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미 반수가 넘는 용사들이 희생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끔찍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습격이었다.
혹시 이곳의 정체는 마계와 연결된 아비스(大魔宮)가 아닐까?
데스 나이트의 잔해와 뒤섞여 쓰러진 용사들의 시신을 일그러진 얼굴로 쳐다보던 세르게이가 내뱉은 일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처럼 많은 데스 나이트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하나 하나가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가 아닌가? 출몰한 데스 나이트의 수는 지금이 암흑전쟁을 벌어지던 삼십 년 전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많았다. 머리가 빠질 정도로 고민했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선발대도 결코 무사하지 않겠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세르게이의 귀로 또다시 경고성이 들려왔다.
적입니다. 이번에는 후미에서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히 퍼져나갔다. 고개를 돌린 세르게이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신 베르하젤을 찾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제발 저희들에게 가호를…….
일단의 데스나이트, 듀라한, 리치들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후미를 들이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물에 가까운 숫자였기에 동료들이 얼마나 죽어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용사들의 얼굴에는 피로감과 함께 절망감이 역력히 떠오르고 있었다.
피해는?
일단 살아남은 인원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본대 일백 명의 인원 중 살아남은 기사는 도합 서른 둘입니다. 거기에서 중상자를 제외한다면 스물 일곱이 겨우 전투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4대 기사는 무사하다는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마법사는 얼마나 살아남았지?
두……명입니다. 중상을 입었지만 슈렉하이머님은 다행히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보고를 들은 세르게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대가 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결계 속에서 예상했던 희생은 고작해야 열 이내였다. 상대가 구울과 와이트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결과가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은 베르하젤에게 청원을 한 뒤 탈출하는 과정에서 드래곤들의 공격을 차단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처럼 허무하게 소모되어 버리다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들은 트루베니아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고 병사들이 쉴새없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끔찍이 아껴왔던 전력이었다.
그런 기사단이 이처럼 허무하게 궤멸되어버리다니……. 이런 상황에서 승리를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법. 어떤 일이 있어도 서약석을 손에 넣어야만 했던 세르게이였다. 그는 결국 전진 명령을 내렸다.
중상자들은 놓고 간다. 운이 좋아 후발대와 만난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냉정한 판단. 중상을 입은 기사들의 얼굴에 체념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렇게 많은 데스 나이트가 출몰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일 터. 그들은 편안하게 죽음을 맞기로 작정하고 눈을 꼭 감았다.
몸을 잘 숨기고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구하러 오겠어.
한 마디씩 위로를 건네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언제 저들의 신세가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임무를 떠올리며 억지로 자신을 추슬렀다.
저벅저벅.
수가 판이하게 줄어든 본대의 용사들은 눈물을 삼키며 안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상자들의 모습은 곧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데이몬은 기사들과 섞여 묵묵히 걸었다. 완전히 기절해 버렸는지 다프네는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냘프게 전해지는 심장 박동소리만이 데이몬을 안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상황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보기에도 정말 처절한 접전이었다. 그런데 전투과정을 되새겨보던 데이몬의 눈동자에 갑자기 이채가 떠올랐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습격해 온 데스 나이트들. 특이하게도 그들은 무척 낯익은 검술을 사용했다. 바로 기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동일한 검로였으니까.'
싸움에 몰두하느라 정신 없었던 기사들과는 달리 데이몬은 전투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용사들과 데스 나이트들은 같은 뿌리로 짐작되는 검술을 사용했다. 이미 많은 고수와 싸워봤던 경험으로 인해 데이몬은 그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죽은 기사의 영혼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놈들은 죽은 이카롯트의 기사들에게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헬버트론을 불러 세웠다. 그는 몹시 피곤한 안색으로 왜 그러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수중의 의혹을 털어놓았다.
이봐! 헬버트론. 놈들과 싸우면서 혹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어?
무슨 생각 말이야.
몹시 짜증스러운 듯이 대꾸하는 헬버트론이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쌍방은 분명히 같은 검술을 사용했어. 혹시 선발대가 당하고 난 뒤, 그들이 데스 나이트로 변해 덤비는 것이 아닐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하지마. 선발대가 그리 빨리 전멸 당했을 리도 없거니와 데스 나이트가 그리 금방 만들어지는 줄 알아.
화가 치미는 듯 헬버트론은 사납게 역정을 부렸고 데이몬은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그 말을 예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걸음이 별안간 멈춰졌다.
가만…….
사실 이처럼 많은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들이 등장한 자체가 의문투성이였다. 아마도 마왕이 아니라면 이들을 불러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그것을 떠올리자 세르게이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이들이 애초부터 같은 편이라면…….
그는 다급히 데이몬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안색을 굳히는 데이몬을 향해 냉랭히 내뱉었다.
성녀를 내려놓아라.
무슨 일이지?
네놈 따위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부아가 왈칵 치밀어 올랐지만 다프네에게 별달리 위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데이몬은 묵묵히 몸을 숙였다. 기사들이 달려들어 다프네를 묶은 가죽끈을 풀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미 혼절해 있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세르게이는 지체 없이 슈렉하이머를 불렀다. 부상을 입어 한쪽 어깨를 붕대로 감싼 슈렉하이머가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슈렉하이머는 통증이 심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세르게이를 쳐다보았다.
성녀를 깨우실 수 있겠소?
가능하긴 하지만 이 상태로 데리고 가는 것이 충격을 덜 받을 텐데요.
중요한 일이오. 지금 즉시 그녀를 깨우도록 하시오.
슈렉하이머는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힐링으로 그녀의 기력을 돋워주려는 것이다.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한 곳이라 캐스팅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을성 있게 마나를 끌어 모은 슈렉하이머는 마침내 다프네를 깨울 수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 공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다프네는 데이몬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아저씨. 여기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세르게이가 말을 잘랐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성녀.
무, 무슨 일이지요?
성녀이니 만큼 충분히 느꼈을 것이오. 아까 느꼈던 죽음들에 대해서 말이오.
다프네의 안색이 별안간 시퍼렇게 질렸다. 세르게이는 잔인하게도 다프네로 하여금 생명이 소멸하는 순간을 다시 되새기도록 채근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데이몬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
하지만 세르게이가 손을 들자 주위의 기사들이 달려들어 데이몬을 붙들었다. 꼼짝달싹 못하게 된 데이몬은 그저 씨근거리며 세르게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데이몬을 처리한 뒤 세르게이는 다프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니 사실대로 대답해 주어야 하오. 아까 당신은 어떤 죽음을 느꼈소? 인간의 생명이 소멸되는 걸 느꼈소? 아니면 다른 것도 섞여 있었소?
불쌍하게도 다프네의 얼굴은 아예 백짓장이 되어 있었다. 세르게이는 채 입을 열지 못하는 다프네를 다시 한 번 채근했고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사, 사람들의 죽음뿐이었어요. 오로지……. 왜 내게 그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거죠.
대답을 하자마자 다프네는 울음을 펑펑 터뜨렸고 결국 슈렉하이머가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슬립.
마법의 힘에 의해 강제로 잠이 들어버린 다프네. 기사들은 그녀를 다시 데이몬에게 업힌 뒤 가죽끈으로 꽁꽁 동여매었다. 데이몬은 세르게이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네놈에게 본때를 보이고야 말겠다.
네놈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면…….
짧게 대답한 세르게이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이 배어 있었다.
