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조금 뒤에도 네가 그 태도를 유지하는지 보겠다. 성녀를 내려놓아라.
베르키스의 말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데이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그,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물론 계획대로 해야겠지? 난 그녀를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 님의 레어로 데리고 갈 것이다. 크라누스님께서 그녀를 돌로 만드실 테고……. 그녀는 아마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영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안 돼
데이몬은 비통하게 고함을 질렀다. 다프네가 돌이 되는 것을 추호도 좌시할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등을 통해 다프네가 가늘게 몸을 떠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놓아다오. 너희들에게 결코 해가 되지 않도록 보살피겠다. 이미 난 너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종족에게 전혀 애정이 없다. 심산유곡에 숨어들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오지 않을 테니 제발…….
베르키스의 얼굴에 배인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그는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사랑 때문에 종족을 배신한다……. 재미있는 현상이군.
그녀는 나에게 생명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원한다면 내가 대신 죽어주겠다. 그러니 제발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다오.
데이몬의 애원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뜻인가?
그렇다. 설사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겨도 좋다. 이미 나는 고통에는 단련될 대로 단련된 몸이다. 결코 네 흥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데이몬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베르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데이몬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고, 고맙다.
하지만 이어진 베르키스의 말에 데이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다시 사라져버렸다.
고마울 것은 없어. 성녀를 돌로 만드는 것은 예정된 일이니까 말이야. 그녀의 운명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말을 곡해하지 말도록……. 정확히 따지자면 널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 레어로 데리고 가서 차근차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나의 새로운 계획이고,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뜻이니까.
이런 비열한…….
몸을 부들부들 떨던 데이몬이 별안간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어떻게 해서든 다프네를 구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절대 명령 목표제한 석화!(Power word Limitted ovject harden into stone)
제법 긴 스펠이었지만 마법은 순식간에 구현되었다. 달아나려던 데이몬의 몸이 그 자리에 고정되어버렸다. 안간힘을 썼지만 다리는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데이몬의 얼굴에 식은 땀이 연신 흘러내렸다.
이익.
젖먹던 힘까지 다해 용을 써 봤지만 허사였다. 다리는 팔과 마찬가지로 그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숙여본 데이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의 다리가 어느새 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확히 허리어림 아래에서부터였다.
어, 어떻게?
너무 힘을 쓰지 말도록……. 그러다 부서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넌 이제부터 내 장난감이란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명심하도록…….
끄아아.
데이몬의 입에서 결국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힘이 없어 한 여자를 지키지 못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말이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아무 동요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성녀 역시 그 방법으로 돌을 만들 것이다. 물론 크라누스님께서 직접 시전하실 것이지만 말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힐끗 눈짓을 했다. 그러자 오우거 몇 마리가 데이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등에 업혀 있는 다프네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콰우우우.
오우거의 손길을 느끼자 데이몬은 발악을 했다. 하지만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터라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는 결국 눈 버젓이 뜨고 다프네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데이몬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오우거의 굳센 팔에 안긴 채 연신 발버둥을 치며 말이다.
아, 아저씨.
다프네.
둘의 음성은 황량한 노스우드 평원에 널리 메아리쳐졌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서도 미치지 않았다. 거의 반미치광이가 된 데이몬의 귀에 베르키스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래도 넌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만약 너희들의 임무가 성공했다면 성녀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뭐, 뭐라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귀가 번쩍 트인 데이몬이었다.
주신 베르하젤 님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일. 그것은 하등한 인간에게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입는 일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군. 베르하젤 님께 청원을 올리고 난 뒤 성녀는 그 즉시 생명이 다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실은 아마도 인간들 대다수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 거짓말…….
치를 떨며 연신 고개를 뒤흔드는 데이몬을 보자 베르키스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데이몬의 반응이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작별 인사나 해 두도록. 너희 둘은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 역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다프네의 슬픈 눈빛을 보자 데이몬의 가슴은 마치 생으로 도려내어지는 듯 아려왔다.
다, 다프네…….
이렇게 헤어지게 되는 군요. 아저씨.
이미 체념한 듯 다프네는 처연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꽃잎 같은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거렸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입술이었다.
아저씨랑 꼭 함께 살고 싶었는데…….
그 말을 남기고 다프네는 멀어져갔다. 오우거의 팔에 끼인 채 말이다. 그것을 보자 데이몬의 눈꼬리가 찢어지며 핏물이 점점이 배어 나왔다.
다프네. 으아아아아.
하지만 그의 절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베르키스가 손을 들자 데이몬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상당히 시끄러운 녀석이군. 과연 참을성이 얼마나 되는지 기대해 보지.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가디언들은 이곳을 떠날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이미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사실 그들은 본체로 현신한 상태에서 이리로 날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이곳으로 공간이동을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살아남은 오우거와 트롤들이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그들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는 경험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반면 할 일을 잃은 스톤 골렘들은 순차적으로 원래의 형태인 돌로 돌아가는 상태였다.
다프네를 든 오우거가 화이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베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누스님께 잘 호송하도록 하라. 결코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화이트 드래곤은 곧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을 필두로 드래곤들이 여기저기서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시신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평원을 다시 한 번 쓸어본 베르키스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뒷일은 오크들에게 맡기고 편안히 수면기에 들어가야겠군. 오백 년 후에 있을 아르카디아 정벌에 대비하려면 충분히 수면을 취해야 할 테니…….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에 데이몬의 모습이 들어왔다. 리치 둘이 늘어진 그의 몸을 들쳐 메고 다가오고 있었다.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저 녀석을 먼저 손보는 것이 좋겠군. 내 정신계 마법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묵묵히 뇌까리던 베르키스의 몸이 붉게 물들며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쓰쓰쓰.
순식간에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한 베르키스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폴리모프를 끝내자 리치들이 다급하게 베르키스의 등에 탑승했다.
의식을 잃은 데이몬과 함께 말이다. 리치들을 실은 베르키스는 곧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곤 자신의 레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노스우드 평원은 다시 적막감 속에 젖어 들어갔다. 주인을 잃은 투구와 장검이 사방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놓인 용사들의 시신을 달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최후까지 분전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며 말이다.
으아아악.
데이몬의 입에선 그칠 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오우거가 양손으로 그의 몸을 움켜쥐고 세차게 쥐어짜고 있는 상황이었다. 칠공에서 피가 마치 분수처럼 솟구쳤다. 심지어 땀구멍을 통해서도 피가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 그의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얼마 정도인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의식이 멀쩡한 것이 정말 원망스럽기만 했던 데이몬이었다. 고통이 그 정도로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흐으으.
기진맥진한 나머지 비명소리는 점차 신음소리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신을 통해 가해지는 고통은 여전했다. 그 정도 고통을 겪었다면 감각이 무뎌질 만도 했지만 신경을 통해 전해지는 통증은 조금도 가실 줄 몰랐다. 아무래도 모종의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우거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 의해 전신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경험.
데이몬은 벌써 한 시간 가량이나 오우거에게 쥐어짜지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처절한 고통으로도 데이몬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존재에게 말이다.
