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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혈도에 계속해서 힘이 가해지자 알카리스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멍하니 뜨여있던 눈동자가 슥 돌아가며 백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싸늘한 기운이 알카리스의 전신을 뒤덮었다. 핏기가 사라져가던 알카리스의 몸은 곧 꼿꼿이 굳어버린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되었다.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모아놓은 마나를 흩어버렸다. 베르키스의 레어와 그리 멀지 않은 만큼 마법의 기척은 가능한 빨리 숨겨야 했다. 비록 그가 게덴하이드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9써클의 마스터가 된 것을 게덴하이드가 알아차린다면 그는 즉시 베르키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 복수도, 다프네를 구해내는 것도 끝장이겠지?

나직이 되뇌인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가디언들이 레어로 돌아와 있을 시간이었다. 물론 침입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격퇴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게덴하이드를 당적해 낼 인간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할 정도였으니까……. 데이몬의 시선이 알카리스에게로 향했다.

이놈의 몸은 약 한 달간 이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그 전에 나는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찾아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빠져나갈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한가지 문제는 극복한 듯이 보였지만 그래도 일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도난을 완벽히 봉쇄하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속에서 어떻게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빼내어와야 할지 도대체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이 나가고 난 뒤, 석실에서는 제단에 누워있는 비운의 황태자만이 남게 되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작전은 완전 실패입니다. 투입한 병력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습니다.

뭐라고? 괴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페르슈타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알카리스를 구해내기 위해 3개 기사단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투입했는데 괴멸이라니……. 부관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안절부절못해하며 보고를 해 나갔다.

투입한 3개 기사단은 정말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드 마스터 10명 중 4명이 전사하고 팔라딘들은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쿠슬란 궁정 마법사님도 전사하신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만약 그분의 후퇴 명령이 없었더라면 나머지 인원도 그곳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페르슈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부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이기에…….

정보부에 의하면 그곳은 과거 종족 전쟁에서 가장 위력을 떨쳤던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곳을 지키는 가디언들 대부분이 6써클을 넘어서는 리치입니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알아낸 사실입니다.

말도 되지 않아. 상대가 6써클의 리치라면 팔라딘들은 역부족이겠지만 소드 마스터들마저 당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 소드 마스터들이라면 6써클의 공격 마법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페르슈타인의 역정은 일견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수준이 높은 소드 마스터와 그보다 낮은 팔라딘과는 막아낼 수 있는 마법에서 현격한 격차를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서 대마법 갑옷의 질은 별달리 문제가 되지 못했다. 같은 갑옷을 입고 있더라도 소드 마스터는 팔라딘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고위급 마법까지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의 차이 때문이었다. 많은 마나를 주입 받을수록 대 마법갑옷의 방어력은 증가되는 것이다. 물론 일정 수준까지겠지만 말이다.

페르슈타인의 의문은 곧이어 이어진 부관의 설명에 의해 풀렸다.

그곳에는 9써클로 짐작되는 무시무시한 리치가 있었습니다. 리치들의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놈으로써 사망한 소드 마스터 대부분이 그놈에게 당했습니다.

9써클이라……. 놀랍군.

페르슈타인은 그때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9써클의 대마법사에게만은 역부족이었다. 비록 대마법 갑옷으로 인해 소드 마스터가 마법사보다 월등히 강한 면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일정 수준까지였다.

9써클의 대마법사가 시전한 공격 마법이라면 소드 마스터의 몸을 감싼 대마법 갑옷을 일격에 분쇄할 수 있었으므로……. 또한 대마법사의 주문영창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적어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대마법사를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페르슈타인은 인상을 팍 구겼다.

미치겠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3개 기사단이 괴멸한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밀고 있는 황태자 알카리스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파견한 기사들이 페이런과 루드비히의 시신을 확인해서 수습해 온 상태였다. 비록 그것이 몸의 일부분뿐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에겐 추가로 파견할 병력이 충분히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죽었을 것이 확실한 알카리스를 위해 더 이상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에 불과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패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정박아인 알카리스를 황제 자리에 앉혀 국정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으니 말이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결국 둘째 황자인 드비어스를 밀어야 하는 것인가?

나이가 어리기는 했지만 둘째 황자는 알카리스와는 달리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판단력과 결단력이 이미 범인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이가 든다면 결코 그의 손에 휘둘릴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봐야 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슈타인은 마음을 정리했다. 사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드비어스를 밀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둘의 부모처럼 암암리에 암살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사실 황손들의 원인 모를 사망에는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황좌를 노리고 귀족이나 타 왕국의 군주들이 벌떼처럼 일어날 테니……. 아직은 나에게 그놈들을 막을 능력이 없다.

만약 크로센 기사단의 힘을 손에 넣었다면 그것은 하나도 걱정할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애석하게도 크로센 기사단은 아직까지 발렌시우스 황제 한 사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 충성심이 드비어스 황자에겐 이어질지언정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페르슈타인 공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알카리스를 잃은 이상 드비어스를 황좌에 올려 시간을 번 다음 차근차근 놈들을 회유해야겠군.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최선책일 테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뜻을 이루고 말겠다는 결의의 눈빛이 번뜩였다.

끓어오르는 화를 곰삭이고 있는 자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트루베니아 대륙에도 하나 있었다.

빌어먹을.

게덴하이드는 지금 몹시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느닷없이 난입한 침입자들에 의해 리치가 열 다섯이나 작살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500년 동안 레어를 지키며 입은 피해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물론 리치라는 존재의 특성상 팔이나 다리 하나정도 잘려나가는 것은 부상으로 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상자들이 대부분 수십 조각 이상으로 분해되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온전한 이상 되살려낼 수 있긴 하지만 상당기간 경비임무에 투입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레어에 갇혀 있는 인간 노예들만으론 그들을 회복시킬 수 없었고 추가로 노예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병상에만 누워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 베르키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란 사실 때문이다.

직접 만들어낸 리치가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으니 그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가지고 있는 베르키스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것이 바로 게덴하이드가 안절부절못해하는 이유였다.

큰일이군.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들로 인해 베르키스님의 수면이 방해를 받았으니…….

홧김에 침입자들의 시신을 몽땅 가루로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그것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침입자를 상대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던 게덴하이드의 눈이 미묘하게 빛났다.

놈들의 규모와 실력을 봐서 단순한 트레져 헌터 따위가 아니었어. 도대체 놈들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트레져 헌터 중에서는 소드 마스터가 끼여있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귀한 경우였고 트레져 헌터들 대부분이 행운을 노리는 애송이들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게덴하이드가 보기에 이번 침입자들의 실력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대부분이었다면 단순한 목적으로 침입한 자들이 단연 아니라고 봐야 했다.

설마 그 멍청한 바보 놈을 구하러 온 놈들일까?

게덴하이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멎은 곳에 리치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보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리치였다.

명령은 어김없이 완수했겠지?

몸을 가늘게 떤 리치는 지체 없이 복명했다. 게덴하이드는 이미 인간뿐만 아니라 같은 리치들 사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 된지 오래였다.

말씀대로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습니다. 놈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틀림없겠지.

물론입니다.

리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만족할 듯 싶었던 게덴하이드였지만 그는 도리어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놈을 죽이지 말고 추궁을 해 볼 것을 그랬나? 덮어놓고 죽여버렸으니 놈들이 난입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

고민에 빠져 있던 게덴하이드의 눈에 살금살금 들어오는 리치 하나가 비쳤다. 그를 보자 게덴하이드의 눈가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거의 모든 리치들이 출동해서 침입자를 막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얄미운 놈이 이제야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것이다. 게덴하이드로써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좍 펴서 놈을 불렀다.

너 이리로 와 봐!

나 말인가?

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게덴하이드의 화를 더욱 북돋웠다. 족히 700년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저렇게 대책 없는 놈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의 앞으로 걸어온 리치는 무슨 일이냐는 듯 가슴을 펴고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더욱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만 두자. 네놈과 말씨름해봐야 내 머리만 아플 뿐이니…….

