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분명 우리 백도의 명숙들을 유인, 살해하려는 불온한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하오.
사파 놈들의 잔꾀에 속아선 아니 되오.
하지만 그대로 묵살하기엔 미끼가 너무 컸다. 때문에 무림맹에선 수십 명의 무사를 파견해서 생사평 부근을 샅샅이 훑기에 나섰다. 사실 여부를 확실히 알아보고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찰의 내용은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적힌 내용대로 배교 교주 독고무기는 수하 단 10여 명만을 대동한 채 생사평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무얼하러 온 거지?
상황을 알게 된 무림맹은 지체 없이 대응에 나섰다. 그들로써는 장래 백도의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이 될 것이 분명한 마두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결국 그를 제거하기 위해 오랫동안 은거 중이던 전대 고수들이 속속 하산했다. 가공할 무공을 지닌 독고무기를 소문나지 않게 처치하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계획은 성공해서 예정대로 독고무기를 척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 남아 있었는데...
그런데 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모두의 눈길이 적송평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살 정도, 많아봐야 세 살이 넘어 보이지 않은 어린아이 하나가 한 무사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를 나이의 어린아이. 하지만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는 것을 봐서 뭔가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아이가 독고무기의 외아들로 짐작되는 아이였으니...
가장 성질이 급한 적송평이 서둘러 검을 뽑으려 했다.
처치해 버립시다. 죽여 입을 막는다면(殺人滅口) 간단히 해결될 것이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나름대로 백도의 명숙이라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만약 합공으로 독고무기를 격살한 일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자신들의 명예가 형편없이 실추될 것은 안 봐도 뻔한 사실. 거기에다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까지 참살했다는 사실이 추가된다면 그들은 무림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터였다. 서찰을 보낸 자의 저의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그들로썬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 운기조식을 마친 소림성승이 몸을 일으켰다.
그 아이는 우리 소림사에서 맡겠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혜정에게로 집중되었다.
무, 무슨 뜻이온지?
운기조식을 마쳐서인지 소림성승의 얼굴에는 다소나마 혈기가 돌고 있었다.
굳이 남의 시선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처럼 어린아이를 죽일 순 없소. 내가 본사로 데리고 가서 한 번 계도해 보리다.
그 말에 백도 명숙들은 아연해했다.
안될 말입니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저 아이는 사파 마두의 아들입니다.
저 원독 어린 눈빛을 보십시오. 놈이 만약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필히 제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림성승의 태도는 추상같았다.
이미 소림성승의 고집은 소림사 안팎으로 널리 알려진 바가 있었다.
날 때부터 악한 자는 없소. 비록 독고무기의 자식이라곤 하나 본사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오랜 수행을 거친다면 한 명의 불자로 충분히 태어날 수 있을 것이오.
하, 하오나.
불법 외에 무예를 전수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걱정할 것은 없소.
하지만 적송평은 그리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하오나 혜정대사. 일은 대사의 장담처럼 간단하지 않을 듯 싶소. 교주를 잃은 배교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아이를 빼앗아 가려 할 것이오. 만에 하나 아이가 추후 상상도 할 수 없을 대 마두가 되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소. 독고무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면 자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터, 만약 배교의 기괴막측하고 사이한 무공과 결합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맞습니다. 적 장로의 말이 지당합니다.
거의 모든 명숙들이 적송평의 뜻에 동의했다. 그 모습에 소림성승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저 어리디 어린 아이의 명을 거두려 할꼬?'
소림성승의 시선이 얼핏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직 천진난만할 나이였지만 아이의 모습에서는 결코 귀여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늘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보기 흉하게 뒤집힌 들창코에 등이 심하게 굽은 것을 봐서 선천적인 기형으로 보였다.
정말 꿈에라도 보기 싫을 정도로 추악한 용모. 녀석은 특이하게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소림성승은 아이의 시선에서 살기(殺氣) 비슷한 것을 느꼈다.
천성적으로 살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로군.
그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내가 이 아이에게 친히 금제를 가하도록 하겠소. 모두 들어보았겠지만 우리 소림사엔 계도할 수 없는 악인에게만 시전하는 금제술이 있소. 그 대법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시술한다면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시겠소?
적송평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치, 칠종단금술.
모인 백도 명숙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파장은 컸다.
칠종단금술. 피 시술자에게서 살심(殺心)을 원천적으로 말살해버리는 고도의 금제술로써 그 위력에 살계(殺戒)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는 소림 비전의 금제법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시술을 받은 자는 결코 살인을 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칠종단금술은 피 시술자의 영혼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만약 살심을 일으킬 경우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가한다고 한다. 그 고통은 인간이라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정도. 만약 고통을 무시하고 살인을 행한다면 피 시술자는 그 즉시 뇌의 혈맥이 모두 파열해서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살생을 금해야 하는 승려의 입장인지라 소림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제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이 칠종단금술을 시술받은 자는 천년 소림사의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서, 성승. 칠종단금술을 시전하신다면 성승께서 지금껏 쌓아온 내공 중 상당수가 소실될 터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소림성승 혜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차피 살대로 산목숨이오. 죽으면 어차피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일 터, 내 무엇을 아까워 하리오. 그러니 아무런 걱정말고 저 아이를 내게 데려다 주시겠소?
칠종단금술이 널리 쓰이지 못한 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이백 년 이상의 내공을 가진 내가고수가 자신의 진신내력을 총 동원해서 시술해야만 대법이 시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법은 시술자의 내공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금제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시술자는 자신이 일생동안 익힌 내력의 일정량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 소림 제일의 내가 고수라 자부하는 소림성승이 일개 마두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내력을 소진시키려 하다니. 무림 명숙들이 보기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소림성승을 만류하지 않았다.
이미 무림에서 정평이 나 있는 소림성승의 고집이 아니더라도 그들로써는 강대한 소림사의 제일 고수가 자청해서 힘을 잃어주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자고로 타파의 힘이 약해지면 자파에 기회가 돌아오는 법. 잠시 이해득실을 따져본 적송평은 만면에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성승이라 불릴 만 하실 자비심이시오. 대사.
대사는 영원한 소림의 활불이 되실 것이오.
억지로 웃음 짓는 명숙들의 얼굴을 훑어본 소림성승은 쓴웃음을 지으며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이미 아이는 무사들의 손에 의해 소림성승의 앞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였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을 묻는 성승의 말에도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원독어린 눈빛만 희번덕거릴 뿐이었다.
살기가 하늘을 찌르는 아이로구나. 과연 내 결정이 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구나.
그러나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판단하시겠지. 그럼 노납이 네 본성에서 영원히 살기를 제거할 대법을 시행하겠노라.
한숨을 내쉰 성승은 합장을 하며 두 손에 내력을 모았다. 소림 제일의 내력을 가진 실력자답게 무형의 엄청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소림성승의 얼굴을 쏘아볼 뿐이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갈!
기합성을 내지른 소림성승은 합장한 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뼈가 앙상한 성승의 두 손은 삽시간에 아이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장심을 통해 미증유의 거력이 아이의 머리 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쭉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간 아이의 눈이 급격히 크게 뜨여졌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극통이 머리 속으로부터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굳게 닫힌 입이 벌어지며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서 이처럼 극악한 시술까지 받고 있는 아이.
정말 처지가 기구하기 그지없는 아이의 이름은 바로 독고성이었다.
헉.
독고성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록 꿈이었지만 느껴지는 통증은 잠이 싹 달아날 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다. 꽉 잠긴 음성이 입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제, 제기랄. 그토록 겪어왔건만 이 빌어먹을 고통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군.
잠에서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도 독고성은 연신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과거였기 때문에 이따금 이렇게 옛 일을 상기시키는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때문에 배교의 절대자이던 시절엔 제법 많은 수하나 시비들이 악몽을 꾸고 난 분풀이로 호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독고성은 연신 눈을 끔뻑거렸다. 눈꺼풀을 비집고 흐릿하게나마 빛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사물이 명확히 식별되지 않았다. 전신에 온통 시큰거리는 통증이 전해졌고 머리가 깨어질 듯한 두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아픈 걸 보니 아마도 저 세상은 아닌 듯 싶군.
죽은 다음이라면 생전에 입은 상처의 통증 따위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단정했다. 그러자 독고성의 뇌리에 문득 자신의 몸 상태가 떠올랐다.
가만...
독고성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배교 총단으로부터의 탈출.
정파와 마교,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배교 추적대와의 처절한 사투가 마치 조금 전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마교의 쌍수마존 위청과 그 수하들을 처리하느라 남은 진원진기를 일시에 폭발시켰던 일이 떠오르자 독고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당시 나는 사준환 놈의 암습에 단전이 반 이상 파괴당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진원진기를 폭발시켰다면.