크, 크으. 네놈을…… 컥.
오우거의 손아귀가 또다시 조여들자 숨이 턱 막혀버린 데이몬은 연신 도리질을 쳤다.
전신의 세포들이 숨을 쉴 수 없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콱 눌려진 허파는 도저히 공기를 빨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점차 납빛으로 변해갔다. 조금만 더 지체된다면 그는 필시 생을 다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의 숨이 끊어지기 바로 직전 차가운 일성이 지하 광장에 메아리쳐졌다.
그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이몬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오우거가 급작스럽게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머리가 둘 달린 흉포한 트윈 헤드 오우거가 발치에 나동그라진 데이몬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끄으으.
데이몬은 눈을 까뒤집은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풀려나긴 했지만 오랜 시간 눌린 나머지 허파가 공기를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허파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장기들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막 숨이 넘어가려 하는 데이몬.
하지만 그가 절명하기 전에 눈부신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이름하여 힐링(healling) 마법이었다. 생물을 치료해서 되살아나게 하는 고급 마법이긴 하지만 데이몬에겐 정말 가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사라락.
몸을 뒤덮은 휘황찬란한 빛 속에서 데이몬의 몸은 점차 치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산이 으스러진 전신의 뼈마디가 제자리에 가서 붙고 터진 혈관이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파열된 신체 장기 역시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고통 역시 잦아들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얼굴은 일그러진 그대로였다. 또다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그 냉랭한 음성이 또다시 귓전을 맴돌자 데이몬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치료가 끝났으니 또다시 시작해야겠지?
그와 동시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르.
데이몬은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공포감이 역력히 배어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입을 통해 나오는 음성은 판이하게 달랐다.
이번에는 스톤 골렘인가?
잘 아는군. 오우거보단 손속이 조금 매울 거야.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한 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얼마나 매운지 한 번 기대해 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충격이 쾅하고 뒤통수를 강타했다. 데이몬의 몸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냅다 쳐 박혔다.
끄으으.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일어서려 버둥거리던 데이몬의 얼굴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스톤 골렘의 주먹이었다.
퍼퍼퍽.
부러져나간 이빨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데이몬은 안면이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스러진 코와 입을 통해 선혈이 낭자하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지능이 없는 스톤 골렘은 조금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으지직.
스톤 골렘에게 밟힌 데이몬의 왼쪽 다리가 그대로 짓뭉개졌다. 부릅뜬 데이몬의 눈에 핏발이 섰다.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통증은 이미 그가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
콰직. 콰직.
계속해서 발을 짓찧고 있는 스톤 골렘의 아래에서 데이몬의 몸은 말 그대로 곤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머리와 가슴 등의 치명적인 부위는 제외하고 말이다. 척추가 부러져나가고 전신의 뼈가 아예 가루가 되어갔다. 마침내 데이몬이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자 예외 없이 예의 그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데이몬. 근육이 모조리 결딴난 터라 그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듯 보이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찬란한 빛이 그의 몸을 뒤덮자 치유의 과정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점점 치료되고 있는 데이몬의 모습을 지켜보던 음성의 주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늦었군. 하마터면 부활(Resurrection.)을 써야 할 뻔했으니 말이야.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자는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그의 앞에는 데이몬이 마치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치료가 완전히 끝났는지 그의 몸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말라붙은 팔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아직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깨울 마음이 없는 듯 베르키스는 섣불리 마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인간은 그가 처음 겪어보는 훌륭한 실험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장난감을 성급하게 잃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베르키스는 잠정적으로 실험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녀석은 지금까지 실험해 본 인간들 중에서 참을성과 의지가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군. 두 번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우니 오늘은 이만 아껴둬야겠지?
이미 베르키스는 데이몬을 대상으로 일 주일 동안이나 혹독한 고문을 퍼부었다. 그의 마법 실력이라면 대상이 숨만 멎지 않는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치료를 할 수 있었으므로 고문은 추호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고 진행되었다. 빈사상태에까지 고문당했다가 치료되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데이몬이 보인 반응은 베르키스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데이몬은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력을 보였던 것이다.
베르키스는 지금껏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결과를 떠올려보았다.
이럴 경우 통상적인 인간들은 하루까지는 살려달라는 애원을 한다. 하지만 이틀을 넘어가면 변하지. 도리어 죽여달라고 말이야. 사흘이 넘어가면 십중팔구는 미쳐버린다. 하지만 이놈은 달라. 꼬박 일주일 동안을 고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치기는커녕 나에게 변함 없이 적개심을 보이고 있지.
레어로 잡혀온 뒤 데이몬은 우선 베르키스 휘하의 고블린 고문술사들에게 맡겨졌다.
고블린 고문술사(拷問術士)들. 베르키스의 휘하에서 전문적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만을 연구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설사 죽은 시체의 입이라도 열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문실력은 단 한 사람 데이몬에게 만은 통하지 않았다.
손톱 밑에 못을 박고 피부를 벗긴 뒤 소금을 뿌려도 데이몬은 신음소리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종류의 고문을 죄다 가했어도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고통에 만성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 혹독한 분근착골도 여러 번 겪어보았고, 칠종단금술에 의한 고통마저 당해본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몬의 참을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도리어 고문하는 고블린들이 먼저 지쳐 두 손을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본 베르키스는 방법을 바꿨다.
엄청난 힘을 가진 중형 몬스터와 스톤 골렘으로 하여금 가장 원초적인 방법, 즉 무차별적인 구타를 통해 데이몬의 기를 꺾어버리려 한 것이다.
고문을 위해 특히 힘이 좋은 트윈 헤드 오우거가 넷이나 선발되었다. 거대한 스톤 골렘 또한 새로이 만들어졌다. 가디언 전원이 리치로 채워져 있던 터라 베르키스는 마법을 써서 고문 전용 스톤 골렘을 새로 만들어내야 했다.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서 베르키스는 이틀만에 데이몬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오로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뿐이었다. 놈은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치지도 않는 데다 정신만 차리면 자신을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정말 호기심이 도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베르키스는 수면에도 들어가지 않고 거듭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물리적인 고문은 그만 끝내야겠군. 이번에는 정신 마법을 한 번 사용해 볼까? 놈이 과연 얼마나 견딜지 궁금하군. 일전에 실험해 본 인간들은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미쳐 버렸는데 말이야.
베르키스가 손짓을 하자 오우거들이 다가와 데이몬을 집어들었다. 그들은 곧 데이몬을 베르키스의 정신마법 실험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이곳은…….
정신이 든 데이몬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엔 어리둥절한 빛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만 해도 오우거와 스톤 골렘에 의해 전신이 자근자근 다져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판이하게 다른 곳으로 와 버린 것이다. 사방은 온통 흰 안개가 가득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이몬은 우선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몸은 이미 깨끗하게 치료가 끝나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또다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개자식.
베르키스에 대한 분노가 물밀 듯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베르키스는 자신에게서 다프네와 스승 도일을 빼앗아간 존재였다.
