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살아가는 대륙 트루베니아의 모든 영토는 주신(主神) 베르하젤의 입김이 닿아 만들어진 세상이다.
신께서는 대륙을 창조하시고 나서 여러 종족을 탄생시키셨다. 숲의 종족 엘프, 뛰어난 대장장이 드워프, 복수의 화신 오크. 그 외 완전하지 못한 존재인 각종 몬스터들까지.
이렇게 각 종족을 차례대로 만들어내신 베르하젤 님은 각 종족들을 조율하는 파수꾼으로 드래곤을 삼고, 그에 생명과 힘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 종족들의 분쟁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하사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마법이란 권능이었다.
세상의 체계가 모두 잡히고 나자 베르하젤 님은 가장 마지막으로 신과 가장 닮은 종족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 베르하젤 님은 인간을 비롯한 각 종족들에게 영원한 세월 동안 직접 보살필 것을 맹서했고, 그 증표로 신께서 직접 만드신 서약석(誓約石)을 각 종족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있는 한 각 종족들은 언제 어디서든 베르하젤 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각 종족들은 이것을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비처에 소중히 보관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 종족들의 흥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종족들은 트루베니아 대륙 곳곳에 퍼져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서로 살생함이 없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고대의 인간들은 베르하젤 님에 대한 신앙심이 무척 깊었다. 인간들은 그분의 의도에 따라 여러 유사인종들과 공존하며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엘프 족의 허락 하에 산을 개간하고 드워프에게서 경작할 도구를 공급받고 탁월한 사냥꾼인 오크 족에게서 고기를 제공받으며 각 종족 간에 아무런 다툼도 없이 조화롭게 살아간 것이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 기간은 무척 길고도 길었다.
그러나 오랜 평화기간이 지나가고 종족 간에는 분쟁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땅이 넓었을 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문제였다. 바로 영역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비약적으로 늘어버린 개체 수를 감당하기 위해서 종족들은 타종족의 영역을 부득이하게 침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영토 확장을 가장 갈구했었던 종족이 바로 인간과 오크 족이었다. 가장 번성하고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두 종족이 슬금슬금 타 종족의 영역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영역 확보를 목적으로 시작된 추악한 다툼은 마침내 대륙의 곳곳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베르하젤 님의 의도는 작금에 와서 그렇게 여지없이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그 불씨를 지핀 것은 다름 아닌 인간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정복전쟁은 시작되었고 대륙의 곳곳을 전화의 불길로 덮으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갔다. 무려 오십 년 동안이나...
수많은 생명을 스러지게 만든 정복전쟁은 결국에는 인간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갖은 사투 끝에 인간들은 오크 족을 물리치고 펠루시아 산맥 저편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인간들은 빼앗은 방대한 영토를 두고 승리의 기쁨을 여과 없이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그들이 예상했던 달고 풍성한 열매는 아니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처절한 응징이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라는 뜻을 거스른 대가로 인간들은 베르하젤 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뜻을 거역한 인간들에게 신은 분쟁의 불씨를 영원히 꺼뜨리지 않고 순환되도록 만들었으며 영역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총 세 번의 대참사를 겪도록 안배하였다.
그중 첫번째는 인간들 간의 불화였으며, 두 번째는 마왕의 강림으로 인한 어둠의 군대와의 전쟁이다. 인간들은 갖은 고초 끝에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해 내고야 만다.
하지만 마지막 위기는 인간들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시련으로 다가오게 된다. '종족들을 조율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 드래곤들의 전면적인 개입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깨달아야 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그리고 꿇어 엎드려 경배하라. 베르하젤 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100년 전 베르하젤 교단의 대 승정이었던 휘린파리나의 '인간들에 대한 경고문' 中에서―
고즈넉이 해가 저물어 가는 들녘.
기괴한 적막감이 가슴을 죄어드는 공포로 화해 달려든다. 사위는 조용했으나 사방의 경물로 볼 때 이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코 평온하지 못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들판에 펼쳐진 광경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머리가 갈라지고 창자가 튀어나온 시신들이 들판에 널려 있었다. 훤히 드러난 창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이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살아있던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하나같이 부러진 무기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죽어 있는 자들.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무기를 놓지 않은 것을 봐서 이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존재인 무림인 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때는 송나라 말엽, 여러 고수들에 의해 창설된 무수한 문파들이 자신들의 무공이 제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비무를 벌여대고 그것도 모자라 문파 간의 전면적인 힘 대결마저 널리 성행되는 시기였다. 관(官)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이들의 접전을 방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파들의 힘이 막강한 무림의 절정기. 시대 상황을 따져보면 이처럼 시신이 널려 있는 모습은 그다지 진귀한 일이 되지 않았다. 문파 간의 힘 겨루기가 중원전체를 걸쳐 무수하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곳에 널려 있는 시신들 대부분이 같은 표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색은 다소 틀렸지만 시신들은 하나같이 가슴팍에 아수라의 문양을 새겨 넣고 있었다. 서로간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고 죽어 있는 모습에서 이들이 서로 상잔(相殘)했음은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무림에서 아수라의 문양을 쓰는 문파는 다름 아닌 배교(背敎)였다. 기이막측한 사술과 괴이신랄한 무공으로 무림의 거두 마교(魔敎)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한 문파.
그런데 어떻게 배교라는 한 조직의 무사들이 서로 상잔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 해답을 밝혀줄 자는 참혹한 현장의 구석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쓰쓰쓰.
마치 그 자리에서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낸 자는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듯 그는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있었다.
트, 틀렸어. 이미 천자혈마공(天子血魔功)이 벌써 깨어지기 시작했어.
작달막한, 왜소하다 볼 수 있는 체구에다 등이 기형적으로 굽어있는 모습을 봐서 아마도 꼽추인 듯 보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몸에서는 만인을 부복시킬 수 있을 만한 위엄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족히 한 조직을 맡고 있는 절대자에게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자연스러운 위엄 같은.
왝.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 낸 사내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저녁의 석양이 사내의 얼굴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한 마디로 추악했다. 죽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 보기 흉하게 휘어진 매부리 코. 입 꼬리가 치켜 올라가 무척 야비해 보이는 인상. 사내는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절대자의 기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사내의 눈빛만은 맑기 그지없었다. 온통 피 칠갑을 한데다 석양을 정면으로 받은 나머지 도무지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지 않는 용모였지만 그의 투명한 눈빛만은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내의 눈빛은 점차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산하는 분노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천자혈마공이 완전히 깨어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서둘러 몸을 날리려던 사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여러 자루의 검에 관통 당한 채 늘어져 있는 처참한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차라리 혈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신. 사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애틋하게 변했다.
종리령. 너마저도...
그곳에 죽어있는 시신은 사내의 둘도 없는 심복이었다. 모두가 등을 돌렸어도 수하들과 함께 변함 없이 충성을 바쳤던 충직한 심복.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 종리령은 죽는 순간까지 적에게 저항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사내의 눈가에서 서서히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종리령, 그리고 수호마왕군(守護魔王軍). 너희들의 희생을 이 독고성 죽는 순간까지 잊지 않겠다.
그 때 적막을 깨고 스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흐흐흐. 미안하지만 교주. 그럴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오.
그와 함께 수십 명의 인영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생겨난 것처럼 등장한 자들. 하나같이 타는 듯한 적의에 아수라의 문양을 가슴에 새겨 넣은 자들로써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 결코 범상하지 않는 자들이 분명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특이하게도 적안(赤眼)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종류의 사술을 극성까지 익힐 경우 생겨나는 붉은 눈동자. 강퍅한 표정을 한 적의인은 아직까지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를 향해 냉랭하게 내뱉었다.
교주께서 본교의 사술을 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경지까지 익히신 분이시오.
때문에 숨어 있느라 우리 적미당에서 고생을 좀 했지. 교주의 천자혈마공이 깨어진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 멀리는 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에 며칠동안 이곳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내 예상이 적중했구려. 상황을 보아하니 공은 적미당에서 세울 것이 확실하겠소.
길게 말을 늘어놓던 적의인은 힐끗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사내는 미동도 없이 서서 죽어있는 시신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적의인은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순순히 투항하시오. 교주. 정파 놈들에게 붙들린다면 당신의 최후는 더욱 비참할 것이오. 이미 전 무림이 당신을 쫓고 있는 상황, 당신이 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소. 그러니 더 이상 피할 생각 마시오. 총사께서 교주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눈이 빠져라 궁리하고 계시니 운만 닿는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오.
총사라는 말을 듣자 사내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적의인이 거론한 총사라는 자가 바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배교 총사 사준환!
전 무림을 통틀어 최고라는 정평이 나 있는 지략가로서 오십 년 전만 해도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던 배교를 지금은 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문파로 키운 천재적인 수완가라 할 수 있었다. 사씨 가문의 제갈공명. 바로 이것이 무림에서 배교 총사 사준환을 평하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독고성에게 있어 총사란 존재는 이제 단순한 반역자에 불과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뒤통수를 친 비열한 반역자.
독고성은 지금껏 사준환의 충성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했기에 독고성이 느낀 배신감은 더욱 지대했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는 분명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독고성의 귀에 적의인의 스산한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시간이 없소. 교주. 이젠 가타부타 결정을 할 시간이오.
독고성의 몸이 점차 떨림을 멈췄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안광이 적의인에게 퍼부어졌다.
거절이군. 준비하라.
