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칠종단금술의 효과는 데이몬이 중원에 있을 때부터 증명된 상태였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익힐 경우, 피에 굶주린 혈귀로 만들어버린다는 천자혈마공. 그 저주받은 마공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인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뇌리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칠종단금술 때문이었다. 그리고 칠종단금술은 트루베니아에서도 데이몬을 한 번 더 구해주었다. 데이몬을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세뇌마법(洗腦魔法). 인간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10써클의 최고위급 마법으로써 대상이 어떠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던 간에 가차없이 충실한 종복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이다. 이 마법이 시술될 경우 대상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술자를 거역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시술자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서슴없이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세뇌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오른 팔이었던 게덴하이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정도로 마법의 위력은 강렬했다. 당시 벌써 9써클의 반열에 올랐으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에게 깊이 지배되고 있던 게덴하이드였지만 그 역시 세뇌 마법에는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베르키스의 충실한 종복이 되어 잘 훈련된 개처럼 레어를 지키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세뇌 마법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데이몬은 그 과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세뇌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었다.
자신의 마법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베르키스는 세뇌 과정이 끝나자마자 수면에 들어갔고 데이몬은 정신을 온전히 보존한 채 다른 실험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데이몬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서너 명의 리치였다.
그는 데이몬을 리치로 만들라는 베르키스의 엄명을 받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수면기가 끝날 때까지 데이몬을 살려놓으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데이몬이 도착하자 게덴하이드는 곧 그를 리치로 만드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것이 바로 데이몬이 리치가 되게 된 배경이었다.
그 과정을 상기한 데이몬은 눈빛을 번뜩였다.
나에겐 차라리 다행이었지. 리치가 되지 못했다면 나는 채 6개월을 살지 못했을 테니까…….
당시 데이몬의 몸은 헤이스트의 남발과 심한 화상으로 인해 생명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게덴하이드에 의해 당한 죽음의 손길로 인해 어둠의 마력이 심장까지 파고들어 있었으므로 어찌 보면 리치가 된 것이 데이몬에겐 정말 다행일지도 몰랐다.
리치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강해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를 떠올리자 데이몬의 얼굴에 미미하게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놈들은 내가 세뇌되지 않았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복수를 위한 일념으로 데이몬은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어떻게 해서든 강해져서 다프네를 구해내고 복수를 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성공했다. 조금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게덴하이드는 그것을 단순히 정신마법의 후유증이라 간주했다. 리치가 된 이후 데이몬은 예정대로 베르키스의 가디언 군단에 편입되게 된다.
그것이 내가 힘을 얻게 된 과정의 시작이었지.
리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정신은 온전했다. 어쩌면 그것 역시 칠종단금술이 작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이몬은 의문을 떠올릴 틈도 없이 마법 수련에 들어갔다. 그에겐 영원한 수명과 함께 폭넓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의 휘하에 있는 리치들에겐 실력을 높이기 위한 마법 수련이 허용되었다.
물론 일정 수준까지였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엄청난 양의 마법서를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배움에 목말라했던 데이몬에겐 행운이라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수명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된 터라 데이몬에겐 마음놓고 마법을 수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조로운 가디언으로써의 생활은 지금까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유시간을 그에게 제공했다.
이후 데이몬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마법을 익혔다. 500여 년 동안의 마법 수련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미 도일로부터 기초가 탄탄하게 닦였던 터라 걸릴 것은 전혀 없었다. 속성으로 익혔던 인간 시절과는 달리 데이몬은 순리대로 과정을 닦아나가며 차근차근 써클을 올려나갔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마법을 익힌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 150년 만에 6써클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데이몬에게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으니…….
베르키스는 휘하의 리치들이 6써클 이상으로 올라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가 상당히 고생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베르키스의 리치들 중에서 6써클을 초과하는 자는 오로지 게덴하이드만이 유일했다.
그는 이미 인간이었을 때 9써클의 반열에 올라섰던 것이다. 그 외의 리치들은 모조리 6써클의 마스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인간을 상대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6써클은 데이몬에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9써클의 마스터라도 성에 차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는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서클을 높일 방법에 대해 궁리하게 된다. 그 당시를 상기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뇌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에겐 천만 다행이었지. 그 때문에 베르키스의 마법서실(魔法書室)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당연한 말로 리치들의 마법서실에는 6써클 이상의 마법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게덴하이드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대신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에 쌓여 있는 마법서를 노렸다.
드래곤의 마법서라면 충분히 자신을 9써클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베르키스의 마법서실로 잠입할 방법만을 골똘하게 생각하게 된다. 장장 40여 년의 세월동안을 말이다. 데이몬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베르키스의 마법 서실로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쉬울 줄은 몰랐지.
비록 경계가 삼엄하기는 했지만 그리로 숨어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문제는 리치들에게 펼쳐진 세뇌 마법이었다.
물론 마법서적에 관심이 있을 만한 존재는 리치들뿐이었으므로 베르키스는 마법서실에 별다른 관문을 설치해 두지 않았다. 그가 시술해놓은 세뇌 마법을 그만큼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뇌마법이 시술된 리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베르키스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리치들은 명령이 없는 한 결코 베르키스의 서가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은 게덴하이드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의 뇌리에 베르키스의 서가는 들어가서는 단 될 금지(禁地)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만은 예외였다. 세뇌마법에 조종되고 있지 않았던 데이몬만이 아무 거리낌없이 서실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경비의 눈을 피해 잠입하는데 30년이 걸렸지. 그리고 마법서실의 문을 여는데 5년, 서실 내부의 알람 마법을 해제하는데 또다시 5년.
비록 6써클의 마스터가 되었지만 데이몬에게는 마법서실 앞을 경비하는 리치들의 눈을 속일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전원이 데이몬과 동일한 써클의 마법사들이었던 것이다.
실력이 동일한 10여 명의 리치를 단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때문에 데이몬은 결국 다른 방법을 궁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바로 지하로 길게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데이몬은 장장 30년 동안 굴을 파서 마침내 마법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리치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척 깊이 굴을 파야 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법서가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법서실의 문을 봉인하고 있는 마법을 제거하기 위해 그는 또다시 오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물론 마법 서실 안의 알람 마법을 제거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근차근 매듭을 풀어나갔고 마침내 베르키스가 애용하는 마법서들은 그의 수중에 들어오고 말았다. 마법서를 손에 든 데이몬은 치밀어 오르는 격정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되었어.
그 때부터 그는 고위급 마법에 대한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드래곤의 마법서인 만큼 익히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시간이 충분했기에 그는 차근차근 연구하며 이치를 풀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볼 스승이 없었기에 그는 철저한 연구를 통해 해답을 발췌해내야만 했다. 해법을 찾기 위해 초급 마법서를 수없이 뒤적여본 탓에 그는 거의 모든 종류의 마법을 극성까지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의 마법실력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데이몬은 200년의 노력 끝에 9써클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9써클의 엑스퍼트인 게덴하이드를 능가하는 경지 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익힐 수 있는 극한의 마법이었다. 물론 데이몬의 피땀어린 노력도 있었지만 이 성과는 그가 리치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경지였다. 인간에겐 수명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제 그는 게덴하이드와 1대 1로 붙어도 섣불리 꿀리지 않을 마법 실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리치가 된 탓에 다소 반감되긴 했지만 몸놀림과 실전경험을 감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섣불리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여전히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했다.
아직까지 베르키스에겐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미 과거에 익혔던 사술을 모조리 복원하려는 마음을 먹게 된다. 비록 사술의 시전에는 내공이 필수적이었지만 써클이 올라감에 따라 단번에 엄청난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된 점을 감안해서 데이몬은 마나로 하여금 내공을 대치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었다.
수십여 년에 걸친 정진, 그로 말미암아 데이몬은 마침내 사술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데이몬이 7써클의 엑스퍼트가 된 이후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것을 운용해 데이몬은 마침내 게덴하이드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 있었다. 자신을 완벽히 숨기는 여러 가지 사술과 술법은 게덴하이드의 눈에 데이몬의 경지를 항상 6써클 정도로만 보이도록 감춰주었다.