안개 속을 계속해서 전진해가던 일행들은 또다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기습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격적인 것은 이번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캉 푸캉.
안개 속에서 각각 스물 남짓으로 이루어진 두 무리가 치열하게 교전을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쌍방이 모두 데스 나이트라는 점이었다.
심혼을 빨아들일 듯이 눈구멍에서 이글거리는 안광, 마왕의 문양이 선명한 거무튀튀한 갑주, 습격해 온 데스 나이트와 한 치도 틀림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데스 나이트 두 무리가 서로 상잔을 하고 있었다. 물론 리치와 듀라한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동안에도 듀라한 둘, 리치 하나가 몸통이 조각난 채 쓰러졌다.
뜻밖의 광경에 기사들은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 다 적이 분명했으므로 대응할 태세를 갖춘 채 말이다.
본대를 발견하자 데스 나이트 무리들은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외형상 본대의 인원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놈들이 만약 힘을 합쳐 공격해온다면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닐 것이었으므로 기사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그렇게 전개될 것 같았기에 기사들은 검자루를 불끈 거머쥐었다.
그때 세르게이의 냉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공격하지 마라. 방어하는 것만 허용하겠다.
무척 놀란 듯한 기사들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세르게이는 한 발 앞으로 쓱 나섰다.
두 무리의 데스 나이트는 양편으로 갈라진 채 이쪽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안광에서는 적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앞서의 상잔으로 열 정도가 쓰러진 터라 모두 합친다면 삼십 남짓 되어 보였다. 때문에 용사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은 고작 스물 일곱. 물론 그랜드 마스터 급인 4대 기사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길 수는 있어 보였지만 대가는 분명 어마어마할 터였다.
동료들 중 반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
공격하기로 마음을 정한 듯 데스 나이트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전에 세르게이의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너희들은 누군가? 정체를 밝혀라.
그 말에 다가서던 데스 나이트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놈들은 서로 마주보며 서로의 눈빛을 주시했다. 뭔가 의견을 나누는 듯한 눈치였다.
곧 한 데스 나이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들 중 가장 상급자로 보이는 자였다.
그의 입에서 데스 나이트 특유의 묘하게 공명되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질그릇이 깨질 때 나는 듯 듣기가 무척 거북한 음성이었다.
존존재재하하지지 않않아아야야 할할 것것들들이이 도도리리어어 정정체체를 운운운운하하다다니니 가가소소롭롭구구나나.
상대의 말을 일순 알아듣지 못한 세르게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라고?
성성녀녀를를 내내놓놓아아라라. 그그렇렇지지 않않으으면면 부부정정한한 생생애애에에 영영원원히히 종종지지부부를를 찍찍게게 되되리리라라.
신경써서 들은 탓에 이번에는 상대의 말을 알아들은 세르게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의 목적이 성녀였나?
그그렇렇다다.
말을 마친 데스 나이트들은 일제히 검을 치켜올렸다. 검은 아지랭이같은 기운이 검신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거의 모두가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로 보였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았다.
일단 싸우기 전에 네놈들의 신분을 알고 싶다. 말할 용의가 있나?
원원한한다다면면…….
앞으로 나선 데스 나이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데스 나이트의 입에서 예의 그 음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놀랄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나나는는 이이카카롯롯트트의의 명명예예로로운운 기기사사단단장장 알알프프레레드드 백백작작이이다다. 성성녀녀를를 수수호호하하여여 베베르르하하젤젤의의 신신전전으으로로 모모시시는는 사사명명을을 띄띄고고 있있다.
너너희희 더더러러운운 것것들들이이 어어떻떻게게 해해서서 성성녀녀를를 납납치치했했는는지지는는 모모르르지지만만 순순순순히히 내내놓놓지지 않않으으면면 영영혼혼조조차차 온온전전하하지지 못못할할 것것이이다다.
기괴하게 공명되는 음성이라 일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자 세르게이의 눈이 급격히 치떠졌다. 그것은 다른 기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충 나이델하르크의 암흑군단 휘하 어느 어느 부대 소속이란 대답을 기대했는데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뭣이라고?
조금 전까지 교전을 나누던 다른 데스 나이트 무리도 놀라긴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뭐라고 시끄럽게 중얼거렸다. 얼굴 표정이 없는 데스 나이트라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도무지 몰랐지만 제법 심각해 보였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세르게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네가 7조를 맡고 있는 알프레드라고?
아아니니 어어떻떻게게 그그 사사실실을을?
앞으로 나선 데스 나이트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그때서야 세르게이는 상황을 명확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다름 아닌 같은 편과 상잔을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저들이 데스 나이트의 몰골로 보이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더 이상의 손실은 막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체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는 용사단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세르게이 공작이다. 알프레드 날 기억하나?
개개소소리리. 너너 따따위위 너너절절한한 듀듀라라한한 따따위위가가 어어찌찌 총총사사령령관관님님을을 사사칭칭하하는는가가?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말에 세르게이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이쪽을 데스 나이트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검술실력이 높은 자는 데스 나이트, 비교적 약한 자가 듀라한으로 보이는 듯 싶었다. 사실 세르게이 공작의 검술실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리치의 진정한 정체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컸다.
도저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불연 듯 좋은 생각이 떠오른 세르게이 공작은 손가락을 펴서 한 쪽을 가리켰다. 바로 다프네를 업고 있는 데이몬을 향해서였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보이는가? 성녀는 바로 보이는가?
물물론론! 성성녀녀님님의의 존존귀귀하하신신 몸몸을을 고고작작 구구울울 따따위위에에게게 맡맡기기고고 있있다다니니 발발칙칙한한 것것들들…….
안광을 이글거리며 사납게 내뱉는 데스 나이트. 헝클어진 생각을 겨우 정리한 세르게이는 한자 한자 똑바로 내뱉었다. 한 국가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총리인 만큼 그는 부하의 면면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난 너를 똑바로 알고 있다. 알프레드. 너는 이카롯트에서 애처가로 소문난 기사이다. 하지만 나는 너의 알려지지 면모를 똑똑히 알고 있다. 클론델 백작 부인과 알게 모르게 정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데스 나이트의 입에서 놀란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허허, 헉헉. 어어떻떻게게 그그 사사실실을을…….
나는 정보부를 총괄하고 있는 세르게이 공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 사실을 알겠는가?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본대에 소속되어 있던 클론델 백작은 이미 전사했으니까 말이다.
데스 나이트는 말이 없었다. 일견해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데스 나이트 무리에서 한 명이 갑자기 앞으로 불쑥 나왔다. 물론 들려오는 음성이 기괴하게 공명되긴 마찬가지였다.
그그렇렇다다면면 내내 이이름름도도 알알고고 있있는는가가? 나나는는 선선발발대대의의 4지지단단을을 맡맡고고 있있다다. 네네가가 진진정정한한 세세르르게게이이 공공작작 전전하하라라면면 날날 모모를를 리리가가 없없다다.
물론. 델리피어 자작을 내가 왜 모르겠나? 얼마 전 딸의 결혼식에 직접 참석했었는데 말이다. 애석하게도 사위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불운이 있었지?
노노, 놀놀랍랍군군.
모두가 말을 잊었다. 비로소 상황이 명확히 정리되었다. 그들이 싸운 적은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아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대의 모습은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이 분명했다. 심지어 나뒹구는 시신들조차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나뒹구는 갑주의 표면엔 마왕의 문장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세르게이가 사태 장악에 나섰다.