독고성은 다급하게 내력을 운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시작하자마자 무위로 돌아갔다. 내공을 일주천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인체의 기관은 이제 그의 몸에서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 없어. 단전이 느껴지지 않아.
단전은 이미 존재감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듭되는 혹사로 인해 갈가리 찢겨버린 것이다. 심지어 경맥과 혈도에서조차 아무런 반응도 전해지지 않았다. 진원진기를 폭발시키는 과정에서 활짝 열렸다가 곧이어 닫혀버린 경맥과 혈도. 그것들은 콱 틀어 막힌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다시 말해 독고성은 이제 두 번 다시 내력을 운기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처참하게 변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고로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지금까지 닦아온 무공을 꼽을 것이다. 무인에겐 경우에 따라서 부모나 형제, 처자식보다도 더 소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공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고성의 경우는 더욱 절박했다. 추악한 외모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숱한 멸시를 받아온 독고성. 그가 현실을 타개할 길은 오로지 무공수련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무공을 익혔다. 무공수련에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을 소림사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보내고 뒤늦게 연성을 시작한 만큼 그 길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얻은 무공이 송두리째 사라지다니... 가히 하늘이 꺼지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 같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억지로 위안해 보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뒤이어 이어지는 오열.
어흐흐흐.
독고성은 울고 또 울었다. 그런다고 잃었던 무공이 다시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래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독고성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는 퉁퉁 부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일까?
이제야 서서히 사물이 분간되기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은 무척 호화롭게 치장된 커다란 방이었다. 그의 몸은 장정 열 명이 누워도 넉넉할 만한 커다란 침대 위에 고이 뉘어져 있었다.
독고성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혹이 서렸다.
무척 생소한 장식이군. 방의 형태도 그렇고 침대의 모양 역시...
배교의 교주이던 시절 독고성은 무척이나 호사스럽게 생활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과거 그가 기거하던 침실도 이곳에 비한다면 가히 오두막이라 비하할 수 있을 정도로 방은 호화롭게 그지없었다. 또한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중원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독고성의 시선이 방의 구석에 놓인 철인(鐵人)에게로 닿았다.
어디에다 쓰는 물건이지? 할 일도 없군. 정련된 강철로 사람 형상이나 본떠 놓았으니.
그것이 기사들이 걸치는 중갑주, 풀 플레이트 메일이라는 것을 꿈에도 짐작 못한 독고성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때 문이 덜컥 열렸다. 본능적으로 경계 자세를 취하려던 독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지금 몸 상태라면 암습이 아니라 무공을 모르는 자가 몽둥이를 쥐고 덤벼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독고성이 익힌 천자혈마공은 심오한 초식이나 정교한 변초가 필요한 무공이 아니었다.
철저히 패(覇)를 추구하는 내가기공으로써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닥치는 대로 치고 부수는 패도적인 마공이었다. 그런 터라 무공을 상실한 지금, 독고성에게는 차라리 하급 무사나 표사들이나 익히는 삼류 무공이 더 절실했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해 속성을 택한 독고성에게 기본기를 충실히 익힐 시간 따윈 애당초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하얀 백염이 인상적인 늙은이였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와 이질적인 얼굴 형태에서 독고성은 그가 결코 중원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불꽃 문양이 그려진 장포의 형태가 중원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독고성의 머리는 노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꽃 문양의 옷에 색목인이라니... 본교와 먼 친척 뻘인 서역의 배화교(조로아스터교) 사람인가?'
들어온 노인은 다름 아닌 슈렉하이머였다.
오! 깨어났구려. 잘 주무셨소.
슈렉하이머가 반색하며 인사말을 걸었지만 애시당초 독고성이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상대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한 표정에 비로소 실책을 알아차린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의사소통부터 해결해야겠군. 과연 통역 마법이 통할 지는 미지수지만.
방안으로 들어온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 주문 같은 것을 웅얼거리자 독고성으로써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 자신이 배교의 기괴막측한 사술을 모두 터득한 고급 술법사였기 때문에 주문이란 것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고성은 이제 그 숱한 사술들은 단 하나도 쓸 수 없었다. 사술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내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단 한 점의 내공도 사용할 수 없는, 범인과 전혀 다름없는 몸이었다. 때문에 그는 긴장하며 상대의 주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주문을 마친 노인은 다시금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갑자기 중원어가 튀어나왔다.
잘 주무셨소?
독고성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 만큼 커졌다. 한 눈에 척 보아도 중원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는 색목인이 느닷없이 유창한 중원어를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독고성의 고향인 양주 지방의 방언이었다. 억양까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예로부터 땅이 넓은 중원에는 수많은 방언이 존재했다. 드넓은 영토 때문에 방언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고, 그 때문에 같은 중원사람이라 하더라도 의사소통이 모두 가능한 건 아니었다. 남쪽 지방의 운남 사람과 북서쪽으로 치우친 산서 사람이 만난다면 두 사람이 대화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고성의 고향인 양주 역시 중원에서 본다면 변두리였기 때문에 서부지방 사람과 만난다면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방인이 자신의 고향 방언을 그것도 아주 유창하기 말하고 있으니... 눈만 감았다면 마치 고향 사람으로 여길 뻔했을 정도니 독고성으로썬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는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어떻게 해서 색목인인 네가 양주 방언을 알고 있지?
아! 이 언어 말이군요.
슈렉하이머는 모호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서운 능력을 과시한 이계의 실력자가 자신 대륙의 마법에 놀라는 것이 그리 싫진 않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마법을 이용해서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마법?
저는 지금 이 트루베니아 대륙의 공용어로 당신께 말을 걸고 있습니다. 이 언어를 당신이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마법의 위력이지요.
트루 머시기?
트루베니아 대륙입니다. 지금 당신께서 딛고 서 있는 땅이 바로 트루베니아 대륙이지요. 당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대답에는 일말의 자부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태어난 트루베니아 대륙을 사랑했다. 특히 그 어렵다는 차원이동을 멋지게 성공시켜 임무를 성공시키고 차원여행을 성공한 유일한 신관이 되었다는 점에 슈렉하이머는 심히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설명은 독고성에겐 그리 쉽사리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독고성이 사술에 능통한 술법자이긴 했지만 둘은 애당초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던 존재인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독고성의 안색은 점점 싸늘해졌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네놈이 무슨 의도로 날 속이려는 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곳이 어디인지 소상히 밝히도록 하라.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은 바로 트루베니아 대륙입니다.
트루벤인지 개똥인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정체를 밝힐 수 없다면 내가 밝히겠다.
비켜라
독고성은 슈렉하이머에게 거침없이 하대를 하고 있었다. 우선 절대자였던 시절 몸에 익은 버릇이기도 했으며 상대의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한 것도 있었다. 자신의 호통에 상대가 움찔 하는 것을 느낀 독고성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정상이 아닌 몸은 당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으으음.
한참동안 몸을 일으키려 애쓰던 독고성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은 아직까지 처참히 망가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슈렉하이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포션과 힐링으로 외상이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속으로 심각하게 골병이 든 상태입니다.
닥쳐라 이놈! 네가 무얼 안다고?
내심 부끄러웠던 독고성은 짐짓 허세를 부리려는 듯 호통을 쳐 댔다. 독고성의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할 수 없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심기가 편치 않은 듯 싶군요. 그럼 오늘은 물러가도록 하겠사오니 푹 쉬신 다음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비록 그가 도움을 구걸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긴 하지만 애당초 고위급 성직자였던 터라 이처럼 하대를 당하는 것이 슈렉하이머에겐 썩 달갑진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는 슈렉하이머의 뒷모습을 독고성은 의혹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놈의 꿍꿍이가 뭘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육신 때문에 잠이 밀물처럼 쏟아졌고 독고성은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에는 느닷없이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과연 그가 우리의 염원을 들어줄까?
넓은 대청을 걸어나가며 슈렉하이머는 마치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복도에 늘어선 병사들이 공손히 예를 취해왔지만 그는 마치 정신나간 것처럼 걸어갈 뿐이었다.