그것은 데이몬이 9써클의 마스터가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게덴하이드의 경지를 넘어선다면 그의 이목을 더욱 손쉽게 숨길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여전히 성이 차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9써클의 마스터가 되었고 사술도 얻었지만 그것만으로 드래곤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성장한 드래곤이라면 대부분 10써클의 경지를 넘어서는 대마법사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법 공격이라도 드래곤에게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때문에 데이몬은 스승의 유언에 따라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네크로멘서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를 떠올린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에는 흑마법과 네크로맨시(Necromancy)에 대한 서적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아마도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봉인하며 얻은 것인 듯 싶었다.
데이몬에겐 또다시 상당한 분량의 연구과제가 생겼고 그는 또다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했다. 네크로맨서가 되어 고급 언데드 몬스터와 합세한다면 드래곤을 상대하기가 더욱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연구하는데 또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결국 데이몬은 네크로멘서의 기술을 대부분 터득하긴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여기서 두 번째 관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초월한 것으로 여긴 시간 문제 때문이었다.
드래곤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어둠의 마력이 필요하다. 언데드 몬스터를 모을 마력을 모으려면 적어도 200년의 세월을 연구에 정진해야 한다. 인간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들의 수면기는 앞으로 10년이면 끝난다.
물론 지금은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리치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었지만 베르키스에게만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정신마법의 대가인 베르키스라면 자신이 이룬 마법의 경지를 단박에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다시 말해 베르키스가 깨어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자신이 9써클의 마스터라도 오직 하나 베르키스에게만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세상 어디로 도망가던 간에 그는 베르키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베르키스는 나를 위시한 모든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가지고 있다. 만에 하나 놈이 눈치채고 베슬을 깨뜨려버린다면 나는 그 즉시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혀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힘을 얻은 이후 데이몬은 제일 먼저 그의 생명력이 담긴 베슬을 훔쳐내고자 했다.
하지만 라이프 포스 베슬은 이미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베르키스가 자고 있는 곳은 외부와 완벽히 격리된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의 실력으로도 그곳은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강제적으로 돌파를 시도한다면 그 즉시 내부의 알람 마법이 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르키스가 깨어날 테고 자신은 그 즉시 소멸될 것이 분명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다른 방면으로 해법을 찾으려 했다.
드래곤들의 수중에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구슬이 있다고 했다. 만약 그 구슬을 손에 넣어 마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빠른 시간 내에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해 낼 수 있다. 충분히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 규모의…….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구슬이 베르키스의 레어에 존재하지 않았고 게다가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빼내어 와야 했다. 무엇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데이몬은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난 해낼 것이다. 다프네를 구해낸 뒤 난 드래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족족 죽여 없애버릴 테니까…….
어찌 보면 광오한, 다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다짐이었지만 데이몬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가슴이 완전히 복원된 것을 느낀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은 베르키스의 서가에 한 번 들어갔다 와야겠군. 이미 모든 서적을 독파한 상태지만 찾아볼 것이 있으니…….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레어로 향하는 데이몬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아르카디아 대륙은 트루베니아 대륙보다 정확히 1.5배 넓은 신대륙이다. 원류 격인 트루베니아 대륙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신대륙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확히 550년 전 뱃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아르카디아를 밟았다. 그들의 후손은 계속해서 대륙 곳곳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드넓게 펼쳐진 기름진 대지와 대륙 곳곳을 가로지르는 강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풍성한 수확물을 거둘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비약적으로 그 수가 늘어날 수 있었다.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조상은 대부분 트루베니아에서 쫓겨난 자들이었다. 죄를 짓고, 또는 종교 분쟁으로 말미암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대륙을 밟은 자들. 그들은 끊임없이 습격해오는 흉포한 몬스터들에 용감히 맞서 싸우며 신대륙을 개척해 나갔다.
대륙의 곳곳에는 여러 왕국이 세워졌고 개척 과정에서 흘린 정착민들의 피땀을 토대로 그 왕국들은 점점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거대한 제국에서부터 변방의 조그마한 왕국까지, 아르카디아는 원류인 트루베니아와는 판이하게 다른 발전과정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왕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단연 크로센 왕국을 선택할 것이다.
구국의 영웅 크로센 대제가 직접 세운 제국으로써 아직까지 크로센 제국의 황제자리는 그의 후손이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였지만 굳이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타 왕국의 왕들은 크로센 황제에게 무한한 경외를 보냈다. 단지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경외받을 자격이 있었으므로…….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대체로 원류인 트루베니아와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트루베니아의 왕국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봉건 국가로써 군주는 영주들과 기사들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대가로 충성을 맹세 받는다. 물론 영지가 없는 귀족들도 많았으며 영지를 하사 받기 위해 혈안이 된 귀족들 역시 없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군주의 눈밖에 난다면 대상 귀족과 그 식솔들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아무개 영지의 누구누구를 영주 자리에서 해임하노라.
이렇게 선포한다면 영지가 없는 무수한 귀족과 기사들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를 몰아낸다면 자신이 그 영지의 신임 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칙령이 떨어지면 그런 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공격을 가할 것이 분명했고 실각한 영주는 영지는 물론이오 목숨조차 제대로 부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국왕보다 병사가 많은 귀족들이 있었어도 감히 왕권을 넘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트루베니아의 현실이었다.
트루베니아는 이런 봉건 체계 아래에서 왕권을 튼튼하게 확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달랐다. 그들은 왕국의 군사력을 반 이상 군주가 쥐고 있는 형태의 집권제 국가들로써 각 영주들은 보유할 수 있는 병사의 수에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왕국의 군주들 대부분이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뒤 사람들을 모아 왕국을 세운 경우였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와 정통성 면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왕권은 항상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군주들은 왕국의 군사들을 대부분 휘하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유지할 수 있는 선까지 말이다.
물론 귀족들이 암암리에 병사를 모아 군주를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국왕이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럴 경우 주변 왕국들은 자신에게 별다른 피해가 없는 한 새로운 국왕을 묵인한다.
이것이 바로 크로센 대제가 아르카디아의 왕국에 끼친 영향이었다. 크로센 제국을 세운 이후 대제는 바로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평생동안 이어진 내 신념이다.
오라! 나보다 검술 실력이 뛰어나고 통치를 잘할 자신이 있는 자가 있으면…….
그렇다면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 내 자리를 넘겨주겠다.
물론 크로센 대제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용장 아래 약졸 없다고 그의 휘하엔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한 크로센 기사단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크로센 대제의 말이라면 아무 거리낌없이 사지에 뛰어들 정도로 충성심이 깊었다. 게다가 크로센 대제가 낳은 다섯 명의 아들 모두가 뛰어난 소드 마스터로 성장한 때문에 크로센 대제는 무척 평안하게 천수를 마칠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영향은 여타 왕국들에게 더욱 크게 파급되었다. 야심이 있는 영주들은 암암리에 병사를 모아 조련했고 틈나는 대로 끊임없이 왕권에 도전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이유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어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물론 군주들도 마찬가지로 항상 귀족들의 도전에 대비해야 했고 그 덕에 아르카디아에서는 군주자리가 뒤바뀌는 일이 무척 빈번하게 일어났다.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능력이 없다면 결코 왕위를 보존할 수 없는 것이다.
자고로 인간사를 가장 발전시킨 것이 전쟁이라는 말이 있듯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을 겪은 탓에 아르카디아 왕국들의 저력은 날이 다르게 성장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인간들에게 크나큰 위협이 되었던 몬스터들도 이젠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쇠망해 버렸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단련된 아르카디아 병사들에게 몬스터들은 더 이상 두려운 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르카디아에도 드래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깊은 산중에 꼭꼭 숨어있다는 점이 인간들의 번영에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드래곤들은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처럼 호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토대로 아르카디아는 점점 인간들만의 대륙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
불과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펠젠틴은 정말 엄청난 규모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아르카디아 최강국의 수도에 걸맞게 방대한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외곽의 방어시설 역시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규모만으로 본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카롯트의 수도 펠드리안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고풍스러운 면에서 펠드리안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펠젠틴은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진 도시였다. 잘 정비된 도로망과 방사형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한 눈에도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방사형의 중심 부분에는 바로 황궁이 위치하고 있었다. 노황제 발렌시우스 1세가 기거하는 동시에 제국을 이끌어나가는 고급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궁의 한 곳에서 갑자기 기나긴 탄식이 새어나왔다.