이제부터 싸움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서서 신분을 밝히고 동료란 것을 증명하기로 하자. 자신의 이름과 소속부대, 그리고 가문을 밝혀 더 이상의 상잔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
곧 대대적인 확인작업이 벌어졌다. 용사들과 데스 나이트, 듀라한, 리치들은 쭈뼛거리며 다가와서 서로의 이름과 신분을 교환했다. 하나같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이다.
슈렉하이머에게 리치 하나가 다가왔다. 뼈만 남은 몰골에 사악한 기가 감도는 전형적인 리치였다. 마치 귀곡성같이 찢어지는 음성이 이빨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음성이 기괴하게 공명되지는 않았다.
나는 이카롯트 궁정 소속 마법사인 펠렌드다. 너의 이름과 소속을 말하라.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침통한 기가 서렸다. 지금껏 죽이고 죽었던 자들이 모조리 한편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펠렌드. 날 모르겠소? 나 슈렉하이머요.
뭐, 뭐라고…….
리치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슈렉하이머는 그가 평소에 무척 존경해 마지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슈렉하이머 역시 같은 리치로 보이는 듯 싶었다. 그 증거로 상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슈렉하이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장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머리통을 옆구리에 떡 하고 끼고 있는 듀라한 하나가 라인델프에게 다가왔다. 잘려져 나간 채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머리통의 입이 열렸다. 물론 목 위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너는 누군가? 나는 엘링턴 가문의 크란시아다. 이름과 신분을 밝혀라.
라인델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듀라한은 바로 자신의 처남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동생 말이다.
날 모르겠는가? 처남? 나 라인델프다.
뭐, 뭐라고…….
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우습게도 듀라한의 눈에는 라인델프의 모습이 영락없는 데스 나이트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절친했던 처남 매부 사이는 의심 섞인 눈초리로 서로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진군은 일단 거기서 멈춰졌다. 같은 편임이 확인된 이상 모든 병력을 모은 뒤에나 출발해야 할 듯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상잔으로 죽어갈지 몰랐다.
특히 세르게이는 드러난 사실에 아예 질려버린 듯 했다. 같은 편끼리, 그것도 최후에 써먹기 위해 아끼고 아꼈던 소드 마스터들이 서로 죽이고 죽였다니…….
결국 참다 못한 그는 슈렉하이머에게로 다가왔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대승정은 짐작하시겠소?
슈렉하이머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듯 싶소. 만약 환각 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죽은 자들은 분명히 본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 법이오. 하지만 이들은 죽은 뒤에도 마법이 풀리지 않았소.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몸통이 조각난 데스 나이트의 잔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허리를 굽혀 머리통 하나를 집어들었다. 듀라한의 손에서 굴러 떨어진 듯한 머리통이었다. 슈렉하이머는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차가운 감촉. 질감 모두가 듀라한의 머리통이 분명하오. 보시다시피 본체가 쓰러진 뒤에도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소? 만약 이것이 분명 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슈렉하이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아마도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10써클의 마법이 아닌가 생각되오. 드래곤들의 전유물 말이오.
하지만 세르게이는 그 말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신께서 펼치신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소? 각 종족의 발길을 막기 위해 험한 관문을 설치하신 분이니 말이오.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소. 하지만 그분께서 이토록 처참한 죽음의 관문을 설치하셨다고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용사들은 정신 없이 사방을 둘러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포의 대명사인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지척에서 웅성거리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데이몬에게도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언데드들이(아마도 용사로 짐작되는) 들이닥쳤다. 데스 나이트 하나가 싸늘한 안광을 피워 올리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비교교적적 약약한한 구구울울을을 보보니니 그그래래도도 반반갑갑군군. 이이봐봐 네 네정정체체는는 뭐뭐지지?
데이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의 눈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안광이 급격히 짙어졌다. 검을 뽑아들려는 데스 나이트를 제지한 것은 헬버트론이었다.
그만 두도록……. 녀석의 신분은 내가 보증하지.
그그러러는는 네네 녀녀석석의의 정정체체를를 먼먼저저 밝밝혀혀라라
내 이름은 헬버트론이다.
헬버트론의 말에 상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이미 이카롯트의 4대 기사는 대륙의 모든 기사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무척 송구스럽다는 듯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실실례례했했습습니니다다. 저저는는 4지지단단 소소속속의의 세세바바인인입입니니다다. 무무례례를를 용용서서하하시시길길…….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데스 나이트는 미심쩍은 듯 헬버트론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물론 헬버트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프네는 제대로 보이나 보군.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술의 대가인 그였으므로 작금의 상황에서 뭔가 짚이는 바가 없진 않았다. 그는 용사들 사이에 섞여 듀라한과 데스 나이트가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힐끔 쳐다보며 나직이 되뇌였다.
아무래도 이들은 고도의 정신계 마법에 당한 듯 싶다. 상대를 자신의 적으로 착각하게끔 하는…….
물론 마법은 어느 모로 보아도 중원의 사술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하지만 단 한가지, 사술이 마법보다 우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측면에 작용하는 측면이었다. 마나의 재배열을 통해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점에서 사술은 결코 마법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거나 심령을 제압한다는 점에서 사술은 나름대로의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마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데이몬이 파악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중원에 고도의 내가기공을 익힌 고수가 많다는 점에 기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정신을 직접 조종할 수 있다면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상대를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으므로…….
물론 내가기공도 거기에 따라 진보를 거듭해왔고, 뛰어난 내공을 익힌 자는 보편적으로 사술에 저항하는 힘이 무척 강한 편이었다. 다시 말해 절정 급 경지에 오른 무사라면 사술에 거의 제압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정파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정파와 사파의 내공 차이에 따른 격차가 분명히 있었지만 말이다. 만약 데이몬이 사술을 펼칠 수 있다면 상당한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술에 문외한인 이곳의 기사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 술법은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물론 사술도 무공의 갈래에 속했다. 그러므로 시전하는데 반드시 일정량의 내공이 필요했다. 데이몬에게 끌어올릴 내공이 남아있을 턱이 없었고 뇌리에 온갖 사술의 구결이 기억되어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도저히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용사들은 서로의 이름과 신분에 대한 확인작업을 마치고 뒤이어 도착할 후발대 병력을 기다렸다.
뒤쳐진 후발대 병력은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론 하나같이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의 모습을 한 채 말이다. 리치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을 봐서 대부분 접전의 와중에 죽어간 모양이었다. 소드 마스터의 앞에서 마법사란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므로…….
그들은 본대의 모습을 보자마자 성급히 덤벼들려 했고 세르게이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상황은 진정되었다.
실실례례했했습습니니다다. 무무례례를를 용용서서하하시시길길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는 자는 겉으로 봐서는 전형적인 데스 나이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신분은 후발대의 17지단을 맡고 있는 카를로스 남작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세르게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곳에 오며 부상자를 본 적이 있는가? 음! 아마도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수그린 데스 나이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보보았았습습니니다다.
어떻게 되었는가?
데스 나이트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꺾었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는 부상자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착잡한 기가 감돌았다.
모조리 죽여 없앴나보군. 할 수 없는 일이지. 상황을 보아 내가 전령으로 보낸 두 기사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겠군.
제일 먼저 자신들에게 덤벼든 두 명의 데스 나이트는 아마도 선발대에서 보낸 전령이 분명한 듯 싶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낸 전령 역시 후발대에 같은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데스 나이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의 예상을 증명하듯 무릎 꿇은 데스 나이트의 음성이 귓전에 전해졌다. 기괴하게 공명하는 데스 나이트 특유의 음성 말이다.