그럴 것을 왜 불렀어?

상대의 반응에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발작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놈을 대해 본 경험 때문이었다. 두들겨 패고 고통을 가해보아도 상대의 태도에는 결코 변함이 없었다. 이 사실을 게덴하이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500년의 세월 동안 놈을 대해보며 절실히 느낀 것이므로.

말을 말아야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은 게덴하이드는 몸을 돌렸다. 그에겐 베르키스에게 조금 전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데이몬의 동공에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몸을 돌린 게덴하이드는 애석하게도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리치들에게 레어 주변을 빈틈없이 경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난 뒤 게덴하이드는 지체 없이 베르키스에게로 향했다. 베르키스는 지금 레어의 최하단에 위치한 지하공동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500년의 긴 세월 동안 말이다.

게덴하이드는 그리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무척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비록 그가 레어 외곽의 총 경비책임을 맡고 있는 자였지만 이곳에만 들어오면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 가디언들이 경비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통로를 지나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고 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거인상들이 통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전체가 청동으로 된 거인상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적이 침입해 올 경우 그 거인상들이 엄청난 힘을 가진 브론즈 골렘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톤 골렘보다 월등히 강력하다고 볼 수 있는 브론즈 골렘.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지하공간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9써클의 마스터인 그도 감히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 말이다.

저기 있군.

목적한 것을 찾았는지 게덴하이드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유달리 덩치가 큰 거인상이 두 기 서 있었다. 고대 타이탄(Titan)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금속제 거인상은 벌거벗은 근육질의 몸매를 과시하며 마치 문지기인양 철문 양옆에 버티고 있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졌으며 6미터에 달하는 신장은 올려다보고 있는 게덴하이드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져 있는 거인상이었다.

이름하여 아이언 골렘인 것이다. 전체가 정련된 강철로 되어있는 탓에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자랑했고, 또한 베르키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석이 몸 속에 들어있는 터라 움직임이 오우거에 육박할 정도였다. 느린 스톤 골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골렘 기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인 것이다.

얼마나 아꼈으면 베르키스는 이것들을 노스우드 대회전에서도 동원하지 않았다. 아마 드래곤이란 종족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결코 레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해 본 게덴하이드는 불쑥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라.

굳이 신분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영원히 깨어있는 저 아이언 골렘들은 이미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살폈을 테니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여겼는지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가디언 게덴하이드. 신분 확인이 끝났으니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기둥처럼 서 있던 아이언 골렘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린 아이언 골렘은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쿠르르르

거대한 철문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말 놀랍군.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문이 열리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이언 골렘을 쳐다보며 게덴하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통상적인 스톤 골렘이라면 결코 이런 빠르고 원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물론 강력한 마법석을 집어넣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본체가 배겨날 수 없을 것이다. 돌이란 특성상 제대로 움직이기 전에 몸체가 부서져나가기 십상이었으므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게덴하이드는 철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쳤지만 그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눈부신 햇살보다 어둠이 더 반가웠던 게덴하이드였으므로…….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 늘어진 계단이 눈에 들어오자 게덴하이드는 그리로 향했다.

뚜벅뚜벅.

발자국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통로의 길이가 생각보다 짧았던 것이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에 도착하자 게덴하이드는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미 가디언의 보고로 자신이 온 것이 전달되었을 터. 그 상태로 베르키스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반응은 오래지 않아 들려왔다. 물론 벽 너머로부터였다.

게덴하이드인가?

그렇습니다. 베르키스님.

무릎을 꿇은 상태로 게덴하이드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는 베르키스를 향한 경외심이 역력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얼마만큼 베르키스에게 복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리치가 몇 상했더군. 나에게 느껴졌을 정도니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엎드린 게덴하이드의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예상대로 베르키스가 잠에서 깨었다는 사실에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 힘을 가졌다면 분명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놈들이었겠군. 자세한 상황을 얘기하라. 게덴하이드.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직각으로 꺾은 게덴하이드는 곧 침입자들의 내습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약 열 명 남짓으로 구성된 파티의 잠입에서부터 뒤이어 공격해 들어온 무리까지, 침입을 막아낸 과정을 세세히 보고한 게덴하이드는 짐작까지 덧붙였다.

아마도 놈들은 처음에 들어온 파티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놈들을 쫓고 있었던지, 아니면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말이지요.

가디언이 열 다섯이나 상한 것을 보면 놈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나 보군.

그, 그렇습니다. 대부분 소드 마스터들이었고 그 중에 열 놈은 특히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여러 모로 보아 최상급에 랭크되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요. 물론 놈들 중 넷은 제 손에 죽었습니다.

당연한 말로 게덴하이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팔라딘이라는 칭호로 불려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베르키스는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아르카디아 놈들의 힘이 500년 전보다 비약적으로 강해졌다는 말이 되는군.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500년의 세월동안 오크들도 비약적인 성장을 했으니 결코 인간들에게 밀리진 않을 터. 베르키스 님을 비롯한 드래곤들이 가세한다면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게덴하이드의 호언장담에도 베르키스는 마뜩찮은 반응을 보였다. 인간들의 저력이 어떠한지 베르키스만큼 절실히 알고 있는 존재도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르키스가 입을 열었다.

수면기가 끝날 때까지 정확히 10년 남았다. 그러니 너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나의 레어를 철통같이 경비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트레져 헌터 놈들이 또다시 몰려올지도 모르니 이번에 들어온 보물 몇 가지를 지크레이트의 보고로 가져가 보관하도록 하라. 중요한 일이니 네가 직접 행해야 한다.

어김없이 거행하겠습니다.

게덴하이드의 태도에 만족한 듯 석벽 너머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게덴하이드는 지체 없이 출구로 향했다.

되었어.

바닥에 땅을 대고 있던 데이몬은 손바닥을 쳤다. 베르키스와 게덴하이드와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노심초사한지 한시간여 만에 목적을 이룬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마친 그는 지체 없이 끌어 모은 마나를 흩어버렸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터라 더 이상 지체할 여지가 없었다. 데이몬의 동공에는 희열의 눈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예상대로 놈들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어.

사실 베르키스와 게덴하이드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그의 능력으로도 벅차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베르키스 앞에서 패밀리어나 도청마법 따위를 사용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이언 골렘의 눈을 피해 잠입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 오랜 시간동안 이 사실 때문에 고민해야 했다.

심지어 땅의 정령인 노움을 이용한다고 해도 베르키스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해법은 의외로 술법에서 드러났다. 이름하여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 먼 곳에서 적의 규모와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 익혔던 중원의 술법이 그의 목적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천리지청술은 중원에서는 그리 널리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대화는 대부분 전음을 통해서 하는 무림인의 속성상 도청에 사용되기에는 기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땅의 울림을 통해 음성을 도청하기 때문에 내력이 무척 깊은 자가 아니면 대화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천리지청술의 감도를 높이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고 마침내 예상했던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일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아마 내일 정도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사실 그는 지크레이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파악조차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일 정도면 그를 친절히 지크레이트의 레어로 안내해 줄 존재가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를 상대할 방도에 대해서는 이미 궁리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성공한다면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지크레이트의 손에 명을 달리하게 될 테니까…….

어차피 인생사 모든 것이 도박이지.

데이몬의 몸은 곧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게덴하이드는 아침 일찍 레어를 나섰다. 베르키스의 명령대로 새로 들어온 보물들을 지크레이트가 관리하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로 옮기려는 것이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인간이 멸망한지 벌써 오백여 년. 하지만 대륙 각지에서는 심심찮게 보석이나 마법 무구들이 출토되고 있었다. 왕이나 군주의 무덤이 오크족에 의해 파헤쳐지며 생겨난 이른바 약탈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것들은 오크들에 의해 고스란히 드래곤에게 바쳐졌다. 때문에 베르키스의 레어에는 이따금 그런 보물들이 짐수레에 실려 오곤 했다. 물론 짐수레를 호위해 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오크 보병들이었다.