휴우.
한숨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은 바로 집정관의 집무실이었다. 총리와 맞먹을 정도로 높은 직책인 집정관. 이것은 트루베니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책이었다. 다수결로 귀족들 사이에서 뽑힌 총리의 독주를 막기 위해 국왕이 직접 임명하며, 원래는 총리와 협력하여 국사를 의논해나가는 아주 높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국왕이 타국과의 전쟁이나 세금 부과 등의 굵직한 사안을 결재한다면 이들 둘은 비교적 세세한 사안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물론 경미하다고는 하나 거대한 제국의 국무인 만큼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집정관 실에서 한숨 섞인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곧 창문이 열리며 한숨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말 걱정이로군.
모습을 드러낸 집정관은 의외로 무척 젊은 인물이었다. 서른 중반 정도의, 집정관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나이라 할 수 있는 자로써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가진 장년인이었다. 맑은 눈빛을 보아 범상치 않은 지혜를 가진 것이 분명했고 꽉 다문 입술은 굳은 의지력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인상적인 외모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지금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일견해도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이름은 테오도르 폰 네르시스. 크로센 제국의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집정관을 맡은 행운아였지만 예상을 뒤엎고 뛰어난 일처리로 인해 여러 귀족들을 놀라게 했던 관리의 귀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못할 고충이 있었으니…….
테오도르는 얼굴을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빛이 눈을 파고들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가 채 십 년도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전쟁에 대비해도 모자랄 판인데 고작 권력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
테오도르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곧 황궁 내부의 가장 거대한 건물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곳에 기거하는 이는 바로 크로센 제국의 주인이었다. 비록 노환 때문에 의식불명상태로 병상에 누워있기는 하지만 젊은 테오도르를 집정관에 임명한 노황제 발렌시우스 1세였던 것이다. 테오도르의 눈에 잠시 애틋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미 그는 모종의 일을 행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던 것이다.
황제께서는 필시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다. 이 일을 해내지 않는다면 아르카디아도 역시 트루베니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니까.
그는 지금 훗날 역모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일을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결코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 일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크로센 가문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열망으로만 불타고 있었다. 그것만이 자신을 집정관에 봉한 발렌시우스 1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테오도르는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명색만 집정관일 뿐이었다. 현 크로센 제국의 총리인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밀려 사소한 권한하나 행사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름뿐인 집정관이었던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노력으로 황제가 그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상태였다.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은 권력을 미끼로 대부분의 귀족들을 포섭해놓은 다음이었으니까 말이다.
페르슈타인 폰 헬프레인. 그는 과거 혈혈단신으로 아르카디아에 넘어온 벨티모스 폰 헬프레인의 후손이었다. 오래 전 이카롯트에 대한 역모사건으로 멸문한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었던 벨티모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아르카디아로 건너온 벨티모스는 가문을 부흥시키는데 평생을 바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 노력은 후손 대대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지금의 헬프레인 가문은 아르카디아에서는 손꼽히는 가문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모를 꾀한 피가 어디 가지는 않는 법. 현 헬프레인 가문의 가주인 페르슈타인은 지금 크로센 제국의 황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비록 강자지존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아르카디아였지만 단 하나 크로센 제국에서만은 그 법칙이 인정되지 않았다. 황권을 넘보기에는 크로센이라는 이름 석 자가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센 대제가 아르카디아에 베푼 은혜는 그 정도로 큰 것이었고 그 때문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감히 그의 후손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헬프레인 가문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크로센 제국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영지를 가진 가문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사병을 길러서 지금은 황제와 맞먹을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총리 자격으로 궁정으로 들어온 페르슈타인 공작은 국정의결권을 가진 귀족들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황권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었다. 그에게 넘어간 귀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지금은 황제라 할지라도 감히 숙청하지 못할 정도로 헬프레인 가문의 힘은 방대해져 있었다. 발렌시우스 황제의 정신이 멀쩡했다 해도 제거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을 상기한 테오도르는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견제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왕국들의 힘을 한데 모아 드래곤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크로센 궁정에서의 그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수는 겨우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나 할까. 그나마 그의 지지세력은 개혁파 신진 귀족들이 전부였고 그들 대부분은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고위급 귀족들을 모조리 규합해놓은 페르슈타인 공작과 겨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쌍방이 보유한 힘에 너무나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으므로 그의 뜻은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왕국의 군대를 한데 모아 드래곤의 침공을 막아내고, 역습으로 트루베니아까지 진격해서 탈환하자는 것이 바로 테오도르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안이었다. 반면 페르슈타인 공작파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과거 전례를 잊었소? 우리 아르카디아는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파병으로 트루베니아를 위기에서 구해주었소.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요? 도리어 중상 모략으로 크로센 대제께 크나큰 모욕이나 주지 않았느냔 말이오. 그러니 트루베니아가 멸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요. 그런데 우리가 왜 트루베니아를 탈환해야 하오?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트루베니아를 차지했으니 드래곤들은 아르카디아까지 건너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오. 설사 건너오더라도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은 과거 트루베니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오. 그 사실을 아는 이상 놈들은 쉽사리 바다를 건너오려 하지 않을 것이오.
전쟁불사를 주장하는 페르슈타인의 논리에는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찬성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편에서 서지 않는 중도파 귀족들조차 페르슈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실정이었으니 테오도르에겐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의 안위만 중시하다니, 멍청한 작자들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속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테오도르의 주먹이 굳게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두각시 황제를 세울 순 없다.
이미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음모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크로센 제국은 헬프레인 가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실 현 황제인 발렌시우스 1세에게는 원래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릴 때 죽은 첫째를 제외한 나머지 황자들이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당해버린 것이다. 아무도 그 원인을 캐내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인은 아직까지 의문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 죽음의 배후에 필시 페르슈타인 공작이 있을 것이라 단정했다.
황자들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을 만한 자는 오직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증거가 일체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아니 증거가 있더라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황위계승자들이 모두 죽어버린 때문에 발렌시우스 황제는 무척 오랫동안 권좌에 앉아있어야 했다. 남은 황손이 단 둘 뿐이었고 그들의 나이가 무척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은 둘째 황자가 낳은 자식들이었고, 그들 외에는 황위 계승자가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 황자들은 일가족 모두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황손이 있는 때문에 외견상 보기에 황위 세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여기에 있었다. 두 황손 중 첫째 알카리스가 바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알카리스는 무척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한 번 본 여인들이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정박아였다. 스물을 넘긴 나이였지만 그의 지능은 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와 비슷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하늘의 저주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둘째 황손 드비어스는 나이답지 않게 총명하고 명석한 소년이었다. 열 넷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형과는 달리 의젓하고 재지가 넘치는, 말 그대로 군주의 풍모를 타고난 소년이었다. 성장한다면 귀족들의 전횡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현명한 황제가 될 것이라 테오도르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문제는 페르슈타인이 차기 황제로 첫째 황손인 알카리스를 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근거로써 오래 전에 명을 달리한 크로센 대제의 마지막 유언을 내세우고 있었다.
황위를 둘러싼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막기 위해 군주 자리를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고는 큰아들에게 넘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알카리스를 밀고 있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페르슈타인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필시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알카리스를 황제 자리에 앉혀놓고 국정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할 생각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테오도르는 개혁파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해 페르슈타인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대제께서 말씀하신 불가피한 일이 바로 이것이오. 정박아인 황손 알카리스에게는 국정을 운영해나갈 능력이 없소. 나이가 어리더라도 총명한 둘째 황손 드비어스를 차기 황제로 삼아야 하오.
하지만 명분에서도, 세력에서도 뒤지는 터라 테오도르에게는 페르슈타인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포섭된 귀족들이 이미 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터였다.
