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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소년의 말에 그는 결국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간다면 소리를 질러버릴 거예요.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성난 시선을 소년에게 던졌다.

같이 죽자는 뜻인가?

그래요. 남아있으면 어차피 살 수 없을 테니 말이에요.

황당해진 데이몬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보아하니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발로 가지 그러나?

무서워서 도,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는걸요?

할 수 없이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소년을 부축해 일으켰다. 하얗게 질린 소년의 얼굴에 다소나마 혈색이 돌았다.

고, 고마워요. 제 이름은 디트리히라고 해요.

살고 싶다면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어.

처음 들어보는 험악한 욕설에 디트리히라는 소년 부대장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이 언제 이런 욕설을 들어보았을까. 데이몬은 주의 깊게 사방을 살피며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소년은 놓칠세라 재빨리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오크 보초병은 사방에 깔려있었다. 그러나 수호마왕군 시절부터 기습과 침투에는 이력이 날 만큼 난 데이몬이었다.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린 데이몬은 오크 감시병의 눈길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군복을 보니 같은 소속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서 근무했습니까?

오크 점령지를 무사히 빠져나온 뒤 디트리히는 집요할 정도로 데이몬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사히 빠져나온 것은 전적으로 데이몬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이몬의 생존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인간에 비해 후각과 청각이 뛰어난 오크 보병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 빠져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데이몬은 그런 사지를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헤쳐 나온 것이다.

키륵.

간혹 가다 맞닥뜨리는 보초병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통이 끊어졌다. 비록 마법을 전개하진 못했지만 특유의 몸놀림은 여전히 살아있는 데이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둘은 날이 밝기 전에 오크 점령지를 벗어나 카르나틱 평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시 어새신으로 복무했나요? 실력을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계속되는 질문을 견디지 못해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초리엔 진득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더 이상 주둥이를 나불댄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을 쓰도록 하겠다.

소, 손쉬운 방법이오?

죽은 자는 말을 못하는 법이지. 그것도 영원히 말이야.

기가 질린 디트리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상대는 도무지 말이 통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군복의 형태를 보아 결코 나보다 상급자는 아닌 듯 싶은데……. 표식이 모두 타버려 알아볼 수가 없으니 원.'

군복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심하게 그슬린 나머지 도무지 용모를 분간할 수 없었다.

밤에 빠져 나올 때는 몰랐지만 날이 밝자 디트리히는 데이몬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범인이라면 운신도 하지 못할 중상을 입고도 자신을 구해준 자는 신음 한마디 뱉지 않았다. 피부에 온통 물집이 잡혀 있는 것을 봐서 고통이 보통이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의 키가 무척 작다는 것과 등이 굽은 꼽추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밖에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데이몬이 다시 출발하는 것을 보자 디트리히는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그만 따라간다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디트리히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미 십여 명의 오크 보초병을 소리나지 않게 살해한 것을 보아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자였다.

둘은 그렇게 방향을 서쪽으로 잡고 한동안 걸어갔다. 굳게 닫힌 채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데이몬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 참이 지난 후였다.

혹시 펠드리안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나?

디트리히는 반색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네, 알고 있어요. 여기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약 일주일 거리에 펠드리안이 위치하고 있어요.

혹시 가 본적이 있나?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했다.

펠드리안에서 이곳까지는 아버님과 예전에 사냥을 많이 다녀보았기 때문에 지리엔 무척 익숙합니다.

사냥? 흥. 팔자 편한 소리로군.

냉소섞인 비웃음에 잠시 움찔한 디트리히였지만 일단 상대의 말문이 트였단 사실에 기가 살았다. 디트리히는 곧 자신의 신분에 대해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상대의 관심을 끌려하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제 아버지는 펠드리안에서도 명망 높은 브릭스 후작입니다. 저는 아버님과 함께 이번 전쟁에 참전했었지요. 원래는 후퇴 명령이 떨어졌을 때 바로 퇴각해야 했지만 그만…….

겁에 질려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단 말이지?

일순 말문이 막힌 디트리히. 계속해서 이죽거리는 데이몬의 말투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은 아마도 귀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오크의 점령지를 벗어났기 때문에 공포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또한 상대의 말투가 전형적인 평민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깔보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귀족 신분인 제가 이례적으로 공대를 해 드리는데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 신분에 걸맞는 대우를 해 주십시오. 일단 저를 구해준 보답은 펠드리안에 도착하면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디트리히의 얼굴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싸우지도 않고 시체 밑에 숨어버린 겁쟁이에게 해 줄 대우란 없어.

결국 디트리히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저는 이 모욕을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결투? 네가?

브릭스 가문은 펠드리안에서도 이름높은 무가입니다. 얕보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디트리히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피가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아 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적을 향해 휘둘러보지 않은 검임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디트리히가 취한 자세는 의외로 빈틈이 없었다. 한 눈에 보더라도 기본기를 충실히 닦았음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검을 뽑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제법 기본기가 탄탄해 보이는군. 하지만 실전경험이 없으면 말짱 헛수고라고 말해 두지. 기껏해야 전장에서 시신의 수나 늘인다면 다행일까?

공격하겠습니다. 이야압.

더 이상 참지 못한 디트리히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양손으로 움켜 쥔 장검이 벼락같이 데이몬의 허리춤을 목표로 폭사되었다. 데이몬은 슬쩍 허리를 뒤틀어 공격을 흘려보냈다.

제법이군.

뜻밖의 실력에 데이몬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겁에 질려 숨어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건만 의외로 소년의 검술 실력은 훌륭한 편이었다. 균형도 잘 잡혀 있었고 검을 휘두르고 나서의 무게 중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기사에 필적하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년은 결코 데이몬의 상대는 될 수는 없었다. 실전경험의 차이에서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다. 더욱이 갑주를 입지 않아 소년의 전신이 훤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이니…….

크윽.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디트리히는 벌렁 나가자빠졌다. 왼 손의 건틀릿으로 검을 슬쩍 퉁겨낸 데이몬이 바짝 붙어 디트리히의 구미혈, 즉 명치를 그대로 가격해 버린 것이다. 태양신경총에 충격을 받은 디트리히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물론 구미혈은 혼혈에 속하는 혈도이므로 생명에는 별달리 지장 없을 것이었다. 쭉 뻗어버린 디트리히를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괜한 짓을 했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쓴맛을 보여준 것은 좋았지만 그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할 수 없이 데이몬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으므로 마법을 전개할 수 있어야만 이곳을 벗어나가기 용이할 터였다.

