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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아니 우리는 정중히 사양하지.

거절을 듣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구태여 저런 녀석들을 위해 요리를 만드는 것은 그도 별달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주방에 들어가고 나자 헬버트론은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 라인델프가 영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말을 걸었다.

난 저 녀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생긴 것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전혀 예의가 없고…….

얼씨구? 넌 예의가 있어?

라인델프는 헬버트론의 농지거리를 묵살한 채 자신의 의견을 펼쳐나갔다.

사실 흑마법사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예전 같았으면 보는 즉시 목을 날려버렸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존립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 때야. 이미 저자의 실력은 내가 겪어보았지. 공작 전하의 말씀에 의하면 저자의 오우거 잡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라고 하더군. 그렇다면 그는 우리 계획에 꼭 필요한 자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출신지도 명확하지 않고……. 또 놈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잖아?

뭐 그 점에 대해서는 별달리 상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헬버트론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계획이 성공리에 끝난다면 세르게이 공작전하께서 그 자를 살려두실 까닭이 없을 테지. 어쨌든 놈은 타 차원에서 건너온 놈이고 이미 공작 전하께 여러 번 무례를 범했으니 말이야.

그건 그래. 놈이 제 아무리 날뛰더라도 우리 중 한 명이 맡는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지. 물론 네놈만 빼고…….

이런 빌어먹을…….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넉다운 된 것은 분명 놈이었을 거야.

어지간한 헬버트론도 패배를 상기하자 별안간 음성이 거칠어졌다. 신중한 성격인 듯 라인델프가 주의를 주었다.

쉿 조용히……. 놈이 듣겠어.

네 소드 마스터들이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데이몬은 주방에서 연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다음은 연어 살 4 파인트.

아, 알겠습니다.

난데없이 들어 닥쳐 요리를 한답시고 날뛰는 작자 하나 때문에 귀족 식당의 요리사들은 얼이 반쯤 빠져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요리하는 일을 천한 일이라 생각하는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추악하게 생긴 조그마한 녀석 하나가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복장을 봐서 고급 귀족이 틀림없어 보였기에 요리사들은 군소리 없이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후추와 소금, 그리고 완두콩 기름을 조금 가져와.

하, 하오나 완두콩 기름 같은 저급 기름은 이곳에 없는지라…….

멍청한 자식! 완두콩 기름이 왜 저급 기름이야? 그럼 뭐가 있지?

중년의 요리장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황궁 요리실을 맡은 지 어언 20년 동안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오, 올리브 기름은 있습니다만…….

올리브 기름? 흠! 그것도 괜찮겠군. 일단 가져와 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이름만 대면 재깍재깍 재료를 가지고 오는 때문에 데이몬은 비교적 편하게 요리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이참에 상당한 고급 요리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군. 이참에 황실 요리장 자리나 꿰어 차 볼까.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에 몰두하는 데이몬. 그 말을 들은 기존의 요리장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제미랄. 어디서 반 토막 같은 게 굴러 들어와 요리를 한다고 난리야?'

이것저것 뒤섞어서 팬에서 볶이고 있는 재료들을 보면 별 반 맛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 재료의 구성이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배합이었고 양념 역시 전혀 엉뚱하게 들어가 있었다. 맵고 짠맛과 신맛을 내는 향신료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였으니 말이다.

데이몬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요리는 중원에서도 오로지 황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최고급 요리 중 하나였다. 오로지 황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요리이기 때문에 외부에는 명칭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요리 방법이나 재료의 구성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우연한 기회에 비법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사준환이 그를 위해 납치해 온 숙수들 중에는 황궁에 소속된 숙수가 하나 끼여 있었던 것이다.

세, 세상에…….

당시 요리의 맛을 본 데이몬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식가라 자부하며 무수한 요리를 맛보았지만 이처럼 오묘한 맛을 내는 요리는 처음이었다. 가히 중화요리의 정수라 일컬을 수 있음직한 요리. 그 때의 맛을 잊지 못한 데이몬은 모처럼 그 요리를 만들어 시식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놈을 준비하려면 재료를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지.

연어 살이 어느 정도 볶이자 데이몬은 팬 속에다 버섯을 첨가했다. 원래 사용하는 중원의 버섯보다 크기도 컸고 향도 달랐지만 양념의 배합을 약간 달리 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듯 했다. 게다가 올리브 기름은 완두콩 기름보다 오히려 부드러워서 요리의 향이 제대로 살아 날 것 같았다.

팬 속에서 볶이고 있던 요리는 서서히 제 냄새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냄새에 데이몬은 탄성을 질렀다.

캬! 과연!

옆에서 요리장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요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못미더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요리의 냄새가 발산되기 시작하자 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이것은 그가 생전 처음으로 맡아보는 고소한 요리 냄새였다.

어, 어떻게 이런 냄새가…….

연신 코를 벌름거리는 요리장. 냄새만 맡아도 절로 군침이 돌만큼 요리의 향은 매력적이었다. 처음에는 고소했다가 어떻게 보면 싱그러운 풀 냄새 같기도 한, 요리의 냄새는 정말 복합적으로 풍겨오고 있었다. 벌써 요리장의 입 속에는 침이 가득 고이다 못해 목구멍으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는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요리실 내부의 요리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군침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본 데이몬은 내심 어깨를 으쓱했다.

이놈들아! 중화 요리는 예로부터 천하 제일이니라……. 그저 고기를 굽거나 삶는 네놈들이 어찌 이 맛을 알까?

요리의 냄새는 요리실 내부를 진동하다 못해 연회장 내부로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매혹적인 냄새에 식사를 하러 들어온 귀족들은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햐! 기가 막히는 군.

입맛이 돈 귀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냄새를 풍기는 요리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하지만 요리사들이 애당초 그럴 권한이 없었다. 고객이 직접 만들어 먹을 요리인데 어찌 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난색을 표하며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 요리는 데이몬 남작께서 직접 만드시는 요리입니다. 직접 드실 것이기 때문에 그 요리만은 주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

뭐라고 직접 요리를 한다고…….

남작이나 되는 작자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말에 귀족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문할 수 없는 요리란 말에 그들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이 무척 없는 사람이군. 하지만 냄새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

요리사들의 경의 어린 눈빛 속에서 데이몬은 마침내 요리를 마쳤다. 요리사들의 눈빛이 경멸감에서 경의로 바뀌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팬 속의 요리를 접시에 쏟아 부은 데이몬은 향이 날아가지 않도록 뚜껑을 단단히 덮었다. 그리고 막 접시를 들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다급한 음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저…. 대단히 죄송하지만 제게 요리의 맛을 감상할 영광을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요리장이었다. 그의 눈망울에는 어떻게 해서든 요리의 맛을 보겠다는 열의가 가득 차 있었다. 향에 반한 나머지 맛이 어떨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요리장이었다. 내심을 짐작한 데이몬은 흔쾌히 승낙했다.