독고성의 눈빛을 본 적의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응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보아 독고성이 순순히 투항했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십 명의 적의 무사들이 검진을 형성하며 독고성에게로 접근해 들어갔다. 배교의 대외척살조직인 적미당 무사들답게 그들의 몸놀림은 자로 잰 듯 정교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형 병기들이 독고성 일인에게 겨냥되었다. 평범한 강호의 무사들이라면 이런 공격에 난색을 표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독고성은 결코 평범한 무사가 아니었다. 수많은 무사들을 이끌고 오랜 세월동안 전장을 전전하며 정파 무림계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고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해서 배교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절대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유로 공격해 가는 무사들은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명령이긴 하지만 결코 칼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는 자가 바로 독고성 교주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령을 내린 적미당주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그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슬그머니 품속의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사실 교주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과 적미당 만으로는 당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비록 공을 탐해 휘하 조직만을 동원, 독자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당해낼 수 없음은 명약관화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독고성 교주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순순히 잡혀주는 것뿐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상황을 보아하니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어 보였다.
공이 다소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만사가 불여튼튼이라...
그는 서둘러 신호탄의 줄을 당기려 했다. 이미 이곳 부근은 교주 추적에 나선 고수들이 빽빽이 천라지망을 펼쳐놓은 장소. 신호탄만 터진다면 지원군이 벌떼처럼 몰려올 것이고 자신의 수하들은 충분히 그 시간을 끌 능력이 있었다. 적미당주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신호탄의 줄을 당겼다.
푸슈슈슈.
찢어지는 듯한 소성과 함께 신호탄이 불똥을 흩날리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커어억.
날아오르는 신호탄을 쳐다보던 적미당주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붉은 광망이 넘실거리던 눈동자는 어느덧 공포에 젖어가고 있었다.
해가 저문 가운데 수많은 횃불이 사방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시신들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모습은 변함 없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그 시체들의 수가 다소 늘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적미당주도 끼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시신이 되어 싸늘한 땅에 몸을 뉘이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처참하게 으스러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찢어져라 눈을 치뜨고 있는 적미당주.
늦었는가?
횃불의 가운데에서 느닷없이 무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음성의 주인은 무척 청수한 용모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몸에 걸친 학창의(鶴?衣)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한 마디로 선풍도골이라 칭할 수 있는 단아한 용모.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의인들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칠공으로 진득한 선혈을 흘린 채 동심원을 그리며 쓰러져 있는 시신들. 몇 명의 회의인들이 죽은 시신들을 검시한 뒤 보고를 시작했다.
모두가 일격에 절명했습니다. 죽은 상태를 볼 때 독고 교주는 진원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본교의 정예 중 하나인 적미당을 반각도 안 되는 시간에 몰살시키고 도주하다니...
그렇게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가?
서둘러 추격해야 하지 않을까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 중년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놈은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신세야. 이곳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정파 놈들까지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지. 공식적으로 마두(魔頭)로 공인된 놈을 잡기 위해 말이야. 놈이 숨을 곳은 이 중원천지 그 어디에도 없어.
얼굴에 수염이 숭숭 난, 마치 장비를 연상시키게 하는 흑면 중년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속하는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 튀기며 싸우던 정파 놈들과 연합하다니?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교주였던 자를 추적하게 되다니 말입니다.
중년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무림에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어제의 적이라 할 지라도 얼마든지 오늘의 동료가 될 수 있는 법.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다. 눈엣가시이던 독고 교주를 몰아낸 이상 이젠 싫어도 정파 놈들과 손을 잡고 마교를 견제해야 할 때다.
중년인의 눈가에는 무언가 회한의 빛이 흘러지나가고 있었다. 배교의 절대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와신상담한지 어언 수십 년. 그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려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준환. 무림 제일의 지략가로 공인되어 있는 배교의 드러나지 않은 실세이며 이 모든 상황을 배후에서 암중 지휘해온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오랫동안 감춰온 야심을 드러내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 괜히 조급하게 행동하다간 다된 밥에 코 빠트릴 수도 있으니...
사준환은 심유한 눈빛으로 주위의 그림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두가 배교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실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앞서 하나같이 사준환의 심복들이었다. 그러므로 사준환은 심중에 품고 있던 말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암암리에 강기 막을 쳐서 아무도 엿듣지 못하게 안배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오래지 않으면 우리의 천하가 시작된다. 독고 교주를 시발점으로 나는 마교와 구대문파를 차례차례 복속시킬 것이다. 배교의 강력한 무력이 이미 나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 그대들은 생을 다하는 날까지 나와 부귀영화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준환의 장담에 수하들은 소리 죽여 환호성을 질렀다. 총사와 함께 했던 고된 나날들. 그에 대한 보상이 마침내 눈앞에 닥친 것이다.
고수들이 넓게 포진되어 추적하고 있으니 놈의 자취는 곧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말을 이어나가던 사준환은 뭔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발견해서 처치한 자들에 대해 뭔가 발견한 점은 없는가?
흑면 중년인이 곧 앞으로 나와 보고를 올렸다.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놈들이 색목인이란 것과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복색을 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발각된 놈들 중 둘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으며 한 놈의 숨이 붙어있긴 했으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득이 죽여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준환은 미간을 슬며시 모았다.
놈들의 은신술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어. 기척마저도 감쪽같이 숨기는 놈들이니...
만약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라고 해도 전혀 존재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야.
도대체 어디 놈들일까? 색목인들이니 혹시라도 서장 포달랍 궁에서 온 놈들이 아닐까?
사준환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저편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성과 함께 신호탄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장소였다.
발견했나 보군. 가자!
사준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들은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나같이 상승 신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봐서 모두가 절정급 고수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던지 사준환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만이 장내에 남아 여운처럼 떠돌 정도였다.
교주가 정파 놈들에게 잡히기 전에 먼저 처치해야 한다. 서둘러라.
그들이 떠나고 나자 장내는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남은 것이라곤 어지럽게 널린 시신들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장내에선 또다시 웅성거리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는 음성은 놀랍게도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언어. 놀랍게도 그 음성은 허공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햐! 정말 놀랍군. 마법을 사용한 기척은 어디에서도 없었거늘 이렇게나 빨리 모습을 감춰버리다니.
상황을 보아 조심하는 게 상책일 듯 싶소. 벌써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소. 그것을 보아 저들은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는 데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듯 하오.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를 시전한 마법사들을 그리도 쉽게 찾아내다니 말이오. 만약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를 펼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무사하진 못했을 거요.
할 수 없는 일이지. 고국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려면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한 법.
덕분에 우리는 이곳 무사들의 검술실력이 고국보다 훨씬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않소? 우리가 이곳에 온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소. 하지만 그 동안 벌써 여러 명의 마스터 급을 보지 않았는가 말이오? 그 보기 힘든 소드 마스터를 말이오.
허공에서 울리는 음성은 점차 모종의 감정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드래곤의 마수로부터 우리 대륙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검사를 초빙해 가야 하오. 아르카디아의 크로센 대공과 맞먹는, 아니 그를 능가하는 실력자를 말이오.
하지만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곳의 검사들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데다 무척 호전적입니다. 대화를 위해 접근한 마법사를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과 대화하기는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안 되어도 해야 하오. 고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단호한 말과 함께 허공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스르르 나타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입지 않는 특이한 복색을 걸치고 있는 자들, 그들은 뜻밖에도 벽안의 색목인들이었다.
두건이 달린 로브(robe)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이들은 서둘러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있을 지도 모르는 매복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주위에는 온통 널린 시체들 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연 수염을 기른,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불꽃 문양이 새겨진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자 서두릅시다. 발각되지 않도록 인비저빌러티와 하이드 마나 포스를 또다시 메모라이즈 해야 하오.
그 말에 푸른 눈을 한 중년인이 경악해서 입을 열었다. 음성을 봐서 그가 노인과 대화를 나누던 자인 듯 싶었다.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는 마법사로 보이는 자였다.
그, 그럼 설마 저들이 싸우는 곳으로 잠입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소.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우리는 이곳의 검사를 포섭해서 데리고 가야만 하오.
하, 하지만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미 드래곤 하트에 저장된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고, 저런 엄청난 감지력을 가진 자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우리 실력만으로 마스터 급 검사를 사로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예로부터 마법사는 숙련된 검사에게 약하다는 것이 정설로 정립된 상황이었다. 캐스팅에 시간이 걸리는 마법사가 검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마법사가 동원되어 충분히 거리를 두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스터 급을 상회하는 검사라면 가능성은 더욱 희박한 일이었다. 아마도 마법이 실현되기 전에 목이 달아날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들에겐 더 이상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이용한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 이상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소. 모두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고국의 사정을 생각하시오.
모두들 힘을 냅시다.
노인의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극도로 침울해졌다. 그들 모두는 경각에 달한 고국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서둘러 마법을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기척이 드러난다면 그 즉시 죽음이란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그들의 캐스팅은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실력이 가장 뛰어난 덕분에 메모라이즈를 가장 빨리 마친 중년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 역시 메모라이즈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신성마법을 사용하는 신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메모라이즈는 숙련된 마법사인 자신보다도 오히려 더 빨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데리고 갈 사람은 정하셨습니까?
노인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데려갈지는 생각해 본적 없지만 한 명 물색해 둔 바는 있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크로세르 대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자인 듯 싶소.
그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었기 때문에 중년인도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마법사들은 하나 둘 메모라이즈를 마치고 눈을 뜨고 있었다.
으아아악.
폐부를 관통하는 듯한 처절한 비명소리. 뒤를 이어 누군가가 선혈을 왈칵 내뱉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혈을 뱉은 자는 방금 이승을 하직한 자가 아니었다.