용용서서하하십십시시오오. 그그들들은은 영영락락없없이이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의의 형형상상을을 하하고고 있있었었기기에에…….
세르게이는 낙담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200명의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막강한 이카롯트의 기사단이 상잔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끼고 아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드래곤과의 전투에나 투입했을 걸…….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이미 늦어버린 것. 이제 그는 남은 용사들만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아무래 안타까워 해봐야 죽은 기사들이 되살아날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는 우선 인원 편성을 서둘렀다. 상황을 보아 남은 용사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은 듯 싶었다. 병력 파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소드 마스터와 데스 나이트로 보이는 자들은 도합 사십 육 명, 귀족 기사들과 듀라한이 십 이 명. 거기에다 마법사와 리치를 합한 수가 여덟 명이었다. 물론 그 속에는 슈렉하이머가 끼여 있었다. 그 외의 인원으로는 우선 성녀를 꼽을 수 있었고, 또한 그를 업은 데이몬까지 합친다면 남은 용사들의 수는 정확히 69명이었다. 사백 명으로 시작했던 막강한 용사단이 이 정도로 수가 줄어버린 것이다.
본격적인 접전을 치르기도 전에 맞이한 엄청난 피해. 하지만 수행해야 할 임무가 워낙 막중했기에 용사들은 또다시 결계 속으로 묵묵한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는 싸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상대가 그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도 말이다.
세르게이의 추상같은 명령에 용사들은 안색을 굳히며 묵묵히 행군에 열중했다. 바로 옆에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동료들이었으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결계가 품고 있는 마법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래도 처음에는 같은 무리의 동료들만은 제 모습으로 보였지만 이제 그것도 옛 말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인간의 모습이던 동료들이 죄다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결계의 비밀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검부터 날리고 볼 뻔했을 정도였다.
이이봐봐! 너너 데데이이몬몬 맞맞어어?
옆에서 들려온 기괴한 말에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헬버트론이 걷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눈구멍 사이로 사이한 빛을 일렁이는 데스 나이트 하나가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몸에 걸친 갑주까지 마왕의 문양이 선명한 데스 나이트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 헬버트론?
맞맞는는가가 보보군군. 제제길길 네네 모모습습이이 별별안안간간 구구울울로로 변변해해서서 하하마마터터면면 검검을을 날날릴릴 뻔뻔했했어어.
헬버트론으로 짐작되는 데스 나이트는 고개를 흔들며 툴툴거렸다. 데이몬은 자신이 변한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그는 구울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구울의 모습이 어떤데…….
묘묘지지에에서서 시시체체를를 파파먹먹고고 사사는는 식식인인 몬몬스스터터말말이이야야. 시시뻘뻘건건 눈눈동동자자와와 귀귀밑밑까까지지 찢찢어어진진 입입, 날날름름거거리리는는 긴긴 혀혀까까지지 틀틀림림없없는는 구구울울의의 모모습습이이군군. 놀놀라라워워.
실력에 따라 모습이 달리 보인다는 말이 아마도 맞는 듯 싶었다. 일행 중에서 제일 약한 때문에 오직 데이몬만 구울로 보이기 때문이다. 헬버트론은 상당히 강력해 보이는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데스 나이트보다 갑주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무성했고 뽑아든 검은 암흑의 오러 블레이드에 덮여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본 헬버트론은 거의 모든 용사들의 모습이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의 몰골로 바뀐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드러난 사실에 용사들은 저마다 모골이 송연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사방을 온통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눈 버젓이 뜨고 지켜볼 자 담량 큰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데이몬만이 재미있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실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다니 재미있군.
세르게이의 모습은 어느새 듀라한으로 바뀌어 있었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있는 머리통은 목 위가 아닌 옆구리에 끼여져 있었다. 그것을 봐서 세르게이의 검술실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슈렉하이머는 어떨까?
백발이 성성한 슈렉하이머의 모습은 벌써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몹시 사악해 보이는 리치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머리에 쓴 관(冠)과 함께 마치 뱀파이어처럼 길게 자라난 어금니가 다른 리치와 비교적 다르게 보이는 점이었다.
흥미를 가진 데이몬은 연신 주위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우선 외곽의, 비교적 강한 기사들이 배치되는 위치에는 어김없이 데스 나이트가 검을 꼬나 쥔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듀라한들이 걷고 있는 것을 봐서 아마도 귀족 기사들인 듯 싶었다. 문득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프네의 눈엔 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하지만 다프네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충격을 받지 않도록 슈렉하이머가 마법으로 재운 것이다.
심안을 가지고 있으니 제대로 보이겠지. 뭐.
데이몬과 다프네는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결계 속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손실이었다. 마지막 반격을 기약하기 위해 아끼고 아꼈던 트루베니아 최강의 기사단은 결국 전력의 대부분을 안개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같은 편끼리의 상잔으로 말이다. 그런 아픔을 간직한 채 용사들은 결국 결계 지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동료의 모습이 언데드로 바뀌는 것말고는 더 이상의 공격은 가해지지 않았다.
뿌연 안개로 덮인 결계 지대의 중심부를 빠져나온 기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정말 지긋지긋했다는 표정이 감돌았다.
휴! 끝인가?
정말 저주받은 곳이었어.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계 지대를 지나자마자 살을 엘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도리어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료 330명을 집어삼킨 결계 지대의 안개는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차리리 뼈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더 반가울 정도로……. 안개가 걷힐수록 결계에 깃든 마법의 힘은 약해졌다. 그에 따라 끔찍한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던 용사들이 하나씩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직까진 신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시거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으므로 머지않아 신전의 모습이 들어올 것이다.
혹시 신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소? 대승정.
세르게이의 질문에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문서에 따르면 신전은 거대한 성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모든 용사들에게 본 모습으로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의 모습을 한 용사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세르게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일이로군.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신전의 둘레에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니…….
원래는 성곽이 없었다고 합니다. 훗날 베르하젤님의 후광을 독차지하려는 목적으로 고대의 군주들이 쌓은 것이지요. 베르하젤님의 뜻이 꺾이기 시작한 시기에 말입니다.
그렇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르게이의 눈에 갑자기 빛이 일렁였다. 저 멀리서 웅장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정말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가히 펠드리안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비견될 정도로 말이다.
저곳인가?
엄청나게 크군.
용사들의 눈망울에 긴장감이 역력히 떠올랐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표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세르게이가 특유의 싸늘한 음성으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결코 서두르지 마라. 이제부턴 정신 바짝 차려서 주위를 경계해야 한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용사들은 긴장한 채 병진을 새로 구성했다. 가운데 위치한 데이몬과 다프네를 철저히 보호하는 형상으로 말이다.
이제부터 그들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절로 마음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용사들은 대열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축물의 형상이 점점 뚜렷해졌다. 또한 성곽과 가까워질수록 안개 또한 옅어졌다. 마침내 웅장한 신전 외벽의 모습이 용사들의 눈에 명확히 들어왔다.
드디어 도착했는가?
무척 고풍스러운 건축물이었다. 성곽이나 망루의 양식이 지금 것과는 무척 달랐다.
워낙 웅장했기 때문에 허물어진 부분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성곽은 용사들에게 점점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심히 성곽을 관찰하던 세르게이가 이마를 찡그렸다.