만에 하나 와이번에게 발각될 경우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 즉시 죽은목숨이라 봐야 한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데이몬은 끈기 있게 마나를 통제해 나갔다. 보람이 있었던지 주위의 마나가 서서히 통제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되었어.

데이몬은 만면에 희색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디트리히도 정신이 들었는지 얕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끄응.

일어나라. 애송아.

부스스 눈을 뜬 디트리히의 눈동자엔 경악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대가 검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자신을 넉아웃시키다니…….

사실 심약한 성격과는 달리 디트리히의 검술 실력은 같은 연배에선 손꼽히는 실력이라 말할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조련시킨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대 일 대결에서는 상대가 근위대 기사라도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평민 출신의, 검도 들지 않은 상대에게 단 방에 기절해 버리다니…….

수련은 제법 한 것처럼 보이지만 네 검은 겉보기만 화려할 뿐이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선 전혀 쓸모 없는 검술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지.

가문의 검술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래 뵈도 제 아버님은 소드 마스터이십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실력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디트리히는 아직까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진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엔 패배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소드 마스터라고 특출난 것은 아냐. 난 이미 소드 마스터와 무수히 싸워본 경험이 있지.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깜짝 놀란 디트리히는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상대가 내뱉은 말은 그의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말도 안되고 말고, 소드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데…….

필시 그는 지금까지 소드 마스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야.'

그 때부터 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오크 군이 진군하고 있는 마당이라 간혹 가다 만나는 마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은 후방으로 멀찍이 피난을 가 버린 지 오래였다.

이것은 인간끼리가 아닌 오크라는 종족과의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사뭇 달랐다. 다시 말해 인간끼리의 전쟁이라면 주민들이 이처럼 마을을 비워놓고 피난을 갈 필요가 없다. 전쟁터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피 튀기게 싸워 승부를 가르면 주민들은 그저 이긴 쪽에 충성을 맹세한 채 소작료만 납부하면 되는 일이었다. 처신만 잘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만은 달랐다.

오크들은 점령지의 주민들 중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예를 제외하곤 모조리 학살해 버린다. 이것은 오크 점령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간혹 목숨을 건진 사람이라도 평생을 오크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광산이나 농장, 혹은 무기 제조창에서 평생을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침공해 온 오크들은 인간에게 밀려 무려 오십 년 동안이나 황량한 펠루시아 산맥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했던 자들이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자연히 지대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을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들녘을 가득 메운 밀은 누렇게 익은 채 썩어갔고, 때를 잘 만난 철새 떼들만 뜻밖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데이몬과 디트리히는 밀밭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펠드리안 방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새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짤막하게 내뱉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데이몬의 등허리를 디트리히는 무척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게 저 자는 자신의 신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일관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싫은 양 꼭 필요한 말만 짧게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라 디트리히는 묵묵히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펠드리안에 도착하기만 해 봐라. 아버님에게 부탁해서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디트리히의 이런 꿍꿍이를 모르는지 데이몬은 계속해서 풀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같이 가요.

디트리히는 새를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고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때 다급하고 짤막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쉿! 몸을 낮춰라.

무, 무슨 일이죠?

데이몬은 어느새 밀 사이로 몸을 숨긴 상태. 하지만 디트리히는 경고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큰 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밀을 쪼아먹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파드드드득.

이런 병신같은 자식. 숙여!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들려오자마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귀를 찢는 듣한 파공성과 함께 그를 덮쳤다. 동시에 들려온 광포한 포효소리. 새들이 날아오른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헉.

깜짝 놀란 디트리히는 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그것이 디트리히에겐 천만다행이었으니…….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있는 긴 발톱이 디트리히의 등허리를 쭉 가르고 지나갔다. 끔찍한 통증에 디트리히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콰우우우.

비명소리에 대응하듯 여기저기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밀밭 군데군데서 중형 몬스터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 한 마리와 트롤 두 마리였다. 그들을 통제하는 듯한 오크 보병도 서넛 모습을 보였다. 부근에서 인간 사냥을 벌이고 있었는지 놈들은 전신이 피로 물든 모습이었다. 조금 전 디트리히를 낚아채려 한 것은 바로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은 또다시 디트리히를 노리고 급강하를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인 듯 오크 보병들은 디트리히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도, 도와줘요.

디트리히는 곧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위용을 과시하는 중형 몬스터들이 하나도 아니고 넷씩이나 자신을 목표로 달려오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이몬을 향해 과시했던 자신감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 데이몬을 애타게 찾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 도망쳤나봐.

앳된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콰우우.

이미 오우거 한 마리가 바로 앞으로 다가와서 커다란 방망이를 하늘 높이 치켜든 상태였다. 과연 빠르기로 정평 있는 오우거다웠다. 한 대 맞는다면 그대로 떡이 되어버릴 정도의 몽둥이가 디트리히를 향해 내려쳐졌다. 디트리히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절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공포심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무언가가 디트리히의 앞을 휙 스쳐지나갔다.

엉?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막 방망이를 내려치려던 오우거의 몸이 굳어진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언가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트롤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막 도달한 트롤 세 마리도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체 불명의 그림자가 다음 차례로 노린 것은 지면에 거의 닿을 듯 내려온 와이번이었다.

케르르르.

뭔진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와이번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다시 날아오르려 했다.

퍼펑.

순간 눈앞이 갑자기 깜깜해지며 극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와이번의 동공은 이미 산산이 터져 나간 채, 핏물이 분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촐지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와이번은 날아오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득였다. 그러나 와이번의 거대한 몸은 이미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미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콰쾅.

굉음과 함께 바닥에 격돌한 와이번 주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먼지 구름으로 인해 장내를 누비고 있던 물체의 형태가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헤이스트의 효력이 다해버린 것이다. 장내에는 곧 데이몬의 왜소한 모습이 드러났다.

취익. 인간이다.

죽여라.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오크 보병들이 두 눈에 살기를 맹렬히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중형 몬스터들이 꼼짝달싹 못하고 굳어버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헉, 헉.

데이몬은 다소 난감한 기색이었다. 피부가 질긴 것만 믿고 갑주를 입지 않는 오우거가 데이몬에겐 차라리 편한 상대였다. 비록 거칠기는 했지만 오크들은 철제 갑주로 중요 요혈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데이몬이 노릴 만한 혈도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 혈도를 정확히 제압할 자신은 없었다.

더욱이 온전치 못한 몸으로 헤이스트를 전개했기 때문에 정신마저 아득해져 왔다.