차원이동은 성공했다. 슈렉하이머를 비롯한 사절단 일행은 이계의 이름 모를 무사를 데리고 그들의 고향 트루베니아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환한 사절단은 오로지 그들 뿐이었다. 다른 시간대로 간 이들은 하나같이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임무를 성공시킨 슈렉하이머 일행은 각국 왕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 줄 영웅을 초빙해 왔다는 데 대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만큼 트루베니아 대륙의 상황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자고 나면 어김없이 하나씩의 왕국들이 사라져버리는 실정. 비록 데리고 온 이계 무사가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슈렉하이머는 그에 한 가닥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 대륙은 필히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약석(誓約石)을 되찾아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마치 정신병자처럼 중얼거리던 슈렉하이머는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을 탈취당하던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기에 슈렉하이머가 더욱 책임감을 느끼는 지도 몰랐다.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은 두 번째의 위기인 블러디 문(bloody moon)의 참사를 막 극복한 상태였다. 두 번에 달하는 전쟁으로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슈렉하이머는 두 번의 전쟁에 모두 참여한 경험 많은 프리스트였고 베르하젤 교단의 수련생들을 교육시키는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트루베니아 대륙의 최강국 이카롯트 제국에 위치해 있는 총 교단의 프리스트로 말이다. 미래의 성직자를 키워내는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으므로 당시에는 고위급 성직자인 그가 직접 교육을 맡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슈렉하이머는 점차 그 때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알다시피 트루베니아 대륙에는 인간들 이외에도 많은 유사인종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여러 유사인종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무척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종족이다. 그렇지 않나?
슈렉하이머의 앞에는 이, 삼십 명 정도의 젊은 수련생들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교단의 앞날을 책임질 젊은 인재들이었다. 슈렉하이머의 반문에 수련생들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잠시 그들을 둘러보던 슈렉하이머는 미소를 떠올리며 대화를 계속 풀어나갔다.
인간은 엘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명을 가지고 있다. 천년 가까이 살아가는 그들의 수명을 인간이 따라갈 수가 있을까?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당한 말이라서 수련생들은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기술면에서 인간은 드워프들을 따라갈 수 없다. 아니 비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겠지. 이 사실은 너희들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 중 제일 가는 대장장이라도 드워프들이 만드는 장비는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힘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우거, 트롤 따위의 저능한 몬스터에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비록 체력이 오크보다는 다소 낫긴 하지만 생식력과 성장속도 면에서 인간은 오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잠시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복전쟁 당시 인간의 주된 적은 바로 오크 족이었다. 울창한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나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드워프들과는 달리 오크들은 인간과 맞먹는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종족이었다. 그러므로 상황은 점차 두 종족간의 전면전으로 치달아갈 수밖에 없겠지? 처음에는 힘과 인구수에서 앞선 오크 족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었다. 인간보다 힘이 세고 천성적으로 사냥꾼으로 타고난 오크족을 인간들이 극복하기란 힘든 실정이었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어갔다.
처음에는 막연히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 여겨졌던 인간들. 하지만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인간들은 무수한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며 트루베니아 대륙에 살아가는 다른 유사종족들을 대부분 정복할 수 있었다.
잠시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는 수련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막강한 오크 종족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고 펠루시아 산맥 저편으로 몰아내었는지 누구 아는 사람 있나?
그의 질문에 한 수련생이 손을 들었다.
예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수련생은 장황하게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이처럼 우위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조사된 바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막연히 베르하젤 님의 축복 때문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바로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선대의 경험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지혜 말입니다. 그 덕택에 우리 인간은 짧은 수명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오크 족을 위시한 타 종족에 비추어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서로간의 관계가 다양합니다. 그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각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또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수련생의 설명을 들으며 슈렉하이머는 점점 감회에 젖어갔다. 지금 수련생의 의견, 이것은 삼십 년 전 당시 종교분규 시절에는 나와서는 안될 성질의 것이었다. 만약 당시였다면 그 즉시 불순한 생각으로 간주되어 발언자가 재판에 회부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재판 없이도 화형에 처해질 성질의 발언이었다. 방금 수련생의 주장은 당시 불신자들의 그것과 별달리 다름이 없었다. 트루베니아 최악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종교분쟁의 원인 말이다. 하지만 그 지엄했던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는 지금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발언 역시 더 이상 죄가 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세월이 참 많이 변했지.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그 때의 상황을 돌이켰다. 불과 백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사건들. 종교 분쟁에 이어 벌어진 정말 처절했던 어둠의 전쟁.
잠시 후 수련생의 발표가 끝나고 나자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그 때의 상황을 학생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의 과목은 역사였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반수는 그 때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였으므로...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다.
강의를 시작한 슈렉하이머는 인간에게 닥친 두 번째의 재앙인 암흑 전쟁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에겐 선대의 경험을 어린 수련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다 썩어버린 살을 너덜거리며 녹슨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병사. 형형색색의 생김새를 자랑하는 이름 모를 마계의 마물,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각종 골렘과 데스나이트. 다크 쉐이드. 이 끔찍한 어둠의 군대에 맞서 병사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슈렉하이머는 숨을 죽인 수련생들을 둘러보며 가슴을 내밀었다. 한 수련생이 즉시 그에 응대해왔다. 아까 의견을 발표한 바로 그 수련생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써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정신의 발로입니다.
가족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지요.
알게 모르게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 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실망감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리 상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승리하는데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원군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종교분쟁 때문에 아직까지도 각 왕국에서는 아르카디아란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금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 국민이 베르하젤 교단의 독실한 신자였던 시기는 이제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블러디 문의 참사라 일컬어진 암흑군단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이러다간 백년 후쯤 되면 교단이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로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그의 눈에 초롱초롱한 수련생들의 눈빛이 들어왔다. 수업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슈렉하이머는 종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 굉음이 들려왔다.
콰쾅.
그들이 수업 중이던 교실이 우르르 흔들렸다. 엉거주춤 서 있던 슈렉하이머는 그만 뒤로 볼썽사납게 나뒹굴 뻔했다. 겨우 몸을 수습한 슈렉하이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도대체.
이곳은 이카롯트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베르하젤 교단의 총 본산이었다. 이러한 굉음과 진동은 있을 수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해산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슈렉하이머는 학생들에게 일갈하며 얼른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은 굉음과 함께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콰쾅.
그리고 거기서 몸을 드러낸 것은... 슈렉하이머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레졌다.
오, 오크?
온통 피에 젖어있는 도끼를 든 괴물 수십 마리가 교실 내부로 뛰어들어와 있었다.
번들거리는 녹색 피부, 1.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달막한 체구였지만 하나같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봐서 한 눈에 전사(戰士)들임을 알 수 있었다.
조잡하고 거칠지만 튼튼해 보이는 갑주를 걸치고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는 존재.
그들은 바로 오크였다.
1차 종족 전쟁 직후 지리멸렬해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들었다고 알려진 오크 무리가 난데없이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이카롯트 왕국에 위치한 베르하젤 교단의 총 본산으로 말이다. 슈렉하이머로썬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크들의 목적은 곧 밝혀졌다. 이름하여 살육. 그들은 가차없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멀뚱멀뚱 서있던 수련생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도끼에 찍힌 상처에서 낭자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소리에 슈렉하이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입에서 거의 반사적으로 거센 주문영창이 터져 나왔다.
블라인드니스(blindness)
사색이 된 수련생들을 막 쓸어가던 오크들이 갑자기 장님이 된 것처럼 허둥대며 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 눈에 보아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크들이 더 이상 수련생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슈렉하이머의 노력은 성공했다. 이젠 이것들을 잠재워야 할 차례였다.
버닝 핸즈(burning hands)
슈렉하이머의 두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손 주변을 마법으로 가열한 후 그 열기로 상대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는 마법인 버닝 핸즈. 이것이라면 어렵지 않게 오크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슈렉하이머는 얼른 장님이 된 오크들에게 다가갔다.
그 때 오크들의 뒤에서 차디찬 일성이 터져 나왔다.
잔재주 피우지 마라 인간, 디스펠 매직(Despell Magic)
화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슈렉하이머의 두 손에 붙은 화염이 퍽 하고 꺼져버렸다.
뒤이어 블라인드니스가 디스펠되자 오크들은 겨우 장님 신세에서 벗어났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오크들은 이제 슈렉하이머를 노려보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저음의 거친 음성이 확 토해졌다.
취이이익, 인간 죽어라!
수십여 자루의 베틀 액스가 쏜살같이 슈렉하이머의 전신을 노렸다. 공간전이로 공격을 피해낸 슈렉하이머는 얼른 반격을 가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해 버린 존재에 대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크리티컬 운즈(critical wounds)
고위급 성직자답게 슈렉하이머는 순식간에 반수 이상의 오크들에게 마법을 걸어버렸다. 주문영창이 끝나자마자 오크들은 삽시간에 무기를 내던지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워어어.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뒹구는 오크의 몸에서 점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절명했는지 축 늘어진 오크도 그 중에서 심심찮게 보였다. 한숨을 돌린 슈렉하이머는 일단 겁에 질려있는 수련생들에게 대피하란 몸짓을 했다. 수련생들이 후문을 통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한 존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이리 나오시게?
그때까지 오크들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감당하기엔 노 프리스트 슈렉하이머란 존재가 너무도 강력했다.
제법이로군.