또한 정신이 혼미한 노황제 발렌시우스 1세는 지금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때문에 테오도르로써는 무모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들통난다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위험천만한 계획을 말이다.
그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 두 사람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두 사람만 포섭한다면 그의 계획은 반 이상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한 사람은 나에게 협조하기로 맹세했다. 나머지 한 사람이 문제다.
천만 다행으로 테오도르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사람은 진정으로 아르카디아를 걱정하는 열사로 보였다. 당시 암암리에 그를 만난 테오도르는 제반 사정을 모조리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다.
이 임무는 당신의 목숨을 버려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오.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도저히 대답을 강요할 수 없소. 모든 것을 당신이 판단해서 결정하시오.
알겠습니다. 집정관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상 밖으로 그는 흔쾌히 테오도르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을 설득하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럼 모쪼록 조심하시기 바라오.
테오도르는 무척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테오도르가 두 사람 모두를 만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므로……. 만에 하나 페르슈타인의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서 그가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것은 도박이다. 만약 그가 딴 마음을 먹었다면 이곳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필경 페르슈타인의 사병들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도저히 액운을 피할 수 없었다. 페르슈타인의 능력이라면 집정관 한 명의 실종 정도는 충분히 감출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단지 뻔히 닥칠 위기를 알고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긴 하지만…….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테오도르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있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에 테오도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는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테오도르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 밖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그와 아르카디아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덜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바라본 테오도르의 얼굴엔 환희의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문을 두드린 자들은 그가 손꼽아 기다렸던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며 테오도르는 아르카디아의 앞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정신에 작용하는 면에서는 사술이 마법보다 월등히 뛰어나군.
마법 서적을 뒤적이며 데이몬은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지금 들어와 있는 곳은 바로 베르키스의 마법 서실이었다. 오직 베르키스 말고는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
심지어 게덴하이드조차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 전무할 정도였다. 그런 금지(禁地)를 데이몬은 지금까지 밥먹듯 들락날락해 왔던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침입을 막는 마법 장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디언들이 이곳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는지 베르키스는 의외로 이곳에다 간단한 알람 마법 하나만 달랑 설치해 놓았을 뿐이었다.
물론 6써클의 마스터였던 데이몬이 이 마법을 파훼하는데 장장 5년이 걸릴 정도였으니 결코 간단한 마법이라 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베르키스의 마법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 할 만 했다.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은 사방 30평방미터 정도 되는 석실이었다. 벽면을 온통 서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에는 마법 서적이 빈틈없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 중에는 드래곤들의 마법서도 있었고 인간들로부터 약탈한 것도 있었다.
심지어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하는 마법서도 있었으니 가히 인간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마법이론서가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서적들은 데이몬이 한두 번씩 탐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데이몬은 수백 년 동안 서실 내부의 책을 모조리 독파한 상태였다.
그건 그렇고…….
훑어본 서적을 바닥에 내려놓은 데이몬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법과 관련된 서적은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이미 바닥은 데이몬이 읽다 버린 책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물론 데이몬에게는 그것을 정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베르키스가 깨어나기 전에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으므로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들과의 전쟁과정과 그 전후처리를 기록한 보고서였다.
베르키스는 인간 정벌에 총사령관 격인 드래곤이었고 분명 그의 레어 어딘가에 그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가 있을 터였다. 물론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냥 서가에 꽃아 두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것이 마지막 서가인데…….
텅 빈 서가 앞에서 데이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베르키스의 비밀 서류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지금 서가마다 디스펠과 탐색마법을 빠짐없이 시전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물론 이것은 지금까지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서클이 낮은 마법사는 그보다 높은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을 결코 디스펠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하지만 데이몬은 이제 일반적인 마법 실력만은 결코 베르키스에 뒤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가 베르키스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정신에 작용하는 10 써클의 마법뿐이었다. 그 외의 마법실력은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9 써클과 10 써클의 차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술을 다각적으로 응용한다면 놈이 10 써클의 정신 마법을 시전하더라도 쉽사리 당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내 라이프 포스 베슬만 빼돌린다면 말이다.
격정이 치밀었는지 뼈만 남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리치가 된 이후 그는 이제 팔을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인을 맺었다.
디스펠.
예상대로 서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은 실망하지 않고 재차 탐색 마법을 펼쳤다. 마법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서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검색하려는 것이다.
응?
텅 빈 데이몬의 동공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극히 미세한, 아마도 과거였으면 결코 눈치채지 못했을 마법의 기척이 그의 탐색마법에 감지된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서가에 손을 붙였다. 디스펠을 캐스팅하자 뼈만 남은 손을 축으로 눈부신 광구가 맺혔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광구는 어느 순간 빛을 맹렬히 내쏘았다.
번쩍.
목표제한으로 단위 면적 당 작용하는 마법의 효과를 비약적으로 늘인 변형 디스펠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마침내 서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책을 꽂는 부분이 빙글 돌아가며 시커먼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이었군.
데이몬은 급히 손을 집어넣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이미 그에겐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몸에 배어 있던 상태였다.
혹시라도 놈이 수작을 부려놓았을지도 모르니…….
공간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살짝 걸친 데이몬은 목표제한 디스펠을 다시 한 번 캐스팅했다. 천만 다행으로 마법 하나가 거기에 걸렸다. 서실 내부에 펼쳐져 있던, 데이몬이 파훼하는데 5년이 걸렸던 바로 그 알람 마법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어졌다.
이 정도야 이젠 문제도 아니지. 이미 난 9써클의 경지에 올랐다고…….
그가 정신을 집중함에 따라 마나의 재배열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이루어졌다.
알람 마법은 결국 1분도 버티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과거 5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성장이었다.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서슴없이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엔 한 무더기의 서류 뭉치가 딸려 나왔다. 그것을 본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이것이로군.
데이몬은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류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약 두 시간 가량의 집중 끝에 데이몬은 서류의 내용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몇 가지 마법을 시전해서 기억력과 응용력을 높인 탓에 데이몬은 단 시간 내에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서류를 읽고 난 뒤 그의 얼굴에서 득의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비록 리치의 얼굴이라 많은 표정을 드러내진 못하지만 말이다.
성공했군.
데이몬은 거기에서 마침내 목적했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라진 봉인구에 대한 행방이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마법의 구슬.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가 만들어내고 휘하 드래곤들의 마나가 대대적으로 주입된 봉인구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지금까지도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이델하르크는 마계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영원히 잠에 빠져있어야 하는 것이다.
되었어.
데이몬은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것말고도 많은 제반 지식을 얻는 수확을 얻었지만 현재 그에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봉인구에서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뽑아내어 언데드 몬스터들을 소환하지 못한다면 그의 복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공할 수 없다. 일의 성패는 바로 그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해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빼오는 것인가 이다. 물론 그 전에 내 라이프 포스 베슬을 먼저 훔쳐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서류를 통해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레어에 어째서 보물이 존재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은 보석이나 보물 종류를 무척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베르키스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데이몬은 수많은 보석과 보화들이 드래곤들의 레어로 실려 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인간들에게서 약탈한 것들이다.
드래곤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크들은 빼앗은 전리품 중 값진 것들은 모조리 드래곤들에게 바쳤다. 어차피 오크들에게 보물은 별달리 소용없는 물품이었다. 물론 드래곤들은 무척 기뻐하며 받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500년의 세월동안 베르키스의 레어를 지키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서 약탈한 보물들은 모조리 드래곤들의 레어로 옮겨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베르키스의 레어에는 보물이 별로 없었다.
금이나 은 따위의 부피 큰 보물은 있을지언정 값비싼 보석이나 마법 무구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베르키스의 레어 구석구석을 살펴본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류를 통해 그 해답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그랬군. 놈들은 도난을 우려해서 그곳에다 보석을 옮겨놓았던 것이로군.
현재 드래곤들 대부분이 수면기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드래곤들이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 지크레이트라는 이름의 그린 드래곤 하나 만은 이례적으로 잠에서 깨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 기간 중 그만이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지크레이트는 인간과의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바로 수면기 동안 그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들이 잠을 자는 동안 지크레이트는 깨어있는 상태로 보물을 지킨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바로 지크레이트의 수중에 있었다.