피로감이 중첩된 때문이었다. 혀를 지긋이 깨물어 정신을 차린 데이몬은 건틀릿을 움켜쥐고 달려오는 오크들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마주 달려오는 데이몬을 보자 한 오크가 글레이브를 일직선으로 찔러왔다.

에잇.

몸을 슬쩍 젖혀 글레이브를 피해낸 뒤 데이몬은 글레이브 자루를 옆구리로 꽉 붙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오크 보병의 인후혈에다 건틀릿에 달린 송곳을 찔러 넣었다.

케륵.

미약한 신음성과 함께 상대의 목에서 피보라가 솟구쳤다. 급급히 건틀릿을 잡아 뺀 데이몬은 살기를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납작 수그렸다.

서걱.

날카롭게 날이 선 글레이브 두 자루가 시기적절하게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몬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만들어낸 매직 미사일 한 발을 날렸다. 중형 몬스터들을 제압하느라 끌어 모은 마나를 대부분 소진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가 쏠 수 있는 마지막 매직 미사일이었다.

파파팍.

그것은 바로 눈앞에 있던 오크 보병의 투구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해서 글레이브를 찍어 넣던 놈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날린 것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 보병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데이몬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순간 허벅지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데이몬은 통증을 꾹 눌러 참았다. 왼손을 묘자권으로 거머쥔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리며 허벅지를 찌른 오크 보병의 인중을 그대로 가격했다. 오크 보병의 투구는 인간 병사들과 달리 얼굴 아랫부분이 훤히 터져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의 공격은 정통으로 먹혀 들어갔다.

퍽.

앞니가 우수수 부러져나간 오크는 얼굴을 감싸안은 채 뒤로 나가 떨어졌다.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데이몬은 마지막 남은 오크 보병을 향해 육박해 들었다. 한 쪽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다가서는 모습이 마치 악귀를 연상케 했다.

췩, 취익.

기세에 질렸는지 오크 보병이 글래이브를 맹렬히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데이몬의 몸은 거의 본능적으로 글레이브의 사각을 파고 든 상태였다. 둘은 곧 한 덩어리가 되어 땅을 뒹굴었다.

슈각.

건틀릿에 달린 송곳이 인후혈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오크 보병은 질펀하게 피를 흘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헉, 헉.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던 데이몬이 겨우겨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정확히 디트리히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디트리히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도저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이몬은 그런 디트리히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냉랭히 내뱉었다.

지금 당장 뒤처리를 하도록 해라.

네? 뒤, 뒤처리라뇨?

아직까지 살아있는 놈들의 명줄을 끊으란 말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 즉시 시행해라.

데이몬의 으르렁거림에 디트리히는 어쩔 수 없이 검을 쥐고 걸어갔다. 오크 보병 둘은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매직 미사일과 묘자권에 얻어맞은 놈들 말이다.

그는 무척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누워있는 오크 보병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오크는 결코 고분고분 죽어주는 종족이 아니었다.

헉.

느닷없이 달려든 오크 보병이 정강이를 꽉 물어버리자 디트리히는 고통에 찬 비명성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서 장검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통증에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그는 필사적으로 양손을 뻗어 다리를 물고 있는 오크의 입을 벌리려 했다. 그러나 꽉 다물린 오크의 입은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엄니가 살을 파고들며 피가 줄줄줄 흘러나오자 디트리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정말 쓸모 없는 놈이로군.

냉랭한 비웃음소리와 함께 검광이 번뜩였다.

서걱.

오크 보병의 목이 다리를 문 상태 그대로 떨어져나갔다. 핏줄기가 확 뿜어져 디트리히의 얼굴을 적셨다. 자신도 모르게 팔 소매로 얼굴을 정신 없이 훔치는 디트리히.

피를 덮어쓰는 것이 무서운가 보지?

디트리히를 향해 한 번 으르렁거린 데이몬은 나머지 오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디트리히가 떨어뜨린 장검이 들려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슈각

두 번째 오크의 목도 간단히 잘려나갔다. 목숨을 끊는데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는 데이몬이었다. 물론 매직 미사일에 마혈이 제압된 중형 몬스터들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데이몬은 먼저 그것들의 다리힘줄을 잘라 쓰러뜨린 뒤 눈구멍에다 사정없이 장검을 찔러 넣었다. 뇌를 관통 당한 중형 몬스터들은 끽소리도 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눈이 멀어버린 와이번을 처리했다. 먼저 돌을 던져 와이번의 주의를 반대쪽으로 분산시킨 다음 드러난 급소인 귀 밑 비늘 사이로 깊숙이 검을 찔러 넣자 와이번 역시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쨍그렁.

디트리히의 발치에 장검을 던져 준 데이몬은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검이로군.

말을 마친 데이몬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오크란 종족이 무기를 손질할 턱이 없었기 때문에 글레이브 날에는 오래된 피와 살점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상처를 그대로 둔다면 덧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모닥불을 피웠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오크 보병이 떨어뜨린 글레이브의 자루를 잘라내어 불에 달궜다.

치이이익.

시뻘겋게 단 금속이 상처를 파고 들어가자 데이몬의 이마에 심줄이 툭툭 불거졌다. 꽉 다문 입술이 마치 경련하듯 떨렸다. 하지만 신음소리는 일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칠종단금술에 단련될 대로 단련되어 참을성엔 일가견이 있는 데이몬이었다. 그 모습에 디트리히는 상처의 통증도 잊은 채 입을 딱 벌리고 데이몬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일 이후로 디트리히는 말을 잊은 듯 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펠드리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펠드리안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잘 된 일이로군.

데이몬도 디트리히의 돌변한 태도에 별달리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디트리히를 살려낸 이유도 바로 길 안내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물론 데이몬에겐 펠드리안에 꼭 가야할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를 꼭 만나봐야 했던 데이몬이었다. 스승 도일을 한 번 떠올려본 데이몬은 이를 으스러져라 꽉 깨물었다.

'놈에게 책임을 꼭 묻고야 말겠다.'

생각에 팔려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옆에서 비장한 말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잔인해질 수 있죠?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꽉 깨문 디트리히의 얼굴이 보였다. 데이몬은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질문을 묵살해버렸다.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데이몬이 관심을 보이건 말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때부터 전 이런 제 성격이 싫었어요. 실전에만 돌입하면 얼어붙어 버리는 성격 말이에요.