쿨럭. 시, 시간이 없어.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독고성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방금 자신이 죽인 회의인의 심장에서 호조(虎爪)를 뽑아들었다. 강철로 된 장갑에 긴 손톱이 돋아 나와 있는 형상의 기형무기 호조. 바로 독고성의 애병이었다. 그러나 호조는 그간의 험준한 혈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끝마디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뎌진 상태였다.
한철(寒鐵)로 만들어진 기병(奇兵)의 지금 모습을 봐서 그가 돌파해 온 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독고성은 시선을 돌려 이리저리 죽어있는 회의인들의 시신을 쓸어보았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의 명령이라면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 정도의 수하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자신에게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것을 봐서 총사의 그림자가 배교에 얼마나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무서운 놈.
독고성은 점점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이끌고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처, 천자혈마공이 깨어진다면 이나마 발악이라도 할 수 없을 테지.
천자혈마공(天子血魔功). 독고성을 초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최강의 무공이지만 또한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저주받은 마공이라 할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리며 독고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찢어 죽일 놈! 감언이설로 나를 속여 천자혈마공을 연성 하게 하고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널리 퍼뜨려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다니.
허공에 대고 화풀이를 해 봐도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총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정사대전을 끝내고 수하들과 함께 당당히 배교 총단에 입성한 그 날, 승리를 축하하는 자축연자리에서 그는 그토록 믿었던 총사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암습을 받고 치명상을 입었다. 단전이 완전히 으스러질 정도의 중상. 독고성의 처절한 도주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총단을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암습으로 인해 천자혈마공은 벌써 깨어지기 시작한 상태. 그나마 살아남은 수하들도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 당했다. 그들을 떠올리자 독고성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수하이기에 앞서 전장을 전전하며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었던 절친한 전우였기 때문이었다.
사준환 이놈. 네놈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수풀사이로 몸을 날리는 독고성은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그 때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독고성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 바로 살기(殺氣)였다.
독고성은 달려가는 자세 그대로 손을 쭉 내밀었다.
으지직.
그를 향해 날아오던 암기 서너 개가 호조에 잡혀 으스러졌다. 독고성은 그대로 뛰어들어 호조를 냅다 휘저었다.
퍼퍼퍽.
낭자한 핏둥치와 함께 살점이 비산했다. 이미 날이 무뎌진 호조였기에 베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살을 뜯어버리고 있었다. 서너 명의 인영이 그 자리에 꼬구라졌다. 혹독한 수련을 거친 고수였는지 죽는 순간까지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 암습이 탄로나자 매복해 있던 고수들은 서슴없이 몸을 드러내어 공격을 감행해 왔다. 해골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총단 산하의 음명당 고수들 인 듯 싶었다.
흑.
독고성의 호조에 두 명의 음명당 고수가 가슴이 뚫려 쓰러졌다. 그러자 뒤에 바짝 밀착해 있던 인영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을 봐서 아마도 암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 했다. 그는 긴 계조겸을 휘둘러 독고성의 가슴을 노려왔다. 계조겸에 푸르스름한 강기가 맺혀 있는 것을 본 독고성은 급급히 호조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이미 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처지라서 계속적으로 강기를 끌어올릴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독고성은 이렇게 필요할 때에만 강기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챵.
공격을 막아낸 독고성이 으르렁거렸다.
보아하니 너는 음명당주 곽세기인 것 같군. 네 놈 역시 사준환의 졸개였었나?
계조겸과 호조를 맞댄 인영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렇소. 교주. 이곳까지 도주해 온 것을 보니 과연 배교 제일의 고수답구려.
허나 여기서 살아날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시오. 곧 총사께서 당주들을 이끌고 달려오실 테니 말이오.
독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조를 휘둘러 곽세기를 공격해 들어갈 뿐이었다. 뒤이어 음명당 고수들과의 처절한 혈투가 이어졌다. 총단 제일의 정예라는 음명당의 고수들도 역시 독고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곽세기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독고성은 음명당 고수들을 하나 하나 착실하게 죽여나갔다. 이미 전 무림이 하나가 되어 그를 뒤쫓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란 없었다.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접전은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
끄아아악.
얼굴 반쪽이 날아간 음명당주 곽세기가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수련이 아무리 깊다하다 생살을 파헤치는 통증에는 저항할 수 없는 법이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독고성은 왼팔에 깊은 검상을 입었다. 내력이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은 때문이었다. 피를 줄줄 흘려대던 독고성은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심하군. 곽세기 정도에게 부상을 입다니...
고개를 내젓던 독고성은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이미 음명당의 모든 고수들은 독고성의 손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했다. 독고성의 왜소한 몸은 이내 바람이 되어 장내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래지 않아 무수한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명당까지 전멸했는가?
늘어져 있는 음명당 고수들의 시신들을 둘러보던 사준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피해가 정말 만만치 않군.
기밀 엄수를 위해 사준환은 자신이 신임하는 수하들만을 추격전에 투입했다. 때문에 이들을 잃은 것이 그로써는 여간 애석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암습으로 인해 단전이 거의 파괴되긴 했지만 독고성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호마왕군의 조력이 있었다 하나 이 정도면 가히 사람의 범주를 넘어선 초인(超人)이라고 봐야 했다. 사준환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급할 것은 없어. 어차피 놈은 단전이 반 이상 파괴당했다. 천자혈마공이 와해되면 놈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터. 또한 정파나 마교 놈들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독고성을 추격하고 있는 마당이니 더 이상 수하들을 잃을 필요는 없다. 특히 영호명이라 했던가?'
사준환은 독고성 추적대에 가담한 정파의 젊은 고수를 떠올렸다. 강북 무림의 명가인 철검문을 맡고 있는 젊은 문주로써 검강을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후기지수 제일의 고수.
독고성의 손발을 잘라놓으려는 지단 토벌작전에서 그는 정말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특히 원독에 가득한 눈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독고성의 수하들을 도륙해 가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정파 제자 같지 않는 독랄한 모습마저 보이던 자였다. 영호명을 떠올리던 사준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만약 이 모든 계획이 다름 아닌 내 머리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과연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독고성과는 달리 사준환의 외부에 대한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정파에서도 정정당당하고 신의가 있는 인물로 묘사될 정도였다. 비록 사준환이 사도의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사준환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평판을 관리한 때문이었다. 모두가 효과적인 배교 장악을 위해 미리 안배한 것이지만 말이다.
전서구를 날려서 놈이 도주한 위치를 정파와 마교 추격대에 알려주어라. 쓸데없는 피를 더 이상 흘릴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김 정율입니다. 무척 오랜만에 여러분께 잡담을 드리는군요.^^
역시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하니 쉽지 않습니다. 외전 작업도 해야 하고 다크메이지도 써야 하고. 신형 컴퓨터로 바꾸었다고 글이 빨리 써지는 것도 아니더군요.^^
그리고 원고 중에 검은 사각형(……)이 간혹 뜨는데 원래는 말줄임표입니다. 한글 파일로 볼 땐 이상이 없는데 유독 통신상에만 검은 사각형으로 올라가니 저로썬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운영체계가 바뀐 탓이 아닌가 합니다. 원래는 윈98 쓰다가 지금은 xp 쓰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한글입력 상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혹시 해결방법을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시구요.
두 번째 작품 다크메이지를 올리는 시간은 대략 7시에서 8시 사이가 될 것 같습니다.
소엠처럼 이따금 비축분이 쌓이면 연참도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소엠 수준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것말고도 할 일이 무척 많거든요. 이를테면 아기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이따금 칭얼대면 안아주고, 곯아떨어진 아내를 위해 청소나 설거지도 하고, 등등 말입니다.
첫 딸을 보고 나서 저도 모르게 아줌마(?)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아기 낳는 과정이 힘들단 뜻이지요. 그 험난한 과정을 치르고 어머니가 되신 아주머니들, 정말 존경합니다. 모두들 어머니를 존경합시다.
하하! 잡담이 길었지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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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평원의 끝자락, 험준한 준령으로 통하는 길목에 다수의 인영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새하얀 백의를 걸치고 있는 자들. 한 방울의 선혈이 묻어있는 장검 문양을 가슴팍에 아로새기고 있는 것을 봐서 그들은 산서 무림의 명가인 철혈문의 문도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안광이 형형한 것이 누구 하나 고수가 아닌 이가 없어 보였다. 특히 그들 중 중앙에 서 있는 인물의 전신에서는 태산이라도 꿇어 엎드리게 할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 나오고 있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다소 많고 그렇다고 장년으로 보기도 어려운 나이. 두터운 검미 아래에는 부리부리한 두 눈이 자리잡고 있었고 눈동자에서는 헤아리기 힘들만큼의 심유함과 함께 지혜가 빛나고 있었다. 우뚝 선 콧날과 꽉 다문 입술은 그의 의지가 얼마가 굳건한지를 모여주는 듯 했다.
그의 이름은 영호명.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 중 명실상부한 최고수로 인정받고 있는 신진 고수였다. 특히 검술 방면에서 그가 이룬 경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정사 대전 중 예기치 않은 사고로 세상을 타개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젊은 나이에 철혈문을 이어받았지만 지금껏 아무 무리 없이 문파를 이끌어나갈 정도의 수완을 보유한 인재. 그런 그가 문파의 전 고수를 이끌고 이곳 적령평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호명은 실각한 배교 교주 독고성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독고성은 바로 사부를 죽인,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던 것이다. 사부를 떠올리자 영호명의 검미가 분노로 꿈틀거렸다.