서류에 의하면 놈은 아직 웜급이 되지 못한, 비교적 약하다 볼 수 있는 드래곤이다.
하지만 서류에는 놈을 처치하더라도 결코 보물을 탈취하진 못할 것이라 나와 있다.
왜냐하면 지크레이트는 드래곤들이 힘을 모아 만든 마법의 보고(寶庫) 인크레시아에다 봉인구를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서류에 의하면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결코 타인이 털 수 없는 종류의 보고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으로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보고였기 때문이었다.
인크레시아는 일종의 차원의 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약속된 자의 주문에 의해서만 열리는, 그 외에는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보고이므로 그야말로 도난을 완벽하게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속의 보물들 역시 타 차원, 그것도 생명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차원에 보관된다. 설사 신이라고 해도 보물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약속된 자 외에는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인크레시아는 말 그대로 철옹성 같은 보고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것말고도 데이몬에겐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까지 훔쳐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집념을 꺾지 않았다. 그에겐 복수와 함께 다프네를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
아무도 없는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에서 데이몬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가지 물품을 훔쳐낼 방도를 떠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곳은 어디지?
누군가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음성의 주인은 무척 젊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소년이라 하기엔 다소 나이가 많고, 그렇다고 청년으로 보기는 다소 미흡한 금발의 청년. 놀랍게도 그는 너무도 헌앙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하늘 휘날리는 금발머리 아래엔 두툼한 눈썹이 자리해 있었고 우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은 남자도 여자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청년의 얼굴에는 치기만이 가득했다. 눈매가 왠지 모르게 멍해 보이는 청년은 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짜증스러운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이곳에 온다면 사탕과 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그랬잖아?
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묵직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사탕과 과자는 저쪽에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온 자는 갑옷을 걸친 기사였다.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아서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반백의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로지른 끔찍한 흉터와 짜부러진 왼쪽 눈이 그를 결코 범상하게 보이게 하지 않았다. 외눈에서 새어나오는 안광은 보는 이의 심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르카디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강자였다.
루드비히 폰 아미르트.
그는 크로센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써 황가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근위기사였다. 벌써 30년 전에 소드 마스터의 자격을 취득한 자로 검술 실력이 아르카디아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끼인다고 자부할 정도로 강한 검사인 것이다. 황제를 경호하는 근위기사단장의 뒤를 이어 황태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국의 황태자를 보호하는데 부단장이 나서는 것은 극히 지극한 일이었다.
이미 사탕과 과자가 준비되어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을 듣자 청년의 안색이 갑자기 환해졌다.
정말이죠? 루드비히 경?
그렇습니다.
아이 좋아라.
청년은 무척 기쁜 듯이 기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친위 기사들이 바짝 붙어 뒤따랐다. 그들에겐 자신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청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별달리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매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짙은 고뇌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왕가의 존속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힐끗 시선을 던졌다. 뒤따라가고 있던 노 마법사 하나가 그의 시선을 받자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역시 평범한 신분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크로센 제국의 궁정 마법사로써 7써클의 마스터인 페이런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으니…….
그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쓸쓸한 우수가 서려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크로센 제국에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올지 익히 아는 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로센 제국이 귀족들의 손에 좌지우지해 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년을 따라 걸어가며 루드비히는 바로 어젯밤 페이런이 찾아왔을 때를 상기했다.
뭐, 뭐라고?
페이런의 말을 들은 루드비히는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늦은 밤에 찾아온 자신의 오랜 지기 페이런이 정말 경천동지할 제안을 해 왔던 것이다. 루드비히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나, 나는 할 수 없네. 어찌 크로센 대제의 핏줄을…….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크로센 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나? 자네는 이미 궁정에서 돌아가는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나, 난 기사라네. 도저히 그 일을…….
그렇다면 황가가 몰락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겠다는 뜻인가?
루드비히는 말을 잊었다. 물론 그라고 궁정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린 황손을 두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암투를 말이다. 하지만 페이런의 제안은 기사인 그로써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 페이런은 지긋한 음성으로 루드비히를 설득해 나갔다.
지금 자네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네. 오래지 않아 페르슈타인 공작은 황태자의 호위를 자신의 충실한 심복으로 대처할 것이 분명하네.
시간이 없어.
알카리스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자네도 익히 알고 있을 줄 아네.
하지만 어찌 우리 손으로 그 분의 후손을…….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침통한 표정의 페이런을 보며 루드비히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페이런과 자신은 평생동안 크로센 제국에 충성을 바쳐온 충신들이었다. 이런 일을 계획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그 일이 꼭 필요함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한다는 사실까지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황가에 대한 충성심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다.
어쩔 수가 없군. 자네 제안대로 하겠네.
고맙네.
감사를 표하기는 했지만 페이런의 얼굴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임무를 성공하더라도 그 대가로 그들 둘의 목숨과 함께 가문의 운명까지 끝장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상기한 루드비히는 얼굴빛을 고쳤다.
'후회는 없다. 평생을 황가에 충성했으며 마지막까지 내 모든 것을 바칠 작정이었으니……. 오직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지만 젊은 황태자를 보자 침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페이런이 벌써 20년 동안이나 호위해왔던 황태자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능이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알카리스는 무척 천진난만하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지금껏 호위해오는 동안 마치 손자 같은 느낌도 받았으니 그들 둘에게 연민의 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기필코 알카리스가 사라져야 했다. 그래야만 영명한 드비어스가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으며 또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독주를 막을 수 있었다. 더불어 크로센 황가의 존속까지도 말이다.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사실 집정관 테오도르에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았어도 페이런은 어렴풋이 제국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그런 페이런의 푸념을 벌써 여러 번이나 들어본 상태였다. 둘은 같은 학부를 졸업한, 마치 형제와도 같은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페이런에게 집정관이 찾아간 것은 정말 천행이라 볼 수 있었다. 페이런은 테오도르의 제안을 듣자마자 두말없이 동의하고 나섰다. 그만큼 뜻 있는 자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전횡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루드비히 역시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했다.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들 둘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마법실력이 뛰어나고 검술실력이 강하더라도 황태자를 바로 옆에서 경호하는 둘이 아니라면 계획은 실패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긴장으로 굳어있는 루드비히의 모습을 보자 페이런은 마치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우리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저곳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네. 비운의 황태자와 함께 우리들의 늙은 목숨까지 처리해 줄 존재가 말이야.
그렇게 강한 존재가 있단 말인가?
페이런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은 바로 레드 드래곤의 레어이네. 또한 그곳에는 9써클에 이른 무시무시한 리치가 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상태이지. 테오도르 집정관이 근위기사 헤이우드의 입에서 직접 확인한 사실이니 아마 틀림없을 걸세.
루드비히는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9써클의 리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우리와 함께 비운의 황태자 알카리스까지 끝장낼…….
다시금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도 모르는 채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자 알카리스가 걸어가고 있었다. 옆의 시종에게서 과자를 받아 연신 입 속에 집어넣고 있는 황태자. 그들을 쳐다보는 노기사와 노마법사의 눈빛은 극도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쾅!
화려하게 치장된 커다란 방에서는 난데없이 굉음이 울려 퍼졌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자는 화려한 복장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그는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뭐라고? 황태자가 실종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의 앞에는 서너 명의 기사들이 쩔쩔매는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한 기사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알카리스 황태자는 수도 남쪽의 별궁으로 공간 이동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법 통신에 의하면 황태자 일행은 그리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올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중요한 시가에…….
크로센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자라 할 수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 없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조금 있으면 발렌시우스 황제가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알카리스를 찾아오지 않으면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정말 큰일이군.
별안간 그의 눈에서 살광이 치솟았다. 황태자의 호위를 맡고 있는 자들에게 발산하는 분노였다.
루드비히. 페이런. 내 이놈들을 그냥…….
불연 듯 경솔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계획대로라면 그들의 자리에 벌써 심복을 배치했어야 했지만 설마 하는 생각에 그들을 그냥 내버려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골수까지 노황제의 심복이었다.