좋다. 까짓 것.

접시를 열어 요리를 한 점 집어준 데이몬. 그는 요리장이 요리를 먹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요리의 맛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데이몬이었다. 요리를 입에 넣은 요리장이 잠시 침묵을 지키자 궁금해진 요리사들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저, 마스터…. 맛이 어떠신지?

향만 그럴 듯 하지 맛은 별로겠지요?

요리사들의 질문공세에도 요리장은 침묵을 지켰다. 별안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요리사들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도대체 왜 눈물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요리장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앞으론 나에게 더 이상 마스터라고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

오늘?

지, 진정한 하늘을 뵈었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요리의 신이었다. 신. 나는 이토록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나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말을 마친 요리장은 결국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순수한 요리 실력의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 때문이었다. 요리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요리장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 되었다.

요리접시를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데이몬은 헬버트론에게 손짓을 했다.

맛이 궁금하다고 그랬지? 뚜껑을 열고 먹어도 좋아. 물론 너 하나에 한정된 허락이겠지만 말이야.

주방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아까부터 입맛이 동했던 터라 헬버트론은 사양하지 않고 뚜껑을 열어 젖혔다. 순간 요리의 향이 온 식당 내부를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햐! 냄새 정말 죽이는데…….

맛은 더 죽일 거야. 난 아무에게나 요리를 만들어주지 않거든…….

그럼 맛을 한 번 볼까?

연회장 안 사람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으며 헬버트론은 요리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코끝을 맴도는 먹음직스런 냄새에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헬버트론은 요리를 입안에 넣고 한 입 씹었다. 순간 요리는 그래도 침과 섞여 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동시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응!

딱딱하게 굳어버린 헬버트론의 얼굴. 그 모습에 나머지 세 기사들은 긴장한 채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혹시라도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뒤이어 이어진 헬버트론의 영문 모를 행동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와구와구.

헬버트론은 정신 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고개를 아예 접시로 쳐 박고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맛있는 과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의 행동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도무지 모를 정도로 요리의 맛은 훌륭했다.

일류급 요리사에 의해 단련된 그의 입맛도 전통 있는 중국 요리의 유혹을 견뎌내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요리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이봐. 헬버트론.

뭐 하는 거야?

의아해진 동료 기사들. 물론 그들이라고 냄새에 군침이 돌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체면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헬버트론이 보여주는 모습에 요리의 맛이 어떤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그들이었다.

이봐! 그렇게 맛있어?

대답을 좀 해봐.

거듭되는 질문을 거듭 무시한 채 헬버트론은 여전히 접시에 고개를 쳐 박고 정신 없이 먹어댈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접시가 완전히 빈 다음에야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깨끗하게 비웠는지 아예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헬버트론은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에는 예외 없이 경외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정말 잘 먹었다.

뭐, 인사까지야.

이 헬버트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훌륭한 맛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설명이겠지만 요리를 먹으며 오르가즘 비슷한 것을 느낄 정도였다.

뭐 맛있게 먹었으면 되었고…….

요리접시가 아직 비진 않았지만 데이몬은 식사를 마쳤다. 어느 정도 배가 찬 상황이었고 내심 잘난 체 하는 세 기사를 좀 놀려줄 심산도 있었다. 수건을 들어 입을 닦은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군. 요리를 해 준 대가로 내게 궁전 구경을 좀 시켜주지 않겠어?

헬버트론을 이곳에 남겨둔다면 분명 자신이 남긴 요리까지 섭렵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그를 데리고 가야 했다.

그, 그럴까?

헬버트론은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물론 몹시 아깝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이 남긴 요리를 한 번 응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어서며 그는 동료들에게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죽이는 맛이었어. 아마 너희들은 죽었다 깨도 모를 정도로 말이지.

데이몬이 헬버트론을 데리고 나간 뒤 남은 기사들의 시선은 곧 접시에 남은 음식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요리의 맛이 어떨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음식접시에 손을 대는 것은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카롯트를 이끌어나가는 네 기둥이라는 소드 마스터들이 남이 먹다 남은 음식에 눈독을 들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음식의 향이 남아 코를 자극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식당 내부의 모든 귀족들이 요리 접시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접시가 다른 탁자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마도 같은 탁자에 있었다면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미치겠군.'

'대관절 어떻게 한다?'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 사라미스 세 사람의 얼굴에 짙은 갈등의 빛이 거듭 교차했다.

마음 같아서는 요리를 맛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탁자를 향해 집중되는 시선으로 말미암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말 그대로 유혹과 체면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하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다 드셨으면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의 요리사들이 다가와 탁자 주위를 빼곡이 에워쌌다. 하나같이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서 탁자를 치우려는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린 라인델프가 짐짓 헛기침을 했다.

아니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다. 치우려면 조금 기다리거라.

요리사들은 몹시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고 라인델프는 침을 꼴깍 삼키며 포크를 들어 접시로 가져갔다. 순간 식당 내부의 무수한 시선들이 그의 얼굴로 꽂혔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요리의 맛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 말이다. 얼굴이 연신 화끈거렸지만 과감하게 포크로 요리를 찍은 라인델프는 그것을 재빨리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헬버트론과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마, 맛이 어때?

괜찮아?

프림베르그와 사라미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지만 이미 라인델프의 뇌리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맛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접시에 쳐 박았다. 이것까지도 헬버트론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습에 남은 동료들은 반사적으로 접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치사한 자식.

같이 먹자.

곧 그곳은 동료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그 모습을 뜻을 이루지 못한 불쌍한 요리사들과 귀족들이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간 데이몬은 한 동안 헬버트론으로부터 궁전 내부를 안내 받았다. 훌륭한 요리를 대접받은 데 대한 보답인지 그는 비교적 친절하게 궁성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궁궐에 대해 데이몬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무리 화려하다 하더라도 그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인 것이다.

결국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헬버트론을 떼어놓았다. 그와 헤어진 뒤 데이몬은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고민거리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법 실력을 급상승시킬 수 있을까?