보물들은 일정기간동안은 베르키스의 보고에 보관된다. 그러다가 이따금 귀중한 것만 추려져서 게덴하이드에 의해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로 옮겨지는 것이다. 물론 베르키스가 눈을 뜨고 있을 때라면 그의 보고를 털 만한 존재는 감히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깊은 수면기에 빠져있었고 레어를 지키는 리치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키스로써는 도난을 완벽히 방지할 수 있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모든 드래곤들의 공유물이라 봐야 했다. 비록 지금은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가 보유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관리인에 불과했다. 그 속의 보물들은 오랜 세월동안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것들이었고 한데 섞여 보관된다.

베르키스의 보물 역시 인크레시아의 한켠에 단단히 보관되어 있었다. 게덴하이드가 보물을 가져다준다면 지크레이트는 약속된 방법대로 인크레시아를 열어 보물을 집어넣는다. 인크레시아는 자신이 인정한 주인인 지크레이트가 아니면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것은 이미 게덴하이드가 여러 번 해 왔던 일이었고 비밀 엄수를 위해 그는 단 하나의 리치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레어에서 조금 떨어진 뒤 공간이동을 해야겠군.

나직이 중얼거린 게덴하이드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깨에다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짊어지고 손에 한 자루의 보검을 든 지금의 모습은 전혀 리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리치가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보검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검의 이름은 르헤르트 세이버. 주인에게 용기와 투지를 심어주는 영구 마법이 걸려있는 검으로 심지어 영혼조차 벨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명품(名品) 중의 명품이었다.

이 검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카롯트를 상징하는 로젠가르트 황가의 검이라는 데서 드러난다. 이 검이 없다면 진정한 이카롯트의 황제라고 단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비운의 검 르헤르트 세이버는 한동안 주인을 잃고 황야에 내버려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베르키스의 레어로 오게 되었다. 과거 이카롯트가 패망할 당시 황제 로젠가르트 4세는 이 검을 어린 태자에게 주어 다수의 기사들과 함께 궁정을 빠져나가게 했다. 어떻게 해서든 혈통을 이어나가게 하려는 시도였지만 불행히도 태자 일행은 펠드리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르헤르트 세이버는 땅속 깊이 묻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태자가 죽고 난 뒤 검을 넘겨주지 않을 심산으로 동행한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해서 검을 바닥에 깊숙이 묻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로 르헤르트 세이버는 거의 500년 가까이 땅 속에 묻혀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한 오크 헌터의 눈에 띄기 전까지 말이다.

당시 오크 족장들은 보물이 발견되면 죄다 드래곤의 수중에 바치고 있었다.

오크들에겐 이런 보물보다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는 고기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르헤르트 세이버는 이곳 베르키스의 레어로 오게 되었고 급기야 마법 보고 인크레시아에 보관되기 위해 옮겨지는 신세가 되었으니……. 오백 년 동안 묻혀있었지만 르헤르트 세이버의 칼날은 조금도 부식되지 않았다. 심지어 예기조차 사라지지 않았던 터라 당시 이 검을 인수했던 게덴하이드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좋은 검이로군.

그는 이 검을 특별히 베르키스의 제 1 보고에 집어넣었다. 금과 은 따위의 흔한 보화가 아니라 정말로 보물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이 보관되는 장소로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지금 모조리 자루에 담긴 채 게덴하이드의 등에 메어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귀한 것들을 가지고 있던 까닭에 게덴하이드는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이것이 그가 레어에서 멀리 떨어진 뒤 공간이동을 하려는 이유였다.

조금 뒤 적합한 장소를 찾은 게덴하이드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으로 판단되자 그는 지체 없이 마법진을 그렸다.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서 갑자기 하얀 가루가 휘날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뼛가루로써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가지고 온 것이었다. 먼지보다 월등히 가벼운 뼛가루는 공간이동이 끝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없어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캐스팅만으로도 충분히 공간이동을 할 수 있었지만 게덴하이드는 위험부담을 덜기 위해 마법진을 그리려는 것이다.

쓰쓰쓰쓰.

자욱하게 뿌려진 뼛가루들이 곳 일정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게덴하이드의 마법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뼛가루들은 용케 마법진의 형태를 유지했다. 작업을 마친 뒤 게덴하이드는 냉큼 마법진 위에 올라서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스산한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마법진의 좌표를 보니 지크레이트의 레어가 남쪽 엘마리노 산맥에 있는 것 같군.

맞나?

뭐, 뭐야?

대경한 게덴하이드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9써클의 엑스퍼트인 그의 이목을 속이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뒤에 멀뚱멀뚱 서 있는 그림자를 보자 그의 동공에 놀라움이 서렸다. 접근한 자는 그가 익히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휘하의 가디언인 자였다.

네, 네놈은 데이몬?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게덴하이드는 빠른 시간 내에 평정을 회복했다. 상황을 봐서 놈은 자신의 뒤를 밟아 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미 레어의 리치들에겐 레어를 벗어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았던 터, 그것을 무시하고 이리로 왔다면 불경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할 터였다.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으며 게덴하이드는 살광을 피워 올렸다.

오래 전부터 의심을 해 왔었는데 이제 증명이 되었군.

상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게덴하이드를 쏘아보고 있었다.

베르키스님의 실력을 차마 의심할 수 없어서 가만히 두고 봐 왔는데 이제야 분명해졌어.

뭐가 말인가?

네놈의 목적. 어떤 이유로 베르키스님의 마법을 풀었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세뇌마법에서 풀려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렇다면 네놈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

날 처치하겠다는 뜻인가?

물론. 일단 네놈의 본체를 소멸시켜놓고 베르키스님께 소명하겠다. 나중에 그 분께서 친히 심문하실 수 있게 말이다.

말을 마친 게덴하이드는 메고 있던 자루를 풀어놓았다. 물론 르헤르트 세이버 역시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양쪽으로 활짝 펼친 손에서 급격히 광휘가 떠올랐다.

슈르르르.

그가 장기로 삼고 있는 공격 마법 호리드 윌팅이었다. 이것은 이미 소드 마스터 여러 명을 저승으로 보냈던 공포의 마법이라 볼 수 있었다. 마법을 완전히 캐스터 해 놓은 게덴하이드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동공에서는 무척 기다렸다는 듯한 빛이 일렁였다.

오백 년 전에 당한 수모를 이제야 갚을 수 있겠군. 이곳까지 따라온 것을 보면 증거가 충분하니까 말이야.

얼마든지.

느긋한 상대의 태도를 보다 못한 게덴하이드는 손을 휙 털었다. 양손에 맺힌 호리드 윌팅이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상대의 몸을 향해 쏘아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게덴하이드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려있었다.

9써클의 호리드 윌팅. 이 정도라면 네놈의 몸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이후 남은 네 영혼은 내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짓이겨…….

말을 이어나가던 게덴하이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상대가 살짝 몸을 움직여 호리드 윌팅을 퉁겨내는 것을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파파파팍.

빗나간 호리드 윌팅은 애꿎은 나무들만 우수수 쓰러뜨리며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그 과정에서 상대의 몸을 축으로 전혀 다른 4종류의 마법이 캐스팅되었음을 용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마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자신의 호리드 윌팅을 허공으로 퉁겨버린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결코 자신의 아래라고 할 수 없었기에 게덴하이드는 입을 딱 벌렸다.

어, 어떻게……. 네놈은 고작 6써클에 불과할 터인데.

네놈이 알고 있는 써클이 아니라서 어떻게 하지? 무척 미안하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청색 화염줄기가 퍼부어졌다.

콰콰콰콰.

게덴하이드는 놀랄 겨를도 없이 공간전이(Blank)를 시전해서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가해진 공격이 대인 공격 최강의 공격 마법 헬 파이어임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9써클 급의 헬 파이어라면 그가 장기로 삼고 있는 호리드 윌팅보다 족히 두 배의 파괴력을 가진다. 거기에 정통으로 격중된다면 그도 역시 소멸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조금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덴하이드는 치를 떨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상대를 6써클 정도의 중급 리치로 알고 있던 게덴하이드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헬 파이어라면 그도 아직까지 완전히 캐스터하지 못하는 마법이었다.