사람들은 절더러 대련 마스터라고 불렀어요. 물론 비웃음섞인 말이겠죠? 그래요. 전 대련에서만은 그 누구도 겁내지 않아요. 설사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말이에요.

하지만 실전에만 들어서면……, 피만 본다면 온 몸이 굳어버려서 꼼짝도 할 수 없어요. 심지어 강아지 한 마리도…….

디트리히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배어 있었다.

원래 전 징집 대상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전 자원해서 참전했지요. 전쟁터에서 싸우다보면 이런 제 성격이 고쳐질까 싶어서 말이에요. 하지만 결과는…….

디트리히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묵묵히 걸어가던 데이몬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얼굴은 무표정한 그대로였다.

여전히 사치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군.

성격을 고치기 위해 전쟁에 자원했다. 허! 화살 받이로 죽어간 실더들이 듣는다면 기가 막혀 땅을 칠 노릇이군. 이봐!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아.

데이몬의 눈에서 어느덧 싸늘한 한광이 돋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배부른 소리란 걸 모르나? 하긴 지체 높으신 귀족들께서 어찌 평민의 삶을 아실 수 있을까, 혹시라도 넌 실더의 입장을 생각해 본 일 있나? 보급 물자를 아낀다는 목적 하에 방패하나 달랑 들고 최전방으로 내몰린 부상병들 말이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을 부대장을 시켜 두들겨 패고 심지어는 목까지 잘라 사지로 내 몬 놈들이 바로 너희 귀족 놈들이야. 아마도 넌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난 달라. 나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실더로 전락했었었으니까…….

서, 설마?

이번 전쟁에 얽힌 내막을 하나 더 알려줄까? 아마도 모르고 있었나 본데 똑똑히 알아두도록 해. 카르나틱 평원에 운집한 10만의 병력이 사실은 적의 진군을 늦추기 위한 소모품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마, 말도 되지 않아요.

흥! 그래? 그럼 그 명성을 떨치던 이카롯트 기사단의 소드 마스터들은 다 어디로 갔지? 또 트루베니아 제일이라는 펠드리안 마법 군단의 모습을 카르나틱 평원에서 본 적이 있어?

아마도 너희 수뇌부 놈들이 미리 빼 돌렸겠지. 물론 지체 높으신 귀족 분들은 고스란히 목숨을 보존하셨을 테고……. 뭐, 그분들도 겁에 질려 시체더미 밑에 콕 박혀 있던 놈까지 챙길 여유는 없으셨을 테지만 말이야.

전과는 달리 디트리히는 일말의 반박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보이는 그대로 믿는 게 아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모든 일에는 가려진 반대쪽이 있다. 이제 네 고민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사치스럽다는 사실을 알겠나?

냉랭하게 쏘아붙인 데이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디트리히는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데이몬의 이죽거림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그날 날이 저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적이다.

데이몬의 경고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을 뽑아든 디트리히는 데이몬의 옆에 넙죽 엎드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는 태도였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적의 규모를 살폈다. 대략 10여 명 정도 되는 오크 보병들이 소리를 죽인 채 둘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둘을 따라온 추적대인 모양이었다. 워낙 조용히 접근했던 터라 어지간한 데이몬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뻔했다. 달빛에 반사된 글레이브의 예기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기습당해 곤경에 빠질 뻔했다. 데이몬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죽은 놈들의 시체를 보고 추적해온 것 같군.

제가 무얼 어떻게 하면 되죠?

옆에서 들려오는 비장한 말투. 데이몬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가능하다면 시간을 좀 끌어주었으면 좋겠군. 맞서 싸우던 도망치던 상관없겠지만 대략 일각 정도만 놈들의 주의를 끌어줄 수 있겠나?

디트리히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검을 꼬나 쥔 채 서슴없이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디트리히의 돌변한 태도에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놈이?

그러나 적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곤 전력을 다해 부근의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챵챵챵

칼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호통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격투소리는 제법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마법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데이몬은 소리를 죽여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미 몇 개의 매직 미사일이 형성되어 오른 손 건틀릿 주위를 맴돌고 있는 상태였다. 뒤쪽으로 돌아간 데이몬은 우선 장내를 살펴보았다.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제법이로군.

추격해온 오크 보병은 정확히 여덟이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디트리히는 남은 일곱과 정신 없이 검을 나누고 있었다. 쓰러진 모습을 보아 죽은 놈은 아마도 기습을 당한 듯 했다. 신들린 듯 검을 휘두르는 모습. 디트리히의 모습에서는 지금까지의 심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리저리 상처를 입었는지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추호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해 낼 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점점 뒤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이스트까진 펼칠 필요가 없겠군.

암암리에 놈들의 허점을 파악해 놓은 데이몬은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벼락같이 내달았다.

이놈.

느닷없이 뒤에서 적이 등장하자 혼비백산한 오크들이 산개해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은 어느새 네 마리의 오크를 꺼꾸러뜨리고 있었다. 충분히 쉰 때문에 매직 미사일에는 충분한 마나가 주입되어 있었으며 정확도 역시 지칠 대로 지쳤던 어제와는 달리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켁.

오크들은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부분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벌렁 넘어져 버렸다.

목젖 부분, 정확히 말해 치명적인 사혈이 위치한 인후혈이 으스러진 오크 보병들은 그대로 절명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취, 취익.

비로소 상황이 심각함을 느꼈는지 남은 오크들이 일제히 데이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태껏 싸우고 있던 디트리히를 버려 두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데이몬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데이몬은 남은 오크 보병들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며 갑옷 틈새에다 매직 미사일을 박아 넣었다.

케륵.

상황은 곧 종료되었다. 바람의 속성을 가진 때문에 매직 미사일은 갑옷의 미세한 틈새라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또한 어둠에 묻혀 날아왔으므로 오크 보병들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손을 툭툭 턴 데이몬은 다소 누그러진 듯한 눈빛으로 디트리히를 쳐다보았다.

해야 할 일은 이젠 알고 있겠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디트리히는 검을 역수로 틀어쥐곤 오크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앞서 공격받은 오크 넷은 인후혈이 파열되어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중에 제압된 오크 셋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데이몬이 일부러 마혈을 제압했던 것이다. 그곳으로 다가간 디트리히는 이번에는 아무 머뭇거림 없이 검을 박아 넣었다.

키륵.

목 줄기를 정통으로 뚫린 오크는 축 늘어져버렸다. 디트리히는 머뭇거림 없이 다른 오크의 명줄을 끊어나갔다. 목의 동맥이 끊어지며 뿜어진 핏줄기로 인해 얼굴이 흠뻑 젖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마무리를 완벽하게 하고 다가온 디트리히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살고 싶으면 먼저 죽여라. 알겠나?