놈! 너는 결코 살아서 이 적령평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죽은 영혼까지도….
거칠게 내뱉은 영호명은 독고성에 의해 죽은 사부를 또다시 떠올렸다. 사부와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설 가능성은 아예 없었으므로 그만큼 죽은 사부에 대한 영호명의 그리움은 지극했다.
산서의 철혈문은 원래 쾌를 추구하는 쾌검술(快劍術)로 일가를 이룬 문파였다.
빠르기로 따지자면 철혈문의 철혈검법(鐵血劍法)은 쾌검술의 대명사인 곤륜의 분광검법(分光劍法)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세인들이 평한 바가 있다. 하지만 쾌검술이란 본시 현란한 검로를 이용해 상대를 현혹시키는데 주안점을 두는 검술인 법,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에게는 위력이 현저히 반감되는 법이었다.
그런 철혈검법의 단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오던 전대 철혈문주 영호충은 마침내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장자인 영호명을 소림사의 속가제자로 입문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철혈문의 장래를 건 결정이었다. 철혈검법에서 최고의 약점으로 드러난 신법과 내공 면을 강화시키기 위한 고육지책. 하지만 결코 쉽다고 볼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보편적으로 무림의 방파에서는 직계가 아닌 방계 제자에게는 문파의 진신절기를 전수해 주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방계에도 못 미치는 속가제자에게 이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림사에서 영호명은 자신과 가문의 운명을 뒤바꿀 엄청난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당시 소림사뿐만 아니라 전 무림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추앙받던 절대고수 소림성승과 우연한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보기 드문 기재로군.
소림성승 혜정은 한 눈에 영호명의 자질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직접 무공을 사사하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이 문제 때문에 소림사는 상당히 시끄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장문인까지 나서서 혜정을 말렸을 정도였으니까.
방계도 아닌 속가 제자에게 절기를 전수하다니요.
이런 일은 지금껏 유래가 없던 일입니다. 말도 되지 않습니다 사숙.
그러나 소림성승은 소림사 안팎에서 일어나는 숱한 반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리타분한 문규 나부랭이 때문에 절세 기재를 이대로 썩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아.
장문인의 만류를 한 마디로 묵살한 혜정은 그 때부터 영호명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무려 십 오년. 자질이 뛰어난 까닭도 있었지만 무림 최고의 고수에게 사사를 받은 터라 영호명의 무공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얼마나 진전이 빨랐는지 영호명은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십 팔 나한진을 파훼할 정도로 가공할 성취를 보일 정도였다. 그때서야 영호명의 진가를 알아본 소림사에서는 그에게 속가 제일인의 명호를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 무림에 출도하여 충분한 실전경험을 쌓을 것을 종용한다.
이후 영호명의 행로는 정말 눈부셨다. 혜정에게 직접 사사받은 심후한 내공. 뛰어난 오성으로 터득한 상승 신법에다가 철혈문의 정묘한 검법이 결합되어 영호명은 이미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절세 고수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세상을 어지럽히던 사파의 마두들은 영호명 이름 석자에 하나같이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그에 의해 처단된 마두들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 산서의 음양쌍마. 청해의 혈발귀. 동정호의 묵룡지주. 애송이라 깔보며 덤벼들던 강호의 흉마들은 영호명의 살생부에 어김없이 이름을 등재하는 처지가 되며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러기를 얼마간, 욱일천승하던 영호명에게 느닷없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에게 헤아릴 수도 없는 은혜를 베푼 소림성승이 그만 암습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었다.
영호명은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소림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부의 처참한 시신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사부님. 이 영호명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흉수는 제 손으로 처단하여 사부님의 영전에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은 쉬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배교 총단 속에 꽁꽁 틀어박혀 있던 흉수에게 접근할 도리가 없었거니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사대전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은 지체 없이 정사대전에 참가했다. 막강한 무공으로 말미암아 어렵지 않게 호천수호단(백도의 신진 고수들로 이루어진)의 단장으로 임명된 영호명은 정사대전에서 정말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마교 고수들조차 영호명이 이끄는 호천수호단과 맞닥뜨리는 것을 꺼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영호명에게 불운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배교와의 접전에서 철혈문을 이끌고 선봉에 섰던 아버지 영호충이 난전 중에 그만 전사하는 비보가 전해진 것이다.
거듭되는 불행. 하지만 영호명의 용기는 거기서 꺾이지 않았다.
호천수호단의 단장직을 사임한 영호명은 철혈문으로 돌아가 신임 문주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자마자 철혈문도들을 이끌고 다시금 정사대전에 참가했다. 배교에서 전대 교주의 아들인 독고성을 신임교주로 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문이었다. 사부님,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는 분명 독고성이다. 이 혈채는 필히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정사대전 중 영호명은 눈에 불을 켜고 독고성을 노렸다. 하지만 천자혈마공을 익히고, 또한 배교 제일의 정예라 일컫는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있는 독고성에게 접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독고성의 자질은 영호명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여서 혈전을 거듭하면서 그는 끝없이 강해져 갔다. 하지만 영호명은 끈기 있게 그를 척살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놈의 수족은 하나도 남김 없이 잘렸다. 드디어 놈의 수급을 잘라 사부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대전을 통해 드러난 독고성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후기지수 중 제일의 실력을 갖춘 자신이라 할지라도 감히 이긴다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영호명에게 걱정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소림사의 장문인으로부터 이미 독고성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비책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영호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놈! 이번만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독고성을 기다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영호명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추적대로부터 들어온 급보입니다. 놈은 교활하게도 포위망을 뚫고 천령산 산자락으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 무당파 고수 삼십여 명이 참살을 당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깜짝 놀란 영호명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이런, 추적이다. 당주들은 수하들을 통솔해서 모두 천령산으로 올라라. 놈을 잡는 것은 필히 우리 철혈문이 해 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철혈문도들은 일사분란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봐서 그들이 이 젊은 문주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천령산을 뛰어오르며 영호명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놈은 반드시 내 손에 처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저승에 계신 사부님과 아버님께서 한을 푸실 수 있을 것이다.
흐윽.
가슴을 관통 당한 회의인이 검을 떨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도 잠시 가슴속을 파고든 호조가 심장을 움켜쥐어 터뜨려버리자 회의인은 삽시간에 절명하여 고개를 꺾었다.
헉, 헉
쓰러지는 회의인의 가슴에서 호조를 꺼낸 독고성은 점차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추슬렀다. 이미 몸은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혈인(血人)이 되어버린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장장 사흘을 이어간 혈투. 잠을 못 잔 것은 물론이오 물을 제외하곤 쌀 한 톨조차 입에 넣지 못했다. 이미 기혈은 엉킬 대로 엉켜버렸고 몸은 푹 젖어버린 솜뭉치처럼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생을 마감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독고성은 꾹 참고 몸을 날렸다. 적어도 이대로 죽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가는 진로의 수풀 속에서 느닷없이 검이 쑥 튀어나왔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독고성은 그대로 어깨를 내밀었다.
푸슉.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에이는 듯한 통증이 어깨에서 전해졌다. 더 이상 흘러나올 피가 없었는지 출혈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는 그림자가 움찔하는 순간 독고성의 신형은 그림자들 사이를 뚫고 바람처럼 지나갔다.
퍼퍼퍽.
그 뒤로 생을 마감한 그림자들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공격이 적중했다고 방심한 사이 독고성의 반격이 가차없이 그들의 명줄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검에 독을 묻어 있었는지 독고성은 어깨가 점차 마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교 놈들인가? 음살대 놈들이 아마도 검에 독을 바른다지. 아마?
범인이라면 벌써 백 번은 죽었어도 모자랄 상처. 그런 부상을 입고서도 독고성의 어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이미 생사를 초월한 상태라 볼 수 있었다.
후회는 없다. 이미 권력의 정점에 한 번 올라본 이상 여한 따윈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놈, 사준환만은 용서할 수 없다.
먼저 하이텔 김 정진님의 지적에 감사 드립니다. 정진님의 말씀대로 분광검법은 점창의 것이 맞군요.^^ 사일검법과 함께 그 유명한 점창의 분광검법을 착각하다니 이런 실수가…….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통신연재를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퇴고한다고 노력하건만 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잘못을 역시 독자들이 예리하게 지적해주시는군요. 그럼 독자여러분의 많은 비평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서서히 포위망을 구축해 가는 마교 고수들을 보며 독고성은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었다.
'내 몸이 정상이라면 한 번 해 볼 만 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니…….'
하지만 싸워야한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독고성의 머리는 원활히 움직였다.
'방법은 오직 하나, 남은 진원진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워야 한다. 그것으로 천자혈마공의 최후초식 천마혈세(天魔血世)를 시전한다면 위청은 모르지만 휘하 고수들은 모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행로가 결정되자 독고성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전장에서 갈고 닦은, 죽이지 않으면 도리어 자신이 죽는다는 원칙에 따라 독고성은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을 깡그리 끌어 모아 선제공격에 나섰다.
흠. 아무리 보아도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로군. 그 많은 검사들을 도륙하고도 아직 힘이 남아있으니…….
그가 죽인 자들 중에는 마스터 급도 여럿 끼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아 저자는 아마도 말로만 듣던 그랜드 마스터 급이 틀림없습니다. 저 정도라면 충분히 크로센 대제에 비견할 수 있는 검사입니다. 이곳 무사들의 수준은 정말 놀랍군요.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우리 대륙으로 데리고 가야만 하오. 그것만이 풍전 등화의 위기에 놓인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능력으로 어떻게…….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에는 곤혹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해야 하는 일이오. 그런데 드래곤 하트의 마나는 얼마나 남았소?