냉랭한 일성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문을 통해 들어왔다. 검은머리를 한 무척 냉막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얼굴에는 사이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청년의 두 눈에 아무런 감정이 떠올라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눈동자는 인간의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달랐다.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은 눈빛에서 슈렉하이머는 본능적으로 그가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너, 넌 누구지?
슈렉하이머의 질문에도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버르적거리는 오크들을 한 번 훑어본 청년은 가볍게 손을 한 번 내저었다.
크으으으.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오크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슈렉하이머를 쳐다보며 베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서 오크가 왜 복수의 화신이라 불리는지 슈렉하이머는 잘 알 수 있었다.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고난 전사가 바로 오크들이었던 것이다. 막 달려들려던 그들을 제지한 것은 의외로 마법을 풀어준 청년이었다.
멍청한 것들. 이자는 내가 상대하겠다. 너희들은 다른 인간들을 상대하라.
취이익. 알겠습니다.
청년을 무척 두려워하는 듯 오크들은 고개를 공손히 숙이더니 교실에서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슈렉하이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가벼운 손짓 하나만으로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 하는 모습에서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오크들이 방안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청년은 슈렉하이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정체를 물었나?
....
쉽게 얘기하도록 하지. 우린 인간들이란 존재에게 응징을 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인간?
그렇다. 자만심이 그득하며 욕심이 많아 끊임없이 분규를 일으키며 틈만 나면 타 종족을 정복하려 하는, 이 트루베니아 대륙에 있어서는 안 될 종족인 인간을 말살시키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는 기가 막혔다.
어째서? 그런 너 자신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모습? 네놈들을 속이기 쉬워서 하고 있을 뿐 다른 뜻은 없다. 너희 종족들의 최후를 앞당기기 위해 선택한 모습이라고 할까?
이놈.
참지 못한 슈렉하이머가 선제 공격을 날렸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그가 지휘하는 오크의 손에 의해 휘하의 수련생들이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제자를 잃은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슈렉하이머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빛이 번쩍하더니 그의 손에서 라이트닝 볼트가 형성되며 청년을 향해 날아갔다.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파지지직.
그러나 슈렉하이머가 쏘아낸 회심의 일격은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라이트닝 볼트가 작렬하는 순간 청년의 전신에서 일어난 유형의 기운이 전격을 완전히 차단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슈렉하이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포스 실드? 그 고위급 마법을 주문영창도 없이 시전하다니? 네, 네놈의 정체는 도대체?
슈렉하이머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청년의 모습에서 갑자기 한 존재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존재. 강대한 힘과 지능으로 대륙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존재 드래곤. 만약 그 수가 어느 정도만 되었더라도 드래곤은 능히 트루베니아 대륙을 주름잡을 수 있었다. 이 강력하고 영리한 존재에 단신으로 맞설 상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드래곤이라면 능히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할 수 있을뿐더러 이 정도의 위력 또한 충분히 낼 수 있었다.
드, 드래곤인가?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슈렉하이머가 떠듬거리자 청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용케 눈치챘군. 그렇다.
어, 어떻게? 드래곤은 다른 종족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청년의 눈에서 갑자기 살광이 치솟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슈렉하이머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눈빛은 강력했다.
인간이여, 너희 천박한 자만심에 조소를 보낸다. 그 작은 몸집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의 목숨까지 노리다니... 하지만 너희 인간들은 앞으로 그 만용조차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무, 무슨 뜻이지.
블랙 드래곤으로 짐작되는 청년은 슈렉하이머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너희 족속들, 그 중에서도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어린 동족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도 우리는 그 동안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동족들의 경솔함과 어리석음일 뿐이라고 치부했을 뿐이다. 하지만 너희 인간들의 만용은 끝이 없더구나.
감히 우리들의 레어에 침입할 생각에 이어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님의 해츨링까지 사냥하다니...
쾅!
그 말에 슈렉하이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이다.
'결국 일이 벌어졌군.'
교단의 권위가 땅에 추락한 뒤 인간계는 한 동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실력 있는 기사들 중에는 은연중에 과거 불신자들의 신념을 이으려는 목적을 가진 자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 자신들의 실력을 키우려고 노력했고 그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어둠의 군대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몬스터 사냥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 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으로 몬스터 사냥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백미는 단연 드래곤 사냥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 마법사들과 파티를 결성하여 드래곤을 잡기 위해 트루베니아 대륙의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거기까지는 슈렉하이머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그 자들이 드래곤 로드의 헤츨링을 해치다니...
망연자실해 있는 슈렉하이머의 귀에 청년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해츨링을 잃은 뒤 우리들의 로드 크라누스님은 너희 간악한 존재 인간들을 벌할 결심을 굳히셨다. 우리들은 그 분의 뜻에 따라 이제부터 응징을 시작할 것이다. 이곳 베르하젤 총 교단을 시작으로 인간들의 파멸을 위한 전쟁은 시작된다. 트루베니아 대륙에 인간 족의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로군.'
슈렉하이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황을 보아 드래곤들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겁을 먹진 않았다. 어둠의 군대까지 물리친 인간들의 저력을 깊이 믿고 있던 것이다.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다고 생각한 슈렉하이머는 두 손에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일단 해츨링을 살해한 것은 내가 대신해서 사과하지. 하지만 인간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에는 도저히 찬성할 순 없군.
마나가 모임에 따라 슈렉하이머의 손에서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자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오크 찌꺼기들을 끌어들인 모양인데 너희들은 아마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마왕이 불러들인 어둠의 군대를 물리칠 정도로 인간들의 저력은 막강하다. 오크와 연합했다고 해서 우리를 이길 수는 없어.
청년의 얼굴에서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명백히 비웃음이라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어리석기는. 기껏 한 번의 전투에서 나이델하르크를 패퇴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냐?
한 번의 전투라고 하지만 그 이후로 나이델하르크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모든 힘을 잃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자신감 어린 태도에 어이가 없는지 청년은 쿡쿡쿡 웃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암흑세계의 언데드 군대는 실체가 없는 존재다. 만약 나이델하르크가 잠시 쉬어 마력을 회복한다면 이카롯트 공방전에서 잃은 병력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보충할 수 있다. 곳곳에 산재한 각 종족의 고분이 어둠의 병사들을 얼마든지 공급해 줄 테니까... 너희 인간들은 그것을 간과하고 나이델하르크를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인지를 모르고 말이다.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지?
청년의 음성은 점점 변해갔다. 그와 함께 그의 몸집 역시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런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빨리 처리하고 들어가야겠어. 결론만 말해주지.
사이한 아름다움을 가진 청년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거기에는 검은 광택이 도는 비늘을 가진 거대한 드래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슈렉하이머는 핏기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드래곤을 쳐다볼 뿐이었다. 마침내 드래곤이 완전히 제 모습을 갖췄을 때 슈렉하이머의 뇌리로 한 줄기 음성이 메아리쳤다.
―이것 하나만 알아두어라. 인간. 펠루시아 산맥으로 패퇴한 나이델하르크가 다시 수하들을 불러들이려고 할 순간에 그것을 저지한 분이 바로 우리들의 로드 크라누스님이셨다. 그분은 천신만고 끝에 나이델하르크를 생포해서 봉인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트루베니아 대륙을 어둠의 물결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너희 간악한 인간들은 그 은혜도 모르고 그 분의 해츨링을 살해하는 죄를 범했다.
드래곤은 타는 듯한 눈동자로 슈렉하이머를 직시했다.
―이제 너희들의 멸망은 정해졌다. 그것은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 대륙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 님의 지휘 하에 이곳에 왔다.
가장 먼저 너희들의 서약석을 빼앗기 위해. 크라누스 님을 따르는 드래곤들이 모두 이곳에 왔으므로 너희들은 결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과거 너희들이 오크 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너희들의 서약석을 빼앗고 오크의 서약석을 다시 그들에게 다시 돌려줄 것이다.
드래곤의 말을 들으며 슈렉하이머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가라! 인간.
그를 향해 블랙 드래곤의 애시드 브레스가 퍼부어졌고, 지지 않겠다는 듯 슈렉하이머의 손에서도 눈이 시릴 정도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악!.
굉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희디흰 백염을 온통 붉은 피로 물들이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생을 마친 자는 화려한 복장을 한 노인이었다. 온통 으스러진 가슴 부위에는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문장이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일곱 송이가 아로새겨진 문장. 그것은 문장의 주인이 현 베르하젤 교단의 대승정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쿠르르릉.
자욱한 먼지구름과 함께 신전 내부의 석주들이 무너져 내렸다. 장정 네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겨우 에워쌀 수 있을 듯한 아름드리 석주였지만 이처럼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때는 무척 아름다웠음직한 신전. 그러나 이곳은 이제 흉물스럽다 할 수 있는 장소로 변한 지 오래였다. 수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산산이 깨어진 상태였고 이곳을 지키며 기도를 드리던 신관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에 몸을 뉘인 채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 위를 온통 연녹색 안개가 덮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굉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처참하게 부서진 문을 시작으로 신전은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으지직.