그를 고뇌하고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준환에 이어 복수해야 할 대상이 하나 더 생겼고 그것은 바로 강력한 존재 드래곤이란 사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는 설사 자신이 온전한 몸이었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존재라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줍잖은 마법으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야. 어떻게 해서든 빨리 8,9 써클로 올라서 네크로멘서가 되어야 된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보니 그 시간동안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헤이스트를 마구 남용한데다 몸을 함부로 굴린 때문에 그의 몸은 이미 심하게 노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솔직히 20년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벌써 오십 줄에 접어든 터라 데이몬은 안면을 찡그렸다.

고작 이십 년, 정상적인 방법으론 6써클에도 오르기 힘들다. 어디 속성으로 마법을 익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배운 지식에 유추해 보건데 마법이란 학문은 오히려 무공보다도 속성이 힘들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공이라고 해서 결코 속성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동안 수많은 고수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고 그 결과 나름대로의 속성법이 여러 문파에 정립되어 있긴 하지만 속성법들 대부분이 치명적인 약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례로 데이몬이 익힌 천자혈마공이 바로 그러했다. 천인공노할 만한 연성방법도 문제였지만 강해지더라도 마성이 골수에 사무쳐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인 것이다.

내공수련법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사파의 내공심법이 정파의 그것에 비해 연성속도가 빠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일정 수준까지였다. 절정의 경지에 접어들면 사파의 내공심법은 더 이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름하여 마의 벽에 봉착하는 것이다. 그 벽을 깨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정파 내공심법에 비해 가능성이 무척 희박했다. 물론 절정의 경지 정도라면 이곳 트루베니아에선 능히 이름을 떨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방법이 없군.

무공이던 마법이던 간에 정석에 따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수련하는 것만이 오직 최선이었다. 속성으로 익힌다는 것은 분명히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주화입마에 빠질 우려도 있었다. 거기에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마법에는 속성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도일이 정립해놓은 속성법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3써클까지만 적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 이후의 단계는 오로지 정석적인 방법으로만 길을 밟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데이몬에게 그 방법을 시도할 만한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데이몬은 연신 욕설을 퍼부으며 정원을 걸어갔다. 곱게 단장되어 있는 정원이었지만 생각에 팔려 있느라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 잠깐만요.

난데없는 음성에 데이몬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앞으로 내딛던 발을 허공에 멈춘 채 말이다. 뒤이어 누군가가 그를 향해 후닥닥 달려들었다. 왜소한 그림자는 데이몬의 발 앞에서 딱 멈췄다. 곧이어 안도감이 역력히 배어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행이군요.

보고 있던 데이몬의 뇌리에 써늘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생각에 팔려있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감각으로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대응자세를 취했다. 상대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는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집이잖아? 그것도 젖비린내 나는…….

데이몬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한 이는 소녀였다. 대략 십 칠, 팔세 정도 되었을까? 수수한 백의를 입은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흙바닥에 대고 있었다. 옷자락이 흙으로 더럽혀 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데이몬은 일단 소녀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살폈다.

꽃이잖아?

소녀는 이름 모를 꽃 한 줄기를 두 손으로 곱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어여뻐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진 데이몬을 향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마워요. 걸음을 멈춰줘서…….

순간적으로 분통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이 막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다.

이런 빌어먹을 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듯한 욕지거리가 막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찰나에 소녀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허억.

순간 데이몬은 숨이 콱 막히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단순히 예쁘다는 말보다는 한없이 귀엽다는 표정이 옳을 듯 싶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은 마치 하늘의 은하수를 옮겨다놓은 듯 싶었고 오똑한 코와 도톰하다 싶은 입술은 가히 미란 이런 것이다 하고 강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소녀의 미모에 데이몬은 우두커니 굳어버렸다.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말이다.

그 모습에 소녀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입 좀 다무세요. 침 떨어지겠어요.

으음!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데이몬이 헛기침을 했다. 괜히 계면쩍어진 탓에 그는 또다시 고개를 들고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별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만 대하면 마치 얼어붙은 듯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속으로만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내가 왜 이러지? 갈 때가 되었나?'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데 갑자기 코끝에서 풋풋한 방향이 풍겨져왔다.

한없이 싱그럽고 달콤한 냄새였다.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크게 뜨여졌다. 소녀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코끝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당황해진 데이몬은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런 황당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살포시 웃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처음 보는 분이군요? 오신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그, 그렇다.

저도 그래요.

말을 마친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살짝 주름잡힌 눈꼬리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모습.

그 모습에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으며 또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소녀의 미소는 사람의 혼백을 송두리째 빠져나가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 이년은 요물이야. 결코 사람이 아니야.'

눈을 감은 채 연신 고개를 내젓던 데이몬의 뇌리에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는 데이몬이 중원에 있을 당시 안면이 있던 마도 고수 하나의 영상이었다.

소살마군 등천리. 그는 마교의 십대 장로 중 한 명으로써 미공(眉功)의 달인이었다.

나이가 일흔에 가까웠지만 흡정술(吸精術) 덕택에 결코 서른이 넘어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진 자로써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색마이기도 했다.

그가 가장 장기로 삼는 절기가 바로 미공이었다. 사도의 절기인 환영마소(幻影魔笑)를 극성까지 익힌 탓에 미공으로 상대의 혼백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바로 그의 특기였다. 그의 뇌살적인 미소가 얼마정도의 위력을 지녔는지는 데이몬도 익히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의 환영마소(幻影魔笑)는 대상이 여자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대로 혼백을 뽑아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소살마군의 미소를 한 번 본 여자라면 아무리 천하 열녀라 해도 소용없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대로 소살마군의 품에 안길 정도니 말이다.

소녀의 미소는 그 소살마군의 환영마소(幻影魔笑)에 능히 비교될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하나 전자는 극도의 무공절기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눈을 꼭 감은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욕설을 퍼부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계집! 무슨 수작 부리는 것이냐?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소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전 계집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다프네예요.

네년은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칠게 내뱉던 데이몬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 덕에 소녀의 뇌쇄적인 미소를 여지없이 보고야 말았다. 바로 눈앞에서 본 덕에 데이몬의 뇌리는 삽시간에 하얗게 비어가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프네의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저, 정말 죽여주는 미소로군. 이건 환영마소 따위의 사공이 아냐.'

다프네의 미소는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또한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추호도 사심이 깃들여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절로 가슴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저 정말 아름다운 계집이군. 마치 선녀처럼 말이야.'