마나 소모량이 상상 이상입니다. 제 계산으로는 앞으로 서너 시간 남짓 지탱할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돌아가기 위해선 이곳으로 올 때 사용한 마나보다 족히 열 배 이상의 마나가 소모됩니다. 최악의 경우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큰일이구려.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회유해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할 터인데.
사태를 조금 더 관망하시지요. 상황을 보아 저 무사가 쉽사리 당할 듯 보이진 않습니다.
그럽시다. 우리 모두가 이곳에 남는 한이 있어도 저 자를 필히 데리고 가야 하오.
그래야지요.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위청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져 있었다. 마교의 호법원 장로로써 공식 서열 육 위의 위치에 있는 최절정 고수인 쌍수마존(雙手魔尊) 위청이 이런 놀란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평소 정력(定力)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정평이 있었기에 그가 이처럼 놀란다는 것은 지금 그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엎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크아아악.
그의 주위에서는 비명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으로 온 자들은 모두 실력이 검증된 마교 본단의 고수들. 그런 고수들이 너무도 어이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죽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핏빛 안개였다. 거기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기혈이 터져 나가며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찰나지간 위청은 원로원의 예측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엄선된 본단 고수들이 저처럼 맥없이 죽어갈 이유가 없었다.
말로만 들었던 천자혈마공의 위력이 이런 것이었나?
핏빛 안개를 따라다니며 연신 도를 날려보았지만 걸리는 것은 공허한 감각뿐이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듯한 모습. 위청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본단 고수들은 쉴 새 없이 죽어 넘어지고 있었다.
캬아아악.
마지막 고수가 거꾸러지고 나서야 핏빛 안개는 점차 흩어지고 있었다. 안개 사이로 드러난 것은 바로 독고성의 모습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 마치 강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독고성은 스르르 고개를 돌려 위청을 쳐다보았다. 야차 같은 모습에 위청은 절로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독고성이 위청을 향해 걸음을 막 내딛는 순간.
허억.
짤막한 신음과 함께 독고성의 무릎이 힘없이 꺾여졌다. 풀썩 쓰러진 독고성은 거센 기침과 함께 쉴새없이 선혈을 내뱉었다. 토해낸 핏덩어리 사이에 내장 조각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내부가 완벽히 으스러진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독고성의 상태를 파악하자 위청은 그때서야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내심 조금 전 보았던 독고성의 분전이 새삼 이해가 가는 위청이었다.
대단하시오. 독고 교주. 진원진기까지 모두 소진해 가며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다니…….
진원진기를 소진하는 것. 이것은 시전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진원진기란 무공을 익히는 순간부터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하는, 다시 말해서 무인이 이룩한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보편적인 무인은 생의 마지막을 맞는 순간까지도 진원진기를 소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시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보편적으로 무인들은 자신이 성취한 무공을 생명 이상으로 아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원진기까지 아낌없이 소진해가며 저항하는 것을 보니 독고성의 삶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짐작이 가는 위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상황이 아니었다. 위청은 시커멓게 변한 양손에 강기를 밀어 넣으며 쓰러져 있는 독고성에게 다가갔다.
교주의 끝없는 투지에 찬사를 보내오. 하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구려.
진원진기를 모두 소진한 이상 이제 교주에겐 손가락 까닥할 힘조차 없을 터. 교주에게 무인으로써의 최후를 맞도록 해 주겠소. 이것이 내가 교주에게 바치는 마지막 배려이오.
독고성의 앞에 선 위청은 쌍수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상대는 이제 무공을 완전히 잃었다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청은 추호도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이없이 생을 마감할 줄은 위청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독고성의 눈에서 빛이 급격히 일어났다.
에잇.
앉은 자세 그대로 손이 앞으로 쭉 내뻗어졌다.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던 호조에서 느닷없이 눈부신 광채가 폭사되었다.
헉.
막 장도를 내려치려던 위청은 혼비백산했다. 호조에 전혀 예상 못한 암기가 장치되어 있다니……. 급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가슴을 보호한 위청은 발을 날려 독고성의 가슴팍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퍽.
암기 따위는 호신강기를 결코 뚫지 못하리란 자부심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
하지만 그 방심이 생과 사를 여지없이 뒤바꾸어 놓았다. 호조에서 발사된 암기는 호신강기를 유유히 뚫고 들어와 위청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섬뜩한 느낌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을 느낀 위청은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컥. 이, 이것은.
위청의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상대가 발사한 것은 한낱 암기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전문적으로 호신강기를 파훼하는 신기(神器)였던 것이다. 잠깐의 방심에 의해 생을 마치게 되다니, 그것은 자신의 자부심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발길질에 저만치 날아가 나동그라진 독고성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 위청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설사 곰이라고 해도 일격에 절명시킬 경력을 실었건만…….
겨우 겨우 몸을 일으킨 독고성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슴 부위의 옷자락이 부스러지며 속에 숨어있던 엄심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주인을 지켜내는데 모든 힘을 소진했는지 엄심갑은 독고성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힘없이 부서지며 떨어져 내렸다. 독고성은 쓸쓸한 표정으로 손에서 호조를 풀어내어 멀리 던져버렸다. 얼굴이 파리한 것이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거센 기침을 토해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저, 절맥투심정이오. 아시다시피 호, 호신강기만을 전문적으로 파훼하는 다, 당문의 명품이지. 정사대전 중 주, 죽인 당문의 고수로부터 습득한 것이라오. 만일을 위해 호조에 장착해 두었는데 이렇게 요,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구려. 그리고 이 엄심갑은 우리 수호마왕군이면 기본적으로 착용하는 호신구라오. 만년한철로 만들어져서 다소 무겁긴 하지만 방어력 하나만은 호신강기에 버금갈 정도지.
금방이라도 떠나갈 듯한 의식을 추스르며 위청은 쥐어짜듯 내뱉었다.
도대체 그토록 생에 집착을 보이는 이유가 뭐요. 나 같으면 벌써 삶을 포기했을 텐데.
독고성의 얼굴에 어린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당신은 알지 못할 것이오. 믿었던 수하에게 정말 철저히도 우롱당했던 나날들. 그 앙갚음을 하기 전에는 도저히 세상을 떠날 수 없음이오.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위청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혼백이 떠난 육신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꼿꼿이 선 채 생을 마감한 위청의 시신을 힐끗 쳐다본 독고성은 다시금 몸을 날리려고 했다. 이미 도망칠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자진(自盡)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천령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이곳까지 도주해 오지 않았던가? 조금 떨어진 곳에는 끝이 보이지도 않는 천장단애가 위치해 있었다. 그곳까지만 간다면 한 많았던 생애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처참하게 망가진 육신은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기어서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팔 역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력으론 단 한 자도 움직일 수 없었던 상태. 결국 독고성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별빛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고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이대로 끝나버리는가?
이제 저항을 시도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위청과 수하들을 처리하느라 진원진기를 남김없이 소모해 버렸기 때문이다. 천자혈마공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몸에는 단 한 올의 내공도 남아있지 않았다. 갈가리 찢겨진 단전에서는 이제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완벽히 파괴된 육신. 큰 대자로 드러누운 독고성은 갑자기 안면근육을 푸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독고성아. 독고성아. 네 인생도 무척 기구하구나.
생각해보니 세상에 자신만큼 불행하게 살다 가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거지도 침을 뱉을 정도의 추악한 외모에다 허리 똑바로 펴고 하늘도 볼 수 없는 꼽추인 것도 모자라서 사파 거두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멸시와 수모를 겪었던 어린 시절이 정말 한스럽기만 했다. 이런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죽을힘을 다해 무공 연마에 몰두했건만 결국은 철저히도 이용당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숙명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생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하늘이 정말 원망스러웠던 독고성이었다. 눈을 뜨고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독고성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위청. 당신은 아마도 내가 죽인 마지막 사람이 되겠구려.
천자혈마공이 깨어진 이상 소림성승의 시술은 다시 발동될 것이다. 천자혈마공에 의해 오랜 시간 억눌렸던 만큼 칠종단금술의 위력은 더욱 배가되어 있을 터 그는 이제 더 이상 살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터였다. 다시 말해 두 번 다시 살인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내겐 아무런 능력이 없다. 심지어 갓난아이도 죽일 수 없을 만큼.
비록 무공은 사라졌지만 전장에서 갈고 닦은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은 듯 했다. 그를 노리고 수많은 인영들이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지니 말이다. 필시 자신을 척살하기 위한 추적대리라. 독고성은 생을 완전히 포기한 채 눈을 꼭 감았다.
사준환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독고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배교 고수들이 시립해서 한 때 그들의 교주였던 자의 최후를 감상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렸는지 독고성은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준환은 독고성의 몸에 일말의 내력도 깃들어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독고성의 핏기 없는 얼굴을 힐끗 응시한 사준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대단하군. 마교 장로인 쌍수마존과 함께 본단 고수 삼십여 명을 도륙하다니...