무척 낡은 성곽이로군.
아닌게 아니라 성벽의 풍화가 정말 극심한 수준이었다. 쉴새없이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성문이 달려 있어야 할 곳은 아예 뻥 뚫려 있었고 성벽 또한 이음새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다. 세르게이는 우선 척후를 보냈다.
성벽 내부를 철저히 정찰하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두 기사가 척후로 출발한 뒤 일행들은 그곳에 멈춰 서서 보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사방의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난 뒤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그들의 전력으론 드래곤 하나 이상을 상대할 수 없었다. 도합 칠십 명에서 한 명이 빠진 상태로 용사대는 척후의 보고가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조금 뒤 도착한 척후들은 이상 징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 움직이는 물체는 전혀 없었습니다. 성벽 내부는 무척 광활한 공터를 이루고 있었으며 성벽과는 약 1km 거리에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허! 1km라니……. 엄청나게 넓은 공터겠군. 신전도 많이 허물어져 있겠지?
척후를 나갔던 기사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당혹하다고도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이……. 특이하게도 신전 건물은 외관상 전혀 풍화된 흔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금방 지어진 듯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별달리 이상할 것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벽이야 물론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것인 만큼 무너질 만도 했지만 신전은 바로 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베르하젤이 신전이 무너지도록 그대로 방치할 리는 없어 보였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세르게이는 베니테스를 쳐다보았다. 마법을 사용해서 숨어있는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돌연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베니테스가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베니테스의 태도가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하긴 했다. 이따금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있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딴 생각이나 하다니…….'
세르게이는 짜증 섞인 일성을 내뱉었다.
베니테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베니테스가 고개를 돌렸다. 멍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세르게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겐가? 지금이 그토록 한가한 시기인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탐색 마법이나 시전하도록……. 신전 주변에 몬스터 따위가 없는지 살펴보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캐스팅에 들어가는 베니테스. 미덥지 못했는지 세르게이는 남은 마법사들에게도 탐색 마법을 시전하도록 명령했다.
만에 하나 있을 위험을 철저히 회피해야 한다. 슬라임 따위의 하등한 몬스터도 놓치지 말고 살피도록 하라.
마법사들은 묵묵히 신전 주위를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안정했기 때문에 캐스팅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시간에 걸친 탐색시간이 지나가고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그때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놈들이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결계 지역을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지?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병력을 진군시켰다. 70여 명의 용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성벽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갔다. 물론 뽑아든 장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끌어올린 채로 말이다. 마법사들의 검색에 아무것도 나오진 않았지만 이곳은 신의 성역이었으므로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어들어 감에 따라 성벽은 점점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거리에서 바라본 성벽은 말 그대로 폐허 그 자체였다.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워낙 웅장했기 때문에 멀리서 볼 때 별로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성이랄 것까지도 없겠군.
세르게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덧 선진이 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라기보다는 그저 터진 곳이라 불러야 정확할 듯 싶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걸어 들어가던 용사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신전을 보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세, 세상에…….
용사들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신전의 모습이 그만큼 웅장하고 멋있었다. 신전의 모습은 완전히 허물어져 건축물이라고 볼 수 없는 성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고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아름다웠고, 어디 한 군데 허물어진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되었건만 신전은 말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용사들은 저마다 입을 벌린 채 신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참다 못한 세르게이가 역정을 벌컥 낼 때까지 말이다.
서둘러야 한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
정신이 든 용사들이 검을 고쳐 쥐자 세르게이는 뒤를 쳐다보았다. 다프네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데이몬의 등에 업혀 있었다. 잠시 다프네의 얼굴을 들여다본 세르게이는 슈렉하이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절차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요?
네. 신전 내부에 들어가면 거대한 홀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베르하젤 님께 청원을 올려야 합니다. 물론 청원을 올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성녀에 한정됩니다. 현재로썬 그곳이 베르하젤 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확실하오?
그렇습니다. 고문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 맞다면 말이지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세르게이는 용사들을 쳐다보았다.
저곳이 우리의 목적지다. 힘을 내라. 트루베니아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용사들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손에 트루베니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걸려있다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으로 훤히 터진 공터. 용사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사방을 주시하며 조심조심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럴수록 신전의 모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용사들의 대열이 성벽과 신전이 위치한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산이 일시에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폭음이었다.
콰르르르.
용사들의 고개가 마치 뺨이라도 맞은 듯 뒤로 팩 돌아갔다. 굉음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용사들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이게 무슨?
헉.
놀랍게도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용사들이 진입한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동안 풍화에 시달린 성벽이었고, 무너질 만큼 낡기는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이 들어선 지금에야 무너지다니…….
용사들이 주시하는 동안에 성벽은 연쇄적으로 허물어졌다. 마치 도미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맥없이 말이다. 그와 함께 엄청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성벽이 있던 곳은 순식간에 먼지구름에 덮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르게이의 뇌리에 불연 듯 불길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성벽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이 지나가자마자 무너지다니……. 혹시 매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용사들의 진군을 중지시켰다.
정지. 이 자리에 서서 일단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도록 하자.
용사들은 그 자리에 서서 성벽을 감싼 먼지구름이 가라앉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전력 상 퇴로를 확인한 뒤에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뒤쪽을 예의 주시하던 기사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런…….
세상에…….
아무리 흙먼지에 덮였다 하더라도 먼지구름 속의 상황이 전혀 안보이지는 않는 법이다. 하물며 뛰어난 시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다시 말해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르르.
먼지 속에서 솟아오른 돌들은 한데 엉켜 곧 일정한 형태를 이루어갔다. 돌로 된 수많은 거인의 형상으로 말이다. 보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고, 골렘?
이런. 스톤 골렘(Stone Golem)이야.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은 어느새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스톤 골렘으로 바뀌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톤 골렘. 일종의 마법석을 이용해서 돌에 생명을 불어넣어 탄생된 괴물이다. 몸 전체가 돌로 되어 있는 만큼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하며 힘 또한 엄청났다. 또한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팔, 다리가 잘려나가도 금방 재생이 되는 데다 몸 속의 마법석이 파괴되기 전까진 결코 쓰러지지 않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괴물이었다.
물론 스톤 골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마법 실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마법사는 꿈에도 제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스톤 골렘들이 용사들의 퇴로를 빈틈없이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보아도 백은 훌쩍 넘기는 숫자였다.
보고 있던 세르게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과연 놈들이었어.
이 정도의 스톤 골렘을 만들어 낼 정도의 마법 실력이라면 인간 마법사로는 불가능했다. 오로지 마법의 조종인 한 존재만이 이런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 완성된 골렘 군단은 일렬로 늘어선 채 이리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쿵쿵.
동작이 무척 느린 편이었지만 지축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용사들의 심금을 저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스톤 골렘은 설사 대상이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상대하기 극히 까다로운 괴물 중의 하나였다. 물론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충분히 스톤 골렘의 신체를 잘라낼 수 있다. 하지만 스톤 골렘은 몸 속의 마법석이 파괴되기 전까진 끈질기게 죽지 않는다.
두터운 몸 속에 간직된 마법석을 파괴하는 것 자체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므로 용사들의 얼굴엔 질린 기색이 퍼져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라도 저렇게 많은 스톤 골렘들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다. 모두들 전력으로 신전을 향해 질주한다. 스톤 골렘은 동작이 느리니 결코 우릴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세르게이의 명령에 용사들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좁은 신전 입구를 방패삼아 싸우는 것이 그래도 효과적인 대응책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용사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빈틈없이 차단되어 있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말이다.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용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설마 꿈이 아닐까?