데이몬은 꼼짝도 하지 않고 다프네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껏 눈에 담아두려는 듯이 말이다. 웃는 낯으로 데이몬을 마주 쳐다보던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제 얼굴 뚫어지겠어요.

그, 그러냐?

데이몬은 급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심각하게 고뇌해야 했다. 그 얼마나 당당했던 데이몬이었던가? 이카롯트 제일의 권력자인 세르게이 공작에게까지 그는 거침없는 욕설과 하대로 일관했던 전례가 있었다. 설사 드래곤 앞에 선다고 하더라도 심중의 말을 못 털어놓을 자가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한낱 소녀 하나 앞에서 이렇게 쩔쩔매다니…….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복장을 보니 귀족이신가 봐요? 그것도 아주 높은…….

아니……. 그, 그렇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려던 데이몬은 생각을 바꿨다. 썩어빠진 귀족 행세를 하는 것이 비록 적성에 맞진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다프네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프네는 빙긋 웃으며 데이몬의 손을 잡아끌었다.

잘 되었네요. 그럼 절 좀 도와주세요.

손길이 닿는 순간 데이몬은 마치 라이트닝 볼트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얼른 손을 잡아 빼며 급급히 되물었다.

무, 무엇을 말이냐?

화단에 물을 좀 주고 싶은데 도무지 우물로 갈 수가 없네요. 경비하시는 병사 분들께서 상부의 허가가 없다고 결코 내보내주시지 않거든요? 높은 귀족이시라면 절 좀 제발 내보내 주세요.

뭐 뭐라고?

저걸 보세요. 화단의 꽃들이 바짝 타 들어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해? 불쌍한 것들…….

발을 동동 구르는 다프네의 모습에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닌게 아니라 화단의 꽃들이 모조리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듯 싶었다. 아마도 정원지기들이 모조리 징집되어 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불쌍한 꽃들이 말라죽게 내버려두시진 않겠죠? 아저씨 절 좀 도와주세요.

그 정도야.

데이몬은 으쓱하고 어깨를 폈다. 물론 그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다프네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젠장 내가 정말 왜 이러지? 한낱 계집아이에게 이토록 빠져버리다니…….'

물론 다프네의 부탁 정도는 가볍게 해결할 수 있을 듯 했다. 경비하는 병사라면 근위병이 분명할 터 아마도 그들은 상부의 명령보다 자신을 더 두려워할 터였다.

수틀리면 놈들을 가차없이 때려눕혀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데이몬이었다. 마음이 급했던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다프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데이몬은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머리가 빠지게 고민해야 했다.

출입문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근위병들 몇이 핼버드를 교차시켜 진로를 막았다.

정지! 무슨 일이…… 헉!

돌연 한 명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근위병 한 명이 자신을 쳐다보며 몸을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기세 좋게 다프네가 나가는 것을 막은 것까진 좋았지만 뒤에 따라온 이를 본 뒤 나온 반응이었다.

오랜만이군.

이를 드러내며 하얗게 웃는 악귀(?)를 쳐다보며 근위병은 자신도 모르게 한 쪽 눈을 가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한 손으론 가릴 수 없을 만큼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정체는 바로 오늘 아침 데이몬에게 매직 미사일을 선물 받고 뻗어버린 그 근위병이었다. 때문에 데이몬을 보자마자 근위병에겐 그 때의 공포가 새삼 치밀어 올랐다.

무, 무슨 일인지?

나머지 근위병들이 쭈뼛거리며 용무를 물었다. 모습을 보아 데이몬에 대한 악명을 익히 알고 있는 듯 했다. 데이몬은 일부러 얼굴을 험상궂게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이 아이와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한 방씩 얻어맞고 문을 열 것인지 순순히 열 것인지 열 셀 동안 생각해 본 뒤 결정하기 바란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근위병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사실 그들에겐 그 누구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란 명령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는 법. 눈 앞의 악귀는 도저히 말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라. 모조리 때려눕혀서라도 널 내보내 주겠다.

다프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느끼자 데이몬은 일부러 마나를 살짝 끌어 모았다.

건틀릿이 눈부시게 빛나자 안 그래도 멍이 들어 시퍼런 근위병의 얼굴이 아예 샛노랗게 변해버렸다.

'하. 할 수 없군.'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서로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근위병들은 곧 결정을 내렸다.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마음 내키면 생각해 보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해대는 데이몬.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근위병들은 쭈뼛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채 말이다.

데이몬은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다프네를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근위병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재수 옴 붙은 날이로군. 그런데 놈과 함께 나간 소녀는 도대체 누구지?

글세? 시녀는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이 제법 예쁘더군. 가만…….

주섬주섬 말을 늘어놓던 근위병의 별안간 경직되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지나가서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데 별안간 근위대장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 누구의 출입도 통제하라는, 특히 젊은 여자의 경우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

입 소문이 엄격히 단속되었기에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궁전 내부에 인간의 운명이 달려있는 여인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위병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사실 성녀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녀가 맞는다면 우리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은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달려나갔다. 겁에 질려있던 아까와는 달리 근위병들의 태도엔 데이몬과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기백이 넘쳐흘렀다. 이것은 단순한 처벌 차원이 아니었다. 트루베니아에 사는 인간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그녀만은 보호해야 했다. 어차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판사판이란 심정으로 검 자루를 꼭 쥐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의 얼굴엔 안도감이 떠올랐다.

다, 다행이군.

두 남녀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이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특히 제 몸뚱이 만한 물동이를 짊어진 채 걸어오는 악귀의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근위병들의 얼굴에는 웃음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우루루 달려가서 둘의 주위를 에워쌌다.

뭐야?

데이몬이 눈을 치켜 떴지만 근위병들은 막무가내였다. 한 근위병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한 쪽 눈두덩이 시퍼렇게 물든 바로 그 근위병이었다.

문까지 안전하게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마다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이 뭘 잘못 쳐 먹었나?

판이하게 변한 근위병들의 태도에 다소 어리둥절한 데이몬. 그러나 자청해서 호위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둘은 근위병들의 철통같은(?) 호위 하에 무사히 궁정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백짓장같았던 근위병들의 얼굴은 그때서야 본래대로 돌아왔다.

오늘 일은…….

멀찌감치 걸어가는 둘을 보고 근위병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간주해 버리고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기로 한다. 알겠나?

두말하면 잔소리.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근위병들의 얼굴엔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이 배어나고 있었다.

여기 놈들은 나와 미적인 감각이 틀린 모양이지?