이미 데이몬은 돌이 되어버린 다프네의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바 있었다. 데이몬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할 작정으로 베르키스가 의도적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그곳의 영상을 투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데이몬은 하늘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에 슬픈 표정이 가득한 상태 그대로 다프네는 돌이 되어 있었다. 크라누스의 레어 한 귀퉁이에서 말이다. 기억을 떠올린 데이몬의 얼굴에 점차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드래곤이란 종족을 향해 발산하는 순수한 증오심이었다.
네놈들에게 응징을 할 수 있다면 마왕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이 급격히 뜨여졌다.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노려보는 한 존재를 쳐다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데이몬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바로 그를 배신한 배교 총사 사준환이었던 것이다. 사준환은 지금 두 눈 가득 비웃음을 담고 데이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말을 하다 말고 데이몬은 냅다 몸을 날렸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행동이었다. 지금 데이몬의 뇌리에는 오로지 상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준환의 면전에 접근한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의 목젖을 거머쥐려 했다. 하지만 장작개비처럼 말라비틀어진 팔은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런.
그때서야 힘이 없음을 절감한 데이몬은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렸다.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전해졌다.
크윽.
데이몬은 허공에 붕 떠서 사정없이 바닥에 구겨졌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귓전을 통해 이죽거리는 사준환의 음성이 전해졌다.
완전히 폐물이 되었구려. 독고 교주. 아마도 나에 대한 복수는 물 건너간 일일 듯 하오이다.
데이몬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이놈! 어디서 아가리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턱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누군가가 발길질로 그의 얼굴을 차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무엄한 놈. 감히 교주님에게…….
부서진 이빨과 핏물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 데이몬의 눈빛이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사준환의 곁에는 어느새 그의 심복들이 다수 모여든 채 데이몬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적미당주와 음명당주도 끼여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너희들은 내 손에 죽었는데…….
죽일 놈. 눈 버젓이 뜨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사준환과 그의 수하들은 곧 데이몬에게 달려들었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데이몬에게 무자비한 린치가 가해졌다.
퍽퍽퍽
내공이 깃든 주먹과 발이 날아듬에 따라 데이몬의 몸은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데이몬의 의식은 무자비한 구타 속에서 도리어 냉철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허상이로군. 사준환 놈이 이곳에 나타날 턱이 없는 데다, 내 손에 죽은 놈들이 살아 돌아올 리가 없으니……. 또다시 드래곤 놈의 소행인가?'
그는 억지로 전신에 가해지는 통증을 잊으려 애썼다. 상황을 봐서 이것은 드래곤이 정신마법을 써서 연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술에 높은 조예가 있는 데이몬은 금세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무념 무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대비책이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가 허상이었고 그 모든 것에 반응을 한다면 자신의 정신과 자아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파괴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가급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생생했고 사준환에 대한 증오심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솟구쳐 올랐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가증스런 드래곤 놈들에게 복수를 하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각도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지만 칠종단금술에 단련된 그의 의지력이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감당해야 하는 시련은 끝이 없었다.
사준환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쌍수마존 위청이 살기를 띤 채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데이몬의 손에 의해 이승을 하직한 마교 장로 위청 말이다.
이노옴! 감히 나에게 암습을 가했겠다?
위청의 성명절기인 장공이 데이몬의 가슴팎을 단숨에 으스러뜨렸다. 웅혼한 그의 내력이 전신 혈맥을 헤집고 다니는 통증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마냥 참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복수를 하려는 일념으로 그는 말 그대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어린 시절 앙숙이었던 모용진까지 나타나 침을 뱉으며 발길질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손에 당한 오우거와 트롤들마저 나타나 몸을 짓밟았다. 그의 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난자되었고 짓밟혔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모든 과정을 견뎌냈다. 복수의 일념 하나로 모든 과정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디기 힘든 상황이 전혀 없진 않았으니…….
성아야. 어찌 네가 날…….
가슴이 으스러진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난 자는 바로 소림성승 혜정이었다. 비록 자신에게 칠종단금술이란 금제를 가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이후 유일하게 데이몬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준 자였다. 그런 혜정이 나타나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는 데에는 데이몬도 배겨날 수 없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극도의 격정으로 일그러졌다.
아, 아닙니다. 제겐 결코 성승을 해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거짓말 말아라. 넌 이미 나에게 뿌리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느냐?
일그러진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다가오는 소림성승. 데이몬은 하마터면 베르키스의 술수에 말려들 뻔했다. 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의 정신이 파괴되는 첩경이었으므로. 다행히 위기를 넘긴 것은 그가 이미 소림성승에 대해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덕택이었다.
'성승께서는 나에게 결코 이럴 분이 아니다.'
소림성승에 대한 철저한 신뢰로 인해 데이몬은 마침내 심마(心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림성승의 인품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미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고난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
데이몬. 날 구해다오. 나, 나는 너무나 괴롭단다.
신체의 반이 타버린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 도일.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데이몬에게 절실히 도움을 청했다. 마계의 악마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도일의 남은 육신을 파먹고 있는 상황. 하지만 데이몬은 냉랭하게 그를 떨쳐버렸다.
너는 스승님이 아니다. 스승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 아니다.
데이몬이 부정하자 도일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존재로 인해 데이몬의 인내심은 한계에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날 사랑한다고 했죠? 그런데 왜 날 돌이 되게 내버려뒀나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서 데이몬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목 아래 부분이 돌이 되어 있는 상태의 다프네였다. 한없이 맑았던 눈빛은 간 곳 없이 그녀의 얼굴에는 오로지 표독함만이 가득했다. 그녀를 보자 데이몬의 얼굴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져버렸다.
미, 미안하다. 다프네.
그렇게 능력이 없었나요? 그러고도 날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나 보죠?
데이몬의 가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자신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질시 어린 시선을 퍼부어도 단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 사람마저 지금 자신을 냉대하고 있다니…….
다, 다프네 너마저…….
흥! 벌레만도 못한 사람.
냉랭한 코웃음소리와 함께 다프네가 고개를 돌렸다. 맥이 빠진 나머지 데이몬은 그 자리에 털썩 허물어졌다. 도무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데이몬이었다.
'차라리 죽자. 그것이 나에게 도리어 편할 테니…….'
점점 마음을 굳혀 가는 데이몬의 앞에 또다시 다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면면을 따져보아 하나도 가볍게 생각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데이몬의 입이 벌어지며 힘없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종리령. 너, 너희들은 수호마왕군?
복수를 다짐했던 과거의 수하들이 나타나 다프네의 곁에 죽 늘어섰다. 그 중에는 오래 전 명을 달리했던 아버지, 독고무기도 끼여 있었다. 원망 어린 시선들이 데이몬을 향해 집중되었다. 한 마디 말도 없었지만 시선들에는 무수한 질책이 섞여 있었다.
'아들아. 왜 나의 복수를 해 주지 못했느냐?'
'정말 실망스럽소. 총수. 우리의 복수마저 해 주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었소.'
시선을 견디다 못해 데이몬은 귀를 막아버렸다. 무능했던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차라리 지옥인들 이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을 듯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치지 않는 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데이몬은 귀를 틀어막은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차라리 날 그냥 내버려 둬. 복수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제발…….