물론 위청에게 독고성의 도주 경로를 누설한 것은 바로 사준환이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자이긴 했지만 한 때 절대자였던 독고성이 정파 고수들의 손에 척살된다는 것은 배교로써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사준환은 정파 추적대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위청을 비롯한 마교 추적대에만 독고성의 정확한 도주경로를 알려 주었다. 마교의 손을 빌려 암암리에 처리하려 하는 것이 바로 사준환의 속셈. 하지만 저들이 독고성의 손에 의해 전멸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마교 공식 서열 육 위의 위청이라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대 일로 겨룬다면 설사 자신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고수였다. 그런 절세의 고수를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휘하의 정예 고수들과 함께 고스란히 몰살시키다니.
독고성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상대를 살려줄 순 없었다. 자신이 배교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바로 독고성이기 때문이다. 사준환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독고성에게 고즈넉이 말을 걸었다.
능력이 가상하긴 하군. 정말 아까워. 만약 교주가 조금만 어리석었더라도 난 당신을 살려두었을 것이오.
사준환의 음성을 들은 독고성의 왜소한 몸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 뿐, 독고성은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난 당신을 참수할 생각이오. 당신의 목을 총단의 성문에다 효수하여 완벽히 배교를 장악하는데 자양분으로 삼을 생각이니 말이오.
사준환은 뒤를 돌아보며 힐끗 눈짓을 했다. 그러자 회의를 걸친 두 명의 무사가 검을 뽑아들고 독고성에게로 슬그머니 접근했다. 저항할 뜻이 전혀 없는 상대의 목을 베기 위해 말이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큭.
다가서던 무사들이 갑자기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줄줄 배어 나왔다. 그와 함께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음성.
과연 조호이산지계였군. 그깟 졸렬한 책략으로 나 영호명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소?
수풀을 헤치고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에 검을 아로새긴 철혈문의 고수들. 그들의 앞에는 영호명이 버티고 서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독고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런.
영호명의 등장을 보자 사준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별달리 반갑지 않은 상대가 최후의 순간에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이다. 잠시 독고성을 노려보던 영호명은 사준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자의 목숨은 이미 내 것이라 천명한 바 있소. 어떤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음을 밝히는 바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서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개가 엿보였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기에 사준환은 안색을 굳히고 앞으로 쓱 나섰다.
자네의 원한이 얼마나 큰 지는 나 역시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는 한 때 우리의 절대자. 우리에겐 그의 명예를 지켜 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사실 독고성의 누구의 손에 죽는가 하는 문제는 사준환에게 하등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문제는 배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하급 교도들의 사기였다. 만약 독고 교주가 정파 인물의 손에 의해 참수된다면 그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교의 장악을 꿈꾸고 있는 사준환으로써는 독고성을 넘겨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영호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명예? 웃기는 소리로군.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작자에게 무슨 얼어죽은 명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영호명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예기를 뿌리는 검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베고 지나갈 수밖에 없소.
그 기세에서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기개가 물씬 풍겨났다. 그 모습을 본 사준환은 혀를 끌끌 찼다.
'골치 아프군. 놈이 쉽게 물러날 리가 없으니.'
영호명이 데리고 온 철혈문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쾌검술의 달인들이다. 비록 자신이 배교의 정예들을 대동하고 있다고는 하나 쉬운 싸움이 될 리는 없었다. 더욱이 하등 쓸데없는 일로 수하들을, 그것도 무의미하게 잃는 일이 사준환의 성미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한 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은 것은 사준환의 몸에 밴 오랜 습관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전대 교주 독고성의 처형을 네게 맡기겠다. 하지만 그의 수급만은 우리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영호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수도 없소. 나는 이미 놈의 수급을 사부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바치기로 맹세한 몸이오. 머리통을 잃은 몸뚱이라면 무방하지만 수급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소.
그건 나도 허락할 수 없다. 독고 교주의 처형을 맡긴 것만도 우리로써는 크게 양보한 것이다.
사준환과 영호명은 독고성의 수급을 놓고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두고 말이다. 눈을 감은 채 대화를 듣고 있던 독고성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자신을 이미 죽은 시체로 간주하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저렇게 난리를 부리고 있으니... 마치 시장 좌판에 놓인 썩은 생선처럼 말이다.
이익.
부아가 치밀어 오른 독고성은 눈을 뜨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조금 쉰 때문인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철혈문 고수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놈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리에 중인들의 시선이 독고성에게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른 고수들. 뛰어난 이목답게 독고성의 상태를 한 눈에 파악하고 있는 바, 별다른 경계를 하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 있을 도주를 막기 위해 몇 몇 배교 고수들이 몸을 날려 독고성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독고성의 예리한 눈은 조금 떨어진 낭떠러지를 용케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목표했던 바로 그 천장단애였다.
크크큭. 내가 순순히 네놈들의 의도에 따를 성 싶으냐.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절벽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리가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기에 그는 두 손만으로 죽을 힘을 다해 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준환과 영호명의 치열하던 설전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미 독고성의 명줄을 영호명이 끊기로 약조한 만큼 일단 처치해 놓고 다시 대화를 시작하기로 암묵적으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잡아라.
둘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자 그곳에 있던 고수들은 독고성을 목표로 일제히 몸을 날렸다. 상승 신법을 구사하는 고수들인 만큼 단 몇 번의 도약으로 독고성이 있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한 철혈문 고수가 날랜 동작으로 독고성의 뒷덜미를 잡아갔다. 상대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이상 그는 아무런 경계심도 가지지 않았다.
헉.
손을 뻗던 철혈문 고수는 혼비백산했다. 그저 열심히 기고 있던 것으로 보이던 목표물이 느닷없이 몸을 돌리며 예기를 발하는 무언가를 집어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급히 검을 뽑아 날아오는 것을 쳐냈다.
챵.
회피동작을 취한 다음 반격을 가하는 것은 그들 정도의 고수들에겐 몸에 완전히 익은 동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발차기로 독고성의 아래턱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퍽.
독고성의 왜소한 신형이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올랐다. 마치 반발력을 이용하기라도 하듯 너무도 힘없이 퉁겨진 것이다.
아차.
검에 맞고 두 조각이 되어 떨어진 것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지였다.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철혈문 고수는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뒤를 추적하던 고수들이 각종 암기를 발사하는 기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큭.
천운인지 독고성의 몸은 절벽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쳐 박혔다. 척추를 관통하는 듯한 고통을 느낄 여지도 없이 독고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렀다. 마치 그 자리에서 생겨난 것처럼 땅바닥에 푹푹 박히는 암기들. 그중 몇이 독고성의 몸에 적중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독고성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데굴데굴 구르는데 사력을 다할 뿐이었다. 그 때 뒤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이 그토록 쉽게 자진(自盡)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이 영호명이 지른 호통소리란 것을 눈치챌 여지도 없이 갑자기 허전한 감각이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사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절벽에 도달했던 것이다. 허공으로 떠버린 독고성의 몸은 그대로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의 핏기 없는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들 있게나. 내 삶은 내가 결정할 테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통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감각과 함께 몸이 갑자기 낙하를 중지한 것이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독고성은 흐릿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칼을 굳게 움켜쥐고 있는 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자신을 붙잡은 자는 영호명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독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짝 말라버린 입술이 벌어지며 무미건조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토록 내 목을 자르고 싶나?
두말하면 잔소리.
간발의 차이로 독고성을 붙잡는데 성공한 영호명은 힘을 주어 그의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반대쪽 손은 절벽의 바위를 마치 두부처럼 파고 들어가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임기응변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영호명 역시 천장단애에서 추락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터, 곧 철혈문 고수들이 그의 팔을 잡고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때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두두둑.
영호명의 안색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 이런 빠, 빨리 나를 끌어올리시오.
조급한 심경을 대변하듯 철혈문 고수들의 움직임이 다소 빨라졌다. 하지만 영호명의 손을 통해 계속적으로 뭔가가 끊어지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린 영호명은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독고성을 잡아챘다.
에잇.
머리털이 모두 뽑히기 전에 그의 몸을 절벽 위로 던져 올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손에서는 허전한 감각만이 전해져왔다.
이런.
뽑힌 머리칼 한 줌을 움켜쥐고 영호명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독고성의 머리칼이 잡아채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몽땅 뽑혀버린 것이다. 당연한 말로 만신창이가 된 독고성의 몸은 끝없는 천장단애 아래로 추락을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영호명의 시선이 떨어져 내리는 독고성의 얼굴에 가서 꽂혔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목격하자 영호명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 죽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필코 내 손에 죽어야 한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독고성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다소 짙어졌다. 감정이 격양된 자신도 모르게 천장단애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안 됩니다. 주군.
하지만 철혈문 고수들의 만류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절벽에서 추락한다면 그가 아무리 절세 고수라고 하더라도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사부의 원수를 직접 갚지 못한 허탈감으로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은 다시금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옥 끝까지도 추적할 것이다. 이미 죽었더라도 상관없다. 기필코 네놈의 수급을 떼어내어 사부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올리고 말 것이다.
단호하게 내뱉은 영호명은 휘하고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난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놈의 수급을 수습할 생각이오. 그러니 나머지 문도들은 당주들의 지휘 하에 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대신 무공이 뛰어난 용호대(龍虎隊)만 내 뒤를 따르도록 하시오.
넷. 주군.
영호명의 서슬 퍼런 명령에 철혈문 문도들은 곧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준환은 혀를 끌끌 찼다.
저토록 원한이 깊었었나?
이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천장단애로 다가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사준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정도 높이라면 설사 놈이 성한 몸이라 하더라도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구름으로 가려질 정도로 높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절벽이었다. 이제 독고성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접어버린 사준환은 고개를 돌려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배교 고수들을 쳐다보았다.
철수한다.