다프네와 함께 화단 쪽으로 걸어가며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까지 숨이 막혀 다프네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데이몬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그 정도로 탁월했다. 그런데 근위병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프네를 보고도 별달리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정말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다프네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어요. 여기예요.

음성을 들으니 또다시 가슴이 떨려왔다.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데이몬은 일부러 쿵 소리를 내며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튀어 오른 물방울에 얼굴과 옷자락이 흠뻑 젖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머.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 손을 뻗었다. 옷소매로 데이몬의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주려는 것이다. 도리어 놀란 것은 데이몬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연신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졌다. 다프네의 손길이 스쳐지나간 부분은 특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곤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데이몬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자신이 왜 이러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소 떨리는 듯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여, 여기다 뿌리면 되느냐?

그래 주시면 고맙겠어요. 아저씬 정말 친절하신 분이시군요.

데이몬은 홍당무가 된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화단에 물을 주었다.

생각해보니 꽃에다 물을 주는 일은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단에 물을 뿌리는 데이몬.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신경 써서 한 때문에 꽃들은 골고루 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다프네는 또다시 생긋 웃었다.

힘드셨죠? 아마 꽃들이 아저씨께 마음 속으로 정말 고마워 할 거예요.

그, 그러냐?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든 데이몬. 하지만 환하게 웃는 다프네의 얼굴을 대하자 또다시 가슴이 설레어 올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난 이만 가보마.

다프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벌써 가시게요? 저랑 얘기나 좀 나누시고 가시지…….

내, 내일 오마.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할 수 없군요. 그럼 내일 이 자리에서 아저씰 기다릴게요. 꼭이요.

다프네의 음성을 들으며 데이몬은 땅을 박찼다.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한낱 계집아이에게 정신이 홀려버리다니…….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데이몬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빌어먹을 놈. 멍청한 자식. 그러고도 네놈이 스승의 복수를 할 수 있겠느냐? 수호마왕군들이 시퍼렇게 눈 부릅뜨고 저승에서 쳐다보고 있다. 한낱 여색에 정신이 팔려 대의를 잊으려 하느냐? 정신 차려라.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다프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특히 수줍은 듯이 웃는 해맑은 미소는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근처 분수대가 눈에 띄자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첨벙.

아직까지 물이 차가운 계절이었다. 물보라를 사방으로 튀기며 뛰어든 탓에 데이몬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신 두방망이치던 가슴이 차츰 진정되었고 붉게 상기된 얼굴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데이몬은 연신 고함을 치며 머리를 물 속으로 쳐 박았다 빼기를 반복했다.

요, 요물.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요물.

들뜬 마음이 차츰 진정되자 데이몬은 터벅거리며 분수대 밖으로 나왔다. 오한이 들어 이빨이 덜덜덜 떨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근처를 경비하던 근위병들이 서너 명 분수대 근처로 몰려와 데이몬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데이몬은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뭘 보나?

아니 왜 갑자기 분수대에 뛰어드셨습니까?

내가 살던 곳의 목욕법이야. 왜 아니꼽냐?

아, 아닙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하는 격언을 떠올리며 근위병들이 물러가자 데이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긴 춥군. 으으으. 요, 요물. 가만……

별안간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다프네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자신을 대하는 다프네의 태도는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우 여자들은 자신을 마치 징그러운 벌레나 도마뱀 보듯 대했다.

그것은 그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흉측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외모는 여자들의 심미안과는 아예 극성이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품에 안길 경우조차도 여자들의 몸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이미 거기에 만성이 되어버린 나머지 데이몬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치부해왔다. 하지만 지금 그 상식이 여지없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몸이 흠뻑 젖은 것도 모르고 데이몬은 분수대 옆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다프네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님이었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다프네는 결코 자신을 꺼려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척 친밀하게 자신을 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행동에 결코 사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달한 감각을 가진 만큼 데이몬은 능히 상대의 진의를 꿰뚫어볼 수 있다고 자부했다. 눈동자의 움직임, 하찮은 손놀림이라도 유심히 살펴본다면 충분히 속셈을 찾아낼 수 있다. 일례로 데이몬은 벌써 여러 번이나 여 살수의 정체를 간파해 낸 적이 있었다.

물론 중원에서의 일이었고 당시는 무수한 방파에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그들의 청부를 받은 살수집단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여살수들을 파견해서 데이몬의 목숨을 노렸다. 미모는 기본이었고, 방중술 따위의 남자를 홀리는 기술에 도가 튼 여 살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데이몬의 감각을 피해 가진 못했다.

요망한 것들.

데이몬은 그녀들의 미소가 가식이란 사실을 한 눈에 간파했고 그녀들은 데이몬의 호조아래 예외 없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에는 미공이나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드는 몽혼약을 사용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어떤 방법도 데이몬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 데이몬은 한 마디로 닳고 닳은 사파의 거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랐다. 다프네가 자신을 대하는 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고, 음성에는 걱정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데이몬은 맹세코 지금껏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오직 스승 도일말고는…….

허 참. 별일도 다 있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계속 머리를 굴린 때문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는 힘없이 걸음걸이를 떼어 숙소를 향해 옮겨놓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자신의 숙소 말이다. 일단 눈을 좀 붙이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데이몬은 한동안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렸다. 수련에 몰입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의 생각 때문에 도저히 정신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가 봐야 하나? 아니야. 괜히 그랬다간 어제처럼 볼썽 사나운 꼴이나 보일 텐데…….

그에게 어제의 경험은 정말 한심한 것이었다. 사람의 목을 베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파 거두인 자신이 한낱 계집아이 앞에서 그처럼 쩔쩔매는 꼴이라니…….

그랬던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함을 지르며 고개를 베개 속에 파묻었다.

그년은 요물이야! 요물! 요물.

그는 거듭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제 같은 꼴을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드래곤이 아니라 심지어 염라대왕 앞에서도 섣불리 꿀리지 않을 자신이 아니던가? 수족이 잘려나가고 심장에 검이 박혀도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 앞에서 입조차 제대로 떼지 못한 채 가슴만 조이다니…….

나는 가지 않는다. 곧 전쟁터에 나갈 내가 계집 따위에 마음을 둘 이유가 없다.

눈을 감은 채 데이몬은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때마침 시녀가 침상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주인의 일에 참견을 할 수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행여나 자신에게 눈독들이지나 않을까 해서 시녀는 몹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결코 데이몬의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불 속에서 그 기미를 눈치챈 데이몬은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계집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똑같다. 벗겨 놓으면 하나도 다를 게 없어. 이를테면 저 시녀 년이랑 하등 틀릴 게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잊어버리려 할수록 다프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해맑은 미소가 끊임없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또한 그녀가 자신에게 대하는 친밀한 태도.