9써클의 마스터가 아니면 감히 익히지 못하는 궁극의 마법. 휘하 리치의 마법실력이 벌써 자신을 추월했고, 또한 그 낌새를 지금껏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게덴하이드는 도저히 정신을 추스를 수 없었다. 게다가 공포의 마법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니…….

콰콰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굳건히 딛고 서 있던 지표면이 사정없이 파헤쳐지며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패였다. 돌과 흙이 그대로 증발되어 버리는 것을 보니 상대의 공격이 진정한 헬 파이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퉁겨져 나가던 돌과 흙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상대가 이미 모종의 결계로써 이곳을 완전히 감싸 놓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장기인 블링크로써 또다시 위기를 모면한 게덴하이드는 사력을 다해 호리드 윌팅을 날렸다.

에잇.

상대가 정녕 9써클의 마스터라면 오로지 같은 써클의 호리드 윌팅 말고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가슴으로 맞받았다. 이미 푸른빛의 광막이 그의 몸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상황이었다.

퍼펑.

자신의 공격이 광막에 막혀 헛되이 스러지는 것을 목격한 게덴하이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네놈이 9써클의 마스터란 것을 사실로 인정해야겠군. 도대체 어떻게 마법을 익혔나?

이런 상황에서 천연덕스럽게 그거나 묻고 있을 형편이 아닌 것 같은데…….

또다시 엄청난 기운이 자신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을 느낀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블링크를 펼쳤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상대를 피해 도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난 저놈의 상대가 아냐.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베르키스 님의 레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놈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라이프 포스 베슬은 엄연히 베르키스님이 가지고 있다. 베르키스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놈은 분명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은 길었지만 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일단 이곳에서 몸을 뺀 뒤 휘하의 리치들을 동원해서 놈의 발목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게덴하이드였다.

그 틈을 타서 지하로 들어간다면 골렘들로 이루어진 가디언들이 2차로 놈의 난입을 저지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은 어렵지 않게 베르키스를 잠에서 깨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 싶었다. 물론 휘하 리치들 대부분이 엄청난 타격을 받겠지만 그들은 애당초 복원이 가능한 존재들이었다. 아니 이것은 그들을 모조리 잃더라도 반드시 해 내야 하는 일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드러내던 게덴하이드는 반사적으로 공간이동을 캐스트하려고 했다. 이미 레어의 좌표는 그의 뇌리에 명확히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는 결코 캐스트를 마칠 수 없었다.

엇.

순간적으로 아랫배를 파고드는 둔중한 충격 때문에 게덴하이드의 몸이 기역(ㄱ)자로 꺾였다.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리치라고 하나 워낙 강력한 충격이었던지라 끌어 모은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일격은 시초에 불과했으니…….

오백 년 전에도 이런 경험을 겪은 적이 있지?

냉랭한 음성과 함께 무언가가 쉴새없이 그의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매직 미사일이었다. 초급 마법인 매직 미사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위력에다 그조차 감지할 수 없는 빠른 속도. 그것들은 게덴하이드가 전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특히 관절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이다.

퍼퍼퍼퍼퍼퍽.

불쌍하게도 게덴하이드는 쉴새없이 전신을 난타하는 매직 미사일로 인해 전혀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끝없이 날아드는 매직 미사일로 인해 간헐적으로 경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 캐스팅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이었으리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게덴하이드의 주변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네놈이 회피범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 내 모습을 보자마자 도망치지 않은 이상 네놈에게 기회는 없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림에 따라 게덴하이드가 얻어터지고 있는 주변의 땅이 길게 파헤쳐졌다. 게덴하이드가 그리려던 마법진과는 달리 효과가 무척 오래 가는 마법진이었다. 게덴하이드를 난타하고 있는 매직 미사일들에게 마나를 계속 공급하여 그 효과가 지속되게 하는 마법진인 것이다.

잠깐 사이에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은 그곳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9써클의 마스터답게 순식간에 모여든 마나가 마법진에 가득 채워졌다. 작업을 마친 데이몬은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의 게덴하이드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베르키스란 놈이 눈치를 챌 것이 분명하기에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미안하지만 그 모습으로 한 나절만 버티거라. 그 정도면 내가 목적을 이룰 것도 같으니…….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데이몬의 말을 들을 경황도 없는 것이 정확한 상태였다. 마법진에 갇힌 채 연속적으로 매직 미사일의 공격을 받는 게덴하이드. 아마 마법진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 그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법진 주위에 결계를 하나 설치해서 흔적을 감춰버린 데이몬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래도 속이 조금 시원하긴 하군.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비약적인 발전이라 해야 했다. 과거에는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던 게덴하이드를 순수한 마법 실력으로 저 지경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하지만 이것을 이루기 위해 그가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합당하다고 생각해야 했다. 비록 이 실력으로도 드래곤과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손에 넣은 후라면 이야기가 틀려질 것이다.

나직이 되뇌인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게덴하이드가 떨어뜨린 자루와 르헤르트 세이버를 집어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데이몬은 마법진 위에 섰다. 게덴하이드가 설치해놓은 공간이동 마법진 말이다. 마법진을 구성하던 뼛가루들이 모두 흩어져 있었지만 좌표는 데이몬의 뇌리에 명확히 기억되어 있었다. 그가 손을 들자 흩어졌던 뼛가루들이 모여들더니 다시 마법진의 형태를 이루었다.

자 그럼 드래곤들의 보물을 어디 한 번 견식하러 가볼까?

섬광이 번쩍 일어나며 그의 몸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마법진을 이루고 있던 뼛가루들도 동시에 흩어져버렸고 그 자리에는 끊임없이 몸을 들썩거리는 게덴하이드만 남게 되었다. 물론 결계로 인해 아무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데이몬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멀리 떨어진 트루베니아 최남단이었다. 그곳의 엘마리노 산맥이 바로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의 레어가 위치한 곳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데이몬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은?'

그가 워프해 간 곳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서너 마리의 트윈헤드 오우거가 방망이를 치켜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마도 지크레이트의 레어를 경비하는 가디언인 듯 싶었다. 또한 사방에 서 있는 석상들은 아마도 스톤 골렘이 분명할 터였다. 곧 한 마리의 고블린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끽끽거리는 고블린 특유의 음성이 좍 찢어진 입에서 터져 나왔다.

펠루시아 산맥에서 오신 분입니까?

베르키스의 레어가 펠루시아 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런데 당신은 늘 오시던 분이 아닌데…….

데이몬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털어놓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정이 없는 리치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얼마 전 트레져 헌터들의 공격이 있었다. 놈들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게덴하이드는 그만 큰 부상을 입고 치료 중에 있다. 따라서 이번 임무는 내가 맡게 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고블린은 별달리 의심하는 기색 없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던 터라 데이몬은 즉각 뒤를 따랐다. 사실 이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서라도 지크레이트에게 가야 하는 것이 데이몬의 입장이었다. 만약 게덴하이드가 마법진에서 풀려난다면 그의 염원은 그 즉시 물거품처럼 흩어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지크레이트의 레어는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베르키스의 레어에 비하면 말이다. 아마도 레어의 주인이 깨어있다는 점과 그를 죽이더라도 보물을 탈취할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한 듯 싶었다. 고블린의 안내를 받으며 데이몬은 레어의 경비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일단 가디언은 오우거와 트롤을 주축으로 이루어져있군. 스톤 골렘도 심심치않게 보이고 말이야.'

목적을 이룰 경우 빠른 시간 내에 이곳을 뚫고 나가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방어진이 갖춰진 형태를 특히 주의해 보았다. 물론 오우거 따위의 중형 몬스터는 그에게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3써클의 초급 마법사이던 시절에도 중형 몬스터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물며 9써클의 대마법사가 된 지금이라면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군데군데 배치된 스톤 골렘이었다. 골렘에 혈도가 있을 리는 만무했고 또한 상당한 마법 저항력을 가진 터라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스톤 골렘을 쓰러뜨리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빠져나올 땐 헤이스트로 강행 돌파해야 할 것 같군. 문제는 지크레이트가 나에게 속아넘어가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데…….'

