 언제쯤 보게 해 줄 작정이지? 가급적 빠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말에 츄가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비로소 투르카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오우거란 말을 듣자 대뜸 마을로 오겠다고 한 상대의 태도. 그것은 평범한 떠돌이 오크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었다. 츄가르는 대뜸 한 마디를 던졌다.
취익. 왜 그렇게 오우거를 상대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거지? 혹시 오우거와 원수진 것이라도 있나?
일개 부족의 족장인 만큼 예리하다 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목적. 하지만 데이몬은 츄가르보다도 오히려 더 노련했다. 일순 말이 막힐 법한 어려운 질문을 그는 노회하게 돌려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