수하들이 철수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사준환은 만면 가득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곧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너털웃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천하는 시작될 것이다. 전 무림을 일통하려는 나의 원대한 포부는 배교를 발판 삼아 시작될 것이다.
험준한 천령산의 봉우리는 곧 사준환이 터뜨리는 광소로 인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독고성의 몸은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릇 사람이 높은 절벽에서 떨어질 때에는 바닥에 부딪혀 몸이 박살나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지기 마련이다. 대기와의 과도한 마찰, 그리고 극한으로 치밀어 오르는 공포심 때문에 심장이 대번에 멎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아직 절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입가 가득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데 대한 안도감 때문이었다. 지금껏 철저히 안배된 계산에 살아온 인생, 그 삶의 마지막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독고성의 입가에 맺힌 미소의 의미였다.
한 많았던 생애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군.
점점 의식이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저승이 어떤 곳인지 알 순 없지만 최소한 이곳보다 못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살아온 생애를 조명해 보자니 결코 천국에는 갈 수 없을 듯 싶었다.
지옥이라.
독고성은 점차 멀어지려는 의식을 한껏 추슬렀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때 아릿하던 시선에 무언가가 잡혔다.
헉.
독고성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놀랐다. 누군가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와 함께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일순 영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끄, 끈질긴 놈.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인영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존재는 마치 날개가 달린 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독고성은 존재의 정체를 샅샅이 살폈다. 우선 이곳에서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복색, 두건으로 반쯤 가린 얼굴은 결코 중원인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영호명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다니... 믿을 수 없어하는 독고성의 귀에 비행인(飛行人)이 발한 듯한 일성이 들어왔다.
리버스 그래버티(重力逆轉)
'리버..뭐? 무슨 뜻이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독고성의 몸이 추락하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릇 빠른 속도로 달리던 물체가 갑자기 정지하게 되면 그 충격은 결코 적지 않은 법.
독고성은 그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드는 감촉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천사(天使)인가?'
그 생각을 끝으로 독고성의 의식은 깊은 나락 속에 빠져 들어갔다.
다행이군.
간발의 차이로 목표물을 손에 넣은 벽안의 중년인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비록 목표물이 시체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목표물의 목숨을 유지시킬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니테스. 이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다른 차원, 그곳에 존재하는 대륙에서 최고위급의 마법사로 인정받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힐링.
짤막한 외침과 함께 그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중원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술법인 힐링 마법에 의해 생겨난 빛은 참혹한 형상의 목표물을 한 바퀴 휘감더니 그의 몸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일단 응급처치를 했으니 빨리 마법진으로 돌아가자.
베니테스는 재빨리 캐스팅에 나섰다. 목표물의 무게 때문에 점점 낙하를 시작하고 있던 몸이 급격히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공간이동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마나의 소모가 극심한 관계로 도저히 그럴 여력이 없으니...
마치 새처럼 하늘을 날아가며 베니테스는 정말 이 일이 천운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검술실력을 지녔다. 때문에 이곳의 인물을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아 설득할 재간이 없었으며 요행히 의사를 전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의도에 순순히 따를 지는 미지수였다. 또한 그만큼의 검술실력이 있는 자라면 이곳에서도 분명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을 터, 솔직히 자신들을 따라나서는 것은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우연히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검사를 보게 되었으니...
자신의 품에 안긴 왜소한 체구를 가진 인물은 타 차원의 인물인 자신들이 보기에도 무척 추악한 모습을 한 사내였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수많은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던 인물. 하지만 그의 활약상을 본 이후 베니테스는 단번에 그 사내의 실력에 매료되어버렸다. 소드 마스터.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은 궁극의 무예가가 이곳에는 무수히 존재했다. 선렬한 빛을 발하는 오러 블레이드(검기)의 모습에서 베니테스는 그들이 소드 마스터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소드 마스터라면 능히 근위 기사단에 들 수 있을 정도로 대우받았으며 또한 그만큼 귀한 존재였다. 때문에 제법 세력이 있는 영주들은 소드 마스터를 휘하에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허나 이곳에는 그런 귀한 존재가 널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자신의 품속에 안겨 있는 사내는 그런 무수한 소드 마스터들을 마치 무 베듯 우수수 쓰러뜨려 버린 것이다. 베니테스가 보기에 사내는 말 그대로 전신(戰神)이었다. 자신의 세계로 온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순식간에 절대자가 될 수 있을 듯한 무서운 실력자.
특이하게도 그 사내는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손톱이 길게 난 건틀릿 같은 기형 무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 실력에는 소드 마스터조차 저항할 수 없었다. 때문에 베니테스는 잠정적으로 사내를 점찍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쫓긴다면 필시 이곳에서 중대한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유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
그 때부터 베니테스는 사내의 뒤를 바짝 추적했다. 오로지 사내에게 말을 붙여볼 틈을 엿보기 위해. 통역 마법이 통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베니테스는 줄기차게 사내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가 말을 걸 기회는 여간해선 오지 않았다.
그만큼 사내는 쉴 틈도 없이 접전을 치러나갔기 때문이다. 무수한 검사들이 그의 무기 아래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벼드는 검사들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살육전을 전개해 나가던 사내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왔던 것이다. 자신들을 포위한 적들 앞에서 사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가 절벽에서 몸을 날렸을 때 베니테스는 자신에게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기회는 없어.
그는 지체 없이 공간이동의 술(術)을 시행했다. 정확한 좌표를 몰랐기에 어림짐작으로 시행한 위험천만한 방법. 다시 말해 하나의 도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시도였지만 신의 돌보심이 있었는지 도박은 다행히도 성공했다. 떨어져 내리는 사내의 옆에 베니테스는 무사히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가 익힌 고위급 마법의 정수가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리버스 그래버티로 사내가 떨어지는 속도를 감소시킨 뒤 에이비에이션(비행마법)을 조정해가며 사내를 안아든 것은 어지간한 마법사는 꿈도 꾸지 못할, 차라리 곡예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고 난이도의 기술이었다. 날아가던 와중 베니테스는 슬쩍 고개를 내려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질 정도로 추악한 외모였지만 베니테스에겐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그가 부디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텐데.
일단 그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서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데려간다면 그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터. 베니테스는 속력을 더욱 올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온통 수목으로 둘러싸인 계곡. 그곳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자들로써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두건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모습은 무척 이질적이었다. 대체적으로 옅은 갈색, 혹은 푸른 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며 이목구비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봐서 중원인은 분명 아니었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경계하듯 포진해 있었다.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는 문자가 마법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특히 마법진의 가운데에는 무척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놓여 있었다.
선혈처럼 붉은 빛이 감도는 보석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며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뒤이어 들려오는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
꿀꺽.
무척 긴장하고 있는지 사람들의 안색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슬며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큰일이군. 더 이상 지체한다면 돌아가지 못할 텐데.
늙수그레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와 불꽃 문양이 그려진 로브를 봐서 성직자가 아닌가 생각되는 노인이었다. 그들은 지금 누군가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예정된 시간을 넘긴다면 그들 모두는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기 때문에 초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곳의 검사들에게 발각된다 해도 우리들의 운명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베니테스가 그 검사를 구출해 올 수 있기만을 기원할 뿐이지.
착잡한 듯 노인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은 슈렉하이머. 이곳 중원과는 공간과 시간이 판이한 전혀 다른 장소에서 온 자였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을 자신들의 조국. 점점 밀리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계로의 차원이동을 감행했던 것이다.
본시 차원이동이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마법이다. 지금껏 차원이동을 통해 이계에 다녀온 마법사는 긴 인간의 역사를 뒤져봐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간혹 차원의 문이 열려 이따금, 아주 이따금 이계의 사람이나 괴수가 모습을 드러내긴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으니.
그러나 이 차원이동의 시도를 결심하게 된 하나의 물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드래곤 하트란 존재였다. 방대한 마나를 저장하고 있는 드래곤의 심장. 이것이라면 차원이동에 필요한 엄청난 마나를 얼마든지 공급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시도한 모험. 슈렉하이머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그 어렵다는 차원이동은 어렵사리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원래 그들은 이곳에 상당기간 체류하며 이곳 실력자들을 설득, 구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사절단의 구성원으로 마법사와 예법에 밝은 학자들을 대거 대동했을 뿐이었다. 허나 그것은 애당초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이곳의 무사들은 생각 외로 호전적이고 잔인했다. 대화를 위해 모습을 드러낸 사절단을 그들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도륙해 버렸다. 말을 걸 여지를 일체 주지 않는 자들. 때문에 사절단 일행들은 계속해서 몸을 숨기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처럼 납치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원이동에 드는 마나는 생각 외로 어마어마했다. 마법사들의 계산을 무려 열 배나 초과해서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마나를 방출한 관계로 자체적인 분열마저 시작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드래곤 하트의 마나는 계속해서 흩어지고 있을 터, 최악의 경우 그들은 두 번 다시 고국의 땅을 밝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드래곤 하트가 과연 그들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마나를 공급해 줄 수 있을 지 미지수였으므로.
그러나 슈렉하이머는 억지로 자신을 위안했다.
분명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간 사절단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차원이동을 통해 도움을 청하러 간 사절단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도합 다섯 개의 사절단이 마법진을 통해 각기 다른 시간대로 이동한 것이다. 물론 차원이동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좌표가 어긋나서 마계나 정령계로 떨어진다면 도착 즉시 생을 마감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슈렉하이머는 내심 지금의 상황이 천운이라 생각했다. 다섯 사절단 중 유독 자신이 속해 있던 사절단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 말이다. 그의 생각으로 이곳이 목적했던 장소가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하는 마스터 급 검사가 이토록 많이 널려있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이곳에 체류한 하루 동안 슈렉하이머는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크로센 대제가 살던 곳은 분명 이곳이 틀림이 없어.