디트리히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절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무슨 뜻이지?

전 지금까지 당신을 어새신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당신은 결코 어새신이 아닙니다.

아무리 실전경험이 없다 하나 어새신 따위에게 당할 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몸놀림은 오랜 수련을 쌓은 기사의 수준에 육박합니다. 때문에 결투에서 패하고 난 뒤 난 당신을 신분을 감춘 기사로 간주했습니다. 물론 말투를 감안하면 평민 출신이겠지만 말입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디트리히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새신(assassin:암살자). 각 왕국의 정보기관에서 암살이나 정보수집을 주목적으로 키우는 자들로써 철저히 비밀리에 양성되는 존재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중원의 살수(殺手)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어새신들은 첩자 교육까지 병행해서 받기 때문에 그리 검술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어새신들이 일반 기사와 겨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습 공격을 할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철저히 변칙적인 기습공격과 독 따위의 암수에 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방심할 경우 설사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 해도 섣불리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어새신에 대한 개략적인 사실을 잠시 떠올려본 데이몬은 디트리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알고 싶은 게 뭐지?

디트리히의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오크들을 쓰러뜨릴 때 당신은 분명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오우거도 꼼짝못하게 할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지나갔지만 전 그것이 풍계 공격마법이란 것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매직 애로우 같은 것 말입니다.

말을 마친 디트리히는 데이몬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고급 기사에 필적하는 몸놀림. 게다가 비교적 위력이 약한 풍계 공격마법으로도 능히 오우거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라면 정말 강력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 보아야겠지요? 거기에다 당신은 마법 지팡이도 없이 마법을 전개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집요한 질문에 진저리가 난 데이몬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깟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제겐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디트리히의 손이 슬며시 검 손잡이를 잡아가고 있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오로지 하나 뿐입니다. 바로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말이지요. 마왕에 의해 깨워진,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자들. 오직 그들만이 뛰어난 검술과 함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당신같이 말이지요.

기가 막힌 나머지 데이몬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데이몬을 보며 디트리히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추리를 풀어나갔다.

일단 저는 당신의 상처에 유의했습니다. 그 상처는 보통 사람이라면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움직입니다. 다시 말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가 아니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정말 대책이 없는 놈이로군.

부아가 치밀어 오른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디트리히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좋다. 내가 데스 나이트라고 하자. 그렇다면 정체가 탄로 났으니 다음은 널 죽여 입을 막아야 할 차례가 되겠구나?

그, 그건…….

디트리히는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허점, 데이몬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뒤이어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억.

데이몬은 복부를 움켜쥐고 나동그라진 디트리히를 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원칙대로라면 널 죽여 입을 막아야겠지. 난 데스 나이트니까 말이야. 하지만 할 일이 남아있으니 일단 널 살려 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난 펠드리안으로 가는 길을 전혀 모르니까 말이다.

숨이 탁 막힌 디트리히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제, 제가 순순히 가르쳐드릴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자고로 말을 안 듣는 놈에겐 몽둥이가 특효약 약이라 했다. 두들겨 패다보면 가르쳐 줄 것이라 확신한다. 안 되면 할 수 없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데스 나이트(?)를 보며 디트리히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매에는 장사 없다는 원칙은 중원이나 트루베니아나 다름없이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디트리히는 얼굴이 떡이 될 정도로 얻어터진 다음에야 고분고분해졌다. 결국 그는 데이몬을 펠드리안으로 공손히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의도가 뭔지는 정말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고야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대관절 왜 펠드리안으로 가려고 하는 거죠?

허! 그놈 참 말 많군. 생각해 봐라. 마왕의 명령을 받은 데스 나이트가 뭘 하러 수도로 가겠는지 말이다.

요인에 대한 암살이나 혼란 조성, 이런 것 말입니까?

암살이라…….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목적은 펠드리안의 한 놈에게 스승을 죽게 한 책임을 물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세르게이에게 말이다.

사실 거기에는 그가 세르게이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도 한 몫을 했다. 생각만 해도 절로 분통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빌어먹을 새끼!.

원래대로라면 세르게이란 놈을 천참만륙시켜도 시원치 않을 데이몬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도일과 맥밀란이 자신의 곁을 떠났으며 8만에 달하는 죄 없는 병사들까지 함께 카르나틱 평원에 묻혀야 했다. 하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에겐 칠종단금술이 있었기 때문이었었다. 물론 사준환에 이어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까지 받아내야 할 빛이 생겼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전 까지는 목숨을 아껴야 할 때였다.

뭐 죽일 생각까진 없고……. 카르나틱 평원에서 죽어간 8만 병사들의 원한에 대한 앙갚음을 조금 해 줄 생각이다.

디트리히의 눈이 동그래졌다.

앙갚음이라구요?

화가 풀릴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놓아야지 분이 좀 풀릴 것 같다. 더도 덜도 말고 반쯤 죽을 정도만…….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디트리히는 실소를 지었다.

정말 이해하지 못 할 분이군요.

네놈도 그 상황에 내몰려봐라! 원통하지 않겠는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디트리히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앙갚음에 저도 동참시켜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저도 느낀 바가 없진 않습니다. 어쨌든 저 역시 부대장이었으니까요. 비록 많진 않지만 제가 지휘하던 병사들도 대부분 죽었을 겁니다.

뭐, 못할 이유야 없지만……. 과연 네게 그럴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것도 데스 나이트와 함께 말이야.

방금 그 말로 당신이 데스 나이트가 아니란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데스 나이트가 인간 병사들에 대한 복수 따윌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한 용기와 의협심이 대단한 분이란 것까지 함께요.

큼! 그 녀석 아부는…….

괜히 머쓱해진 데이몬은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 이후로 둘은 비교적 평온한 여행을 해 나갔다. 디트리히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데이몬에게 무척 깍듯하게 대했다. 귀족이라는 신분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데이몬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물론 타고난 성정이 그런지라 디트리히를 대하는 태도가 180。달라진 건 아니었다. 면박도 주고 쥐어박아 가며 퉁명스럽게 대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태도엔 정감이 서려있었다. 이따금 시간을 내어 디트리히의 검술을 지도해 주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멍청한 놈!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겠나? 교본대로만 하는 건 이미 죽은 검술이야.

조금만 변칙적인 공격을 가해도 금방 자세가 무너진다고…….