뇌리가 하얗게 비어 가는 것을 느끼며 데이몬은 의식을 잃어갔다. 두 번 다시 깨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생을 마감했으면.'
하지만 그는 결코 미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질적인 기운 때문이었다.
정말 연구해 볼만한 물건이야.
연신 꿈틀거리던 데이몬의 몸이 축 늘어지자 터져 나온 일성이었다. 데이몬을 쳐다보던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배어있었다. 맹세코 그는 저토록 의지가 강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단 한시간도 견디기 어려운 정신계 마법을 데이몬은 장장 일주일 동안을 버텨냈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신력이었다.
일주일이라……. 설사 드래곤이라 해도 그 정도를 버틸 수 없을 텐데 말이야.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시간이 있다면 저 인간이 과연 얼마나 버티는지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수면기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이미 다른 드래곤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500년 간의 깊은 잠에 들어간 상태. 뛰어난 마법 실력 탓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지만 아무리 베르키스라 해도 더 이상은 힘들어 보였다. 편법으로는 결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법. 베르키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아쉽군. 500년 동안 수면을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일주일 동안 데이몬에게 가해진 정신계 마법. 평범한 인간이라면 단 한시간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위력이 가공한 마법이었다. 인간의 정서를 극도로 피폐하게 만드는, 그리하여 정신공황의 상태에까지 몰고 가는 공포의 마법을 저 인간은 장장 일주일이나 버텨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뇌리를 장악하고 있는 이종의 술법 때문이란 사실을 베르키스는 결코 알 수 없었다. 평상시에는 살심을 억제하지만 정신이 피폐해질 경우 칠종단금술이 전력을 다해 시술자를 보호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인내심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베르키스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다소 낯익은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쏘아보고 있는 한 명의 리치.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데이몬에 의해 생명력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니 적대감을 보일 만도 했다. 잠시 고개를 뒤흔든 게덴하이드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베르키스 님. 놈은 정말 위험한 존재입니다. 차라리 후환을 없애기 위해 바로 처치해 버리심이 옳은 판단인 듯 합니다.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3써클의 유저인 데이몬에게 본체가 소멸 당하는 경험을 겪었던 터라 데이몬을 쳐다보는 게덴하이드의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다. 벌써 100명이 넘는 인간 포로들에게서 생명력을 빨아들였지만 그의 몸은 아직까지 정상이 아니었다.
때문에 데이몬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극히 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애당초 휘하 가디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성품이 아니었다.
게덴하이드. 판단은 전적으로 내가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냉랭해진 목소리에 게덴하이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주제넘게…….
게덴하이드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표정이 일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 의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지.
그의 반응에 베르키스는 마음이 다소 풀렸다. 만약 명령을 내린다면 게덴하이드는 설사 대상이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일지라도 서슴없이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베르키스는 단정적으로 내뱉었다.
놈을 리치로 만들어서 나의 가디언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백 년 동안 나의 레어를 지키게 할 것이다. 비록 놈의 의지력이 가상하긴 하나 나의 세뇌마법을 감당하진 못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베르키스 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게덴하이드의 지극한 태도에 유쾌해진 베르키스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잠시 후 세뇌마법을 시술할 것이다. 너는 이놈을 리치로 만들기 위한 과정에 착수하라. 수면기에 들어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직각으로 꺾은 뒤 몸을 날리는 게덴하이드를 보며 베르키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세뇌마법을 시술한다면 놈 역시 게덴하이드와 같은 태도를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로 하여금 오백 년의 기간동안 자신의 레어를 지키게 한 다음 유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실험은 언제 보아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십 년 이내에 트루베니아는 오크 족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다음은 아르카디아 차례인가?
이미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은 수뇌부를 깡그리 잃어버린 상황. 몇 몇 군주들이 살아있긴 하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르키스의 생각에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문제였다. 또한 천년 동안의 충성을 맹세한 터라 오크 족이 아르카디아 정벌에도 역시 혁혁한 역할을 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백 년 후 또 다시 유희가 시작되겠군. 심심하진 않겠어.
베르키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뇌마법의 캐스팅이 완료된 상황. 마법이 실행되면 데이몬이란 인간의 태도는 판이하게 바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을 섬기는 충실한 종복으로 말이다. 베르키스는 그 사실을 결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우선 대상의 몸 상태를 살폈다. 베르키스의 눈썹이 찡긋했다.
녀석, 헤이스트를 남발하고 몸을 함부로 굴린 때문에 생명력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군. 리치로 만들지 않는다면 고작 6개월도 버티지 못했을 터였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베르키스의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솟아올랐다.
쓰쓰쓰.
광휘는 순식간에 데이몬의 머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옆에서는 게덴하이드가 데이몬을 리치로 만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두고 있었다. 베르키스는 의식을 잃은 데이몬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서도 광휘는 계속해서 데이몬의 머리로 빨려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오백 년 후에도 날 실망시키지 않길 바란다.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모종의 기대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마법의 효력이 다했는지 의식이 가물가물해져왔다. 잠시라도 빨리 수면기에 접어들기 위한 일념으로 베르키스의 마음이 급해졌다. 다행히 세뇌의 과정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졸립군.
베르키스는 힘을 내어 마나를 재배열했다.
베르키스의 예상은 결국 적중되었다. 로젠가르트력 247년. 트루베니아 대륙은 마침내 오크 족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베르키스를 포함한 드래곤들이 모조리 수면기에 들어간 지 단 5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펠드리안이 함락되는 사건을 마지막으로 트루베니아는 한 치도 남김없이 오크 족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남은 군주들을 비롯한 병사들이 최후까지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총사령관을 위시한 정예 전부가 노스우드에 묻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배겨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예외 없이 죽거나 오크 족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일부 인간들은 위험을 감수한 채 조각배에 몸을 싣고 아르카디아로 향했다. 살기 위해선 오로지 그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뜻을 이룬 인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비록 크라누스의 방어벽이 효력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두 대륙 사이의 바닷길은 결코 만만한 항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배들은 백여 일에 이르는 오랜 항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트루베니아 대륙은 이제 오크의 것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것은 오백 년의 세월 동안 변함 없이 지속될 것이 분명했다.
햇살이 무척 따사롭게 내려 쬐는 날이었다. 때는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 겨울을 보낸 뱀과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 보금자리에서 여기저기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만물의 생동감이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산등성이에 몸을 숨긴 채 먼 산을 쳐다보고 있는 몇 명의 존재들에겐 봄의 생동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한 채 건너편 산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 그들은 이미 트루베니아의 주인 자리에서 밀려난 종족들이었다. 오크 족의 보호 아래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명맥을 이어나가는 인간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무기력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자신감이 얼굴에서 역력히 배어나고 있었다.
수는 정확히 네 명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빙글 돌렸다.
과연 우리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말을 건 자는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푸른 색 눈동자가 금발 머리와 어우러져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몸에는 무척 견고해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두께가 얇아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 갑옷이었다. 갑옷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과 허리에 찬 검집을 보니 트루베니아의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에게 이미 무기의 소지는 오크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었던 것이다.