마치 인간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 기성과 함께 연녹색 구름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팅킹 클라우드(stinking cloud).
대승정이 생애 마지막으로 전개한 고위급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들어온 자는 냉막한 표정을 한 청년이었다. 그것도 눈이 시릴 듯 붉게 타오르는 적발(赤髮)이 무척 인상적인 청년. 그가 바로 대승정을 죽음에 몰아넣은 존재였다. 지금 그는 방자하게도 죽은 대승정의 시신을 지긋이 밟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사방을 둘러보던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에 조금 전 자신의 손에 의해 이승을 하직한 대승정의 시신이 들어왔다. 청년의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지며 비웃음 섞인 일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인간들의 힘이 약해지긴 약해졌군. 베르하젤 교단의 대승정이 겨우 이 정도 실력이라니...
그의 뒤에서 스윽하고 그림자 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인간들의 저력을 경시할 순 없습니다. 인간들 개개인은 약해도 전체는 결코 약하다 할 수 없으니까요.
적발 청년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해졌다. 그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방금 말을 꺼낸 자를 쏘아보았다.
요, 용서하십시오. 미천한 존재가 그만...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녹색 피부를 가진, 왜소하지만 건장한 체격의 유사종족 오크, 그것도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피부가 온통 주름살로 쭈글쭈글해진 늙은 오크였다.
통상적으로 오크 중에서 늙은 오크를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워낙 호전적인 성품을 가진 터라 오크무리 중에서 곱게 늙기란 가히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이다.
무리 중에서 늙은 오크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단 한가지. 젊은 오크를 능히 힘으로 제압할 만한 신력을 가진 경우 밖에는 없었고 이 오크는 바로 그 신력을 보유한 오크 로드였다. 하지만 그 신력도 눈앞의 적발 청년에게는 하등 소용이 없었다.
미천한 것을 아는 놈이 감히 내 앞에서 망발을 하는가?
청년의 서슬 퍼런 질책에 늙은 오크는 그저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사실 그는 결코 미천하다고 간주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비록 힘을 잃고 펠루시아 산맥 서쪽에 꼭꼭 숨어 있지만 과거에는 백만 오크 무리를 손짓 하나로 통솔하던 오크 족의 당당한 군주인 것이다.
석양의 정복자 류이켁,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지리멸렬해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들어 있긴 했지만 젊은 오크 중에서 그를 제압하고 우두머리자리를 차지할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오크의 수장은 아직까지 그가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앞의 청년 앞에서 도통 오금을 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청년의 정체는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것이 그만 위대하신 존재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벌을 주십시오.
거듭되는 사죄에 마음이 풀렸는지 청년은 마침내 눈빛을 거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신전의 중앙 부분으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오크들의 군주 쿠이켁과 휘하의 친위병들은 그때서야 겨우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젠장 어쩌자고? 성질머리를 알면서도... 내가 미쳤지.'
다급하게 청년의 뒤를 따르던 류이켁의 눈에 죽어 처참하게 널브러진 대승정 이피크로스의 시신이 들어왔다. 류이켁의 눈에 갑자기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놈! 꼴 좋다.
그도 그럴 것이 시신의 정체는 정복전쟁 당시 오크 족을 무단히도 괴롭혔던 전대 대승정의 수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류이켁은 지체 없이 그레이트 액스를 들어올렸다.
복수의 화신인 오크 족인 그에게 죽은 시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써컹.
둔중한 파육음과 함께 이피크로스의 목이 뎅겅 잘려나갔다. 이미 죽은 시신이라 피는 별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친위병에게 수급을 수습하라 명령한 뒤 류이켁은 얼른 청년의 뒤를 따랐다.
신전의 중앙 부분은 하나의 거대한 밀실 구조로 되어 있었다. 두께가 1미터에 가까운 강철 벽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공간. 밀실 주위에는 온갖 종류의 보호마법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속에는 인간의 보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하여 인간의 서약석. 가치를 떠나 인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물이었다. 또한 그 속에는 종족전쟁 당시 탈취된 오크의 서약석도 들어있었다.
밀실을 쳐다보는 청년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제법 장난을 많이 쳐 놓았군.
인간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마법사들, 그들 중에서도 엄선된 자들이 오랜 시간 정성 들여 펼쳐놓은 각종 보호마법이었다. 이중 삼중의 보호장치들이 밀실을 겹겹이 감싸고 있었지만 청년의 눈에는 한낱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의 정체는 마법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언락(Unlock)
오랜 세월 밀실을 지켜왔던 보호마법은 이 한마디에 너무도 어이없이 해제되어 버렸다. 두께가 1미터 남짓한 철벽 역시 청년 앞에는 무력했다. 목표제한 헬파이어 한 방에 두터운 철벽은 허무하게 뚫려버렸고 그 속에 꼭꼭 감추어졌던 보물은 마침내 청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밀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사방이 3 평방미터 남짓한 공간의 중간에는 커다란 철괴가 놓여있었다. 물론 그곳에도 역시 여러 가지 도난 방지 수단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청년의 손짓에는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철커덕.
보호마법이 풀리며 철괴가 열렸다. 청년은 느릿하게 철괴 속으로 손을 뻗었다.
이것이 인간의 서약석이로군.
청년이 집어든 것은 오색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하나의 보석이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에 형언할 수 없는 빛을 뿜는 아름다운 보석. 한 종족의 흥망을 결정짓는다는 속설과는 달리 서약석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청년의 눈동자에는 티끌만큼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차피 이런 보석 정도는 그의 레어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므로... 그는 서약석을 품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크라누스님의 명령은 완수되었다. 이제 인간의 서약석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그 때 그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키스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인간의 군대가 신전을 에워싸고 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사력을 다해 막고는 있지만 워낙 수적으로 역부족인지라... 상황을 보아 외곽의 오크 부대는 모두 전멸한 것 같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슈렉하이머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검은머리 청년이었다.
냉막한 표정은 변함 없었지만 군데군데 옷이 찢어진 모습은 슈렉하이머와의 결전이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저, 정말입니까?
수하들이 전멸했다는 보고에 류이켁의 안색이 싹 변했다. 어차피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멸이라니... 하지만 그들의 다급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적발 청년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크라누스님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나?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것들이 인간 따위에게 쫓겨오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흑발 청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정말 독종들입니다. 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상관없다는 듯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습니다.
베르키스라 불린 적발 청년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자신들의 서약석이 위기에 처했으니... 좋다. 공간이동 준비를 해놓을 테니 모두 불러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블랙 드래곤이 몸을 돌리자 베르키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닥을 한 번 쳐다본 그는 손을 한 번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신전 바닥에 기이한 형태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진은 적발 청년의 마나를 받아 점점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때 떨리는 류이켁의 목소리가 청년의 귀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저희.. 저희...
고개를 돌리자 안절부절 못해하는 류이켁의 모습이 들어왔다. 베르키스의 눈에 잠시 노기가 서렸다.
쓸모 없는 것들만 데려왔더군. 그 새를 못 견디고 전멸하다니...
하오나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각 부족에서 최고의 용사들만...
집어치워라.
베르키스의 일갈에 류이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베르키스는 잠자코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쓰윽.
그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앞서의 것에 결코 못지 않을 정도로 영롱한 빛을 내뿜는 보석이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데 대해 불평이라도 하듯 보석은 유난히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베르키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것이 너희의 서약석이 맞느냐?
오오.
무심코 고개를 든 류이켁의 얼굴이 격동에 부르르 떨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인간들의 영웅 크로센에 의해 서약석이 탈취된 지 어언 오십 년. 그 세월은 명예로운 오크 족을 굴종의 나락에 떨어뜨린 세월과 한 치도 틀림이 없이 동일했다. 그토록 갈구하고 찾으려했던 자신들의 서약석은 이제 바야흐로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을 되찾기 위해 희생된 용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비록 드래곤의 도움을 받았을지언정 자신들의 서약석을 다시 보게 되니 류이켁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귀에 냉랭한 베르키스의 음성이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약속대로 이것을 너희들에게 돌려주겠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류이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조건이라도 승낙하겠다는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서약석을 되찾는 조건은 오크 족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 대가로 너희 오크 족은 앞으로 천년 년 동안 드래곤들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
그, 그것은...
류이켁은 일순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거렸다.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드래곤의 수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크들에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에 류이켁의 눈망울엔 다시금 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종족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던 인간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나는 인간들을 정벌하는데 너희들을 선봉장으로 세울 생각이다. 크로트리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들을 통합해서 인간 족의 씨를 말리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없애고 나서 우리는 그 자리에다 새로운 질서를 세울 생각이다.