하, 하지만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변칙은 결코 정석을 이길 수 없다고…….

물론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정석대로만 하면 네놈보다 센 놈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해. 정석을 주로 구사하되, 거기에다 적절히 변칙을 섞어야만 효과적인 싸움을 할 수 있지.

디트리히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런 돌대가리! 검을 들어 봐.

자세를 잡은 디트리히를 보며 데이몬은 목검을 들어올렸다. 긴 여행을 대비해 지팡이 대용으로 깎아 만든 엉성한 막대기였다. 도저히 목검이라 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이럴 때는 요긴한 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 간다.

고함소리와 함께 데이몬이 달려들어 공격을 가했다. 목검이 중단세로 허리를 가격해가자 디트리히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 공격을 가로막았다.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진검이었으므로 허술하게 깎아 만든 목검 따위는 대번에 두 동강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목검과 검이 맞닿자마자 데이몬은 허리를 급격히 틀었다. 그러자 팔도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목검은 디트리히의 검 옆면과 부딪힌 상태 그대로 검신을 타고 쭉 미끄러졌다.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송어처럼 말이다.

딱.

아얏.

몹시 아픈 듯 검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감싸쥐는 디트리히를 보며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진검이었다면 넌 이미 죽은목숨이야. 손이 날아간 놈이 전투에서 이길 순 없는 노릇이지. 그렇지 않나?

그, 그렇긴 하네요.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을 감싸쥐면서도 디트리히는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몬이 가르쳐주는 것들은 철저히 실용적인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배운 검술과는 전혀 달랐다. 기술 하나하나가 바로 실전에 써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데이몬은 검을 수련한 검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수한 고수와 싸워본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미 특유의 변칙 공격술을 깊이 있게 정립해놓은 상태였다.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 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데이몬이 툴툴거렸다.

젠장. 이러다간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군.

아마 내일 점심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한 번 믿어 보도록 하지.

해가 저물자 둘은 인적이 사라진 조그마한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집을 샅샅이 뒤져 간단히 배를 채운 두 사람은 또다시 검술 수련에 들어갔다. 물론 디트리히는 몇 가지 기술을 배우는 대가로 흠씬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뻗어버린 디트리히를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원. 이런 약골을 봤나?

침을 질질 흘리며 늘어진 모습을 봐서 내일 아침까진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몬의 얼굴에 실소가 떠올랐다.

그녀석 정말 가관이군.

디트리히의 얼굴은 퉁퉁 부어 올라 준수했던 본래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데이몬이 얼마 전 느낀 필살의 공격법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보편적으로 젊은 기사 놈들은 얼굴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 뭐 계집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지는 모르지만 결투 시에 이것은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서, 설마 얼굴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겠냐? 중장갑을 착용했을 땐 별달리 소용없겠지만 결투할 때나 약식 투구를 걸쳤을 때에는 충분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얼굴을 공격할 경우 대부분의 머저리들은 얼굴에 상처 나는 게 싫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허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우와! 그건 정말 치사한 공격법인걸요?

큼! 그럼 잘 생긴 얼굴 가지고 저승에서나 가서 자랑하던지……. 어차피 죽으면 썩어버릴 얼굴 아니냐? 죽은 놈은 저승에서나 투덜거리라고 해.

디트리히는 결국 데이몬의 논리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점을 극복해야한다는 명분 하에 실전에 들어간 디트리히는 얼굴 부분에 무수한 공격을 허용해야 했다. 물론 그의 실력으로 데이몬의 무수한 잔기술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디트리히는 얼굴이 떡이 되어 기절하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늘어진 디트리히의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데이몬은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연 듯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었던 중원에서의 삶. 그러나 그곳은 복수를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계속 마법을 배워나가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어쨌든 차원이동마법을 통해 이곳으로 왔으니…….

불연 듯 스승 도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데이몬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스승님…….

따지고 보면 데이몬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스승과 보낸 나날일지도 몰랐다. 물론 수호마왕군과의 추억도 좋은 시절이었지만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행복한 경험이었다.

스승이 자신을 떠났다는 공허감은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고 있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도 모른 채 데이몬은 묵묵히 뇌까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 데이몬 결코 스승님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최강의 네크로멘서가 되어 원수를 갚고, 또한 스승님의 혈육을 꼭 찾겠습니다. 그리고 제 힘이 닿는 날까지 보살피겠습니다.

데이몬은 묵묵히 스승의 당부에 대한 각오를 되새겼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남루한 나그네 둘이 접근하자 수문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웅장한 펠드리안의 성문으로 접근하는 자는 한 눈에 보아도 거지로 밖에 안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카르나틱 평원에서의 패전 때문에 펠드리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흉흉했다. 병력을 대대적으로 징집하고는 있었지만 이대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수도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럴수록 치안병력의 단속은 엄격해졌고 입을 잘못 놀린 시민들은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명목 하에 처형장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중앙 광장에서 끊임없이 피 냄새가 진동할 지경으로 말이다. 심지어 운이 나쁜 자는 아무 죄도 없이 목이 달아나는 상황이었으니 성벽 수비병들 역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심쩍은 자들이 접근하니 수문 병사들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전쟁으로 인해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신분을 밝혀라!

거침없이 하대로 일관하는 수비병들의 태도에 데이몬의 눈썹이 꿈틀했다.

펠드리안으로 들어선 나그네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데이몬과 디트리히였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데이몬이 막 발작하려는데 디트리히가 앞으로 쓱 나섰다. 섣불리 수비병들을 구타했다가는 펠드리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데이몬에게 눈짓을 보낸 디트리히는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곳에는 가문의 문장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나는 브릭스 후작가의 장자인 디트리히 폰 브릭스라고 하오. 카르니틱 방어군 제 6군단의 14 백인대장으로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오.

디트리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비병들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브릭스 후작가라면 그들로썬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위 귀족이었다.

백인대장이라는 직책보다도 후작가의 장자라는 사실이 그토록 수비병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다.

성문을 열어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수문 병사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성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끼기기기.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육중한 성문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무심한 눈길로 올라가는 성문을 지켜보았다. 이곳을 나설 때는 스승 도일과 함께였었지만 돌아올 때는 홀로 오게 된 것이다. 물끄러미 성문을 쳐다보고 있는데 디트리히가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들어가시지요

공대하는 것을 병사들이 듣는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성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상당히 꼬장꼬장해 보이는 중년의 백부장이었다.

이곳에는 신분이 증명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소. 그러니 당신도 관등성명을 밝히시오.