얼어붙은 용사들 앞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크르르르.
일단 눈에 띈 것은 엄청난 수효의 중형 몬스터 군단이었다. 일견해 삼백이 넘어 보이는 오우거와 트롤이 손에 무기를 꽉 움켜쥔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날개를 접은 와이번들이 웅크리고 앉은 채 핏발 선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듬성듬성 서 있는 중형 몬스터들의 틈을 오크들이 메우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틀림없는 정예들만 가려 뽑은 오크 보병들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용사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결계지대와 마찬가지로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용사들이 굳어있는 동안에 퇴로를 차단한 스톤 골렘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망연히 오크 군단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용사들.
그들 틈에서 세르게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크들 사이에 선 이질적인 존재.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들에 대해 말이다. 물론 그들은 결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세르게이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도합 다섯. 가망이 없군.
그의 시선이 오크 군단의 중심부에 위치한 붉은 머리 청년에게로 향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감안하면 저자는 아무래도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일 공산이 컸다. 그가 알기로 인간과의 전쟁에 참전한 드래곤 중 레드 드래곤은 베르키스만이 유일했으므로…….
베르키스. 인간과의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드래곤으로써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준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에인션트 급으로서는 드래곤 로드인 크라누스에 이어 두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드래곤이었으며 마법실력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크라누스를 능가할 정도라는 마법광(魔法狂)이기도 했다.
마법에 관한 애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는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을 모조리 리치로 채울 정도였다. 물론 세뇌마법을 통해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도록 조처한 뒤에 말이다.
일전에 펠드리안에 난입한 게덴하이드 역시 베르키스 휘하의 가디언이었다. 30년 전 베르키스는 사로잡은 게덴하이드를 세뇌시켜 자신의 가디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를 리치로 만든 것도 물론 베르키스의 소행이었다. 수명이 짧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자신의 레어를 지키게 하려면 오로지 리치로 만드는 방법 밖에 없었으므로…….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은 스톤 골렘이나 오우거 따위의 중형 몬스터로 하여금 가디언을 삼는다. 그런 점에서 베르키스는 여타의 드래곤들과는 다른 별종 드래곤이라 할 수 있었다. 특유의 타는 듯한 안광으로 운집한 용사들을 쳐다보던 베르키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한 가지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비웃음이란 표정이 말이다. 그는 곧 용사들의 면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 각본에 따라 충실히 연기해 준 배우들이여.
용사들의 얼굴에 암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단지 환영이기를, 아니 꿈이라면 원이 없겠다고 거듭 되뇌였는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꺾여버린 것이다.
쿵쿵쿵.
그 와중에서도 스톤 골렘들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많은 적들을 상대로 용사들이 승리를 거둘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면면을 보아 하나하나 강력하지 않은 놈들이 없었다. 그나마 원래의 전력이었다면 제대로 된 저항이나마 한 번 해볼 수 있을 텐데, 만신창이가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르게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결계 지역 안에서의 일은 당신의 짓이오?
베르키스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애초에 신께서 펼쳐놓으신 결계가 있었다. 원래의 결계는 너희들이 겪은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저 극도의 공포심만을 주어 범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지. 하지만 내가 마법을 사용하여 결계의 속성을 조금 변형시켰다. 공포심 대신 상대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이 끓어오르도록 말이야.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신이 설치한 결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역력히 배어나고 있었다. 그 말에 세르게이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휘하 기사들이 왜 수적으로 뒤지는 상태에서도 무리한 공격을 해 왔는지 말이다. 어찌 보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를 법한 상황이었지만 역시 세르게이는 냉정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뭔가 말하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의 계획을 파악한 것이오?
마치 쥐어짜듯 내뱉는 세르게이의 음성. 베르키스는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노려보던 세르게이는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첩자를 사용한 것이오? 도대체 어떻게…….
이번 작전은 정말 극비 속에 진행된 작전이었다. 포터로 정해진 근위병들조차 당일 아침에 통보 받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마법사와 기사들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신분과 실력을 엄밀히 조사해 아무 이상이 없는 자들로만 선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행적을 이토록 훤히 파악하다니……. 잠자코 있던 베르키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토록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지.
베르키스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지목했다. 그러자 용사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로 쏠렸다. 당사자의 눈이 급격히 뜨여졌다. 베르키스가 자신을 지명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 난 아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뒷걸음질치는 자는 바로 베니테스였다. 이카롯트의 궁정마법사로써 세르게이의 심복임과 동시에 데이몬을 데려오려는 작전에도 참가했던 베니테스 말이다. 물론 그를 쳐다보는 용사들도 무척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 베니테스는 결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세르게이조차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도 되지 않소. 베니테스가 어째서.
물론 그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생각까지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거, 거짓말.
듣고 있던 베니테스는 귀를 막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것은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심지어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냉엄한 말은 계속 들려왔다.
그는 이미 나와 패밀리어(Familiar) 계약을 맺고 있다. 계약을 맺은 직후 기억을 지웠으므로 당시를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베니테스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래곤과 패밀리어 계약을 맺고 있었으며 그동안 용사대의 근황을 드래곤에게 낱낱이 알려왔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베니테스를 쳐다보던 세르게이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의 상황이 이제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군.
오래 전. 칸두라스 왕국이 멸망했을 당시 세르게이는 베니테스를 전장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베니테스는 전투경험이 많은 워 메이지였고, 칸두라스 왕국이 멸망한 이유를 캐내는데 그 이상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니테스는 십여 명의 수하를 대동하고 칸두라스 왕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신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매복에 걸려 수하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하지만 칸두라스 왕국의 멸망에 드래곤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있었습니다.
그날이후 베니테스는 이상하게도 전장으로 파견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전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워 메이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당시 그의 행동이 조금 미심쩍었지만 세르게이는 별달리 상관하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베니테스는 그 이외의 일에도 충분히 쓸모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탓에 베니테스는 궁정 마법사가 될 수 있었고, 이계의 절대자를 초빙하려는 작전에도 어김없이 참가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이 안배한 일이었다니…….
불안한 기색으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베니테스의 시선이 세르게이와 딱 마주쳤다.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여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드래곤의 소행이었다면 자네도 어쩔 수 없었을 테니…….
그 말을 듣자 베니테스의 눈에 격정의 빛이 떠올랐다. 믿어주는 것을 보니 과연 자신이 믿고 의지할 만한 상관이란 생각도 들었다.
베니테스는 결국 참지 못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비록 기억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드래곤의 수족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자기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웠던 베니테스였다.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다니…….
저,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죄송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세르게이는 착잡한 기색으로 다가와 베니테스를 얼싸안았다. 베니테스는 결국 눈물을 펑펑 쏟을 수밖에 없었다.
제,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가던 베니테스의 눈이 별안간 부릅떠졌다. 가슴팍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콸콸콸.
그의 왼쪽 가슴은 이미 한 자루 장검이 관통한 채 연신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출혈로 인해 새하얗게 질린 베니테스의 얼굴이 장검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그리 마음이 편치는 않았는지 세르게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러는 날 이해하게. 미안하네. 우리 계획을 누설한 데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겨, 결코 내 뜻이 아니었는데.
베니테스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은 채 눈을 까뒤집었다.
털썩.