평소 냉대와 질시에 익숙해져 있던 데이몬에 이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임이 분명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데이몬은 냅다 자신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뺨이 벌겋게 부어 올랐다. 통증 때문에 다소나마 정신이 들었던지 눈을 부릅뜬 데이몬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수련이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네크로멘서가 되어야 한다. 스승의 원수를 갚고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는 오직 마법만을 생각해야 한다. 정신 차리자.

데이몬!

그 자리에 털퍼덕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은 데이몬은 전력을 다해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던 소녀의 얼굴에 반색이 스쳤다.

오셨군요. 아저씨

그녀의 앞에는 데이몬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다프네는 환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맞았다.

이것 봐요. 꽃들이 파릇파릇하게 살아났잖아요?

그, 그렇구나.

데이몬은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틀며 겨우겨우 말을 털어놓았다. 그토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프네를 보고 나자 마음이 여지없이 뒤흔들려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다프네가 생긋 미소를 떠올리자 데이몬은 또다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연신 도리질을 쳐야 했다.

이러면 안 된다. 정신통일! 정신통일!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극히 부드러운 것이 품속을 파고들었다. 눈을 뜬 데이몬은 순간 마치 9써클의 라이트닝 볼트가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다프네가 한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데이몬의 몸은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꽃들이 살아났어요.

어……. 어……

불쌍한 데이몬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프네는 생긋 미소를 떠올렸다.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특유의 미소였다.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 같아요. 꽃들을 위해 그토록 애써 주시다니…….

이, 이것 좀 놓고 말하자. 제발.

버둥거리던 데이몬은 겨우 그녀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마치 전신의 털이 모조리 곤두선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느낌이 결코 나쁘진 않았지만 말이다. 다프네가 생긋 웃으며 한 발 물러선 뒤에야 데이몬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로써는 자신을 대하는 다프네의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혹시 내가 무섭지 않니?

무섭긴요. 정말 좋은 분 같은데요…….

내 얼굴이 험상궂다거나 소름끼치지 않아?

데이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더 괜찮아 보이는걸요? 아저씨는 다른 사람보다 마음씨가 더 고운 것 같으니까요?

음! 미치겠군.

데이몬은 지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을 하고 있었다. 다프네가 보는 자신은 지금껏 타인의 눈빛에서 느낀 경험과 너무도 상충되는 것이었으므로…….

데이몬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평가라고 해야 정확할 듯 싶었다.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프네를 쳐다보았다.

너 혹시 장님 아니니?

네?

앞을 못 본다거나……. 아님 사물의 형체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정신이 이상하다거나.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요? 전 눈이 무척 좋은 편이거든요. 그리고 전 미치지 않았어요.

말을 마친 뒤 또다시 미소를 짓는 다프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미치겠군. 저 행동이 가식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건만 추호도 그런 기미가 안 보이니…….'

아닌게 아니라 다프네의 눈동자에는 추호도 거짓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저토록 순수한 눈동자 뒤에 만약 꾸밈이 있다면 그녀는 아마도 신이 틀림없을 터였다. 신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이목을 이처럼 감쪽같이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눈을 꼭 감은 상태로 데이몬은 옆의 바위로 다가가 털썩 걸터앉았다.

일단 옆에 좀 앉거라. 네 미소를 보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게요.

다프네는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의 옆에 붙어 앉았다. 풋풋한 방향이 여과 없이 코로 스며들었다. 또다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데이몬. 하지만 그것은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방향과는 한없이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네 몸 냄새가 정말 좋구나…….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다프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데이몬은 아직까지 이런 방면에서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정말 그래요?

음! 그렇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 자신이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색함을 지워버리려는 듯 데이몬은 다프네의 직책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니?

여기서요?

그렇단다. 복장을 보니 귀족은 아닌 것 같고……. 혹시 황궁에 소속된 시녀이니?

글쎄요? 그것은 저도 잘 모르는 걸요?

다른 사람이 이런 대답을 했으면 분명 불호령을 내렸을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다프네 앞에서만은 왜 이렇게 약해지는지 데이몬 자신도 정말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행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삼가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불확실한 대답에도 데이몬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니?

그럼 아저씨는 뭘 하시는 분이세요?

응. 나? 나, 난 마법사란다.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는 워 메이지라고나 할까?.

지금은 임무수행을 위해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지.

그럼 마법을 잘 사용하시겠네요.

뭐, 조, 조금은…….

떠듬떠듬 대답하며 데이몬은 다프네의 옆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귀 밥 부분이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았다. 공교롭게도 그때 다프네가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뭔가 기대가 잔뜩 서려있는 시선이었다.

저에게 마법을 좀 보여주시면 안 되요?

응? 마, 마법.

마법사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는 일을 해 낸다고 들었어요. 이를테면 물건을 공중으로 띄운다거나 안보이게 하던지, 아니면 불꽃을 만들어 내거나 하는 것 말이에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무척 신기했어요.

으, 으음.

데이몬은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매직 미사일로 몬스터를 제압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사실 다프네가 말한 것들은 초급 마법에 속했다. 마법(魔法)이 아니라 마술(魔術)로 봐야 하는 것들.

대략 1,2써클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시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철저히 실전 위주의 마법만을 연성했던 터라 데이몬은 그런 것들을 수련해 본적이 없었다. 아무리 써클이 높더라도 익히지 않은 마법은 전개할 수 없는 법. 하지만 다프네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었던 터라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들지 안 들지 모르겠지만 한 번 보거라.

말을 마친 데이몬은 마나를 끌어 모았다. 어느 정도의 마나가 모이자 데이몬은 즉시 헤이스트를 펼쳤다.

궁성 안에 몬스터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고, 또한 다프네에게 살육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에게 남은 마지막 밑천을 드러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슈슈슛

그의 몸은 곧 바람이 되어 정원 내부를 누비기 시작했다. 원래 탁월했던 몸놀림에다 헤이스트까지 가세하자 데이몬의 움직임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꽃이나 나무를 꺾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방을 맴돌았다. 그가 달려간 궤적을 따라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정원을 대략 열 바퀴쯤 질주하고 난 데이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프네 앞에 내려섰다.

어떠냐. 볼 만 했느냐?