그는 나와 동행입니다.

옆에서 거드는 디트리히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백부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물론 백인대장께서는 문장을 제시함으로써 신분이 증명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 자 역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만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신분을 확인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 나는 그와 함께 복무했었소. 카르나틱 방어선에서 말이오.

그러나 절차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소속 부대와 직책, 그리고 출신지가 명확한 자만이 펠드리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경험이 없는 탓에 디트리히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당황한 탓에 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 급한 일이 있소. 시간을 다투는……

디트리히의 태도는 백부장의 의혹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눈짓을 한 뒤 한 손으로 검 손잡이를 지긋이 움켜쥐었다.

신분을 밝히기 전까진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둘의 논쟁을 듣고 있던 데이몬이 앞으로 쓱 나섰다.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난데없는 말에 백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날 본 적이 있다고…….

한 때 난 이곳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 제 57 성벽 경비조원으로 말이야.

네가 이곳에 근무했었다고?

벌써 1년이 지났군. 그 때는 오크 놈들의 공습이 한창 행해지던 때였지. 음! 이 일을 알지 모르겠군. 하루는 오크 놈들이 와이번에 매달려 침투를 한 적이 있었어. 보통 때의 다섯 배가 넘는 오크 유격병들이었어. 그놈들이 일시에 성벽에 내려섰지. 그 때 자네는 단신으로 오크 무리 앞에 나아가던 자를 기억하고 있나?

서, 설마.

뜻밖의 사실에 백부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기억을 뒤져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이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나였지. 당시 넌 아마도 64경비조의 선임병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이름은 잘 모르지만 부하들을 통솔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말이 틀렸나?

마, 맞아. 그 때 난 64경비조를 맡고 있었어.

그때서야 비로소 백부장의 의심이 풀렸다.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만약 데이몬이 아니었으면 성벽 수비병들은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때문에 백부장은 데이몬이란 존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이질적인 용모. 그렇군. 화상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어.

난 이곳에서 근무하다 바로 8군단으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가드로 복무하며 카르나틱 방어전을 치렀지. 마법 부대의 가드로 말이야.

용케 살아왔군. 생존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무튼 환영하네.

백부장은 손을 뻗어 데이몬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다음 뒤를 쳐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신분확인이 끝났다. 통과시켜라.

고맙군.

고맙긴 뭘.

데이몬과 디트리히는 창검을 곧추세운 병사들 사이를 지나 펠드리안 시내로 걸음을 옮겼다. 특히 디트리히의 얼굴엔 뭔가 이해하지 못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펠드리안에 들어가자마자 디트리히는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곳에 계셨습니까?

그렇다. 성벽 수비병으로 말이다.

당신은 정말 의문에 쌓인 사람이군요. 그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면서 고작 성벽 수비병으로 복무하다니…….

왜? 실력이 있다고 수비병으로 복무하지 말란 수칙이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 실력 정도면 그 이상의 직책도 맡을 수 있었을 텐데요.

이를테면 근위 기사라든지……. 전 이곳에서 당신이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데이몬은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때 근위병으로 복무한 적은 있었지. 하지만 그 때는 나에게 힘이 없었을 때야.

그건 그렇고 이만 입을 좀 닫아주겠나? 이제부턴 무척 위험한 일을 하러가야 할 테니…….

위, 위험한 일이요?

복수 말이야. 물론 일국의 공작을 두들겨 패는데 근위 기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지. 아마도 죽자고 싸워야 할거야. 결코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지.

디트리히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 그렇군요.

왜? 펠드리안으로 돌아오니 겁이 나나 보지? 내키지 않으면 빠져도 좋아. 어차피 이건 내 일이었으니…….

아닙니다. 겁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애석하게도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르게이 공작은 펠드리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고 있는 고위급 귀족인 것이다. 그런 자를 손보러 가는 것이니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아버지에게까지 파장이 미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서열 상 세르게이의 아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난 평생 심약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세르게이 공작이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겐 합당한 명분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아버지에게까지는 누가 미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디트리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몸. 이판사판입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근위 기사 몇을 상대해야만 놈을 손볼 수 있다.

알겠습니다.

일단 궁성까지의 길은 네가 열도록 해라. 네 신분을 활용한다면 놈의 면전까진 어렵지 않게 나갈 수 있을 테니…….

그러지요.

펠드리안 시내로 접어든 둘은 궁성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후! 힘들군.

대책회의를 마치고 막 회의실을 나서던 세르게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각 국 군주들에게서 패전에 대한 온갖 비난과 질책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던 터라 아직까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책회의는 벌써 보름째 이어지고 있었고 그 기간동안 세르게이는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카르나틱 평원의 8만 병력이 몰살한 책임을 오로지 그가 홀로 져야만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를 연합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자는 건의까지 나왔다. 하지만 로젠가르트 4세가 적극적으로 두둔해 주었고 그 때문에 자리는 다행히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세르게이의 입지가 많이 좁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세르게이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존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8만 병력의 방치. 그로 인한 궤멸. 물론 명령을 내린 세르게이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들이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계획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했다. 때문에 전멸할 줄 알면서도 부득이 자리를 사수하란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나지막이 뇌까리던 세르게이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베니테스가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 쉰 세르게이는 자신의 자리로 다가갔다. 걸어가던 와중 뭔가 생각이 났는지 세르게이는 베니테스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 뭘 말씀이십니까?

이번 전쟁에서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그, 글쎄요. 저로썬

베니테스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잠시 들여다보던 세르게이는 말없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모쪼록 계획이 성공해야 할 텐데…….

세르게이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조금 뒤 작전회의가 벌어지니 준비하라는 베니테스의 조언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이다.

조금 뒤 벌어진 작전 회의장에는 이카롯트를 이끌어나가는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황제를 보필해야 할 근위 기사단만 빠지고 나머지 귀족들 대부분이 모인 큰 회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군주들의 회합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해듣게 되는 것이다.

주재자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루하게 세르게이 공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원래 늦는 편이었지만 오늘 따라 유달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르게이 공작이었다.

결국 그는 귀족들이 조바심이 날 즈음에야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다리시느라 지루하셨지요.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르게이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는 결코 미안한 기색이 깃들여있지 않았다. 귀족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그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카롯트 제일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섣불리 그의 눈을 벗어난다면 최전선에 배치될 지도 몰랐기 때문에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던 세르게이는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이다. 어제 군주 회합에서 결정된 사실로는…….