물론 그는 지금까지 게덴하이드의 눈만은 완벽하게 속여넘겼다. 당하는 순간까지 게덴하이드는 자신의 마법수준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크레이트까지 속으란 법은 없었다. 그는 웜 급에 도달한 다 자란 드래곤이었고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10써클의 마스터라고 봐야 했다.

'속인다는 것이 아마도 불가능하겠군.'

생각이 정해지자 그는 암암리에 끌어올리고 있던 은폐 마법을 풀어버렸다. 기척을 일정수준 숨기는 이 마법으로 지금껏 자신을 감싸 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을 감추는 것은 오히려 지크레이트에게 의심을 사는 격이 된다.

때문에 데이몬은 모처럼 자신의 본 모습으로 레어의 초입에 들어섰다. 지나가던 가디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데이몬의 모습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당당하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이를 데 없는 베르키스의 사자였다. 지금까지 이곳을 방문한 게덴하이드 역시 무척 거만하게 행동하며 이곳을 들어섰던 것이다.

이제부터 드래곤을 만난다 생각하니 긴장이 아니 될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암암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리치가 된 이후 그럴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가슴을 조이며 지크레이트의 처소로 안내를 따라 걸어갔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이 보물을 가지고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늘 오던 자가 아니고 오늘은 다른 자가 왔습니다. 기이하게도 수준이 게덴하이드보다 높아 보이는, 9써클의 마스터로 짐작되는 자였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게덴하이드보다 마법수준이 높다고? 이상하군. 수면 중인 베르키스님께서 가디언 우두머리를 바꿨을 리는 없을 텐데……. 좋아 만나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문간에서 잠시 기다리던 데이몬은 곧 지크레이트의 처소로 안내되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톤골렘으로 짐작되는 석상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회랑을 지나자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마도 전부가 황금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화려한 문이었다. 드래곤들이 정말 황금을 좋아한다고 투덜대던 데이몬은 문이 열리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베르키스의 레어도 황금으로 전신에 도배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내부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생각보다 좁은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엄청나게 넓다고 볼 수 있었지만 무언가 거대한 것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이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고 곧 우렁거리는 음성이 머리 속으로 전달되었다.

―네가 베르키스님의 레어에서 보물을 가지고 온 자이냐?

실내를 가득 채운 거대한 초록색 덩어리를 쳐다보고 있던 데이몬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초록색 덩어리의 상단 부분에서 어둠을 뚫고 두 줄기의 강렬한 빛이 그를 향해 퍼부어졌다. 그것이 그린 드래곤이란 사실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이여. 저는 이번에 들어온 보검과 보화들을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에 보관하라는 베르키스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저번에 왔던 자는 어디에 가고 네가 왔느냐?

고개를 조아린 상태로 데이몬은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마법진에 갇혀 끝없이 매직미사일에 난타당하고 있는 게덴하이드가 듣는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 제법 규모가 큰 인간들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게덴하이드는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어 현재 치료 중에 있습니다. 그 외에도 리치로 구성된 가디언 열 다섯이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무척 큰 접전이었습니다.

―놀랍군. 인간들에게 아직까지 그런 힘이 남아있다니…….

아르카디아에서 건너 온 트레져 헌터들이었습니다.

지크레이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미 그는 베르키스의 레어를 전원 리치로 구성된 가디언들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만들 엄두를 내기 힘든 강력한 리치 가디언들. 눈앞의 사자 역시 의심할 여지없는 리치였다. 10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지크레이트의 눈은 데이몬의 성취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9써클의 마스터라, 놀랍구나 게덴하이드보다 강력한 리치가 있을 줄은…….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사소한 말꼬투리 하나가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으므로 그는 잠자코 침묵을 지키며 지크레이트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는 암암리에 처소 내부의 경비상황에 대해 살폈다. 골렘으로 보이는 석상 열기 남짓을 제외하면 지크레이트가 전부였다.

'하긴. 드래곤은 그 자체로도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생명체이니…….'

지금의 상황에서 지크레이트를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9써클의 마스터라도 드래곤에게 정면 대결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조금 뒤 드래곤의 입이 떨어졌다.

―그럼 보화를 꺼내보아라.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짊어지고 있던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에 쥐고 있던 보검 르헤르트 세이버까지 말이다. 르헤르트 세이버를 지켜보던 지크레이트는 탄성을 내질렀다.

―근래에 보기 힘든 뛰어난 보검이로군. 이카롯트의 로젠가르트 황가를 상징한다는 검인가?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지크레이트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퍼부었다. 상황을 보아 약간의 의심이 남아있는 듯 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베르키스의 가디언인 데이몬에게 대답하기 힘든 종류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는 데이몬의 모습에 지크레이트는 가지고 있던 의심을 모두 지워버렸다.

좋다. 보화들은 내가 알아서 마법보고에 보관할 테니 넌 이만 가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몸을 돌려서 나갈 듯 몸을 일으키던 데이몬이 돌연 지크레이트를 돌아보았다. 지크레이트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사실 베르키스 휘하의 리치와 그와는 결코 볼 일이 없었으므로 경계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마나를 슬며시 끌어올린 상태로 지크레이트는 리치의 눈을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만.

청?

지크레이트의 커다란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청이라니……. 베르키스의 가디언 사자가 자신에게 할 청이 있었던가? 그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청인지 말해보아라

다시 몸을 돌린 데이몬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용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단히 실례되는 일인 줄 알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니 하해 같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사실 약 100년쯤 전에 전 우연히 이계의 술법이 적인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계의 술법?

그렇습니다. 이계에서 차원이동으로 건너온 존재가 남긴 술법이온데 머리가 나쁜 탓인지 무려 100여년을 연구에 몰두했어도 그 뜻을 하나도 풀지 못했습니다. 비록 리치의 몸일지라도 저 역시 마법을 추구하는 마법사입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술법의 비밀을 풀고자 이렇게 무례한 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던 지크레이트의 눈에 호기심이 번뜩였다. 그 역시 10써클의 대 마법사였으므로 이계 술법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무슨 종류의 술법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100년 동안 연구해서 간신히 번역만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마나를 모종의 기운으로 변환시켜 활성화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을 마친 데이몬은 볼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레이트의 눈에는 점점 호기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야 말았다.

어떤 술법인지 한 번 꺼내어보아라.

알겠습니다. 사실 제 주인이신 베르키스님께 여쭈어보아야 합당한 도리이겠지만 그 분께서는 지금 수면을 취하고 계신지라.

말을 마친 데이몬은 한쪽 손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성질 더러운 베르키스라면 아무리 이계의 술법이라도 잠을 깨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던 지크레이트는 극도의 호기심을 떠올리며 리치를 주시했다.

조금 뒤 리치의 손에 한 장의 종이가 딸려 나왔다. 언뜻 보아도 수기로 작성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공손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명을 기다렸다.

이것이옵니다.

그런가?

지크레이트는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종이는 마치 날개가 달린 듯 떠오르더니 지크레이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종이를 들여다보는 지크레이트의 눈망울엔 극도의 기대가 서려있었다.

흠. 이것이 바로 이계의 술법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지크레이트는 뚫어지게 종이를 쳐다보았다.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공식들이었다. 마법 공식과 어느 정도 비슷하긴 하지만 전개과정이나 응용법 면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도 지크레이트는 그것을 푸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놀랍군. 이런 술법이 있었다니……. 언뜻 봐서는 정신에 작용하는 종류 같은데 도저히 원리를 파악할 수 없군. 마법과는 사뭇 다르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술법 같아.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제 굳은 머리로는 앞으로 천년을 연구하더라도 해독하기가 힘들 듯 싶어서…….