소수의 저항군 빼고는 말이다.
걱정하지 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니까……. 거기에다 우리에겐 강력한 조력자가 있잖아?
말을 받은 이 역시 스물 남짓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그곳에는 그들 외에도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아가씨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마법사로 보이는 이도 있었다. 서른 정도로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마법사였지만 그들은 서로 말을 놓고 있었다.
이봐 페트릭. 감히 드래곤의 레어로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네놈의 담량도 정말 보통이 아니야.
마법사의 감탄에 처음에 말을 꺼냈던 금발머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오우거 따윌 잡아가 봐야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 것은 요원하다고 봐야 하지.
최근 들어 팔라딘 자격심사가 무척 엄격해졌단 말이다. 오우거는 운반하기도 힘들뿐더러 흔해빠졌기 때문에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오우거보다 더욱 강력한 몬스터를 잡아가야 한단 말이지. 만약 드래곤 레어의 가디언을 잡아간다면 우리 모두는 틀림없이 뜻을 이룰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하지만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
팔라딘(Paladin)이란 말을 듣자 그들의 눈에는 열망의 빛이 일렁였다.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 일이 그들에겐 그만큼이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실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자들이었다.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크로센의 수련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영웅 크로센 대제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르카디아에 세운 제국.
크로센 대제가 트루베니아, 아르카디아 두 대륙에 끼친 영향은 정말 크다 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기사들에게 소드 마스터가 되는 길을 크게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과거엔 그 찾아보기 힘들었던 소드 마스터를 요새는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크로센 대제의 비법대로 수련에 몰두한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거의 틀림없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따라서 아르카디아에는 나름대로의 서열이 따로 정해졌다. 지금까지는 검기(劍氣)와 검강(劍岡)중 하나만이라도 시전할 수 있다면 소드 마스터로 칭해졌지만 이제부터는 검강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소드 마스터로 칭해지게 된 것이다. 검기를 더욱 더 응축시켜 검에서 일정 길이 이상 뽑아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들, 즉 검강을 전개할 수 있는 자만이 소드 마스터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 이외의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들에게는 따로 팔라딘이란 명칭이 주어졌다.
팔라딘(Paladin). 한 때는 교회에 소속된 성기사를 지칭하는 말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원으로 따지자면 원래는 실력이 뛰어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수준 높은 기사들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팔라딘이란 칭호가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새로이 정립되게 된 과정은 바로 이러했다.
지금까지의 소드 마스터 중 수준이 낮은 자는 팔라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기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햐! 팔라딘이 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실력이 있어도 쉽사리 될 수 없는 것이 팔라딘인데 말이야.
오크 족의 손에 의해 패망되어버린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시간이 갈수록 힘이 강해졌다. 혈통과 신분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에서는 오로지 실력만이 제일이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기사들이 작위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곳에 있는 젊은이들 역시 그런 기사들 중 몇이었다. 그들은 필생의 소원이던 팔라딘 자격 취득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트루베니아엔 더 이상 인간이 살지 않는 거야? 레이몬드?
패트릭의 말에 레이몬드라고 불린 마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아.
사실 그는 젊은 기사들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다. 하지만 기사들과 학부 동기였기 때문에 결코 나이를 내세울 수 없는 처지였다. 오로지 수련에 시간이 걸리는 마법을 택한 것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크 족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얼마간 있다고 들었어. 그 외에 아직까지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힘이 극히 미미한 실정이지.
당연한 결과겠지? 멍청한 자들.
싸늘하게 내뱉는 기사들의 얼굴엔 예외 없이 경멸감이 서려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온 때문에 그들이 트루베니아 인에게 느낀 감정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5백년 전의 비사에 대해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패트릭은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연신 씨근거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인간 전체가 멸망할 만한 위기를 두 번씩이나 구원해 줬건만 끝내 은혜를 저버린 놈들이니 멸망해도 싸지. 그렇지 않아? 아드리안.
패트릭의 말에 아드리안이라 불린, 상당히 미모가 뛰어난 아가씨가 맞장구를 쳤다.
견고한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 그녀 역시 기사인 듯 싶었다.
맞아. 최후의 순간에 도움만 청했더라도 트루베니아는 멸망하지 않았을 거야.
자신들이 자초한 화이니 만큼 할 말이 없겠지?
묵묵히 듣고 있던 세 번째 인물이 끼여들었다.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같은 연배로 보이는 붉은 머리칼의 젊은 기사였다.
내가 알기로 트루베니아에서는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사가 될 수 없다고 들었어. 그러니 아드리안. 너는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그렇지 않았다면…….
젊은 기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처럼 멋진 기사의 아내가 되어 아기나 낳을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리 검술실력이 뛰어나도 여자는 기사가 될 수 없었으니 말이야.
놀고 있네. 멋진 기사? 스펜서 네가?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는군.
화가 치밀었는지 아드리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뽑아들려 했다.
대련이다. 이번에는 아예 한 쪽 팔을 잘라주마. 스펜서.
어, 어, 농담이야.
그 모습에 질린 듯 스펜서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드리안은 그들 중에서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난 수련기사였던 것이다. 지금껏 검술 대련에서 스펜서는 아드리안에게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오른 팔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갈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곤경에 빠진 스펜서를 패트릭이 구해주었다.
뭘 하는 거야? 이곳이 어디인지 벌써 잊었어. 가디언이 우글거리는 드래곤의 소굴이라고……
패트릭의 질책에 아드리안은 씨근거리며 검을 도로 꽃아 넣었다. 하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스펜서를 한 번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는 아드리안이다.
원 성질은…….
찔끔 하며 고개를 돌리던 스펜서는 페트릭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헤이우드님이 왜 이렇게 늦으시는 거지?
걱정 마. 삼촌의 실력이라면 드래곤의 손아귀에서도 능히 살아오실 분이니까 말이야.
패트릭의 두 눈에는 삼촌을 굳게 믿는다는 신뢰가 일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삼촌 헤이우드는 크로센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소드 마스터였던 것이다. 검기를 응축해서 유형의 기운으로 만드는 고도의 검술, 검강을 일으킬 수 있는 진정한 소드 마스터로써 크로센 제국을 수호하는 근위 기사단의 당당한 일원인 기사가 바로 그의 삼촌이었다.
사실 패트릭이 이런 용담호혈의 절지로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삼촌의 혁혁한 조력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특별휴가까지 내어가며 그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다.
하지만 가디언을 잡는데 그분의 조력을 기대해선 안 돼. 그분은 오로지 비상 상황에서 우릴 보호해 줄뿐이니까……. 다시 말해 팔라딘 자격을 얻을 수 있고, 없고는 오로지 우리 실력에 달린 일이야. 알겠어?
알았어.
아드리안과 스펜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우드란 든든한 보호자가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몬스터 포획은 오로지 그들의 힘으로만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본신의 실력뿐이었으므로. 그들을 보며 패트릭은 히쭉 웃었다.