너희들은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에 대한 복수는 류이켁이 꿈에도 바라던 일이 아니던가? 류이켁은 이를 지긋이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하신 분의 조건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다.
인간의 운명을 능히 결정지을 수 있는 두 종족의 맹약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조금 뒤 인간의 모습을 한 일곱의 드래곤들이 신전 내부로 들어왔다. 전신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지만 희생된 이는 하나도 없는 듯 했다. 마법진 위에 운집한 그들의 귀로 베르키스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것은 신전 외부에 포진한 인간 기사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내 이름은 베르키스. 위대하신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 님의 명을 받든다. 지금은 순순히 떠나기로 하지. 하지만 정확히 십 년 뒤,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인간을 정벌할 채비를 완벽히 갖춘 다음...
파아앗.
마법진에서 급격히 빛이 뿜어졌다. 그 빛 무리는 베르키스와 류이켁을 비롯한 드래곤들의 몸을 삽시간에 휘감아버렸다. 신전 내부를 잠깐동안 밝히던 빛 무리는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서약석과 함께... 그리고 그 자리에 완전 무장을 한 무수한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런...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채 입을 벌리고 있던 밀실의 상자뿐이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나머지 들고 있던 병기들을 하나 둘 떨어뜨렸다. 오십 년 전과 반대로 이번에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서약석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당시 블랙 드래곤과 혈투를 벌이던 슈렉하이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간신히 몸을 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고위급 성직자라고 해도 애당초 드래곤과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좁은 실내라서 블랙 드래곤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이승을 하직했을 터였다.
간발의 차이로 피신한 슈렉하이머는 가장 먼저 대승정 이피크로스에게로 향했다. 가장 중요한 서약석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와서 목격한 것은 목이 달아난 대승정 이피크로스의 싸늘한 시신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인간들의 서약석이 빼앗기는 순간을 여과 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숨어서 피눈물을 흘리며 말이다. 당시를 회상한 슈렉하이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반드시 서약석을 탈환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이계의 검사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급선무다.
이미 서약석이 탈취당했다는 사실은 각 왕국의 병사들에게 널리 퍼진 상태. 따라서 현격하게 밀리는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서약석의 재탈환이 필수요소였다.
그의 능력이라면 필히 드래곤들의 손에서 서약석을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잠자코 자신의 거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독고성을 회유해서 서약석을 되찾겠다는 다짐과 함께..
독고성의 몸이 회복되는 기간동안 슈렉하이머는 그야말로 열과 성의를 다해 그를 대했다. 무공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자포자기했던 독고성은 겨우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고 자신이 온 새로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트루베니아란 대륙이 중원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단순히 거리로 판단할 수 없는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 괴리가 두 대륙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희들이 차원이동을 성공시킬 수는 있었지만 동일한 방법을 또다시 사용한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입니다.
차원이동의 술은 그만큼 성공률이 희박한 마법이지요.
음.
독고성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그의 말에 의하자면 자신이 중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육신으로 돌아가 봐야 그 가증스러운 사준환 놈에게 복수를 할 가능성은 전혀 없을 테지.'
쓴웃음을 지은 독고성은 슈렉하이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성을 찾은 이후 그는 슈렉하이머에게 반 공대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이오. 그리고 이처럼 지극 정성을 다해 날 대하는 이유까지 알고 싶소.
말하자면 사연이 무척 길 것입니다. 이제부터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지요.
과거 수련생들의 교육을 도맡아 했던 슈렉하이머답게 그는 이방인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 모양을 보고 있던 독고성은 기가 찼다.
'젠장. 말투만 가지고는 마치 오랜 고향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군. 통역 마법이라고 했나? 정말 요상한 술법도 다 있단 말이야?'
자신에게 들리는 어투는 분명 특유의 억양이 섞인 양주 지방의 방언이었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의 입 모양을 봐선 그가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독순술(讀脣術)에 조예가 있는 독고성은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우리가 사는 이 트루베니아 대륙은 바로 온 우주를 총괄하시는 주신 베르하젤 님께서 만드신 세상입니다.
슈렉하이머의 입에서는 트루베니아의 건국신화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깊은 신관답게 슈렉하이머는 성직자의 관점에서 설명을 해 나갔다. 모든 영광을 주신 베르하젤에게 돌리고 말이다. 검에 목숨을 건 무림인이 받아들이기엔 다소 거북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보여준 성의가 있었기에 독고성은 꾹 참고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들어나갔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 트루베니아 대륙엔 인간 이외에 여러 유사종족들이 살고 있으며 일 백년 전 오크라는 유사종족과 인간 사이에 종족의 사활을 건 대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그의 설명에서 독고성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집약하자면 이 곳은 무림인이 결코 이해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쉽사리 이해하기엔 둘은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살아왔던 것이다. 우선 독고성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크라는 몬스터였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의하자면 작달막한 체구에 돼지 머리를 한 괴물이 바로 오크였다.
중원인의 관점에선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런 미물들의 무리가 일 백년 동안이나 인간과 대등하게 전투를 치러왔다는 사실이 독고성에겐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믿으셔야 합니다. 비록 오크가 인간에 비해 다소 힘과 체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대신 가공할 정도의 성장속도와 생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오크는 대략 1살 전후가 되면 충분히 전투와 사냥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15세가 되어야만 비로소 무기를 들 수 있는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구려. 감히 인간의 아성을 위협하는 미물이 존재한다니...
하지만 사실입니다. 특히 오크들은 한 배에 열에 달하는 새끼를 낳을 정도로 생식력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식량만 제공된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전투에서 소모된 수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
그런 오크종족의 특성으로 인해 인간은 당시 전멸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무분별한 소모전으로 전개되어 갔을 시기입니다. 오크는 전장에서 잃은 전사를 보충할 여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만 인간에겐 그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죠. 때문에 그 때 인간들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끝없이 패주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정말 생각하기도 힘든 암울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슈렉하이머는 어린 소년 신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때의 참혹했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독고성에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 때 오크 놈들은 가증스럽게도 성에 고립된 저희들이 빤히 보는 앞에서 전사자와 포로를 대상으로 파티를 벌였습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산채로 불에 구워지는 것을 보며 저희들은 이제 인간들의 역사가 완전히 끝장났구나 생각했지요.
그 오크란 놈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종족전쟁 당시에는 포로를 잡는다는 것이 하등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놈들은 겨울철을 나기 위해 동족끼리도 서로 잡아먹는 놈들. 때문에 놈들은 인간들을 잡으면 꼭 산채로 불에 구워 식량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럴 수 없었지요. 오크를 먹지 않는 때문에 생포하는 즉시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병사들은 결국 오크 고기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슈렉하이머의 노안에 감회가 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고성은 그 때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크 고기의 맛이 어떨까? 자고로 중원에서는 인간의 젖을 먹여 키우는 새끼돼지의 고기를 최상등품으로 친다. 그렇다면 사람의 고기를 먹고 자란 오크라면...'
뒤이어 터져 나온 슈렉하이머의 격양된 음성 때문에 독고성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때 우리 인간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크로센 대제가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크로센?
그렇습니다. 근 백년간의 인간사를 통틀어 가장 강했고, 또한 가장 많은 화젯거리와 분규를 몰고 왔던 이 시대 최고의 풍운아이지요.
점점 격양되는 슈렉하이머의 음성에서 독고성은 그가 크로센 대제를 얼마나 숭배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 분의 활약에 의해 전세는 일시에 뒤집혀 졌습니다. 그 분은 정말 트루베니아의 천년 역사상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불세출의 인물이며 가히 영웅이라 불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해냈기에...
독고성을 힐끗 쳐다본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설명을 시작했다.
그 분의 업적을 이해하시려면 먼저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 종족의 서약석에 대한 일입니다.
슈렉하이머는 베르하젤에 의해 각 종족에게 전해진 서약석에 대한 비밀을 독고성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각 종족의 조화를 관장하는 신비스러운 보석으로써 이것이 종족의 손에 존재하는 동안 그 종족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주신 베르하젤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신화. 이것 역시 독고성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놀랍구려. 그러한 내력을 가진 보석이 존재한다니...
이미 서약석은 각 종족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한 보물입니다. 때문에 처참한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피아가 이 서약석만은 목숨을 다 바쳐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크로센 대제께서 바로 오크들의 서약석을 빼앗아오는 위업을 이루셨습니다.
수천 명의 엄선된 오크 전사들이 경비하는 틈을 뚫고 들어가서 말이지요.
음.