뜻밖에도 다프네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뜻밖의 반응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그가 전개한 것은 아무나 볼 수 없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왜, 왜 그러느냐? 내가 널 슬프게 했느냐?

그게 아니고요.

참지 못했는지 다프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보고 있던 데이몬의 가슴이 아련히 아파 올 정도였다.

앞으로 그런 마법은 두 번 다시 쓰지 마세요. 몸의 시간을 빠르게 돌린 때문에 아저씨가 더 늙어 버렸잖아요.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깨는 일이랍니다. 단순히 제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저씨께 그런 일을 시키다니 다프네는 무척 슬프답니다.

말을 마친 다프네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하지만 보고 있던 데이몬은 더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헤이스트의 비밀을 꿰뚫어보다니…….'

불연 듯 다프네의 신분이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헤이스트의 비밀을 간파하는 것만 보더라도 한낱 시녀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모습에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이 들지 않는 자신이 정말 이상하기만 했다. 또한 다프네가 흐느끼는 이유 자체가 자신을 걱정한 때문이 아니던가? 우는 모습에 덩달아 슬퍼진 데이몬은 잠자코 다프네의 등을 두들겼다.

아, 알았다. 앞으로는 네 앞에선 결코 헤이스트를 전개하지 않겠다. 울지 말아라.

그 말에 다프네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에요.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물론 전장에서는 헤이스트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다프네는 눈물 젖은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떠올리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지 않기 위해 급히 고개를 돌린 데이몬. 하지만 손가락을 걸자마자 예외 없이 강력한 체인 라이트닝이 전신을 관통했다. 전신이 짜르르 하는 느낌에 데이몬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허억.

어디 아프세요?

아, 아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른 손을 잡아 빼는 데이몬. 그녀와 닿으면 왜 이렇게 살이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프네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앞으론 아저씨께 마법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을 게요.

으음!

데이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나란히 앉은 다프네는 곧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 바다가 보이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자랐어요. 영주님도 무척 인자하시고 동네 주민들도 모두 한 가족처럼 아주 정다운 분들이셨어요. 비록 제가 거기서 태어났는지는 확실히 잘 모르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산 것 같아요.

그러니?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 기른 분들은 세 분의 할아버지셨어요. 아주 인자하고 다정하고 어떨 땐 무척 엄격하신 할아버지들……. 그분들께서 엄마 아빠 역할을 모두 다 해 주셨지요.

고아였나 보구나?

글쎄요?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사실 어릴 땐 엄마 아빠의 얼굴을 무척 보고싶어했던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할아버지들이 워낙 잘 해 주셔서 그들에 대한 생각을 금방 잊을 수 있었지요.

그랬다면 다행이구나.

다프네의 말을 들으며 데이몬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했다. 결코 유쾌할 수 없었던 성장과정. 소림승들이나 속가제자들에게 늘 얻어맞는 것이 일상이었고, 하루 종일 손가락질과 질시 속에서 성장했던 데이몬이었다. 그런 만큼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란 아이들을 보면 항상 화가 치밀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였던 처절한 유년기이기도 했다.

다프네는 계속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자란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은 점점 그녀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단조롭고 평범하다 볼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마치 마법 이론을 듣는 것처럼 몰입해서 듣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들은 늘 표정이 우울했어요. 마치 세상의 고뇌를 모두 짊어지고 계신 얼굴들이셨죠. 다프네는 그것이 마음이 아파 항상 그분들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노력했어요.

네 마음이 어릴 때부터 고왔나 보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데이몬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고작 어린 계집아이의 말상대나 되어주고 있다니……. 만약 과거의 그였다면 정말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었다. 시간 나는 대로 복수의 칼날을 끊임없이 갈아야 할 자신이 이런 하잘 것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다니…….

하지만 다프네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냉혹하게 떨쳐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결코 냉정하지 않았다.

네 얘기가 재미없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아저씬 할 일이 있단다. 이만 가 보아야…….

조금만 저와 얘기하시면 안될까요?

마음이 절로 끌리는 듯한 다프네의 애원, 하지만 눈을 감은 탓에 데이몬은 겨우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구나. 아저씨에겐 무척 급한 일이 있단다. 그러니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도록 하자꾸나.

꼭 부탁드려요.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그러니 제 말상대는 아저씨만이 유일해요. 심지어 다른사람들은 절 상대조차 하지 않는 걸요?

뜻밖의 말에 데이몬은 눈을 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슬픔이 가득한 다프네의 눈동자였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상대해주지 않는 외로움. 데이몬은 적어도 그 설움이 가슴속에 사무친 사람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걱정 말아라. 다프네. 이곳 놈들은 모조리 눈알이 썩은 놈들 뿐이야. 너처럼 착하고 예쁜 아이를 상대하지 않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만약 그런 놈들이 눈앞에 띈다면 당장 모가지를 뽑아버릴 테니 마음놓거라.

분노가 치민 나머지 단숨에 의중의 말을 털어놓은 데이몬. 다프네에게 함부로 하는 놈이 있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지를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연신 씨근거리는 데이몬의 눈에 깜짝 놀란 듯한 다프네의 모습이 비쳤다.

어린 다프네가 험악한 욕설을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미,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아니에요. 오히려 절 걱정해주시는 아저씨의 마음이 깊이 와 닿는 걸요? 제게 관심 가져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말을 마친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데이몬의 볼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저쪽으로 날아갈 듯 달려갔다.

급한 일이 있으시다니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럼 아저씨 내일 봐요.

하늘하늘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천상의 선녀 같기만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미처 그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가 되어 그 자리에 얼어버린 데이몬.

다프네의 입술이 닿은 뺨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굳은 자세로 볼을 감싸안은 채 굳어버린 데이몬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입술을 비집고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 입술이……… 저, 정말 부드럽군.

볼을 감싸안은 자세로 데이몬은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이 광경을 본 자가 없는지 사방을 주의 깊게 돌아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그때서야 부끄러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자신 같은 대마두가 보이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동. 그것이 설사 트루베니아 사람의 시선이라 해도 피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데이몬은 예전의 냉혈(冷血)모드로 돌아와 있었다. 다프네 앞에선 순한 양이었지만 지금의 데이몬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맹수로 돌변해 있었다.

쾅.

단단해 보이는 탁자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주인이 폭주하는 모습에 시종이나 시녀들은 이미 몸을 피한지 오래였다.

내가? 이 데이몬이 세상에 그런 꼴을 보이다니…….

생각해 볼수록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드래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선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마법 수련에 빠져있어도 시원찮은 시간을 한낱 계집아이와 노닥거리며 보내다니…….