하지만 삼촌은 날 무척 사랑하시지. 아마도 그분은 지금쯤 레어 근처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몬스터를 물색하고 계실 거야.
저, 정말이야?
물론. 드래곤의 레어에서 잡아왔다면 아무리 저급한 몬스터라도 대단한 평가를 받게 되지. 아마 삼촌은 우리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오우거나 트롤 정도의 가디언을 염두에 두고 계실 지도 몰라. 가능하다면 이리로 유인해 오실 수도 있고…….
아드리안과 스펜서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레이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재 4써클의 엑스퍼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마법실력만 따지자면 레이몬드의 마법 실력은 능히 그 이상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비록 마법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일행 다섯 명을 이곳까지 무리 없이 공간 이동시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래스를 올리기 위해서는 실력 외에 반드시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실력이 이 정도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이미 아르카디아에서는 그들 외에도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상황이다. 만약 악명 높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가디언을 하나 잡아간다면 그들은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수련기사들인 패트릭과 아드리안, 스펜서는 꿈에도 그리던 팔라딘 자격을 취득할 수 있을뿐더러 자신 역시 5써클의 유저로 승급할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바로 눈앞에 닥친 것이다.
만약 일만 잘 풀린다면 네 녀석에게 술 한잔 단단히 사지. 아니 술이 문제겠어? 이런 기회를 제공해 주신 네 삼촌에게도 톡톡히 사례를 해야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만약 삼촌의 조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감히 이럴 엄두를 낼 수나 있었을 것 같아? 지금까지 드래곤의 레어에서 가디언을 잡아온 경우는 거의 없어. 백년 간 통틀어 손가락에 겨우 꼽을 수 있을까 말까 하니까…….
하긴 그래.
스펜서와 아드리안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드래곤 레어에서 가디언을 포획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기사들에 의해 무수하게 행해져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아르카디아에서는 중형 몬스터의 씨가 마른 지 오래였고 몬스터 포획을 위해서는 오로지 트루베니아로 건너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레어를 경비하는 가디언은 가장 훌륭한 사냥감이었다. 물론 대가가 큰 만큼 위험도도 높았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패트릭은 스펜서를 돌아보았다.
이봐 가디언 사냥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스펜서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마 10% 남짓 될까? 많은 수련 기사들이 돌아오지 못했지. 물론 그들에겐 소드 마스터의 지원이 없었으니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말이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패트릭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레이몬드가 한창 탈출용 마법진을 손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해변에 정박 중인 그들의 배로 이어지는 공간이동 마법진이었다. 가디언을 포획한다면 그들은 즉시 배로 공간이동을 해 갈 것이다.
변변찮은 배도 보유하지 못한 오크들이 그들을 추적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므로 배까지 가기만 한다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쪼록 삼촌께서 적당한 가디언을 한 놈 유인해 오셔야 할 텐데…….
초조한 기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패트릭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지척까지 접근해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그림자 하나를 보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일이야. 패트릭.
갑자기 터져 나온 욕설에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패트릭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 일행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들이 눈치조차 못 챈 사이,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그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말이다.
상대는 리치였다. 해골에 얇은 피부가 말라붙어 있는 형상의 마물(魔物)인 리치는 일단 그 이름만으로도 악(惡)의 대명사였고 결코 약하다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에 따라 그들은 발검자세를 취하며 상대의 모습을 세세히 살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상대의 키가 무척 작다는 것이다. 그것을 봐서 리치가 되기 전에 체구가 상당히 작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뼈만 남았을 법한 등 부분이 완만한 굴곡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아 생전에 꼽추였다는 것 또한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 외에 상대는 전형적인 리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커먼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데다 드러난 얼굴에는 살이 거의 붙어있지 않았다. 또한 눈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안광이 강렬한 것을 보아 제법 강력한 리치인 것 같았다.
챵.
기사들은 서둘러 검을 뽑아들며 대응 준비를 갖췄다. 날렵한 몸놀림을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흔적이 보였다. 마법사인 레이몬드 역시 서둘러 주위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리치라면 그들이 결코 만만히 생각해선 안 될 강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의외로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 텅 빈 동공을 이리저리 돌려 일행을 둘러볼 뿐이었다.
패트릭. 시간을 좀 끌어주겠나? 놈에게 한 방 먹이려면 캐스팅할 시간이 필요해.
레이몬드의 귀엣말에 고개를 끄덕인 패트릭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웬 놈이냐?
텅 빈 리치의 동공이 패트릭에게로 옮겨졌다. 순간 패트릭은 등골이 오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치의 눈빛이 그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거기에는 아르카디아의 수련기사라는 자부심이 큰 몫을 했다.
정체를 밝혀라. 이놈. 무얼 하려 여기 왔느냐?
거듭되는 패트릭의 호통에 마침내 리치가 반응을 보였다.
애송이들이로군. 목숨을 건지려면 이곳에서 즉시 사라져라.
뜻밖의 말에 일행은 멍해졌다. 상대가 분명 리치라면 불문곡직하고 이쪽을 공격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라면 리치는 의당 그렇게 행동해야 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순순히 놓아보내려 하다니……. 하지만 목적이 있는 터라 그들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상황을 보아 상대가 드래곤의 가디언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터무니없는 소리. 우리는 반드시 네놈을 잡아가야겠다.
패트릭, 스펜서, 아드리안은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리치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몸에 걸친 대 마법 갑옷을 철석같이 믿고 말이다. 팔라딘 자격만 취득하지 못했다 뿐이지 그들은 이미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하나같이 부호의 자제들이라 대 마법 갑옷 또한 남김없이 걸치고 있었다. 질이 상당히 좋은 고급 갑옷이라 5써클 정도의 공격 마법은 충분히 차단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리치 정도의 마물을 잡아간다면 만족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네놈이 우리를 당해낼 수 있을 성싶으냐?
패트릭의 말에 리치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비웃음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법한 표정이었다.
멍청한 것들. 마음 같아서는 너희 애송이들을 일격에 저승에 보내고 싶다. 하지만 금제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나.
헛소리.
양쪽이 설전을 나누는 사이 레이몬드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는 광휘가 맺혀 있는 마법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모두 비켜.
시간을 끌고 있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줄기가 불똥을 맹렬히 튀기며 쏘아졌다.
쿠쿠쿠쿠.
공간을 가르며 퍼부어진 불줄기는 정확히 리치를 목표로 퍼부어졌다.
족히 5써클은 될 듯한 파이어 블래스트(Fire blast). 레이몬드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네놈이 비록 리치라도 이 공격에서 무사하진 못할…….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날린 파이어 블레스트가 리치 앞에 이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파파팍.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스파크만이 마법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레이몬드는 미처 마나가 재배열되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리치가 손을 한 번 휘젓자 5써클의 공격 마법 파이어 블레스트가 그대로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레이몬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려면 상대는 적어도 6써클의 엑스퍼트를 넘어서는 실력자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공격을 저토록 수월하게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순간 거센 기합성이 울려 퍼졌다.