그럴 만도 하다 싶어서 지크레이트는 종이에 적힌 공식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하지만 드래곤인 그라도 오의를 쉽사리 파악하긴 힘들었다. 그 사실에 지크레이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10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자신이 해독하지 못하는 마법 공식이 있다니……. 오기가 치민 지크레이트는 종이를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공식을 직접 시전해 보아야 할 것 같군.

말을 마친 그의 주위로 마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해독하지 못하는 사실에 부아가 치민 지크레이트가 적힌 공식대로 직접 시연을 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지!'

그것을 느낀 데이몬의 얼굴에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지크레이트는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종이에 적힌 공식은 데이몬이 백년 동안의 고심 끝에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귀령제혼술이라는 섭혼술의 변형 버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으로는 드래곤을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데이몬이 선택한 방법으로 종이에 적힌 내용의 대부분이 배교의 최고위급 사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원래는 이것으로 베르키스를 상대할 작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지크레이트에게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귀령제혼술(鬼靈制魂術). 이것은 배교의 독문 절기로써 오랜 시간동안 백도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섭혼술이었다. 인간의 혼백을 직접 조종하여 시술자의 명에 절대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술법으로써 여기에 걸린 자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이 술법의 가장 무서운 점은 상대가 내공이 하늘에 닿은 초절정고수라도 걸려들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술법은 상대의 내공을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내공이 높은 자는 사술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는다. 하지만 귀령제혼술은 일정수준까지만 술법이 전개되면 그 이후부터는 상대의 내공을 빨아들여 저절로 금제를 완성시킨다. 당하는 자가 저항하기 위해 내력을 쏟아 부을수록 심혼을 제압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귀령제혼술에 당한 자는 일정 시간동안 시술자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다하게 된다. 심지어 명령이 떨어진다면 자신의 혈육에게조차 서슴없이 살수를 펼치게 되고 심중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남김없이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말 그대로 가공할 만한 술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창이 있다면 의당 방패가 존재하듯 중원에도 귀령제혼술에 저항하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배교와 상대하는 문파들(주로 명문정파들이다)도 처음에는 이 귀령제혼술에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 술법을 파훼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그 덕에 귀령제혼술도 오래지않아 무적이라는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귀령제혼술에 제압되지 않는 고수들이 속속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술법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그 이후론 그리 널리 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로잡은 적의 수뇌부의 입을 열기 위해 귀령제혼술보다 효과가 있는 술법이 없었기에 간간이 사용되곤 했다. 데이몬도 포로의 심문을 위해 귀령제혼술을 여러 번 시전한 적이 있었다. 그런 유래를 가진 배교의 술법이 이번에는 마법으로 형태를 바꿔 트루베니아에서 전개되려 하는 것이다.

'귀령제혼술은 세뇌마법과는 판이하게 형태가 다른 술법이다. 경험해 본적이 없는 이상 설사 드래곤이라 할 지라도 걸려들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데이몬은 긴장한 채 종이의 공식을 읽어나가는 지크레이트를 주시했다. 한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크레이트의 신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령제혼술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술법이었고 또한 마법으로 변환한 때문에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 데이몬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걸려들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데이몬은 숨을 죽인 채 반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간의 마나를 동원해서 공식대로 시행해 본 지크레이트의 얼굴에 실망기가 스쳤다.

시험삼아 마나를 조금 밀어 넣었지만 정작 마법이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나가 모자라서 그런가?

공식의 내용은 흥미를 돋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우선 끌어 모은 마나를 다른 형태의 기운으로 변환시켜 구현하는 형식이었고 방식 역시 재배열되는 형태가 아니었다. 타고난 마법사라고 볼 수 있는 드래곤에겐 정말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배열이 아니라 거의 합성된다고 봐야겠군.

살짝 캐스터해 본 결과 지크레이트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종이에 적힌 공식에는 리치가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언어와 기초적인 접근 방법은 마법의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술법의 중요한 줄기 부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법이 실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못 참겠군.

지크레이트는 용언마법(龍言魔法)으로 술법을 시행하고픈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크레이트의 시선이 꿇어 엎드려 있는 리치의 등허리에 가서 멎었다.

'혹시나 놈이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는 길게 의심하지 않았다. 우선 이것이 어떤 종류의 술법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드래곤인 자신에게 위험할 것 같지가 않았다. 또한 상대는 이미 베르키스에게 심령이 제압 당한 리치. 따라서 드래곤에게 해가 될 짓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지크레이트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아. 이까짓 것이 나를 해할 수는 없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지크레이트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았다. 무시무시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그를 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드래곤의 용언마법이 힘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되었어.'

데이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기색을 지웠다.

지금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복수를 꾀하고 그와 더불어 다프네를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오로지 이것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지크레이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10써클의 마스터라 그런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지크레이트가 끌어 모은 마나의 양은 정말 방대한 수준이었다. 그의 거대한 초록빛 동체는 마나를 한껏 머금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지크레이트는 이계 술법을 캐스터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곧이어 실현될 결과에 대한 기대로 빛나고 있었다.

콰콰콰콰.

마침내 이계 술법이 실현되었다. 짙은 회색의, 왠지 모르게 사이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 자욱하게 피어나서 지크레이트의 몸을 감싸 버렸다.

크하하하. 성공이다.

지크레이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곧이어 이루어질 마법의 결과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계의 술법마저 극복했다는 자부심이 얼굴에서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피어오른 운무가 머리 쪽으로만 집중되자 지크레이트의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운무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회색 빛의 운무는 이미 그의 머리를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놀랄 만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피어오른 운무들이 그의 머리통으로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코와 귀, 입을 통해서 말이다.

깜짝 놀란 지크레이트는 얼른 캐스팅을 멈췄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것을 직감한 것이다. 캐스팅이 멈춤에 따라 끌어 모아 놓은 마나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크레이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버렸다.

이, 이것은?

놀랍게도 캐스팅은 멈춰지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던가 싶더니 운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지크레이트가 모아놓은 마나를 고스란히 말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얼른 코와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한 술법을 자신에게 가져다 준 리치에게 영문을 물어보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서 지크레이트는 또다시 놀라야 했다. 꿇어 엎드려 있던 리치가 어느새 일어나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대의 눈빛에서는 적의가 줄기줄기 묻어나고 있었다. 기가 찬 지크레이트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네, 네놈이?

대법은 발동되었다. 이미 필요조건을 모두 충족했으니 너는 결코 귀령제혼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즉시 몸을 날렸다. 목표는 우두커니 서 있는 석상들이었다.

그것들의 정체는 스톤 골렘이 분명할 터였고 지크레이트의 명이 떨어진다면 즉시 공격을 가해올 것이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 모습에서 지크레이트는 상대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분노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놈.

공격을 퍼붓기 위해 상체를 쳐들려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때서야 이계 술법의 존재가 떠오른 지크레이트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일단 이 술법부터 해결해야 해.

스톤 골렘들에게 리치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지크레이트는 서둘러 마나를 재배치했다.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 오는 이계 술법을 파훼하기 위해 디스펠을 캐스팅하려는 것이다.

콰쾅.

우두커니 서 있던 스톤 골렘 두 기가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리 강한 몸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지옥의 화염이라는 헬 파이어에는 배겨내지 못했다.

그 상태 그대로 데이몬은 문가의 커다란 스톤 골렘에게 짓쳐 들었다. 문을 여는 것이 놈의 역할이란 것쯤은 이곳으로 들어오며 미리 파악해놓은 사실이었다. 지원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놈을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했다.

에잇.

그의 양손에서 길쭉한 섬광의 기둥이 생겨났다. 한 손에 세 개씩 도합 여섯 개였다.

이름하여 에너지 볼트(energy bolt). 물리적 데미지와 화학적 피해를 동시에 입힐 수 있는 상당히 수준 높은 마법이었다. 또한 스톤 골렘의 몸에 화염이나 전격계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 결정이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크기로 생겨난 에너지 볼트는 막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스톤 골렘을 향해 화살처럼 내려 꽂혔다.

콰지직.