젠장맞을……. 어떤 일이 있어도 놈들을 찾아야 한다. 두 노물은 찾는 즉시 죽여버려도 무방하지만 황태자만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데려와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부산하게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페르슈타인은 눈을 빛냈다. 그에겐 선조의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뤄내야만 하는 사명 같은 것이 있었다.
이미 크로센 제국의 군사력은 반 이상 내 수중에 들어온 상태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조상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테니 말이다.
통상적으로 아르카디아에서는 쿠데타에 의해 정권이 뒤바뀌어도 주변국가들이 개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름하여 강자지존(强者至尊)! 크로센 대제가 주창한 원칙에 따라 능력이 있는 귀족이라면 얼마든지 국가를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방어하고 못하고는 원칙적으로 군주의 능력에 달려있다. 무능력한 군주라면 왕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르카디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르카디아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이었다.
그 논리에 의하자면 페르슈타인은 벌써 크로센 제국의 절대자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쉽사리 행동할 수 없는 것이 당금 제국의 황제는 바로 크로센 대제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르카디아에 끼친 은혜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 이상 자신에게 힘이 있더라도 섣불리 그 후손을 실각시킬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다른 왕국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자신에게 응징을 가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쨌거나 그들은 크로센 대제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던 자들이었으므로…….
현재 나는 왕국 둘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근교의 왕국들이 군사력을 하나로 합친다면 나로써도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최우선적으로 크로센 제국을 안전히 장악해야 한다. 제국의 군사력을 하나로 모아야만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알카리스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그를 황제자리에 앉혀놓아야만 제국의 국정을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내가 황제로 등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크로센 기사단이 아직까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놈들은 황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웃으며 받아들이는 골수분자들이다. 그들의 힘을 얻지 못하면 내 꿈은 실현될 수 없다.
페르슈타인이 나지막이 지껄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로브를 걸친 것으로 보아 마법사로 보였는데 무척 다급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인가?
크, 큰일났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는 마법사는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쿠슬란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는 채 말도 잇지 못한 채 헐떡거렸다. 그 모습에 페르슈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 놈들의 행선지를 밝혀냈습니다.
뭐라고?
페르슈타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곳이 어디이던 간에 동원할 수 있는 기사들을 모조리 파견해서 알카리스를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굳은 결심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쿠슬란의 말에 페르슈타인은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레,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라고? 트루베니아에 있는…….
그, 그렇습니다. 일전에 근위기사 헤이우드와 수련기사들이 몬스터 사냥을 다녀온 바로 그곳입니다.
이런.
페르슈타인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루드비히와 페이런의 흉계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던 페르슈타인이었다. 그곳은 명백히 사지라고 볼 수 있는 장소였으므로…….
드래곤의 손을 빌어 황자를 처리하겠다는 뜻이군. 할 수 없지. 즉각 기사들을 파견해라.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알카리스를 되찾아와야 한다.
하, 하지만 그곳에는 9써클의 리치가 있다는 보고가…….
알카리스를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내 손에 죽는다. 양자 택일하라. 리치에게 죽겠는가? 아니면 나에게 죽겠는가?
결국 쿠슬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치에게 죽는다면 그 하나로 끝날 테지만 페르슈타인의 눈 밖에 난다면 가족들 모두가 무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루드비히와 페이런의 식솔을 남김없이 체포해라. 반역을 시도한 놈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야 하니까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쿠슬란은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페르슈타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가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오도르. 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 네놈의 소행인가? 감히…….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 없는 듯 페르슈타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만있자. 기문둔갑술을 마법으로 적용하는 공식이 어떤 것이었지?
자신의 처소에서 데이몬은 골똘히 생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술을 모조리 마법으로 응용시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중원의 문파들 중 사술에 가장 정통한 집단이 바로 배교였고 그곳의 교주였던 탓에 데이몬은 온갖 사술과 술법에 통달한 상태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내공이 없던 탓에 사술을 시전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9써클의 마스터가 된 이후 데이몬은 꾸준히 사술을 발굴해왔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술의 이론들은 죄다 마법으로 둔갑되어 있는 상태였다.
드래곤을 상대하려면 마법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놈들에겐 생소한 술법인 사술로 상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듯 싶다.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에게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빼앗고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사술을 해법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데이몬의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라이프 포스 베슬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빌어먹을…….
베르키스가 직접 작성한 서류를 통해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이 현재 베르키스의 몸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녕 요원한 일이었다.
물론 베르키스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레어를 경비하는 리치 모두가 덤벼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배에 조금의 힘만 준다면 리치들은 모조리 소멸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세뇌마법에서 벗어나서 데이몬에게 협조한다는 가정 하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능성이 전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
데이몬은 돌연 눈을 빛냈다. 이미 그는 사술을 통해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놓은 다음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란 게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고 위험부담이 높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시키고 만다.
나직히 각오를 다지는데 갑자기 그의 앞에 놓인 수정구슬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그것이 마법 통신이란 것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다급하게 수정 구슬 앞에 앉았다.
마나를 불어넣자 수정구슬에는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자신과 동일한 리치의 모습이. 그는 다급하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모든 가디언들에게 알린다. 지금 레어의 동남부에 강력한 적이 출현했다. 이미 가디언 셋이 놈들의 손에 당했다. 빠른 지원을 바란다.
데이몬의 눈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그까짓 사소한 일로 인해 상념을 중단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물론 레어의 안전이야 관심조차 없는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강력한 적에 의해 레어 전체가 쑥밭이 되어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것 역시 생각하기 힘든 가정이었다. 이곳에는 적어도 오십 명이 넘는 6써클의 리치가 있었으며 또한 9써클에 오른 게덴하이드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침입자들은 일다경을 버틸 수 없을 것 같군.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수정구슬에서 또다시 음성이 튀어나왔다.
놈들에게는 강력한 소드 마스터 하나와 고위급 마법사 하나가 끼여 있다. 그 외의 놈들은 별달리 문제가 없지만 둘의 실력은 결코 얕볼 수 없다.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만큼 방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서둘러다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슬에 맺힌 영상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싸우는 동료들을 지원하러 간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돌아앉으려고 했다. 굳이 자신이 가지 않더라도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다른 리치들이 침입자들을 끝낼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 갑자기 괴이한 빛이 일어났다.
불연 듯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만있자. 만약 그 소드 마스터란 놈의 몸을 얻는다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 해법을 찾았다는 듯한 빛이 일렁거렸다.
열심히 몸을 날리는 데이몬의 뇌리에는 사술의 이론들이 쉴새없이 지나쳐가고 있었다.
지금 데이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몸이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 단단히 쥐어져있는 썩어빠진 리치의 몸이 아닌, 살아 숨쉬는 생생한 인간의 몸. 지금 데이몬의 뇌리에는 영혼교환의 사법(靈魂交換邪法)에 대한 구결이 떠오르고 있었다. 영혼교환의 사법, 이것은 배교의 사술 중에서도 최고위급 주술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기억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다른 사람의 영혼을 뽑아내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 앉는, 한 마디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고급 술법의 일종이다. 물론 고위급 사법인만큼 그 시술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뇌의 파장이나 영혼의 동질성 따위의,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대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과거 읽었던 배교 경전을 통해 데이몬은 이 사법이 성공할 확률이 고작 10%내외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패한다면 둘 다 백치가 되어버리겠지?
영혼교환의 사법은 그만큼이나 성공하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이 이 방법을 선택하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절박한 지경에 처해있는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실 그의 명줄을 쥐고 있는 베르키스에게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을 훔쳐낼 방도가 없는 터라 몸을 바꿔치는 것말고는 방도가 없어 보였다.