타앗.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자 패트릭을 위시한 세 명의 기사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해 들어갔다. 그들은 방패에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를 모조리 주입한 채 리치에게로 육박해 들었다. 대 마법 주문이 각인된 방패에서는 마법 문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콰콰쾅.
정확히 세 번의 폭음이 이어지고 공격해 들어간 기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어야 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빛이 번쩍한 순간 그들은 들고 있던 대 마법 방패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또한 형언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의 가슴팍을 가격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윽. 이, 이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패트릭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슴을 싸고 있는 흉갑이 완전히 박살난 것을 발견한 것이다. 뒤이어 일어선 스펜서와 아드리안 역시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아련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세, 세상에 대 마법 갑옷과 방패를 아예 박살내다니…….
그들을 쳐다보며 리치는 무표정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말로 할 때 꺼져라. 네놈들을 죽일 수는 없지만 팔다리 하나정도 잘라내는 것은 가능하니 말이다.
그들은 질린 표정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상황을 봐서 그들이 감당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5써클의 공격마법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과 방패를 한 방에 박살낸 것을 봐서 리치의 마법 수준은 충분히 그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보내 줄 때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 같았다. 하지만 다급하게 마법진으로 향하던 그들의 걸음은 오래가지 않아 멈춰졌다.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한 인영을 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패트릭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사, 삼촌.
이 상황에서 더 없이 든든할 수 없는 우군이 나타난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은빛 갑주를 착용한 중년의 기사였다. 매서운 눈빛과 콧수염 아래에 자리한 입술이 무척 강퍅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으로써 관자놀이(태양혈)가 불룩한 것을 봐서 엄청난 수련을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본 그는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챵.
스펜서와 아드리안의 얼굴에도 반갑다는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헤이우드님.
모두 내 뒤로 비켜라.
헤이우드는 검을 치켜세우며 싸늘한 눈빛으로 리치를 응시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리치로군. 반가워.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는 가장 적합한 사냥물을 찾았다는 듯한 빛이 일렁였다.
리치라면 오우거나 트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훌륭한 사냥물이다. 죽으면 재가 되어 흩어져버린다는 특성 때문에 산 채로 잡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일단 성공한다면 조카 패트릭과 그 동료들이 팔라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헤이우드는 검에 슬며시 마나를 밀어 넣었다.
나와 맞닥뜨리다니 정말 운이 없는 녀석이로군. 경계가 워낙 삼엄해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거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날 잡아가겠다는 뜻인가?
물론. 패트릭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조카라서 말이야.
헤이우드는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접근을 시도했다. 선열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와 그의 검을 완전히 감쌌다. 하지만 리치는 별반 겁을 먹지 않은 듯 했다.
멍청한 작자. 뜨거운 맛을 봐야겠군.
느긋하게 팔짱을 풀던 리치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어났다.
응?
마치 뭔가를 감지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느긋하던 리치의 반응이 별안간 다급해졌다.
빌어먹을. 이봐! 한가롭게 싸울 형편이 못되니 즉시 이곳에서 꺼져.
돌연한 상대의 반응에 의아해 졌지만 그렇다고 뜻을 접을 헤이우드가 아니었다.
순순히 우리들을 따라간다면 생각해 보지.
리치의 눈빛이 다소 사나워졌다.
지금 즉시 꺼지지 않으면 뜨거운 맛을 봐야 할 걸…….
미친 놈. 헉.
헤이우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리치의 손에서는 어느새 사람 몸통 만한 불덩어리가 생겨나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콰콰콰콰.
특이하게도 불덩어리는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빛을 띠고 있었다. 화염 가운데에서는 선렬한 마왕의 문양이 소름끼치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열기가 화끈하게 전해질 정도였다. 상황을 봐서 결코 평범한 마법이 아니었다. 뒤이어 레이몬드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 헬 파이어(Hell fire) 세, 세상에 9써클의 마법이라니…….
그 한 마디에 헤이우드는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9써클의 헬 파이어라면 그의 대 마법 갑옷도 버티지 못하는 고위급 마법이다. 닿는 모든 것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공포의 공격 마법 헬 파이어. 그 위력은 대인 공격 마법 중 가장 으뜸이었고 심지어 대상이 돌이나 쇠라고 하더라도 이것에 명중된다면 무사할 수 없었다. 인화물질이 없더라도 그대로 타버리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것은 인간이 전개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마법이라 생각해야 했다.
아르카디아의 궁정 마법사들 중에도 헬 파이어를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만약 헬 파이어에 적중된다면 일행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헤이우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설마 드래곤은 아니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도망조차 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정확히 셋 세겠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후의 결과를 책임질 수 없다.
무슨 꿍꿍이지?
하나.
결국 헤이우드는 수련기사들을 독촉해서 마법진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전의가 싹 사라진 상태였다.
둘.
헤이우드는 수련 기사들을 데리고 서둘러 마법진 위에 섰다. 저 리치가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보내주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상황을 보아 몸을 빼는 것이 백 번 나을 듯 싶었다.
우선 상대가 9써클 이상 되는 리치가 분명하다면 싸워봐야 자신들에게 전혀 승산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9써클의 고위급 리치를 감당하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착용하고 있는 대 마법 갑옷이 헬 파이어를 막아낸다는 가능성은 전무했다.
갑옷에 각인된 대 마법 주문에는 엄연히 감당할 수 있는 마법의 한계가 존재했다.
리치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푸른 광구가 헬 파이어가 분명하다면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는 레이몬드에게 연신 독촉을 했다.
서둘러라.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진을 발동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리치의 등장과 그 마법 수준에 얼이 반쯤 빠져있던 상황이었다.
사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공간이동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쓰쓰쓰.
마법진 위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신형이 점차 광휘에 휘감기며 흐릿해져갔다. 하지만 리치는 그저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말이다.
그의 손을 감돌고 있던 헬 파이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도망치는데 열중하던 헤이우드 일행에겐 미처 그것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 순간 크로센에서 온 가디언 사냥꾼들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지막한 음성이 리치의 입 부분에서 흘러나왔다.
다행이군. 그나저나 조금 귀찮아지겠는걸?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곳에 여러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이우드 일행과 마찬가지로 워프 마법으로 이동해 온 듯 보이는 자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또한 리치였다. 멀뚱멀뚱 서 있는 자와 같은 모습과 복장을 한 리치들은 나타나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언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래지않아 남은 것이 공간이동 마법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색을 끝낸 리치들은 곧 먼저의 리치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된 건가? 인간 놈들은?
처음의 리치는 무척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놓쳤어.
무척 간단한 한 마디. 질문을 던진 리치들은 말문이 막힌 듯한 모습으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주시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으니…….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그 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자 헤이우드 일행을 순순히 보내준 리치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모습을 드러낸 자 역시 리치였다. 하지만 그는 여타의 리치들과 달리 무척 강해 보이는 놈이었다. 머리에 기괴하게 생긴 관을 쓰고 있었고 긴 송곳니가 자라나 있는 데다 입고 있는 복장도 달랐다. 나중에 나타난 리치들이 곧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인간들을 놓쳤다고 합니다. 게덴하이드님.
뭐라고?