생명이 사라진 그의 몸은 바닥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세르게이는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지금 회심의 미소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한 가지 사실을 머리 속에 새겨 넣고 있는 상태였다. 패밀리어 계약을 맺은 자가 죽는다면 그것을 시전한 자는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 세르게이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충실한 부하의 명을 거둔 것이다.
패밀리어 계약. 상당히 고등한 존재가 그보다 저등한 대상을 상대로 펼치는 일종의 종속 마법이었다. 피 시술자는 패밀리어 계약을 통해 시술자에게 철저히 종속되게 된다. 또한 피시술자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공간을 뛰어넘어 시술자에게 전해진다.
위험부담 없이 주변이나 멀리 떨어진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곧잘 패밀리어 계약을 맺곤 했다. 박쥐나 기타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마한 짐승을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패밀리어 계약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고등한 존재에게는 시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사 9써클의 대마법사라도 인간을 대상으로 패밀리어 계약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드래곤밖에 없었다.
하지만 패밀리어 마법에도 단점이 없진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패밀리어가 죽을 경우 그것을 시술한 자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껏 마법사들 중에서 이유 없이 미치거나 오랫동안 몸져눕는 경우가 종종 보고된 적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패밀리어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은 경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패밀리어가 고등한 존재일수록 시술자는 더욱 강한 타격을 입게 된다. 만약 패밀리어가 인간 정도의 고등한 존재라면 시술자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가해질 것이 분명했다.
세르게이는 이 사실 하나만을 믿고 베니테스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은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패밀리어의 죽음에 결코 무사하진 못할 것이오.
회심에 차있던 세르게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채 말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패밀리어가 죽었는데 어떻게…….
놀랍게도 베르키스의 신상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신 그의 옆에 서 있던 리치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연신 몸을 뒤틀어대는 것을 보니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 했다. 묵묵히 세르게이를 쳐다보던 베르키스가 입을 열었다.
과연 인간은 교활하고 간교한 놈들이 틀림없군. 나는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리치 하나를 매개로 패밀리어 계약을 맺었다. 따라서 패밀리어의 소멸로 인한 고통은 오로지 리치에게만 집중될 뿐이다.
그 말에 세르게이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섣부른 생각 때문에 쓸만한 마법사 한 명을 제 손으로 처치해 버린 것이다. 잔인하기도 한 결단에 심지어 용사들도 세르게이를 향해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명석한 머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는지 세르게이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고통에 연신 몸을 꿈틀대던 리치를 힐끗 쳐다본 베르키스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제 너희들을 시작으로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너희 인간이란 것들은 한 마디로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야.
물론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닌 경우이리라…….
참다못해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나섰다.
물론 당신네들이 매우 강력한 존재란 것은 인정하오. 하지만 인간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모조리 꺾지는 못할 것이오.
베르키스의 시선에 슈렉하이머에게로 와서 멎었다.
그 때의 신관이로군. 서약석을 탈취할 당시 유일하게 살아 도망갔던 신관.
그렇소. 당신들이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존속할 수 있을 것이오.
쥐어짜듯 내뱉는 슈렉하이머의 음성에 베르키스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제법 볼 만 하더군. 하지만 하나 알아둘 게 있다. 너는 철저히 내 계산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을…….
뭐라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너는 인간들을 모두 멸망시키기 위한 내 유희에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간이다.
유희?
그 말에 분노를 느낀 것은 슈렉하이머 뿐만이 아니었다. 늘어선 용사들의 눈에서도 예외 없이 광망이 일렁였다. 인간 모두의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를 단순한 유희라 칭하다니……. 참다못한 기사 두 명이 몸을 날렸다.
죽인다.
4대 기사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실력이 있는 소드 마스터들이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베르키스를 향해 육박해들었다. 동료들을 잃어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상황에서 유희란 말을 듣게 되자 아예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다가오는 소드 마스터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심지어 그의 뒤에 늘어선 리치들조차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들이 지척까지 접근하자 베르키스는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폭사되었다. 그 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소드 마스터의 몸에 적중되었다.
츄팟.
달려들던 소드 마스터들의 몸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그들의 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 있었다. 그것도 잠시. 기사들의 몸은 단계적으로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목, 가슴까지 차근차근 말이다. 신기한 것은 그들의 몸에 걸친 대마법 갑옷까지 함께 부스러진다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 두 명은 곧 바닥에 쌓인 소복한 가루만을 남긴 채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기사 두 명을 소멸시킨 베르키스는 느릿하게 손을 털었다.
고작 인간들이 만든 조잡한 대 마법 갑옷을 믿고 나에게 덤벼들다니…….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슈렉하이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법의 위력에 용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저 정도로 마법 실력이 강하다니……. 평소 대마법 갑옷 때문에 마법 공격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역시 드래곤의 마법은 차원이 달랐다.
왜 네가 나의 유희의 주연 배우가 되었는지 설명해 주겠다. 아마 너는 그것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손을 뻗어 다프네를 가리켰다. 그녀는 데이몬의 등에 업힌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데이몬 역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질린 듯한 표정의 용사들을 둘러본 베르키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우선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최초로 성녀를 발견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점이다.
베르키스의 설명이 진행됨에 따라 슈렉하이머의 안색은 점점 굳어 들어갔다. 그것은 늘어선 용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일이 베르키스에 의해 안배된 것이라니…….
그의 말에 의하자면 성녀의 발견은 베르키스의 명령을 받는 다크 엘프 하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했다.
트루베니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성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나는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물론 베르하젤 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기에 그녀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때문에 나는 석화마법(石化魔法)을 사용, 그녀를 돌로 만들어 나의 레어에서 영면을 취하게 만들려고 했다. 인간들과 베르하젤 님이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계획은 곧 수정되었다. 그것은 곧이어 다가올 드래곤들의 수면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의 시선이 얼어붙어 있는 세르게이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의 노력은 제법 가상했다고 볼 수 있다. 핵심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일반 병사들만 전장에 내모는 수법 말이다. 그 방법 탓에 수뇌부를 일망타진 한 채 마무리를 오크들에게 맡기려던 우리들의 계획에 여지없이 차질이 생겨버렸다.
핵심전력들이 건재하다면 오크들이 결코 인간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섣불리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너희 소드 마스터들을 모조리 처치하기 전까진 마법을 사용해서 수면기를 연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저놈은 얄밉게도 계속해서 소드 마스터들을 전장에서 빼돌렸다. 상황을 보아 수면기 전까지 모두 처치할 수 없을 듯 보였기에 결국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의 군대에 소드 마스터가 존재한다면 오크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오크의 군대엔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키스는 성녀를 이용해 세르게이가 아끼고 아꼈던 전력들을 없앨 계획을 꾸미게 된다.
베르키스는 우선 성녀를 발견한 다크 엘프를 우연을 가장해 슈렉하이머와 만나게 한다. 당시 슈렉하이머는 인간의 존속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동분서주하고 다니던 시기였다. 다크 엘프에게서 성녀에 대한 한 가닥 실마리를 잡은 슈렉하이머. 그는 결국 베르키스의 안배대로 행동하게 된다.
성녀를 얻게 된다면 너희들은 필시 새로운 서약석을 얻어내기 위해 이곳 노스우드로 향할 터. 때문에 나는 암암리에 이곳에 와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너희들의 수를 좀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기에 결계에 손을 대게 된 것이고…….
베르키스의 안배대로 함정은 완성되었다. 결계 개조작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르게이의 명을 받은 어새신 부대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은 용사들이 당한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상잔하게 된다.