골렘의 가슴팍과 어깨, 옆구리가 동시에 터져 나갔다. 하나같이 마법석이 들어 있음직한 부분이었다. 속에 들어있는 마법석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부위였지만 9써클의 대마법사가 시전하는 에너지 볼트에는 배겨나지 못했다.

하지만 골렘은 쓰러지지 않았다. 흉측하게 깨어져나간 옆구리 부분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골렘은 사납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용케 적중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마법석이 무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해진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 에너지 볼트와 거의 동시에 퍼져나간 무수한 매직 미사일이 이미 스톤 골렘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상태였다. 가히 매직 미사일의 신이라고 불려도 될 듯한 신위.

데이몬의 통제를 받은 매직 미사일 몇 발이 목표했던 골렘의 마법석을 어김없이 파고들었다.

퍼퍼퍽.

휑하니 드러나 있던 마법석은 결국 산산이 깨어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물론 스톤 골렘과 함께 말이다. 빙글 몸을 돌린 데이몬의 손에서 또다시 청색 화염이 솟구쳤다.

콰콰쾅.

두 번째 헬 파이어가 작렬했고 다가오던 스톤 골렘 두 기가 산산이 바스라진 채 나뒹굴었다. 데이몬이 아무리 9써클의 대마법사라도 헬 파이어는 결코 연사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매직 미사일로 놈들을 견제하여 시간을 벌고, 그 틈을 타서 끌어 모은 마나를 이용한 헬 파이어로 스톤 골렘들을 하나하나 착실히 파괴시켜 나갔다. 헤이스트까지 펼친 상태였기 때문에 스톤 골렘들은 그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다.

지크레이트의 가디언들은 정말 허무하게 괴멸되고 있었다. 줄기차게 쓰러지는 모습에서 무기력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스톤 골렘이라면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상대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싸워본 노련한 전사였고 효과적으로 싸우는 방법이 아예 몸에 배어있었다.

쿠르르르.

마지막 골렘 한 기의 몸체가 부서지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다행히 이곳으로 들어오는 문은 굳건히 닫힌 그대로였다. 소동을 들었는지 밖에서 연신 두드려대고는 있었지만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의 특성상 어느 정도는 마음놓을 수 있을 듯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데이몬은 지크레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크레이트의 모습을 보자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갔다.

귀령제혼술이 드래곤에게도 통할 줄은 아마도 배교 장로들조차 몰랐을 거야.

불쌍하게도 지크레이트는 잔뜩 웅크린 채 연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귀령제혼술에 반쯤 제압 당한 것이 확실했다. 연신 디스펠을 해 대는 지크레이트였지만 애당초 마법이 아닌 귀령제혼술을 파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이제 마법을 전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뇌리를 파고들려는 회색 운무를 방어하는 것만도 그에겐 벅찬 일이었다.

이, 이런 술법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놈의 계교에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순순히 용언마법을 전개한 자신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술법을 캐스팅하기 전으로 돌아가 놈을 단박에 박살내고 싶은 것이 지크레이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사력을 다해 이계 술법을 막아내고 있는 사이 자신에게 올가미를 걸어놓은 가증스런 존재는 뚜벅뚜벅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스톤 골렘들은 모조리 당한 것 같았다. 그에겐 상대를 제압할 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다.

많이 괴롭나 보군.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지크레이트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데이몬에게 퍼부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계 술법 때문에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얄밉게도 계속해서 비위를 긁고 있었다.

이봐! 대륙 최강의 종족이란 자부심은 어디로 간 거야? 고작 리치 하나에게 당하는 놈들이 대륙 최강이라고 자부할 수 있어?

이, 이 자식.

결국 부아를 참지 못한 지크레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이계 술법이고 뭐고 간에 놈을 당장에 박살내어 버리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고개를 든 순간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공을 파고드는 회색 빛 동공을 볼 수 있었다.

헉.

데이몬은 이미 마나를 모아 사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회백색 안광이 이글거리는 데이몬의 눈을 직시한 지크레이트의 눈동자가 점차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시전한 귀령제심안의 도움에 의해 귀령제혼술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혼백이 마치 송두리째 상대의 눈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하등한 리치에게 맥없이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저항했지만 무리였다. 지크레이트의 의식은 점차 깊은 심연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펑.

크으으.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앙상한 몸뚱이 하나가 바닥에 털썩 나뒹굴었다. 음성의 주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를 걸치고 있는 리치였다.

조금 전까지 그를 구속하고있던 마법진은 이제 힘이 다한 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동그라진 리치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타격으로 몸이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터라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욕설을 퍼부어 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그의 몸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인들 제대로 시전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비록 불노불사의 리치였지만 벌써 다섯 시간 가까이 매직 미사일에 난타 당하고도 멀쩡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겨우겨우 등을 기대고 몸을 세운 게덴하이드는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을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문득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가 떠오르자 그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무, 무서운 놈.

아마도 그자는 끈질기기로 말하면 전 우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해야 할 정도라고 단언할 수 있는 자였다. 500년 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베르키스의 정신 마법까지 체험해야 했던 자. 어떻게 해서 세뇌마법을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고 9써클의 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정말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3써클의 햇병아리였던 자가 말이다.

하지만 게덴하이드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사실을 베르키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무척 급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놈의 의도가 무엇일까? 날 잡아둔 것을 보면 분명 지크레이트님께 간 것 같은데 대관절 무슨 이유로…….

물론 게덴하이드는 데이몬이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더불어 이미 지크레이트를 완벽하게 제압해 놓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머리를 흔든 게덴하이드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놈이 도대체 무얼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목적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베르키스 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

게덴하이드 역시 물론이오 가디언으로 있는 모든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은 베르키스가 직접 가지고 있다. 때문에 세뇌마법이 아니라도 리치들은 감히 베르키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베르키스가 라이프 포스 베슬을 깨뜨려버린다면 대상 리치는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데이몬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게덴하이드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네놈이 아무리 나인 써클의 마스터라도 소멸되는 운명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몸을 움직여본 게덴하이드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위급 리치인 탓에 그의 회복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상태를 점검해보고 나서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머리털이 쭈뼛 솟는 듯한 공포심에 휘감겨야 했다. 상대는 자신을 너무도 정확하게 망가뜨려 놓았던 것이다.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든데다 마법을 사용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몸이 베르키스 님께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망가뜨렸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리치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경우 라이프 포스 베슬에 담긴 생명력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대부분의 리치에게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일전의 예로 수면중인 베르키스가 휘하 리치들이 당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차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미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에 제한적인 탐지마법을 걸어놓고 있었다. 따라서 게덴하이드가 심각한 타격을 받거나 소멸될 경우 베르키스는 즉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수면을 중지하고 레어 바깥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다. 리치 우두머리가 당했다면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말이다.

놈은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

상대의 용의주도함에 게덴하이드는 딱딱하게 질려 버렸다. 그의 뇌리에는 서둘러 놈의 반역을 베르키스에게 고해야 한다는 하는 마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는 생각만큼 원활히 모여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날 정도로 노력한 끝에 그는 마침내 공간이동에 필요한 분량의 마나를 겨우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캐스팅에 들어갔다.

워프.

찬란한 빛무리와 함께 게덴하이드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약 10km 정도 떨어진 베르키스의 레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게덴하이드님.

우두머리인 게덴하이드가 몹시 낭패한 기색으로 마법진에서 나타나자 리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알기로 감히 게덴하이드를 저 지경으로 만들 존재는 여간해서는 없었다. 9써클의 리치를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다. 이름하여 드래곤 말이다. 하지만 게덴하이드에겐 한가롭게 그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켜라.

호통을 쳐서 리치들을 물러나게 한 게덴하이드는 곧장 베르키스의 처소로 향했다.

비틀거리면서도 결사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절박한 심경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지하 깊숙이 위치한 베르키스의 처소는 정말 멀었다.

만약 공간왜곡장이 펼쳐져 있지 않았다면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워프를 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비틀비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발을 놀림에 따라 저 멀리서 브론즈 골렘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나이델하르크는 봉인구에 각인되어 있는 마법진에 의해 제압되어 있다. 만약 마법진이 깨어질 경우 그 즉시 나이델하르크가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흠.