사실 오랜 역사를 가진 배교에서도 이 술법을 시행한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우선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높은 데다 그것을 감수할 만한 메리트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무예란 정신과 육신의 합일을 최우선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몸을 바꾸어 능력을 차지하길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최강 고수를 납치해서 몸을 차지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내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때문에 이 방법은 지금껏 빈사상태에 처하거나 늙어 죽을 위기에 처한 배교의 장로들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정말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10%의 확률을 극복해서 새로운 젊은 몸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시술자는 내공이 전혀 깃들지 않은, 범인과 다름없는 몸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랜 수련을 통해 다시 무예를 익히기 전까진 시술자는 전혀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만에 하나 교내에 원한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날을 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탓에 이 영혼교환의 사법은 오랫동안 배교의 경전 창고에 묻혀있었다. 데이몬 역시 이 구결을 외우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소용될지 심각하게 의심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지. 설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육신을 얻게 되더라도 마법을 전개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로지 대법이 성공하는 것만을 바라는 것이지.
데이몬은 이제 마법의 극한을 경험하고 있는 대마법사였다. 마법이란 학문 자체가 정신적인 면에 극도로 치중한 학문이니 만큼 몸이 바뀌더라도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별다른 장애가 없어 보였다.
물론 마법을 몸에 익숙하도록 다시 연습해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마법은 무예와는 전혀 다른 경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순간 데이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꿔치기 할 수 있는 싱싱한 몸이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베르키스가 보관하고 있는 라이프 포스 베슬의 파괴를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중원과는 판이하게 떨어진 이곳 사람들과 정신파장이나 여타의 조건이 맞아떨어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으므로……. 물론 데이몬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정신 없이 달려가며 데이몬은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나에겐 영원한 시간이 있다. 일단 대법이 성공해서 베르키스 놈의 손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소드 마스터의 몸을 발판으로 수련을 거듭해서 반드시 복수를 꾀할 수 있을 터. 비록 내공은 얻지 못하겠지만 소드 마스터의 잘 단련된 몸이라면 빠른 시간 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 소드 마스터가 얼마나 강한 자인지는 모르지만 부디 게덴하이드의 손에 당하지 않았길 기원하며 데이몬은 정신 없이 몸을 날렸다.
페, 페이런.
루드비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랫동안 절친했던 친우가 바로 눈앞에서 죽어 가는 데 경악하지 않을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페이런의 몸은 산산이 부스러지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9써클의 고위급 마법에 격중되었던 탓이다. 루드비히의 귓가에는 페이런이 남긴 마지막 말이 감돌고 있었다.
나, 나인 써클의 호리드 윌팅! 헤이우드의 보고는 사실이었어.
페이런의 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스러져버렸다. 그것을 쳐다보던 루드비히의 뇌리에도 어느덧 죽음이라는 단어가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이곳에 오면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드래곤의 레어에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가디언들이 우글거렸다. 대부분이 6써클을 넘어가는 고위급 언데드 몬스터인 리치. 세상에 리치가 이토록 많을 줄은 그들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접전을 벌인지 10분도 되지 않아 데리고 왔던 친위 기사들 대부분이 죽어 넘어졌다.
그들 대부분이 팔라딘이었지만 6써클의 리치를 상대하는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퍼부어지는 마법 공격, 팔라딘들은 대마법 갑옷과 함께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살아남은 자는 단 세 사람. 뛰어난 소드 마스터인 루드비히와 리치보다 써클이 높은 마법사 페이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를 쓰며 보호하는 황태자 알카리스였다.
죽일 목적으로 데리고 왔긴 하지만 그들 둘은 사력을 다해 알카리스를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를 사지로 데리고 온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곳은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뚫고 나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페이런이 목숨을 잃은 이상 자신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알카리스를 쳐다보았다.
흐으, 흐으.
거듭되는 친위기사들의 죽음에 알카리스는 아예 넋이 나가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크게 뜨여진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미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피가 얼굴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곱게 자란 그가 언제 이런 상황을 맞아보았으랴! 그 모습에 루드비히는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이 죗값은 죽어 저승에서 치르겠습니다.
살짝 목례를 한 루드비히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페이런을 일격에 소멸시켰던 공포의 리치가 시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일견해 보더라도 여타의 리치와는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는 자. 루드비히의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네놈이 말로만 들었던 9써클의 리치로군. 반가워. 그래도 내 최후를 하찮은 것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그를 쳐다보던 게덴하이드의 눈매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사실 이번 침입자들은 역대 트레저 헌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저 인간은 마치 죽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 같지 않은가? 처음 접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인간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외곽에다 포위망을 갖추는데 주력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려보내지 않을 작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들은 예상을 뒤엎고 레어가 있는 쪽으로 계속 밀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압도할 만한 전력도 아니었다. 고작 소드 마스터 몇과 마법사 하나로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게덴하이드가 아니었다. 어차피 상대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척살해야 할 침입자에 불과했다. 트레져 헌터이든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자이건 상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광을 번뜩이며 게덴하이드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무슨 이유로 왔는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감히 트루베니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 자체가 죽을 이유이므로…….
놀랍군. 리치가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굳힌 루드비히는 검을 잔뜩 꼬나 쥐었다. 그의 눈에 멍하니 선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비운의 황태자가 비쳐졌다. 순간 가슴이 저려왔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목숨을 끊어 고통을 줄여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상황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공격.
게덴하이드의 명이 떨어지자 리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콰콰콰콰.
파이어 블레스트, 체인 라이트닝. 새도우 블레이드. 브로큰 스워드등의 중급 공격마법들이 루드비히에게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루드비히의 몸은 곧 섬광에 싸여 버렸다.
우욱.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에 루드비히는 묵직한 신음을 뱉었다. 비록 대 마법 갑옷이 열심히 마법 공격을 막아주고는 있었지만 그것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깨어지던가 아니면 체내의 마나가 고갈되면 그도 결국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이처럼 열세인 상황에서는 마법사를 상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것도 면면을 따져보아 하나, 하나가 6써클의 마스터로 짐작되는 리치들이 아니던가? 갑옷의 마법진이 붕괴되는 것을 느낀 루드비히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았다. 허무하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최후의 반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갈 순 없지.
리치 하나라도 처치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물론 저승길에 페이런을 소멸시킨 리치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에잇.
마나를 밀어 넣음에 따라 갑옷에 새겨진 마법 문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루드비히의 몸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쏘아졌다. 목표는 페이런을 소멸시킨 바로 그 리치였다. 루드비히는 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우며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내 임무는 이제 끝났다.
리치의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콰쾅.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충격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갑옷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리치들의 공격에 이미 한계에까지 달아올랐던 대마법 갑옷. 그것이 리치의 9써클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끝인가…….
갑옷과 함께 몸이 부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루드비히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의 혼백은 육체를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챙그렁.
주인을 잃은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황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노기사의 충성심을 애도하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상황은 종결되었다. 목적이 모호하긴 했지만 베르키스의 레어에 침입했던 자들은 남김없이 살해되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하나에겐 저항할 능력도, 심지어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이건 완전히 바보로군.
마지막 생존자를 보자 게덴하이드의 눈에서 경계심이 싹 사라져버렸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놈의 모습에서는 우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그는 상대의 상태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한 눈에 보기에도 얼이 빠진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기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놈들이 사력을 다해 보호하던 것을 보니 꽤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군. 복장을 보면 고급 귀족 같은데 말이야.
알카리스의 면면을 훑어보던 게덴하이드는 끌어올린 마나를 풀어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을 처리하는데 자신이 직접 손을 쓴다는 것이 솔직히 마나가 아까운 일이다.
너!
게덴하이드의 지목에 리치 하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이놈을 데리고 가서 포로들이 갇혀 있는 곳에 가둬라. 죽여버려도 되겠지만 그래도 나이가 젊은 놈이니 생명력을 흡수하는데 쓰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리치는 얼른 다가가서 알카리스를 둘러메었다. 반항할 정신도 없는지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호위를 잃었던 충격이 무척 컸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이 아니던가? 게다가 시종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처참하게 죽어갔으니 놀라지 않았으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리라.
완전히 얼이 빠진 듯 알카리스는 눈을 크게 뜬 상태로 그저 입가로 침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찜찜한데 그냥 죽여버릴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침입자입니다. 약 100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인간 기사들인데 이쪽으로 거침없이 난입하고 있다는 급보입니다.
고민하던 게덴하이드는 그 소리로 인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떠올렸다.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란 것을 알고도 돌입했다면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놈들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얼빠진 귀족 녀석이 목표물일수도 있었다.