그리고 펠드리안에는 결계 속에 구울과 와이트가 우글거린다는 보고가 올라간다.
어새신들에게는 동료들이 어김없이 구울과 와이트로 보였기 때문이다. 용사들의 귀에 베르키스의 이죽거림이 계속 들려왔다.
한가지 더 가르쳐주지.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 사이의 장벽은 벌써 해제되었다.
너희들이 노스우드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에 말이다. 많은 힘을 소모한 때문에 크라누스 님에겐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지. 그분은 지금쯤 레어에서 한창 수면 준비에 몰두하고 계실 것이다.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용사들의 얼굴에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드래곤의 안배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또한 그들이 여기서 허무하게 전멸되어 버린다면 트루베니아는 필시 오크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트루베니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은 결코 장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크의 먹이감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용사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베르키스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너희들을 시작으로 트루베니아에서 인간이란 종족은 사라진다.
이미 스톤 골렘들이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이미 드래곤들의 가디언들은 이곳에 총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수백 마리의 중형 몬스터와 오크 보병들, 베르키스의 리치들까지 가세해 있는 상태. 그것들은 눈에 흉성을 띄워 올리며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가능성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하지만 용사들은 아무 머뭇거림 없이 적을 맞을 준비를 갖췄다. 세르게이가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그대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겠다.
기사들이여. 목숨을 바쳐 명예를 지키자. 비록 여기서 생을 마감할지언정 나는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 말에 기사 몇 명이 호응했다.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오.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했소.
하지만 세르게이의 눈망울엔 이미 좌절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캐스팅이 시작되었는지 드래곤들의 손에서 광휘가 동시다발적으로 피어올랐다. 하지만 용사들의 얼굴에는 추호도 겁먹은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톤 골렘과 중형 몬스터들의 돌격을 필두로 와이번과 오크 보병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 뒤로 드래곤과 리치의 대대적인 지원사격이 이루어졌다.
끄아아악.
케르륵.
피와 살이 튀는 처절한 접전. 용사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집요한 저항을 해 댔다. 정말 놀랄만한 투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압도적인 전력차이를 극복할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을 소진한 용사들은 결국 하나씩 싸늘한 대지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용감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스톤 골렘 군단의 절반이 폐물이 되어버렸고 살아남은 중형 몬스터는 고작 스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오크 보병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목적했던 존재, 드래곤은 단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용사들의 힘으론 스톤 골렘과 중형 몬스터로 이루어진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노스우드 평원에서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인간은 단 둘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가?
용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인 데이몬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그의 등에는 의식을 잃은 다프네가 축 늘어진 채 업혀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에 의해 그녀는 또다시 크나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실신하지 않았다면 더욱 고통스러웠으리라…….
신기하게도 스톤 골렘들과 중형 몬스터는 데이몬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크 보병들조차 접근하지 않았기에 둘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데이몬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다프네를 업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여러 번이나 생을 마감했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베르하젤의 눈과 입인 성녀만은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허무하군.
데이몬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시선이 늘어진 세르게이의 시신에 가서 멎었다.
머리통이 떨어져나간 채 피바다 속에 누워있는 총사령관 세르게이. 스톤 골렘의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세르게이의 머리통이 뽑혀져나가는 광경을 데이몬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쳤던 세르게이 공작의 최후였다.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으면서까지 동분서주했지만 그는 결국 드래곤이란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비교적 용감히 분전했지만 애당초 그의 검술실력으론 오우거 한 두 마리가 한계에 불과했다. 그는 이제 결계지역 안에서 보였던 듀라한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두 번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이카롯트의 상징이라는 4대 기사 역시 시신이 되어 나뒹구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가장 많은 스톤 골렘들이 파괴되었고 몸통이 두 조각으로 잘려나간 중형 몬스터 역시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힘이 한정된 인간이었다. 체내의 마나가 점차적으로 소진되자 그들은 하나씩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헬버트론은 스톤 골렘의 거대한 주먹에 짓이겨진 채 한 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두개골이 으스러진 채 두 눈알이 튀어나온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나마 그는 다행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는 드래곤의 헬 파이어에 격중되어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사라미스의 최후 역시 끔찍했다. 그의 몸은 상체만 남아 스톤 골렘의 잔해로 보이는 돌무더기에 맥없이 걸쳐져 있었다. 하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잘린 허리 어름에서는 잘린 창자와 함께 피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무심히 쳐다보던 데이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곳으로 오며 얼굴을 익혔던 용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인간은 오직 그만이 유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슈렉하이머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그로 짐작되는 시체는 없었다.
라인델프처럼 흔적도 없이 타버렸나 보군.
고개를 내저은 데이몬은 실소를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별달리 슬픈 감정은 들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생을 체념하고 있던 상태. 등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에 그는 몸을 돌렸다.
쿵, 쿵.
육중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스톤 골렘 두 기가 다가왔다. 험난했던 격전을 보여주듯 돌로 된 동체가 이리저리 패여 있었다. 하지만 마법석이 무사했는지 골렘들의 움직임은 비교적 원활한 편이었다. 데이몬의 옆으로 다가온 스톤 골렘들은 육중한 팔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라는 모양이군.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접전의 와중에 틈을 보아 도망쳐야 했지만 데이몬은 결코 그럴 순 없었다. 우선 다프네를 두고 혼자만 갈 순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지금 이순간 데이몬에게는 다프네가 자신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또한 데리고 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을 뿐더러 그에겐 아이스 트롤에게서 다프네를 보호할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물론 드래곤의 손에서 빠져나간다는 자체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발상이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죽 늘어선 드래곤들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그들 틈으로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보이는 리치들이 마치 호위하듯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저번에 보았던 게덴하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이 다가오자 베르키스는 눈을 빛냈다. 이미 그는 데이몬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베니테스를 패밀리어로 삼았던 덕택에 말이다.
네가 그 이계에서 데리고 온 소드 마스터로군. 놀라워 이계의 존재를 보게 되다니…….
데이몬을 쳐다보던 베르키스의 눈엔 득의한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심심하지는 않겠군. 오백 년 후 아르카디아를 멸망시키고 난 뒤 또다시 유희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데이몬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또다시 중원을 침공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물론. 이미 우리들은 인간이란 존재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간주했다. 그것은 네가 살던 곳의 인간들에게도 틀림없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보통 이럴 경우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은 뻔했다. 하지만 상대는 결코 자신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한 번 시도해 보면 재미있겠군.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그곳에 사준환이란 이름을 가진 녀석이 있을 거야. 기회가 되면 그놈을 가장 처참하게 죽여줄 수 있겠나? 내겐 그놈에게 갚아줄 빛이 있으니 말이야.
뜻밖의 반응에 베르키스는 멍해졌다. 그 때문에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반말로 지껄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세르게이조차 감히 반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존재에게 말이다. 인간계 최강의 존재라는 드래곤이 주는 위압감은 그 정도로 컸다.
재미있군.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인간들은 너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던데 말이야.
당연하지. 나는 그들과 전혀 틀리거든.
빙글빙글 웃으며 이죽거리는 데이몬. 이미 삶에 미련을 버린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광오한 태도에 결국 베르키스도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군.
글세? 강아지치고는 좀 크지 않아?
마치 잡아먹을 듯 데이몬을 노려보던 베르키스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이미 그는 베니테스를 통해 데이몬에 대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가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까지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