독고성은 침음성을 질렀다. 일개 보석이 각 종족의 번영을 관장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정색을 한 슈렉하이머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당시 그 분은 크로세나 왕국의 군주였습니다. 이곳에선 국가의 명칭이 곧 군주의 이름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따라서 그 분의 본명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검술 실력만은 트루베니아에서 도저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사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요.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휘하 크로세나 왕국의 정예 기사들을 데리고 오크 족의 중심부 깊숙이 잠입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수천 명의 오크 친위대들이 지키고 있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말이다. 곧이어 이어진 처절한 혈투. 하지만 크로센 대제가 직접 사사한 크로세나의 정예 기사들은 악전고투 끝에 오크 친위대를 전멸시키고 그들이 꽁꽁 숨겨둔 서약석을 탈취해 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전황의 추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불세출의 영웅 크로센 대제에 의해 오크의 서약석이 탈취당했다. 그 일로 인해 밀리던 전황이 뒤집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약석을 빼앗긴다는 일. 그것은 더 이상 베르하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는 뜻과 일치했다. 그 하나만으로 오크 전사들의 사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땅에 떨어져 버렸다. 미개한 지능을 가진 오크인지라 그들이 서약석에 두는 의미는 가히 절대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한없이 용맹스럽고 잔인하던 오크 전사들. 하지만 서약석을 빼앗긴 이래로 오크들은 미개하기 그지없는 단순한 몬스터로 전락해버렸다.
이 낭보는 곧 전장에 널리 알려졌고 오크들과는 정반대로 인간 병사들의 사기는 치솟을 대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여 이제 베르하젤의 가호가 함께 하신다. 이 은총은 오직 우리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베르하젤의 보살핌에서 제외된 오크 찌꺼기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버리자.
크로세르 대제의 위업. 그에 의해 하나로 밀집된 인간 병사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오크 족을 밀어붙였다. 물론 그 군대의 최선봉에는 어김없이 그의 기사들이 앞장을 섰다. 그 뒤로도 이십 년을 끈 기나긴 전쟁. 처절한 혈투 끝에 인간은 마침내 오크의 주력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플로우르 대평원에서 벌어진 최후의 혈전에서 오크는 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잃고 처참히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동족을 잃고 극소수만 살아남은 오크 족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척박한 펠루시아 산맥 서쪽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오크 족의 지배 하에 있던 영토는 마침내 인간들의 새로운 영토로 새로이 편입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한 슈렉하이머는 뭔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하여 트루베니아 대륙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요. 뒤이어 벌어진 두 번의 참사. 그것은 인간계에 익히 치명적이라 칭할 정도의 피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을 따르자면 트루베니아 대륙은 인간들의 독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승리는 오로지 크로센 대제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이나 그는 위대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며 또한 신비에 쌓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었다.
크로센 대제의 출신이 어디이고 어디서 검술을 배웠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주위 인물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우연히 열린 차원의 문을 통해 이곳에 온 타 차원의 인물이란 사실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만 저희들은 그가 아무래도 당신이 있던 중원이란 곳에서 온 인물이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독고성의 미간이 지긋이 모아졌다.
그 크로센 대제란 자가 우리 중원의 무사란 말이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 중원이란 곳에는 무수한 소드 마스터가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직접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독고성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소드 마스터라니?
오랜 수련으로 말미암아 마나를 검과 갑옷에 응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무예자를 말합니다. 오러 블레이드. 다시 말해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강철조차도 무 베듯 할 수 있는 궁극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를 이곳에서는 소드 마스터라 통틀어 칭하고 있습니다.
'검기를 말하는 건지 검강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군.'
잠시 생각에 빠졌던 독고성은 곧 50년 전의 영웅 크로센 대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가 중원에서 온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별안간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독고성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슈렉하이머에게 돌렸다.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소.
이제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크로센 대제는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고강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 중 그 누구도 크로센 대제를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하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만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베르하젤 님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으로써 그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가진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말로 크로센 대제가 이곳에 온 초기에는 이곳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풍습의 차이로 인해 곳곳에서 오해를 살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강한 검술실력에도 불구하고 삶을 연명하기 위해 용병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당시 명성을 노린 기사들의 결투 신청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전해졌다. 그 결과 그는 각국 기사들의 수 없는 질시를 받았다. 예로부터 뛰어난 자에게는 선망보다 질시가 먼저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변변찮은 작위도 없이 그저 하찮은 용병 신분이었던 그에겐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만남이 어느 날 우연히 이루어졌다.
당시 그가 머물고 있던 이카롯트 제국의 수도에는 변방의 왕국 크로세나의 국왕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크로세나 왕국은 오크들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했었지요.
간신히 빠져 나온 왕족들이 살아남은 기사들과 함께 이카롯트 제국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런데 망명생활을 하던 크로세나 국왕이 우연한 기회에 크로센 대제의 결투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크로센 대제가 보유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검술실력. 당시 크로세나 국왕은 크로센 대제의 검술실력에 넋이 나갔다고 전해졌다.
멸망한 우리 조국을 되살릴 인물은 오직 이 자밖에 없어.
크로세나의 늙은 국왕은 오크에게 점령된 자신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무척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바로 크로센 대제에게 아름다운 자신의 딸과 함께 크로세나 왕국의 군주 자리를 양도한 것이다. 당시 이카롯트 제국의 중신들은 크로세나 국왕의 파격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결정에 무척 경악했다고 전해졌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신분이 낮은 용병 나부랭이에게 왕녀와 함께, 일국의 군주 자리를 양도하다니... 비록 멸망한 왕국이라고는 하나 이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로세나 국왕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일을 추진시켰다.
그 결과 크로센 대제는 공식적으로 크로세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크로센이란 그의 이름은 당시 지어진 것이라 했다.
아마도 대제의 본명은 이곳 트루베니아에선 아무도 알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비웃는 결정이었지만 크로세나 국왕의 결정이 탁월했다는 것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이곳의 언어를 익히게 되자 크로센 대제의 진가가 드러났던 것이다. 그는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기사들을 지휘하는 통솔력 또한 전혀 못지 않았다. 당시 망명 중이던 크로세나는 오백 여 명의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봉록을 지급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밤을 틈타 야반도주하는 기사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크로센 대제는 당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서 기사 오백 명의 마음을 대번에 사로잡았다고 전해졌다. 그런 다음 이어진 것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수련방법을 기사들에게 전수하는 것이었다. 목적은 약속대로 멸망한 크로세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당시 소드마스터란 존재는 바로 신께서 내리신 것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소드마스터가 되기란 어려웠으니까요. 무수한 기사들이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련했지만 소드마스터가 되는데 성공한 자는 몇 명 없었습니다. 크로센 대제는 바로 그 고정관념을 깨트려 버렸습니다.
당시 트루베니아의 최강국이었던 이카롯트는 총 이백여 명에 달하는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일개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자부했기에 이카롯트 왕국은 무척 오랫동안 트루베니아의 최강대국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크로센 대제 단 일인에 의해 그 탄탄했던 철옹성이 일시에 허물어져 버렸다. 크로센 대제 비법의 방법으로 수련한 기사들 중 반수가 단 십 년 만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당시 이카롯트를 비롯한 각 왕국들은 그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비록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이 비록 검술로 정평이 있는 실력자들이라곤 하지만 단 십 년 만에 250명의 소드 마스터를 키워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바로 기적이었으니까요.
단숨에 이카롯트 왕국을 능가하는 기사단 전력을 보유하게 된 크로센 대제는 마침내 휘하의 모든 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떠났다. 비록 병사들의 수는 적었지만 그가 보유한 기사단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일개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오크들과의 전면전이 막 벌어지려는 무렵. 사방에서 종족간의 사활을 건 전쟁이 벌어졌다. 크로센 대제의 기사단은 그 전쟁에서 누구도 발휘할 수 없는 위력을 선보이게 된다.
당시 크로센 대제에 의해 단련된 기사단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들은 단 일주일만에 오크 이만을 섬멸시키고 멸망한 왕국 크로세나의 모든 영토를 되찾았으니까요...
그 뒤 크로센 대제의 행로는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드높은 실력과 엄청난 전과가 알려지자 오크 족을 피해 숨어 다니던 크로세나 왕국의 열혈 청년들이 속속 그의 군대에 투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굳이 크로세나 왕국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오크 족에 의해 멸망된 무수한 왕국의 패잔병과 기사들마저 대대적으로 가세하고 나섰다. 그들은 오직 크로센 대제를 섬기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가족과 고국을 멸망시킨 오크들에게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밖에 없었으므로...