생각을 마친 게덴하이드는 알카리스를 들고 있던 리치에게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그 녀석을 당장 처치해버리고 따라오도록. 그리고 다른 놈들은 모두 날 따르라.
짤막하게 내뱉은 게덴하이드는 몸을 날렸다. 진용을 정비한 리치들이 일제히 뒤를 따랐다.
놈을 어떻게 처치한다?
알카리스를 내려놓은 리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는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인간이었고 놈을 처치하는 방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방법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정하고 손을 들었다.
아이스 브링거로 꽁꽁 얼린 뒤 에어 블레스트로 산산이 박살내버려야겠군. 그래야만 시체 썩는 냄새가 잘 퍼질 테니 말이야.
말을 마친 리치는 지체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서둘러 명령을 완수하고 접전에 참가할 생각이었으므로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그의 마법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림자에 의해 캐스팅이 잠시 중지되었다.
너, 너는?
나타난 자는 자신과 동일한 리치였다. 다만 평소에 리치들 사이에서 경원되고 있는 자라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리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같은 가디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게덴하이드가 정말 끔찍이도 싫어하는 리치였다. 바로 데이몬이라는 이름의 리치.
이놈의 처리는 내가 맡지.
나타난 데이몬은 서슴없이 알카리스의 머리통을 쥐었다. 그것을 보던 리치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그가 알기로 상대는 결코 인간을 죽이려들지 않는 특이한 리치였다. 인간 침입자들과 싸움이 벌어지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접전을 회피했고 그가 맡은 경비구역에 침입한 인간들은 단 하나도 죽여 없애지 않았다. 물론 경비망이 뚫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로 상대는 리치들 사이에서 극도로 꺼리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서 인간을 처리하겠다니…….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 없다. 이미 게덴하이드님께서 이놈의 처리를 나에게 하명하셨다.
이해해주면 안되겠나? 익히 알다시피 게덴하이드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낫지 않았거든. 놈의 생명력을 좀 흡수했으면 하는데…….
하지만 리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는 게덴하이드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을 내놓지 않으면 널 공격할 수밖에 없다.
수틀리면 둘 다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릴 심산으로 리치는 양손에 한껏 마나를 끌어 모았다. 어쩔 수 없다 여긴 때문인지 상대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원 녀석. 이렇게 까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내 눈을 보아라.
헉.
짤막한 경악성과 함께 리치의 동공이 한껏 팽창했다. 상대의 눈구멍에서 이글거리는 사이한 안광을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리치의 안광이 점차 풀리고 있었다.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넌 나의 종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리치의 손에서 아이스 브링거가 서서히 소멸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은 상대가 완전히 걸려들었음을 직감했다.
넌 날 본 일이 없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인간 역시 네 손에 죽어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넌 이 인간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저, 저는 아이스 브링거로 인간을 꽁꽁 얼린 뒤 파이어 스톰으로 송두리째 태워버렸습니다. 인간이 존재했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좋다.
기대했던 대답을 얻자 데이몬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넌 게덴하이드에게로 돌아가라. 그리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고하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리치는 멍한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완전히 홀린 듯 머리통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데이몬의 눈을 보지 못하게 되자 리치의 눈빛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데이몬이 일침을 놓았다.
서둘러라. 게덴하이드를 도와 침입자들을 격퇴해야지.
그, 그렇지.
리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겠다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 뒤에서는 데이몬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배교의 수준 높은 사술인 귀령제심안에 당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게덴하이드까지 제압할 자신이 없지만 네놈 정도면 식후 운동거리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알카리스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침이 입가로 흐르다 못해 데이몬의 소맷자락까지 적시고 있었다. 데이몬의 눈에 아쉽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소드 마스터가 죽다니 아깝군. 할 수 없지. 이 녀석이라도 잡아다가 시도를 해 보는 수밖에…….
빠르게 손을 놀려 알카리스의 상태를 짚어본 데이몬의 얼굴에 뭔가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천행인가? 이놈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야. 뇌의 파장이 고르지 못한 것을 봐서 애초부터 정박아였던 것 같은데 차라리 잘 되었군. 넋이 나간 놈이라면 대법이 성공할 가능성이 비교적 높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몸을 날렸다. 게덴하이드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놈을 꽁꽁 숨겨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목적한 소드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에겐 강한 힘을 가진 육신보다는 넋이 나간 육신이 더욱 반가웠다.
알카리스를 들쳐업고 달려간 데이몬이 도착한 곳은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이었다. 기암괴석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봐서 외부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장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데이몬에게 있어 극히 소중한 장소 중 하나였다.
그는 이곳에서 사술을 마법으로 변환시키는 방대한 작업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바위가 켜켜이 쌓인 곳에 도착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인을 맺었다.
쿠르르르.
굉음과 함께 바위가 돌아가며 시커먼 입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알카리스를 들쳐업은 상태로 데이몬의 모습은 곧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바위는 원상태로 돌아가며 입구를 차단했다.
밀실 내부는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사방의 바위벽들이 칼로 잘려 나간 듯 반듯하게 깎여 있었고 한쪽에는 자그마한 서가가 놓여 있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 수기로 작성된 것들이었다. 데이몬이 마법과 사술을 집대성해서 완성해놓은 이론들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는 것이다.
석실 가운데에는 큰 제단이 놓여 있었다. 마법과 사술을 연성하는데 사용한 듯 제단에는 데이몬의 손때가 시커멓게 묻어 있었다.
으차.
데이몬은 그 위에다 알카리스의 몸을 내려놓았다.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양 알카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알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정말 수려한 얼굴이었다. 여자라면 아름답다고 묘사할 수 있는 외모에 마음이 떨릴 만도 하건만 불행히도 데이몬은 남자였다. 그것도 잘 생긴 사람을 극도로 미워하는 추남 말이다.
녀석. 반반하게는 생겼군. 다 부질없는 것이지만 말이야.
고개를 흔든 데이몬은 한쪽 석벽을 열어 젖혔다. 그 속에는 사술의 시전에 쓰이는 시약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먼저 놈을 가사상태로 빠뜨려야겠군. 시술 과정에서 만약 놈이 죽는다면 칠종단금술 때문에 나 역시 살아남지 못할 터이니…….
자신을 금제하고 있던 칠종단금술을 떠올리며 데이몬은 나직이 뇌까렸다. 생각해보면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리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이 살생을 할 수 없는 자신이 말이다. 그렇다면 칠종단금술은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라 봐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금제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멍하니 뜨여진 알카리스의 눈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미안하지만 네 몸을 내가 차지해야겠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 별달리 여한은 없을 테지. 아마 바보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보다 나에게 몸을 넘겨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미 알카리스는 극심한 충격으로 인해 혼백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쉽게 말하자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가만 놔두면 그대로 죽어버릴 운명의…….
몇 가지 재료를 골라낸 데이몬은 그것을 섞어 시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법이 완전히 준비될 때까지 놈의 몸을 보존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물론 인간 하나를 가사상태로 만드는 것 정도야 데이몬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시약이 완성되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가져다가 알카리스의 입에 흘려 넣었다. 목젖을 살짝 잡아당기자 시약은 알카리스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꾸르르르.
그것을 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원래대로라면 내공을 동원해서 타혈법을 시전해야 했지만 지금 데이몬에게 끌어올릴 내공이 있을 턱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주위에서 끌어 모은 마나로 하여금 내공을 대치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데이몬이 발견해놓은 사술에 대한 해법이었다.
마나가 어느 정도 모이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그것을 재배열했다. 그의 양손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섬광의 정체는 과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매직 미사일이었다. 데이몬은 이것을 이용해서 알카리스의 혈도를 타동할 생각인 것이다.
퍼퍼퍽.
석실 내부를 뒤덮은 매직 미사일들은 데이몬의 통제에 따라 순차적으로 알카리스의 전신을 두드렸다. 힘과 정확도, 모든 면에서 빗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손으로 혈도를 타동하는 것보다 더 수월해 보였다. 이미 데이몬은 오로지 매직 미사일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신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자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