그 때 갑자기 입구 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발길질로 문을 강하게 걷어찰 때 남직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놀라 경악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발칙한…….

저, 저놈이 죽고 싶어서?

그곳에는 무척 남루한 차림새의 왜소한 인물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써서 복장을 식별할 수도 없었다. 심한 화상을 입었는지 체모가 홀랑 타버린 것도 모자라 온통 물집 투성이라서 꼴이 상당히 가관이었다. 화려한 문에 흙 묻은 발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아 방금 그 소리의 정체를 익히 짐작할 만도 했다.

들어온 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회의장 내부를 휘휘 돌아보았다. 다분히 도전적인 기색이 물씬 느껴지는 태도였다.

주, 죽일 놈.

귀족들의 시선에서 일시에 분노의 광망을 일렁였다. 이곳이 어디인가? 이카롯트 제국의 최 고위층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장소가 아닌가? 그런 신성한 곳에서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하나가 무단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다니……. 당당한 덩치의 귀족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미남자로써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벼른 칼날을 연상시키는 자였다.

네놈은 뭐냐?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혀라.

그러나 침입자는 일언반구 대답도 없이 회의장 내부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리고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그는 카르나틱 방어전에서 저와 함께 살아남은 분입니다. 아버님.

고개를 돌려본 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귀족의 이름은 바로 브릭스였다.

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디, 디트리히. 살아있었구나?

브릭스 후작의 얼굴에 환희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죽었을 것이라 간주한 아들이 저처럼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방어진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 그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미리 마련된 마법진을 통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미 서너 명의 고위급 마법사들이 지휘관들의 퇴로를 미리 마련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전투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은 채 후방에서 드래곤이 펼친 공간왜곡장의 틈을 계산하는데 몰두했고 그 결과 수뇌부들만은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물어진 중군 부분에 위치해 있어서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디트리히만은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들조차 탈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던 터라 브릭스 후작은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사지에 버려 두고 탈출하던 당시 그는 피눈물을 뿌렸다.

그런데 디트리히가 저처럼 멀쩡히 살아 돌아오다니…….

이리 오너라 내 아들아.

브릭스 후작은 아들을 부둥켜안으려 했다. 심성이 심약한 탓에 어릴 적부터 놀림받던 아들이었지만 그에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혈육이었다. 그런데 막 끌어안으려는 순간 디트리히가 그를 왈칵 밀쳐버렸다.

왜? 왜?

주춤주춤 물러서는 후작의 눈에 딱딱하게 굳은 디트리히의 얼굴이 비쳐졌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아버님. 제겐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당황해서 굳어버린 아버지를 두고 디트리히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미 데이몬이 세르게이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상황이었다. 디트리히는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곧이어 근위병들이 회의장 내부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정도 소란이 벌어졌는데 그들이 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늘어선 귀족들 앞을 가로막았다. 물론 퇴로마저 빈틈없이 차단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데이몬은 세르게이를 향해 다짜고짜 으르렁거렸다.

오랜만이군. 세르게이 공작.

세르게이의 눈매가 지긋이 좁혀졌다.

누군가?

기억나지 않는가 보군. 이것 섭섭한데?

데이몬은 손을 들어 얼굴의 먼지를 닦아냈다. 이리저리 물집이 잡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세르게이는 곧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워낙 용모가 특이했기 때문에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너, 너는?

이제야 기억이 나나 보군. 세르게이 양반.

계속 이죽거리는 데이몬을 보다 못해 근위 대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발칙한 놈. 공작 전하께 이 무슨 망발이냐?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얼씨구? 아직까지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구먼. 대장 양반.

그 말에 흠칫 한 근위 대장은 데이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너, 너는?

당신 때문에 쫓겨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난 아직까지 고리타분한 학생 놈들과 함께 따분한 강의나 듣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야.

뭐, 뭐라고?

너같은 놈이 잘리지 않고 붙어있는 것을 보니 이카롯트의 앞날이 무척 훤하군 그래?

이…. 이….

분에 못 이겨 몸을 파르르 떠는 근위대장을 본체만체 하며 데이몬은 다시금 세르게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쥐새끼처럼 잘도 빠져나갔더구먼. 8만의 불쌍한 병사들을 몽땅 사지에 남겨두고 말이야.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떤 목적으로 8만의 생명을 사지에 몰아넣었는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죽음을 당하는 병사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본 적 있어?

데이몬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이건 빠져나오는 와중에 본 일인데 살아남은 병사들의 목을 오크 놈들이 사정없이 자르고 있더군. 그들의 얼굴 표정이 어땠는지 당신에게 정말 보여주고 싶더군.

굳게 닫혀 있던 세르게이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물론 생각해본 적 없다. 왜냐하면 나는 사령관이고 철저히 지휘관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병사들의 목숨보다 승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

병사들을 희생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호오! 그러셔?

데이몬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세르게이의 무감각한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물론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본관도 마음이 심히 아프다는 것을 밝힌다. 그것을 감안해 무례는 여기까지 허락할 수 있다. 일단 살아 돌아왔다는데 경의를 표하며 대신 오늘의 무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물러가라. 가서 새로운 보직을 다시 배정 받도록 하라.

사무적으로 흘러나오는 어조에 데이몬은 마침내 성질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정말 분통터지게 만드는 놈이로군. 이봐! 네놈이 무슨 목적으로 명령을 내렸는지는 내 알 바 아냐. 하지만 네놈의 결정으로 인해 내 동료들이 깡그리 죽었다. 그 책임을 명령을 내린 너에게 물어야겠다.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는 데이몬. 세르게이의 눈에도 점차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기서 물러가지 않으면 부득이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흐흐흐! 네놈의 얼굴을 떡으로 만들어 8만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전까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러갈 수 없다.

저도 동감입니다.

데이몬의 옆에서 터져 나온 앳된 음성. 고개를 돌려본 세르게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브릭스 가의 대련 마스터였군. 살아 돌아온 것도 용한데 용기는 더욱 가상한 걸?

디트리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노, 놀리지 마십시오

물론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 표현할 수 있다. 살아 돌아온 공은 나중에 치하할 테니 지금은 물러가라. 너는 저자와 행동할 만한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못 들은 척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오크의 피를 잔뜩 머금어 별달리 예기를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검을 쥔 디트리히의 자세에서는 당당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설사 이것이 명령 불복종에 상관 모독죄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전 죽어 가는 병사들의 눈동자를 아직까지 잊을 수 없으니까요.

세르게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포진한 근위병들에게 눈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