굳건한 철심과 인내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데이몬이었다.

그런 만큼 다프네에게 빠진 자신이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미웠다. 연신 씨근거리던 데이몬은 눈을 차갑게 빛냈다.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내가 왜 그 계집아이 앞에서만큼은 꼼짝을 하지 못하는지…….

하지만 다프네를 떠올리자 또다시 마음이 풀어졌다. 특히 이별 선물로 받은 키스의 감촉은 아직까지도 볼에 아련히 느껴질 정도였다.

데이몬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은 사실 그에겐 무척 행복했던 순간이라 볼 수 있었다.

집요하게 머리를 죄어오는 복수에 대한 부담,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는 두려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회의. 하지만 다프네와 함께 있는다면 데이몬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극히 평온한 마음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껏 나에게 그토록 친밀하게 대해준 계집은 없었다. 혹시 그년이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다프네를 그냥 겁탈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에 깔려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데이몬의 논리대로라면 여자란 벗겨놓으면 모두 똑같은 존재이니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겐 도저히 강압적으로 나갈 수는 없어 보였다. 특히 그녀가 싫어할 만한 짓은 추호도 하기 싫다는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몬은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제기랄. 바로 이게 문제라니까. 그년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그 길만이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야. 수틀리면…….

데이몬은 눈을 번뜩였다.

그대로 그년을 죽여 버려야지. 그래야만 내가 수련에 몰두할 수 있으니…….

그의 눈에서 명백히 살기로 보이는 안광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칠종단금술은 발동되지 않았다.

혹시 맛있는 요리 좋아하니?

글쎄요? 요리를 먹어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래? 그렇담. 이 아저씨가 정말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마.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하는 데이몬. 그는 어느새 순한 양 모드로 돌변해 있었다.

다프네를 절단내기 위해 파워 업 건틀릿까지 준비해 왔던 데이몬이었다. 칠종단금술 때문에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요망한 얼굴이라도 갈가리 찢어발겨 버리겠다고 그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그래야만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던 다프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애초에 먹은 마음이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없었고 어울리지 않게 얼굴에 미소까지 떠올리는 데이몬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소름이 끼칠 만큼 데이몬의 미소는 어색했다. 아마도 웃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때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프네의 관점은 타인들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아저씨.

웃는 모습?

데이몬의 눈빛이 갑자기 멍청하게 변했다. 십여 년 정도 전 우연히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본 뒤 두 번 다시 거울을 찾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심지어 거울이 보이면 먼저 박살부터 내어버릴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물론 데이몬의 심미안도 여타의 사람들과 그리 다름이 없었으므로…….

그런데 자기보고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정신나간 계집아이가 있다니……. 데이몬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러니? 시간이 흘러 용모가 좀 바뀌었나 보구나?

숙소에 돌아가는 대로 거울을 한 번 봐야겠다고 거듭 다짐하는 데이몬이었다. 물론 애궂은 거울들이 떼로 박살이 날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렇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솜씨를 발휘해서 요리를 좀 해 오마.

아마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맛있는 요리를 맛보게 될 거야.

정말이요?

물론이다. 내 한 달음에 다녀오마.

데이몬은 마치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어떻게 해서든 다프네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오래지 않아 바뀌고 있었다.

젠장! 내가 왜 이 딴 짓을 하고 있지?

팬에다 고기를 넣고 연신 볶고 있던 데이몬은 미간을 찡그렸다. 연회장의 요리실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은 좋았는데 막상 요리를 하고 있자니 자신의 행동에 갑자기 회의가 들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요리사들을 닦달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의 요리솜씨에 깊이 감복한 요리장이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젠장맞을……. 빌어먹을…….

계속 투덜거리며 요리를 해 대던 데이몬. 하지만 그의 손은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양념과 재료를 쏟아 붇고 있었다. 요리가 완성되자 데이몬은 그것을 조그마한 접시에 덜었다.

둘이 먹을 것이니 이 정도면 되겠지?

접시에 뚜껑을 씌워 집어든 데이몬은 요리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순히 재료를 대어준 만큼 남는 요리로 인심이나 써 볼 심산이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먹도록 해라. 앞으로도 이렇게 잘 협조해 준다면 의당 응분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요리사들의 눈동자엔 순식간에 탐욕의 빛이 일렁였지만 데이몬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그 뒤로 요리사들이 일제히 요리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왜, 왜 마음에 안 드느냐?

데이몬은 무척 황당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정성껏 만든 요리를 가져와 자랑스럽게 내려놓았지만 다프네가 도무지 먹으려 들지 않는 것이다. 데이몬은 일단 이유를 분석했다.

요리는 틀림없이 제대로 만들어졌어. 헬버트론에게 만들어 준 것과 향이나 맛이 한 치의 오차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왜 다프네가 안 먹으려는 거지?

미안해요. 아저씨. 저는 고기를 먹지 않는걸요.

아항!

데이몬은 손가락을 탁 퉁겼다.

알고 보니 넌 채식주의자였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아저씨가 금방 만들어다 올릴 테니. 중원에서 제일 유명한 채소 요리로 말이다. 가만있자, 버섯을 듬뿍 넣어서…….

다급하게 몸을 날리려는 데이몬을 다프네가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저씨. 전 불로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는걸요?

엥? 그게 무슨 소리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모자라 불을 댄 음식을 일절 먹지 않는다니……. 중원 사람의 관점으론 전혀 상상을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어이가 없어하는 데이몬을 향해 다프네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전 그럴 수가 없더군요.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죽어간 동물들의 고통이 느껴지거든요. 채소도 마찬가지예요. 익히고 삶았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요. 때문에 전 옛날부터 그런 것들을 먹지 않았어요.

그, 그럼 넌 뭘 먹느냐? 설마 공기와 물만 먹는 것은 아니겠지?

다프네는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저씨. 제가 먹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게요.

조금 뒤 데이몬의 앞에는 다프네가 가지고 온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음식의 정체가 전혀 뜻밖이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음식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넌 오로지 이것만 먹고산단 말이냐?

네. 아저씨.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다프네. 데이몬은 그 미소를 보지 않기 위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는 온갖 과일과 나무열매가 바구니 가득 놓여 있었다. 중원의 것과 비슷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과일이 데이몬에겐 생소한 것들뿐이었다.

물론 과일 따위에 관심을 가질 그가 아니었으므로 중원의 과일도 별달리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과일들을 내려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것만 먹고사니 저렇게 예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