그 때 한 마법사가 고함을 질렀다.
베니테스 님이 오고 계십니다.
슈렉하이머의 고개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팩 돌아갔다. 그의 눈에 마치 새처럼 공중을 날아 이곳으로 접근해 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슈렉하이머의 노안에 반색의 빛이 번져갔다.
성공했는가? 정말 천운이군.
신성마법에 의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베니테스가 안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도록 하시오. 한시가 급하오.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설치된 마법 트랩을 통해 외부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더욱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염원이 닿았는지 마법진은 곧 활성화되었고 드래곤 하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세차게 마나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베니테스가 마침내 마법사들이 기다리던 곳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오오. 성공하셨구려. 과연 제국 이카롯트의 수석 마법사다운 실력이오. 어, 어서 이곳으로.
연이은 마법 시전에다 먼 거리를 날아온 때문에 베니테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상태였다. 상황이 어떤지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품에는 왜소한 체구를 한 시체(?) 한 구가 안겨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 모습에서 숨이 붙어있다고 여기는 자는 없을 터였다. 그런 마음을 느낀 듯 베니테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살아있습니다. 물론 생명이 경각에 달해있긴 하지만 포션을 사용한다면 생명을 다소나마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일시적으로 응급처치는 끝낸 상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슈렉하이머는 품속에 손을 넣어 유리로 된 조그마한 병을 꺼냈다.
이름하여 힐링 포션. 모험가들이 흔히 소지하는 조잡한 포션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품이었다. 슈렉하이머는 병의 봉인을 풀고 그것을 지체 없이 시체의 입에다 부어넣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싼 포션이었지만 슈렉하이머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 그럼 떠납시다.
이미 모든 사절단의 구성원들이 마법진 위에 모여있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차원이동의 마법이 구현될 때만 기다렸다.
쓰쓰쓰쓰.
마법진은 오래지 않아 발동되었다. 그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마법진은 곧 휘황찬란한 빛에 휘감겨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능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광휘. 그 빛무리에 이곳으로 달려오던 무수한 그림자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비쳐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빛무리 속에서 어른거리던 십여 명의 그림자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쏴아아아.
십여 명의 사람들을 삼킨 광휘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돌개바람처럼 휘돌아 올라가며 점점 빛이 사그러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빛무리 앞에 갑자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뜩 경직된 얼굴.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호명이었다.
어떻게 이, 이런 일이.
그는 점점 사그러지는 빛무리를 쳐다보며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원수를 쫓아 이곳까지 왔는데 막상 눈앞에서 목표물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의 입에서 비통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놈들의 정체를 몰라 기다리지만 않았더라면...
독고성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던 중 영호명은 말도 되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 바가 있었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독고성을 계속 지켜보며 추락지점을 가늠하는 중 독고성의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은 말도 안돼. 허공답보라도 저럴 수는 없어.
영호명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이 놀랄 만한 일은 계속 벌어졌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놀랍게도 새처럼 하늘을 날며 뭐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끝없이 추락하던 독고성의 몸이 급격히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닿은 듯 독고성의 몸은 계속 추락을 멈춰가다 어느 순간 허공에 딱 멈춰버렸다. 절벽의 바닥을 거의 지척에 둔 순간이었다. 그러자 의문의 비행인(飛行人)은 지체 없이 독고성의 몸을 안아들었다. 그러고 어딘가를 향해 냅다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상황을 눈치챈 영호명은 추격을 시작했다. 비록 상대가 허공을 날아가긴 했어도 영호명이 보유한 상승 신법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기를 한 참여.
영호명은 마침내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인의 비행궤적은 바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을 독고성의 동조자들로 간주했다. 독고성을 구해온 것만 보아 영호명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는 즉시 행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 우선 수적으로 현저히 열세였으며 무엇보다도 허공답보를 시전한 중년 고수가 가장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허공답보를 시전하는 고수에다 그 수하들이 가세한다면 내가 감당하기 힘들다. 일단 용호대가 도착한 뒤 공격을 감행해야겠군.
영호명은 철혈문 문도들이 도착한 뒤에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적들이 도주할 퇴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조금 후면 도착할 수하들을 기다렸다. 영호명의 신법이 워낙 빨랐기에 철혈문 수하들은 조금 뒤쳐져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저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영호명의 숙련된 감각에도 감지되지 않는 것을 봐서 저들은 이곳에서 없어진 것이 확실했다. 점점 사그러지는 빛무리를 지켜보며 영호명은 이를 으스러져라 꽉 악물었다.
배교 놈들의 사술은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놈을 놓칠 수는 없어. 너희들이 간 곳이 지옥 끝이라 해도 따라가겠다.
마음을 굳힌 영호명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빛무리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빛무리가 막 사그러지려는 찰나였다. 그의 몸 역시 광휘에 휩싸여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없어져 버렸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광휘는 완전히 꺼져버렸고 그 자리는 곧 조용해졌다. 뒤이어 이어지는 어지러운 발자국소리.
아니?
무, 문주님.
주군이 사라지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한 철혈문 무사들만이 소리 높여 고함을 질러댈 뿐이었다. 하지만 한 번 모습을 감춘 영호명은 그 어디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영원히...
으아아악.
한 무인이 생을 마감하며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소리. 생과 사가 뒤바뀌는 이런 일은 무림에선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수천 명의 문하를 보유한 사파의 거두라면 결코 쉽게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사령천존 독고무기. 오랜 전통을 가진 사도 문파 배교의 제 18대 교주로써 점점 강성해지는 배교의 모든 생사 여탈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절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처럼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것도 배교 총단이 있는 천산에서 무척 떨어진 이곳 하남에서 말이다.
한 동안 몸을 부들부들 떨던 독고무기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이 온통 으스러져 있는 것을 봐서 그가 고도의 내가기공에 의해 절명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독고무기의 시신 옆에는 서너 명의 인물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휴! 정말 가공했어.
긴 수염을 기른 도인이 검을 수습하며 장탄성을 토해냈다. 고풍찬연한 송문고검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이가 나간 것을 보니 격전이 무척 치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적송평. 공동파의 원로로써 근래 얼마 남지 않은 백도의 전대 원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고무기의 목숨을 거둔 것은 그가 아니었다. 독고무기의 친위대인 수호마왕군을 몇 도륙했긴 했지만 애당초 그의 실력으론 독고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독고무기를 맡은 실력자가 또다시 있다는 말이다. 곧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독고무기를 쓰러뜨린 당사자에게로 말이다.
왝.
한동안 몸을 떨며 서 있던 백염의 노승이 갑자기 왈칵 선혈을 뱉어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계피학발의 노인. 무척 쭈글쭈글한 피부에도 불구하고 무척 자애스러운 풍모를 가지고 있는, 겉보기에는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노인의 정체는 바로 소림성승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내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절대 고수로써 벌써 오십 년 전에 소림사 달마원주를 역임했던 노고수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독고무기를 절명시킨 장본인이었다. 무척 오랫동안 은거해 있던 그는 소림 장문인의 간절한 부탁으로 이번에 하산하게 되었다. 현 소림방장을 사질로 두고 있을 정도로 배분과 실력이 높기 그지없었지만 독고무기와의 일전이 전대 고수인 그에게도 결코 쉽진 않은 모양이었다. 고통이 심한지 그는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적송평이 그에게 운기조식을 권했다.
그러지 말고 조식을 통해 몸을 회복시키도록 하시지요. 대사. 저희들이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겨우겨우 내뱉은 소림성승은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기조식을 해서 들끓는 기혈을 가라앉히려는 것이다. 남은 명숙들은 만약에 있을 지도 모르는 암습에 대비해서 그의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쌌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적송평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이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소. 사파의 거두 독고무기를 이처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니...
그 말에 늘어선 전대 고수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배교의 절대자가 달랑 수호마왕군 열 명만 대동하고 이 먼 하남으로 올 줄 누가 알았겠소?
지금처럼 마교가 일원천리로 발원하는 마당에 이 일은 한 마디로 우리 백도의 홍복이라 할 수 있소.
사파의 거두를 제거했다는 일. 의당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기습을 가해 상대를 척살했다는 것은 무림인으로써 전혀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는 점점 힘이 강대해져 가는 마교 단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또 다른 사도의 문파인 배교가 마치 욱일천승하는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상황. 그런 열세를 보다 못해 전대 고수인 그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목적은 달성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아마도 그들만 간직해야 할 비밀로 묻혀 버릴 것이다. 그 때 비쩍 마른 도인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도포에 그려진 표식을 봐서 무당파의 고수인 듯 했다.
그런데 독고무기가 수하 십여 명만을 대동하고 이리로 온다는 소식은 대관절 누가 흘렸을까요?
그러게 말이오. 덕분에 대어를 낚는 성과를 거둘 순 있었지만 그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소.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배경에는 뭔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다. 달포쯤 전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누군가가 사람을 시켜 무림맹 총단으로 한 장의 서찰을 보내 왔던 것이다. 서찰에는 비록 아무런 서명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내용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모년 모일 정오 경 배교 교주 독고무기가 수하 단 10여 명만을 대동한 채 하남의 생사평을 지나갈 것이오.
무척이나 짧디 짧은 글귀. 하지만 이 서찰 한 장으로 인해 무림맹 총단은 발칵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