지원병들이 쇄도한 결과 크로세나 군대의 힘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흉포한 오크 전사들조차 크로세나 왕국의 휘장만 보면 꼬리가 빠지게 줄행랑친다고 알려질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선대 국왕의 탁월한 선택에 의해 크로세나 왕국은 지금까지의 최강국이었던 이카롯트 제국을 넘어서는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인간들에겐 압도적으로 불리했습니다. 인구수에서 월등한 오크 족에 의해 무수한 왕국들이 멸망당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갔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크로세나 왕국의 군대만은 거침없이 오크 족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로세나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열세마저 극복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크로센 대제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용단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엄선된 기사들을 대동해서 오크 족 본진에 침투, 그들의 서약석을 빼앗아오려는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익히 말씀드린바와 같이 크로센 대제의 계획은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그의 의도대로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오크 족을 밀어붙였고 마침내 최후에 벌어진 플로우르 공방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지요. 베르하젤 님의 뜻을 거스르고 종족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우리 인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 참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대 참사라니?
해가 뉘엇뉘엇 떨어지고 있었지만 둘의 대화는 그칠 새가 없었다. 슈렉하이머가 고위급 신관이라서 통역 마법을 오랜 시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독고성은 잠자는 것도 잊고 슈렉하이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비록 머나먼 타국의 역사였지만 그에겐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정복전쟁을 통해 크로세르 대제는 인간들의 명실상부한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에서 비롯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그칠 새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슈렉하이머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인간사에서 가장 추악하다 볼 수 있는 다툼을 떠올렸다.
종족전쟁이 끝난 당시는 바로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가 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때문에 베르하젤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당시엔 가장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었으며 만약 발각될 경우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이 가능했다. 거기에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도 어김없이 포함되었다.
문제는 인간들의 영웅인 크로센 대제께서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란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신자. 신을 믿지 않으며 오로지 본신에 능력에 의지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를 꾀하는 자들. 그들은 주신 베르하젤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들의 의지로만 해결하려 한다. 그들 불신자의 시초가 바로 크로센 대제였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일이오. 우리의 운명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야 하는 법. 신을 찾는 것은 그 다음에나 생각해 볼 문제요.
크로센 대제는 당시 신의 자비에만 모든 것을 의존하는 시대 상황을 비웃었다.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존재하지도 않는(그의 관점으로는) 신이 좌우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신념을 우선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에게 전파했다. 신에게 의지함이 없이 오로지 노력과 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는 신념은 곧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인 크로센 대제를 오히려 주신 베르하젤보다도 더 믿고 있는 상태. 그의 가르침에 의해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은 신앙심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검술실력과 능력을 기르는데 주안했고 그로 인해 비약적인 실력향상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족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되었어.
종족 전쟁이 모두 끝나고 자신감이 생긴 크로세르 대제는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밝히기에 나섰다. 바야흐로 공개적으로 불신을 천명하는 자가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나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베르하젤 신을 믿지 않소. 나는 오로지 내 능력과 노력을 믿을 뿐이오.
그의 발언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베르하젤 교단은 물론이오 신앙심이 독실한 각 왕국 군주들이 그의 말을 그냥 받아넘길 리가 없었다. 그 때는 베르하젤 교단의 힘이 가장 강대했을 때였고 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가장 중대한 범죄로 간주하던 때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크로센 대제와 베르하젤 교단과는 필연적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의 사태를 전해들은 독고성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고작 그런 문제로 그런 전공을 세운 자를 축출하려 하다니...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크로센 대제를 깊이 숭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역시도 베르하젤의 독실한 신자였다. 때문에 그런 선언을 한 크로센 대제에 대해 섭섭하다는 감정마저 가질 정도였으니... 문제는 크로센 대제를 몰아내는 데 각국 군주들의 질투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당시의 군주들은 크로센 대제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하급 병사들에게 거의 신과 동일한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만큼 그들이 크로센 대제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전공. 거기에다 자국 병사들까지도 크로센 대제의 위업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각 군주들이 크로센 대제에 대해 가지는 경계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만에 하나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그 통일제국의 황제로 크로센 대제를 추대하자는 의견이 나올 시에는 그들로써는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로써는 도저히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하급 병사들은 자국의 군주보다 크로센 대제를 더욱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터에 크로센 대제의 폭탄발언이 터져 나왔으니 각국 군주들에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으리라...
베르하젤 교단의 판결이 급기야 내려졌다. 이것은 각국 군주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힘입은 판결이기도 했다.
크로세나 왕국의 군주 크로센은 신을 부정하는 중죄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그가 세운 모든 전공을 백지화하고 그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겠다.
재판에 회부된다면 그 즉시 화형에 처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물론 크로센 대제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순순히 재판에 응할 리가 없었다. 정복전쟁을 통해 크로세나 왕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크로세나 왕국의 군사력은 지금까지의 최강국 이카롯트 제국의 모든 힘을 가볍게 넘어설 정도였다. 크로센 대제가 불복하자 각국 군주들은 보유한 군사력을 모두 연합해 크로센 대제의 군대에 대적하기로 결정했다. 트루베니아 대륙은 급기야 신자와 불신자와의 극한 대립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집안을 정리하는 것은 어느 대륙을 막론하고 가장 시급을 요하는 일이다. 때문에 각국 군주들은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휘하 기사들 중 크로센 대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모조리 추려내는 숙청작업.
그들에겐 어김없이 불신자의 굴레가 씌워져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미 군주들과 한 통속이 된 종교재판소의 결정은 뻔하기 그지없었다.
화형을 선포하노라.
이렇게 해서 수많은 기사들이 종교재판을 통해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교단 측의 심판은 너무나도 지엄했다. 불신자로 간주된 기사들뿐만 아니라 그들 휘하의 병사들까지 추호도 용서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오직 학살로밖에 볼 수 없는 공개적 살해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충성을 다 바치던 자신의 군주에 의해...
숙청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자 그들의 칼날은 곧 크로센 대제에게 집중되었다.
쌍방의 분쟁은 이처럼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어갔다. 바야흐로 인간들간의 내전이 촉발되려 하는 시기. 하지만 마지막 순간 크로센 대제가 적절한 타협책을 내세웠다. 자신의 발언이 이처럼 심각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크로센 대제였다.
좋소. 내 신념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떠나리다. 신을 믿던 안 믿던 각자의 의향에 맡기는 자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의 신념을 지켜나갈 것이오.
이미 크로세나 왕국의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크로센 대제를 지지하고 나서는 실정이었다. 그들에게 크로센 대제는 백성들의 안위를 자기 몸보다도 더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이었으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정든 고향을 버리고 크로센 대제를 따르기 위해 서슴없이 짐을 꾸렸다. 거기에는 종교재판을 피한 자들과 크로센 대제를 숭상하는 자들이 대거 가세했다.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서 무려 트루베니아 대륙의 전체 인구 중 십 분지 일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들의 가세에 힘입어 크로센 대제는 얼마 전 발견된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아르카디아로 갈 것이오.
아르카디아 대륙. 불과 오십 년 전에 처음 발견된 신대륙으로 트루베니아와 무척 멀리 떨어진 미지의 대륙이었다. 그곳의 기후가 어떠하며 어떤 몬스터가 살고 있는지, 또한 어떤 작물을 가꿀 수 있는지 등등. 모든 면이 베일에 쌓인 대륙이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카디아 대륙은 이곳 트루베니아와 뱃길로 백일 가까이 걸리는 무척 먼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정복전쟁 중에 뱃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곳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단지 트루베니아 대륙과 맞먹는 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밖에는... 크로센 대제는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이끌고 바로 그 신대륙을 개척하려 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당시 베르하젤 교단 측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우선 교단 측에 크로센 대제를 제압할 만한 실력 있는 기사가 없었습니다. 각 국 근위기사 단장들을 모두 모아 덤비더라도 크로센 대제를 당해낼 순 없었고 또한 오크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 종교분규로 무수한 기사들을 숙청했던 터라 그를 막을 엄두를 도저히 내지 못한 것입니다.
협상은 마침내 타결되었다. 크로센 대제는 자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믿음의 자유를 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선박건조기술로 백일이나 걸리는 항해를 할 수 있는 배를 만든다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오직 대제 하나만 믿고 있었다. 배가 완성되는 대로 사람들은 몸을 싣고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 대륙을 향한 머나먼 항해를 시작한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크로센 대제는 휘하 기사단을 거느리고 최후까지 그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크로센 대제가 떠나기를 결정함으로 인해 트루베니아 대륙에는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분쟁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 국 군대의 요직에 위치한 수많은 기사들이 그를 따라나섰기 때문입니다.
크로센 대제를 따라 나선 기사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뜻 있는 기사들은 그만큼 베르하젤 교단의 독선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각 왕국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크로센 대제가 데리고 간 기사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양성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을 상기한 슈렉하이머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제 살 깎아먹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둠의 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발호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니까요.
어둠의 마왕이라니요.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있던 슈렉하이머는 독고성의 반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