자초지종을 들은 리치의 눈구멍에서 소름끼치는 듯한 안광이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수석 가디언으로 약 500년 펠드리안의 궁정에 난입해 성녀를 납치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자 말이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누군가에게로 다가갔다. 헤이우드 일행을 놓아준 리치에게로 말이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으르렁거렸다.
어찌해서 인간들을 놓아주었나?
리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게덴하이드의 시선을 맞받을 뿐이었다. 마치 한 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결국 게덴하이드는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자신의 지휘통제를 받는 부하가 저처럼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부아가 치밀지 않을 지휘관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나를 재배열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콰쾅.
그의 손에서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리치의 앞가슴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리치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저쪽의 암벽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가슴팍이 완전히 으스러진 것을 보아 게덴하이드의 공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익히 알 만 했다.
그 모습에 둘러싼 리치들은 무척 당황해 하며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저, 게덴하이드님. 이러실 필요까지야…….
그들의 말에 게덴하이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불문곡직하고 공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의 부하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엄연히 자신의 주인이 직접 만든 리치였다. 만약 놈의 본체가 소멸된다면 그 사실은 수면 중인 주인 베르키스에게로 즉시 전달될 것이 분명했다.
가해진 공격은 게덴하이드의 장기인 호리드 윌팅이었다. 9써클의 호리드 윌팅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리치의 몸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게덴하이드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경솔했군.
물론 문책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게덴하이드는 그 사실로 인해 베르키스의 수면이 방해받을까봐 이처럼 전전긍긍해 하는 것이다. 단단히 세뇌당한 탓에 그는 베르키스에게 극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지휘하는 모든 리치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곧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몸을 털고 일어나는 리치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럴 수가……. 내 호리드 윌팅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몸을 일으킬 수 있다니…….
앞가슴이 으스러진 상태였지만 리치는 전혀 비틀거리지 않고 이리로 걸어왔다.
그렇다고 별달리 분노한 것 같지도 않았다. 느긋하게 걸어와 자신의 앞에 태연하게 서는 리치를 보고 게덴하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방어력 하나는 강력한 놈이로군. 어쨌거나 침입자를 놓쳤으니 그에 대한 응징을 치른 것으로 생각하라.
그러지 뭐.
반말 짓거리로 대꾸하는 리치를 보자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말투로 보나 태도로 보나 놈은 결코 자신을 상급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반항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섣불리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죽여도 무방한 고블린이나 중형 몬스터와는 달리 상대는 베르키스가 직접 임명한 가디언이었기 때문이다.
'놈은 세뇌과정에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분명해. 이 사실은 베르키스님께서 깨어나시는 즉시 보고 드려야겠어.'
결국 게덴하이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무시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과 상대해봐야 자신의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이것은 그가 오백 년 동안 함께 지내며 느낀 상대에 대한 평가였다.
레어로 돌아가라. 너처럼 멍청한 놈에게 더 이상 외곽 경계를 맡길 수 없다.
그 말을 듣자 리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혀를 끌끌 찼다.
레어에 인간 노예가 몇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몸을 복원하도록…….
그러지.
그 말을 뱉은 뒤 리치는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아 타격이 전혀 없지는 않은 듯 싶었다. 공간이동을 하지 않고 걸어가니 말이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게덴하이드의 눈구멍에 기이한 안광이 일렁였다.
설마 놈이 아직까지 나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약 500년 전, 그러니까 눈앞의 리치가 인간이었을 때 둘 사이에는 감정의 앙금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수지간이라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앙금이 말이다. 혹시나 그 사실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게덴하이드는 곧 그 사실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그럴 리는 없어. 놈은 베르키스 님에 의해 기억이 깡그리 지워진 채 세뇌당했어.
그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곧 베르키스의 마법 실력을 의심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베르키스의 충실한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게덴하이드에겐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아무래도 세뇌하기 전 가해진 정신계 마법의 영향으로 봐야 할 것 같군.
결론을 내린 게덴하이드는 멀뚱멀뚱 서 있는 리치들을 쳐다보았다.
앞으론 이곳을 너희들 둘이서 경비를 서도록 해라. 추후 인간 놈들의 침입이 있을 경우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추적해서 처치해야 한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치를 보며 게덴하이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들의 태도는 저 얼빠진 리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 수고하도록.
말을 마친 게덴하이드의 몸이 서서히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리치들은 곧 자신들의 위치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산정으로 향하는 소롯길에 그림자 하나가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로브로 감싼 왜소한 몸. 뼈만 남은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그림자는 아까의 그 리치였다.
가슴팍이 참혹하게 으깨진 모습이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서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리치의 입에서 갑자기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놈. 누군 죽이고 싶지 않아서 놓친 줄 아나.
리치의 퀭한 눈구멍에는 분노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정신 나간 놈들이라면 솔직히 나도 살려보내고 싶지 않았어. 세상에 출세를 위해 드래곤의 레어에 잠입해 가디언을 포획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놈들이지. 만약 칠종단금술만 아니었다면…….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리치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뼈만 남은 얼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감돌았다.
리치가 되고 나서도 칠종단금술이 남아있다니 정말 놀랍군. 하긴 그 덕에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긴 하지만 말이야.
과거를 상기하자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리치의 뇌리에 지난 일, 정확히 말해 500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 겪었던 것처럼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그리고 모호한 감정이 담긴 음성이 새어나왔다.
다프네.
그는 지금 한 소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 돌이 된 채 잠들어 있는 소녀. 그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구해내야 할 존재이기도 했다. 더불어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원한을 갖게 한 존재 역시 떠올랐다. 인간이 아닌 존재 드래곤. 놀랍게도 리치는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베르키스. 기다려라 나의 응징을…….
뼈만 남은 주먹이 불끈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리치의 주인인 레드 드래곤은 그에겐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바로 스승과 사랑하는 여인을 앗아간 원흉이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이었던 그를 리치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이름은 바로 데이몬이었다.
격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암암리에 탐색 마법을 펼쳐 주위를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혼잣말이 들킬 가능성이 없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500년 동안 데이몬이 정체를 숨겨온 비결이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베르키스가 날 리치로 만든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으니…….
데이몬은 슬며시 손을 들어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것은 그가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경지였다.
이미 데이몬은 9써클의 반열에 오른 대마법사가 된 지 오래였다. 비록 리치의 몸이었지만 말이다.
우선 몸을 복원해야겠군.
털썩.
그 자리에 좌정한 데이몬은 끌어 모은 마나로 형편없이 부서진 앞가슴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레어에 준비된 인간 노예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몸을 복원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칠종단금술의 금제를 받고 있는 그에겐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아직까지 그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오랜 연구를 통해 터득한 그만의 방법으로 몸의 복원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500년의 세월은 그를 대마법사로 만듦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수많은 사술을 복원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쓰쓰쓰.
그의 앞가슴 부분이 점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데이몬은 자신이 대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오랜 시절 데이몬을 통제했던 칠종단금술. 시술자에게 살심을 원천적으로 말살해 버리는 이 금제법은 놀랍게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효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술자의 인성을 보호하는 효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