데이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의 입을 통해 궁금했던 사실을 모조리 듣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귀령제혼술에 의해 완전히 제압된 지크레이트.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이 중원의 사술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귀령제혼술의 무서운 점이었다. 심령금제에서 벗어나더라도 그동안 자신이 무얼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붉게 충혈된 눈빛. 거대한 드래곤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혼탁함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 그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질문하겠다.

뭐든지 물어보도록…….

번들거리던 지크레이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다음이었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나에게 보여다오.

알겠다.

대답하는데 있어 지크레이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만큼 귀령제혼술에 깊숙이 제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한 쪽 손을 지긋이 치켜들었다. 손에 광구가 맺히며 눈부신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너무나도 영롱한 빛이었다. 빛이 지속된 시간은 정확히 일각. 이후 빛무리는 맹렬한 빛을 내쏘며 소멸해갔다. 그 바람에 데이몬은 손으로 눈을 가려야 했다.

빛이 사라지자 데이몬과 지크레이트의 앞에는 사방 1.5미터 남짓한 크기의 검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차라리 차원의 문이라고 불러야 할 듯한 왜곡된 공간.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마침내 데이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도저히 인크레시아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이것이 인크레시아인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주문을 외워야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외에는 차원의 틈새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재미있군. 그렇다면 물건을 넣을 때와 꺼낼 때는 어떻게 하지? 직접 들어가서 보관해야 하나?

지크레이트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불가하다. 인크레시아의 안은 대기가 전혀 없는 데다 극한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보관한 물품이 썩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 생명체는 인크레시아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 역시 인크레시아의 안에서는 단 1분도 버틸 수 없으니까 말이다.

말을 마친 지크레이트는 데이몬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생각해 보니 넌 들어가는 게 가능하겠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언데드, 리치이니까 말이다.

빌어먹을. 덩치만 커다란 초록 도마뱀녀석이……

데이몬은 인상을 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쨌거나 언데드 몬스터로 불리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물건을 꺼낼 때는 어떻게 하지?

지크레이트는 손을 들어 머리를 툭툭 쳐 보였다. 데이몬에겐 물론 앞발로 보였지만 말이다.

인크레시아에 물건을 넣고 빼는 것은 모두 마법에 의해 행해진다. 물건이 보관된 위치는 머리 속에 기억되어 있고 모종의 마법 주문과 함께 그 물건을 떠올리면 인크레시아는 어김없이 그것을 꺼내어 준다. 보관할 때도 마찬가지다. 넣을 것을 명령한다면 인크레시아는 속의 방대한 공간으로 물건을 수납한 뒤 안전하게 보관한다.

그리고 좌표는 내 머리 속에 기억되는 것이지.

무척 복잡하군.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만하면 알아낼 것은 거의 알아낸 셈이었다.

설마 드래곤을 심문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데이몬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 갑자기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쯤 게덴하이드를 구속하고 있는 마법진이 효력을 다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크레이트의 얘기가 너무나 흥미진진하다보니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다급하게 지크레이트를 쳐다보았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어디에 보관되어 있지?

원한다면 꺼내주겠다. 하지만 그것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꺼낼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좌표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것은 영원히 인크레시아의 안에 존재해야 하므로. 이것은 크라누스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다.

빌어먹을……. 나에겐 시간이 없단 말이야.

다급한 마음에 데이몬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풀려난 뒤 게덴하이드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뻔했다. 놈은 분명 베르키스에게 달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노리고 말이다.

안절부절못해하던 데이몬. 그때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데이몬의 뇌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인크레시아와 지크레이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데이몬은 손뼉을 딱 쳤다.

좋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

어떻게 하겠다는 뜻이지?

지크레이트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지금의 그는 전혀 드래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넌 몰라도 돼.

지크레이트를 쳐다보던 데이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지크레이트는 그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무슨 일인가? 게덴하이드.

벽 너머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게덴하이드는 반색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베르키스가 깨어나기를 말 그대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참이었다. 드래곤은 인간과는 달리 금방 잠들고 바로 깨어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기에 이처럼 튼튼한 장막 속에서 수면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크, 큰일났습니다. 베르키스님.

큰일?

게덴하이드는 곧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세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500년 전 재미 삼아 리치로 만들었던 데이몬이 어느새 9써클의 마스터가 되어 게덴하이드를 제압했다는 사실에 베르키스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설마 놈의 정신력이 내 세뇌마법을 극복했단 말인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놈이 어떻게 해서 9써클의 마스터가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짚이는 바가 없진 않다. 조금 기다리거라.

베르키스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는 듯 했다. 곧 극도로 분노한 음성이 벽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그랬군. 내 마법서실의 알람마법들이 모조리 디스펠되어 있어. 놈은 내 마법서를 가지고 마법을 익힌 것이 틀림없다. 이놈을 그냥…….

하, 하지만 베르키스님의 마법서실에는 10여 명의 리치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리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법서실에 들어갈 수 없을 텐데요.

세뇌마법을 극복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놀랍군 10써클의 마법을 이겨내는 인간이 있을 줄은…….

사정을 게덴하이드가 알아봐야 하등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던지 베르키스는 그저 짧게 얼버무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르키스는 이번에는 다른 것에 대해 물어왔다.

그래. 놈이 지크레이트에게 갔다고?

그렇습니다. 조금 전 연락을 취해 본 결과 놈이 어김없이 지크레이트님의 레어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사자 행세를 하며 그 분의 처소에 들어간 것은 확인되었지만 그 뒤로 문이 폐쇄되어버린지라 자세한 사정은 그곳의 가디언들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지크레이트가 놈에게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게덴하이드는 그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이란 종족을 능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베르키스가 불같이 화를 낼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드 마스터의 암습이면 몰라도 마법이 장기인 리치가 정면대결로 드래곤을 감당할 가능성은 아예 없었기에……. 예상대로 베르키스는 지크레이트가 당했으리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재미있군. 놈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일까?

가디언들이 사력을 다해 문을 부수고 있으니 곧 전말이 드러날 것입니다.

베르키스님. 그것보다도 먼저 놈을 끝장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됩니다만.

아무래도 그게 낫겠군. 상당히 위험한 녀석이니…….

베르키스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했다. 좋은 실험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다소 애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뇌마법을 극복한 놈을 살려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때문에 베르키스는 커다란 아가리를 좍 벌려 몸 속에 보관한 데이몬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토해냈다.

리치 데이몬의 생명력이 보관된 용기를 쳐다보는 베르키스의 눈망울에는 차가움만이 가득했다. 수면을 취하던 도중에 깨어난 덕택에 결코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놈.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곧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손으로 베슬을 틀어 쥔 베르키스는 지긋이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지직.

베슬에 가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베르키스는 힘을 살짝 풀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싸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마도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베슬이 깨어진다면 리치는 그 즉시 소멸되어 버린다. 그것은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물론 베르키스에겐 놈을 단번에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힘을 주었다 뺐다하며 극한의 고통을 가한 뒤에야 끝내려는 것이 바로 베르키스의 속셈이었다. 베슬에 금이 가면 속에 저장된 생명력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그것은 리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할 것이다. 베르키스는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잠에 빠져있어야 할 자신을 깨운 데 대한 대가였다.

크윽.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점의 빛도 없는 태고의 어둠 속이었다.

바, 발각되었나 보군. 조, 조금만 있으면 대, 대법이 완성되는데……. 큭.

신음소리는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성의 주인은 줄기차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듯 했다. 필생의 염원이 걸린 듯 말이다.

크으, 그래도 다행이군. 바, 바로 죽일 생각이 없어 보이니… 커컥.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비명 소리로 보아 얼마만큼의 고통이 가해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의 인물은 끈질기게 고통을 참아내며 작업에 몰두했다. 사실 그는 고통이라면 이력이 날 대로 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알 수 없는 기운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어둠 속 미지의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음성의 주인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거듭된 과정이 무척 지루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파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